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9. (가), (나) 시기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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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불태우고 왕의 측근 세력들을 제거하였으며, 인종을 감금하였다.
(나) 최충헌은 최고 집권 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으며 신변 경호를 위하여 도방을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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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② 거란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③ 최영과 이성계 등 신흥무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④ 삼별초가 배중손의 지휘로 몽골과의 항쟁을 계속하였다.
정답: ①
* 이자겸의 난(1126)과 최충헌 집권(1196) 사이의 역사적 사실
(가) 고려 전기 최대의 문벌귀족인 경원 이씨 이자겸은 딸들을 예종(1105~1122)과 인종(1122~1146)의 왕비로 두어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다 국왕의 자리까지 넘보기에, 왕위 유지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궁궐이 불타는 등 위기에 처했다. 이를 이자겸의 난이라 한다(1126). 그러나 얼마 후 인종은 이자겸의 부하인 척준경을 시켜 이자겸을 제거하였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나) 이의민을 타도하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1196~1219 집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1209)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고,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이후의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① 1135년 묘청의 서경파는 서경천도를 추진하였으나 개경파의 반대로 실패하자, 칭제건원, 금국정벌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키었다. 개경파 김부식의 토벌로 1년 만에 막을 내리었다.
② 993년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으나(993), 서희의 외교를 통해 고려는 오히려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994).
③ 고러말(공민왕~우왕)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홍산대첩, 1376), 이성계(황산대첩, 1380) 등의 무장들이 명성과 세력을 얻어 신흥 무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④ 고려 정부가 몽골과의 항쟁을 끝내고 개경으로 환도하자(1270),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를 거부하며 배중손(후에 김통정)의 지휘 하에 강화도, 진도, 제주도에서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항하여 항쟁하다 결국 진압되었다(1270~1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