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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시도행전 2:42∼47)
여러분, 담임목사님께서 안식월 휴가를 마치고 단에 서신 것을 뵈니까 든든하고 참 좋지요?
저도 좋습니다.
우선 설교준비를 매주 안 해도 좋게 되었으니까 좋고요, 담임목사님의 귀하신 설교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 더 좋습니다.
오늘은 사도신경의 다섯 번째 고백인 ‘성도의 교통’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가르쳐준 신앙고백’이라는 뜻인데, ‘우리들은 이와 같은 것들을 믿습니다’ 라고 연결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 두 번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세 번째는 성령, 네 번째는 거룩한 공회, 교회, 그리고 다섯 번째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줄여 말해서, 알기 쉽게 말해서 ‘성도의 교제’입니다.
이 다섯 번째 고백에서 중요한 단어는 ‘교통’입니다.
그런데 ‘교통’이라는 말을 살피기 전에 두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성도’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천주교의 사도신경 문제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사도신경은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여러분 한분, 한분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나는 성도다’ 라는 깨달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성스러울 성(聖) 무리 도(徒), ‘성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을 ‘풍속 속(俗)자’를 써도 ‘속도(俗徒)’라고 하지요.
‘속도’는 사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감리교회에서는 속회 회원도 속도라고 하는데 그럴 때는 한자가 다릅니다.
‘엮을 속(屬)자’를 습니다.
우리는 속도, 속된 사람, 세속에 젖은 무리가 아니고 성스러운 무리, 성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용산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전에는 ‘성도’라는 말이 “.기독교 신자를 높여 부르는 말”, 이렇게 풀이되어 있습니다만 교회에서 쓰는 성도라는 말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도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자에는 ‘구별된’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성소, ‘구별된 장소’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도를 진주조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주조개도 겉모습은 보잘 것 없습니다.
일반조개와 같습니다.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상처가 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액체를 분비하는데 그 액체가 진주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허물이 많고,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믿음으로 그 상처를 이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죄라는 큰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보잘 것 없는 껍데기 속에 구원이라는 진주를 지니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시편 16장 3절은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여러분과 저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시편 30편 4절은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 34편 9절은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여호와를 힘써 경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시편 97편 10절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보전하시어서 악인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잠언 2장 8절은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보전하여 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 6절과 7절에서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는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교통”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서 오늘 설교 준비를 거의 끝냈습니다.
마무리 작업을 하다가 문득 사도신경이 나를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가슴을 때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그렇지, 나는 성도지!’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성도라는 이름 말고, ‘성직자’라는 이름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힘써 설교 원고를 많이 손질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성도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들입니다.
나를 구별하여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도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말과 행동에서 ‘이것이 성도로서 합당한 말인가?’ ‘이것이 성도로서 합당한 행동인가?’ 물으며 그 답에 따라야 합니다.
주일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여기에 이르러서는 “나는 성도다” “나는 구별된 사람이다” “나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는 것을 새롭게 새기시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 옆에는 천주교 성당이 있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다른 점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도가 다르고 예배 형식이 다르고 용어들도 다릅니다..
사도신경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문장이 다르고 내용도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내용이 다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입니다.
천주교의 사도신경은 이 부분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통공’은 ‘공이 통한다’는 뜻인데, 천국에 가 있는 성인들이 그들이 이루어놓은 공덕, 선행 같은 것으로 지상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옥에 있는 성도들도 도울 수 있다고 합니다.
천주교는 천국과 지옥 말고 연옥이 있다고 말합니다.
연옥은 영혼의 대기소 같은 곳, 단련을 받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연옥이 있다고 하는 것도 개신교와 다른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신교는 성도의 교통, 성도의 교제를 강조합니다.
교통이라는 말은 ‘교제’와 같은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처음에 그리스말로 기록 되었는데 그리스어 ‘코이노니아(κοιννωνία)’를 ‘교통’이라고도 번역했고 ‘교제’라고도 번역했습니다.
성경과 찬송가 제일 앞에 있는 사도신경 밑에 ‘사도신경 새번역’이 있는데 거기에는 “성도의 교제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라는 그리스어는 교회에서 그대로 많이 쓰이기도 합니다.
지난 달에 “거룩한 공회와”에 대해 말씀드릴 때,, 교회에 대해 말씀드릴 때 1997년에 제정된 기독교대한감리회 신앙고백 제6항을 알려 드렸습니다..
우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으며
친교는 교제와 같은 말입니다.
지난 달에 교회가 해야 하는 일, 예배, 교육, 봉사, 전도와 선교에 대해 조금씩 말씀드리면서 “친교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달에는 성도의 교통에 대해서 살필 차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세요?
성도의 교제는 교회의 필수 요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도의 교제가 빠진 교회는 참다운 교회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교회는 성도의 교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교제의 모범을 보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서 탄생했습니까?
교회의 탄생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방언으로, 각 나라 말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말씀을 전하는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선포하고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과 우리가 어찌할꼬”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너희가 화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행 2:38중)
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4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왕성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의 첫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신약성경에 ‘교제’라는 말이 여기, 사도행전 2장 42절, 교회의 탄생에 대한 기록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그들이 교제하는 모습은 어떻하였습니까?
본문 가운데 44절에서 48절 앞부분까지에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이것을 줄여서 ‘유무상통의 공동생활’이라고 하지요.
그렇게 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47절 중간,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교회가 칭찬 대신에 비난을 받는 일이 많지요.
요즘 교회가 받는 비난 가운데는 억울한 것도 많고, 오해에서 오는 것도 많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하는 비난도 많지만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대교회는 교제를 통해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47절 끝부분,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가 날마다 부흥했습니다.
교회가 참되게 부흥한다는 것은, 교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외형적인 왕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천국 백성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초대교회의 이런 교제가 잘 살아 있습니까?
여러분, 한 교회당 안에서 예배 드리는 성도에 대해서, 옆자리에 앉아서 예배 드리는 성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어느 큰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옆자리의 성도가 누군지 모르고 그저 예배가 끝나면 인사도 없이 일어나서 헤어져버리고, 그렇게 하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인사를 나눠야 하겠다’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주일에 예배가 끝난 다음에 옆사람에게 “오늘 같은 자리에서 은혜로운 예배를 드려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무개입니다.”하면서 악수를 청했더니 그분이 매우 당황해 하면서 하는 말이 “혹시 돈 꿔 달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저는 ‘옆자리의 그 분, 혹시 교회에서 금전 관계로 피해를 입은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좋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잊지 못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중국이 1970년대 후반까지는 강한 폐쇄정책을 썼습니다.
그때 교회의 문이 닫혔기 때문에 성도들은 혼자서, 또는 몰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교회들을 가정교회라고 불렀습니다.
1978년 말에 개혁개방 정책이 선언되었습니다..
교회의 문도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외국으로 편지를 보내는 일도 허용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어느 선교방송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성도들이 그 방송국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설교와 찬송, 여러 교회의 예배실황을 잘 듣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중국 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중국동포가 한국에 왔다고 하면 기자들의 취재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교인이라면 이 교회 저 교회에서 힘써 모셔다가 간증을 들었습니다..
올해가 중국과 국교를 맺은 지 30년이 되는 해인데 국교를 맺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때는 ‘중국’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고 ‘중공’이라고 했지요.
믿음이 아주 좋은 중국동포 한 분이 왔습니다.
제가 “혹시 도와드릴 일이 없습니까?” 했더니교회 이름을 하나 대면서 “그 교회에 가서 예배를 한 번 드릴 수 있게 안내해 주십시오. 방송을 통해서 그 교회 예배 실황을 빠뜨리지 않고 들었는데, 목사님의 말씀, 찬양대의 찬양, 성도들의 ‘아멘’ 소리 이런 것들을 들을 때마다 천국처럼 여겨지곤 했습니다.”’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예배 시간, 찾아가는 법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나서 “예배 잘 드렸어요?” 했더니 볼멘소리로 “실망했습니다. 안 가는 것이 낳을 뻔했습니다”하더군요.
갔더니 2부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 성도들과 3부 예배에 들어가려는 성도들이 엇갈려서 혼잡했고, 그때 중국에서 온 분들이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 모습도 초라한 느낌을 주고, 낯설어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러나까 힐끗힐끗 보고, 인사하는 사람 없고, 여러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교회에 다녀온 것이 아니라 시장에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우리 중국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면 얼싸안고, 반가워하고 지난 주일에 안 나온 사람에게는 왜 안 나왔느냐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얼마나 염려했는지 아느냐고 하고, 예배를 마치고 헤어질 때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낭 때 그때까지 계십 바라네“ 이 찬송을 눈물을 흘리면서 부릅니다.”라고 하더군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얼마 뒤에 제가 중국을 방무나게 되었습니다.
한중수교 전에는 중국(그때는 '중공'이라고 했습니다)을 방문하려면 교육을 받고 여권에 '특정국가 방문 허가' 스탬프를 받아야하고, 까다로웠습니다.
중국에 가서 교회를 방문해보니 그 동포의 말 그대로 였습니다.
'여기가 천국이네!'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교회가 성도의 교제가 살아있는 교회, 살아있을 뿐 아니라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를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립보교회는 바울 사도를 기쁘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사랑의 교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에 힘쓰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기에 힘써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아주 구체적인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교회 가운데 예배 순서 가운데 특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소식 전하는 순서 뒤에 십자가를 보며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다음에 서로를 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고백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진심으로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실 때 마음속으로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교제의 첫 걸음입니다.
찬송가 가운데 성도의 교제를 주제로 한 아름다운 찬송이 있습니다.
많이 불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221장 “주 믿는 형제들”이라는 찬송입니다.
(1절)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2절)하나님 보좌 앞 다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 안에 하나라
(3절)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동고동락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
(4절)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참 감동을 주는 가사이지요.
이 찬송은 영국의 웨인스게이트에 있는 아주 작은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탄생했습니다.
작고 가난한 교회이어서 때로는 목사님 생활비를 감자와 양털로 드리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찬송가의 1절 가사와 같이 천국의 교제 같은 사랑의 사귐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존 포셋(J. Fawcett) 목사님이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진심으로 교인들을 사랑했고, 교인들은 목사님을 깊이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포셋 목사님이 런던의 큰 교회로부터. 은퇴하시는 목사님의 후임으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응낙을 했습니다.
이사하기로 한 날이 되어, 마차에 짐을 다 실었습니다.
떠나려고 하는데 이별을 슬퍼하면서 흐느끼는 교인들을 보니까 차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사모님이 못 떠나겠다고 했고 포셋 목사님도 자기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짐을 내리고, 청빙한 교회에 양해를 구하고 평생을 시골의 작은 그 교회에서 목회했다고 합니다.
그때의 일을 기념하기 위해 1782년에 이 가사를 썼다고 합니다.
감동적인 작품에는 감동적인 배경이 있는 법인데 이 감동적인 찬송가 뒤에는 성도의 교제를 바탕으로 한 이런 아름다운 배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성도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다운 삶을 살기에 힘쓰겠다’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성도의 교제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힘있게, 떳떳하게 고백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저희들이 믿음의 형제, 자매로서 주님 앞, 한자리에서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제가 부족했음을 주님께 고백하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 주님,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깨닫고 성도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성도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며 힘써 나누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을 떳떳하게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에 성도의 교제가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사회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구원 받는 사람이 날로 더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