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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정을 나누다
김 순 길
꽃내음 물씬 풍기는 오월! 저 모퉁이에서 보랏빛 미소를 짓는 앉은뱅이 ‘패랭이꽃’이 정겹게 가슴에 안긴다.
오늘은 75세 이상 노인들이 ‘코로나 19’ 백신을 맞는 날이다. 나이가 들다보니 매사에 노파심이 앞선다. 지난번 1차 백신 주사는 이상 없이 잘 맞았는데, 이번 2차 백신은 부작용이 더 심하다는 소문이다. 가득이나 겁이 나는데 마음이 더 움츠려든다.
며칠 전, 대전에서 70대 노인이 2차 백신을 맞고 사망했다고 한다. 가까운 부여에서도 지병을 앓고 있던 80대 노인이 2차 백신을 맞고 병원에서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들리는 소식마다 끔찍한 비보에 마음을 가누기 어려운 찰라 ‘딩동댕’ 카카오 톡이 울린다.
“형님 ♡, 마음 편히 갖으시고 백신 잘 맞고 오세요. 파이팅 ♡♡♡.”
평소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의 정이 서린 메시지다. 비록 만나지 못하고 볼 수도 없지만, 눈을 이용하여 때맞추어 정을 전한다. 적이 안심되고 위로를 받는다.
백신접종이 끝나자 인솔자가 집에 도착하면 진통제를 미리 한 알씩 복용해서 부작용을 예방하라고 한다. 혼자 살다보니 부작용이 염려되어 멀리 사는 아들을 오게 하여 같이 지내고 있다. 혹시나 부작용이 마음이 걸려 며칠 전 예방주사를 맞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가 어떠했었는가? 물어봤다.
“주사 맞은 날은 무사했고, 다음 날 몸살기가 있어 ‘타이레놀’ 두 알을 아침에 먹고, 잘 때도 두 알을 더 먹었다”고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알을 먹고, 자는 것도 잠을 잘 자도록 하는 방법이라 한다. 어찌하면 좋을까? 망설이는 찰나 서울에 사는 딸에게서 전화가 온다. 자기 전 ‘타이레놀’을 한 알 먹고, 두 번 더 복용하라고 한다. 멀리 살고 있으니 와보지는 못하고 몸씨 걱정되는 말투다. 의사인 남편이 환자를 많이 대해보고 주는 조언인지 혼동된다.
‘나는 아직 아무 이상이 없지 않은가? 참는 데까지 참고 견디어 보자.’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주사 맞은 곳이 약간 부었다. 얼음찜질을 하라고 하는데 얼음주머니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참고 견디고 있다.
우리민족은 예부터 유난히 정이 많은 민족이다. “한 톨의 콩알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다. 꼭 물질이나 금전이 아닐지라도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서 베푸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가 상대와 악수를 할 때, 내 손이 차면 어떻게 하지? 상대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따뜻한 기운은 상대의 몸에 불을 지펴 피 순환을 원만하게 해준다. 냉기가 온기로 바뀌어 사랑을 피우는 마중물이 된다. 정이 많은 사람에게는 사람이 따르기 마련이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모금은 생명을 되찾게 한다. 코로나19에 얽매여 활동을 못하는 나에게 ‘카카오톡’은 큰 도움이 된다. 많은 정보 중에 건강에 관한 정보는 꼼꼼히 챙긴다. 행여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당뇨가 있는 아들에게 전한다. 다음으로 내가 베풀지 못하는 고마운 은퇴 여교장 모임인 ‘동백회’ 회원들과 문학창작반 문우들에게 정을 전한다. 조금이라도 건강해서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서산에 노을이 지기 전, 부디 따뜻한 마음으로 온정을 품어 마중물이 되어 널리널리 많이 품어 나누고 싶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12),
수필집 『향원의 열매』, kimsk3527@hanmail.net
코로나19의 교훈
김 기 태
지구의 역사는 인간이 살아오면서 전쟁과 질병과의 싸움이었다.
영국의 남자 키가 유럽 사람들의 평균 신장보다 작은 것은 건장한 남자들이 전장에 끌려가서 많이 전사하고, 군에도 가지 못할 약골인 남자들만 살아남아 그들이 후손을 이었기에 여자보다도 몸집이 작고 유렵 남자와 비교해도 왜소한 작은 체구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 호텔에 투숙하여 침대를 보면 여실히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침대보다도 길이가 짧고 작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칼로 질서를 잡겠다고 싸움이 생활화 된 일본의 사무라이도 그들의 몸집을 작게 만들었다. 전체 인구 중에 남자의 숫자가 여자보다 적어 인구를 증가시키려는 정책으로 여자들에게 기모노를 입혀 시간과 장소를 안 가리고 남자를 받아 주어 아이를 낳게 제도화 했다. 그들의 성씨를 보면 세계에서 제일 많은데 애기아빠 만난 곳에 따라 성씨가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쟁은 정상적인 삶을 파괴시켜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전쟁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역시 ‘전염병’이었다. 콜레라, 흑사병, 장티푸스가 우리 인간들을 괴롭혔다. 치료약도 없던 시절에 전염병이 한번 지나가면 국민의 1/3이 희생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때문에 끝이 없는 인간과의 전쟁으로 이어져 왔다.
전염병이 돌면 인간은 필사적으로 치료약과 백신을 개발하여 저항하였다. 약효에 따라 전염병이 잠시 주춤하다가도 더 강한 변종이 나타나 인간을 괴롭혔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은 끝이 없는 질병과 사투를 벌인 것 같다.
이번 코로나19는 지금까지 발생한 전염병 중에서 그 성격과 위력이 토네이도 급이다. 기존 경험으로는 전염확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손을 씻고, 소독하고,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 정도로 방어하는 원시적인 수준이다. 걸리면 집단 감염이 된다. 혼자 조심한다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발원지도 불분명하다. 중국은 우환이 코로나19 발원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야시장에서 밀매되는 야생동물이 숙주가 되어 생겨 난 전염병이라는 설과, 군부대에서 생화학 시험으로 연구했던 바이러스가 관리소홀로 사회로 번져 생긴 설이라는 두 가지 소문으로 흘러 다녔다.
시간이 흐르니 지구 구석구석에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를 막기 위해 입국을 통제하여 비행기와 배가 멎으니 세계 경제가 멎고, 경제가 스톱되니 대 공항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부국인 나라에서도 마스크가 부족하여 자국비행기를 가지고 마스크를 구하러 다녔다. 치료약도 없고 백신도 없으니 속수무책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보이고 힘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상가가 문을 닫고 학교수업이 중지되었다. 학생들은 집에서 컴퓨터로 선생님이 보내 주는 수업과 숙제를 하게 되었다. 기업 간 회의도 국가 간의 회의도 비 대면인 화상회의로 돌아갔다. 사회적 안전거리를 확보하라는 정부 지시로 가무가 중단되고 연예 활동이 올 스톱이 되었다. 공장 굴뚝의 연기도 멎었고, 깃발을 들고 떼로 몰려다니는 관광도 중지되었다. 촛불집회도, 광화문 태극기 집회도, 코로나가 중지시켰다. 아무도 못 말렸던 신의 다툼 지역인 중동의 전쟁도 중지시켰다.
사회활동이 중지되니 북경의 하늘이 맑아지고 베네치아의 바닷 속 물고기가 보였다.
백신이 개발되니 돈 많은 강대국이 선수를 쳐 백신을 독점한다. 돈 없는 나라 백성들은 코로나로 죽어가는 가족들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미국은 미국을 찾는 관광객에게도 백신을 놓아 준다고 장삿속으로 유혹하고 있다. 백신도 가격차이가 많아 높은 가격인 백신은 강대국에게 싹쓸이 하고, 힘이 없는 나라는 4500원짜리 백신을 맞아야했다. 먼지보다 작은 코로나19 바이러스 하나로 세상의 질서가 바뀌었다. 세상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인하며 지구를 관리했던 인간의 모습이 잘못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종교도 모순점을 많이 보여준 것 같다. 정부에서는 집회를 억제하며 거리를 두라고 강요했지만, 성직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믿음을 앞세워 강행하다보니 그곳에서 집단 감염이 퍼지게 된 것이다. 과학의 힘을 종교가 무시하며 생기는 현상이었다. 그들도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고집을 부렸지만, 자연 앞에서 신의 영역을 벗어나 생기는 현상이었다. 이 모든 요인이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인간의 무병장수하고 싶은 끝없는 욕심에서 생긴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은 모든 동물에게 맞는 생명의 시한을 부여했다. 그런데 인간만이 그 숙명을 깨려고 노력한 것이다. 오래 살기 위해서 좋다는 음식을 찾다 보니 장수하기 위해서 못 먹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돈이 되면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1919년 우리나라 인구는 2천만 명에 불과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8천만 명이 넘어가고 있다. 100년 사이에 인구가 4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 할 일에 지구가 몸살을 앓게 된 것이다. 인간의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에 신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지구가 파헤쳐 지고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이는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팔아 세력을 넓히려던 그들에게 심판을 내린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인간 욕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행착오 끝에 조금씩 질서가 잡혀가는 것 같다. 백신 앞에서 코로나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안심할 일은 아니다. 또 다른 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
우리의 운명이 전쟁과 전염병에 휘둘릴 수는 없다. 하나뿐인 지구, 인간이 주인인 양 오만하게 살 일이 아니고, 자연의 순리대로 아끼며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일이라고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 같다.
세상 풍경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장관후보 청문회를 보면 화가 난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아님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장관 후보로 선택되었을까?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인품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없는가?
지명한 사람은 또 무슨 생각으로 장관 후보로 올렸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가지만
'그렇게 살았으니 그 자리까지 올라갔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질문하는 사람은 깨끗할까?
그 사람도 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님 우리 주변은 어떤가?
나라 구석구석에서 문제점이 많고 구린 냄새가 진동을 한다.
장관후보자가 살아 온 과정을 보면 일반인이 봐도 혀가 찬다. 그들이 살아 온 삶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지적에 당사자는 너무 태연하다. 남들도 다하는 관행으로 이어 온 일인데 무슨 잘못이냐 하는 식이다. 가치관의 혼돈이다. 지도자가 가지고 있어야 할 성품과 덕목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나를 청문회에 올려놓고 아내와 점검해 보면 나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남보다 뒤쳐질까 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을 처리해야 했으며, 법을 지키고 배려하고 봉사하고 살면 바보짓이 아닌가 생각도 들고, 경쟁에서 지면 패배자로 인식하여 주눅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닌 듯싶다.
어린이 공모전에서도 보면 대상 또는 특상을 받을 모범 답안이 돈을 주면 시중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고, 마음이 깨끗하고 모범을 보여줘야 할 종교집단도 돈으로 믿음을 평가하며, 그들이 믿는 신도 돈으로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자존감 하나로 살아왔다는 지식인들의 논문도 남의 논문 표절에 익숙하여 양심의 가책을 못 느꼈다. 한 때, 킹카로 살다 은퇴하여 자식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외치던 노인들도 봉사활동을 한다고 무리지어 노란 조끼입고 사진만 찍고 있었다.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쩔쩔매는 이런 장관후보의 모습이 어쩜 우리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해타산 앞에서 우리는 중심을 잡고 양심껏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이익을 위해 저지른 부동산 전매도, 아이들 교육을 위한 위장 전입도, 절세와 도세를 오가며 저지른 세금 포탈도. 그리고 멀쩡한 사람이 군 면제를 받고, 군에 가도 특혜를 받고 편한 곳에서 근무하다 제대하는 금수저들. 고급정보를 이용한 재산 증식. 목적을 위해 추진해 가는 일이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런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회. 이런 환경 속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얻기 위해 양심을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안 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면 떳떳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 간다.
세상은 어느 한쪽에서만 썩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외교관 부인이 생활 도자기를 가지고 들여 와 찍은 사진을 페이스 북에 올려 난리가 났지만, 그 사람만의 행동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들이 들어올 때 정부에서 지원하는 이삿짐을 컨테이너에 넣어 가지고 오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물품에 대해서는 제지하는 경우가 없다. 단, 수량이 많아 규정을 넘기면 그 부분은 자비 부담을 할 정도였다. 그동안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것을 자랑하고 여유분을 판매하려고 하는 도덕적 양심의 결여 때문에 벌어진 헤프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겨울에 먹으려고 땅 속에 저장했던 무가 바람이 들어가 한 곳이 썩으면 무구덩이 전부가 썩듯이. 이렇듯 우리 사회는 성한 곳이 하나 없는 총체적 부실이었다. 지금 이것이 우리 모습인 것 같다. 누가 누구를 탓하랴. 수십 년을 땀 흘려 쌓은 많은 치적들이 4년 만에 너무 빨리 무너지는 것 같아 가슴이 터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에게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간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아호도 없었고, 준다는 명예박사도 하나 갖고 있지 않았다.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직 자기 이름 하나로 족한 사람이었다. 그가 총격을 받고 군 병원으로 왔을 때 허름한 시계를 보고 그가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군의관이 없었다고 한다. 사적인 글에서 대통령 000라 쓰지 않고 000 拜라 썼다. 여름에 혼자 근무 할 때는 에어컨을 켜지 않고 선풍기를 돌리며 근무를 했고, M-16 총기 구입에서도 관행으로 리베이트를 주겠다고 무기업자가 제의 했을 때, 그 돈으로 총을 더 달라고 해서 무기상이 놀랐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는데, 우리는 지금도 그 분을 두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그분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발뒤꿈치 때만도 못한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으니 속이 메스꺼운 것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달라서 지금도 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하고 사는데, 이런 사람들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민심과 다르게 나라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으니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 충남 서천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밥로스. 초상화, 생활공예, 전) 계룡건설 토목 본부장, 현) 온동마을 촌장,
저서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등
아버지께 드리는 글
조 영 숙
1.
아버지 받아 보세요.
아버지 병원에 다녀오신 일은 어떠했나요? 저는 아직 자는 시간에 형과 함께 집을 나서 병원에 가신다는 일이 건강한 사람도 귀찮고 힘든 일인데 많이 힘드셨지요. 나이 들면서 노인들이 겪는 4가지 고통 가운데 하나가 질병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삶의 마지막 가는 길에 어느 정도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본인이 운동과 관리를 통해 이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의 다른 고통으로는 경제적 빈곤, 외로움, 할 일 없음을 들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이런 어려움들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문제는 연금과 보상금으로, 외로움 문제는 선생님들, 제자들, 교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로, 할 일 없음의 문제는 메일과 카톡, 전화, 독서, 운동 등으로 어느 정도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하게 잘 적응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버지가 불편을 겪는 수면장애, 변비 등은 노인들이 흔히 겪는 고통입니다. 그런 가운데 손자인 정모가 재활전문의로 가까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제가 최근에 드는 생각은 인생은 즐거움과 고통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즐거운 일이 더 많고, 어떤 사람은 고통의 순간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려운 순간,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고, 자신을 다스리기 힘든 일을 만나면 누구든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우울하고 힘든 삶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살다 보면 자신이 잘못해서도 일어나고, 오해해서도 일어나고, 불가피한 환경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런 과거 때문에 절망하고, 후회하고,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부정적 경험에 매몰되어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고통의 순간이 많을 지라도 그런 장면을 마음의 모니터에 띄우고, 소리도 줄이고, 화면도 희미하게 하고, 그리고 장면도 작게 하다가, 마침내 삭제하면 됩니다. 부정적 사건을 그렇게 편집하여 버리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있었던 행복한 순간의 장면을 불러와 내 마음의 모니터에 띄웁니다. 그리고 소리를 키우고, 장면에 컬러를 입히고, 포토샵을 하여 아름답게 편집을 하고 계속 동영상을 돌립니다. 그러면 마음에 우울한 기분이 사라지고 평화롭고 즐거운 기분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결국 즐거운 감정을 더 많이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장면을 떠올리며 자신을 격려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우울할 때는 감사의 조건을 찾아 떠올리면 기분전환에 좋습니다. 우울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대화의 전환을 통해 기분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아버지의 통장을 보니 저에게 10만원, 아내에게 20만원을 보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뜻으로 보내셨는지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 제가 영한이와 저에게 1∼2천만 원 주시면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아버지께서 제 말씀을 수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미안합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상처가 깊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중이라도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셨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말하라고 해서 보낸 아내의 메일에 성의 있는 답변을 보내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강조하셨습니다. 보상금 받은 전체 금액에 비하면 3천만 원이 크지 않다는 의미인데 아버지는 3천만 원이 큰돈이 아니라는 데 어이없어 하셨습니다. 그것이 마음을 결정적으로 닫게 하였습니다. “아내가 나름 합리적으로 추측하여 말한 내용이 아니면 아니고, 맞으면 아버지의 생각이 이렇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네가 그렇게 섭섭하다면 미안하다.” 아내는 정직과 공정함에 아주 예민한 사람입니다. 아내는 기억력이 비상하고,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내가 이 문제에 대해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저도 그냥 내버려 둡니다. 스스로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기간이겠지요. 아버지도 마찬가지지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아버지나 형을 원망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섭섭하지만 저에게 베풀어 주신 좋은 경험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아버지가 결정하신 것에 대해 아내나 영한의 처가 하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 때문에 마음에 번민이나 괴로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물론 우리 형제들도 노인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영육이 강건한 가운데 평안하고 복된 마무리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21. 3, 7.
대전에서 둘째 영숙 올림
2.
아버지 받아 보세요.
내일이면 4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거리에는 눈을 아래로 두면 영산홍이 붉게 그리고 희게 피어 있고, 위를 보면 이팝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는 아름다운 봄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쉽게 진정되지 못한 가운데 벌서 5월을 맞이하게 됩니다. 풀과 나무들은 계절을 따라 꽃이 피고, 잎을 돋우며 생명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버지 기력은 쇠하고, 아픈 곳은 많아지고, 움직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니 많이 힘드시지요. 코로나 이전에는 가끔 외출도 하시면서 선생님들도 만나시고 식사도 하셨는데 말입니다. 신문을 보니 노인들도 힘들지만 코로나 사태에 젊은이들이 우울하고 이 시기를 잘 이겨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주변의 환경이 살아가는 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환경 가운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캐럴 드웩(Carol S. Dweck)이 지은 마인드셋이란 책이 있습니다. 사람은 고정 마인드셋(Fixed mindset)을 가지거나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을 가진다고 합니다. 고정 마인드셋은 재능은 타고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재능 있음을 증명하는 데 힘을 쏟습니다. 실수하거나 실패하면 변명을 하거나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지 않습니다. 성장 마인드셋은 재능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수하거나 실패해도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합니다. 살아가는데, 인간관계를 맺는데, 기업의 대표가 되어서도, 운동선수나, 교사가 되어서도 성장 마인드셋이 성과를 내고 행복을 누립니다. 고정 마인드셋을 가지면 재능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경쟁에서 이기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장 마인드셋을 가지면 성장 가능성을 보고 사람을 선발하고 훈련시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성장 마인드셋으로 무장하여 어려운 시기에도 성과를 내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사람들 만남이 제한되어 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코로나 사태로 지난 해 강의를 하지 못했다고 프리랜서 재난지원금을 4월 초에 50만원을 받았습니다.
둘째, 코로나 사태 가운데서도 강릉 성묘를 다녀오고 아버지도 뵐 수 있어 감사합니다. 몸은 여위었지만 정신은 분명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다리가 부어 있어 걱정했는데 붓기가 빠져 있어 마음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물론, 발이 다소 부어 있어 전혀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리를 높이 들고 주무시는 일은 잘 하시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셋째, 대전시민대학 웰다잉 강의가 비대면으로 1학기 10회를 무사히 마치고, 이제 내일이면 2학기 세 번 째 강의를 비대면으로 진행합니다. 1학기에 실수도 여러 번 했지만 이제 크게 불편하지 않게 강의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중 고등학교 생명존중 강의도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넷째, 제가 활동하는 대전 호스피스회에서 제가 기획한 안이 ‘학습콘텐츠 공모전’에서 선정되어 학습 프로그램을 15회 30시간을 진행하게 되어 기쁩니다. 이번에 대전지부 사무국장이 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가정의 달이 다가오는데 코로나 사태는 아직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버지, 건강 잘 보존하셔서 코로나 사태가 조금 진정 되면 우리 5부자가 될지 4부자가 될지 모르지만 가까운 휴양림이나 콘도 등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요. 돌아가신 어머니와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하고, 어머니의 성장이나 행복,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나 자신의 성장과 행복에는 시간을 아끼지 않으면서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못하고 살았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고, 선생님들과 제자들과 삶의 마지막까지 교류하며 사시는 모습은 삶이 헛되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마지막에 주변에 친구나 함께 할 사람이 없다면 그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48년생인 윤여정 배우가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았다고 신문이 떠들썩합니다. 예전 같으면 지금 같은 위치에 있지 못했겠지요. 저도 나이가 들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도록 도전할 것입니다. 아버지도 마지막까지 선한 싸움을 마치고 달려갈 길을 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건하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2021.4. 29
대전에서 둘째 영숙 올림
3.
아버지 받아 보세요
아름다운 5월은 벌써 지나가고 6월도 오늘이 8일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하는데 5월을 보내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야 하겠다는 마음을 갔다가 이제야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 간의 만남이 제한된 가운데 답답한 일상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며 살게 되었습니다.
아카시아와 이팝나무 꽃이 진 자리에 빨간 장미꽃이 아파트 담장을 장식하고 있어 지날 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5월은 바쁜 가운데 좋은 일도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5월 초에 형과 영한과 함께 강릉 성묘를 다녀올 수 있었고, 서울을 방문하여 아버지를 뵙고 4형제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5월 둘째 주 저녁 예배에 대표 기도를 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양평 상심리 교회에서는 장로님과 안수집사들이 돌아가며 대표기도를 했는데 이곳 대덕교회는 안수집사라도 대표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이곳에 온지 10년이 넘었는데 두 번인가 세 번 기도한 것 같습니다. 대전극동방송에 출연해 신앙간증을 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학습콘텐츠 공모사업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방송국 게시판에 글을 올렸더니, 방송에 출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수락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웰리빙과 웰다잉을 위한 고령화 사회의 의제 발굴과 해결”이란 학습콘텐츠인데 6월 7일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강식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1박 2일로 민주지산 휴양림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공모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많이 사용하게 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일이 되게 만들어야 하니 잘 안 되는 부분은 보완하여 되도록 만들고 컴퓨터 실력이 능숙하지 못하니 시간이 더 많이 들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가정에서는 아내를 힘들게 했지만 제가 활동하는 단체에서는 고마워하고 많은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날에는 대학 교수님에게 편지를 보내 제 생각과 근황을 알려드렸습니다. 정말 감사하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제자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을 보고 저도 작은 실천을 했는데 교수님이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저희가 서울에 갔을 때 아버지는 힘이 드셔서 대공원에도, 식사도 밖에서 하지 못하셨습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초청을 받고 홍천에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형을 통해 들었습니다. 많이 좋아지셔서 그렇게 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아버지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고 있음을 압니다. 그것도 그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제자들이 알고 깨닫고 실천하니 정말 보기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부디 강건하고 평안하셔서 우리 형제와 함께 외출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바랍니다. 모세처럼 120세가 되도록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2021. 6. 8
대전에서 둘째 영숙 올림
원 교수님께
원 교수님 받아보세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 19로 대면활동이 제한된 가운데 자유스러운 만남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 교수님은 조심스럽게 외부활동을 하시는 모습을 카톡을 통해 접하고 있습니다. 늘 웃으시고 건강한 모습이어서 보기 좋습니다.
제자가 교수님을 찾아뵙는 것이 도리이건만 원 교수님이 먼저 찾아와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주셨습니다. 학창 시절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열심히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좌절했습니다. 직장생활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15년여 회사생활도 소진한 가운데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서점을 11년여 경영했습니다. 마음은 편했고, 책을 가까이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이 생기고 책이 정가제에서 할인이 되니 소형 서점은 견디기 어려워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1년 쯤 쉬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위암을 발견하고 수술과 치료에 전념했습니다. 몸이 회복되자 사회의 일자리를 찾았으나 별로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제자신이 초라한 느낌이 들었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심도 들었습니다. 대학원 시절, 그리고 회사생활 막판에 찾아온 우울증이 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그동안 믿음의 훈련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새벽을 깨우며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내 안에 이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는지 놀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길에 이런 생각을 주셨습니다. “네가 지금 일자리를 찾으면 너도 만족하지 못하고 사회에 크게 기여하지도 못한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때가 되면 은퇴한다. 네가 지금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면 남보다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지 않느냐?” 생각이 이렇게 바뀌자 제 삶은 무엇을 하든지 의미가 되고 활력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든, 운동을 하든, 강의를 듣든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그리고 인생 후반의 키워드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영육의 강건, 독서, 상담, 글쓰기를 정하고 정진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강의하기, 강의듣기, 문화활동 참여하기, 책 내용 나누기, 아내와 좋은 시간 보내기, 가족과 여행하기, 좋은 친구 사귀기 등 다양하게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고등학교에서 생명존중(자살예방) 강의하기, 대전시민대학에서 웰다잉: 행복한 삶 아름다운 마무리 강의하기로 교수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강의하는 기쁨과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이 허락하시면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책 내용을 나누는 일, 인성분야 강의하기, 그리고 협상(갈등 많은 세상에 조정이나 중재 포함) 분야에서 작은 기여라도 하고 싶습니다.
시급한 과제로는 고령화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발굴하여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지자체나 정부 기관에 제안하고 싶습니다.
제 이야기만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액티브 시니어로 멋진 삶을 누리시기 바라며 영육 간에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2021. 5. 15, 스승의 날
대전에서 제자 조영숙 올림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대전시민대학 ‘웰다잉’ 강사, ysc1951@naver.com
논산은 영원한 호국의 도시
김 근 수
충남 논산의 명소 탑정호수는 잔잔하여 파도는 그다지 높지가 않았으며 하늘은 푸른 호수물빛처럼 푸른색으로 빛이 나고 있었다. 묵향 그윽한 역사의 고장 논산의 풍경은 영원한 기름이 가득 찬 초롱을 들어 올려 세상을 밝은 빛으로 환하게 쓸어내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소박할지라도 진정한 사랑이 호반의 연한 가지들을 어루만져 주는 듯 했고, 선한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반짝이는 마음의 날개를 열어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과 봉사 그리고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었다.
올해의 봄은 온 지구촌이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유사 이래 미증유의 역병(疫病)인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힘겹게 싸우면서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현 시점을 지혜롭게 견디며 서로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보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나는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안고 집을 벗어나, 모처럼 젊은 시절 훈련을 받던 논산훈련소가 생각나 겸사겸사 탐정호수를 둘러보게 되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시작점으로 하는 이 지역은 군 입대를 하는 아들과 떠나보내는 부모가 이별과 격려의 눈물을 흘리며 애잔하고 먹먹했던 추억거리를 간직하게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탑정호수는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로 어족자원이 풍부하고 큰 농경지가 펼쳐져 있어서 겨울철새들의 월동지로도 이용되고 있다. 특히, 매주 수요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훈련소 영외면회객들이 즐겨 찾는 논산 팔경 중 하나이다.
6월은 호국의 달이다.
1950년 6·25사변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같은 민족끼리 동족상잔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전 국토가 황폐화 되는 크나큰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이제는 세계 10대 강국으로 부상한 경제대국이 되어 자랑스러운 선진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조국은 어머니보다도, 아버지보다도 또 그 밖의 모든 조상들보다도 더욱 귀하고, 더욱 숭고하고 더욱 신성한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소중히 여기고 조국에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는 세계에는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며, 각각의 민족 구성원은 저마다 자기 민족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민족 간의 이익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투철한 민족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몸을 바쳐 투쟁한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의 일생은 부조리한 시대, 불합리한 시대를 바로잡아보려는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실패에 강한 사람은 그만큼 성공의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 한다. 역경에 강한 사람은 언젠가는 성공한다는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을 지킬 필요가 있듯이, 요즘처럼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것이 불확실성 시대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에 바른 밸런스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국 런던대학교 사회학과 토인비 교수는 “인류가 역경을 극복해가며 이룩한 문명의 역사를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이라고 말을 했다.
도전과 응전 속에 소소한 삶을 오늘도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진 것은 별로 없다할지라도 신뢰와 끊임없는 노력을 믿고, 자신의 생활을 깊이 있게 잘 헤쳐 간다면 우리들 마음의 금고는 늘 넉넉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청량한 시어들이 넘쳐 날 것이다.
여름날의 문턱을 지나는 호수에는 고즈넉한 아름다운 노을이 풍만한 탑정호수를 어루만지며 물고기가 후두두둑 파닥거리며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우윳빛 흰구름을 간직한 호수는 넓은 날개를 펼치고 언덕 위를 맘껏 뛰어노는 나무들과 세상의 모든 폭풍우를 잠재우고, 숲을 물결치게 하는 것 같다. 호국의 달 6월에 다녀온 젊은 시절의 추억이 살아있는 논산은 21세기의 중심 역할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행복이라는 것
전 월 득
어둡고 메마른 대지를 환하게 비춰주던 봄의 전령, 곱고 예쁜 봄꽃들의 향연이 막을 내렸다. 때를 찾아 조용히 다가와 답답한 마음들을 달래주던 아름다운 자리에 어김없이 새 잎들이 돋아난다. 솜털같이 보드라운 연록들을 점점 짙게 물들이는 공기는 따스하다 못해 나른해진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에 닫혀 진 마음 문이 열리며 몽글몽글 한 낮의 오후는 여유롭고 황홀하다. 지천에 싱싱한 새싹들이 쑥쑥 자라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희망을 노래하듯 봄날은 원숙한 여인의 형상이다. 화창한 봄날 움 추렸던 몸을 곧추세워 산책로를 걷는 일상을 통하여 행복의 원천을 찾은 기분으로 새로움을 느낀다. 삶의 터전이 바뀐 것도 아닌데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며 뒤엉켜 자라는 모습에 고향을 본 듯 반갑고 뿌듯하다. 문득 나 태주 시인님의 ‘풀꽃’을 연상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강아지풀 엉겅퀴 씀바귀 밥보자기 가마 풀까지, 큰 도로위에 뱉어내는 매연을 아랑곳 하지 않고 튼튼하게 자생하고 있었다. 도심 한복판, 더구나 날마다 거니는 집 뒤 담장을 따라 이토록 눈에 익숙한 잡초들이 자유로이 뻗어가며 신선한 풀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날 한 뼘 넘게 자란 가마 풀을 한주먹씩 뽑아서 마루 끝에 앉아 네 가닥의 가마를 만들던 옆집친구의 얼굴도 어른거린다. 귀리 풀 대궁에 빨간 뱀 딸기 구슬 꿰며 놀던 고향집에서 쑥 개떡 쩌 내주던 늦은 봄의 어머니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그렁거린다. 전쟁 직후의 시골에서 보릿고개를 슬기롭게 견뎌내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꽃을 보기 위해 정성껏 가꾸시던 작약 꽃 뿌리를 캐내어 머리에 이고 5일장에 가셨다. 반란 아닌 반란에 허탈해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애절하다. 농촌생활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시던 학자의 귀향과 꽃밭 사이에 허울 좋은 꽃 보다는 생활비가 더 절박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지금도 작약 꽃을 볼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한다. 잊혀가는 고향집 아버지의 꽃밭을 그리워할 겨를도 없이 주변 산책로의 봄날이 어느 해보다 풍성하다. 하늘 높이 치솟는 가로수 사이로 참나리 붓꽃 원추리 산 마늘 명이나물 새싹들이 반들반들 무더기를 이루며 번식하고 있다. 아파트 화단에서도 추억의 함박꽃이 싹을 틔우며 향수를 달래준다. 삭막할 것만 같은 아파트 숲 사이마다 나무들이 높이 자라서 가끔씩 찾아와 노래 부르는 이름 모를 새들의 속삭임은 더욱 정겹게 들린다. 아름다운 도시에 공존하며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삶이라는 역경 속에서 스프링 벅(spring buck)들처럼 앞만 보고 뛰어왔다. 이제는 하늘과 땅과 스치는 바람까지도 천천히 음미하며 완충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 시점이라 여겨진다. 같은 집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도 무심코 지나던 주변의 친화적인 이미지를 이제라도 발견하고 마음에 와 닿았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고 축복인 것이라 믿고 싶다. 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이 나이쯤 되면 내일이란 없으니 그 무엇에 기대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며 맘껏 누려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나의 심리적 핵은 평범하지 않다 사람의 습성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처럼 특히 나에게는 말이다 .
늦었지만 제 2국어를 배우며 행복한 나로서는 내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이 다르듯이 또래 친구들과의 생각도 다르기 때문에 가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전형적인 반응을 잘 일으키지 않는 성격이라서 일 것이다.
얼마 전, 딸과 사위와 점심식사를 마치고 멋진 카페에서 야외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 적이 있었다. 주변의 산세에 싱그러운 녹음이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바람에 일렁이는 대숲의 소리가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감미로웠던 날이었다. 공간에 널부러진 듯한 건물에 자연스럽게 놓여 진 야외테이블 앞에 다정스런 젊은이들의 모습도 한층 낭만적으로 보였었다. 감각이 남다른 사위는 요즘 이런 공법이 대세라며 인증 샷도 찍어주었다. 오너의 창의적인 생각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2층에서 바라보는 산기슭, 뭉게구름 사이로 소나무와 경쟁하며 싱그럽게 피어나는 은행나무의 살랑거리는 몸짓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노랗게 물들어 갈 때쯤 혼자라도 조용히 와보고 싶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마침, 내 맘을 들여다본 듯 센스쟁이 왈, 엄마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와보시면 느낌이 또 다를 거라며 강추 한다고 하였다. 그토록 딸과는 눈빛만으로도 교감되는 애틋한 사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늑한 분위기에 어떤 친구와 어떤 대화를 이어가야 내 마음이 충족할 수 있을까, 그럴만한 친구가 있는지 떠올려보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좋아야 될 젊은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른들께서 “댁은 아직 젊어서 참 좋겠수!” 하며 말문을 흐리던 노파의 모습이 문득 스치며, 내가 바로 느끼는 현실이 되고 보니 씁쓸하기 까지 하였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이제야 우주만물을 제대로 느끼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이라고 위안하고 싶다. 건강한 두뇌와 온 몸으로, 하고 싶은 일과 취미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며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이라는 것은 내마음속에서 자생한다는 것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리며, 내일을 희망하는 젊은 노파의 아름다운 삶을 기대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긴 겨울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쌀쌀하던 기온이 온순해지면서 우리 집 앞 베란다에도 따스한 햇살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오래전 임무를 상실한 작은 테이블이 베란다에서 나에게 자꾸 손짓하는 듯하여,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데리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안으로 숨어 있던 꼬마의자 두 개가 빼꼼히 걸어 나와 반겨준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원래의 주인이 현존하였다면 매일 아침마다 두 개의 머그잔에 달달한 커피를 정성껏 담아놓고 반쯤 허리 굽혀 두 팔로 안내하며 “마님 앉으시지요. 모닝커피 대령하였나이다.” 유머러스한 언변으로 그윽한 미소를 지어보이곤 하였을 것이다. 필수적으로 따라다니는 재떨이와 지독한 담배연기에 질색하면서도 무슨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많이도 나누었었다.
‘맑게 개인하늘이 참 예쁘다고 저 흘러가는 뭉게구름 좀 쳐다보라고.’
오늘같이 좋은 날, 서울에서 힘들게 공부하는 딸래미가 내려온다면 더 맛있는 거 만들어 먹이 자고, 금지옥엽 딸래미의 그리움을 달래며, 가계로 출근하는 길에 함께 있을 볼링게임에서 누가 웃을지 가위바위보 하자고, 날마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엮어 내던 곳이 바로 양지바른 베란다의 작은 테이블이었다.
남편은 애주가였고 애연가였다. 밀폐된 거실을 피하여 대체된 흡연 목적의 허접한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 함께했던 추억들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휑하니 앉아있는 거실 밖 테이블의 소임이 끊난지라 ‘과감하게 정리할까?’ 생각하면서도 비록 사물이지만 떠난 이의 대체물이 되어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갔지만 곳곳에 흔적들이 남아서 때때로 놀라듯 반가움을 느낄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몇 년 전에 딸집에 벗어놓고 왔던 줄무늬 스웨터를 발견하고 30여 년 전 애틋했던 남편을 소환하며 깜짝 놀랐다, 까마득하게 잊었던 내 젊은 시절을 반추하는 호사를 누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40대 초반 남편이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던 때였을 것이다.
한 계급 승진과 더불어 따라온 특별보너스를 받아 깜짝 이벤트성 선물로 원피스와 함께 사줬던 스웨터였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직장과 가족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월급봉투를 나에게 통째로 맡기고 부족한 용돈에 아웅다웅하며 저축에만 올인 하던 시절이었다.
퇴근길에 아이들 간식과 식료품을 사오는 것은 다반사였지만, 표준체형이 못되는 내 옷을 고른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내 취향에 잘 맞고 예뻤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깜짝 선물에 감동하면서도 옷보다는 나중을 위하여 저축이 우선이라고 겉치례성 인사를 건넸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연한 걱정 접으시고 당당히 입고 외출하라며 안면에 환한 웃음을 짓던 모습이 다시 떠올라 무뎌진 가슴이 고동치고 있었다.
노랑병아리처럼 예쁘던 일곱 살 천재소녀 딸아이는 아빠가 좋아하는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연주를 하고, 다섯 살, 세 살 두 개구쟁이 녀석들은 마징가 Z 춤을 추었다. 그 옆에 앉아 소주 한 잔에 콧노래를 부르는 남편을 위하여 나는 바람처럼 주방을 날아다녔다. 돌아보니 다정다감하고 행복했던 날들이 스치듯 흘러가고, 다시 못 올 그날들은 그리움으로 남았다. 지금쯤 함께였다면 젊은 시절보다 훨씬 더 안정된 생활 속에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공유할 것이다. 끼를 발산하며 악기 하나 쯤 연주하고 좋아하는 노래교실에 충실히 다닐 터였다. 80년대 초, 일본출장길에 구입한 케논 카메라와 길고 커다란 망원렌즈를 적극 활용하여 원정 출사를 다니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낭만적인 성격에 재치 있고 리더십도 좋았으니 박력 있는 추진력으로 어느 그룹에 합류하여도 선두에서 소외되지 않고 행복한 노후를 즐길 수 있을 텐데, 야속한 운명은 그를 허용하지 않았다.
종종 딸과의 통화중에 문화생활에 적극적인 엄마가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며 기뻐 할 때면 부재중인 남편에게 더 아쉽고 미안해진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빠 예기를 함부로 꺼내지 않는 딸과의 통화는 항상 엄마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며 아빠 대신 지원군이 되겠다는 말밖에 더 이상 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 사랑하는 가족 곁을 먼저 떠나보낸 그리움은 남은 가족들의 몫이 되어 아픔으로 남는다. 그곳에서는 부디 아프지 말고 하늘나라의 평안을 누리길 기원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나는 살고 있다.
올해의 봄도 점점 완만해지고, 죽은 듯 추운겨울을 견뎌온 나목들은 다시 새 움을 틔우며 살아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생명은 소중하고 경이로운 것,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나목들이 부러워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오늘도 심연의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고향에 가던 날
그리움 따라서 길을 나섰다
고향은 언제나 어머니 품속같이 따뜻한 추억의 본원지,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는 곳, 나의 유년시절을 보듬어준 아름다운 산천과 뛰놀던 놀이터가 있는 곳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고향만은 변함없기를 기대하고픈 소중한 곳,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세월 따라 모든 게 달라지며 과거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다.
수백 년 동안 수호신처럼 고향을 지키며 마을의 상징이었던 아름드리 느티나무, 이글거리는 태양을 숨겨주며 친구들을 불러 모으던 놀이터에도 변화의 바람은 예외 없이 불어 왔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생을 마감할 환우처럼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신음하며 더 이상 부드러운 날개 짓을 하지 못한다. 온 우주라도 덮을 듯이 싱그럽게 피어나 너울거리며 노인들의 사랑방이 되고 온 마을사람들의 쉼터가 되어 신파극이 열리고 우리들의 음악회가 열리던 곳 고무줄 놀이하던 동생의 싸움판에 끼어들어 눈탱이가 밤탱이 되던 날, 20리 길 병원으로 울며불며 달려갔던 추억이 생생한 현장이다.
치마폭에 공깃돌 나르는 고사리 손들이 날마다 모여 두꺼비집 만들던 놀이동산의 고왔던 흙 마당은 뜻밖에도 콘크리트로 도배되었다, 화석이 되어버린 빈 놀이터, 천진했던 어린 날들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그 많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가고, 이제는 자연을 거부당한 나의 놀이터. 오랜 세월 묵묵하던 역경의 삶을 송두리째 내려놓은 웅장하던 거목의 몸살에 가슴이 먹먹하였다.
알사탕 줄줄이 널어놓고 노란주전자에 텁텁한 막걸리 퍼 담던 학고방 월남치마 아주머니의 행방도 묘연하였다. 5일 장날이면 어김없이 동생을 데리고 마을 어귀에 서성이며 황새목 내밀어 엄마의 작은 보따리를 기다리던 곳에 엄마가 다시 오지 않을 쓸쓸함을 넘어 이국처럼 변해가는 고향마을이 아린 설움이 되어 안타까이 허공만 바라보았다,
바둑이와 함께 걷던 논두렁에 정겨웠던 개구리소리 고요하고, 소달구지 덜컹대던 뒤안길에는 낯익은 자동차가 쌩쌩 거린다. 고샅길에 옹기종기모여 소곤거리리던 아낙들과 하얀 박꽃이 아름답던 초가지붕 간데없이, 앞 다투어 꾸며놓은 현대식 2층집이 낯설고 어설프다. 한때는 도시바라기였던 젊은이들이 회귀본능으로 유턴하며 옛 고향은 수난의 시대를 맞이하고, 어정쩡한 시골 풍경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상처로 남았다.
마을 한복판 따뜻한 남쪽에 있던 우리 윗집, 작은 당숙모 댁을 찾아갔다. 너무도 반갑고 고마웠다. 조그마한 키에 야무지고 인정도 많으셔서 마음 터놓고 엄마가 밤마실을 자주 가시던 유일한 친척 작은 당숙모 댁이다. 백세 가까우신 내외분이 여전히 생존해 계시다니, 둥그렇게 허리를 말고 쪼그려 앉아 무쇠 솥 아궁이 앞에서 마늘 까는 모습이 꼭 엄마의 환상으로 오버랩 되면서 그때서야 고향에 왔음을 실감했다. 추운 겨울날, 눈밭을 뛰어넘어 엄마 뒤를 쫄랑거릴 때 그 아궁이에서 꺼내주던 군고구마의 맛이 입안에 맴돌고 있었다. 숯검댕이에 까매진 내손을 끌어안아 하얀 앞치마로 쓱쓱 닦아 주시던 엄마와 당숙모님의 젊었던 모습이 교차하며 멀어져간 내 유년시절을 소환하고 있었다. 무르팍에 ‘삼’ 가닥을 비벼 날실을 만들고, 하얀 모시 바구니를 들고 오르내리던 엄마와 따뜻한 음식을 나누고, 바쁜 일손을 나누며 다정했던 두 분의 모습이 엊그제인 양 생생하였다.
굴뚝 옆 감나무 밑에서 감꽃 목걸이 만들어 목에 걸고 목단꽃잎 주워 족두리 쓰고 홍매화 꽃잎 따서 연지곤지 찍고 ‘숙이’와 각시놀이하던 우리 집, 이른 봄 햇살이 문풍지 뚫고 뿌연 먼지 한줄기 곧추세워 내리쬐던 작은 초가집, 엄마의 커다랗게 책 읽는 소리가 울 밖을 넘어 우리들의 마음을 다독이던 집, 앞마당 어미닭을 따르는 병아리 떼를 쫓다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울지 않던 집, 앞산에 흐드러진 진달래는 어린철부지의 마음속까지 곱게 물들여놓고 하얀 싸리꽃 무덤은 거센 파도처럼 일렁거렸지,
자운영 꽃밭에서 신발 한 짝 벗어들고 휘두르다 꿀벌한테 쏘이고 입술이 홍 나발 되어 저녁밥도 굶었던 개구쟁이, 개울가에 앉아서 아버지가 만들어준 버들피리, 소리 높여 불어대고, 나풀나풀 어린 쑥 바구니를 엄마 앞에 내밀면 울 엄마 솜씨는 맛도 좋더라!
돌아보면 무지개처럼 빛났던 유년의 고향, 나는 소박하고 아름답던 어린추억의 그리움을 안고 서산마루에 걸터앉은 저녁노을 뒤로 마을 언덕에 올라 화석처럼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진 재 훈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하는 ‘금강여행 역사여행 미션투어’에 당첨되어 외손주, 큰딸 가족과 1박 2일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팀 명칭을 가화만사성이라 정했는데, 우리 집 가훈이기도 하다.
여행은 늘 여러 가지 행복한 감정을 동반한다. 출발 전의 설렘, 여행 동안의 즐거움, 끝나고 집으로 향할 때의 안도감이 그것이다. 이번 여행은 둘째 딸의 출산으로 아내 손에 맡겨진 어린 손자 때문에 겸사겸사 계획하게 되었다.
가족여행 첫 시작 장소로, 임신 중인 큰 딸이 먹고 싶어 했던 바지락 칼국수 집으로 정했다. 우리 집 두 딸은 이 집 팬들이다. 어렸을 때 서천 바닷가 조개잡이 체험에 자주 데리고 다닌 때문 아닌가 싶다.
한밭수목원 입구에서 인증 가족사진을 찍고 손주가 좋아하는 곤충 체험관에 들렀다. 손주는 그 곳에 진열된 살아있는 장수풍뎅이를 무척 좋아한다. 만지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인데 징그러울 수 있는 풍뎅이를 만지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 어릴 때는 주변이 온통 자연 박물관이었다. 개구리, 메뚜기, 물고기, 잠자리는 물론, 뱀까지 잡아 가지고 놀았으니 지금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지금은 도시화 및 물질만능 시대로 아이들이 컴퓨터 및 스마트 폰에 중독되어 자연과 동 떨어진 삭막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앞으로 손주들과 좀 더 자연 친화적인 곳으로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젊을 때는 직장 일에 얽매여 자식들을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했는데 그 아쉬움을 손주들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
공주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찾았다. 이곳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제방 양 옆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길게 늘어선 수목들이 가족사진을 찍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뚝 아래 작은 연못에는 아직 연꽃이 피지 않았으나 정자와 어우러져 운치가 있어 좋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손주 녀석은 어린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신이 났다. 그 모습을 바라만 봐도 행복감이 밀려온다.
방동 저수지 근처 한정식 집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숙박 장소인 대전 숲 체험원으로 향했다. 도로 양 옆으로 활짝 핀 금계화가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이해 준다. 사전에 예약한 장소에 여장을 풀고, 나는 조용히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산 속이라 그런지 시내와는 비교도 안 되게 온도 차가 확연했다. 진한 숲 향이 내 코끝을 자극한다.
숙소에 들어와 시골에서 가져온 못 생긴 오이와 과일을 안주 삼아 큰 사위와 술을 한 잔 했다. 내 서재에서 빌려간 제레미 다이아몬드(Jared M. Diamond) 교수가 쓴 ‘총, 균, 쇠’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인문학과 국내정치 등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치 오랜 친구와 정담을 나누는 듯 편했다. 사위는 요즘 젊은이들보다 생각이 깊고 예의가 바르다. 나도 능력 좀 있다고 너무 잘난 체하는 사람은 질색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 창문을 여니 싱그러운 숲 내음과 진초록 산속 풍경이 나를 바깥으로 잡아끈다. 어제 밤 날이 어두워 가보지 못했던 임도 산책길을 걸어 보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계수나무라는 표찰이 붙은 잎이 무성한 큰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시절 자주 불렀던 ‘반달’이라는 노래가사에 등장하는 그 계수나무였다. 그 나무를 수없이 보았겠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 신기해 계수나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치와 밥, 컵라면으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익산으로 향하던 중 간판이 허름한 빵집에 들렀다. 모닝커피와 빵을 먹기로 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주변 경치와 맛이 일품이어서 모두들 만족했다. 요즘은 워낙 SNS가 발달해서 외진 곳에 맛집이 있어도 소문이 나면 멀리서도 한걸음에 찾아오는 모양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한 팀 두 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익산 미륵사지를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에도 손주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 지 이모와 뒷좌석에 앉아 재잘대며 흥겹게 떠들어 대고 있다. 인터넷으로 찾은 익산 맛 집에서 낙지볶음으로 점심을 들고, 미륵사지와 국립 익산박물관으로 향했다.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武王)때 축조된 우리나라에서 제일 규모가 큰 석탑이라 한다. 1500년 전에 어떻게 아무런 기계도 없이 저런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는지 새삼 백제 장인들의 기술에 감탄사가 절로 난다. 사람들은 백제의 수도가 충청도 공주, 부여만 있는 줄 아는데 전라도 익산의 왕궁도 유명하다고 문화해설사는 설명한다.
오늘의 마지막 관광예정지인 보석박물관 옆 야외 공룡전시공원에 들렀다. 공룡을 너무 좋아하는 외손주를 위해서다. 손주는 다섯 살인데도 수많은 공룡 이름을 철자 하나 안 틀리고 줄줄 외운다. 늦은 오후임에도 손주를 데리고 공원을 한 바퀴 돌았더니 이마에 땀이 흐른다. 손주 녀석은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좋기만 하다.
이번 1박2일 ‘금강여행 역사여행 미션투어’는 정말 알찬 가족여행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가족과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정담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번 여행에서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자주 이런 여행의 기회를 만들 생각이다.
※ 충북 청주 출생, 금강불교대 수료, jhj432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