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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光金’으로 줄여 사용해도 알만한 사람은 모두가 光山 金氏임을 금방 안다.
우리나라 수많은 성(姓)씨 중 명문의 서열로 상위의 자리를 지켜온 성씨가 바로 광산 김씨 가문임을 부정한 사람은 별로 없을 성 싶다.
‘光金’ 중 특히 사계(沙溪) 金長生 선생의 후손이라면 맞선도 보지않고 딸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겠다.
우리나라 역사상 학문과 도덕성이 뛰어나 온 백성이 나라의 사표로 삼는 인물로 평가 받아 문묘(文廟·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배향된 인물은 모두 18명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한 가문에서 2명의 인물이 배향되기는 은진 송씨(恩津 宋氏)의 송시열·송길준 선생과 광산 김씨의 김장생·김집(金集) 선생 등 2가문 뿐이다.
특히나 부자가 함께 문묘에 배향되기는 광산 김씨가 유일하다.
이렇듯 광산 김씨가 우리나라의 명문으로 자리잡기까지는 2가지의 큰 변수가 작용했다는데, 이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됨으로써 그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2개의 요인중 한 가지는 사계 선생의 7대 조모인 陽川 許氏의 정절과 자기헌신을 꼽을 수 있다. 허씨 부인의 일관되게 문벌을 지키겠다는 일념, 즉 정신적인 유산이 후손에게 계승 돼 큰 음덕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또 한가지는 양천 허씨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후손에 미치어 이른바 조선 8대 명당 음택을 얻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천마가 바람을 가르며 크게 우는 형세)의 대혈을 김극뉴가 차지하게 됨으로써 그 발음(發蔭)이 후손에 크게 미치어 발복한 것이라고 한다.
앞서 소개했던 열녀 사례중 울산 김씨의 민씨 할머니와 남원 양씨의 이씨 부인의 생생한 사례는 두 사람 모두가 험난하기만 한 열녀의 길을 걸으면서 직접 집터나 묘터를 찾아내 한 가문을 위태로운 처지에서 구해 일으켜 세운 풍수지리학의 실증적 사례라고 본다.
그런데 양천 허씨와 그 후손 김극뉴 묘소가 명혈에 쓰여지고, 이내 후손에 길이 감응(感應)됨으로써 명문의 반열로 올라서는 또 다른 특색을 띤 이른바 열녀와 풍수지리학이 간접적인 관련을 맺은 사례라고 볼수 있는데 이것이 이번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니까 열녀 허씨 부인에 대한 미담소재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명당발복에 의해 광산 김씨가 중흥의 탄탄한 초석을 다져왔는데, 이를 상·중·하 3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하겠다.
허씨 부인은 충청 관찰사 김약채(金若采)의 큰 며느리로, 그의 친정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이다. 허씨 부인 남편 김문(金問)은 고려말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그런데 허씨 부인은 안타깝게도 17세의 젊은 나이에 아들 철산(鐵山)만을 남겨둔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됨으로써 그 험난하고 시련에 얽힌 정절의 생애를 걷게 된다.
친가의 부모가 불쌍히 여겨 개가시키려고 택일까지 잡아놓자 허씨 부인은 죽기를 맹세하고 친정집에서 몰래 나와 어린 아들 철산을 업고 수백리 머나먼 길을 걸어 시가인 충청도 연산으로 내려 왔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낙남(落南)길에 험준한 산을 넘다가 칠흑같은 산중을 헤매일때면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한 바람에 안전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연산땅에 정착한 허씨 부인은 아들 철산을 정성껏 양육하고 글 공부에 열중하도록 돌보면서 종신토록 수절하니, 조정에서는 정려를 내렸고 이후 철산으로부터 후손 대대로 내려오면서 광산 김씨의 문벌이 맥을 잇게 된다.
허씨 부인의 공로가 지금까지 맥맥이 이어온 것이라 믿는다. 여지승람과 삼강행실록에 적힌 역사적 사실로는 양천 허씨의 묘갈은 후손 김집이 쓰고, 정려중수기는 후손 김지수(金志洙)가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허씨 부인이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연산의 시가는 충남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소재하는데, 이 곳에 터를 잡은 지는 철산의 할아버지인 김약채때 부터라고 한다.
허씨 부인의 지극정성에 힙입어 성장한 철산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그 아들 국광(國光)은 좌의정 시절 8개월간 혼자서 의정부를 맡았는데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그의 맏아들 이름을 ‘극히 부끄럽다’라는 뜻으로 부끄러울 ‘뉴’자를 넣어 극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열녀 허씨 부인의 지극정성이 가문의 맥을 잇게 했고 마침내 그 후손 김극뉴가 8대 명당으로 알려진 천마시풍형의 명혈에 들어, 그 산소의 발음에 의해 김극뉴의 아들 종윤으로 부터 호, 계(휘), 장생으로 이어진다.
바로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천마시풍형, 즉 도선국사가 조선의 8대 명당이라고 그의 결록에 적어 놓은 그 명혈에 묻힌 주인공이 국광의 장남 극뉴이고,
그로부터 그의 직계 후손들이 연이어 명사로 배출된다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 아닐까 싶다.
광산 김씨의 시조인 김흥광으로부터 23세 손이 되는 김극뉴의 묘재를 찾아가려면 전북 순창읍에서 태인, 임실, 전주로 통하는 2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구림면에서 내려오는 793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직전해 마흘리로 통하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가다 작은 고개를 넘어서 우측으로 돌아가는 길옆에 있는 용마초등학교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을 올려다 보면 빼어나게 우뚝 솟은 용마산(龍馬山)이 보인다.
마치 주위의 모든 산을 제압하고 군봉을 통솔하듯이 특립특출(特立特出)하게 솟아 있는 산의 기세와 수려함이 그 아래 어딘가에 대지명당을 작혈하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한 눈에 짐작 할 수 있다.
이 산봉이 곧 마흘리 뒷산, 즉 김극뉴의 묘터를 만드는 용마산이고, 그 바로 뒷쪽에 또 하나의 수봉이 용마산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來龍해 응결된 장덕산이 있다.
용마산의 산세와 위용으로 봐서 주산과 현무봉을 겸하는 성진(星辰)이라면 장덕산은 그 소조산격의 산봉우리가 될 것이다.
풍수지리학을 연구하고 관심과 이해가 깊은 사람마다 용마산의 형국을 목성산(木星山)이라하고, 또 금성산(金星山)이라고 해서 혼란스럽지만 필자의 눈에는 금성체를 겸한 목성체가 분명하다고 느끼면서 구성(九星)으로는 탐랑성(貪狼星)에 접근되는 산의 형국으로 보아왔다.
그 후손들 중 재력가 보다는 현달한 인물이 더 많이 배출된 점으로 미뤄 봐도 필자의 견해에 큰 차이가 없으리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