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겨울 안개
신외숙
겨울안개가 짙게 낀 어느날이었다.
새벽 댓바람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집을 나서 명식이네 밭을 지나는데 무언가 뒤통수를 당기는 느낌이었다. 돌아보니 명식이 형 철식이가 사병(士兵) 두 명과 함께 나를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불쾌감과 공포가 내 온몸을 뒤덮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들판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추수가 끝나버린 들판은 썰렁했고 간밤에 내려앉은 서리로 사방이 눅눅했다. 안개가 짙게 깔린 탓으로 사방이 부옇게 보였다. 일부러 지름길을 택해 논둑길을 걸었다. 논둑길이 끝나는 곳에 도랑물이 보였다. 살얼음이 끼어 그냥 건넜다가는 푹 빠지기 십상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두 팔을 번쩍 들고서 물을 건넜다.
곧바로 신작로가 나타났다. 그 길을 조금 지나자 현자네 구멍가게가 나타났다. 나는 그쯤에서 신발을 고쳐 신었다. 연대본부 쪽에서 군가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 소총 쏘는 소리도 들려왔다.
'으쌰 으쌰'.
군인들이 런닝 셔츠 차림으로 구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입가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산야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군가를 불렀다.
"싸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이 되었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가 뜨고 해가 질 때에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군인들은 나를 보자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어떤 군인은 휘파람을 불며 몸을 흔들기까지 했다. 냉기가 코끝으로 전해져 왔다. 진입로부터 학교로 통하는 입구는 온통 눈천지였다. 쌓인 눈을 치우지 않아 두껍게 층을 이룬 데다 응달이 졌기 때문이다. 소나무가 쌓인 눈 무게를 못 이겨 가지가 휘청한 채 늘어져 있었다. 안개 속에 멀리 교문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안개가 점점 내 뒤로 밀려났다. 교문을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외침이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시골 아이들은 인사도 군대식으로 한다. 거수 경례를 부치는 아이도 있다. 주변의 영향 탓이리라. 아직 이른 시각이다. 나는 천천히 교무실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아 앉는데 발끝이 시려왔다. 바로 눈앞에 현판이 보였다.
'서정쇄신'
군사정권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였다. 교장실에 들어가면 군 출신 대통령의 사진이 정면으로 보인다.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치르고 들어선 정권이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이 되면 데모대의 함성과 최류탄이 서울 거리를 메우곤 했다. 그들의 요구는 단 한가지였다.
'군사정권 퇴진'
군부독재 종식이 그들의 최대 과제였다. 데모대의 행렬 속에 좌경화 세력이 숨어 조종한다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광주에서 엄청난 인원이 총탄에 스러져 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데모 때문에 흉흉한 민심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졌다고 푸념할 뿐이었다. 내가 근무지를 이곳 최전방 지역으로 선택했을 때도 그랬다.
군 보안부대에서는 내 전력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다. 혹시나 운동권과 연루된 끄나풀은 아닌지 심지어 북과 내통하는 첩자는 아닌지 면밀히 조사했다. 내 친구 관계까지 낱낱이 조사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친구들에게 폐를 끼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도 소득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운동권에 관련될 만큼 사리분별에 밝지도 않았고 대담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소심증 환자였다. 게다가 피해망상에다 신경과민증에다 노이로제 증상까지 있었다. 그럴지라도 나는 돈을 벌어야하는 처지였다. 그러기에 일부러 낯선 고장인 이곳까지 오게된 것이었다. 이곳에 와서 나타난 현상은 생각이 조각모음을 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생각이 복잡한 나는 산만한 정신 때문에 잠시도 평안할 틈이 없었다.
걱정과 불안, 불길한 상상력이 늘 꼬리를 물고 달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팎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내우외환이었다. 집안은 고함과 울음소리와 함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큰오빠는 5.18 광주항쟁과 연루되어 구치소에 감금된 상태였고 그로 인해 풍비박산된 아버지의 사업체는 빚쟁이가 몰아닥쳐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심장병이 발발 툭하면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것도 꼭 일요일이나 공휴일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말했다.
"왜 하필이면 아파도 꼭 공휴일에 아파?"
기실은 없는 살림에 병원비 나가는 게 아까워서 그러는 거면서, 소심증 환자인 나는 큰소리만 들려도 지레 겁을 먹고 떨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어떨 땐 환청까지 들렸다. 나중에는 피해망상이 가중돼 정신병동에 입원할 정도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있었다. 그건 지인(知人)들과의 분리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를 알아 볼 이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몸과 마음을 숨겨버리는 것이었다. 즉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객지를 택한 이유였다. 또 한가지가 있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일년 동안 쉬고 있던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 밥벌이가 필요했다. 그러나 서울로 발령 나기엔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떠나는 게 급선무인 나는 가장 만만한 도서벽지형 학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척박한 산골, 금강산이 마주 보이는 곳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 가량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충 코스는 이러했다. 서울서 출발해 양평 강가를 계속 거슬러 올라 가다보면 홍천이 나온다.
내가 서울을 떠날 당시만 해도 홍천은 비포장 도로였다. 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1 시간 반 가량 지나면 인제가 나온다. 그곳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 신남리를 지나면 소양호를 끼고 아슬아슬한 주행길이 시작된다. 소양호는 한 겨울에도 결코 어는 법이 없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수심(水深)이 바로 그 증거이다. 차량은 빙판이 진 도로를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는데 천길 낭떠러지 끝 소양강은 수증기가 연기 기둥처럼 모락모락 강 언덕을 맴도는 것이다.
소양강을 끼고 구불구불 사행길을 지나면 인가가 보이기 시작하고 평지가 나타난다. 중간에 12개가 넘는 검문초소를 지나야 한다. 헌병이 소총을 들고서 직접 검문하는데 분위기가 여간 살벌한 게 아니다. 모두 주민증을 내보여야 하는데 특히 소양대교를 건너기 전에 가장 검문 검색이 심하다. 검문이 끝나고 소양대교를 건널 때면 악! 소리가 절로 난다.
다리 밑으로 펼쳐지는 강은 까마득히 멀다. 강 수면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수십 미터를 상회한다. 그 다리를 건너면 남면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바로 중앙에 검문 초소가 있고 양쪽으로 길이 갈린다. 왼쪽으론 읍내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최전방 지역 철책선이 보이는 해안으로 향하는 곳이다. 그 중간 기점에 내가 근무하는 직장이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온통 푸른색 일색이었다. 농지에는 벼와 푸성귀가 지천이고 군부대와 농민들. 우습게 표현하자면 그곳은 거주민들조차 군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할 정도로 온통 군 일색이었다. 여름에는 바람 한점 없이 무덥고 겨울이면 보통 영하 20도를 오르내렸다. 서울과 춘천이 3도 온도 차이가 난다면 춘천과 그곳은 역시 3도 차이가 났다.
그런가 하면 해안으로 통하는 대암산은 5월에도 눈이 펄펄 내렸다. 페치카를 두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곳에 도착해 정착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도 관사(官舍)를 차지하지 못한 나는 명식이네 뒷집 점순이네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근대식으로 지은 농가로 대문도 없고 펌프 하나에 텃밭과 울타리 없는 마당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집안이 온통 오픈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외부에서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넓은 마루에 방이 세 개였다. 주인집이 두 개 사용하고 부엌 옆방이 바로 내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나는 그 방안에 누워 날마다 서울을 그리워했다. 시골은 답답했다. 동네를 나서면 아무데도 갈곳이 없었다. 간단한 구경거리라도 찾기 위해선 읍내를 나가야 했는데 동네 언덕을 벗어나 고갯길로 올라가서 40분마다 한 대씩 오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늘 갇혀 지내다시피 하니 군대생활이나 진배없었다. 동네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읍내로 가면 "중학교의 옥선생이 외출했다더라"하고 소문이 났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도 한집 건너 소문이 나 발을 타고 날아다녔다. 동네는 토박이 주민들과 군인가족들이 뒤엉켜 인심이 사나웠다. 시골도 도시도 아닌 외지 인심이 스며든 탓이었다.
가장 힘든 건 대화 상대가 없는 것이었다. 직장에서 나는 제일 막내였다. 나머지는 나보다 보통 20년 연배였다. 나이 차이는 곧 세대차이로 이어졌다. 도시와 시골의 인식 차이도 너무도 컸다. 대표적인 것이 남존여비 사상이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버린 동네는 노인네들만 득시글댔다. 아이들도 가정조사를 해보면 모친 가출이 많았다. 도시와 시골의 문화차이도 격심했다.
나는 그 차이 속에서 항상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을 그리워했다. 늘 도시의 기운을 떠올리면서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새록새록 살아났다.
학교 앞 다방 엘리뜨.
봄 축제 기간만 되면 우리는 짝짓기 미팅을 하느라 뻔질나게 드나들었었다. 미팅에서 성공하면 파트너와 함께 명동에 있는 학사주점에 술을 진탕 마시고 취했다. 신촌 네거리 우산속 디스코텍, 종로3가의 국일관, 그런가 하면 무교동 낙지골목과 쎄시봉 디스코텍도 자주 갔다. 당시 무교동에는 국제극장 뒤로 가수 김정호가 운영하는 '꽃네'라는 경약식점이 있었다.
폐병 말기 증상에 시달리는 김정호가 가쁜 숨을 쉬며 몰아쉬며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난다. '하얀나비'를 부르며 김정호는 가는 손가락으로 기타줄을 퉁겼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영원히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렇게 명동과 종로 무교동을 쏘다니면서 끝없이 낭만이라 외쳤다. 술집에 모여 부라보를 위치면서 '술은 인류의 적 마셔서 없애버리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다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운동권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 주류였던가. 비주류였던가. 이상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심하고 기죽어 지내면서도 그런 자리는 빠짐없이 참석했던 걸로 보아 주류의 입장에 서고 싶어했던 건 분명하다. 나는 방안에서 뒹굴면서 고작 그런 상상놀음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 서울에의 향수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봄 학기가 시작되면서 충청도에서 총각선생이 전근해 왔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렸고 시골 태생이라 그런지 완전 순진무구였다. 부끄러움을 잘 타면서도 나만 보면 쭈볏쭈볏 다가와 말을 붙였다. 얼굴이 발그래지면서. 처음에는 잘 몰랐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음을.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초여름날이었다. 후텁지근한 공기를 씻어 내리려는 듯 맹렬한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데 처음에는 TV에서 나는 소린 줄 알았다. 창문을 열었더니 당장 빗물이 방안으로 몰아쳤다.
얼결에 방문을 열고 그를 맞아 들였다. 그가 우산을 탁탁 털고 나서 말했다.
"여적 안 주무시고 뭐한 거래요."
TV에서 애국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어 지직 거리며 화면이 정지됐다.
"여기 수건에 발 닦고 어여 들어와요, 그런데 이 야심한 시각에 웬일이래."
"웬일은 무슨…… 총각이 처녀 보고 싶어 찾아 왔지요."
순간 가슴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채선생 술 마셨어요?"
목소리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컸다.
"왜 이래요, 누가 들으면 어떡하라구요."
"뭐요?"
그가 주춤거리며 방 윗목에 앉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나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옥선생님은 여기가 좋대요? 어쩌다 서울서 이 먼곳까지 왔대요?"
"좋기는 뭐, 그러는 채선생은요?"
"나야 뭐, 고향서 농사짓다 왔지요."
"뭐요 농사짓다 와요."
나는 단박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농사짓다 온 게 뭐가 그리 우스워요."
그는 약간 화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얼굴에 고민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부쳤다. 한모금 깊게 빨아 당기는데 표정이 이상야릇했다. 그때였다. 밖에서 두런거리며 말소리가 들렸다.
"옥선생 옥선생 자?"
교무주임 김찬옥이었다. 교사들 사이에서 시어머니로 통하는 엄격하고도 대가 센 여자였다. 나와 채선생은 동시에 얼굴이 얼어붙었다.
"이를 어쩐대요."
채선생은 거의 울상이었다.
"들어가도 돼?"
김선생이 당장 문을 열 듯이 말했다.
"네에 선생님, 잠시만요."
나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채선생에게 손짓했다. 어서 뛰어서 나가라는 표시였다. 채선생은 엉겹결에 창문을 넘었다. 쿵소리가 났다.
방문을 열며 내가 말했다.
"김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통행금지도 다 됐는데."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런데 이상하다. 방금 누가 왔다 간 거 같은데."
"네? 누가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소심증 환자가 그렇지 뭐.
김선생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들어오다 보니까 신발이…… 뭐 같은 신발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보다도 말야 나 내일 새벽에 춘천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무슨 일 있으세요?"
"응, 남편이 이번에 도지사로 승진했거든, 내일 취임식이야."
그녀는 자랑스러운 듯 표정이 한껏 고무돼 있었다. 그동안 말하고 싶어 어떻게 참았을까.
"축하드려요 선생님,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네요, 여적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나야 진작에 말하고 싶었지, 그런데 남편이 입조심 시켜서 말야, 내가 교감선생님께는 낮에 말씀드렸어, 내 대신 수업에 들어가 줄 수 있지?"
"네, 그럼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중요한 이야기를 이 한밤중에 찾아와 할 게 뭐람. 낮시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난 안 가려구 했어."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애들 아빠니까 가는 거라구, 그렇지 않음 어림도 없지."
김선생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까는 도지사로 승진했다며 자랑스러워하더니 지금 하는 저 소리는 또 뭔가. 상반된 현상에 나는 또다시 어리둥절했다.
"뭐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내일 수업이나 잘 부탁해."
김선생은 방안을 한번 휘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옥선생 담배 피워?"
"네?"
순간 얼굴이 화톳불처럼 달아올랐다.
"애들처럼 불장난하지 말고 조심해, 불조심 남자 조심 알았어?"
그녀는 의심스런 표정을 잔뜩 짓고 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재떨이를 들고 부엌으로 가 아궁이 속에 털어 넣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펌프가에서 세수를 하는데 점순이 엄마가 다가왔다.
"선생님 어젯밤에 누가 왔다 갔대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궁이 속에 웬 담배 꽁초가 그리 많대요?"
아뿔사. 신중하지 못한 나의 행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아이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담배는 나가서 피우는 게 좋을 것 같네유."
이번에는 아예 얼굴에 모닥불이 확확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서 커피를 끓여 마시고 있을 때였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채선생이 다가왔다.
"저도 커피 한잔 타 주실래요?"
기가 막혔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것이.
"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신 거예요?"
나는 일부러 채선생을 아래위로 훑어 내리며 말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마치 자기 애인이나 아랫사람에게 하듯 했다.
"왜 그래요, 잘 알면서."
"알긴 뭘 알아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교감이 나타났다.
"어이, 처녀 총각 선생, 분위기 좋구만 단 둘이서 여기서 뭐하는 거야?"
채선생이 싱글벙글 웃으며 농을 받았다.
"처녀 총각 사이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래요?"
"그렇지, 사랑엔 국경도 없다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 그것도 겨우 두 살 차이 갖고."
교감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 옥선생이 말을 안 들어?"
그는 채선생을 향해 눈을 찡긋 하더니 손바닥을 옆으로 뒤집었다. 거기에 힘을 얻은 채선생이 말했다.
"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완전 쑥맥이라 그거래요, 잘 알잖아요."
"알긴 뭘 알아?"
나는 그에게 주먹을 보이며 눈을 부라렸다.
"아하! 왜들 이러시나, 우리 학교에 단 한쌍밖에 없는 처녀 총각께서 잘들 지내지 않고. 그저 어린 것들은 할 수 없다니까.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교감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채선생이 부임해 오고 나서 교무실은 잠잠할 날이 없었다. 별별 해괴한 농담이 오가질 않나, 아예 나중에는 채선생과 나를 연인이나 부부처럼 둔갑시켜 말하기도 했다. 점순이네 집에서 6개월쯤 지나고 났을 때 관사에 자리가 났다. 관사에 살던 교무주임 선생이 드디어 사표를 내고 춘천으로 간 것이다. 남편의 내조를 위해서 30년 동안 지켜온 교직을 버린 것이다.
어느날 직원종례를 하다 말고 교장이 말을 꺼냈다.
"관사에 드디어 자리가 났다 이거지, 어이 채선생과 옥선생."
"네?"
채선생과 나는 동시에 대답을 했다.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이. 교장은 모두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거 교무주임이 쓰던 관사 말야, 방이 두 칸이고 하니까 하나는 채선생이 쓰고 그 옆방은 옥선생이 쓰는 게 어때?"
그 말에 직원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 것이다.
"말야, 낮에는 학부형들 눈도 있고 하니까 따로 지내다가 밤에만 합방하는 거야, 어때 내 제안?"
그는 눈 하나 까딱 안하고 농담을 했다. 채선생이 좋아서 배를 쥐고 웃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할말을 모르는데 체격이 건장한 체육선생이 말을 받았다.
"둘 다 어리숙한 데다 쑥맥이 되어서 합방하려면 한참 걸려야 될 거예요."
"뭘 알겠어요, 아직 어린애들인 걸요."
어느새 교감선생이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위험천만한 농담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했다. 그러고 나서 꼭 채선생을 향해 말했다.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구, 알겠어."
아예 코치까지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귀엣말로 했기 때문이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면 채선생은 안달이 났다.
"저기요, 읍내에 새로 생긴 경양식점과 영화가 들어왔다는데, 같이 가실래요?"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채선생은 화가 났는지 재차 말했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대요? 왜 대답이 없대요."
나는 정색을 하고 나서 말했다.
"전, 연하는 별로 취미가 없거든요, 그리고 서울 가면 저 기다리는 사람 많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러니 그만 괴롭히라고요."
채선생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걸작이었다.
"골키퍼가 있다구 골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요."
기가 막혀서. 나는 그의 등뒤에 대고 말했다.
"다시는 밤중에 나 찾아오지 마세요."
"안 가요, 안 간다구요."
나는 무슨 말이든 그대로 믿는 습성이 있었다. 퇴근하고 나면 관사로 들어가 아예 푹 파묻혔다. 읍내에서 사 나른 술병이 나날이 늘어났고 저녁이면 열린 창문 틈으로 담배연기가 빠져나갔다. 창문 밖은 텃밭이었다. 고추밭과 옥수수밭이 교장 관사까지 늘어져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잡풀이 자라 호랑이가 새끼를 칠 정도였다.
나는 서울을 떠나 혼자 기거하는 동안 마음이 담대해져 갔다. 우선 악다구니로 가득 찬 집안 꼴을 보지 않아 노이로제 증상이 사라졌고 모든 걸 혼자 결정하다 보니 이기심만 증폭되었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모든 걸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했다. 남을 배려한다거나 이해하는 마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소심증으로 자주 발생하던 심장병도 어느덧 사라지는 듯했다.
그 틈을 타고 누군가 내게 찾아와 말했다.
인생을 네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살아라. 낯선 감정과 새로움에 눈떠라. 나는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낯선 감정에 몰입했다. 주말이면 아예 읍내에 나가 살았다. 좁은 읍내 바닥을 다 휩쓸고 다니면서 술집 이름을 다 통달했고 장이 서는 날이면 하루종일 마실을 다녔다. 그때면 꼭 읍내 여고에 있는 여교사들과 합류했다.
어떨 땐 경찰서에 근무하는 여직원들과 합류한 적도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후미진 술집에 모여 군사정권을 야유했고 그러다 군인들이 보일라치면 서로 입막음을 하느라 바빴다. 영화관에 틀어박혀 철지난 영화도 감상했고 그것도 시들해지면 시외버스를 타고 인제나 홍천으로 나갔다. 그곳도 군 주둔지대이긴 했지만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었다.
왜냐하면 아는 얼굴과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홍천이나 인제에 가서는 더 대담하게 놀았다. 분위기 좋은 경양식점에서 군 장교들과 그룹미팅을 했다. 모두 육사 출신들이었다. 미팅 주선은 읍내 여고에 근무하는 홍선생이 맡았다. 그녀는 20대 후반으로 미모였다. 사교성도 뛰어나고 사리분별에도 밝았다. 모두 그녀의 명령에 따라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뒤탈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미팅을 할 때마다 파트너에게 에프터를 하는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여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술집에서 팝송을 들으며 한바탕 진하게 마시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장교들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경계하느라 바빴다. 소문이 상부에 전해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눈치였다.
장교들과 여교사들이 서로 어울려 술판을 벌이고 그렇고 그렇다더라.
술에 취해 객지 거리를 걸으면 세상은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낯선 건물, 낯선 골목, 이질적인 분위기의 시외버스 터미널, 그 앞을 우리는 휘적휘적 걸었다. 그러다 관공서 앞을 지날 때면 저절로 긴장이 돼 쭈볏거리기도 했다. 어떤 여교사는 술을 더 마시고 나이트클럽에 가 춤을 추자고 제안했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수업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만남이 끝나면 장교들은 각자 자기가 속한 부대로 귀속했고 여교사들은 시외버스를 타고 학교 관사로 돌아갔다. 그것은 반복될 때마다 묘한 쾌감과 함께 낯선 감정을 일흐켰다. 낯섬은 점차 타락한 감정으로 변해갔고 나는 어느덧 직원들의 농담에도 익숙해져 갔다. 그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염려하던 결과이기도 했다.
내 방에서 나가는 술병이 나날이 늘어갔다. 재떨이에 쌓이는 담배 꽁초도 늘어났고 외로움도 늘어났다. 해가 바뀌고 나자 내 얼굴 표정이 사납게 변해져 있었다. 말투도 거칠어졌고 전에 없었던 대인기피증마저 생겨났다. 그러나 그것을 발표할 수는 없었다. 속으로 삭이자니 죽을 맛이었다. 또다시 내부에서 조급증이 일며 다짐이 터져 나왔다.
떠나자, 이 곳을 떠나버리고 말자.
남편이 도지사로 발령 난 뒤 떠나간 교무주임 대신 새로운 교사가 차출돼 왔다. 그는 40대 중반으로 얼굴에서부터 카사노바 기질이 농후했다. 그의 자랑은 늘 한가지였다. 40평생 벌여온 여자들과의 엽색행각이었다. 직원들의 회식 자리가 있는 날이면 그의 화려한 여자 경력은 날개 돚친 듯 남자들 입가에서 팔려 나갔다.
"십 년 전엔가 내가 사북에서 근무할 때였지, 탄광촌이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 수업 중에도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이 밖으로 우르르 달려나가는 거야, 갱도가 무너져 내렸다는 신호였지, 아버지가 광부인 아이들은 울고 불고 난리가 났지, 대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았어, 얼굴 예쁜 깔치들도 많았지."
그는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 말했다.
"그런데 그 탄광촌 학교에서 근무할 때 말야, 나를 좋아하는 처녀 선생이 둘 있었는데 말야, 내가 어떡케 했겠어?"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튀어 나왔다.
"뭐 어떡케 해? 따먹었겠지."
교무주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관에 데리고 가서 자고 난 뒤 여관비 계산하라고 했지."
"잘했네 뭐, 지가 좋아서 잤는데 뭐."
남자들은 서로 술을 권커니 자커니 하면서 음담패설을 이어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교무주임이 생각난 듯이 말했다.
"어이 옥선생, 나 좀 봐."
갑자기 그가 나를 호칭하는 바람에 나는 기절할 뻔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가 술 한잔 줘도 괜찮겠지."
"저 전."
"왜 그래 저녁마다 관사에서 술병 비우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어느새 다가온 그가 내 잔에 술을 따르며 손목을 쥐었다.
"저 교무주임 선생 또 발동 났구만."
체육선생이 비아냥거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채선생의 눈빛이 꿈틀거렸다. 나도 모르게 채선생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교무주임의 손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한쪽 손은 여전히 손목을 감싸고 있고. 채선생이 다가왔다.
"선생님 제 술 한잔 받으시죠."
그가 소주를 잔에 가득 부었다. 소주잔이 아닌 맥주잔이었다.
"자아 쭉 한잔 들이키시고."
채선생이 교무주임과나 사이에 끼어 앉더니 내게 눈짓을 했다. 빨리 도망치라는 신호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졌다.
"어이 옥선생 어딜 가는 거야, 내가 따라주는 술 한잔 받아야지."
나는 못 들은 척 밖으로 나왔다. 급하게 신발을 구겨지고 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씨팔.
나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아니 선생 입에서 씨팔이 웬말이래요? 남사스러워서 못 들어주겠네."
어느새 나왔는지 옆에서 채선생이 말했다.
"저 인간들 선생 맞아?"
나는 아직도 술판이 벌어져 있는 쪽을 향해 일갈했다.
"꼰대들이 다 그렇지 뭐, 이러지 말고 우리 단둘이서 한잔합시다,"
그날 채선생과 나는 장소를 장터 구석진 술집으로 옮겨 한잔했다. 아니 엉망진창이 되도록 대취했다. 혹시라도 학부형과 마주치게 될까 봐 일부러 구석지고 후미진 곳에서 마셨는데 다음날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그것도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녀석들은 소문을 학교와 이웃 읍내에까지 퍼뜨렸다. 소문의 내용이 기가 막혔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채선생의 반응이었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런데요. 저러다 말겠죠."
"뭘 저러다 말아요? 녀석들이 저를 두고 뭐라 하는지 아세요?"
"뭐요? 우리 둘이 잤다구요?"
그는 태연한 듯이 말했다.
"채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아무렇지 않음 어떡하겠어요. 우리 둘이 아무 일 없었음 됐지."
그러다가 그는 혼잣말로 말했다.
"내가 하고 나서 그런 말을 들음 덜 억울하지."
"뭐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뭘요,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안 그래도 소문 때문에 다 잊고 지냈던 노이로제 증상이 살아날 판이었다. 학부형들의 눈치도 심상치 않았고 직원들은 아예 채선생과 나 사이를 결혼을 앞둔 연인사이처럼 비약시켜 말하기까지 했다. 읍내 교육청에 다녀온 교감이 말했다.
"야! 소문 빠르대, 읍내에 있는 여고에까지 소문이 훤하대, 우리 동기들은 물론 애들도 다 알아, 날 보더니 그러는 거야, 어이! 거기 교사부부 탄생하게 되었다며."
교감은 싱글벙글이었다.
"이거 소문 더 이상 번지기 전에 빨리 국수를 먹여 주던가 해야지, 안 되겠어, 채선생 양쪽 집안 상견례는 언제할 거야?"
나는 아예 대화 대상에서 제외시켜 놓은 듯 채선생하고만 말했다.
"녀석들이 어찌나 집요하게 묻는지……."
말투는 곤혹스러운데 표정은 싱글벙글이었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오신다는 걸 겨우 말렸지 뭐예요."
"아니 왜?"
"아직 준비도."
"준비는 무슨 준비?"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채선생의 멱살을 쥐고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날 뭘로 보길래."
"왜 이런데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이들이 지나가다 말고 흘끔거렸다.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대고 웃었다.
"제가 이따 찾아뵐께요."
아이들이 계속 따라오며 웃는 바람에 나는 거기에 신경 쓰느라 그의 말은 잊어 버렸다.
밤에 자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까 아무리 궁리해도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둘 다 다른 곳으로 전출돼 가는 것이다. 하지만 때가 일렀다. 아직 초여름인 것이다. 더구나 채선생은 부임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의 인생에 얽매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씨팔 재수없으려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욕설에 깜짝 놀랐다. 습관처럼 벽장문을 열고 술병을 찾아 마시고 있는데 방문 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불을 한쪽으로 밀어 넣으며 급하게 소리쳤다.
"누구세요?"
"옥선생님 주무신대요?"
채선생이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왜 또 왔어요."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방문을 열며 내가 말했다.
"할말이 있음 낮에 할 것이지, 지금이 몇 신데 당장 돌아가요."
"싫어요."
기가 막혔다. 하도 기가 막혀서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진작부터 그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채선생이 이미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꾸짖듯 말했다.
"밤에 여자 혼자서 술이나 마시고……."
"그게 채선생과 무슨 상관이에요."
"왜 상관이 없대유, 옥선생 술꾼이라구 읍내에까지 소문이 파다한 거 알아요 몰라요."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러니……."
"그러니 뭐요?"
"이쯤에서 마음 정리하고 다음주에 저희 어머니 만나러 같이 가자구요."
나는 그 순간 너무 기가 막혀서 쓰러질 뻔했다.
"나야말로 옥선생 때문에 장가도 못 가게 생겼단 말예요, 소문이 다 나버려서."
"순진한 척하고 하고 있네 누가 그 속 모를까봐."
드디어 내 입에서 막말이 나왔다.
"소문 핑계대지 말고 오늘밤 결판냅시다."
"어떻게요?"
채선생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그만둘까요, 아님 채선생이 떠날래요."
"네에? 그게 무슨 말이래요 그만 두다니."
"내가 보니까 채선생은 그만 둘 형편이 안 되니까 제가 떠날께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래요?"
그는 거의 울상이었다.
"제가 사표 내고 떠난다구요, 아시겠어요, 더 이상 이런 촌구석에서 버틸 자신이 없다구요."
"그럼 교사 자격증 저절로 박탈되는 거잖아요."
"어차피 난 교사 체질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나는 순간에 모든 걸 다 결정해버리고 말았다. 한번 쏟아낸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나는 누구보다 그 말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채선생이 술병을 잡으려고 했다. 나는 술병을 빼앗아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당에 한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아버렸다. 채선생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돌아갔다.
그는 다음날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하며 만류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아니 마음이 흔들릴까봐 서둘러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내 사표는 정식 수리됐고 나는 그 힘든 객지를 떠나오고 말았다. 떠나오기 전날 직원들이 송별식을 해 주었는데 하나같이 채선생을 걱정하는 말뿐이었다.
후임지도 없이 교사자격증까지 내놓고 가는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그때도 남자 직원들은 입버릇처럼 음담패설을 지껄였다. 그건 그들의 생활의 일부이자 재미인 모양이었다. 그중에서도 교무주임과 체육선생이 말이 기가 막혔다. 연대본부가 보이는 앞길에 이르러 교무주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젊었을 적 군대시절의 일이야, 구보에서 낙오돼 혼자 산길을 걷고 있을 때였어, 산 속에 외딴집이 보였어, 가까이 가니까 여자 고무신이 보이는 거야."
"그래서?"
체육선생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옳다 여자가 있구나 싶었지."
체육선생이 마침 길을 지나는 군 지프를 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음, 재미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겠지."
"그래서 방문 가까이 갔는데 아뿔사 여자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늙은 어멈도 있더라 그 말이었지."
"그래도 확 덮치지……."
"예끼 이 사람.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순간 살의(殺意)가 욕구처럼 안에서 치솟았다. 소리 안 나는 총이 있다면 당장 탕! 쏴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저런 인간들을 남편으로 믿고 사는 여자들의 심경(心境)은 어떤 걸까 몹시 궁금해졌다. 세상에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그렇지 어디서 저런……. 나는 그들의 말을 엿들으며 떠나기로 한 내 결정을 두고 두고 자찬했다.
마지막 날, 채선생은 내게 작은 선물을 주었다. 순금으로 만든 십자가 목걸이였다. 일부러 홍천까지 가서 만들어 온 거라 했다. 그는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애써 설명하려 들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그냥 귀찮은 듯 외면해버렸다. 아무 대책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객지생활을 시작한 지 만 2년만이었다. 추풍낙엽이 객지의 산야를 막 물들기 시작한 깊은 가을이었다.
가족들에게 나의 출현은 반갑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당장 돈줄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의 병세가 나날이 심화돼 환자를 돌볼 손길도 필요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가정부 신세로 전락했다. 간병인도 되어야 했고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일각이 여삼추요 사는 게 생지옥이었다.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고문과 옥고를 치르고 나온 오빠는 거의 식물인간이 되다시피했다.
집안에 돈버는 사람은 없고 환자는 양쪽에서 죽는다고 앙앙대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또다시 노이로제 소심증 강박증이 시작되었다. 옆에서 피해의식을 부추기는 사건도 연이어 발생했다. 이따금씩 환청도 들려왔다. 영(靈)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리테스트를 해보니 정신분열 초기증세였다.
오빠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못해 자살을 시도했다가 더 큰 곤경에 봉착했다.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귀신이 나타나 괴롭힌다며 난리 굿을 쳤다. 보다 못한 여동생은 가출해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구실로 집을 나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래저래 죽을맛이었다. 딱 자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강이 없는 내 삶은 저주에 가까웠다.
만일 신(神)이 계신다면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해 수없는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다 원망의 화살을 퍼부었고 그러다 혼미한 영에 휩싸였다.
"떠나고 싶다, 어디론가."
나는 주문을 외우듯 시간만 나면 자신에게 외쳤다.
차라리 떠나자, 나를 알아볼 이가 없는 먼 곳으로. 가서 죽은 듯 엎드려 살다가 이 세상을 조용히 떠나자. 단 하루만이라도 마음 편히 살아보자.
아무리 평강을 간구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느날 꿈속에서 채선생이 나타났다. 그가 현실처럼 말했다.
"옥선생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대요."
나는 묵묵부답으로 대신했다.
"전 선생님 떠나고 나서 한동안 너무 힘들어 죽을 뻔했지요, 그러다 교무주임 선생과 함께 읍내에 있는 교회에 나가요."
나는 너무 뜻밖이라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채선생은 나를 향해 눈물을 글썽였다. 꿈에서 깨어났는데 너무나 생생하게 꿈 내용이 생각났다. 교회라니…… 더구나 천하의 호색한 교무주임과 함께 교회라니…….
엄마가 단말마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낌새를 알아 챈 것일까. 건넌방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오빠가 나타났다.
"어 엄마."
엄마는 나와 오빠에게 손을 내저으며 안타깝게 울었다. 마침 집에 와 있던 이모가 임종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는 교회로 달려가 목사를 모셔왔다. 간단한 기도와 찬양을 마치자 엄마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하직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동안 소식불통이었던 아버지와 여동생이 돌아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벽제에 있는 용미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자마자 모두 제 갈길로 흩어졌다.
이상한 건 엄마가 사라지자 오빠가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밥술도 제대로 뜨지 못했는데 그동안 못다 한 영양보충이라도 하듯 마구 퍼먹어 댔다. 정신도 차츰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점차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일거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그동안 세상은 군사정권이 사라지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내 나이도 어느덧 30대 중반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결코 노는 법이 없었다. 집안살림을 하면서 저녁이면 학원강사로 뛰었고 그나마 여의치 않으면 옛 기억을 뒤적여 소설을 썼다. 겨울안개처럼 희미한 기억을 허구라는 거짓말을 잔뜩 묻혀 사실처럼 꾸며내는데 성공했다. 등장인물도 다양했다. 때론 채선생이 교무주임과 바꾸어가며 등장했고 홍천이 단골메뉴로 등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제는 항상 떠남이었다. 인생은 항상 떠남의 연속이다. 새로움을 향한 동경과 고통스런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떠남을 시도하는 것이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지만 그걸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정신적 방랑을 꿈꾸었고 무관심의 사각지대에 들어갔다. 스스로.
그 무관심의 사각지대에서 병고를 치르느라 거의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빼 나오다가 들치기에게 걸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은 뻔한 적도 있었다. 파렴치한 친척에게 애써 모은 돈을 떼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우연과 필연이 번갈아 발생하면서 세월의 고마움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꿈이 현실로 나타나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채선생을 경동시장 입구에서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40대 중반이 되어 머리가 약간 벗어져 있었다. 처음엔 그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고 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본 것도 그가 먼저다. 그가 시장 입구 난전에서 생선을 고르고 있는 내게 다가와 "옥선생 아니래요?" 했을 때도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가 내 양팔을 잡고 자꾸 "저 채선생이래요 아직도 기억이 안 나세요?" 재차 말했을 때 희미하게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각진 얼굴에 뱁새처럼 쭉 째진 눈이 옛날과 똑같았다. 그러고 보니 살이 많이 쪘다. 옛날엔 마른 체격에 양쪽 다리를 벌리고 팔자 걸음을 걸었었는데. 그는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시장 바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래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아졌다.
"그런데 아저씨가 다 됐네, 살이 쪄서 꼭 하마같네."
나는 말을 해놓고 나서 스스로 기가 막혀 웃었다.
"야! 안 죽고 살아 있으니까 다 만나게 되네요."
그와 달리 나는 별 감격이 없었다. 원래 정이 없고 살가운 성격이 아닌 탓도 있지만 내 현재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자리를 인근에 있는 커피숍으로 옮겼다. 그는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몇이나 두었대요? 남편은 뭐하시는 분이고요?"
그는 한꺼번에 질문을 내쏟더니 자기 이야기를 했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교사들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세월이 이십 년 넘게 흘렀는데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교무주임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어느날 아내에게 전력을 다 들키는 날이 왔다고 한다. 결혼 전은 물론 결혼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엽색행각을 벌였던 그는 이혼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모면할 구실을 찾았다고 한다.
그건 아내와 함께 교회에 등록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저도 옥선생님 떠나고 난 뒤 하도 술을 마시고 그러니까 그 사모님께서 함께 교회 나가자고 해 지금까지 다니고 있어요, 애 엄마도 교회에서 만났고요."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내 인상을 차근차근 살폈다.
"남편분이 잘 안 해주시나봐요?"
"네? 왜요?"
"그냥, 표정이……."
"잘 해줘요, 아이들도 말 잘 듣고 착해요."
"그럼요 그래야지요, 이렇게 만나고 보니까 참말 반갑네요. 전 내일 모레 근무지
로 가요, 이제 연수 끝나면 언제 서울 올지."
그는 말끝을 흐리며 여운을 남겼다. 무슨 말이 또 하고 싶은 걸까.
"그때 선생님 떠나고 나서 많이 후회했더랬어요, 꼭 잡고 싶었는데."
이십 여 년 전의 기억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그는 눈시울을 적셨다.
"세월은 참 고마운 거래요,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만나기도 하고, 오늘 만나서 참 반가웠어요. 어디서 계시더라도 몸 건강히 살아서 또 만나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악수를 청했다. 손이 거칠고 딱딱했다. 시골서 교사 생활하면서 엄청 고생한 모양이었다. 나는 경동시장에서 그와 헤어지면서 소설 같은 인생이라고 자신에게 자꾸만 되뇌었다. 경동시장은 한약상가로 변해 가는 곳마다 한약 끓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무거운 하늘이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이후에도 세월은 내 발걸음을 휙휙 지나갔다. 후회라는 엄청난 뒷감정을 남기고서. 그동안 나는 말도 안 되는 노가리를 소설로 써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건 하느님도 할 수 없는 소설을 통한 내 과거를 바꾸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후회라는 걷잡을 수 없는 통한의 심정이 숨어 있었다. 그동안 나는 분명 세월을 방관한 건 아니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 했고 충분히 밥벌이도 했는데 남는 결과는 없었다.
너 그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니?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전공을 꾸준히 살린 것도 아니고 작가로 성공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팔자가 좋아서 무위도식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마다 후회가 폭풍처럼 내 뇌리를 휘몰아치는 것이다. 후회는 곧 의지와 연결되어 창작의욕을 부추겼다. 소설은 내 과거를 수시로 변모시켜 주는데 성공했다. 후회를 착각으로 무마시켜 주었고 자괴감을 불식시켜 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도대체 소설 왜 씁니까, 글을 쓴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닐 테고. 그 말뜻의 의미를 나는 잘 안다. 책이 안 팔리는 인터넷 시대에 창작이 웬 말이냐 누가 소설을 읽는다고 헛수고냐. 그러면 나는 속으로 외친다.
*나는 소설을 통하여 내 과거를 바꾸고 싶다+
지난했던 내 과거 삶을.
끝
첫댓글 소리없는 아우성에 느낌 하나 놓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