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년 (태조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 광주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 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 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생 충녕이 왕이 된 이후에도 감찰 대상이 되긴 했으나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세종과는 지극히 우 애가 깊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가 있었지만 세종에게 한 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천 명을 누리다가 1462년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강정이 다.
효령대군
효령은 1396년(태조5년)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 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으로 그녀와 슬하에 6남 1녀,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한 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는 1407년(태종8년)에 효령군에 봉해졌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 되었다. 이 후 출가한 뒤에는 불도에 전념하여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였으며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하기도 했다.
1465년 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그 해 '원각경'을 수교하기도 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 종친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유생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 들의 보호 아래 꾸준히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시호는 정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