고스톱을 칠 줄 아는 사람이면 ‘광을 판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다섯 명이서 고스톱을 친다고 하면 앞사람 셋이서 게임에 참여할 의사를 표시하는 한 그 뒤에 있는 두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모두 죽어야 하고 만약 운 좋게 광이라도 들어 왔으면 들어 온 광 숫자만큼 광을 팔고 남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봐야 합니다.
화투를 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광파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화투를 잘 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노력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의 기회가 됩니다. 무노동 무임금이 원칙인 노동계에 무노동 유임금의 혜택을 주는 경우는 아마도 고스톱 판에서 광파는 경우를 제외하면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자의와는 관계없이 순전히 타의에 의한 광팔이로 돈을 버는 수단이 존재하는 곳도 고스톱 판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는 남이 공돈을 벌도록 자비롭지 않습니다. 이런 불평등 여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도입한 규정이 연사불가(連死不可)제도입니다. 무노동으로 임금을 착취하는 제도를 아예 법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헌데 이 광을 팔며 희희낙락하는 게 못마땅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제도도 있으니 앞에서 일치감치 게임 참여를 포기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울며 겨자 먹기로 강제로 참여하게 만드는 경우입니다. 늘 광만 파는 모습이 못마땅하여 앞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심전심으로 골탕을 먹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광신청을 외쳐도 들은 척도 안합니다. 이렇게 되면 맨 뒷사람은 소위 타의에 의하여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 실증되는 순간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참 묘하여 불평등을 강제로 해소시키는 자정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만 잘 쓰면 자다가도 떡을 먹는가 하면 나쁜 사람 옆에 있다가는 모진 돌에 정 맞는 경우가 있는 곳이 소위 경쟁사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서로 견제하면서도 서로 협력해야 살아갈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경제학자 사뮤엘슨이 말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사회가 작동하는 예는 여기저기 존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일상생활에는 타의에 의하여 강제로 경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타의에 의하여 강제로 경쟁에 참여하여 협공을 당하게 되는 ‘타인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전자는 약자를 배려하는 선의가 되기도 하지만 후자는 사지로 몰아넣는 악의가 됩니다. 사실 자의로 고스톱을 치는 경우 보다 밀려서 치는 경우에 돈을 더 많이 잃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거기에는 생사여탈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헌데 고스톱 게임에서 묘한 것은 판에 참여한 자는 돈을 잃게 되는데 비하여 광을 파는 자는 돈을 벌게 된다는 아이러니입니다. 실제로 밤을 새워 고스톱을 치다 보면 뭔가 먹을 것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정액의 고리를 떼게 마련이고 한 쪽에서는 유유작적하게 광을 팝니다. 이러다 보면 새벽에 일어날 때는 모두 돈을 잃은 사람뿐이고 딴 사람은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그나마 광을 많이 판 사람입니다. 사람이 돈을 잃게 되면 약이 올라 ‘열고’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 화투를 치는 사람은 으레 잃은 사람들만이 남는 파장으로 끝을 맺게 되고 그 많던 판돈은 시간과 비례하여 먹어 없애거나 광 값을 치루는 데 탕진합니다. 여기에는 변소에 간다며 약간의 판돈을 남겨놓고 딴 돈을 가지고 줄행낭치는 얌체족이 한 몫을 합니다. 돈은 간 데가 없고 핏대만 남는 곳이 놀음판입니다.
고스톱은 지위고하가 없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치기도 하고 사장과 부하가 치기도 합니다. 보기 싫은 시아버지나 사장에게 “똥 먹어요. 똥” “피 먹어요. 피”하고 큰소리쳐서 평소에 쌓였던 감정을 풀며 불만을 카타르시스 할 수 있는 게임이 바로 화투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광을 파는 게 좋지만 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광은 돌보다도 하찮게 봅니다. 고스톱에서는 피가 최고입니다. 피~ 어쩐지 무시무시해 보이지 않습니까?. 피 중에서도 제일 사랑을 받는 피가 빨간 똥피, 비피, 끗수와 두 장의 피로도 쓸 수 있는 국진 열끗 짜리가 인기입니다. 흔들고 쓰리고를 하면 주머니돈이 단번에 나가는 파괴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국민들, 특히 운칠기삼의 요행을 믿는 정치꾼들이 앞으로 벌어질 대통령후보들의 본 게임을 국외자의 입장에서 쳐다보며 광파는 일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어느 후보의 입장이 유리해 보이면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자의적으로 참여하여 언젠가 떨어질지도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 열심히 광을 팔고 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광화문의 촛불이 쎄지는 듯 하면 촛불 편에 붙고, 시청앞의 태극기가 쎄지는 듯 하면 태극기편을 엿보며 박쥐같은 행동도 서슴치 않습니다. 소위 과도기에 흔히 나타나는 기회주의자들의 파도타기현상입니다. 자칫 섣불리 나서기는 겁나고 그렇다고 무료하게 기다리기는 지루하고 그래서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목격합니다. 특히 동가식서가숙 하며 시류에 편승하여 광만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징조는 변혁기에 많이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이들 무리 중 가장 눈에 띠는 척후병들이 소위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 또는 지성인들입니다. 정치인들이이야 권력에 편승할 기회를 잡는 게 꿈이요 목적이며 직업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라가 어려울 때 구원의 기수가 되어야 할 지성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묵의 긴 동면에 들고 있음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 볼 때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모두가 돈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정의와 진리의 길에는 담을 쌓고 자의 던 타의 던 절대로 손해 볼 일이 없는 광파는 일에만 열중입니다. 이 격랑의 세계질서에 눈을 감고 서로 눈치만 보며 침몰직전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제2의 IMF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느끼면서도 총대는 안 메고 모두가 손 안대고 코 풀 행운의 여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라야 망하던 말던 대통령만 되고자 하는 대통령병 환자들이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허황스러운 포퓨리즘을 자극하며 시퍼런 작두 위를 위험스럽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광란의 춤판에서 광을 파는 길이 출애굽기의 히브리인들을 이집트로부터 구하는 모세의 기적을 가져오는 승부수라면 누가 직접 게임에 뛰어 들어 돈을 잃을지도 모를 골치 아픈 모험을 하려 하겠습니까? 그러니 광파는 사람들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하기야 나같이 펜을 세워야 할 자칭시인마저도 몸을 사리면서 어찌하면 광만 파는 구경꾼이 될 수 있을까 하며 사방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이 나라가 제대로 굴러 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비광이나 똥광 보다는 같은 값이면 일광이나 삼광이나 팔광을 팔고 싶은 허영까지 가세한다면 말입니다(2017.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