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실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나에게 키스하기 직전 당신 입술을 닦으시는 모습, 오래된 가죽 재킷에 고기 조각의 지방 줄무늬 같은 흰 줄기가 있는 모양, 갓내린 눈이 발밑에서 뽀드득거리는 느낌, 이기의 팔이 너무도 통통해서 끈으로 묶어놓은 소시지 같은 것 등을 알아차리는 법을 문학은 가르쳐준다.
맨눈으로 보는 풍경보다 카메라 렌즈를 통과한 풍경이 더 실감날 때가 있듯이 문학의 렌즈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무질서한 일상의 장면들을 보다 증강된 실재성으로 주목하게 하는 힘이 있다. 어떤 인물의 특징만을 포착한 캐리커처가 그 인물에 대한 세밀화보다 훨씬 더 생생한 실재감을 줄 때가 있는데 그 비밀은 바로 제임스 우드의 말처럼 감각에 의지해 대상의 세부를 지배적 인상으로 돋을새김하는 데서 온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변화를 알아채고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 혹은 장신구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는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듯이 세부를 보는 감각은 독자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그뿐만 아니라 잊고 있던 기억을 부활시키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나에게 키스하기 직전 당신 입술을 닦으시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어머니의 말투나 체취로 연상을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체취는 음식 냄새를 불러올 수도 있고, 특별히 좋아하던 음식에 관한 추억들로 지평을 넓히면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기억 저편의 삽화들이 감자 넝쿨처럼 줄줄이 딸려 나올지도 모른다.
세부를 보는 감각은 이렇게 기억을 소환하는 힘이 있다. 기억과 기록이 만날 때 과거는 현재와 공명하는 새로운 시간대로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박제된 사물들에 숨결을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의 자신을 성찰하는 창조적 시간으로 거듭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르셀 프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감각의 가치이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소설 속 주인공은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한 입 베어 물게 되는데 이때 입 안 가득 퍼지는 향기와 맛에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주인공은 그 맛의 실재를 찾아 가기 위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그간 잊고 지냈던 성장기의 기억을 통해 주인공은 진정한 의미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깨달음을 얻는다. 이 모든 일이 마들렌 과자의 감각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되찾는 방법으로서 감각에 대한 집중은 궁극적으로 시간 속에 소멸해 가는 유한자의 비애를 넘어서는 자유를 맛보게 한다. 제주 4.3의 자각로 알려진 소설가 현기영은 성장소설 '지상의 숟가락 하나'를 쓸 때 그의 편집자였던 필자에게 유년시절의 기억이 국방색의 공포에 짓눌려 잘 풀어지지 않는다는 푸념을 한 적이 있다. 프루스트의 감각을 잘 참조하면서 유년을 온통 흑색으로 칠해 버린 역사의 고통 속에서 비로소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누군가 내게 만약 유년시절 떠나온 고향의 감각을 묻는다면 나는 코에 물이 들어왔을 때의 톡 쏘는 그 매운 느낌에 관해 들려주어야 하리라. 고향 ㄴ앳물에서 무자맥질을 치고 놀다보면 가끔씩 그런 때가 있었다. 물비린내와 매운 내가 미묘하게 섞인 그 감각은 냇물을 어미의 젖꼭지처럼 물고 있는 들판과 마을의 기억을 신체처럼 간직한 농경문화적 정서의 등가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도회의 골목들을 떠돌며 나는 이 감각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마치 스포이트로 물을 빨아들이듯이 코를 킁킁거리곤 하였다. 코가 매워 오면 어쩐지 고향 강변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세숫대야의 물을 고향 강물로 바꿔 주던 그 매운 물은 이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아마도 귀향을 할 수 있는 고향은 이제 이 기이한 감각밖에 남지 않았다는 슬픔 땜ㅜㄴ이 아니었을까. 이 매운 물의 감각은 아직 시가 외지 않았으나 지금도 한 번씩 귀성하는 그 매운 감각이 부활시킨 기억의 시를 보자.
생년월일 사이엔 할머니의 태몽이 없고
첫손주를 맞은 소식을 고하기 위해
소를 끌고 들판에 나가셨다는 할아버지의 봄날 아침이 없고
광주고속 거북이 등을 타고 와서 여기가 용궁인가
동천 옆 고속터미널에 앉아 있던 소년의 향수병이 없고
길바닥 보단 지붕을 좋아해서
못을 징검돌처럼 밟고 슬레이트 지붕을 뛰어다니던
도둑괭이 문제아가 없고
맥주병 소주병 환타병을 깨서 송곳니를 드러낸 담벼락처럼
가난하고 겁많은 눈망울을 숨기기 위해
아무 데서나 이를 드러내던 청춘이 없고
남포동 통기타 음악실 무아에서 허구한 날
죽치고 앉아 있던 너를 보내고 난 날 시작된
서른 몇 해 동안의 기다림이 없고
신춘문예 응모하러 가던 겨울 아침
그게 무슨 입사지원서나 되는 줄 알고
향을 피우고 계시던 어머니가 없고
참 신기하지 재가 되었는데 무너지지도 않고
장을 비집고 든 바람 앞에서 우뚝하던 향 냄새가 없고
늦깎이 근로장학생으로 대학 건물 수위를 보던 그때
일 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힘내라고
밥을 사준 이름도 모를 그 행정실 직원이 없고
이후로 나를 지켜준 그 밥심이 없고
이력서엔 영영 옮겨올 수 없는 것들로 하여
구겨진 이력서에 나는 시를 쓰고 있네
손택수, 이력서에 쓴 시, (현대문학. 2020.10)
이 시에는 향수병을 앓는 소년의 성장기가 나온다.
실향과 실연 그리고 실패로 얼룩진 성장기를 통과하며 문청시절을 보내고 있는 시적 자아는 이력서에 옮길 수 없는 삶의 결정적 장면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다. 고향을 떠날 때 타고온 버스가 하필 '광주고속'인 것은 실제 경험과 무관하게 '거북이'라는 도상이 아이러니를 실현해 주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물결에 따라 이촌향도의 거센 흐름에 떠밀려가는 고속의 시대를 거북이의 속도로 통과하는 자전을 통해 전혀 다른 리듬을 살아내야 하는 근대인의 비애가 읽히길 바라기도 하였을 것이다. 구체적 실촌을 추상화하는 이력서가 고속의 기호라면 그 기호 너머로 잊힌 자잘한 서사들과 '영영 옮겨 올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사라진 향냄새 같은 감각이 거북이의 기호들이다. 어질머리를 일으키는 이 아이러니한 속도 위에 가난과 유랑으로 점철된 가족사와 음울한 청춘의 기록들이 겹쳐진다. 그 과정이 마냥 행복했을 리만은 없다. 고통스럽고 부끄럽기도 해서 외면하고 싶은 자아의 기억은 그러나 '밥심'을 길러준 더 큰 자아와 만나면서 나와의 소통을 연대의 가능성으로 열어 놓는다. 고통이 소통의 길로 나아가면서 '영영 옮겨 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경청과 '이력서를 구기는 행위'는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같은 층위에 놓이게 된다. 이 시는 결국 시인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시에 대한 생각으로 갈무리되고 있다. 시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고백을 통해 정화의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면 어떨까. 미적 완성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리고 구체적 경험이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항구적 문제에 보다 핍진하게 근접할수록 정화의 밀도 또한 정비례하여 높아질 것이고 그 역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자신에 대한 글쓰기는 기원에 대한 기억과 고백, 궁극적으로 는 자기 귀환의 시도로서 장르를 막론하고 지난한 일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일처럼 머나먼 길도 없다. 시를 통해서 간신히 우리는 그 여행지를 향한 여정을 떠날 수 있을 뿐이다. 길 위에는 상처도 있고 외면하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최초의 트라우마에 연결되는 순간 울음이 터질지도 모른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소로는 회고록 '월든'의 원고를 8년에 걸쳐 무려 일곱 번이나 새러 썼다는 사실이다. 일곱 번의 개작은 소로의 기억이 편집되었음을 알려 준다. 편집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흩어져 있는 기억과 가물가물한 사건들에 형태와 구성을 부여하는 선택과 ㄹ배제의 기술이다.
'이력서에 쓴 시' 역시 모든 기억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비애의 정조를 거드는 삽화들과 삶의 구체성을 환기하는 디테일한 감각들로 질서화되어 구성되었다. 이 시에서 선택된 '지붕 위의 도둑괭이나 송곳니를 드러낸 담벼락, 재가 되어서도 무너지지 않는 향' 같은 이미지들이 내 나름으로는 실감을 주기 위해 궁리 끝에 고안된 장치들이다. 고백의 거울을 허구라는 틀 속에 담아낸 것이다. 시에서 고백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최초와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허구를 전제에 둔 발화이기 때문에 그 어떤 기억이든 새롭게 구성하고 그 어떤 고백이든 포용할 줄 안다. 자아의 연금술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창조한다는 믿음과 고백할 줄 아는 용기로부터 오는 것이라 하겠다. 자신을 제재로 한 시일수록 문학은 진정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신화를 지나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경직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진정성 있는 소설가, 평론가, 희곡가 중에서 진정성이 빠져 있음은 논리적으로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라는 말도 있거니와 시인은 언어가 약속된 허구라는 사실을 수용하면서 시 자체가 생동하는 진실 쪽에 서 있게 해야 한다.
<손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