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튼 마살리스는 1961년 10월 18일에 태어나 12세 때부터 트럼펫을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뉴 올린즈 센터 포 크리에이티브 아츠(NOCCA)'에서 클래식 트럼펫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14세 때에 이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윈튼은 18세에 뉴욕에 있는 명문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을 하고, 같은해 여름에는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 메신저스에 입단하여 이미 당시 기존의 재즈 트럼펫터 누구라도 필적할 수 없을 만큼의 테크닉과 악상으로 커다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바른 연주 방법을 취하고 이었으므로 무리 없는 음색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어떤 어려운 프레이즈도 거볍게 불어 버렸으며, 작곡도 능숙하게 할 정도로 모드 주법을 베이스로 하는 능수 능란한 애드립을 구사하였다. 또한 그는 일반적으로 재즈 무지션들이 가지는 클래식에 대한 콤플렉스를 불식시킴으로 클래식과 재즈를 병행해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인 "퀄리티의 향상이야말로 제일 소중하다"라는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깊이 연구하였다. 인기가 높아도 결코 교만하지 않고 겸허했으며 그는 아직도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고 말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재즈 필드에서는 그의 출연을 계기로 젊은 주류파의 뮤지션들이 연이어 속속 출현하게 되었다.
70년대의 중반에 한때 그리니지 빌리지나 소호에서 번창했던 재즈 로프트 그룹들은 수년을 지나며 경영난으로 대개 소멸해 버렸으며 거기에 출연하고 있던 젊은 뮤지션들은 어디론가 가 버려다. 그들 중 아더 블라이스(as), 하미에트 블루이에트(bs), 블러드 울머들처럼 일부 인기 없는 재즈맨은 재즈 클럽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그외의 많은 플레이어들은 펑크 그룹이나 살사 밴드 등으로 몰려가 연주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에서 80년대의 새로운 평크 재즈 그룹들이 형성되고 또한 프레쉬한 재즈 사운드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 무렵 화제를 일으킨 매트리얼, 올리버 레이크의 점프 업 밴드, 바이올린의 빌리 뱅크 밴드 (멤버로는 로프트 출신의 프랭크 로우, 데이비드 머레이, 써니 메레이 등이 참가한다.), 오네느 콜맨의 프라임 타임 출신의 베이시스트 쟈말라딘 타쿠마, 전술한 블라드 울머 등의 연주는 평크 뮤직과 로푸트 재즈의 혼혈로 생겨난 재즈 터치의 '새로운 뉴욕 무직'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기기에는 매우 전위적인 재즈의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에 평크 뮤직, 레게나 댄스뮤직(디스코)등의 요소도 이입되었으며, 어느것이나 엔터테인먼트를 가진 약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파률러적 셩격이 강한 80년대적인 연주가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이들 음악은 셀루로이드 레코드사나 그래머비젼 레코드사에 의해 차례 차례로 출시되었는데 70년대의 일렉트릭 혹을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의한 퓨전 재즈의 반 작용일까 ? 80년대에 들어서 순수한 어쿠스틱 사운드로 재즈나 재즈 터치 음악이 급속도로 클로즈업되기 시작했다. 이미 70년대에 독일의 ECM 레코드사 녹음에 그러한 경향이 보여졌고 그 당시 키스 쟈렛의 연주는 그런 방향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였다. 윈드햄 힐 레코드사 작품에는 대자연과 조화를 추가한 아름답고 상큼한 어쿠스틱 사운드에 의한 연주가 속출하면서 이들은 미국의 풍토나 컨트리 (윈뎀 힐 레코드사는 샌 프랜시스코의 교외인 팔로 알토에 위치하고 있다.)와 밀착된 신시대의 음악(흔히 뉴에이지 뮤직이라고 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되었다. 이런 테크놀러지 시대에 마이너 레이블 답게 아티스트 스스로 만든 그들의 맛을 보여주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로프트게와 오네트 콜맨계의 뮤지션들이 활약하는 가운데 80년대에 또 하나의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스티브 콜맨이 이끄는 파이브 엘러멘츠 밴드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데 당시에는 펑크 재즈에 힙 합이라는 새로운 흑인 팝 뮤직이 등장했으며 그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적절히 통합 수용하면서 그 위에 또다시 애드립의 매력을 겸비한 음악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 음악의 필링이랄까 컨셉트가 지금까지의 재즈와는 상당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었다. 평키한 분위기가 넘치면서도 거기에 변박자, 복잡다단한 폴리 리듬 등의 세심한 배려가 서려 있었으며, 기세 등등한 리듬, 즉 컴퓨터에 메모리 시킨 리듬이 일반화되면서 컴퓨터를 이용한 시퀀셜한 리듬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간들의 연주에 기계적인 리듬이 이입되고 있다고 하면 될까? 또한 스티브 콜맨의 색소폰 솔로 프레이즈에서 보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기적인 분위기로 채우고 있다. 무기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연주에 소홀히 임하고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재즈의 맥이 정체된 것으로부터 인연을 끊어 버렸다고나 할까. 정신적인 면의 표출은 내재된 정신세계를 나타내 보였다 감추었다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톡한 음악 이론을 들고 나와 그 명칭으로 M-BASE(Macro Basic Array of Structured Extemporisations)파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들은 맨해튼을 근거로 삼을 일련의 뮤지션들이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 그들의 뿌리라고 해야 할 아프리카 토속 음악에서 근원을 찾고 각기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구축해 보자는 공동의 과제를 추구하는 뮤지션 집단으로 스티브 콜맨을 필두로 그렉 오스비(as), 게리 토머스(ts), 제리 알렌(P), 모빈 유뱅크스(tb), 카산드라 윌슨(v) 등이 함께 활동해 왔고 또 이들은 사회 비판적인 노래와 흑인 인권 운동에도 그들의 정서를 함께 했다. 특히 이들이 연주하는 음색의 특징은 전율을 느낄 정도로 다이내믹하고 때로는 흐느끼는 사운드에서 아프로-아메리칸의 절규를 느끼곤 한다. 특히 그들 중에서 카산드라 윌슨의 보컬은 3인의 여걸(빌리 할리데이, 엘라 핏제럭도, 새러 본)이 타계한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 갈 큰 재목임에 분명하다. 음악성은 다르지만 록과 평크, 블루스의 요소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장 폴 부렐리의 기타에도 기대해 보고 싶다
전술한 윈튼 마샬리스를 주축으로 한 뉴 스탠더드파와 M-BASE파의 전도가 사뭇 궁금하기만 하다. 90년대가 되어서는 80년대 이상으로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다. 재즈를 또다시 댄스 음악으로 취급하여 파퓰러 뮤직으로 춤추기 좋은 맛을 낸 에시드 재즈가 나오기도 하고 뉴욕의 라이브 하우스 '닛팅 팩토릴'에서는 장르를 초월한 아방가르드의 교류가 빈번이 행해졌으며, 빌 프리제(g) 돈 바이런(cl)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미국의 오랜 음악과 재즈와의 관련을 함구하고 있기도 하여 진정 한치 앞의 음악적인 경향을 점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재즈라고는 해도 순조롭게 어떤 새로운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 감흥이 느껴지는 반면 재즈 씬 전체를 리드해야 하는 강력한 움직임이 없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장해의 동향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을 할 수 없고 다만 역사적으로 확립된 연주 형태 중에서 얼마만큼이나 진지하고 솔직하게 애드립에 몰두 할 수 있는가. 재즈의 역사를 어떻게 바로 받아들이는가가 키 포인트가 될 것이다. 90년대를 정리하며 특기해야 할 몇가지 정황을 알아보고 재즈 입문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전술한 정황외에 피아노의 비르투오조 오스카 피터슨이 옛날 친구들을 모아 투어를 감행했다. 멤버로는 허브 앨리스(S), 레이 브라운(b), 바비 더햄(d)으로 '리유니온 퀴텟'이라고 불렀다. 이 그룹은 90년 3월에 뉴욕의 명문 클럽 블루 노트에서 라이브 레코딩을 했다. 이 앨범은 텔락레코드로 이적한 후 첫 번째 작품으로 발매되었으며 팬들의 호평에 힘입어 그 후에 이날 밤 녹음한 연주는 또다시 2매의 CD로 발표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 그룹은 뉴욕의 클럽 출연을 끝내고 일본의 블루노트에 출현하여 연일 초만원 사례로 청중들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한편 60년대에 존 콜트레인에게 인정받아 그의 그룹에서 활약, 주목의 대상이 된 테너 색소폰니스트 패로아 샌더스가 재부상했다. 그는 구미 각지에서 연주 홀동을 계속해 왔는데 콜트레인의 후계자로서 주목받은 것은 이미 20년 이상이나 되었다. 샌더스의 스피리추얼한 연주에는 정말 폴트레인을 방불케하는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고 팬들로서는 패로아의 재부상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90년 6월에는 일본의 알파 레코드에서 오랜만에 그의 앨범을 녹음하여 <웰컴 투 러브>라고 타이틀을 붙여 발매하였는데 라이크한 발라드 연주가 시공을 뒤어 넘어 환생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필링과 디테일을 보여 주었다.
80년대에 들어 여성 보컬계의 신인들의 활약이 전혀 눈에 띄지 않다가 훌륭한 개성과 창법을 구사하는 유망주가 데뷔했다. 오소독스한 재즈로부터 컨템포러리 곡까지 모두를 섭렵하고 있는 그녀는 다이앤 리브스와 다이앤 슈어를 이은 라셸 페렐로 90년에 일본 마운트 후지 재즈 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인 이래 본격적인 데뷔를 했지만, 그 이전에 도쿄에서 개최된 페스티벌의 발표회에서 보여준 경이로운 보이스 칼라의 열창은 관계자들의 절찬 속에 그들을 아연케 하기에 충분했다. 폭넓은 음역과 기교를 초월한 테크닉으로 재즈의 스탠더드를 불러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표현과 캐릭터를 제시하고 재즈 보컬의 세계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충분히 전달했던 것이다. 페릴의 데뷔작은 페스티벌에 맞추어 발매되었으며 커다란 호평을 받았다.
또한 천재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가 뉴 쿼텟을 결성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밴드에 재적할 때부터 전기 음향적인 칼라가 농후한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던 그가 이번에는 어쿠스틱을 지ㅎ향하는 그룹을 결성했던 것이다. 스코필드가 구성한 멤버는 조 로바노, 마크 존슨, 빌 스투어트였는데, 이 그룹은 몇차례 클럽 기교를 익힌후 블루노트에서 레코딩했다. 이녹음은 스코필드로서는그래머비젼에서 이적한 후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또 그가 이러한 그룹을 결성한 것은 레코드사와의 계약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그 수에도 멤버의 교체는 있었지만 스코필드가 이끄는 이 그룹은 90년대를 리드할 명그룹으로 전망된다.
비 밥 시대로부터 백인 테너 색소폰의 스타일리스트로서 활약해 온 스탠 게츠가 부귀의 몸이 되었다. 50년대는 쿨 스타일로 널리 인기를 모았으며 수많은 걸작을 발표해 온 스탠은 60년대 초 보사 모바 붐의 창시자로서 미국 파퓰러 무직 씬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었었다. 그 이후에도 독특한 테너 사운드로서 눈부신 활약을 지속했고 신인들이었던 게리 버튼과 칙 코리아를 스카우트해서 재즈 필드에 소개하기도 했다. 80년대에 들어서 부터는 암과 투병하는 바람에 자주 활동을 중단했으나 90년대를 전후해서는 비교적 컨디션도 회복하여 라이브 공연도 하고 레코딩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의 마지막 앨범은 케니 배런과의 듀오로 죽기 직전인 91년 3월에 코펜하겐에서 실황된 <피플 타임>이다. 게츠는 이 공연 직후에 급격한 신체적 불편을 호소하고는 나머지 작업을 취소하고 요양중에 6월 6일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또한 인기 드러머 잭 드죠넷이 이끄는 스페셜 에디션으로부터 믹크 구드릭(g)이 떠나고 대신하여 신인 키보디스트 마이클 케인이 참가했다. 그 외의 멤버는 종래와 같이 그렉 오스비와 게리 토머스,, 로니 플랙시코 등이 포진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 따라 밴드 사운드의 캐릭터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금까지는 곡에 따라 드죠넷이 키보드도 연주했었지만 전담 키보디스트가 영입되면서 그룹의 사운드는 더욱 이미지네이션이 강하게 되었다. 기타가 빠진것도 사운드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리고 신생 스페셜 에디션이 취입한 <이스 워크>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에게서 타이틀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대지의 온유함과 스케일의 방대함을 표현하면서 지금까지의 작품에는 없는 유니크한 내용을 시사하고 있다.
또 인기 높은 알토 색소포니스트 데이비드 샌본이 쾌조의 앨범을 발표했다. 전작인 <언아더 핸드>에서는 빌프리젤, 찰리 헤이든, 잭 드죠넷 등 시라어스한 플레이를 보여주어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그 작품에 이어서 신작 <업 프론트>에서도 60년대의 R&B와 평크 사운드에도 상통하는 어시한 플레이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리키 파터슨의 올갠 사운드가 베이스로 연계되는 소울풀한 플레이로 이것 또한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전향적인 자세는 그 후에도 여러 작품군에 연계되어 오고 있다.
재즈계의 황제로서 40년대 후반부터 50년 가까이 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며 재즈의 경향을 크게 좌우해 왔던 마일즈 데이비스가 90년 9월 29일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죽기 약 1개월 전까지 활동을 계속해 온 그는 70년대 이후는 재즈에 머무르지 않고 록과 소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는 연주를 했고, 만년엔 평크와 하우스적인 사운드를 자신의 뮤지션으로서도 주목받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남긴 최후의 스튜디오 녹음 앨범<두밥>에서는 이지 모비를 프로듀서로 기용하여 참신한 사운드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최후까지 흑인 음악의 최첨단에서 음악을 창조했던 것을 살필 수 있다. 말년의 마일즈는 점점 첨예한 블랙 뮤직에 심취하였고 늘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나 활동을 했었다. 유작 <두 밥>에서는 그러한 그가 진력을 하였다는 추측이 가능해 진다.
뿐만이 아니다. 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서 일세를 풍미한 퓨전 그룹 브렉커 브라더스가 대망의 재결합을 했다. 형 랜디와 동생 마이플의 형제를 중심으로 한 그룸은 92년 6월에 뉴욕 교외에서 리유니온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그 직후에 열린 JVC재즈 페스티벌에 등장하여 만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연이어 월드 투어에 나서고 8월에는 일본 마운트 후지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한 후 일본의 재즈 클럽 블루노트 도쿄에서 공연하였는데 이 클럽이 오픈한 이래 최고 입장자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투어에 앞서 녹음한 <리턴 오브 브레커 브라더스>도 베스트셀러가되었고 단순한 리유니온에 머물지 않는 활동으로 세계적인 화제를 집중시키는 일면 인기를 더 높이고 있다. 앞으로의 활약에 커다란 기대를 걸어본다.
쿠바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 곤잘로 루발카바는 유럽과 일본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90년에 몽트루 재즈 페스티벌에서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준 이후 그는 미국을 제외한 세계각지에서 라이브 공연을 해 왔다. 버드 파웰과 맥코이 타이너에게 영향을 받은 루발카바는 지금까지 그의 연주에 너무나도 짙은 라틴색을 혼합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점차 종래의 재즈 필링 속에 볼레로와 라틴 터치를 가미하고 새로운 맛을 표출시키고 있다. 앞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신세대의기수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잠시 일본 여류 재즈 피아니스트 오니시 준코에 대해서 알아보자 근년 일본의 신인 중에서 그녀만큼 주목을 받은 뮤지션도 없을 것이다. 재즈의 명문 보스터의 버클리 음악원을 나온 그녀는 뉴욕에 진출하여 게리 토마스와 케니가렛 등의 그룹에 참가했다. 어쿠스틱에서 일렉트릭까지 자유자재로 키보드를 연주하여 미국의 재즈 필드에서도 높이 평가 되었다. 리드믹한 터치에서 독특한 개성을 느끼게 하는 오니시는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파 여성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점도 각 방면에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실력도 상당 수준에 올라 있고 일면 자신의 음악 실력을 닦아 가고 있어서 금후 그녀의 탄탄한 장래가 보장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약 십수년 전에 윈튼 마살리스가 센세이셔널한 등장을 했지만 그 무렵에 필적할 만큼 화제를 불 바러 일으킨 것이 신인 테너 색소포니스트인 조슈아 레드맨이다. 아버지가 오네트 콜랜과 키스 쟈렛 그룹에서 활약했던 듀이 레드맨으로 그는 명문 하버드 대학 법학과 출신이란 특이한 커리어를 가진 뮤지션으로 91년에 실시한 셀로니어스 몽크 컨페티션에서 우승한후 미국 전역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스트레니트 어헤드한 재즈를 단골 메뉴로 하는 그이지만 스윙계의 연주에서도 근사한 블로우를 보여주고 짧은 활동 경력이지만 몇몇 레코딩에도 참가한 있으며 여기에 대망의 데뷔 앨범을 녹음하는 행운도 잡았다. 폭넓은 음악성을 가진 뮤지션으로 10년에 한 사람 나타날까 말까한 하는 그의 등장 이후 재즈 필드의 눈초리가 예의 심상치 않다.
이외에도 기라성같은 영 라이온들이 그들의 젊음과 패기를 앞세우고 기교를 초월한 테크닉,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정신과 허허로움이 있고 에모션할 줄 아는 지극함 속에 개호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재즈의 장래를 짊어질 필연 속에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은 고뇌하고 있고 대자유를 얻기 위하여 명상하고 있으리라 이 긴 항해에서 내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재즈는 계속 전진할 것이다. 아니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