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아홉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주시경 (실천적 국어학자)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주시경 선생님의 큰 뜻이 있어 한글의 발전이 이룩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출생 - 사망
1876.11.7. ~ 1914.7.27.
약력
1896 한글전용의 <독립신문> 발행에 기여
1897 독립협회의 중앙위원
1906-1914 한글연구 및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 발양
1908 국어연구회 조직, 한글연구의 기초 마련
선생은 개항되던 해인 1876년에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천산리 무릉골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학원(鶴苑), 모친은 연안 이씨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상주(尙州), 아명은 상호, 호는 한힌샘, 한흰메, 백천(白泉), 태백산(太白山) 등이 있다. 선생은 조선 중기 풍기군수로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13대손이었다. 부친 또한 학문이 있어 구암집을 내기도 한 시골 선비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선생이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산나물과 도라지를 캐어다가 죽을 쑤어 형제들의 나이 차례로 나누어 먹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갈" 정도였다. 이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 선생이 본격적으로 학문을 익히게 된 것은 중부(仲父) 학만(鶴萬)씨의 양자가 되어 1887년 상경하면서부터이다. 물론 향리에서도 부친과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을 익히게 된 것이다.
선생은 남대문 시장에서 객주업으로 재산을 모은 양부 후원으로 이회종 진사 서당에서 약 4년간 한학을 배우며 인격을 도야하였다. 이때 한학을 배우면서 선생은 한문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당에서 한문글을 배울 때 선생이 한문을 한문음대로 한 번 읽어 주는데, 이때 아이들은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해서 멍하니 그대로 앉아 있다가 다음에 선생이 우리말로 새겨주어야 비로소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이같이 우리말로 하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왜 하필 어려운 한문음을, 그것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을 왜 헛되이 되풀이하는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되었고, 또 우리글이 있는데 왜 이토록 어려운 한문만을 배워야 하며, 우리말을 쉽게 적을 수 있는 우리글은 왜 쓰지 않나 하고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선생이 한글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선생은 한문을 배우면서 역설적으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나아가 한글 연구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893년 6월 배재학당의 교사인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가 야학으로 신학문을 지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자국어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이 때부터 선생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면서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서재필과 함께 한글 연구 운동의 초석을 세워
서재필은 갑신정변시기의 혁명적 개혁론자가 아니라 점진적 계몽운동가로 변신해 있었다. 서재필의 근대 인권과 민권 사상, 그리고 남녀평등 사상 등은 일반 민중의 의식과 사상을 변혁시켜 이들이 이후 근대 민족운동의 주력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07년 1월 설립된 지석영중심의 국문연구회, 역시 그 해 7월 학부 안에 설치된 국문연구소, 그리고 1908년 8월 선생이 국어강습회 졸업생들과 함께 조직한 국문연구회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나아가 이 전통은 일제시기 선생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와 1931년 1월 확대 개편된 조선어학회,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계승되면서 한글 연구․정리와 보급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운동을 이끈 실천 지식인
1896년 11월 서재필의 지도로 양홍묵, 신흥우, 이승만 등과 함께 배재학당의 학생과 교직원들을 중심으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였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선생은 여기에도 동참하여 활동하였다.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 들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한일의정서’가 강제되었다. 일제는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제하여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여 갔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을 준(準)식민지 상태로 만들어 갔다. 선생은 국망의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량을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집중하였다.
큰 보자기에 책을 넣고 강의 위해 동분서주하여 생긴 별명, ‘주보따리’
우리 나라는 1910년 8월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는 영구한 식민지 지배를 획책하며 민족말살정책을 자행하였는데, 그 표적은 국어와 국사였다. 따라서 제도적인 국사 교육은 봉쇄되고 국어 교육은 제한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일본역사와 일본어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1911년부터 박동의 보성중학교에 조선어강습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고, 그 밖에도 여러 학교에 출강하면서 국어 교육을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이때의 상황을 제자 가운데 한 분인 최현배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눈물을 머금은 '주보따리'는 언제나 동대문 연지동에서 서대문 정동으로, 정동에서 박동으로, 박동에서 동관으로 돌아다녔다. 스승은 교단에 서시매, 언제든지 용사가 전장에 다다른 것과 같은 태도로써 참되게, 정성스럽게, 뜨겁게, 두 눈을 부릅뜨고 학생을 응시하고, 거품을 날리면서 강설을 하셨다. 스승의 교수는 말 가운데 겨레의 혼이 들었고, 또 말 밖에도 나라의 생각이 넘치었다.”
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함은 물론,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선생은 더욱더 한글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함으로써 독립 쟁취의 기초를 닦아 갔다.
그러던 중 몸도 돌보지 않는 한글 연구와 강의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선생은 1914년 7월 27일 서울 수창동 자택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주시경 [周時經] - 실천적 국어학자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