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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일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文敬壽
동학당의 봉기와 그 분란이 끌어들인 청일전쟁으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던 갑오년도 어느새 저물어가는 동짓달 초순이었다. 해서(海西)의 겨울은 유난히 매서운 추위로 벌써부터 두껍게 얼어붙었다.
갑자기 까마귀 울음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며 젊은이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들어서 그런지 그가 사냥을 그치고 병풍산을 내려올 때부터 뒤따르듯 하던 소리였다. 무엇 때문인지 젊은이가 주름 잡힌 미간을 들어 머리 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간 까마귀에 화답하듯 또 다른 까마귀 몇 마리가 저편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가만히 고삐를 말안장에 걸친 젊은이가 재빨리 화승총을 빼내 들었다. 그 고장 사람들이 흔히 '돔방총'이라고 부르는 총신(銃身)을 짧게 한 화승총이었는데, 미리부터 화약과 탄환이 재워져 있고 화승마저 끼워져 있었던 듯했다. 빼든 총을 왼손으로 옮겨 쥔 젊은이는 이어 오른손으로 조끼 주머니에서 당황(唐黃) 한 개비를 꺼내 안장의 딱딱한 곳에 그었다. 나중에 딱성냥으로 불리게 된 박래품(舶來品) 내풍인촌(耐風燐寸)이라 가벼운 발화 소리와 함께 바로 불이 일었다. 그 불을 화승에 붙인 젊은이가 총을 들어 하늘 한 구석을 겨냥했다. 연신 불길한 울음소리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머리 위를 날아가는 까마귀 쪽이었다.
오래잖아 요란한 총포소리와 함께 젊은이의 머리 위 오륙십 걸음 되는 곳을 비껴 날던 까마귀 가운데 한 마리가 검은 깃을 사방으로 흩으며 떨어졌다. 나중에 그의 삶을 기록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 위에서 나는 새를 맞혀 떨어뜨렸다"고 증언하는 그의 빼어난 사격 솜씨였다. 남은 까마귀들이 놀란 울음을 삼키며 황급히 가까운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중근이고 성은 순흥(順興)을 본관으로 하는 안(安)씨였다. 이름이 중근인 것은 젖먹이 때부터 주변의 자극에 너무 예민하고 반응이 빠른 그의 성격을 가볍다고 여긴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집안의 항렬자인 근(根)에다 무거울 중(重)자를 얹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그의 몸에 북두칠성을 닮은 일곱 개의 점이 있다 하여 응칠(應七)이란 이름으로 그 상서로움을 기렸고, 아버지 안태훈은 따로 아들에게 자임(子任)이란 아명(兒名)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릴 적에 가장 많이 불린 이름은 응칠이었고, 관례와 혼례를 치른 뒤에는 관명인 중근이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