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9. 밑줄 친 (가)와 (나) 사이 시기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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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도다. (가)달단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음은 또한 짐승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그들이 경유하는 곳마다 불상과 범서를 마구 불태워 버렸습니다. … (중략) … 옛날 현종 2년에 (나)거란주(契丹主)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와서 정벌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거란 군사는 송악성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현종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판본을 판각했습니다. 그러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도 한가지고, 전후 판각한 것도 한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한가지인데, 어찌 그때에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불다천(諸佛多天)이 어느 정도 보살펴 주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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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개경에서 초조대장경판이 조성되었다.
② 개경의 교장도감에서 『교장』이 간행되었다.
③ 해인사에 장경판전을 짓고 팔만대장경판을 소장하였다.
④ 대구 부인사에 소장된 초조대장경판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정답: ③
* 거란과 몽골의 침략 사이의 역사적 사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초조 대장경). 70여 년(1011~1087)의 오랜 기간에 걸쳐 개경의 흥국사, 귀법사 등 여러 사원에서 목판에 새겨 간행되고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던 이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2차 침입(1232) 때에 불타 버리고 인쇄본 일부가 남아 고려인쇄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고려는 물론이고 송과 요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이른바 속장경이라고 불리우는 교장을 편찬하였다. 이를 위하여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흥왕사에 교장도감(1086)을 설치하여 10여년에 걸쳐 신라인의 저술을 포함한 4700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2차 침입(1232) 때에 흥왕사가 불타며 소실되었고, 그 인본이 송광사와 일본 동대사 등에 일부 남아있다.
1231년부터 고려는 40여 년 동안 몽골과 전쟁이 시작되자, 1차 침입 강화 후, 1232년 최우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재조대장경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개태사 주지 수기의 지휘 하에 제작하기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이후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합천 해인사로 옮겨(1398)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