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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낭군은 진정 기재(奇才)입니다. 오늘밤 나의 거처로 와서 연회를 즐겨야 할 것입니다.”
을불이 그를 허락하고 무리를 이끌고 객사(館)에 들었다.
선길(善吉)은 노루를 요리하고 술상을 차리게해서는 춤을추며 마셨다.
창포가 을불에게 춤을 청하자 을불이 말했다.
“나는 독무(獨舞)는 못하니 그대와 더불어 서로 붙잡고 출까?”
창포가 말했다.
“차례대로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을불이 이에 창포를 안고 온갖 방법으로 희롱을 하니 선길이 노하여 말했다.
“너희들은 아직 혼인도 안했으면서 어찌 이와같이 하느냐?”
창포가 말했다.
“비록 동침은 안했어도 폐물은 이미 받았으니 어찌 혼인이 아닙니까? 행여나 질투는 마세요.”
선길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창포의 어미가 그를 이끌어 달랬으나 어찌 할 수 없자 창포에게 말했다.
“네가 조금 젖(乳)하고 와야겠다.”
창포가 이에 을불에게 말했다.
“노왕(老王)을 젖(乳)해 주고 곧 돌아오리라.”
을불은 젖(乳)의 뜻을 몰라 창포의 어미에게 물으니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창포는 곧 손바닥으로 선길의 뺨을 치며 그를 꾸짖었다. 마침내는 선길을 안고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운반하는듯 했다. 이어서 서로 치고 받는듯한 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말하기를 “선길이 창포에게 매질 당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윽고 얼마후에 환희에 찬 부르짖음이 들리자 모두들 말하기를 “선길이 창포에게 음(淫)했다.”라고 했다. 그 풍속은 남녀의 구별이 없어 나이가 들어 장성하면 부녀와 모자 역시 상음(相淫)하는데 남자는 반드시 먼저 욕심을 품은 여자에게 수태(受笞)한 후에야 바야흐로 통하는 까닭에 매질을 당하는 것이다.
을불은 이를 듣고 즐겁지 않아 말했다.
“노왕이 만약 그 딸을 스스로 징(澄)할 것 같으면 그 딸이 내 처가 되는 것을 어찌 즐겨 하겠는가?”
창포의 어미가 말했다.
“저것은 특별히 한때의 젖(乳)하는 것일 따름이고 오래갈 것이 아니니 노여워 말고 기다리십시오.”
인하여 술을 권하니 을불이 크게 취하여 여러 추장의 처(酋妻)들과 서로 끌어 안고 희학질을 하였다. 그 풍속이 손님(客人)과 더불어 상통(相通)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모두들 즐거워하며 그에 응할 따름이었다. 창포의 어머니가 다시 들어간지 한참이 되어서야 창포가 얼굴에 참괴(慙)한 빛을 띠고 나와서 을불을 잡아끌며 그 침실로 들어가길 청하였다.
을불이 노하여 말했다.
“네가 노왕과 더불어 행음(淫)하고서 어찌 나를 보러 왔는가?”
창포가 말했다.
“일시(姑)나마 아직 혼신(婚神)에게 맹서(盟)를 안한 까닭에 내가 노왕의 잉첩(媵妾)이 됐을
따름입니다.”
“언제 맹서를 하는가?”
“내일 마땅히 맹서를 하리니 노여워 마시고 나를 따라오세요.”
을불이 마침내 창포를 따라서 들어가니 뭇 추장의 딸(酋女)들이 좌우에 벌려앉아서 서로 손뼉 장단을 침으로써(以手相拍) 전송하였다.
표범가죽이 늘어서고 침대머리에는 큰 거울(大鏡)과 누런고니(黃鵠)가 있고 12대촉(大燭)이 양두(羊頭)에 꽃혀 있었다.
옷을 벗으니 흘레붙는 두 마리 흰 개(跨兩白犬)가 되어 장난(戱)치고, 달려가 뛰어오르는 한쌍 사슴의 장막??(奔登雙鹿之帳??)..하며 음(淫)하였다. 행음(淫)을 마치면 다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이와같이 하기를 무릇 7일이었으나 결정이 되지 않았다. 을불이 노하여 말했다.
“너는 나를 속여서 머무르게 하려는 것인가?”
창포가 말했다.
“노왕(老王)에게 아우가 한사람 있는데 나를 취(娶)하고 싶어서 그대를 죽여 그대의 왕에게 바치자고 왕께 권하고 있습니다. 내가 방해해서 힘껏 저지는 했으나 사태가 심히 위급하니 그대는 도망치세요.”
을불이 놀라서 말했다.
“나는 너를 아껴서 왔거늘 마땅히 이 위급한 때에 네가 만약 나를 아낀다면 어찌 함께 달아나지 않는가?”
창포가 말했다.
“내가 만약 함께 달아난다면 노왕은 노해서 반드시 그대를 죽일것이니 어찌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그대의 무리들을 힘써 보호하지 않으리오.”
그리하여 준마 5마리를 훔쳐서 내주니 을불이 재생(再生)등과 더불어 밤에 그 막사(幕)를 빠져나와서 달아났다. 선길이 이를 알고 추격하려 하자 창포가 말했다.
“이미 사위로 삼지도 않았으면서 또 무엇 때문에 쫓습니까?”
선길이 말했다.
“가히 연(燕:모용외)에 바쳐서 무거운 상(重賞)을 받을 수 있으리라.”
창포가 말했다.
“을불은 천인(天人)이니 그대가 잡을 바 아닙니다.”
선길이 노하여 그 신하 칩여(蟄蜍)로 하여금 추격하게 했다. 을불이 그를 쏴 죽이고 달아났다. 돌아와서는 삼도(三徒)를 발(發)하여 최체(最彘)를 치려하자 송거가 간하였다.
“본래 결친(結親)하려 했다가 도리어 원수를 맺음은 중흥(中興)의 계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한 보답으로 베푸니만 못합니다.”
을불이 이에 물범가죽(水虎皮)과 자달피(紫獺皮)로 선길에게 예를 차려서 말을 전했다.
“칠일 생관(甥館:사위로 머문)의 은혜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소인의 참소로 용납되지 않고 되돌아 옴에 이르르니 창포의 용음(容音)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선길은 쇠로하고 색을 탐하여 병으로 일어날 수 없었으니 창포가 일을 전결하고 있었다.
곧 백마(白馬)와 보옥(寶玉)으로써 답하여 가로되
“명랑했던 날(㫰日)의 일은 마치 해가 구름에 가린것만 같습니다. 첩은 마땅히 노왕의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리거니와 낭군과 더불어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 악한 숙부도 이미 죽고 노왕 또한 전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으니 낭군은 전일을 한(恨)하지 마시고 바라건대 초심(初心)을 이루소서.”
을불이 주저하며 결정을 못하자 재생이 말했다.
“선길이 늙고 혼미(老昏)하여 그 아우에게 잘못된 바이나 지금 그 아우가 죽었으니 반드시 대신할 자가 있어 역시 창포를 취하고자 할 것인즉 그를 저지해야 합니다. 거짓으로 출렵(出獵)을 핑계대고서 그 지경에 돌입하여 추장을 베고 그 무리를 진압함이 어떻겠습니까?”
“옳다(善)!”
을불이 대답하고 이에 삼도(三徒)를 발하여 출렵(出獵)을 가탁(假託)하고 짐승을 쫓다가 그 지경으로 오입(誤入)해서는 그대로 돌진하였다.
그 때에 선길은 색(色)에 침닉되어 일어나지 못하므로 부족의 추장(部酋) 산대(山代)와 민문(珉文)이 음(陰)으로 불궤지심(不軌之心)을 품고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선길(善吉)을 포위해서
그를 살해하고 강제로 창포(菖蒲)를 취하여 처로 삼았다. 모든 추장들이 불평을 품고 서로 치고자 관망하다가 삼도(三徒)가 돌입해오자 모두들 창포가 부른 것이라 여기고 힘을 합해 산대(山代)와 민문(珉文)을 쳐서 주살하고 을불과 창포를 받들어 군주(君)로 삼았다.
을불(乙弗)이 이에 창포왕(菖蒲王)이라 칭하고 최체(最彘)의 6촌(村) 2성(城)과, 양화(陽化)의 2촌(村), 갈부(鞨部) 1촌(村)을 통일하고, 무리(衆) 5천 6백을 갖게 되었다.
때는 청토(靑兎:을묘, AD295년) 10월이었다.
담하(談河)를 보내서 경도(京)로 들어가 은밀히 을씨(乙氏)와 초후(草后)에게 보고하게 했다. 이때에 초후는 왕의 총애를 오로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사치해서 도성 밖의 여러 산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대신원(大神院) 능원(菱院) 단왕궁(丹王宮)을 짓고 중수하며 왕과 더불어 왕래하였다. 정사는 모두 우평(于枰)과 상보(尙寶)와 창조리(倉助利)에게 위임하고서 그 다스림을 묻지 않았다.
창조리가 간하여 말했다.
“망국(亡國)의 길(道)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환락을 탐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음(貪樂不顧政)이 하나이고, 사람을 정으로 쓰고 재능으로 쓰지 않음(用人以情不以才)이 하나이며, 현자를 받들어 그 말을 쓰지 않음(擧賢而不用其言)이 하나입니다.
지금 세가지를 다 갖추었으니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우평은 뇌물의 다소(多少)로써 사람을 쓰고 변장(邊將)들은 다만 배를 불리는 것을 일로 삼으니 언제 변이 생길지 모르는데 폐하는 근심함이 없이 호색(好色) 탐황(貪荒)하며 잡역(雜役)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신이 일찍이 주의(朱義)를 천거하여 납언(納言)으로 삼았으나 폐하께서는 그 직간을 괴롭게 여겨 양존(陽尊)으로 그 관(官)을 삼고는 그 말을 듣지 않다가 내치시니 주의(朱義)는 병을 칭탁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를 살피십시오,“
왕이 말했다.
“왕이란 다만 임현(任賢:현자에게 맡김)일 따름이다. 경과 두 장인(二舅)이 나라를 위한 어진 재상(爲國賢相)이니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또 인생(人生)은 행락(行樂)이로다. 경은 나를 잡다한 정무에 근심하다가 초췌해져서 끝나게 하고자 함인가? 금을 캐서 가짐에 위험을 돌보지 않는 자는 바위 사이로 깊이 들어갔다가 압사(壓死)하고 뒤에 오는 자가 남김없이 그것을 거둔다. 짐은 금을 잡다 죽는 것(執金而死)이 즐기다 망국하는 것(樂而亡國)보다 오히려 나은지 알지 못하겠노라.”
창조리는 그 간(諫)할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오면서 탄식하였다.
“내가 물러나야 함이로다.
”
그 처 음씨(陰氏)가 말했다.
“내 형이 그대를 상(相)으로 천거한 것은 나라(國)를 위함이지 임금(君)을 위함이 아닙니다. 주상이 유도(有道)하면 섬기고, 무도(無道)하면 폐할 것이니 이가 곧 상국(相國)입니다. 그대는 내 남편이 되어서 어찌 졸부(拙夫)의 말을 합니까?”
창조리가 물었다.
“그를 폐하고 장차 누구를 세우는가?”
음씨가 말했다.
“을불태자는 약로대왕(藥盧大王)의 소탁(所託)이니 그를 찾아 세움이 가할 것입니다.”
창조리가 말했다.
“지금은 또한 이르도다. 내 관망하면서 서서히 도모하리라.”
음씨는 크게 기뻐하며 을씨(乙氏)와 내통하였다. 때에 을씨는 초후(草后)로 인해 다시 왕에게 총애를 얻었다. 왕이 말했다.
“내가 네 남편을 죽이고 네 아들을 내쫓았는데 너는 원망하지 않는가?”
을씨가 말했다.
“왕을 남편으로 삼았는데 어찌 용열한 남편을 생각하며, 그대의 어린 아들을 낳았는데 어찌 다 큰 아들 생각을 하겠습니까?”
왕은 그러려니 여기고 말하는 바를 많이 들어 주었다.
을씨는 이에 우탁(于卓)과 더불어 장사(將士)들과 교유하며 결탁하였다.
때에 안국군 달가(達賈)의 옛 신하 선옹(仙翁)은 마산(馬山)에 퇴거하여 재산을 쌓음이 누만(累萬)이었다. 아들 선방(仙方)으로 하여금 입경(入京)시켜 을씨를 알현하고 을불태자를 받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을씨는 크게 기뻐하며 침실로 이끌고 들어가 술을 따라 권하고 고기를 잘라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위국지낭(爲國智囊)이란 소문을 들은지가 오래인데 지금 너를 보내 내 모주(謀主)로 삼으니 거의 하늘의 도우심이다.”
을씨는 선방이 취하는 것을 보고 귀에 입을 붙여 말하였다.
“지금 이후로부터 너는 나의 심복(心腹)이 되고 나는 너의 두목(頭目)이 되어 한몸(一身)이고 한마음(同心)이 될지니 맹서가 없을 수 없다. 삽혈(歃血)의 맹서는 뜻이 교혈(交血)에 있음인데 너는 남자이고 나는 여자이니 혈기(血氣)를 직통(直通)하느니만 못하다.”
마침내 옷을 벗고 선방을 안으니 선방이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성모(聖母)를 증(烝)하오리까?”
을씨가 말했다.
“대사를 이루면 네 자손으로 하여금 후족(后族)을 삼고 내 자손은 왕족(王族)이 되어 천하를 함께 할텐데 구구하게 한 배꼽아래를 어찌 사양하는가?”
이 때에 선방은 나이 39살이고 을씨는 35살 이었으니 장양(壯陽) 장음(壯陰)이 맞닿자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선방이 마침내 을씨의 배위에 올라 서로 합하고서 맹서하여 말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은 우리 자웅(雌雄)을 비추사 약속컨대 을불태자를 받들어 왕을 삼고 공(功)을 이루면 세세토록 이와같이 서로 자웅(雌雄)을 지을 것을 맹서합니다.”
맹서를 마치고 행음(行淫)하니 을씨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내 마땅히 네 아들을 낳아서 가르쳐 장래(來)? 나를 위안케 할것이다.”
선방이 말했다.
“우상공(于相公)이 이를 알면 모의에 해로울까 두려우니 안됩니다.”
하고 다시 범(犯)하자
을씨가 웃으며 말했다.
“네 꾀(謀)가 심히 치밀하니 내가 안심이로다. 내가 너와 더불어 상친(相親)함이 이와 같으니 너의 몸은 곧 내몸이다. 감히 사사로이 훼손함으로써 내 걱정을 더하지 말것이니라.”
선방이 말했다.
“신(臣)은 은혜를 받음이 이에 이르러 만번 죽어도 달콤할 뿐이니 후(后)께서는 살리고 죽이소서(生殺之).”
을씨가 이에 속곳내의(衵衣)를 그에게 내어주며 말했다.
“너의 몸안에 입어서 조석으로 잊지말거라.”
선방은 배사(拜謝)하고 물러나와서 술집(酒肆)을 잠행하며 무뢰배들과 교제하여 결탁하고 다시 안국군 달가의 옛 신하로서 전간(田間)에 흩어져있는 자들과 결속하여 서로간에 안팎(表裏)이 되었다.
달가(達賈)의 큰아들 자(柘)의 어머니 해문(解門)은 평산(平山)부호(富戶) 해숙(解熟)의 딸이다.
소시적에 미모로 뽑혀 중천왕(中川王)의 후궁(後宮)으로 들어갔는데 달가와 상통(相通)하여 자(柘)를 낳은 까닭에
스스로는 달가의 아들임을 알았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고 마침내 중천왕의 아들이 되었다. 중천왕이 붕하고 계속하여 약로대왕(藥盧大王)의 총애를 받아서 약로의 아들 저(楮)와 딸 표씨(標氏)를 낳았다
(약로대왕 = 서천왕, 달가의 형. 즉 해문은 중천왕, 서천왕, 달가와 통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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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치갈?)은 태자 시절에 또한 해문(解門)및 표씨(標氏)와 통한 까닭에
(치갈은 해문과 그 딸, 즉 서조모와 여동생과 통했음)
해문을 후대하여 상(賞)을 내림이 매우 무거우니 집안이 매우 부유했으나 달가가 죄없이 피살된 것을 한(恨)하여 항상 은밀히 자(柘)에게 말했다.
“너는 달가의 아들이니 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할것이다.”
자(柘)는 이를 승낙하고 마침내 미친척(佯狂)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또한 무뢰배에 투신하여 음무(淫巫:음란한 무녀?)들을 많이 기르며, 민재(民財)를 끌어모아 수십개의 창고(倉)을 일으켰다.
우평(于枰)은 재물을 탐하고 호색(好色)하였다. 해문(解門)을 보니 나이는 비록 50이었으나 오히려 아름다움은 소녀(少女) 같았으며 궁중을 출입하며 왕의 총애를 얻고 그 집안은 재산이 많았다. 이에 따라가 유혹하며 말했다.
“나는 처(妻)가 세 사람 있으나 그대의 아름다움같은 이는 아직 없소. 그대를 제 4처로 삼고 싶은데 되겠소?”
해문이 대답했다.
“장군(將軍)은 초방(椒房)의 존친(尊親)이요, 첩은 선왕(先王)의 퇴물(退物)입니다. 만약 처(妻)가 될 수 있다면 어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장군은 인색해서 재물을 쓰지않는데 반해 나는 사치를 좋아해서 낭비하니 서로 용납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우평이 말했다.
“내 성격이 비록 인색하나 어찌 애처(愛妻)를 위해 재물을 아까워 하겠소?”
해문이 이에 우평을 이끌어서 목욕(浴)하며 또한 도발하다가 또한 게으름을 피우며 말했다.
“내 아버지 해숙(解熟)은 우리들의 입궁으로 인해 전곡(錢穀)을 많이 허비하고 죽어서, 장원(庄園)은 많이 황폐하고 하나 있는 아들 현(玄)은 오히려 어리므로 내가 아버지를 위해 원(院)을 조성하여 명복을 빌고자 합니다. 장군은 황금 백량(百兩)과 양 천마리(羊千頭), 오곡(五穀) 2백석(石)으로 나를 도와 주겠습니까?”
우평은 침음(沈吟)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그대의 아버지는 공경(公卿)의 신하도 아닌데 어찌 큰 원(巨院)을 짓소?”
해문이 노하여 말했다.
“내가 비록 천한 사람(賤人)이나 세 왕을 차례로 섬겨서 지위(位)가 일품(一品)에 이르렀고, 내 아버지는 비록 공경(公卿)은 아니나 왕자의 할아비입니다. 작은 원(小院)이 가하겠습니까? 그대는 나를 처로 삼고 싶어 하면서 내 아버지를 박대하니 그대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손을 뿌리치고 나가니 우평은 크게 놀라서 쫓아가 안으며 말했다.
“내가 돕고싶지 않은게 아니라 다만 원(院)이 크면 인부가 많고, 인부가 많으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드는 까닭이오.”
해문이 말했다.
“그대는 초친(椒親)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한 처(妻)를 위해 그 아버지의 원(院)을 조영할 수 없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평이 말했다.
“내 마땅히 힘쓰겠소.”
해문이 이에 기뻐하며 욕중(浴中)에서 상통(相通)하여 그 음기(淫技)를 남김없이 발휘하니 우평이 크게 미혹(大惑)되어 감히 그 청구(請求)를 거절하지 못했다. 해문이 이에 자(柘)에게 일러 말했다.
“우평은 곧 네 아버지의 원수이니 내가 그에게 아양을 떤 것은 그 쌓은 재산을 빼앗으므로써 너를 돕고자하는 까닭이다.”
자(柘)가 말했다.
“다만 재산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그 도당(徒黨)들로 하여금 서로 시기해서 해치도록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마땅히 중간에서 이간을 붙이십시오.”
해문은 이를 허락했다.
<高句麗史略> 제16 고국원제기 26년 4월조
羅濟以兄弟子姑姨爲妻 索頭肅愼烝母報子 紫蒙盖馬亦多 是風盖西高東低 水流之勢也
“신라와 백제는 형제의 아들, 조카딸과 고모, 이모로써 처를 삼는다. 색두(索頭) 숙신(肅愼)은 어미를 증(烝)하고 자식을 보(報)하는데 자몽(紫蒙) 개마(盖馬) 역시 많이 그러하다. 이 풍속은 대개 서고동저(西高東低)이니 물이 흐르는 형세이다.
선방(仙方)은 자(柘)가 큰 뜻(大志)을 가졌음을 알고 마침내 서로 친교를 맺고(交結) 무뢰배들로 하여금 사방에서 도적질(作賊)을 하게했다. 우평은 수하들을 독려하여 도둑들을 잡게 했다. 해문이 그 수하들을 반간(反間)하여 말했다.
“양민들을 잡는것을 사사로이 혐오하는 까닭으로 풀어준 그 도둑으로 하여금 잡는자를 두드려 패는 것이다.”
때문에 도둑들이 서울안(京中)에서 횡행함이 많았으나 붙잡지 않았다. 왕은 노하였다. 우평이 도둑 잘 잡는자를 얻고자 하니 해문이 선방을 천거했다. 선방은 이에 우평의 충노(忠奴)들을 잡아들이고 모두 사납게 매질(猛杖)해서 꾸며낸 자백을 좇게했다. 이에 우평의 무리들이 많이 우평을 원망하고 도리어 선방에게 붙었다. 선방은 그들 모두를 어루만져 자신을 위해 이용했다.
해문의 막내 여동생 포씨(蒲氏) 역시 약로대왕(藥盧大王)의 후궁으로써 왕이 태자때부터 잠통(潛通)하다가 이에 이르러서 제 3후(三后)가 되어 서궁(西宮)에 거처하고 있었다. 해문은 다시 선방을 천거하여 서궁(西宮)의 알자(謁者)로 삼았다. 포씨는 왕의 총애가 있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해문이 포씨를 권하여 선방과 더불어 밀통해서 임신을 하였다. 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어떻게 임신 하였느냐?”
포씨가 말했다.
“선방이 가진 영약(靈藥)을 얻어 먹고서 잉태했습니다.”
왕이 이에 선방에게 황금 백량을 내리면서 그 약에 대해 물었다.
선방이 대답했다.
“신이 소시적에 산에 들어가 신선(神仙)을 찾았었는데 한 백두옹(白頭翁)이 있어 바위 위의 오디열매(椹實)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이것을 먹으면 남자는 가히 선도(仙道)를 얻을 수 있고, 여자는 가히 산도(産道)를 얻을 수 있으리라.“ 신이 그것을 따먹고 그 나머지를 따가지고 돌아왔으나 모두 잃어버리고 오직 한개 얻은 것이 오히려 남았으니 이는 실로 하늘의 도움입니다.”
왕이 이에 그 아들을 심(椹:오디?)이라 이름(名)하였는데 후에 선방의 아들이 되었다.
방회(方回), 대발(大發), 우선(于先), 우풍(于豊)은 모두 을불의 옛 스승으로써 을씨와 통모(通謀)하며 원조하였다.
담하가 돌아와서 형세가 점차 유리해짐을 보고하자 송거가 말했다.
“우리들은 밖에 있어 간고(艱苦)하고 저들은 도성에 있어 안락하니 모사(謀事)는 스스로 같지않음이 있는 것이나 만약 저들과 같이 왕이 크게 민망(民望)을 잃기만을 기다리면서 느릿느릿 도모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소금을 가지고 소의 뒤를 따라가면서 ”불알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먹으리라.“하는 것과 같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모용씨(慕容氏)를 설득해 우리 서변(西邊)을 침범케하고 우평(于枰)등이 출동해서 그를 막으면 선방(仙方)등이 안에서 난을 일으키고 우리들은 구원하러 간다 칭하고서 병력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가 왕을 죽이고 우리 군(君)을 세워서 모용씨와 더불어 화친하고 남으로 낙랑(樂浪) 백제(百濟)로 내려가면 조업(祖業)이 가히 창성할 수 있다.”
을불은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기고 담하에게 명하여 샛길로 하여 바다로 나가서 뱃길을 따라서 극성(棘城)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를 설득케했다.
“대국(大國)이 만약 신(臣) 을불(乙弗)을 위해서 병력을 빌려주어 공을 세운다면 마땅히 세세토록 번방(藩)이 되어 조공할 것입니다.”
모용외가 이를 허락하고 병력을 이끌고 서침(西侵)하였는데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서 약로대왕(藥盧大王)의 능(陵)을 보고는 사졸들로 하여금 파내게 했다.
담하가 말했다.
“대왕은 의(義)로써 병력을 빌려주고서 어찌 우리 선왕(先王)의 능(陵)을 파내어 원수를 지십니까?”
모용외가 말했다.
“네 나라가 반복(反覆)하는 까닭에 볼모(質)를 잡고자하는 것이다.”
능(陵)을 파내는 날, 천기가 음산하더니 갑작스레 추워짐이 마치 엄동(嚴冬)과도 같았다. 때는 대룡(大龍:병진296) 8월이었다. 병력을 출발할 때만해도 오히려 늦더위가 남아있었던 까닭에 사졸(士卒)들은 두꺼운 옷이 없었다. 하루 밤 사이에 얼어 죽은 자가 줄을 잇고(相繼) 또한 광내(壙內)에서 풍악(風樂)소리가 나니 사졸들은 두려워서 감히 능을 파헤치지 못했다. 모용외는 뒤(後)에 신(神)이 있다는 이유로해서 중지시키고 또 갑작스런 추위에 옷이 없는 까닭으로하여 퇴각해서 물러갔다.
(을불은 권력을 잡기 위해 적인 모용외와 내통까지 했군요)
선방(仙方)등도 또한 외적(外敵)과는 더불어 통모(通謀)할 수 없다하여 움직이지 않은 까닭에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모용외는 우리가 내응(內應)하지 않은데다 헛되이 사졸(士卒)을 상한 까닭에 그를 꾸짖고 최체부(最彘部) 역시 점제(秥蟬)와 더불어 교위(校尉)에 소속(幷屬)될 것을 명령하였다.
창포(菖蒲)의 어머니는 본래 점제(秥蟬)로부터 왔는데 점제(秥蟬)는 그 아들로써 창포를 아내로 맞게 하고자하여 교위(校尉)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을불(乙弗)을 내쫓으려 했다. 교위가 이로인해 이유없이 질책하며 혹은 부당한 공납(貢)을 요구하니 을불은 실화(失和)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쓰며 정성을 다했다.
때에 조정(朝廷)은 고노자(高奴子)를 신성(新城) 태수(太守)로 삼아 서북(西北)을 대비하였는데 모용외는 그 위엄과 명성(威聲)을 듣고는 다시는 재침(再侵)할 뜻이 없었다. 오로지 낙랑(樂浪)에만 마음을 두고 5부(五部)를 통합코자 하여 모든 신영주(新領主)들을 점제(秥蟬)로모이게하여 맹약(盟約)을 다시 정(定)하도록 했다.
을불은 가고싶지 않았으나 교위(校尉)가 사람을 시켜 재삼 독촉을 하므로 부득이 창포(菖蒲)와 더불어 재생(再生)등을 이끌고서 회맹에 갔다.
서부사자(西部使者) 역시 국경을 정하고자(定界)하여 이르렀는데 교위는 사자(使者)와 서로 통하고 을불을 포박해서 조정에 송치(送致)하였다. 이에 사자(使者)가 호송하여 가니 곧 황마(黃馬:무오298)의 초 겨울이었다.
이해 9월에 서리(霜)와 우박(雹)이 내려 곡식을 죽이니 백성들은 굶주려서 서로 도둑질을 하였다. 왕은 궁실을 더욱 증영(增營)하느라 천하(天下)에 재목을 구하고 돌을 채취토록하니 운반하는 노역자들은 도로에서 추위와 허기에 지쳐 서로를 바라보고 백성들은 원성이 높았다.
을불이 탄식하여 말했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는데 영웅은 소인배 오랑캐(小虜)에게 잡힌 바 되니 이 무슨 마(魔)인가?”
함리(檻吏)들이 그 말을 듣고 상의하기를 “우리가 을불태자의 뛰어남(賢)을 들어온지 오래인데 지금 그 영특한 용모(英皃)를 보니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죄인으로 대우할 수는 없다.”하고 그 칼(枷)과 형틀(械)을 늦춰주고는 그를 심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며칠이 지나 반왕잠(班王岑)에 이르렀다. 그 땅은 청옥(靑玉)이 많이 산출되는데 캐어서 궁실의 장식(粧飾)을 삼으므로 노역자(役者)가 수천명이고 공사를 감독하는 자 또한 수백명이며 운반하는 자들이 서울(京)에까지 잇달았다. 한 사람이 옥판(玉板) 두개를 지는데 결파(缺破:흠집없이 도착?)하면 상(賞)을 주었다. 운반을 호위하는 자(護運者)들이 오고가며 그들을 감독하니 술(酒)과 장식(漿食:국과밥?)을 파는 자들이 길에 시가(街)를 이루었다.
이날 천기가 한랭하고 또한 눈이 내리므로 옥을 깨뜨리는 자(破玉者)들이 속출하여 도중(途中)에서 서로 목놓아 울었다.(아마도 깨뜨리면 본인이 배상해야 하는 듯?) 때에 선방(仙方)의 무리(徒) 수십인도 또한 운반을 호위하는 자(護運者)들중에 있어서 그 우는자들을 보고는 도발하여 말했다.
“어째서 반(反)하지 않고 도둑이 되는가?”
이에 옥을 지는 자(負玉者)들이 난(亂)을 일으켜 그 사자(使者)를 죽이고, 을불이 장차 지나가리라는 말을 듣자 기다렸다가 습격하여 또한 호송사자(護送使者)를 죽이니 함리(檻吏)들은 모두 도둑들에게 붙어서 마침내 을불, 재생, 송거등을 풀어주어 도망치게 만들었다.
왕은 우풍(于豊), 방부(方夫)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진압케하고 을불을 잡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때 을불은 오히려 대설(大雪)로 인해 멀리 도주할 수가 없어서 물레방아(水碓) 집에 숨어서 장차 돼지(猪)를 불에 구워 먹으려 하고 있었다.
방부(方夫)가 군사를 이끌고 물레방아간 밖에 와서 멈추고는 연기가 나는 것을 보자 들어와서 을불을 보았다. 방부는 을불의 얼굴을 익히 알고있기에 비록 변하기는 했어도 속으로는 그를 알고 을불에게 눈을 맞춘채 말했다.
“나는 왕명을 받들어서 을불태자를 잡고자 여기에 이르렀는데 무죄한 사람들이 여기 있어서 군요(軍擾)를 입을까 두려우니 속히 멀리가서 피하길 바라오. 여기서 동북쪽으로 2십리를 가서 당자촌(棠子村)에 고박아(高朴兒)라는 의기(義氣)로운 사람이 있으니 그리 가면 될것이오.”
을불이 그 구해주고자 하는 뜻을 알고 사례하며 일어나자 방부가 말했다.
“날씨가 추운데 또한 허기져서 어찌 가겠소? 나에게 간직한 술(藏酒)과 찐 돼지고기(蒸豚)가 있으니 마시고 가시오.”
을불은 받아서 그것을 먹고 당자촌(棠子村)을 찾아 나섰다.
방부는 군대를 주둔시킨채 움직이지 않고 을불이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수색을 시작했다. 함리(檻吏)들을 찾아내자 이야기를 짜서 말했다.
“을불은 진짜 을불이 아니고 곧 가짜 을불인데 난민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마침내 한 시체의 머리를 베어서 왕에게 바쳤다.
왕이 말했다.
“진짜 을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탁(于卓)이 말했다.
“신이 진짜 을불을 아는데 이미 강에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어찌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차례로 다시 그를 수색하라.”
이에 천하에 령(令)을 내려 을불을 찾는자에게 천금(千金)의 상을 내린다하고 오부(五部)에 사자(使者)들을 파견(發)하니 선방(仙方)이 그 무리들로 하여금 뒤를 좇게 했다.
그때에 을불은 눈(雪)을 무릅쓰고 당자촌에 들어가 고박아(高朴兒)를 물어 찾으니 작은 산등성이 아래 정원(園)이 있는데 소나무 잣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산골짜기 물을 끌어들여 샘(泉)을 만들었으니 곧 은자(隱者)의 집(家)이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동자가 나와서 우러러 보며 말했다.
“장골 대한(大漢) 서너사람이 도적질을 하고자 오셨습니까?”
을불이 말했다.
“아니다. 우리는 고박아선생의 풍도를 듣고서 왔다.”
동자가 웃으며 말했다.
“고박아는 단지 한 돗자리 짜는 늙은이인데 무슨 선생의 풍도가 있습니까? 그대들은 좀도둑이 아니고 우러러 남의 천하를 훔치려는 자들이 아닙니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동자의 말과 같다.”
동자는 처마 밑으로 맞아들이며 숯불갱(炭火之坑)에 이르러서 말했다.
“여기서 옷을 말릴 수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치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숯불은 불길이 치성한 것이 마치 오기를 기다려서 준비된 것만 같았다. 잠시 있자 고박아(高朴兒)가 포의야관(布衣野冠)에 작은 체구의 여윈 얼굴로 나와서 흔연히 맞아들이는데 마치 오랜 숙친(熟親)을 대하는 듯 했다. 당(堂)안으로 이끌어 차례로 예(禮)를 나누며 말했다.
“일전에 경도(京都)의 천한 사위 방부(方夫)로부터 이곳에 도착하는 귀인이 있게 될것이라는 전갈을 받았으나?? 집안에는 받들어 올릴만한 진미도 없고 또한 멀리나가 밖에서 영접할 수도 없었으니 엎드려 비옵건대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日作自京都賤壻方夫到此以爲有貴人來到而家無借奉之味又不能遠接于外伏乞寬恕)??
을불이 말했다.
“표류(漂流)하는 사람이 얻는 아름다움(得佳)은 곧 후의(厚意)이니 살아서 이곳에 도착한 것만도 행운이오! 어찌 감히 분외(分外)의 것을 바라겠소? 이로부터 선생을 받들어 풍교(風敎/威敎??)로써 모새(茅塞:미개한 지식)를 열고자하니 가련히 여기고 구원해 주면 다행이겠소.”
고박아가 말했다.
“산간의 비부(鄙夫)가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로부터 겨울이 깊어져 들판에 눈이 쌓이면 길(行路)이 불통(不通)되어 멀리 갈 수 없으니 가히 천한 장원(賤庄)에 머물러 화로를 끌어안고 술을 데우며 새끼를 꼬고 돗자리를 짜는것도 또한 일락(一樂)을 안에 갖고 있으니 더불어 동취(同趣?)하며 소일(消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딸 고씨(高氏)를 불러 술을 내오게하니 곧 방부(方夫)의 처(妻)였다. 아름답고 영이(穎異:총명과인)하며 사람을 접대함에 능숙하였다. 을불이 그 나이를 물으니 방년 19세로서 초후(草后)와 같은 나이였다. 을블은 초후(草后)를 추억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암연(黯然)히침울해져 눈물을 흘렸다. 고씨가 말했다.
“내 남편은 어릴적에 을불태자와 더불어 함께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습니다. 태자는 현명했으나 불행하게도 강에 투신하여 훙서(薨逝)했는데 세간에는 가짜 을불이 있어서 소란을 일으키니 주상이 근심하여 그 사람을 잡으라고 명했는데, 비록 그 사람을 잡는다해도 진짜 을불이 아닌데 어찌 잡을 필요가 있습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주상입니다.”
말을 마치자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리며 을불에게 술잔을 내미는데 두눈에 정을 담아 보냈다. 을불 또한 웃으면서 말했다.
“주상인즉 현명하고 을불은 어리석도다. 어찌 강에 투신함이 그리 빨랐는가!”
고씨가 다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밤에 천문을 관상(觀天象)하며 ‘왕성(王星)은 미미하고 태을(太乙)은 점차 밝아지니 혹 진짜 을불(乙弗)이 인간(人間)에 살아 있어 오래지 않아 천자(天子)가 되는 것이 아니냐’했는데 천자가 될 자(作天子者)가 어찌 용이하게 사람에게 잡히는 바 되겠습니까? 천명(天命)을 모르고서 망령되게 스스로 성질을 내고 있으니 참으로 미친 주상(主上)입니다.”
일좌(一座)가 모두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제수(嫂)는 진실로 의사(義士)이다! 가히 우리네와 더불어 한 마음이로다.”
이에 서로 친숙하게 장난치다가 크게 취하여 책을 베고서 잠이 들었다.
고씨는 따로 을불을 이끌어서 안으로 들어와 특별히 비단 금침을 펼쳤다.
을불이 말했다.
“사람들 모두 취하여 밖에 누웠는데 어찌 나 혼자만 이와같겠소?”
고씨가 웃으며 말했다.
“용굴(龍窟)은 뱀굴(蛇窟)과 더불어 같이하지 않습니다.”
을불이 물었다.
“용굴(龍窟)이 어디에 있소?”
고씨는 웃으면서 자신을 가리켰다. 을불이 이에 고씨를 안고 잠자리로 들어가 서로 통하였다.
이날 밤에 큰 눈이 한길(丈)남짓이나 내려 원근(遠近)이 모두 길이 막히니 수포사자(搜捕使者) 역시 도중(途中)에서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왕은 속히 잡아오지 않는다고 그 사자(使者)에게 태형(笞)을 가하니 사자들이 모두 원망하여 말했다.
“강에 빠져 죽은 자를 장차 수부(水府:하백궁?)에서 잡아오란 말인가?”
혹은 을불(乙弗)을 자칭하며 죽기를 원하는 자가 서울 안(京中)에 또한 오,륙명이 있었다. 왕은 그들 모두를 친히 국문하고 거짓임을 알자 그 모두를 참하라고 명령했다. 창조리가 간하였다.
“인명(人命)은 지중(至重)합니다. 하민(下民)들이 왕법을 모르고 망령되이 을불(乙弗)을 칭하는 것은 을불의 뛰어남(賢)을 듣고서 허명(虛名)을 훔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인다면 그 이름(名)을 이루어주고 크게 인화(人和)를 잃게 되니 태형(笞)을 가하여 경계시키느니만 못합니다.”
왕은 듣지 않고 속히 그들을 참하라고 명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가 바로 선방(仙方)의 무리(徒)였으니 그 참(斬)하는 자들 역시 같은 무리였던 까닭에 몰래 놓아 주고서 허수아비(偶人)의 목을 끊어 바치며 말했다.
“형을 집행할 때는 모두 산 사람들이었는데 목을 끊은즉 모두 이런 허수아비(偶人)였습니다.”
왕은 크게 의혹(大疑)하였다.
그 때에 경도(京都)에도 큰 눈(大雪)이 내렸는데 도성사람들이 눈사람(雪人)을 만들어 “을불태자”라 하며 혹은 수레에 실어 시가를 지나가니 사람들(市人)이 다투어 절을하면서 “우리 천자(吾天子)”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를 잡고자 한즉 뿔뿔이 흩어져 간곳을 모르고 다만 수백개의 큰 눈사람(大雪人)을 궁안(宮中)에 잡아다 놓았다.
왕은 노하여 그것을 불사르도록 명했다.
역부(役夫) 수백명으로 하여금 각기 큰 횃불(大炬)을 들게하고 “을불은 마땅히 이 눈이 녹듯 꺼져라.”하고 빌게 했다. 그 중에 몇 사람이 크게 외쳤다.
“을불이 마땅한가? 을불은 마땅히 왕이다. 연태자(椽太子)가 마땅히 이 눈처럼 사라져라.”
그러자 사람들 모두가 따라서 함께 제창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 선창(先呼)한 자를 잡도록 명하자 사람들이 모두 횃불을 든 채 뿔뿔이 달아나므로 화연(火烟)이 궁안에 가득 차서 궁인(宮人)들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갑자스런 와중(忽閒)에 잘못하여 궁중에 실화(失火)하니 불길의 기세가 매우 급하였으나 불을 끄는 자가 없었다. 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그 잡는 것을 중지시켰다. 그 눈사람들을 보니 혹은 “椽太子(연태자)” “顔太子(안태자)”라 적혀있고, 혹은 “揷矢婁(삽시루)”라 써 놓았는데 팔을 자르거나 눈을 뚫고, 혹은 머리를 끊고 가슴을 파고 코를 깎거나 입을 지졌으며 또한 “主上可殺(주상을 죽일것이다)”라고도 써놓았다. 왕은 분하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장군(將軍) 우평(于枰)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고 바람이 갑작스레 휘몰아쳤다. 왕은 연후(緣后), 초후(草后), 우태후(于太后) 및 두 태자와 함께 겨우 신림(神林)의 원(院)으로 화(禍)를 피하고 궁중의 모든 비빈들과 왕자녀(王子女)의 생사는 아득히 알지 못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무슨 죄로 이런 재앙을 받는가?”
홀연 신림(神林)의 숲이 어지럽게 우는 가운데 한 장군(將軍)이 검을 휘두르며 호령하고 나오는 것이 보이는데 어김없이 바로 안국군 달가(達賈)였다. 왕은 크게 놀라 땅에 자빠지며 말했다.
“나 죽는다! 나 죽는다!”
우태후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무슨 경겁(驚怯)을 이리 심하게 하는가?”
그때 서궁(西宮)의 알자(謁者)가 포후(蒲后)와 왕자 심(椹) 및 홍(紅) 람(藍) 두 공주를 데리고 와서 아뢰었다.
“신이 병권(兵權)이 없는 까닭에 진화(鎭火)를 지휘하지 못하고 다만 거느린 궁노(宮奴)들과 더불어 겨우 서궁과 정궁(正宮)의 보화를 보전하고 올 수 있었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때야 바야흐로 너의 충성을 알겠다!”
포후(蒲后)가 말했다.
“위두(衛頭)의 패거리들이 모두 난군(亂軍)과 더불어 도둑질을 하자 선방(仙方)이 그를 꾸짖었으나 금할 수가 없었으니 저들은 모두 위두이고 선방은 다만 일개 알자(謁者)일 따름이니 어찌 보국(保國)을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위두는 모두 우 장인(于舅)의 소임이다. 혹여 뇌물을 받고 도적들을 쓴 것인가?”
우태후가 말했다.
“어찌 도적을 쓸 장인이겠는가? 마땅히 이 급한 때에는 미천함으로써 사람을 저버릴 수 없으니 의당 선방을 위두로 삼아 이를 진압해야 할 것이다.”
왕은 그러히 여기고 즉시 선방을 배(拜)하여 위두(衛頭)로 삼았다.
첫댓글 끝부분 원본 사진 40p. 4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