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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스페인 동정(動靜)
내가 독일 베를린에서 하루라도 빨리 정착해야만 할 절박한 상황에서 생뚱맞게 결코 가깝지도 않은 거리의 ‘바르셀로나’까지 갔다 오려는 것은 나름 목적이 있어서였다.
무엇보다도 경제력이 취약했던 나는 베를린 현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뭐든 돈벌이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주변머리 하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거리에 앉아 초상화라도 그려야겠다.’는 생각까지를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런 생각도 그 당시에 했던 게 아닌, 그 몇 년 전 스페인에 살 때 해두었던 것으로,
내 스페인 시절 말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여자 친구 G가,
“인야, 당신은 왜 본인 스스로 람블라(바르셀로나의 관광지)에 나가 초상화라도 그려서 그 어려움을 해쳐나가지 못하고, 맨날 돈 때문에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 거예요?” 하고 질타를 했었는데,
나는 펄쩍 뛰면서,
“그 짓만큼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손 사레를 쳤었다.
그랬던 내가, 여기 베를린에 도착한 뒤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그 짓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 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택했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다시 바르셀로나까지 가려하느냐 하면,
그것 역시 나 스스로는 할 엄두나 용기가 나질 않아, 내 바르셀로나 시절 나와 엇비슷한 시기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 마치 ‘군대 동기’처럼 친하게 지냈던 J사범(태권도)의 도움과 경험을 사기 위해서였다.
왜냐 하면, 그 역시 나와 엇비슷한 시기에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한국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고 바르셀로나로 다시 날아가 호구지책으로(그는 재주가 많다.) ‘람블라’ 거리에서 우리나라 민화 글씨를 그리는 것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았던 터라(내가 재작년 스페인에 들렀을 때), 용감하고 씩씩한 그에 기대어 그런 실습을 통해 기술 등을 배워오겠다는 게 내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 부분 ‘스페인 동정’은 사실 ‘쿠바 이야기’와는 너무 동떨어진 독립된 이야기인지라, 거기에는 연관시킬 수도 없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잠시 쿠바 이야기는 건너뛰기로 한다.
가, 달라진 입장
물론 초행이기도 했지만 그 7-8년 전 처음으로 내가 스페인에 갈 때는, 이미 한국에서 5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쳤던, 그래서 최소한 현지에서 1년여 지낼 여비와 생활비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 멕시코에서 지내다 독일 함부르크에 와 있던 중 다시 들렀던 스페인 행만 해도, 테라코타 작업을 하기도 하는 등(당시엔 작품도 두 점 팔렸다.)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리며 지냈었는데,
이번은, 정말 호구지책의 준비과정을 위한 행로로,
스페인 행이 반복될수록 내 입장과 처지는 전락되는 기분이었다.
*
며칠이 훌쩍 지나갔다.
그 사이에 스페인에 와 있어서다.
그러고 보면 난 참 잘도 돌아다닌다.
어느덧 스페인에 와서 또 다른 모습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걸 보면......
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빠리를 거쳐 24시간여 만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그 전 유럽여행을 다닐 때도 그랬지만, 바르셀로나에 올 땐, 프랑스 국경을 통과해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그 세 시간여의 마지막 구간이 제일 지루하다.
어서 빨리 도착하고 싶어서다.
이번에도 그렇게 가슴은 부푼 상태로(철없이) 바르셀로나에 왔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깐 까라예우(Can Caralleu)’ 동네 친구들에게 전화했더니, 모두들 깜짝 놀라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러면서 하나 같이, 언제 식사하러 올 거냐고도 물어왔다.
물론 그런 그들이 고맙고 여기 스페인의 분위기가 좋긴 하지만,
이번의 내 이곳에서의 체류는, 여기저기 휩쓸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오자 J사범과 누리아가 서로 자기 집에 머물라고 했는데,
결국은 J사범이,
“나는 요리를 잘 못하니, 아무래도 누리아 집에 머무는 게 먹는 것도 그렇고... 더 나을 것 같네요.” 하고 양보해 줘서(그는 다른 건 재주가 많은데 음식하는 건 빵점이다.) 누리아의 바닷가 아파트의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날마다 J와 붙어 다니며 ‘돈벌이’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실행 계획을 짜고도 있다.
그러니까 거리에 앉아 초상화를 그리는 건 물론, 한국에서부터 내 나름대로 구상해 온 돈벌이인 ‘탈’ 작업에 대한 의견도 맞춰보는 중이다.
‘아! 뭔가 다른 것도 연구를 해두었었구나.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그 상황을 다 잊은 채, 지금의 나는 속으로, 철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스페인에 찾아간 줄 알고 그 당시의 나를 안타깝고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면서도 또, ‘이런 걸 보면 나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뭔가 열심히는 하는데, 그게 별 효과가 없다는 게 탈이지......’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온 FRP(플라스틱) 모형이 있어서 그저 신문지와 본드 정도의 재료만 필요한 작업인데,
말리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단점이긴 해도, 일단 마른 뒤에는 유화물감으로 채색해서 상당히 오랫동안(항구적으로?) 보관도 가능한 그럴싸한 ‘작품 탈’이라, 상품성도 있을 것 같아, 그 걸 거리에 내다 팔 구상인 것이다.
잘만 되면 어디서건(특히 베를린)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인데......
6 . 6
*
우리나라는 이제 지방 선거가 끝나 뭔가 정국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처지에도 그런 걸 염두에 두는 내가 우습긴 하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외국에 나와 있다 보니 한국 소식이 그립고 또 깜깜해서 답답한 것도 사실이다.
어제 처음으로 ‘람블라’ 거리에 나앉아 보았다.
여전히 혼자서는 자신이 없어서 어차피 J가 일을 하는 옆에서 앉아 있었던 것으로,
일단 동양화를 팔기 위해 내 놓아 보았는데,
재작년 멕시코에 있을 때 돈이 될까하고 만들어 놓았던 건데, 멕시코 현지에서는 인건비나 물가가 너무 싸서, 아무래도 노력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아(터무니 없이 가격이 낮아), 그 당시에 여기 J에게 보냈던 동양화가 여태까지 남아 있어서였다.
‘아, 그런 일도 있었던가 보네! 그러고 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구만. 근데, 내 일이긴 해도, 세월이 많이 흘러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왔었구나! 그나저나 그 시절에도 내 딴에는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긴 했었구나......’
그런데 몇 시간을 앉아 있었더니 추웠다.
그래서 옷을 겹겹이 껴입고 떨고 있었는데도,
이따금 쳐다보는 사람은 있었어도, 단 한 사람 가격을 묻는 이는 없었다.
아, 이럴 줄은 몰랐다.
그렇게 첫 번째 시도는 실패였고, 실망이 컸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밤에, 그렇게 돌아온 나를 위로라도 해주려는 듯 누리아가 ‘선술집(Taberneta)’에 가자고 했지만,
몸이 피곤하기도 했고 나가고 싶지 않아서,
다음에 가자고 했다.
그리고 재미도 못 느끼면서 TV를 보다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잘 잤다.
누군가 나에게,
‘미술사에 남는, 그것도 1등급에 속하는 화가가 될 것이다.’고 말해주는 꿈을 꾸었다.
꿈이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꿈을 꾼 것은,
내가 터무니없는 꿈을 꾸는 화가(몽상가?)라서,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꿈에서나마 위로를 받으라는 의미였을까?
아, 설사 그렇더라도, 꿈에서나마 그런 말이라도 들었던 게 나는 좋았다. 너무 좋아,
‘나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지!’ 하는 다짐까지 했을 정도로......
오늘은 지난 5월 아직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누리아와 함께 한국에 왔었던 ‘안젤스(Angels)’를 보기위해 ‘피게레스(Figueres)’에 갔다.
아침에 누리아와 서둘러 나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쳐, 1시간 쯤 기다려서야 다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기차역에 나와 있었는데, 그녀 집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었다.
너무 배가 고팠기에 그만큼 맛있게 먹었는데, 그러자 식곤증이 몰려왔다.
그들은 식후에도 떠들고 얘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내가 언뜻 졸았더니,
좀 쉬라며 방 하나에 데려가기에, 염치불구하고 낮잠을 한 시간여 잤다.
그런데 원래 안젤스가 우리를 데리고 거기 어딘가 가까운 곳에 산보라도 하려고 했다는데, 종일 비가 내렸기 때문에 그저 그 집 안에서만 머물다 돌아왔다.
다시 바르셀로나에 오자마자 J한테 전화를 걸었다.
내심, 어제 팔려고 처음 내놓았던 ‘동양화’ 건이 궁금해서 걸었던 전화였는데, 그의 입에서 그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빤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 쪽에서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 뒤 누리아가 준비한 샐러드로 저녁을 먹었는데, 맛도 느껴지지가 않았고 기분도 자꾸만 가라앉아 갔다.
그렇다고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왠지 자꾸만 운마저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하는 일 중, 뭐 하나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면은 없고, 아무리 애를 쓰고 덤벼도 다 나를 외면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다.
어떻게든 노력은 할 것이다.
그러니 제발, 나에게도 뭔가 기회가 주어지길 바랄 뿐이다.
내 하는 일이, 최소한 내가 쏟아 부은 노력의 대가만이라도 돌아오길 빌 뿐이다.
6 . 7
#바르셀로네따(Barceloneta)#
몇 년 전(1990년) 처음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
막막하고 답답할 때는 무작정 바다 쪽으로 걸어서 항구로 나왔고, 거기서도 또 걸어서 이곳 ‘바르셀로네따(Barceloneta)’ 해변에 오곤 했다.
그게 버릇이 되어, 툭하면 바다에 나와 이렇게 앉아 있곤 했다.
그게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또 9년도 지났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그때보다 더 막연한 처지로, 지금 바로 그 바르셀로네따 해변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다.
바다가 무슨 죄일까만, 나는 바다에 한없는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작금의 내 삶에 대한 불평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람 없는 바닷가는 음흉하다. 파도 없는 바다는 더욱 음흉하다.
아, 그녀(끌라우디아)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다시 앉아 있을 줄을 그녀는 상상이라도 할까?
부질없는 일이다. 설사 그녀가 안다 해도,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늘, 바다가 불러서, 옛 생각을 하며 바르셀로네따에 왔다.
그래도 바르셀로나는 바다라도 있어서 마음을 실어 보낼 수 있지만, 베를린에 돌아가면 어찌 한다지?
아, 여기서는 바다만 생각하자. #
'그리고 일 주일 정도의 기록이 없네! 하는 수 없지.' 하면서 장을 바꾸기로 했다.
나, 거리의 초상화가
그러다 결국 나는 거리로 나갔다.
죽어도 못하겠다고 거부했던 바로, 그 ‘거리의 초상화가’가 돼보기로 했던 것이다.
*
어제는 ‘깐 까라예우(Can Caralleu)’에 올라가 마놀로(Manolo)네 집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고, 시간을 쪼개 아말리아(Amalia)와 신포(Sinfo)도 보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나에게 친절한 그들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J와 ‘살로우(Salou)’ 해변에 갔고,
거리에 앉아 보았다.
내가 아직도 자존심 때문에거나 겁이 나서 바르셀로나의 람블라 거리에 나가 초상화 그릴 엄두를 내지 못해서, 일단 제 3의 장소인 살로우 거리에서 나앉는 연습부터 해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이젠 여름이라 그 해변엔 관광객이 모일 시점인 데다, 아무래도 나에겐 생소한 곳에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조금은 수월할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대학시절 학교의 공식적인 ‘야외 스케치’ 말고는 거의 한평생을 꽁꽁 숨어서 그림을 그려왔던 나에게, 개방된 장소에서 한 사람을 앉혀놓고 초상화를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고 또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그 벽을 스스로 허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거리에 앉아 보니, 못할 것도 없을 것 같긴 했다.
비록 단 한 사람 요청해오는 이 없었지만.
그러니까 첫날은 완전한 실패였다.
그런데 단 하루를 거리에서 보냈을 뿐인데도, 나는, 기약 없이 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화가들의 심정과, 거리에 부는 바람이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 것 같다.
바닷가 출신의 나는, 언제 어디서거나 바람이 통하는 곳을 마다하지 않아왔는데, 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바람이 생계를 위협하는 악재라는 것과, 더운 날에도 밖에 오래 앉아 있으면 끈적끈적하게 추위가 몸속으로 파고 든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거리에 나앉는 것에 겁을 내던 나는, 손님이 오는 상황과 그 반응에 몹시 예민하던 J보다도 더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일에 열중하기도 했는데, 내 스스로도 놀랐고 내 자신이 의외로 뻔뻔하다는 걸 안 계기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마음마저 편한 건 아니었지만.
그리고 어두워질 무렵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무겁다 못해 이제는 아프기까지 했다. 게다가,
어머니께도, 또는 한국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락을 해야 하는데, 뭐라 할 것인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드디어 거리에 나앉았다고?
아무리 내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지만, 그 사실 만큼은 알릴 수가 없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슬퍼하시다 화병이 나실 일이어서다.
아, 내가 너무나 이질적인 세상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6 . 15
*
바르셀로나에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아무 생각도 없이 정신 줄을 놓고 사는 기분이다. 아니, 그것뿐이라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여기서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고 있다.
내가 요즘 거리에 나앉는 것은,
이번에 유럽에 와 먹고 살기위한 첫 시도이자 실험인데, 아직 아무런 가능성도 해답도 얻지 못한 상태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나는 지금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긴 터널 안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6 . 17
*
하룻밤을 새고 나면(밤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더 커다란 미궁 속에 빠져있는 기분이다.
또 하루를 보냈지만, 나아지는 기미는 없고 내 상황은 악화일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막막한 현실 속에서, 스페인에 조금 더 남아 발버둥을 쳐야 하나, 아니면 다시 독일로 돌아가 죽든 살든 부딪혀봐야 하나......
어째, 이번 바르셀로나 행은 나쁜 식으로만 돌아가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던 사람들과의 사이에 이상 기류가 흐르는 느낌이 강하다.
내가 빈털터리 모습으로 찾아온 꼴로, 나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지만, 그들 역시 내 눈치만 살피는 것 같다.
그만큼 내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것 역시 사실이고......
모든 건 돈인데, 나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이 인간관계에까지 심한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어제 아침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전 건강하게 잘 있으니, 아무 걱정마세요......’ 하는 빈말만을 하면서, 그러니 너무 내 편지를 기다리지 마시라는 부탁까지도 드렸다.
요즘, 편지 쓸 기분도 아니지만 시간이 없어서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엔 다시 아말리아(Amalia) 집으로 갔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호아낀(Joaquin)과 축구를 보았다.
그리고 시내로 돌아오려고 나오는데, 호아낀이 주섬주섬 뭘 꺼내 나에게 건네는데, 돈 만 뻬세따였다.
깜짝 놀라며, 물론 나는 그 돈을 안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내 주머니에 그 돈을 쑤셔 넣고는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의 속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게 내 삶은 남의 동정을 받는 처지로 전락한 꼴이다.
그렇게 시내로 내려오는데 슬펐다.
‘아, 호아낀! 이제는 이 세상에선 볼 수조차 없는 사람...... 내가 이 세상에 살아오면서 만났던 좋은 사람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좋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던 사람......’ 하면서 나는 갑자기 그의 초상화라도 한 번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렇지만, 어쩌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여기 쿠바에서의 자료에는 그의 초상화가 없을 것이기에,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만이라도 그 그림을 떠올리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몇 점이 떠 있는 여기 ‘까보 끄루스’의 파란 하늘엔 몇 마리의 이름도 알 수 없는 독수리(청소 동물인 듯)들이 떠서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오늘은 밤에 람블라에 나가 여기 와서 만든 탈을 팔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네 시간을 앉아 있어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격을 물어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실패란 말인데......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나를 가장 견디기 힘들게 하는 건,
거리에 나가 손님을 기다리는 일 자체가 아닌,
그런 나를 불쌍하게 여기거나 동정을 하는, 그러면서,
‘너라고 별 수 있냐?’ 하는(내 ‘자격지심’일까?) 주위의 시선과 나를 대하는 태도다.
내 딴에는 살아보겠답시고 그토록 힘들게 여겼던 거리에 나앉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봤자, 니 능력은 거리에서조차 통하지 않는 것 아니냐?’ 하는 조롱 같은 것이 나를 더욱 못 견디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돈의 노예로 전락해 발버둥까지 치고는 있다지만, 니가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라며 거리에 내놓는 상품들마저 세상의 무관심만을 받고 있는데도, 너는 여전히 고고한 척 자존심만 내세우고 있으니...... 그래봤자, 너는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일 뿐인데......’ 하는......
그런데 그건 어쩌면 알량한 자존심의 굴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내 자신의 서글픈 독백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더 용기를 내 싸워야 하나?
이젠 지쳐 그런 의욕마저 사그러드는 기분인데......
그렇지만, 이대로 쓰러질 순 없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힘을 내야 한다.
아,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마음은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
이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것 같은데도...... #
*
그 사이에 다시 ‘살로우(Salou)’에 와있다.
거리에 앉아 내 얼굴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낯선 곳에서조차 쭈뼛쭈뼛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첫 밤은 집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J 차 안에서 잤다.
물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공원에서 자고 또 어떤 이들은 해변에서도 자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자는 거야 호텔일 수도 있다.’고 자위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세면도 못하고 화장실도 못 가게 되면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이 없다는 건, 그런 불편도 다 감내해야만 한다는 거니까.
물론 그런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실제 상황과 딱 맞닥뜨리다 보니 정신마저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도, 장사도 되지 않는 그 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들을 기다렸다.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나에게 관심을 갖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러면서 난 또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전(이 일을 하기 전)의 나는, ‘거리의 화가’에게 눈길조차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너무 무심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그런 무관심은, 이 세상의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것도 우리네 삶이라는 것도......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분명한 건,
나는 조금씩 내 자신의 벽을 허물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비록 내가 부단히 애를 쓰며 한편으론 많이 발전(타락?)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는 이 일에 영영 빠져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을 사람이라는 것도......
6 . 19 여관 방
‘맞는 말이지. 남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말이긴 하지만, 나 자신에겐 정확하게 맞는 말이지. 그래서 실패만 거듭하며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지......’ 하고 나는 스스로 고개까지 끄덕이다가, ‘근데, ‘여관 방’이라고? ‘살로우’에서는 여관을 잡아놓고 있었던가 보구나. 허긴, 거기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랬겠지만, 그렇게까지 절실하게 그 일에 임하고 있었다는 얘기네......’
*
어젯밤에 누군가가 날 도와주는 꿈을 꾸었다.
누군지는 불분명한데, 내 가슴 새끼 호주머니에 뭔가를 꼬깃꼬깃 집어넣어 주는 꿈이었다.
엊그제 호아낀이 그래서, 그런 꿈을 꾼 것인가?
아침에, 베를린에 짐을 맡겨둔 화가 이 00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내가 머물 방을 구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고, 어쩌면 한 화랑과도 접선할 가능성도 있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다.
요즘의 나에겐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그렇담, 다음 주엔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리고 오늘은 ‘거리의 초상화가’로서의 인정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연필 데생 초상화를 그려주고 5천 뻬세타를 받았는데,
물론 처음이라 긴장도 되었고 또 솔직히,
‘잘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되었었다.
일을 하다 보니 햇빛이 그늘을 빼앗아 가기에 자리를 옮겨가면서까지 그렸는데(약 두 시간 가량), 공교롭게도 그 여자는 불어만 썼기에 말도 통하지 않았었다.
내 거리의 화가로서의 첫 번째 손님이었던 그 부부는, 매우 만족해하며 그림을 아주 소중히 들고 돌아갔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약간의 보람을 느끼면서 안도의 숨을 쉬기도 했다.
그렇지만, 왜 그랬는지 나에겐 뭔가 아련한 슬픔 같은 것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어젯밤 꿈이 ‘좋은 꿈’이었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사실 어제도 한 사람이 흥정을 해왔는데, 내가 값을 너무 비싸게 불렀는지 찜찜해하면서 돌아가 버린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 걸 옆에서 지켜봤던 J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자존심만 내세운 거 아닌가요?” 하고 아주 노골적인 질타를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열 살 정도 차이가 나는(어린) 그의 꾸지람을 그대로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은, 그가 어른이고 나는 아이였던 것 같다.
아무튼 초상화 한 점을 그려 판 역사적인 날인데, 그걸로 끝으로 오후에는 공쳤다.
그런데 오늘은 ‘한국 축구의 최악의 날’로 기록될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월드컵 네델란드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5 : 0으로 참패한 것이다.
현격한 실력 차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뒤엔, 밖에 나가기가 싫었다.
여기 스페인도 ‘축구의 나라’인지라, 내가 거리에 나가면 모두들 나에게 한국사람이냐고 물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런데 내가 이 와중에도 그런 일에 왜 신경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월드컵’이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6 . 20
#엉뚱한 강태공#
어제는 공쳤다.
하루 종일 그 누구도, 나에게 초상화 값을 물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누군가 한 사람이 있기는 했던가 보았다.
내가 딴전을 피울 때 J에게 간접적으로 묻는 이가 있었다는데, 가격을 얘기했더니 그냥 도망가더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내가 요구하는 가격이 비싸서 생겼던 일로, J의 여전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그런데,
거리에 앉아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마치 물가에 앉아 낚시를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낚싯대를 던져 놓고 앉아 있으면 세월이 가는지 세상이 바뀌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아니 그런 일엔 전혀 신경이 써지지 않는다.
오로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며 나에게 다가오느냐 만이 관심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리에 앉아서, 가끔 고기가 미끼에 입질을 하듯 물어오는 사람들을 잘 낚아채는 건 그 낚시꾼의 기술이겠지만,
나는 아직 그런 기술이 없는 건 물론, 그런 쪽에는 별 관심조차 갖지 않는 엉뚱한 ‘초보’이기 때문에,
그저 세월만 낚고 있는 강태공 같은 나를 스스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요 며칠 내 자신을 관찰해 보니, 나는 장사가 되든 안 되든 커다란 동요를 하지 않는(무사태평)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쓴 맛을 덜 본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가장 힘든 건, 그냥 한 곳에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지루함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거리의 초상화가에게는 한 장소를 오랫동안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자 숙명일 것 같은데,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는 것도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보니,
성격이 단순하고 급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J는, 장사가 안 되면 금세 어디론가 한 바퀴 돌아다니다, 뭔가 재밋거리를 사오거나(조그만 도구나, 심심풀이 과자, 유희, 실 등), 하다못해 혼자서라도 탁구공을 가지고 벽에다 튕기며 놀기도 하는데,
나 역시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이, 그저 멍청하게 꼼짝없이 앉아 있는 건 그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이란 것도 흥미롭기만 하다.
그런데, 그러면 그가 나에게,
그렇게 꼼짝 않고 앉아 있지만 말고, 이따금 해변을 돌아보라거나, 같이 놀자거나, 하다못해 재미나는 얘기를 해보라고 다그치기도 하는데,
성화에 못 이겨 몇 가지 지난 일을 얘기해 주기는 했지만, 내가 무슨 ‘이야기 공장’도 아니고, 또 내 언변이 좋지가 않은지 그도 별 재미있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흥미도 못 느껴,
나는 그저 멍청하게 앉아있기 다반사다.
그러면 그가 싫증을 내며 어딘가로 어느새 사라지고 나 혼자 남게 되면,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데,
지난 일들이 떠올려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난 흑역사마저 떠올려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하고, 가끔은 고개를 저으며 지난 일일망정 안타까움까지도 느끼곤 하는데,
만약에 이렇게 거리에 나앉지 않았다면 별로 떠오르지 않았을 별의 별 생각까지가 드는 걸로 보면,
이 일이 나를 ‘사색가’로 만드는 건지, ‘몽상가’로 만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
*
평상시에 꿈을 많이 꾸는 난데, 어젯밤엔,
옛날에 대학에 다닐 때, 별로 얘기도 많이 해보지 않았던 한 여자를 사랑하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참, 별 일도 다 있다!’ 하면서 오늘은 일도 없이 거리에 앉아서 그 일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물론 꿈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일이었겠지만, 그녀가 나에게 매달리며,
“결혼해 주세요!” 하고 애걸복걸하던 순간, 하필이면 그 순간에 깨어났는데,
나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면서도,
그게 꿈이었다는 게 너무 허무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내일까지 여기 살로우에 남아있을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차피 인생은 알고서 살아간다기보다는 모르면서 살아진다는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같은 불안정한 경우에는 더더욱......
6 . 22
*
요 며칠 사이에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살로우에서의 마지막 날,
이침에 크로키 세 장을 해서 팔고, J의 요구에 따라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내가 크로키를 했다고? 그래서 팔기까지 했다고? 근데, 어떤 그림이었을까?’ 그게 자못 궁금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고, 이런 식의 그저 흘려버린 기록만으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난 일인데, 어찌 그림까지 기억나겠는가 말이다.
‘그런 일도 있었던가 보구나......’ 할 뿐이다.
그리고 바로 나는 람블라에서(J의 숙소가 바로 람블라와 맞닿아 있다.) 샘플을 펴놓고 장사를 해보려고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내가 그린 초상화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내 그림이 여기 람블라에서 잘 나가는 사진 같이 매끄럽거나 눈에 잘 띄지 않은 이유도 있거니와, 람블라에는 많은 초상화가들이 있어 경쟁이 심한 이유도 있을 것이었다.
결과적으론, 이 람블라 거리에서의 내 초상화는 ‘경쟁력’이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밤에는 그 다음 날 새롭게 식당을 개업하는 B씨를 도우러 갔다.
두 부부가 열심히 일을 해서 드디어 식당을 여는데, 마지막 작업에 정신이 없어서, 결국 하룻밤을 그 집에서 자면서까지 그리고 개업일 저녁 오프닝 막바지까지 일을 거들어주고 돌아왔다.
그리고 누리아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어 돌려놓고, 내가 멕시코에 있을 때 누리아와 함께 내 전시에 와 주었던 M을 만났다.
그런 뒤, 그들의 요구로 B씨 식당 개업식에 갔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들(특히 한국인 교민들)을 만나기 싫어 가지 않으려 했는데, 누리아와 M의 성화에 못 이겨 갔던 것인데,
차려놓은 음식은 훌륭했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축하해 주었고,
어차피 나는 독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B씨 가족과 작별 인사까지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거기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근처라, 성당 앞에는 커다란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초대된 가수들은 노래를 부르고 관중들은 춤을 추거나 서성이면서 ‘산 후안(San Juan)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6월 24일 '산 후안 축제'였다.
그러니, 그 걸 보고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어서, 그리고 M 역시 그전 멕시코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춤을 추자고 나를 잡아 끌어,
그 전 멕시코에서처럼, 그렇지만 이번에는 오픈된 공간(시내 한복판)에서 우리는 춤도 추었다.
낯도 두껍게......
허긴, 이미 식당 개업식에서 마셨던 비노 덕분에 내 낯이 충분히 두꺼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른(옛날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살) 때 같았으면, 아무 정신없게 굉음을 발산하는 산 후안 축제의 폭죽과 폭음에 질려 욕지거리를 늘어놓았을 내가, 이번에는 두 여인과 어울려 새벽 3시가 넘도록 거리에서 춤을 추고 놀아났던 것으로,
그렇게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축제에 취하고, 마지막으론 내 막막한 처지에 취해서...
그동안 암울했던 내 기분이 어느 정도 풀어져, 그로 인해 돌아와선 잠도 잘 잔듯하다.
아침에 일어나(10시 반) J에게 전화를 걸어 짐을 쌓야 한다고 알린 뒤,
또 바삐 서둘러 누리아 언니 ‘아나(Ana)’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마따로(Mataro)’ 쪽 바닷가에 사는 아나의 집은 나에게는 현실감이 없는,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수영장까지 갖춘 집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 이런 곳에서 살아보았으면...... 작업실이 이런 곳에 있다면, 바다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며 살 텐데......’ 하는 헛꿈이 절로 꾸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어차피 이제는 독일로 떠나야 해서 풀도 죽어 있던 나였는데,
누리아가 강력하게 밀어붙여(반 강제적으로), 난 그 집 풀장에서 억지 '물장구'를 치기도 했고,
그들의 많은 가족과 함께 점심식사도 했다.
메뉴는 ‘빠에야(Paella)’였다.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을 즐기려고 비노도 마구 들이켰고, 빠에야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뒤,
테라스의 햇볕에 앉아(그들만, 나는 그늘 쪽에 있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맞기도 했는데,
‘이렇게 좋은 분위기와 경치가 이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나는 뭔가 잔뜩 심통 난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몇 시간 뒤 독일을 향해 떠나면, 어쩌면 오늘 일은 먼 꿈같은 일이 될 게 분명하니......
‘사실 독일로 돌아간 뒤 나는 그 날을 그리면서, ‘스페인 회상’이라는 수채 드로잉을 그리기도 했었지. 그 드로잉은 ‘독일 자료’에 포함돼 있으니, 여기에 첨부하기로 하자!‘ 하면서 나는 자료집에서 그 이미지를 찾아, 이 곳에 갖다 붙였다.
내 그림치고는 상당히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색감에 그 내용마저 지중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긴 하다.
저녁 7시 20분 기차를 타야하는 나에게, 그 집의 분위기를 여유있게 즐기기에는 사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바르셀로나로 돌아올 준비를 해야만 했고,
그렇게 돌아와 J가 챙겨 온 배낭을 받고, 누리아와 셋이서 서둘러 ‘산츠(Sants)’ 역으로 출발했다.
역에 도착한 뒤, 누리아에게 기념으로(?) 내가 만들었던 탈을 하나 건네주고는(M에게도 하나 전해줄 것을 부탁하고) 기차에 올랐다.
누리아와 J가 차창 밖에서,
마치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보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담은 시선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웃음으로 화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억지였다.
그러면서 기차는 움직였고, 내 바르셀로나 행 여정도 끝났다.
나는 지금도 J와 누리아와는 친하게 지낸다. 내가 스페인에 가면 늘 우리 셋이 만나 식사도 하고 어디 놀러가기도 하는 등 셋만의 우정을 나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면, 우리 셋은 어쩌면 '한 팀' 같기도 한데, 그렇게 변함없이 정말 평생 친구로 지낼 것 같다.
어렵던 시절의 그런 과정을 다 함께 공유하며 지낸 사이여서 정도 많이 들었던 것이다.
다, 돌아가야 할 곳, 베를린
뭔가를 해본답시고 약 3주 정도 바르셀로나에서 머물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 상황의 나는 베를린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일의 성과와는 관계없이라도......
*
프랑스로 넘어오는 국경 도시 ‘세르베레(Cerbere)’에서 한 시간여를 지루하게 기다린 뒤 ‘쥬네브(Geneve)’행 기차에 올랐다.
침대칸 표를 살 수는 없었기에 2등 칸에서 새우잠을 자며 밤새도록 달려 스위스에 도착했다.고
스위스는 아름답다고들 하고, 기왕에 지나는 길에 한 번 내려 구경이라도 할 수도 있는 나라지만, 나에겐 어차피 지나쳐야 할 곳일 뿐이다.
물가가 비싸, 내려서 뭔가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젯밤 기차 안에서 멕시코 녀석들이 떠들어댄 걸 보면, 그리고 그들이 프랑스 ‘리용(Lyon)’역에서 다 내린 것을 보면, 오늘 월드컵 축구 게임이 있겠고, 그렇다면 오늘이 25일인데......
한국도 마지막 게임을 하겠지만 이미 예선에서, 아니 본선 1회전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하나마나일 테고......
어제 ‘딸고(Talgo: 특급열차)’를 타고 ‘쮸리히(Zurich)’에 갔으면 바로 연결되는 베를린 행 열차를 갈아타고 오늘 밤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테지만, 너무 비싸(5천 여 뻬세따) 일반 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어차피 오늘 안으로 베를린엔 도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어제 ‘아나(Ana)’ 집에서 점심을 너무 잘 먹었고, 또 스페인에서 뭔가 먹을 것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그냥 기차를 탔기 때문에 어제 저녁을 걸렀는데도, 지금 아침 9시 20분이 넘어가고 있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급적 빨리 베를린에 가고 싶은데,
아, 어쨌든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이제는 ‘쮜리히(Zurich)’다.
6 . 25 쥬네브 역에서...
*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모르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그저 유레일패스 시간표만 보고는,
‘오늘 베를린에 가는 게 어렵겠다.’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오늘 안으로 충분히 갈 수도 있고, 그것도 잘만 한다면 시간을 제법 단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바젤(Basel)’에서 기차를 갈아타면 가능할 일인데, 나는 ‘베른(Bern)’에서 내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것저것 계산을 해보니, 잘 하면 유레일패스 하루치를 절약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거기서 기차를 탄다면 바로 오늘 베를린에 도착할 수 있는 아주 경제적이고도 효과적인 행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방법을 택하려다 보니, 스위에서는 단 돈 한 푼 안 쓰고도 나라를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식사가 부실하고(오늘 아침에, 어제 스페인 국경을 넘어오면서 ‘세르베레(Cerbere)’에서 샀던 보까딜료 하나를 때웠을 뿐이다.) 몸의 피로는 가중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너무 추레해서, 얼른 면도만이라도 하기로 했다.
그런 뒤 결국 바젤에 도착해, 이제 독일로 넘어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내 가방 안에는 비상식량인 초콜렛 하나가 남아있을 뿐이다.
앞으로 20분이면 기차를 탈 것이고, 독일로 넘어가면... 내 새로운 독일 생활이 시작된다.
6 . 25 오후
*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계획은 뒤죽박죽이 되고 내 이야기는 다른 식으로 전개 된다.
그 와중에도 이 여행 기록을 끼적이다가, 기차 한 대가 들어오기에 무작정 탔는데,
그 차가 독일 쪽이 아닌 ‘쮸리히(Zurich)’쪽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차가 달리고 있어, 내가 조금 전 계획을 세워두었던 게 다 허사가 되었던 것으로,
아,
그래서 그 뒤의 행로는 새로운 이야기로 바뀔 수밖에 없다.
하는 수 없었다. 중간의 한 다른 역에서 내려,
어차피 이젠 계획대로 할 수 없어서 허기라도 달래자며, 거기 마켓에 들러 장을 보고, 주린 배를 채웠다.
그리고 오후 4시 14분 차를 탔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내렸다.
그때부터 독일에 들어오는 내내 날씨가 궂어,
‘역시 독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우중충하고 스산한, 전형적인 독일 날씨가 이어졌다.
특급열차를 탔기 때문에 ‘만하임(Mannheim)’에서 내려 ‘이체(ICE)’를 갈아탔다.
1등 칸의 독일인들이 꾀죄죄한 나를 흘긋흘긋 쳐다보았는데,
‘니가 탈 칸이 아니다.’ 하는 시선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엄연한 ‘1등 칸’ 손님이었다. 내 유레일패스가 그 증서니까. 그러니, ‘이 보슈들, 내가 아무리 허름한 외양의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런 ‘불법’이나 저지를 사람 같소? 그러니 나는 당신들에게 부끄러울 일 하나 없단 말이외다.’하는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베를린에 가는 길에,
만약을 위해 이 00 선생한테 전활 걸었더니 돈만 먹고, 전화를 팩스로 바꿔놓았는지 통화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큰일인데...... 밤이 돼 가는데, 베를린에 도착하면 어디로 간다지?’ 그것도 걱정이자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것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체(ICE)’도 연착을 했다.
그 이유까지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궂은 날씨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피곤하다 보니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는데,
그 상황에서도 나는,
‘이 기차가 베를린에 늦게 도착할수록(연착하면 할수록) 나에겐 좋은데......’ 하고 있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늦은 새벽에 도착해, 기차역에서 밤을 새울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6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