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운여정 6)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꽃 정 다산의 고장을 찾아서(1) - 생가와 함께 있는 유택-
어느 덧 깊은 가을이 왔다. 추수를 기다리는 들녘은 황금물결같이 출렁이고, 온 산은 노란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혀 놓은 듯 짙은 단풍이 아름답다. 바라보기만 해도 메마른 우리 마음에 따듯한 불을 지펴 줄 것 같다. 그러나 금년은 복없게 만들고 있는 이상한 정책때문인지, 모두들 견디기 힘든 경제상황 속에서 이를 극복하느라 몸과 마음은 피로에 젖어서 여유로움을 상실하여 왔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이 왔지만 우리들 마음은 계절의 변화에도 예전과 같은 감흥을 느낄 수 없다. 이러한 때 잠시나마 세속의 서울을 떠나 더덕더덕 묻혀온 번뇌를 날려 버리게 하는 곳이 어디 없을까? 나는 심신이 고달프거나 새로운 마음을 다지고 싶어 할 때,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가까운 친구나 문우들과 함께 자주 가 보는 근교가 있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마재 마을에 있는 茶山 정약용 生家와 묘소를 다녀온다. 이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어우러진 곳으로 팔당호를 바라보며 한강변 동남쪽에 다산생가가 위치하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정겨운 분위기가 있다. 의미 있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정다산 생가: 여유당) 다산은 그의 회갑에 즈음하여 파란만장한 생애를 올바르게 정리하고자 스스로 묘지명(墓誌銘)을 작성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풍광이 아름다운 이 곳을 마재(馬峴)마을이라고 하였고, 집 앞을 흐르는 한강을 소내(沼川)라고 불렀다. 팔당대교를 거쳐 양평으로 가는 44번 국도를 따라서 경치 좋은 한강변을 달리다 보면 울퉁불퉁한 길로 이어지는 마재 마을로 들어선다. 이 곳은 예로부터 천하의 묵객들이 문밖 제일의 경관이라고 일컫던 곳이다. 광주 산맥 중간에 있는 높고 깊은 산, 운길산으로부터 시작된 능선 끝자락에 있는 다산 생가는 소내천과 잇닿아 있고, 생가 뒷동산에는 노송으로 둘러 쌓인 그의 유택이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첩첩이 가로놓인 높고 깊은 산을 바라보기도 하고(panorama view), 계곡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소내천을 내려다보는 (river view) 경관을 즐겼으리라. 7살 때 다산이 산을 보고 시 한 수를 썼다.
'작은 산이 큰산을 가리네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
세속을 잊으며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느낀다면 어느 누가 시인이 되지 않겠는가? 또한 세파의 괴롭고 슬픈 것들이 봄 눈 녹듯 사글어지지 않겠는가? 사색의 숨길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도 또 가 봐도 좋은 곳이다.
일찍이 지방 군수를 지낸 그의 아버지를 따라 남녘 지방을 다니다가 이곳 소내로 돌아온 다산은 이 곳의 아름다움을 한 편의 시로 남겼다. 서둘러서 고향 마을 도착해보니 문 앞에는 봄 강물이 흐르는구나 기쁜 듯 약초 밭둑에 서고 보니 예전처럼 고깃배가 보이는 군 꽃이 만발한 숲 사이 초당은 고요하고 소나무 가지 드리운 들길이 그윽하네 남쪽 천리 밖에서 노닐었지만 어디 간들 이 좋은 언덕 얻을 거냐! - 還 沼川居(환 소천거; 소내 집에 돌아 와서) -
이와 같이 다산 생가의 경치는 한강변에서는 이 보다 더 비할 곳이 없다고 생각이 든다. 春夏秋冬 어느 때나 이곳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불현듯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리고 눈으로만 느낄 수 없는 깊은 맛, 역사의 향기가 있어서 더욱 아름다움과 그리운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허소치의 자서전 "몽연록(夢緣錄)"과 추사(秋史)의 시(詩)가 다시금 생각된다. 초의 선사와 추사의 제자이며 남종화가의 대가인 소치가 해남 일지암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초의로부터 정다산과 그의 자제 유산(酉山)공의 높은 이름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소치가 어느 날 우연히 노호(鷺湖)에 있는 일휴정(日休亭)에서 추사공(秋史公)형제와 함께 지낼 때 유산공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유산공은 문아(文雅)한 말씨, 온화한 모습과 기쁜 마음으로 편하게 사람을 대하는 훌륭한 인품을 갖춘 분이었다고 소치는 회고한다. 유산공이 소치에게 "나는 두릉(杜陵)에 사는 사람인데 산수가 수려하니 그대는 한 번 찾아오게. 나는 이제 늙었네. 내가 죽은 뒤에 그대가 방문한다면 그 때는 반드시 후회할 걸세"하며 간곡히 청을 하였다 한다. 소치가 47세 되던 1855년 봄(당시 추사, 초의는 70세, 유산은 73세)에 과천에 있는 추사 선생 댁을 방문한 후 퇴촌(현 남종면 분원리)에 있는 권돈인 상공 별장을 찾았다.(권돈인 상공은 추사의 절친한 친구이며, 철종 때에는 영의정을 지낸 분으로 은퇴하여 분원리 별장에 우거하였다.) 권상공은 강 너머를 바라보며, "저 곳은 유산선생이 계시는 두릉이라네" 소치는 강을 건너 문을 두드리니 유산공이 깜짝 놀라며 반가이 맞이하였다 한다. 7. 8일간 유산과 그의 자제들이 소치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소치가 기록한 이 집의 당호(堂號)를 보면 지금도 그 때의 아름다운 경치를 알 수 있다.
沼上 烟波 釣 之家 (소상 연파 조수 지가, 소내강 위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낚시하는 노인의 집) 桃花流水閣 (도화유수각, 복숭아 꽃 잎이 흘러가는 누각) 碧蘆吟舫 (벽로음방, 푸른 갈대로 만든 시를 읊는 배).
소치는 해남, 진도등 풍광이 좋은 곳에서 지냈지만 다산 생가도 江山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치였다고 회고한다. 소내강의 상류로 오르면 동남쪽 오른편 골짜기가 남한강의 이포 나루, 중원 나루로서 그 옛날 많은 선비들이 내왕하였으며, 강의 하류로 내려가면 서울이 지척간이다. 소치는 이 곳을 떠나 올 때에는 배를 타고 광나루로 내려가 서울에 돌아갔다고 기록하였다.
정다산 家門(南人)과 秋史 家門(老論)은 정반대 당파에 속한다. 그러나 추사는 비록 당파가 달라도 다산 가문과 교유를 하면서 이곳의 아름다움을 한편의 시로 남겼다.
들 빛이 가시어 지고 온통 산 골 빛이 다가온다 푸른 유리와 같은 강줄기 펼쳐져 두 산을 감도는 구나
한 가닥 가마 연기 공중에 서리어 치솟는데 쉬이 알겠네 사립문이 강 위에 열린 것을
이 詩는 추사가 일찍이 다산 생가의 소상헌(沼上軒)에 앉아서 주위 경치를 보고 지은 것이다. 아마도 사립문이란 퇴촌에 있는 권 상공의 집을 가리키는 것이고, 가마 연기는 분원(分院:광주의 도자기 업무를 맡던 관청)에서 자기 굽는 곳을 말한 것이다. 지금은 권상공이 머물던 별장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분원리는 다산 생가의 강 건너편에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강변 마을이다. 그리고 분원리에서 강건너로 바라 보는 다산생가 마을도 그 옛날의 향기를 맛보는 것 같다.
이곳에는 민물 생선 매운탕 집과 카페들이 들어서서 많은 남녀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도자기 굽던 곳은 초등학교로 변하였고 사옹원(도자기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 광주분원의 봉사(奉仕)로 일했던 유산공을 기리는 공적비나 역사유적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광주 분원은 최고의 흙과 물. 도공의 혼이 어우러져 조선 왕실에서 쓰이는 도자기를 만들었던 곳으로 최상품의 백자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몇 해 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는 이 곳에서 만들어진 조선 백자가 사상 최고가인 63억원에 낙찰돼 그 가치를 인정받기도 하였다. 매년 10월 중순 광주 분원 왕실 도자기 축제가 붉게 타는 남한산성에서 펼쳐짐으로서 단풍 속에서의 한국 전통과 역사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분원리에서 강 건너 펴을 보면 다산 생가가 보인다) 분원리에서 강변을 따라 귀여리를 거쳐 양평까지의 드라이브는 새롭게 포장된 강변 길을 따라 river view를 만끽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드라이브를 한 번 권하고 싶은 곳이다. 산과 계곡을 따라 가면 전망 좋은 길목에 옛날 원두막들이 있다. 송편을 즐길 수 있다. 밤과 감, 머루와 다래와 같은 가을을 즐길 수 있다. 인심 좋은 이 동내 아낙들의 푸짐한 마음은 옛날을 잊은 우리들의 마음을 한결 기분 좋게 해 준다. 남한강과 북한강변, 그 주위 산과 계곡에는 많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아마도 세계에서 이 곳보다 카페가 많은 곳이 있을까?
「봉주르, 자유 공간, 흰 구름 저편에, 작은 공원, 푸른 여울, 예담, 바라보는 즐거움, 궁전의 추억, 빛과 향기가 머무는 곳, 구름에 달 가듯이, 황새 울, 강 언덕의 개울 목, 초가집, 강변이야기, 산 아름, 재 너머, 꽃이 피는 그대……」
시나 소설제목과 같은 카페 이름들이 좋아 보인다, 이 곳 분위기에 맞는 카페들이 곳곳에 있어 이 곳의 경치가 얼마나 멋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좋은 역사가 있고 훌륭한 경치가 있고 매혹적인 분위기가 있는 이 곳은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인에게는 최고의 관광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10월 네덜란드 헤그시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한 후 독일 Heidelberg에 있는 오랜 친구 효선공을 찾았다. 대학의 도시, 낭만의 도시, 황태자의 첫사랑이 있던 도시에 살고 있는 이 친구와 함께 라인강을 거슬러 쾰른까지 강변도로를 드라이브하였다. 아름다운 라인강의 경치와 古城, 그리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공장들을 보면서 즐거운 여행을 하였다. 라인강변 중 가장 많은 외국 관광객이 들리는 곳이 뤼데스하임(Ruedesheim)과 로렐라이(Lorelei)언덕이다. 뤼데스하임에는 라인강변의 가파른 산언덕에 이룬 포도밭과 이 포도로 빚은 유명한 포도주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많기로 유명하다. 독일 내국인도 많지만 대부분 일본, 한국, 대만인등 아시아와 구라파, 미국 등지에서 오는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곳을 찾는다. 포도주를 즐긴다. 라인의 멋을 즐긴다. 옛날의 역사를 음미한다. 우리는 수많은 카페 중 Hotel Krone 문 밖에 있는 조그마한 카페를 찾았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에서 라인강을 보면서 커피를 즐기고 있다. 친구가 나를 이 곳으로 안내한 이유가 있었다. 1801년 어느 날 독일 낭만시인 "클레멘스 브렌타노"와 독일 역사 법학의 창시자 "칼 사비니" 교수가 여행중 이 Hotel에 들렸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훌륭한 역사 인물과 함께 드는 커피 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일 것이다.
이 곳 다산 생가 주위는 역사도 있고, 멋도 있고, 아름다움도 있고, 젊은 분위기도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도 매우 가까운 곳이다. 세계 어느 곳에 비하여 떨어지거나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이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면 외국 관광객으로 하여금 더욱 멋있는 한국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茶山 정약용은 1762(영조 38)년에 태어나 1836(헌종 2)년에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친 조선조 영조, 정조와 순조, 헌종의 기간이 곧 그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조선조 후기 르네상스라 부른다. 근대의 여명기라고 한다. 그는 여러 방면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민족 최대의 학자. 사상가이면서 탁월한 시인일 뿐 아니라 문화 예술 방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역사적 인물로 오늘도 우리 곁에 정신적으로 살아 있다.
다산이 이곳에 태어난 사연은 옥당(玉堂)을 거쳐 병조참의를 역임한 5대조 정시윤(丁時澗:1646-1713)이 숙종때 당쟁을 피하여 만년에 세 아들과 서자 한 아들을 데리고 소내로 이사와서, 소내의 북쪽에 초당을 짓고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한 세월을 보내게 됨에 따라 다산의 가문이 이곳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이다. 격심한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남인계의 다산 집안은 다산의 고조, 증조, 조부의 3대에 이르기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정재원) 때에 와서야 탕평책을 편 정조의 등극으로 남인계에 벼슬길이 트이자 진주 목사까지 이르렀으나 소내에서의 문과 급제는 다산을 기다려서야 이루어진다. 다산이 태어난 이 해는 조선왕조 후기의 역사를 소용돌이치게 한 큰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다산이 태어나기 약 한 달 전인 음력 5월 13일 사도세자가 폐세자의 처분을 받고 서인(庶人)이 되어 뒤주 안에 갇히어 굶어서 죽어간 사건이 있었다. 당쟁으로 인한 가장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조선 당쟁사의 큰 줄거리의 하나인 시(時)·벽(僻)파의 싸움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났으며, 이 당쟁이야말로 조선후기 정치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오늘까지도 이와 같은 정쟁(政爭) 행태가 연연히 이어 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이 사건은 다산의 일생에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많은 곡절이 파생되어서 뒤를 이어 참화가 계속 일어나게 되었다.
이곳 마재 마을의 다산생가는 다산의 일생에 전개되는 수많은 사건을 일으킨 사연 많은 마을이다. 마을 뒷산의 이름이 유산(酉山)이다. 뒷날 유산은 다산의 큰아들 학연(學淵)의 호(號)가 되었다. 또한 소내의 상류를 두호(斗湖)라고 불렀다. 5대조 정시윤이 이곳에 처음 와서 강(江)이 호수처럼 큰 넓이를 이루고 있음을 보고 지은 것으로 자기 호(號)도 두호(斗湖)로 불렀다.
마재, 소내, 유산, 두호로 불리던 이 마을은 다산의 누님을 아내로 맞은 이승훈(1756-1801)이 처갓집으로 드나들던 곳이며, 큰형 정약전의 처남 이벽(1754-1886)과 서학을 토론하였으며, 다산의 조카를 아내로 맞은 황사영 (1775-1801)이 처가를 찾아오던 곳이었고, 정약종과 친사돈간이던 홍교만(순교자)도 이곳을 출입했다. 우리 나라 천주교 초창기에 혁혁한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15세에 결혼한 후 서울에 와 이익의 증손 이가환(1742-1801)과 이승훈(이가환의 생질 겸 다산의 매부)을 따라 성호 이익의 저술을 읽으면서 학문적으로 성호학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천진암의 강학회에 이익의 문하인 권철신(1736-1801)을 중심으로 이승훈, 이벽, 정약전 등이 참여한 사실을 18세의 정 약용은 의미 깊게 적고 있다. 이 시기에 다산은 서양과학이나 서학, 천주교 교리를 학문연구로서 접촉할 가능성이 컸다. 다산이 스스로 기록한 데 따른다면 23세 되던 1785년에 이벽에게서 처음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한다.
"갑진년(1784) 4월 보름에 맏형수의 기제사를 마치고 나의 형제들은 이벽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을 따라 내려 왔다. 배 안에서 천지창조의 시원(始源)이나 신체와 영혼 또는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의아하여 마치 은하수가 무한한 것 같았다. 서울에 들어오자 이 벽을 따라서 천주실의 등 몇 권의 책을 보고서 비로소 기뻐하여 마음이 기울어 졌다"(여유당전서)
23세의 청년 유학도 다산은 이를 계기로 우주와 인간의 문제에 관한 천주교 교리에 감동하고 심취하게 되었다. 성리학의 우주론으로 정리된 그의 의식 속에 이 천주교 교리는 그에게 폭발을 일으킬 만 하였다. 다산은 천주교를 종교라기 보다는 학문으로 연구를 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다산의 셋째형 약종(1706-1801)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주교를 종교로 믿고 장렬한 순교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다산 생가인 마재 마을 이야말로 명실상부 국내 초기 천주교, 서학의 발원지 역할을 한 피 어린 역사의 장을 남긴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광주군 퇴촌면 천진암 뒷산에는 순교한 천주교 5 성위(聖位) 이벽, 이승훈, 정약종 등 다산의 친인척 3명과 권일신, 권철신 형제의 묘가 있으며 또한 천주교 발상지를 기념하여 100여년에 걸쳐 짓고 있는 천진암 성당과 다산 생가는 가까운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사상이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가 다산이었으니 그가 태어나 자라고, 연구하고 사색하며, 수많은 저서를 쓰고, 정리하여 보관한 곳이 이곳으로 이 나라 민족사의 한 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긴 유배 생활에서 꿈에도 못 잊던 소내 위의 달빛을 그렇게 그리워했던 일이며,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구제하고 인간을 해방시키려던 다산의 경륜과 포부가 이곳에서 배태되었을 것이니 한 많은 다산의 생애에 소내야 말로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던, 운명적으로 묶인 실제의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이었다. 다산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눈다. 그 전반기의 시기는 영·정조 때라고 할 수 있으며, 후반기의 시기는 순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조가 재위 24년인 1800년에 갑자기 서거하자 노론 벽파의 정치적 등장을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왕세자가 12세로 너무 어렸으므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 추사의 먼 친척)가 대왕대비로 정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조 재임시 그가 비호한 정치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론 벽파는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을 일차적으로 제거한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과 권철신 형제 등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 천주교를 믿고 있던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악(邪惡)을 믿고 혹세무민(惑世巫民)한다는 죄목으로 이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다.(신해사옥, 순조원년 1801) 이때 다산은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18년간 다산 초당에 머물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등 500여권의 정치, 경제, 시문학 등 불후의 저서를 남겼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고 싶은 필자는 가끔 이곳에 온다. 다산의 옛터의 산천경계를 바라보니 막혀 있던 마음이 탁 트인다. 지난 6월 어느 무더운 초 여름 함께 이 곳을 찾은 창작수필 문우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다산이 서재로 쓴 여유당(與猶堂)이 보인다. 여유당은 다산의 당호(堂號)로도 쓰였으며, 그의 전집의 명칭이기도 하다. 뒤 후원에는 국회의장을 지낸 그의 후손 정일권씨가 '與猶堂'이라고 쓴 큰 바위 하나가 있다. 이 자리가 바로 다산의 실제 '與猶堂' 터가 된다.
(생가 뒷편 동산에 있는 다산의 묘)
한강을 바라 볼 수 있는 그의 유택을 오른다. 비석을 읽어 본다. 그가 직접 쓴 '묘지명'이다. 다산은 그의 사후에 쓸 비문을 생전에 작성하여 역사를 정확히 알리려고 하려는 그의 마음을 이해 해 본다. 노송으로 둘러 쌓인 다산의 묘소를 참배한 후 주위를 돌아보면 답답한 마음이 떨쳐 진다. 다산의 옛터 둘레의 산천 경계를 바라보니 역시 강산은 아름답다. 물이 좋고 산이 좋아 가슴이 탁 트이고, 우리 나라 최고의 철학가이며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잠든 곳에 서서 마을의 빈터를 굽어보니 초의, 추사, 소치와 권돈인, 조명인등 당시의 풍류객과 권력자들이 당파와 이념을 초월하고 이 곳에 모여 학문과 예술을 논하고, 한잔 술과 함께 시·서·화를 즐긴 다산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진다. 75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는 동안 10여년의 벼슬살이, 18년의 귀양살이를 제외하고는 50여년의 세월을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올라 이 나그네의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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