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봉우(桂奉瑀)
[생졸년] 1880년(고종 17)~1959년
[출생지] 함경남도 영흥
▲계봉우 선생 모습
[개설]
일제강점기 때, 북간도와 상해, 시베리아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학자 · 독립운동가로, 이명은 사방자(四方子)· 뒤바보· 북우(北愚). 함경남도 영흥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동경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영흥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국내에서의 신민회(新民會) 운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북간도로 망명,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가을 시베리아로 들어가 이동휘의 정치적 거점인 다르뷰로에 부설된 한인부(韓人部) 5두제(五頭制)의 1인이 되는 등 노령 지역 한인사회주의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동휘계의 고려공산당 상해파는 문창범(文昌範)을 영수로 하는 세칭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치열한 반목 관계에 있었다. 1921년 4월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도착, 제2차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 이칭: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이르쿠츠크 집단에 반대하는 사할린 의용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르쿠츠크 집단과의 군권 투쟁으로 말미암아, 박애, 장도정, 김진 등과 함께 1921년 5월경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5년, 제2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외교 활동에 힘입어 1921년 12월 출옥하였다.
1937년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 계봉우 역시 이거, 카자흐 크질오르다에서 만년을 보냈다. 계봉우의 무덤도 홍범도(洪範圖)의 묘소가 있는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내가 찾은 계봉우의 ‘아령실기’와 ‘동학당 폭동’, ‘조선역사’』(윤병석, 『역사비평』22, 1993)
『계봉우의 생애와 저술목록』(윤병석, 『인하사학』1, 1993)
『조선말 의병전쟁연구의 현황과 문제』(김상기, 『의병전쟁연구』상, 지식산업사, 1990)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조직형태에 관한연구』(송우혜, 『한국민족운동사연구』1, 1986)
『계봉우 생애 햇빛』(동아일보 1993. 4. 1.)
집필자 : 김창순(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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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桂奉瑀선생 『吏讀集解』 친필원고 국내 첫 공개 [연합뉴스] 입력 1995. 8. 17. 18:06수정 1995. 8. 17. 18:06
桂奉瑀선생 『이두(吏讀)集解』 친필원고 국내 첫 공개
(서울=연합(聯合) 일제치하 주로 러시아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가겸 사학자, 국어학자로 두드러진 활동을 폈던 桂奉瑀선생(1879∼1959)이 지난 1943년에 저술한 이두(吏讀)연구서인 『이두(吏讀)集解』 친필원고가 18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광복 50주년 경축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桂奉瑀선생의 아들 학림씨(69.카자흐스탄 거주)에 의해 공개된 이 연구서는 일제치하 이두(吏讀)와 관련된 연구가 일본학자에 의해 주도된 당시 상황에서 이미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한 이두(吏讀)연구서가 한국인에 의해 작성됐음을 실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국어학계의 이두(吏讀)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의원을 지냈으며 상해 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李東輝선생과 함께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활동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李東輝선생의 한인사회당에 참여하는 등 사회주의계열로 분류돼 그동안 우리 정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하다가 광복 50년만인 지난 15일 우리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아 복권됐다.
모두 77페이지로 된 『이두집해』에서 선생은 7백27개항의 이두체 표기를 우리말로 옮길 때의 범례를 기록하고 있는데 선생은 이 연구서를 1937년 러시아지역내 한인들이 소련정권에 의해 강제이주됐던 중앙아시아지역의 끄질오르다에서 작성했다고 학림씨는 밝혔다.
학림씨는 이와함께 선생의 시집과 희곡인 『함흥민요』, 상.하권으로 된 순한글 소설 『금강산』, 역사물인 『동학당폭동』도 함께 공개했다.
단국대 南豊鉉교수(국문과)는 이와 관련, "7백여개항에 달하는 이두체 해석이 정확하고도 독특한데다 그 분량도 많아 당시상황으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이두연구서"라면서 "그동안 국어학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桂奉瑀선생의 이두연구서가 발견돼 우리 국어학계의 이두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수원대의 朴桓교수는 "소련정부가 한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킨 뒤 1938년부터는 한국말과 풍속을 전면 금지시켰다"면서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말연구서와 순한글 소설을 저술했다는 것은 선생의 불타는 민족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