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①
* 발해 선왕의 업적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고왕(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공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이를 거부하고 당으로 망명하며 양국 관계는 파탄이 았다.
무왕은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등주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이 때 신라는 당의 사주를 받아 김사란을 시켜 발해 남부 국경을 공격하였으나 추위로 실패하였다(733). 결국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737~793)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3성 6부 중앙 제도를 마련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756), 동경 용원부(785)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에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5경 15부 62주).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에서 압박해오고, 발해 내부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