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삶과 문학>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
최춘해
Ⅰ. 문학의 길을 향한 첫 걸음
1. 나의 데뷔작
신문에 신춘문예 광고가 나면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한두 번 떨어졌을 때는 섭섭하기는 해도 태연한 척 할 수 있었으나 몇 차례 떨어지고 나니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처가, 실망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KBS 방송국에 투고를 해서 채택이 되어 원고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아동문학가로 데뷔 하는 것만이 내 꿈이었다. 이원수 윤석중 한정동 김영일 박홍근 박목월 김성도 김진태 등 아동문학가들이 여간 존경스럽지 않았다. 그 중에도 이원수 씨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 초등학교 때 존경하는 담임 선생님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하듯이 성인이 되었는데도 이원수 씨의 모든 것을 다 닮고 싶었다. 말 한마디, 행동하는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존경스러웠다. 선생은 소주를 좋아하셨다. 소주는 싸고 맥주는 비쌌다. 선생님을 대접하고 싶은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배려라고 느꼈다. 또 시상식이나 총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 식사나 축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얼굴 모습이나 태도가 조금도 가식이나 권위 같은 걸 느낄 수 없었다. 관료들의 오랜 습성인 덕치덕치 쌓인 권위로 덮인 얼굴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얼굴 모습에서부터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쩌면 그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생각되었다. 나도 선생님과 같은 문학가가 꼭 되고 싶었다. 절실한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중에 느꼈다. 내가 당선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아직도 당선될 만한 작품을 못 썼다. 당선 작품이 나오기까지 더 노력을 해야 한다. 내 스스로 더 다부지게 다짐을 했다. 선배들의 시집,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 평론집 등을 열심히 읽으면서 작품 쓰는 일에 정성을 모았다.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글감을 찾았다. 기나긴 세월을 말없이 자릴 지키고 앉아 있는 산등성이를 걸으면 무슨 진리라도 캐어보고 싶고, 눈에 띄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생물이나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이 간다. 산꼭대기에 오를 동안은 꿈을 펴보기도 하고 시의 경지에 묻혀 보기도 한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발아래 펼쳐져 있는 들판을 관망하고 높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푸른 꿈을 키워간다. 나의 데뷔작 ‘시계가 셈을 세면’도 등산길에서 글감을 얻어 정리되었다.
아이들이 잠든 밤에도/셈을 셉니다.//똑딱똑딱/똑딱이는 수만큼/키가 자라고/꿈이 자라납니다.//지구가 돌지 않곤/배겨나질 못합니다./별도/달도 돌아야 합니다.//씨앗도 땅속에서/꿈을 꾸어야 합니다.//매운 추위에 떠은 나무도/잎 피고 꽃 필, 그리고 열매 맺을/꿈을 꾸어야 합니다.//시계가 셈을 세면/구름도 냇물도/흘러갑니다.//가만히 앉아 있는 바위도/자리를 뜰 꿈을 꿉니다.//시계가 셈을 세면/모두모두 움직이고/자라납니다.
나는 등산을 하면서 이른 봄 묵은 잔디에 속잎이 나서 조금씩 더 푸르게 덮여 가는 것, 묵은 가지에 물이 올라 새순이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것, 산봉우리에서 햇살을 내뿜으며 솟아오르는 해님,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들판을 달리는 냇물은 언제나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날마다 보아 왔다. 또 바위 위에 올라앉아 책을 읽으면서 이 바위도 언젠가는 주춧돌이 되거나 석수장이 손으로 사자 모양으로 다듬어지거나 할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향상하고 발전한다는 걸 늘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위의 작품은 <한글문학>에 제1회 추천 작품인데, 다른 두 작품과 함께 조유로님이 추천했다. 당선 완료 작품 ‘이른 봄’은 다음과 같다.
암탉이 알을 품듯/봄님이/온 세상을 품고 있다/안개 낀 아침.//닭의 체온으로/보송보송 예쁜/ 병아리가 깨이듯//봄님의 품안에서/병아리처럼 그렇게 예쁜/연둣빛 새싹이 깨일 테지.//보슬보슬 내리는 안개비는/새싹의 젖줄//새싹이 눈을 감고/강아지처럼 젖을 빤다.
심사를 하신 이원수님은 다음과 같이 추천의 말을 썼다.
당선 작품 ‘이른 봄’이 실린 책
최춘해님의 ‘이른 봄’을 추천한다. 임의 동시들은 이미 적지 아니 보아왔고 기대도 걸어 온 나였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귀여웠다. 아침 안개를 알을 품은 암탉처럼 느끼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안개비를 새싹의 젖줄로 보고 “새싹이 눈을 감고/강아지처럼 젖을 빤다.”고 한 끝 연에서 이 동시는 뛰어난 시의 광채를 보게 해 주었다. 최님은 그의 생활 시들에서 내용의 동화나 소설다움에서 떠나 시 다운 내용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준 것 같다.
2. 상주글짓기회,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 시절 사진 삽입-교단 아동문학 동인회지
교단아동문학 동인지 ‘은방울’
상주는 ‘삼백의 마을’ ‘감이 열리는 마을’ ‘동시의 마을’ 등의 별명이 있다. 누에 고치, 곶감, 흰 쌀 세 가지의 흰 색, 즉 흰 옷을 입은 우리 민족의 순수성을 나타낸 말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글짓기 지도를 하다가 나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현득 김종상 같은 동호인을 만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상주에서는 글짓기회가 있었는데, 회원들이 글짓기 지도를 활발히 해서 상주 아이들의 글이 신문이나 잡지에 쉼없이 발표되었고 백일장이나 현상모집에서도 두드러지게 많이 입상되었다. 그리고 윤석중 선생의 안내로 상주 아이들의 작품으로 서울에서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그 작품으로 <동시의 마을>이라는 책을 내었다. 윤석중 선생은 상주를 ‘동시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다. 이때 글짓기 지도 교사들은 글짓기 지도를 하는 목적이 단순히 글을 잘 쓰게 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생활을 지도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글짓기 지도에 열성을 다 했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글짓기 지도를 하기도 하고 자비로 아이들을 대구 서울 등 외지의 백일장에 인솔해 가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노는 날에도 아이들 작품을 싣는 어린이 신문을 등사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상주읍에서 글짓기 회원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상주읍에서 8km 떨어진 사벌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주일이 멀어서 중간에도 만나야 될 만큼 회원들이 보고 싶었다. 글짓기회에서는 글짓기 지도 방법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각자의 작품에 대한 합평도 했다. 당시에 전국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가 있었는데, 내가 간사를 맡았다. 이 회에는 회장도 없고 간사가 모든 일을 맡아서 했다. 전국의 교단에서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자기의 작품을 회원 수만큼 등사를 해서 간사한테 보내면 간사는 회원 수만큼 <은방울>이라는 작품집을 만들어 회원에게 우송을 했다. 전 달의 작품에 대한 평을 함께 실었다. 21호(1965년 7월 1일 발행)와 28호(1965년 12월 1일 발행)는 인쇄판으로 내었다. 서문은 이원수 고문님이 썼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중앙일보사에서 최종률 기자가 취재하러 내가 근무하는 사벌초등학교에 왔었다. 중앙일보 문화면에 전면 특집 기사(1966년)로 실었다. 최종률 기자는 내가 거처하는 사벌초등학교 사택에서 하루 밤을 묵어서 갔다. 상주 글짓기 회원과 교단아동문학 동인회 회원을 만난 것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내가 매일신문에 등단을 하던 1967년에는 대구시가 경상북도에 합쳐져 있을 때였다.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를 이재철, 김성도, 김진태 세 분이 해마다 심사를 했다. 전 도에서 아동문학에 등단을 한 사람은 손꼽을 정도의 숫자밖에 되지 않았다. 신현득, 김종상, 허동인, 강청삼, 권태문, 김한규 등이다. 문학 단체로는 1957년에 창립된 대구아동문학회 하나뿐이었다. 이응창, 김성도, 김진태, 윤운강, 여영택, 이민영, 신송민, 정휘창, 서월파, 윤혜승, 서광민, 박인술 등이 창립회원이었다. 대구아동문학회에서는 동인지를 발간했다. 창간호<달뜨는 언덕>을 1958년에, 2호<꽃과 언덕>을 1959년에, 3호<오손도손>을 1966년에, 4호 <나무는 자라서>를 같은 해에 발간했다. 이 회에 들어가서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회원은 원화여중고 교원과 계성고등학교 교원이 많았고, 신송민, 신현득, 김선주, 허동인 등 초등학교 교원들이 함께 활동했다.
이때 한 주일에도 몇 차례씩 만난 사람은 신현득이다. 신현득이 칠성초등학교 근무할 때 칠성초등학교 근처 어느 오두막집 셋집에 찾아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다. 식량이 없어서 콩나물이 더 많게 섞인 보리밥을 대접 받았다. 아마 불청객이 갔기 때문에 부인은 굶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양식이 모자라 허덕이던 때에 내가 왜 찾아가서 꼽사리를 끼었는지 후회가 된다. 신현득이 칠성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는 칠성학교 근처 막걸리 집에서, 대구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근처에 옥이 집이 있었는데, 늘 그 술집에서 만나 막걸리를 먹으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주일에도 수 차례 만났었다. 우리가 만나면 가는 집이 정해져 있다. 염매 시장 안에 돼지 국물 집, 학원서점 옆의 가보세 등이다. 권기환, 이천규, 김선주 등 우리 또래끼리 만날 때는 <가보세>는 안 간다. 가보세는 맥주 양주를 파는 집이라서 술 값이 비싸다. 그래서 김성도, 이재철 등 귀한 분을 모실 때만 가보세에 갔다. 김진태 윤운강 정휘창 이응창 박인술 등 선배들이 있었지만 대접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서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술값은 서로 내려고 다투었다. 신현득의 고집을 못 이겨서 내가 질 때가 많다. 평소에도 정의감이 강해서 비뚤어진 것을 그대로 두고 못 본다. 향촌동 어느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는 두 청년을 봤다. 우리 둘은 거기에 끼어들었다. 신현득이 경우에 어긋난 사실을 따질 때 나도 신현득을 두둔했다. 그랬더니 그 건장한 청년 둘은 우리들 목을 졸랐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뒤에 오래 목이 아팠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청년은 향촌동의 유명한 깡패라고 했다. 그만하기를 다행이라고 했다.
상주에 있을 때 이야기다. 이무일, 김종상, 이천규, 강세준 권태문 등이 글짓기 지도와 작품 쓰기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자주 모였는데, 다 친하게 지냈지만 그 중에서도 이무일과 나는 가장 가까운 사이었다. 이무일은 나보다 나이가 7살 아래이지만 격의 없이 지낸다. 남녀 사이에 연애를 할 때, 만나도 자꾸 만나고 싶은 것처럼 동성간인데도 자꾸만 곁에서 보고 싶었다. 이무일은 상주초등학교에 근무하고 나는 사벌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다. 우리 집에서 마음 턱 놓고 허리띠를 풀어 놓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아무 거리낌없이 속에 품은 이야기를 털어 놓으며 술을 마셨다. 아마 너댓 시간은 흘렀을 것이다. 막걸리도 한 말쯤 먹었을 것이다. 드디어 속에 들어갔던 술이 되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먹었던 술이 속에서 새끼를 쳐서 배가 되는 양을 토해냈다. 온 방에 술이 그득했다.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처가 방에 그득한 술을 처리하느라 땀을 뺐다. 우리 둘은 그런 뒤에 더 가까워져서 이무일이 작고하기 전까지 사뭇 가까운 사이로 지냈었다.
내가 가까이에서 아동문학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김종상과 신현득이다. 나이는
나보다 적지만 등단을 먼저 했고 작품을 잘 썼기 때문에 문학에서는 선배로 받들며 많이 배웠다. 그때 좋아했던 작품은 신현득의 ‘고구려의 아이’, 김종상의 ‘흙손 엄마’ 등이다.
Ⅱ. ‘흙’ 연작시를 중심으로 한 나의 작품 세계
사람의 성격이나 작품 세계는 그 사람이 나서 자란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흙’ 연작시를 쓰는 것은 나의 고향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나의 고향 경북 상주 사벌 덕골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삼백과 선비의 고장
내가 고향 상주를 떠나 대구에 온 것이 1966년 10월 1일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전근이 돼 왔다. 34년이나 나를 품에 안아 보살펴 준 상주, 내가 태어나서 잔뼈가 굵고 조상이 묻혀 있는 땅이기에 고향을 떠나 대구로 집을 옮겨 산 지 46년 근 반세기가 되었지만 꿈에도 어릴 때 놀던 산과 들 거랑 (냇가), 동무들 모습이 나타난다. 내가 어릴 적에는 상주에서 대구까지 사벌면 덕골 (덕가리)에서 상주읍 버스 타는 데까지 근 30리 길을 걸어와서 버스를 타고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버스길은 비포장 도로여서 터덜거리며 먼지를 일으키며 한 세월 없이 달렸다. 냉방도 안 된 차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걷지 않고 차를 타고 가는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부원 고개에 이르면 차가 고개를 넘을 수 없어서 차 안에 탔던 손님들이 차에서 내려 버스를 밀고 고개를 오르기도 했다. 그때는 당일 돌아갈 수가 없어서 묵어가야만 했다.
지금은 승용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도 벌초하는 날이나 묘사를 지내는 날 아니면 고향에 가는 일이 별로 없다. 처음에 대구로 이사를 왔을 때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처럼 손수레에 끌고 가는 감을 봐도 고향이 생각났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꼭지 달린 감이/손수레를 타고 온다.//아스팔트에 덮여서/흙이 숨을 못 쉬는/대구 한복판에//상주군 사벌면 덕골, 황새골/우리 밭 우리 감나무 가지를/붙잡고 있던/엄마 젖꼭지만큼이나/손에 익었던 감//할매 쪽진 머리처럼/꾸미지 않은 감꼭지//아버지 목소리만큼 /떫덜 구수한 맛 /내 살점 속엔 /그런 감 맛이 들었다. //아저씨 끌고 가는/손수레에 /할매 산소 냄새가 난다. // 황새골 억새풀 흔드는 / 바람이 /내 살결을 스친다. (최춘해의 ‘꼭지 달린 감’)
황새골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산과 논밭, 선영이 있어 어릴 때는 여기서 거의 살다시피 했었다.
내가 살던 마을 덕골은 동북쪽으로 건지산(정식 이름은 금지산)이 둘러 있고 덕골 마을 앞으로 흐르는 거랑(작은 내)이 있다. 강 둘레에 들이 펼쳐져 있는데, 큰물이 지면 둑이 터져서 홍수가 날 때고 있었다. 이 거랑 물이 들을 적셔 주어 벼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거랑 둑 너머 사시사철 맑은 물이 펑펑 솟아나 멱 감고 빨래터로 좋은 큰 웅덩이가 있었다. 한여름에는 여기서 입술이 새파랗도록 헤엄을 치며 놀았다. 또 달밤이나 별이 총총 흐드러진 밤에는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거랑 보드라운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며 즐겼다. 이웃 동네 황리(정식 이름 황룡) 아이들을 불러 씨름 시합을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이 거랑에서 씨름을 많이 했기 때문에 씨름 선수가 많았다. 키가 더 큰 아이들을 이기고 나서 의기양양했었다. 한여름 밤에는 돗자리를 깔고 모래사장에서 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집으로 갔다. 그러던 거랑은 지금은 덕가 못이 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때 추운 겨울에 밥만 먹으면 의례껏 모여서 놀던 산기슭 ‘방 지어놓은 데’도 허물어지고, 골목길 따뜻한 데서 구슬치기하며 놀던 골목길도 사라졌다. 발에 철사를 박아 썰매를 만들어 타던 논도,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하던 도랑도 없어지고 이제는 포장된 도로로 바뀌었다. 그때 연날리기, 못 치기, 자치기, 꼰을 두며 금방 싸우고도 돌아서서 웃으며 사귀던 기핵이, 학군, 주원이, 용구, 종화, 진영이, 동춘, 동희, 종진이, 등은 벌써 고인 된 사람도 많고 살아있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달래를 캐서 머리를 땋아 새색시를 만들고 모래로 밥 짓고 달래, 냉이, 꽃다지 캐어 소꿉장난하던 귀열이, 소열이, 월분이, 남혼들도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고향에 가도 내가 어릴 때 고향 모습은 마음속에만 남아 있고 모두가 변해서 낯이 설다. 사람도 종화 동영이 몇 사람만 얼굴이 익었고 모두 낯설다. 필자가 쓴 졸시 한 편을 옮겨 본다. 배암등은 뱀 모양을/개구리등은 개구리를 / 닮아 가고 있었다.// 배암등은/ 뱀 행세를 하고 싶었고/ 개구리등도/ 헤엄을 치고 싶었다.// 꿈은 살아서/ 개구리등 발치엔/물풀이 무성하고/ 물풀 사이로는 / 잉어가 떼를 지어 다닌다.// 만물이 잠든 밤이면/ 배암등과 개구리등은/ 설렁설렁 헤엄을 친다. / 때를 만나 느긋하다.// 나는 새로 된 못가에 앉아 / 할매와 같이 논둑콩 심던,/ 풀밭골에서 알밤을 줍던/ 지난날을/ 낚시로 건져 올린다. *배암등과 개구리등은 새로 된 못물에 잠기게 되었다.(‘내 고향 덕골’ 전문)
건지산은 함창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모과골(정식 동명은 목가리)로 넘어가는 솔티고개가 있고, 조금 더 동쪽으로는 서낭당고개(중간에 돌을 던져 만든 서낭당이 있다.)가 있다. 모과골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솔티고개로 가고, 서쪽으로 가면 추가 못이 있고 추가 못을 지나면 양정역이 나온다. 이 양정역에서 조금 더 가면 유명한 공갈못이 있다. 지금은 공갈뭇 터 표지판만 있지만 그 못이 무척 넓었다. 이 못물이 상주들 농수가 되었다. 가을 농사를 다 지어 놓고 못에 물이 마르면 가래를 가져가서 잉어를 잡았다. 추가 못에서도 잡고 공갈뭇에서도 잡았다. 잉어가 가래 속에서 가래(통발)를 꼬리로 치는 느낌은 대단하다는 말만 어른들에게 들었다. 공갈못 노래를 옮겨 본다.
상주 모심기 노래
1
상주- 함창- 공갈못 에-- 연밥- 따-는 저큰애 기--
연밥- 일랑- 내따줄게-- 우리- 부모님 섬겨주 오--
(상주 모심기 노래는 11절까지 있는데 나머지는 생략한다.)
덕골에서 북쪽으로 향한 길이 서낭당 길이다. 이 길로 함창 장, 점촌 장을 보러 다녔다. 이 서낭당 길은 인가가 없이 길
게 뻗쳐 있어서 호랑이나 강도가 나온다고 해서 날이 어둡기 전에 지나가려고 서둘렀다. 이 서낭당 길로는 문경새재를 지나 한양
으로 과거 보러 갔었다. 또 소 장수가 이 길로 소를 몰고 가기도 했다. 그보다 더 동쪽으로는 갈미고개가 있다. 서낭당 길도 갈미고
개 길도 덕가 못에 묻히고 못가로 새로 포장 도로가 생겼다. (중략) 사벌왈릉이 있는 삼덕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도남서원이 있다.
다. 앞으로 도남서원 주
도남서원은 1606년 정경세 등이 영남 5현인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을 제향하기위해 무심 포에 세운 서원이다. 그 뒤 노수신, 류성룡,정경세,이준이 추가 배향되었다.도남서원은 1676년(숙종 2년)사액되고 1797년(정조 21년) 동서재를 세웠으며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나 1992년 지역 유림의 힘으로 강당 등이 세워졌다.
낙강시제는 상주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1196년 백운 이규보로부터 1862년 계당 류주목의 시회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도남서원·경천대·누정·선상 등지에서 총 51회에 걸쳐 이어진 유서 깊은 시회(詩會)다.2011년 시회 때는 조선조에 펼쳐진 낙강시회를 재현하고 그 정신을 이어 받고자 경북지역 문협지부 회원과 각 지역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200여명이 참가해 선인들의 자연과 인간과 시 사랑의 호방한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문학의 장을 한껏 펼쳤다. 현재 상주에서 선비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단체로는 상주문인협회와 상주아동문학회이다.
사벌면 소재지에서 도남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면 금실(금흔)과 흥국 (금흔2리)이 있다. 흥국에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정기룡 장군의 충렬사가 있다. 사벌왕릉과 함께 상주의 문화유적지로서 시민이 받들어 모시는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정기룡 장군이 용마를 타고 모래 사장에서 훈련을 하였다는 경천대는 황지에서 부산까지 1300리 낙동강 중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상주 사벌 경천대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사벌왕릉과 경천대로 자주 소풍을 가서 즐겼다. 기암괴석, 낙락장송, 깎아지른 절벽, 푸른 소 등 경치가 아름다워 하늘이 만든 자천대라고 이름이 붙었다. 경천대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나처럼 감탄사를 연발할 것이다. 경천대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 건너편에 횟골(회상리)마을이 보인다. 지금은 경천교 다리가 놓여 있지만 전에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1975년에 내가 회상국민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밤에 사공이 안 나와서 혼자 배를 저어가다가 강물에 떠내려간 적도 있었고, 큰물이 졌을 때 황톳물이 뱃전까지 찰랑거리는 위험한 경험을 한 적도 있었다. 회상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쓴 시가 상당히 많은데 그 중 한 편을 소개해 보겠다.
나룻배는 얼어붙었어도/얼음장 밑으론 물이 흐른다.// 왜놈들이 총칼을 휘둘렀어도/겨레의 가슴 깊은 곳엔/살수대첩 때 연개수문의 피가/줄기차게 흘렀었다.//얼음이 두꺼울수록/얼음장 밑 물살은 거세듯/임진왜란/ 6·25 ……. /한 고비씩 추위가 휩쓸고 가면 / 겨레의 가슴속 물살도 / 그만큼 거세진다.// 나는 지금 / 낙동강 얼음판 위에 서서/ 가슴속 물살을/짚어 본다. (‘겨울 강물’ 전문)
이제 나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대봉 도서관 주관 저자와의 만남에 초대되어 ‘흙’ 연작시를 중심으로 한 나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정리한 것을 그대로 옮겨 본다.
진행자의 질의문
1. 선생님은 흙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흙을 소재로 다루게 된 이유나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까?
2. 흙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선생님의 생각을 들려주시겠습니까?
3. 선생님은 흙 연작시를 80여 편 발표했는데, 주제별로 분류하여 대표되는 작품 1편씩 들 어서, 그 작품을 어떻게 썼는지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4. 요즘 어린이들은 대부분 도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흙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서 흙을 소재로 쓴 작품이 어린이들에게 재미가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는 않았습니까?
5. 앞으로도 흙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저자의 답변이 될 내용
1. 흙을 소재로 다루게 된 이유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랐으며 흙과 더불어 살았다. 나도 흙의 한 부분이다. 봄에 새싹이 돋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흙이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동심의 원초적 생각인 물활론의 눈으로 흙을 보게 되었다. 흙을 소재로 동시를 썼다. 연작으로 썼다. 그때가 1979년 세계 아동의 해이다. 문교부와 한국일보사 공동 주최로 세계 아동의 해를 기념하여 동시 동화 현상모집을 하였다. 시․도 대회를 거쳐 전국 대회로 이어졌다. 흙 연작 동시 8편을 투고하여 전국 대회에서 동시 부문에 금상을 받았다. (동화부문에는 김종상) 그 뒤부터 흙을 연작으로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연작을 쓰면서 지구를 살리는 데도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지구가 오염 또는 파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작품을 쓰는 사람이 당면한 절실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흙이란 것은 ‘암석이 부스러져 된 분말’이라는 사전적인 뜻의 흙이 아니다. 토양(土壤), 대지(大地), 자연(하늘, 바다, 강, 동식물) 등을 모두 포함시킨 것이다. 그뿐 아니라 흙은 뿌리, 어머니, 고향 등 여러 가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런 넓은 의미의 흙을 작품으로 승화시키자는 것이다.
흙을 사랑하는 것은 고향을 지키는 것이요, 전통을 살리는 것이다. 순수해지는 것이요, 이웃끼리 정다워지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요,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느긋하게 참고 순리에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욕심을 내거나 억지스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모여들고 있다. 농산물 개방으로 앞으로는 농촌을 더 많이 떠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흙과 점점 멀어지고 인심도 각박해지고 있다. 흙을 멀리하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간접으로라도 흙을 겪게 하기 위해서 흙을 소재로 쓴 문학 작품이 절실히 필요하다. 더 늦기 전에 흙을 소재로 한 작품을 앞장서서 써 보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2. 흙이란?
목숨을 가진 모든 것들이 태어나서 살아가도록 해 준다. 봄에 밖에 나가보면 흙이 있는 데는 어디든지 목숨의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온갖 벌레와 동물들이 기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겨울 동안에 품안에 안고 있다가 따뜻한 봄이 돼서 제대로 살아갈 만할 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딸을 사랑하듯이 흙은 모든 생물을 감싸 안아 준다. 그 많은 생물들이 자라고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먹을 것을 다 대 준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주기만 한다.
또 흙은 정직하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는 콩이 나지 절대로 팥이 나지 않는다. 부지런한 농부한테는 풍성한 곡식을 거둬들이게 하고 게으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곡식이 잘 되게 하지 않는다. 땀 흘려 일한 만큼만 보람을 느끼게 한다.
이 세상 모든 생물들이 흙의 한 부분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아간다. 하늘, 산과 들, 강, 바다, 동식물 등, 이런 자연을 숨 쉬며 그들이 주는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말없이 수많은 이치를 끝없이 가르쳐 준다.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배우고 슬기를 얻고 바르게 사는 방법을 배운다. 사랑을 배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배운다. 여기서 흙이라고 한 것은 흙 한 가지만이 아니라, 자연 모두를 통틀어 말한 것인데, 그 가운데 대표되는 것이 흙이란 뜻이다.
3. 나의 연작시 ‘흙(1-82)’ 주제별 분류
‘흙’ 연작 동시집
① 어머니(또는 할머니)를 상징한 작품- 1, 2, 3, 4, 5, 6, 25, 26, 28, 29, 34, 36, 40, 48, 73, 75 모두 16편
② 신비, 순수성을 상징한 작품 - 7, 10, 18, 33, 38, 41, 44, 52, 54, 56, 58, 60, 64, 65, 67, 68, 69, 71.74, 78, 79, 80, 82 모두 23편
③ 토속 신을 상징한 작품 - 8, 9, 11, 13, 16, 19 모두 6편
④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상징한 작품 - 12, 45, 모두 2편
⑤ 고통을 받아 안는 신을 상징한 작품 - 14, 53 모두 2편
⑥ 한 가족임을 상징한 작품 - 15, 21, 35, 39, 42, 66, 70, 76, 77, 81 모두 10편
⑦ 순리를 지키는 신을 상징한 작품 - 17, 46 모두 2편
⑧ 안식처임을 상징한 작품 - 20, 42, 50, 51, 72 모두 5편
⑨ 농부(또는 사람)를 상징한 작품 - 22, 23, 30, 31, 32, 35, 37, 47, 49, 55, 57, 59, 61
모두 13편
⑩ 고향을 상징한 작품 - 24, 27, 43, 모두 3편
신비, 순수성을 상징한 작품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어머니를 상징한 작품과 농부를 상징한 작품이다. 네 번째가 한 가족임을 상징한 작품으로, 이상은 각각 10편이 넘었다. 그 다음이 토속 신을 상징한 작품, 안식처, 고향, 뿌리, 고통, 순리를 상징한 작품 순이다.
주제별로 작품 한 편씩만 들어보겠다.
① 어머니(또는 할머니)를 상징한 작품
흙(2)
흙은 너무 지쳐서/겨우내 잠을 잔다./북풍이 몰아쳐도/곤하게 잠을 잔다.//살갗은 얼어도/품속 개구리 씨앗들을/제 체온으로 다독인다./잠 속에서도 다독이는 건/흙의 버릇이다./풀뿌리 하나라도/감기 들까 걱정이다.//입춘 무렵 흙은/잠이 깨어도/자는 척 누워 있다./품속 어린것들/선잠 깰까 봐.
* 농촌에 살다가 도시 대구로 처음 이사를 와서, 단칸방에 아이들 셋이 엄마와 함께, 곤하게 잠자고 있는 걸 보면서 흙과 연관을 지어 써 보았다. 흙도 어머니 같다는 생각을 했다.
② 순수성을 상징한 작품
흙 18
가까운 나무가 눈을 뜬다./산들이 일어나서 꿈틀거린다./산의 품에 안겼던/산짐승과 산새들/잠긴 목소리를 고른다./꿩은 어제보다/목청이 더 다듬어졌다./골짝 물은 제 갈 길을/찾아서 흐를 줄 안다.//산새소리, 산짐승 소리/골짝 물소리……./새벽마다 맑은 소리/들으며 사는 산은/언제나 싱싱하다./세월은 흘러도/새벽마다 젊어진다.
* 산골짜기에서 살면서, 새벽에 일어나 산이 좋아 산을 오르며 산짐승 소리, 산새 소리, 물소리들이 순수함을 느꼈다. 산은 더욱 싱싱해 보였다. 세월이 흘러도 산이 더 젊어지는 것은 새벽마다 맑은 소리를 듣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어울려 있는 자연이 신비스럽다고 느꼈다.
③ 토속 신을 상징한 작품
흙 8
우리 할머니 살아 계실 때/눈 다래끼가 나면/땅속에 티를 찾아 빼 주셨다.//햇살이 맨 먼저 와 닿는 데서부터/해 뜨는 쪽으로/내 나이만큼 걸음을 세어 가서/땅속에 숨은 티를/용케도 찾아내셨다//땅속에 티가 빠지면/내 눈이 시원하다./내 눈 다래끼도 없어진다.//날을 받지 않고/매흙질이라도 하고 나면/누구든 한 사람은 앓았다./흙의 비위를 거스렀기 때문이다.//이럴 때 할머니는/손이 닳도록 빌어 주셨다.//할머니는 지금/흙과 한 몸이 되어서/마음 편히 누워 계신다.
*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해 애쓰시던 모습이 머리에 박혀 있었다. 흙을 신으로 섬기며 흙과 더불어 살면서 가족의 건강을 위해 손이 닳도록 빌던 할머니 마음이 곧 흙의 마음이라 생각했다.
④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상징한 작품
흙 45
제 갈 길을 찾은 강물/저 바위가 저렇게 닳도록/오로지 한길로만 흐른다.//한 우물을 파라는/강물의 말씀//삼십 리 읍내장/나룻배를 건너/발이 부풀도록 걸어 다녀도//밤낮으로 흘러 주는/강물이 고마워/붙박이로 사는/낙동강변 횟골 주민들.//잉어, 뱀장어, 가물치, 은어……./갖가지 물고기를 품어서 키우는/엄마 같은 강물의 마음.//강물 같은 마음으로/인정을 나누며/대를 이어/강 마을 횟골에서만 산다.
* 불편한 오지의 낙동강변 횟골 주민들이 대를 이어 붙박이로 사는 것은 갈 길을 찾은 낙동강 강물의 말씀 덕일 것이다. 한 우물을 파라는 강물의 말씀을 나도 들을 수 있었다. 인정을 나누며 사는 것도 갖가지 물고기를 품어서 키우는 엄마 같은 강물의 마음을 닮아서일 것이다. 자연은 흔들리지 않는 뿌리와 같은 마음을 가르쳐 준다고 느꼈다.
⑤ 고통을 받아 안는 신을 상징한 작품
흙14
가슴을 터놓고/궂은 일, 서러운 일/다 받아들인다.//밤이 오면/어두움을 받아 안고/날이 새면/햇빛을 받아 안는다.//봄날 새싹들의/발돋움하는 소리도 듣고/살을 에어내는 추위에/손끝이 아려 울부짖는/나무들의 소리도 듣는다.//서러운 달빛 이야기도/논 물 속으로 받아 안는다./즐거운 이야기보다/괴롭고 어두운 이야기들을/더 많이 품고 있는 흙/걱정이 쌓여서/땅속은 비좁다.
* 고통을 받아 안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와 석가여래가 고통을 받아 안았기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있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우리 둘레에도 온갖 허물과 원망을 도맡아 받아 안고 살아가는 맏며느리나 단체의 중역들이 있다. 남들이 보지 않는 데서 어렵게 사는 이들을 위해 궂은 일 험한 일을 도맡아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흙도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⑥ 한 가족임을 상징한 작품
흙․15
마당에 나가면/산들이 빙 둘러선다.//내가 태어나던 날도/그랬을 것이다.//쓸쓸한 날이면/불러서 말벗이 돼 주고/어쩔까 망설이다가/마당에 나가면/용기를 북돋아 준다.//길을 가다가/등산을 하다가/어려운 고비에 이르면/엄숙한 자세로/굵직한 목소리로/끈기가 있어야 한다고/타일러 준다.//내가 상을 받은 날은/함박으로 웃어 주었다.
* 산은 늘 내 둘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우울할 때는 위로를 해 주고 기쁠 때는 함께 즐거워해 주는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⑦ 순리를 지키는 신을 상징한 작품
흙․17
동산에 먼동이 턴다./오늘도 새벽닭이 울어 준다.//오늘은 춘분/해마다 맞는 날이다.//올해도 어김없이/복숭아꽃, 살구꽃은 필 게고/개구리도 울어 줄 게다./흙은 사랑의 손길로/보리 싹을 보듬어 줄 게고/나무가 목이 마르면/하늘은 비를 내려 줄 게다.//올해도 물은/높은 데서 낮은 데로/흐를 것이다./병아리 귀여운 모습을/얼른 보고 싶어 해도/3 주일을 품고 있어야/껍질을 벗는다./장독간 난초 싹이 보고 싶어/마음을 서둘러도/제때가 돼야/밖으로 내보내는 흙.
* 내 마음이 아무리 조급해도 자연은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자연은 절대로 순리를 어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⑧ 안식처임을 상징한 작품
흙 20
해님이 하루 일을 마치고/서산 넘어 갈 때면/들에서 일하던 농부도/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간다.//하늘을 날던 새들도/둥지를 찾아들고/해를 향해 가지를 뻗쳤던/나무와 풀들도/흙으로 마음을 돌린다.//풀밭에 고삐 매인 염소도/집으로 돌아가고파/매해해-/소리를 지른다.//집으로 돌아가는 건/즐거운 일/지금은 모두가/집으로 돌아가는 시각//날마다 돌아가는 집은/잠시 머무는 여관/긴 여행을 마치면/마지막엔/흙으로 돌아간다.
*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행복하다. 하는 일이 고돼도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즐겁다. 흙은 안식처인 집이 된다.
⑨ 농부(또는 사람)를 상징한 작품
흙 22
햇볕 굶주려/속 살 못 채운 벼 이삭/핏기 잃은 얼굴로/하늘 향해 고개 꼿꼿이 들고/뜨거운 햇살 내리기를/목마르게 기다립니다./오늘도 구름이 덥혔습니다./온 여름 하늘을 가리고도/벗겨질 줄 모르는 구름.//제비들이 전봇줄에 모여 앉아/강남 갈 의논을 하고/성급한 코스모스가/풀죽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가을 풀벌레 소리 들리면/조바심이 납니다.//하느님!/지금부터라도 구름을 거두시고/햇살을 내려주소서/무서리가 내리기 전에/속살을 채워 주소서/과일 알알이/단물이 들게 하소서.
* 일조량이 모자라서 곡식이 제대로 익지 못했을 때가 있었다. 농부들은 애타게 햇볕을 기다렸다. 곡식을 안고 있는 흙도 농부 못지않게 곡식과 과일이 익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⑩ 고향을 상징한 작품
흙 43
고향이 나를 손짓하여/되찾는 흙/어머니처럼/덥석 안아 주는 흙/더워 오는 가슴.//흙의 품안에 안긴/할아버지 할머니/편안하고 만족스러운 듯//이웃도 일가친척 인정도/엷어졌다 두터워졌다 하는데/한결같은 건 고향 흙뿐.//한낱 풀씨, 한낱 솔 씨도/뜨거운 사랑으로/안아 키웠구나./새로 태어난 빽빽한/소나무, 감나무, 밤나무들이/손을 흔들어 반겨 준다.
* 객지에서 살다가 고향에 가니 낯익은 산과 들, 나무와 풀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고향 흙을 밟으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위에 들은 작품들은 좋은 작품이라고 든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보기를 들었을 뿐이다.
4. 전망
흙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흙이 있는 농촌이 배경이 되어야 하는데, 농촌 아이들은 별로 없고, 거의 도시 아이들이다. 도시 아이들은 흙과 더불어 살지 않기 때문에 흙을 소재로 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재미가 없어 외면당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또 지금은 농작물의 종류도 달라졌고 농사짓는 방법도 바뀌었다. 사는 방법도,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요즘 아이들은 자연(흙)을 소재로 쓴 것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건져 올린 작품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단테가 자연은 신의 예술이라고 한 것처럼, 자연은 예술품이 생산될 수 있는 원천이라고 볼 때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은 앞으로도 계속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자연을 소재로 쓴 작품을 많이 읽게 되면 자연을 사랑하고 서정이 풍부한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Ⅲ. 아동문학 강의 10년 동안의 행복
10년 동안 무료로 아동문학 강의를 하면서 늘 행복하게 생각했다. 아동문학 강의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이야기가 혜암 아동문학 10호 머리말에 요약이 돼 있으므로 그 머리말을 아래에 옮겨 본다.
<혜암 10호 머리말> 행복했던 1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아동문학교실 강의를 한 10년은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다. 2003년 그루출판사에서 개강을 할 때가 엊그제 같은 데 잠깐 사이에 10년이 흘렀다. 교직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사회에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다. 국록을 받고 사회의 도움을 받아 잘 살았으니 나도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동문학 강의뿐이다. 평생 아동문학을 했으니 아동문학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강좌를 열어 보려고 복지회관 도서관 등 여러 곳에 강의할 장소를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루 출판사 이은재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자기 출판사에서 해 보라고 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바로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 수강생 모집 기사 보도 자료를 매일신문 영남일보 조선일보 대구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에 보냈다. 신문에 기사가 실리자 이외로 수강신청이 많이 들어왔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여간 즐겁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며 강의 준비를 했다. 신현득 교수께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에서 강의 하던 교재를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세계아동문학·아동도서사』, 『동화작품집』복사한 것을 보냈다. 동시 감상 자료는 내 나름으로 만들었다. 정서법은 1988년 한글맞춤법이 개정될 때 문교부에서 발행한 『편수 자료』를 활용했다. 연간 계획을 만들고 월간 계획을 만들어서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 카페에 올렸다. 감상 자료는 문제를 만들어서 과제를 주고, 매주 작품 동화나 동시를 한 편 이상 써오게 했다. 또 매일 일기를 써서 검사를 맡게 했다. 일기는 문장력을 기르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동시 동화 감상과 작품 합평을 한 주일씩 바꿔서 했다. 사전 찾기 지도와 정서법, 시점, 원고지 쓰기, 원고 교정법 등 기본적인 것부터 상세하게 지도했다. 우리들의 마음가짐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우리는 정으로 산다. 둘째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 셋째 계속하면 열매를 맺는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사랑이 있으면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들이 쓰는 작품에도 사랑이 바탕에 깔려야 독자들이 감동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낯선 얼굴들이 서먹하게 만났지만 날이 갈수록 정이 들어서 졸업을 할 때는 정든 얼굴 정든 목소리를 못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10년을 지나고 나니 등단한 사람도 많고 책을 내서 세상의 주목을 받는 작가도 여러 사람이 되었다. 수료생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전국 신인 중견작가들 가운데서 한 사람 뽑는 문학상도 받았다. 기대 이상으로 우수한 작가가 많이 나오게 돼서 여간 기쁘지 않다.
10년을 되돌아보면 한 마디로 무척 즐거운 나날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나가는 강의 시간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30분 전에 도착해서 수강생들을 맞이했다. 수강생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일찍 가지 않고는 못 배겼다. 어서 월요일, 화요일 강의 날이 다가오기를 약속한 애인처럼 기다렸다. 수강생들이 써낸 동시, 동화 작품을 읽고 평과 지도 말을 쓰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지만 즐겁게 썼다. 귀찮다거나 짐스럽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차츰 작품이 향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내 글이 향상된 것보다도 더 기뻤다. 또 수강생이나 수료생 가운데서 신춘문예나 문예지, 창작지원금 수혜자로 뽑히거나 우수 도서나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가 받은 것 이상으로 들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고 10년 동안 계속되었으니, 나는 그 동안 참 행복했었다.
이제 행복했던 생활도 6월로 끝이 난다. 7월부터는 수강생을 못 만난다. 강의 날을 앞두고, ‘0월 0일은 정다운 얼굴 만나는 날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나오세요. 우리는 정으로 산다.’는 문자메시지도 이제는 보낼 떼가 없다. 강의를 시작하는 첫마디로 ‘한 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인사를 하면 반가운 모습, 정다운 목소리, 해맑은 눈빛으로 ‘예’하고 화답해 주던 얼굴들을 볼 수가 없다. 월요일, 화요일이면 시계 바늘처럼 가방을 챙겨서 나오던 그루사 강의실에도 이제는 나올 필요가 없다. 이심전심으로 배려해주고 위로해주고 정을 주고 싶어 하던 얼굴들이 눈앞에서 멀어졌다. 세월이 원망스럽고 나이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10년 세월이 나를 행복하게 했을 뿐 아니라 보람 있는 세월이었기에 하느님께 고맙게 생각한다.
수료생 중에 문학으로 빛을 본 분이 많은 것도 보람이지만, 고전이나 선배들의 문학 작품을 감상하면서, 또는 일기를 쓰고 자기 작품을 쓰면서 세상을 보는 마음의 눈이 밝아졌다. 그래서 약자를 위로해주고 남을 배려해주는 등 사랑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 즉 사람답게 살아가는 인생관을 갖게 된 것이 또한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생활 방법을 바꿔야겠다. 강의하던 시간을 책 읽는 시간, 작품 쓰는 시간으로 바꿀 작정이다. 그러면서 수료생들이 좋은 작품을 쓰기를 기도하고, 혜암아동문학 교실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돕고 싶다. 좀 더 일찍 강의를 시작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 준 혜암아동문학회원, 난방비, 온방비, 전기세 한 푼도 받지 않고 강의 장소를 마련해 주신 이은재 사장님. 수강생을 모집할 수 있도록 기사를 내 주신 매일신문, 영남일보, 대구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의 신문사, 교재를 알선해 준 신현득 박사 등 여러분께 머리 숙여 고마운 말씀 올립니다. 2013년 6월 15일 최춘해
끝에 붙이는 말
뚜렷하게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자살을 결심할 만큼 절실한 체험도 없었고, 커다란 포부를 이루기 위해 특별하게 노력한 것도 없다. 마음속으로는 늘 좋은 작품을 쓰고 싶었지만
내 재주가 없어서인지. 노력이 부족해서인지 역사에 남을 만한 작품도 못 썼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었지만 역시 마음뿐이다. 좋은 작품을 쓰고 싶은 마음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
<작가 탐방>
아동문학 강의 10년의 행복했던 날들
-최춘해 선생님과 함께
박종현: 문학강의를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무료로 하시,고 이제 후배한테 물려 주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 그만두었으며, 그 강의가 지금도 전처럼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춘해: 저의 어줍쟎은 일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목표를 10년으로 잡았습니다. 목적 달성이 되었으니 그만두었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작품을 못 쓰는 변명인 것 같습니다만, 강의에 몰두하느라 내 작품 쓰는 데 소홀했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라도 작품 쓰는 일에 마음을 모으고 싶은 뜻도 있습니다. 제가 강의를 할 때는 내 혼자 낮 반, 밤 반을 다 맡아서 강의를 했지만, 물려줄 때는 낮 반 강의를 맡은 사람과 밤 반 강의를 맡은 사람을 따로 정해서 두 사람이 강의를 맡게 했습니다. 우선은 내가 짜 놓은 프로그램대로 강의를 하고 있으므로 별로 변동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종현 : 요즘도 테니스를 하고 있는지요? 연세가 높으신 데도 정정하신데,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최춘해 : 아직도 미련이 남아 라켓을 못 버리고 있습니다. 공을 네트로 넘겨서 선 밖으로 나가지 않게 주고받는 게임인데, 그게 그렇게 재미가 있습니다. 힘도 약해서 세게 치지도 못하고 실수도 많지만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으로 라켓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매일 아침마다 테니스장에 나가서 세 게임, 네 게임 하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데, 지금은 체력이 달려서 하루 건너 한 번씩 구장에 나가서 한두 게임만 하고 돌아옵니다. 테니스 덜 하는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립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젊을 때부터 함께 다니던 등산 클럽 ‘산절로’와 함께 낮은 산을 오릅니다. 그리고 7월에는 북유럽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좋아하는 여행을 강의 때문에 못 하다가 강의를 물려주고 나서 바로 여행을 갔습니다. 여행을 하고 나서 여행 때 찍은 사진을 카페에 올리고 여행기를 정리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박종현 : 아동문학 강의 10년 동안 제자도 많이 길러내고 유능한 작가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강의를 통해서 보람이 있었다고 느낀 것은 어떤 것입니까?
10기 수료식 모습
최춘해 : 강의를 시작한 초기에는 박종현님 주간의 <아동문예>와 이재철 주간의 <아동문학평론>을 통해서 주로 등단을 했습니다. 등단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자 보람을 느끼고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박종현 주간님이 강의를 계속하도록 용기를 주신 분 중 한 분입니다. 처음에는 등단에 보람을 느꼈으나 등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성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도 사람 사는 이야기이므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먼저 사람다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답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흙의 마음이요, 동심입니다. 동심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이 통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밑바탕이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족끼리, 직장에서는 직장인끼리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쉽게 풀립니다. 그래서 사랑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를 했습니다. 모임을 알릴 때도, 행사가 끝났을 때도 항상 ‘우리는 정으로 산다.’는 말을 했습니다. 동시나 동화를 감상할 때도 주제를 사랑으로 유도하거나 사랑과 관련을 지었습니다. 동시나 동화를 쓸 때도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독자가 감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동심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 따라서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이 많아야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수료생들은 하나같이 정이 많습니다. 수료생이 등단을 하는 것도, 상을 받는 것도 좋지만 사람다운 사람,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가장 보람을 느꼈습니다.
박종현 : 선생님 강의가 다른 사람의 강의와 달랐다고 하는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최춘해 : 작품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생각으로 강의를 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방향을 함께 모색한다는 생각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본이 되는 것은 알뜰하게 지도를 했습니다. 보기를 들면, 우리말을 바르게 나타내려면 사전을 늘 봐야 하는데 사전 찾는 방법을 모르면 엉뚱하게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사전에 보면 ‘안절부절 못하다’로 돼 있습니다. 사전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안절부절’ 띄우고 ‘못하다’로 써야 맞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사전 찾는 법을 모르면 잘못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맞춤법, 시점, 수사법, 교정법, 원고지 쓰는 법 등은 학생 때 배웠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적습니다. 문학 공부를 할 때는 다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 기본이 되는 것을 글을 쓸 때 활용하도록 지도를 했습니다.
박종현 : 선생님께 배운 제자들은 행복했겠습니다. 제자들이나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최춘해 : 작품의 바탕에는 사랑이 깔려 있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사제간의 사랑, 동물 사랑, 식물 사랑, 자연 사랑, 이웃 사랑, 남녀간의 사랑 외에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상대와의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마음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 독자들이 공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는 개성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큰 상을 받거나, 평에 자주 오르내리고 여론에서 뜨게 되면 그 사람의 작품을 닮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남의 아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개성을 살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하기를 바랍니다.
박종현 :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것을 못 이룬 것, 꼭 하고 싶은 일은 어떤 것입니까?
최춘해 : 하고 싶었던 것을 못 이룬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제 그런 것들은 젊을 때의 사치라고 생각하고 내가 가졌던 것도 하나 하나 버리고 있습니다. 서제 하나 만들어서 책을 그득히 모으고 싶어서 알뜰히 모아 두었던 책도 문화원에 거의 다 기증을 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즐겁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읽고 싶었던 책을 시간이 없어서 못 읽은 책들이 많습니다. 다는 못 읽더라도 힘 닿는 데까지 책을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뚜렷한 작품 하나 못 썼는데,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 소원입니다.
박종현 : 좋은 말씀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건강하시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최춘해 : 어줍잖은 사람을 늘 챙겨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아동문예>가 영원무궁 발전하기를 빕니다.
박종현 : 고맙습니다. 계속 아동문학을 사랑하시고 후배들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