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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금강은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 ⑨
이 대 영
▣ 어둠을 걷어 내는 소리
분명, 어둠을 걷어 내는 소리였다. 일자다음과 싱커페이션 형식의 가사에 3소박을 기본으로 하는 불규칙박의 장단형 소리는 어둠을 걷어 내며 정령들을 소집하는 듯했다. 징과 북의 여음으로 트인 통로를 따라 정령들이 집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호기심에 뒤따라 온 잡귀들은 문 앞에 놓인 황토를 보고는 똥줄 나게 달아났다.
정 보살은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쟁이 끝난 후 마을에서 처음 여는 안택굿이었기에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우선, 참숯에 불을 지펴 무쇠 다리미에 담아 흰옷을 곱게 다렸다. 그런 다음 목욕재계 하고 쪽머리를 한 후 아끼던 옥비녀를 꽂았다. 기본 경문도 읽어 보고 상 차리는 법, 굿하는 절차 등도 상기했다. 또한 어제 준비한 축원문, 지방, 위목 등을 챙기고 일진까지 짚어보는 치밀함을 보였다. 한지를 잘라 정성껏 만든 대나무 신장대도 접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굿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오전부터 양씨 댁 일손을 거들었다. 양씨와 먼 친척간인 서 서방은 이틀 전부터 뒷산에서 황토를 파와 대문 입구 양쪽에 세 무더기씩 던져 놓고 왼새끼를 꼬아 대문 위에 금줄을 쳤다. 허 대장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고, 서 씨는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거쳐 큰길까지 나아가며 빗자루로 쓸었다. 광재는 아침 일찍 양 씨 집에 들러 눈도장을 찍은 뒤, 남 서방과 함께 정 보살 집으로 달려가 무구를 옮겨왔다. 물론 이 모든 흐름은 양 씨의 부탁을 받은 이 행수가 주관했다.
오후부터 여자들은 더 바빠졌다. 팥시루떡, 불밝이쌀, 삼색 과일, 나물, 과자, 청수, 술, 국밥 등을 준비해야 했다. 아이들도 ‘정’을 읽는다며 덩달아 흥이 올랐다. 이곳 사람들은 ‘경’이라는 용어 대신 ‘정’이라고 표현하여 안택굿을 할 때면 ‘정을 읽는다.’고 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어른들은 경황이 없다며 모두 바깥마당으로 쫒아냈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숨바꼭질이나 말뚝박기놀이를 하며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개들까지 아이들과 어우러져, 집 밖은 집안의 엄숙함과는 달리 잔치분위기였다.
굿은 부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내칭이에 사는 작은 보살이 안방에서 정 보살을 모셔왔을 때는 이미 부엌에 조왕경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굿이 있는 날이면 동네로 내려와 행사를 거드는 완진이 모친을 ‘작은 보살’, 혹은 ‘대잡이’라 부르곤 했다. 그는 집에 굿당을 차리지는 않고, 집 인근의 산중에 있는 큰 바위에 치성을 드리며 신을 섬기고 있었다. 신 내림을 피하려고 치성을 드리고 신장대를 잡으며 조상신을 달래며 지내고 있었다.
정 보살이 집에 도착하자 양 씨는 가족의 안녕과 조상의 복을 빌고, 지난 전쟁 통에 죽은 아내와 딸의 영혼을 위무해달라는 부탁을 재차 했다. 정 보살은 그를 위로하면서 지난 전쟁 통에 양 씨가 많이 늙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 보살은 부엌에 들어서자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숯을 물에 띄운 부정상 앞에서 경을 읽기 시작했다.
“동방대살 부정소멸 남방대살 부정소멸 서방대살 부정소멸 북방대살 부정소멸
중앙대살 부정개실소멸 종종부정 속거타방 만리지외 옴 급급 여률령 사바하”
‘부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소멸’을 거쳐 ‘사바하’에 이르기까지 부정경은 낮고도 엄중하게 이어졌다. 정 보살은 경 읽기가 끝나자 부정사발을 문밖으로 내던졌다. 공교롭게도 사발은 마당으로 들어서던 광재의 발 아래로 굴러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귀신이 지나가는 줄 알았네!”라며 호들갑을 떠는 그를 본 구경꾼들은 저마다 웃음을 참기에 바빴다. 황 서방 댁은 “부정사발이 용케도 사람을 알아본다!”며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부엌에 있던 작은 보살마저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막지는 못했다.
부정풀이가 끝난 후, 정 보살은 조왕경 상차림 앞에 몸을 바르게 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에 고깔을 얹었다. 조왕신을 청배하기 위함이었다. 조왕신은 불의 신으로 부정과 악귀, 잡귀 등의 출입을 막아 집안의 식복을 관장하기에 안택굿에서 부정을 물리친 다음에는 조왕신을 제일 먼저 청배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더-더-덩-덩’하고 북이 울리고 꽹과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정 보살이 ‘상피피제 조왕신’으로 경을 시작할 때만 해도 사람들은 긴장이 풀리지 않은 듯 연신 눈을 껌벅였다. 그러나 경이 이어지고 무악이 ‘다당! 다당! 다다당! 다다당! 다당! 다다당!’ 하고 음이 고조되자 사람들의 몸도 절로 부엌문으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 서방 댁이 황 서방 댁을 앞으로 밀쳤다가, 황 서방 댁이 다시 오 서방 댁을 밀치며 굿을 즐기고 있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나무불타야나무달마야나무승가야사바하” 하고 조왕경이 끝나자 작은 보살이 정 보살에게 조왕소지를 건넨다. 정 보살은 소지를 촛불에 댄 후 축원을 시작했다.
“대주 양 씨와 3남매 자손들이 년년세세히 살아가더라도 일 년은 삼백육십일을 하루같이 도우시와 몸수건강 신수건강 재수대통 만사형통하게 도와주시고 우연득병이나 관재구설 시비구설 등을 막아주시고 자손들은 창성하게 도와주시고 무병장수 부귀공명하게 점수하여 주시옵고 세세찰지를 하옵소서.”
죽은 양 씨 부인이 기주로서 소지를 같이 올려야했지만 그의 부재로 양 씨의 큰딸이 기주가 되었다. 정 보살은 양 씨 집 식구 수대로 소지를 올렸다. 소지는 쉽사리 타올라 부엌 천정으로 날아오르다 제 풀에 꺾여 땅으로 주저앉았다.
부엌에서 조왕경이 끝나자 작은 보살을 비롯한 여자들은 조왕경 상차림을 장독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정 보살은 양 씨 큰딸에게 소지가 부드럽고 가볍게 올라갔다며 굿이 잘 진행되고 있음을 알렸다.
조왕경이 진행되는 동안 양 씨는 안방에서 굿 장단에 눈을 지그시 감고, 전란 중에 죽은 아내와 막내딸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과 맏딸, 그리고 두 아들은 다행히 목숨을 유지했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의 상처는 덧나기를 거듭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집터 곳곳에 배어 있는 망자의 체취를 지울 수는 없었다. 또한 며칠만 더 기다리다 떠나자는 맏딸의 청을 들어 주었다면 ‘죽음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으로 괴로웠다. 바지를 입지 않고 검정색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피난길에 나섰던 아내를 나무란 것도 후회가 되었다.
피난민의 행렬은 가관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이불과 식량, 주방도구들을 지개에 얹고, 여자들은 아이를 엎거나 큼지막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무작정 앞사람을 따라갔다. 아이가 아이를 업고, 노인이 노인을 업고 가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어떻게든 함께 살아야 한다.”는 부모들의 반복된 말과 학습은 아이들에게 주술이 되어 그들을 앞으로 나가게 했다. 그 와중에도 소달구지나 손수레에 짐을 가득 실고 출발한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미련한 사람들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기민하게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나 험한 소로에서 자기 자신 이외에 모든 것은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항공사격을 받은 후, 달구지나 손수레를 버리고 당장 필요한 짐을 챙기느라 뒤처지고 있는 가족도 여럿 생기고 있었다. 양 씨도 집을 떠나기 전,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두 아들의 지개에 짐을 챙겨 나온 것이 잘 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가 믿는 것은 아내가 소지한 패물과 그의 배에 있는 두둑한 전대였다.
어떤 이는 집에서 쓰던 오동나무 장롱까지 지개에 짊어지고 나와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남을 탓하거나 비웃을 상황은 아니었다. 전쟁 중에도 효자들은 여전히 효행을 실천하고 있었다. 지개, 손수레, 소 등에 노부모를 태우고 힘겹게 대열을 따라붙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장애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지개에 태우거나 긴 끈을 손에 묶어 사람들 속에서 잃어버릴 것에 대비했다.
양 씨 일가는 그래도 공주를 거쳐 유성으로 넘어가는 마티고개까지는 남 서방이 끄는 달구지로 그런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행수의 집에서 가져온 달구지였다. 그러나 남 서방의 귀환 길을 생각해서 고갯마루부터는 다른 난민들과 함께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세천역까지 이동하여 기차를 탈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성과 대전 시내를 거쳐 식장산 근처에 이르자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신탄진을 거쳐 북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공주를 거쳐 올라오는 사람들, 그리고 인근 주민들이 한꺼번에 몰려 역사 근처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식장산의 이름 그대로 먹을 것이 저장되어 있다는 전설의 산이라 그런지, 많은 난민들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구정골, 가는골, 쇠정골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이틀 혹은 사흘씩 밤을 새우고도 여전히 기차를 타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아예 피난을 포기하고 식장산 숲속으로 숨어들어와 움막을 짓고 생활하는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고도 했다. 멀리서 역사를 기웃거리는 남편을 바라보던 그의 아내는 남편의 팔을 끌고 증약으로 이어지는 구정리로 길을 잡았다. 이원역에서 기차를 탈 수만 있다면 행운이겠지만 아예 기대를 접었다. 하루 이틀 기차를 기다리는 사이 언제 인민군이 밀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일단 대구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이 정해지자 생각이 단순해졌다.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고 같은 길을 걸으면 되는 일이었다. 거기서부터는 지도가 따로 필요 없었다. 온갖 행색으로 길을 이어가고 있는 피난민의 행렬은 마치 인간시장 같았다.
국도와 지방도, 그리고 때로는 산길을 따라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지기까지 걷고 또 걸었다. 앞 사람이 서면 같이 서고, 누군가가 엎드리라 소리치면 같이 엎드리고, 어딘가도 모르고 따라가는 행렬이 이어졌다. 새벽이 되면 다른 사람을 따라 일어나 걷다가 앞서던 사람이 냄비를 걸고 밥을 지으면 따라 짓고, 날이 어둑해지면 잠자리를 찾았다. 국군을 만나면 양 손을 들어 만세를 부르고, 인공기가 나타나면 몸을 은폐하고, 저녁이 되면 다리 밑이나 둑 아래에 자리를 펴고 생활했다. 때로는 마을에 아이들을 앞세워 하룻밤 묵기를 청하면, 대부분은 허름한 곳간이라도 내어주는 인정이 있었다. 굶주려 몸이 망가지고 잠자리가 불편한 것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길가 여기저기에 버려진 시신들과 동물들의 사체, 그 주변을 맴도는 파리 떼, 밤마다 악착같이 달려드는 모기들, 하수구에 처박힌 군화와 철모, 부서진 차량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물 등은 참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양 씨는 자신이 정말 피난을 갈만큼 지주인가를 곱씹어 보았다. 트럭에 꽤 값이 나가는 가구들을 싣고 남으로 피난을 내려가는 가족들을 보면서 자신은 거지나 다름없는 존재였음을 체감했다. 남들보다 전답 몇 덩이가 고향에 남아 있고, 자신의 몸에 지닌 두툼한 전대가 있다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피난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남한에 땅 몇 덩어리 가지고 있는 지주들은 모두 인민재판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양 씨는 서둘러 집을 빠져나온 것은 북한군 3사단과 4사단을 방어하기 위해 미 34연대와 19연대가 금강진지를 급하게 구축하던 시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호텔 벨 보이를 하던 큰 아들이 내려와 피난을 재촉하지 않았다면 그는 공주를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저 생각 없이 걷고 걸어 대구든 부산이든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양씨 가족이 옥천, 영동, 김천, 구미에 닿기까지 이주일 가까이 걸렸다. 왜관, 포항, 성주, 거창을 점령하여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인민군과, 서울에서 밀려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항전을 이어가고 있는 연합군 사이의 전투는 실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전날 밤, 가족에게 잠자리를 제공했던 사내는 “왜관의 철교가 아직 폭파되진 않았지만 군용차량과 난민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룰 터이니 아예 거기로 갈 생각은 하지 마쇼!”라며 충고했다. 칠곡에서 왜관나루나 강정나루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강을 건너기도 전에 사람들 발에 밟혀 죽을 것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차라리 비산나루를 거쳐 대구 시내로 들어가는 것이 났다고 조언을 해줬다. 낙동강과 구미 구간에는 동락, 비산, 강정, 강창, 용산, 송당, 월골, 가산 등 총 여덟 개의 나루가 있는데 평균 6㎞마다 한 개씩 나루가 놓여 있다고 했다. 비산나루에 가면 사공을 만날 터인데, 그의 성씨가 전 씨로 자기의 육촌 조카라며 “지산 땅에 사는 양기백이 안내해서 왔소.”라고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자기의 가족들도 이미 조카의 배로 대구로 내려가 있으며, 자기도 오늘 내일 사이로 집을 떠날 것이라는 말도 했다. 혹여 사람들이 몰려 정 배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에는 수심이 얕아 도섭이 가능한 지점이 있다며 약도까지 그려주었다. 또한, 이틀 전부터 내리는 비가 그칠 것 같지 않다며 대나무 우산과 함께 다섯 식구에게 비료포대로 우의를 만들어 주었다. 양 씨는 같은 나주 양 씨로 그와 종친임을 강조하며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꼭 찾아뵙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양 씨 일가가 새벽을 이용하여 나루터 근처에 이르렀을 때, 둑길 아래로 피난민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이미 포탄을 맞아 움푹 파인 웅덩이를 은신처 삼아 도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수영에 능한 사람들은 수심이 얕은 곳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불어 난 물에 고전하는 듯했다.
나루터에는 한 척의 배가 둑 밑이나 웅덩이에 십여 명씩 사람들을 모아 놓았다가 건너편으로 나르고 있었는데, 호객꾼인 사람이 돈을 미리 받아 놓고 사람들을 호명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모인 사람들은 순번을 받아놓고 행여 다른 사람들이 틈을 비집고 들어올까 눈을 치뜨고 있었다. 사람들의 무리를 보니 한 나절은 더 기다려야 될 듯싶었다. 노심초사하고 있는 사이, 강 건너편에 사람을 내려놓고 돌아오는 나룻배가 보였다. 배가 나루에 도착한 것을 본 양 씨는 큰 아들을 무작정 뱃사공에게 보냈다.
“가족이 다섯인데 지산에 사는 양기백 씨의 소개로 왔습니다.”하고 전하라 일렀다. 아울러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나주 양 씨 종친으로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계시던 분입니다. 어젯밤에 양 씨 어르신 댁에서 자고 오늘 이리로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답하라고 일렀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호텔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어서인지, 아들은 두어 번 반복학습을 하더니 종종 걸음으로 나룻배로 향했다.
큰아들이 자리를 뜬 후 양 씨 아내는 안절부절 못했다. 맹수 근처에 있는 새끼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어미처럼, 그의 시선은 아들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다음 순번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달려 나가고, 그 뒤를 이을 사람들이 나루터 근처로 이동했다. 여전히 후방에서는 포성과 총성이 끊이질 않아 사람들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미 B26전폭기와 F82전투기는 연일 금산, 제천, 여수, 광주, 대전 등 북한군 보급차량을 폭격했으며, B29전폭기는 흥남, 영흥지구 통신망을 폭격하며 북한군을 무력화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국군 8사단은 안동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난민들은 비라도 내리지 않으면 살 것 같았으나, 역으로 생각하면 땡볕 속에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았다.
큰놈은 한동안 뱃사공에게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일을 보조하는 사람에게까지는 접근하여 아버지가 일러준 말을 전하는 듯했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 몇이 일어나 수작부리지 말라고 고함을 치는 듯도 했다. 일이 잘 안 된 듯, 나룻배는 다시 강으로 나아가고 아들은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멀리 돌아 가족에게 돌아왔다. 풀 죽은 아들은 사내가 들은 체도 하지 않더라고 했다. 그리고 열일곱 번째라며 17이라고 적힌 누런 쪽지를 받아왔다. 양 씨는 난감했다. 순서대로라면 또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른 나루터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거기도 별반 다를 바는 없을 것이었다.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양 씨 아내는 바로 보따리를 풀어 아이들에게 삶은 옥수수 하나씩을 건넸다. 아침에 지산 노인이 챙겨준 음식이었다.
나룻배가 다시 돌아오자 또 한 무리가 나루터로 이동했다. 그 자리를 다른 무리가 채웠다. 양 씨는 싫다는 큰아들을 설득하여 다시 사공에게 보냈다. 아들의 손에는 마지막 삶은 옥수수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아들은 사공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한 듯싶었다. 그러더니 황급하게 가족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아들의 표정이 사뭇 달라 보였다. 가족 전체가 동시에 탈 수는 없으니 한 명씩 무리에 끼어 배에 오르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감지덕지한 배려였다.
어렵사리 도강을 마친 양 씨 일가가 무작정 찾아간 곳은 대구역이었다. 역전 근처에 가면 동향인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미 대구역 뒤편에 있는 칠성동 방향의 담장 밑 공터에는 많은 난민들이 짐을 풀어 놓고 있었다. 또한 신천변에는 난민촌이 수십 미터 이어져 그들이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었다. 그들은 네 귀퉁이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이불보로 천막을 치거나 볏가마니로 지붕을 얹어 난민촌을 형성해갔다. 바닥 역시 볏가마니나 종이박스를 깔아 눅눅한 기운을 차단했다. 양 씨는 전대를 풀어 지전 일부를 비닐봉지에 담아 바닥에 깔린 종이박스 속에 나누어 깔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난생 처음으로 타향살이 겸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양 씨 일가가 집 같지 않은 집을 짓고 피난민들 틈에 끼어 숨을 돌린 지 하루도 안 되어 포성이 지축을 흔들기 시작했다. 비산나루터 근처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었다. 이미 왜관철교는 아군에 의해 폭파되었다고 했다. 북한군은 마진나루로 도하하기 위해 홀소나루터와 비산나루터에 1개 중대를 투입하여 기만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북한군 15사단의 도하작전에 맞서 강변에 배치되었던 국군 15연대 2대대의 화기가 불을 뿜는 소리가 시내 전역을 삼켰다. 그 후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려는 연합군과 북한군의 교전으로 총성이 끊일 날이 없었다. 불안한 나날이 이어지자 양 씨 일가도 부산으로 내려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피난민들은 어차피 낙동강이 뚫리면 어디를 가도 죽기는 매한가지라는 의견에 동조했다.
도피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죽이든 밥이든 아침을 맞이한 아이들은 역전 시장을 한 바퀴 돌거나 공터에 모여 놀이를 시작했다. 어른들은 신천으로 나가 빨래를 하거나 몸을 씻었다. 그리고 점심 내내 아이들의 옷을 벗겨 이를 잡거나 부지런한 이들은 광주리나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전란 중에도 시장은 여전히 북새통을 이루었다. 역전시장에는 봉초, 양담배, 금붕어장수, 사진사, 엿장수, 구두수선공, 지게꾼, 여관, 상회, 이발소, 푸줏간, 호떡장사, 수수떡 등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중실행의 아픔과 허기를 달래주는 막걸리 대폿집과 국밥집은 단연 인기였다. 아이들은 대개 낮에는 인근 초등학교나 종교시설에 나가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받기 보다는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급식으로 주는 우유나 보급품을 받아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공터 한 편에 설치되어 있는 공공화덕주변에서 놀다 뜨거운 물에 탄 분유를 얻어먹으려 줄을 섰다. 특별히 벌이가 없는 어른들 또한 적십자사에서 이따금 트럭으로 날라다주는 보급품을 타러가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양 씨에게 말동무가 되어 주는 이는 옆에 움막을 친 40대 중반의 사내였다. 아이 셋과 함께 내려왔다는 그는 자기가 차지한 일부 영역을 내어주며 그곳에 움막을 짓게 한 인심 좋은 사내였다. 무주에서 아내와 아이들 둘을 데리고 피난 온 그는 시내 곳곳을 찾아다니며 일거리를 구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비오는 날에는 그동안의 시골생활과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 전쟁 중에 일어난 기막힌 이야기들을 쉼 없이 이어가는 재담꾼이기도 했다.
그가 사는 무주군 적상면은 전쟁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미 빨갱이 세상이 되었다고 했다. 남부군 사령관으로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이현상은 무주에서 가까운 금산군 군북면 출신이었고, 조선노동당 충남도당위원장이었던 남충렬은 경남 함양 출신으로 논산, 금산, 전북 완주에 걸쳐 대둔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가 살던 동네가 적상산 인근에 위치해 있고, 백운산, 민주지산, 덕유산의 지맥으로 이어져 있어 유독 남로당원과 빨치산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고 했다. 그는 괴목리에서 빨갱이들이 인민재판을 열어 동네사람과 군인, 경찰 등을 살해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며, 꼭 일제 강점기 완장을 차고 날뛰던 왜놈 순사보다 더 징한 놈들이라며 탄식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던 그의 부인은 ‘불알 까던 이야기’는 왜 안하냐며 피식 웃었다. 사내도 히죽 웃으며 그가 살던 치목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을의 빨갱이 끄나풀과 빨치산이 미군 네 명을 생포하여 두 손과 다리를 묶어 나무에 매달더니 옷을 벗기더라는 것이었다. 양키들의 거시기가 얼마나 큰 지 확인해보자는 것이었다. 와중에도 코도 크니 거시기도 클 거라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것이 없자 빨갱이들은 “별 것도 아닌 것들이 까분다!”며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만지고 별 장난을 다했다고 했다. 재미가 시들해지자 미군들을 나무에서 풀어 놓을 즈음, 때맞춰 미군헬기가 나타나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미군들은 숲으로 도망을 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내는 아내를 바라보며 “미군도 별것 아니니 마누라도 침 흘리지 말어!”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들은 양 씨 부인도 ‘씩’ 웃으며 “명심하리다!”라고 대응했다. 실로 오랜만에 짓는 그의 미소였다.
북한군의 9월 공세로 미 제8군사령부와 한국 국방부, 그리고 육군본부가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겼다는 소문이 난민촌에 돌았으나 사람들은 더 이상 움막을 떠날 수는 없었다. 양 씨 일가가 대구에서 보름 가까이 생활을 하는 사이, 전대에 있던 돈이 다 떨어지고 바닥에 숨겨 놓은 돈을 쓸 즈음이었다. 그때, 뜻밖에도 그를 찾아 온 것은 지산에서 만난 양기백 노인이었다. 여기에 있는 줄도 모르고 신천변에서만 그들을 찾았다며 그가 사는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양 씨 일가가 도강을 조금만 지체했어도 낙동강변에서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그도 양 씨가 떠난 후에 바로 뒤따라 나섰으나 이미 철교도 파괴되고 나루터도 산산조각이 나서 옷을 벗고 도강을 해 가까스로 대구에 왔노라고 했다. 그의 가족은 달성공원 뒤쪽에 자리한 비산동에서 방 두 칸을 얻어 산다며 여기서 한 시간가량 걸으면 된다고 했다. 땅에 지도까지 그려가며 어려울 때 찾아오라는 그의 말에 양 씨 아내는 고맙다고 엉엉 울며 고마워했다.
노인은 이튿날 일찍 다시 판자를 들고 찾아와 지붕에 있는 가마니를 걷어내고 그 밑에 깔았다. 그러자 한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비가 올라치면 방이 있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권해도 양 씨는 움집을 비우고 갈 수는 없었다. 거지같은 거처라도 하루라도 집을 비우면 그곳은 다른 사람의 집이 되거나 기둥까지 뽑아가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9월 중순에 접어들자 포성이 점차 자지러들더니 유엔군이 인천상륙 작전을 개시하고, 9월 말에는 서울을 탈환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피난생활에 지친 난민들은 서둘러 하나 둘씩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빈 움막집이 늘기 시작했다. 전황이 호전되자 정부 또한 갑자기 늘어난 인구로 혼란을 겪고 있는 부산이나 대구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도시로 유입된 피난민을 귀향시키고자 했다. 이에 정부는 11월 말일까지 피난민 전원을 각자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계엄사령부의 수송 편의를 얻어 특별 귀환 차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또 경부선 역사마다 귀향열차나 군용트럭을 이용하려는 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양 씨 일가도 다른 피난민들을 따라 무작정 대구역으로 향했다. 열차를 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다행히 군용트럭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9월 말, 국군이 대전을 탈환하자 북진하는 군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 급히 명령을 받고 대전으로 향하는 차량을 만난 것이었다. 엄청난 행운이었다. 가축을 싣듯 난민들을 트럭에 태운 다섯 대의 차량은 지체 없이 광장을 출발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인가!’ 싶을 정도로 마을이란 마을은 모두 불타고 논밭 할 것 없이 여기저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다섯 대의 트럭에 실려 구미를 벗어난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요동치는 트럭에도 익숙해져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트럭이 추풍령에 들어설 즈음,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선두 차가 멈춰 섰다. 뒤이어 트럭들이 멈추고 대응사격이 이어지자 총성이 잦아들었다. 퇴로를 차단당해 눌의산, 가성산에 갇혀 있던 빨치산 잔당들과의 조우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1호차 운전병과 주임상사가 사망하고 바로 뒤에 탑승했던 난민 다섯 명이 사망하는 등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그 중 양 씨의 아내와 막내딸도 머리에 총탄을 막고 희생자가 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사람들은 트럭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잔뜩 움츠린 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사태가 진정되자 상황을 파악한 난민들은 탄식을 쏟아냈다. 1호차는 2호차 하사가 운전대를 잡고 다시 차량이 먼지를 일으키며 대전비행장 근처에 도착한 것은 해가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다행히 양 씨는 트럭 동승자 중에 비행장 인근에서 양곡상회를 하는 사람의 도움을 얻어 겨우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고향이라고 돌아왔지만 양 씨는 잿더미가 된 집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평생을 자존심 하나 만으로 살아 온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낙담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늘 한복을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체통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아내와 막내딸을 잃고, 가옥마저 소실된 지금 그를 지탱해왔던 두 무릎은 힘없이 허물어졌다. 양 씨가 삼거리 주막집 뒷방에 눕혀져 정신을 차리는 사이에 마을사람들은 지관을 부르고 부리나케 모여 두 구의 시신을 매장했다. 집 뒷산이 그의 선산이라 매장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피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참으로 지독한 전쟁이었다.
양 씨가 지그시 눈을 감고 애상에 잠겨 있을 때 그를 부른 것은 맏딸이었다. 이미 정 보살이 장독대에서 태을보신경, 안토지신주, 당산경, 명당경, 지신경, 산왕경을 차례로 읽고 산신소지와 당산소지까지 올려 안방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안방 윗목에 차려진 조상상에 정좌를 한 정 보살은 조상축원을 읽고 차례로 조상소지를 올려 나갔다. 바깥 날씨는 차가워져 구경꾼들은 모두 마루로 들어와 처량하게 경을 읽어 나가는 정 보살의 경단에 몸을 얹고 있었다. 조상경이 마무리 되자 드디어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던 대가림의 차례가 왔다. 정 보살이 토지신주와 태을보신경을 읽어 나가는 사이 대받이는 이미 성주받이 쌀에 신장대를 세우고 신 내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 보살이 축원에 들어가자 요지부동이던 대잡이의 신장대가 서서히 미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 보살은 오늘 모신 성주신, 삼신, 조상신 등에게 굿의 정성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신장대가 ‘스스슥’ 소리를 내며 떨었다. 이어 정 보살은 소원을 잘 들어 주실 것인지도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장대가 ‘스스-스-슥’ 하며 흔들렸다. 이에 신명이 난 정 보살은 “오늘 드린 정성이 잘 받아 졌구나!”라고 외치며 징과 북을 두드리자 신장대가 더욱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들의 심중을 헤아린 듯 대잡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잰 걸음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 다니며 대잡이를 흔들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는 행위를 계속했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대잡이가 자신을 귀신으로 착각하여 달려들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고 구경하고 있었다. 정 보살은 대잡이를 진정시키고는 그에게 “성주가 안에 계시는가, 아니면 나가셨는가?”라고 다소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대잡이는 신기하게도 “예! 성주님이 지금 밖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다시 정 보살이 좌정하여 채를 잡고 꽹과리와 북을 치며 휘모리장단으로 이어갔다. 이에 꽹과리가 ‘갱-갱-개개갱!’하고 울리면 이를 놓칠세라 ‘둥-둥-두-두!’ 하고 북이 동시에 맞받으며 굿이 절정을 향해갔다. 그러자 대잡이는 못 참겠다는 듯 신장대를 흔들면서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에 허 대장의 아내는 뒤로 물러서다 넘어지고, 황서방의 아내는 놀라 방귀소리를 크게 냈다. 신장대가 밖으로 나가자 정 보살이 치는 북과 징의 울림은 최고조를 이루며 방 안 곳곳을 찔러댔다. 바깥마당에서 참나무를 잘라와 불을 지펴놓고 안에서 술과 안주를 연신 날라다 먹으며 잡담을 나누던 남자들은 신장대를 잡은 대잡이가 나타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서방과 남서방은 뒤로 물러섰고, 오서방과 광재는 이 행수 곁에 바짝 다가갔다. 신장대는 마당 주변에 심겨진 여러 나무 가지를 훑고 지나가더니 마침내 대추나무에서 멈춰 심하게 요동을 쳤다. 대잡이는 대추나무에서 한동안 신장대를 흔들더니 나뭇가지를 꺾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지자 남정네들은 “겁은 드럽게 많네!”라고 서로 밀치며 큰소리로 웃어댔다. 안으로 들어선 대잡이는 나뭇가지를 불밝이쌀에 꽂았다. 그의 행동을 바라보는 정 보살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흘렀다. 굿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것에 대한 안도와 기쁨의 반응이었다.
정 보살은 이어 내전풀이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모셨던 조상신들을 보내드리고 집안을 기웃거리던 잡신들을 물리치는 의례였다. 정 보살은 성주상과 조상상에 올려졌던 제물들을 바가지에 담아 작은 보살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대문 바깥쪽을 향하여 퇴송경을 외우더니 칼을 마당으로 내던졌다. 칼끝은 잡귀들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정확히 문 밖을 향해 놓여졌다. 작은 보살은 음식이 들어 있는 바가지와 칼을 들고 곧장 문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남정네들이 또 한 번 놀라자빠질 것이다. 그리고 작은 보살은 이에 아랑곳 않고 바가지를 길에 엎고는 정확하게 땅을 향해 식도를 내리 꽂을 것이다. 마치 지옥 같았던 전쟁의 종식을 고하려는 격렬한 몸짓과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