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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송 치 현
암벽 한 귀퉁이를 놓치고 난 뒤로는 기억이 없다. 분명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이어지는 어둠에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았다.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나에게 왜 일어나는지, 우울증이 오는지, 왜 현실 도피를 하는지 알겠다. 티브이를 켤 때 항상 챙겨보던 스포츠 뉴스 채널은 누군가 틀어주지 않는다면 들을 수 없는 이곳은 내가 사는 세상이다.
매일매일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잡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내가 우연히 접한 클라이밍을 배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에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 운동을 알려준 사람을 원망하기도 했다. 바깥에 나가지 말고 겸손하게 실내에서 운동하지 무슨 헛짓거리인지 이러한 절망 섞인 목소리가 내 마음을 지배한 지 오래됐다.
내 앞을 잃은 대신 예민한 청력을 얻은 나는 미로 속에 갇히고 사방이 ‘벽’으로 막힌 이 길은 새로운 세상에서의 첫 벽이다. 맨 정신으로 이 길을 헤쳐 나갈 수 없으니 병원을 나와서는 한동안 집 안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술과 친분을 맺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제정신이 아닌데 알코올이라는 용기 촉진제를 매체로 제대로 된 정답을 찾기란 만무했다. 청력이 뛰어난 동물을 대표하는 토끼처럼 나는 뛰어난 감각이 있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신은 한 가지를 뺏는 대신 그에 따른 나머지 능력을 주신다고 했는데 예전보다 청력이 예민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 뛰어나진 않은 것 같다. 아무리 듣는 것만으로 이 미로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그러니 소리의 ‘소’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글로써 내 마음을 해결해 준다고 한다면 그 속에서 내가 위치한 곳은, 글자마다 띄어져 있는 자간의 공백 사이에 있으며 그곳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이 글자들 사이에서 포효해도 이 마디마디에서 존재하는 것은, 내 절망 섞인 포효이며 그에 따라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존재하고, 나는 더욱더 길을 찾을 수 없으니 이제는 묵묵히 길을 걷는다.
항상 이 벽을 보고 있을 때, 혹은 그것과 마주할 때면 고개를 올려다 저 정상을 바라보곤 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었다. 꼭대기를 바라볼 수 없는 암흑이 짙게 깔린 그 날, 내 무대 위 직원들은 내 앞의 커튼을 치기 시작하니 아무리 조명을 비춰 보아라 그 뒤편의 주인공은 숨바꼭질하고 있으니, 누군가 ‘못 찾겠다 꾀꼬리’라고 불러보아도 저 바다 속 깊은 곳에 빠져버린 숨바꼭질의 주인은 그 말을 듣지 못한다. 그곳에서 깊은 내면의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속은 공기조차 존재하지 않고 누군가 의사전달을 하더라도, 술래가 물먹는 소리만 들을 뿐이다. 그렇게 퇴원 후 은둔생활이 수개월이 지나고 어머니의 자주 울기 시작했다. 나에게 쓴 소리하지 않았다. 아마 나의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잔소리를 하셨기 때문에 별말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사고 전 기억은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내가 그렇게 병원 신세를 지고 온 나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차며 ‘꼬락서니가 뭐냐’라고 할 정도면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가늠이 됐다. 공감 능력의 저하, 감수성은 저 밑바닥이라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 사람에게 꼬리표를 달았다. 차라리 나에게 이런 말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몇몇 이름 모를 사람이 찾아와서 나를 위로한다고, “어떻게 몸은 괜찮아?” “에구 어쩌다 그랬어, 그러니 조심 좀 하지” 언어 속에서 그 온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한 것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연민의 온도’이다. 원망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것이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지나고 그나마 찾아오던 사람들도 쥐죽은 듯 조용했다. 한참 동안 무대의 커튼이 걷히지 않는다면, 무대 앞 관중들은 웅성웅성하며 떠날 것이다. 아버지 자식 아니라고 할까 봐, 그런 소리도 이젠 적응이 되고 어떠한 감정을 느낄 수가 없어졌다. 그렇게 은둔생활은 3년이 꼬박 지났다.
죽지 못해 살곤 있지만,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관중석이 텅 빈 지 오래되었고 시선조차 느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요즘엔 꿈을 꾸어도 검은색 바탕에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렇게 다채롭던 나의 봄은 어느새 겨울이 되었다. 21세기에 사는 요즘 젊은 층들은 마음속에 아이를 품고 살고 있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내 속의 아이는 추운 겨울 속 오두막 안에서 불도 피우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차라리 그럴 바에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요즘 세상의 글들을 읽어내려 노력했다. 그 계기는 어머니가 밤만 되면 부엌에서 우는 것이 듣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슬픈 울음소리는 내 닫힌 마음을 억지로 열어댔다. 문지기도 없는 조그만 오두막은 세상의 것들은 모두 위협의 대상이었다. 마음을 닫은 걸쇠도 무용지물로 만들고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는 억지로 그 아이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시작했던 것이 동사무소에서의 점자 읽기 수업이었다. 하지만 굳은살 범벅이었던 나의 손가락은 세상이 나에게 주는 상처들을 막아주긴 했지만, 세상을 읽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나에겐 세상을 잘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의 여린 손이 필요한 것 같다. 오두막 속의 어린아이는 내 이불을 꼭 붙잡느라 바쁘기에, 그 속에서 손을 꺼낼 여력조차 없다. 문을 강제로 열었던 그 사람조차도 이 이불을 걷어 내기란 여간해선 어려울 것이다.
수업을 듣기 위해 동사무소로 가게 되면 직원 중 한 명은 “어떤 게 필요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들의 말에는 항상 연민의 온도가 느껴졌다. 그렇게 내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 나 자신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여겼던 것 같다. 세상의 강자로 올랐던 내가 어느새 약자의 위치로 내려가니 그럴 만도 하다.
앞을 보지도 않고 마구 날뛰던 여자아이는 나와 부딪히더니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도와드릴까요?’라고 뒤에 덧붙였는데 그 느낌이 왠지 연민과 사랑 사이 정중앙에 머물렀던 것 같다. 나는 ‘괜찮아’라고 대답했지만, 그 여자아이는 내 뒤를 졸졸 쫓아오면서 나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왜 지팡이 써요?”
처음 들어보던 질문이었다.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서 그런지 순간 나도 이 지팡이를 왜 쓰는지 의문이 생겼다. 단순히 눈앞이 보이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한 편으론 ‘지팡이 말고도 다른 걸 쓸 수도 있지 않아요?’ 라는 느낌이 들어 그 아이가 이해되기도 했다. 아니면 나와 같은 사람을 처음 만나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이라는 단답형이지만 사고 이후 누군가의 말에 답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냥’ 이나 ‘몰라’라는 말이 나에겐 최선의 답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처음 만나고 그 아이와 친해진 계기가 생겼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우리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던 중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길이었다. ‘나는 애들끼리 싸우는 정도구나’ 여겼지만 어떤 아이가 날 붙잡았다.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한 것은 처음 이어서 의아했지만, 그것보다 날 붙잡고 억지로 데리고 가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버텨냈다. 순간 화가 났지만 참고 그 아이가 이끄는 곳으로 갔다. 그 아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순순히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 아이가 내 허리춤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내 발길에 혹시라도 다칠 것 같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그 아이를 따라갔다. 다행히 지팡이를 잡은 쪽이 아닌 왼쪽을 잡고 있어서 그나마 편했다. 그 여자애가 데리고 온 곳은 친구들끼리 싸우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무슨 어린아이들 싸움에 끼어드나 싶었고, 또 어떻게 도와줄지 몰라서 순간 멍하니 듣고만 있었는데, 싸움을 말려달라 부탁을 했지만 그건 더더욱 어떻게 할 지 몰랐다. 그렇게 싸우는 상황에서 내가 끼어들면 오히려 내가 더 다칠 것 같아, 쳐다만 아니 듣고만 있었다. 어찌 됐든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와서 그 아이들을 말려 집으로 데려가긴 했는데, 왜 싸우는지 들어보니 500원을 안 갚아서 언제 갚냐고 따졌는데, 자기를 밀었다며 그때부터 싸움으로 번졌다고 했다. 싸우던 친구는 싸움에서 진 건지 씩씩대면서 울분을 토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일단 어른이 끼어있는 상황에선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이겼는데….’ 라면서 돌아가는 것을 들어보니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마냥 귀엽고 옛날 생각도 나서 작게 소리 내면서 웃었던 것 같다. 그 여자아이는 나에게 뭐가 우습냐며 화를 냈는데, 애들 싸움도 말리지 못하냐고 따지듯 나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들 다칠까 봐”라는 말을 했지만 그래도 설득이 되지 않았는지 연거푸 나에게 화를 냈다. 그게 화낼만한 거냐며 나는 따지기도 했는데, 어찌 됐든 어른의 시야로 아이를 설득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닌 것 같다.
“아저씨는 힘은 세 보이는데 바보 같아요.”
“맞아 나는 바보야, 앞도 안 보이고….”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끌고 오지마.’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는데 그 여자아이는 중간 내 말을 가로채고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저씨 옛날에 막 벽도 오르고 그랬잖아요, 난 그거 해보니까 힘들어서 못했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잘하는데 그래도 아저씨 힘세요. 근데 바보예요.”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벽 올랐던 건 어떻게 알았어?” 세상에 궁금한 게 없어진 나는 그 애에게 물어봤다.
“아니 저기 앞에 체육관으로 아빠 따라갔는데, 옛날인데 아저씨 본 적 있어요.”
“근데 아저씨 어떻게 기억해? 아저씨는 잘 모르겠어.”
“처음에는 몰랐는데 아저씨 맞는 것 같아요, 거미같이 막 벽 올라가길래 멋있어서 봤어요. 근데 거미는 무서워요.”
세상 신기한 것을 본 것 같이 나에게 얘기를 했고, 나는 너무 의아했다. 나조차도 잊고 지냈던 것을 그 애가 기억했던 것도 신기했고 몇 년 전 일인데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증도 들었다. 그렇게 더 이상 대화는 오가지 않고 침묵만 이어졌다. 나는 그 애가 말이 많은 편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보통 아이 같으면 말도 많고 궁금증도 많았는데, 이 아이는 질문보다는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는 아이 같았고, 요즘 말하는 ‘애어른’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했다.
내가 가는 동사무소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은 지 시끌벅적했다. 예전엔 시각이 살아 있을 때여서 듣는 것에 예민하지 않았는데, 앞이 보이지 않고 난 이후에는 청각에 주로 의지한 탓일까 유달리 시끄러웠다. 가지각색의 목소리에 사람 몇 명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차라리 귀마개를 끼거나, 헤드셋을 끼고 내 세상에만 존재하고 싶었다. 힘겹게 2층 장애인 교육 센터로 가서 점자 교육장으로 갔다. 혼자만의 힘으로 생소한 점자를 공부하려니 힘들어 찾게 되었는데, 사실 이조차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방에 가만히 처박혀 있는 것을 어머니가 보고는 부엌으로 가서 울고 있다. 그런 모습이 내 마음을 쓰라리게 했던 탓에 차라리 슬픈 것을 볼 바에야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에 교육을 듣게 됐는데 꽤 도움이 많이 되었다. 현재까지 3개월가량 수업을 들었는데 아직 공부가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이 사회가 시각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편의점에서 음료를 고를 때면 많은 어려움이 닥친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편한 투명한 유리문으로 되어있는 냉장고, 그 문은 나에게 그렇게 달갑지는 않았다. 간신히 벽을 짚으면 느껴지는 거라곤 차가움과 차가움, 따뜻함은 드물다. 운동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된 탓에 굳은살도 없어서 요즘 들어 손가락 끝에 다가오는 통증은 극에 달한다. 이것저것 만져보기는 하는데 점자로 ‘탄산’이라는 글자와 ‘음료’ 그리고 ‘기타’가 있다. 그 외의 것들을 내가 잘 읽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더듬어 봐도 알 수 없다. 차라리 이럴 거면 후각에 의존해 사는 벌레와 다를 게 뭔지 심각히 고민하게 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운동할 때 입에도 대지 않던 ‘탄산’이라는 글자가 느껴지는 것이 선택 사항 중에 한 종류는 제외된 셈이라 다른 고를 거리가 생긴다는 것이 다행인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면 내 인생은 게임과 비슷한 것 같다. 뽑으면 무엇인지 모르고 그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제발’이라는 기대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운동했을 때는 사실 눈이 보이나, 안 보이나 똑같은 것은 벽을 잡고서 올라가면, ‘저 정상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호기심보다는, 지금 너무 힘드니 저기 빨리 올라가고 싶다. 그러다 정상에 도달하게 되면 허무함과 성취감이 동시에 오게 된다. 그 느낌으로 포효하며 아우성치긴 하지만, 그 또한 내가 ‘대단하다’, ‘올라왔다.’라는 뿌듯함이 큰 것 같다. 무엇을 하든지 그 결과가 중요해지게 된 것이, 인간은 인생의 전환점이 오기 전까진 그 결과에 대한 느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 대한 반성은 없는 것이다. 대개 인생의 전환점이라면 열 살, 스무 살 넘어갈 때쯤하고, 가족이 큰 해를 입거나, 나 자신이 크게 무언가 잃을 때 같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잃게 되고, 가족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사람들의 건강을 잃게 된 것이고, 내가 무언가 잃었다고 한다면 오감 중에 하나일 것이다. 시간에 대가로는 경험을 얻지만, 시각을 얻는 대신 나머지 감각의 예민함을 얻는다. 이렇게 나는 무언가 잃었지만 전환점이 오지 않는다. 전환의 기준점이 너무 높아서 그런 것일까 싶다. ‘나는 왜 암벽을 올랐을까’에 대한 후회만 생길 뿐, 어느 것조차 나에게 전환점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수학 시간에 배운 ‘손익분기점’으로 계산을 하였을 때 나는 잘 오르던 인생, 벽에서, 내 눈을 세상에 바치고 인생은 나락이라는 것만 있을 뿐 다시 내 인생 곡선이 ‘y’ 방향으로 올라가진 않는다. 무한대 곡선에서 x값이 오를 때마다 ‘y’ 값은 제곱으로 떨어지는 모양새로 변한 것 같다. 영원히 ‘y’자나 ‘x’자 곡선에 기댈 수 없는 참으로 쓸쓸한 모양이다.
어느새 가을이 한 발자국 다가왔는지 낙엽은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낙엽의 소리가 어찌나 큰지 공포감에 귀를 막고 싶었다. 무언가 떨어진다는 말을 하는 것 또 글을 쓰는 것 읽는 것 모두가 싫었다. 낙엽 하나의 무게로 얼마나 많은 것을 짓누르는지, 저 낙엽을 쓸고 있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낙엽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무슨 잎인지 모를 저 낙엽은 차가운 보도블록을 긁어댔고 그때마다 생긴 마찰음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저 포효 소리는 정상에서 올라 외쳤던 포효보다, 고통의 포효보다, 슬픔의 포효에 가까웠다. 그것이 낙엽의 눈물 소리라 생각하니 마음 한편으론 편했다. 그러한 것들을 보게 되면 낙엽은 내 인생과 닮아있다. 차라리 낙엽은 끝이라도 있지…. 나는 찬찬히 가라앉고 있는 바다 속에 모래 한 알일 것이다. 그래도 저 낙엽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고 언젠가 쓸려서 파란 비닐봉지 속에 들어가겠지, 아니면 누군가는 군고구마를 익히는 추억의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끝을 태우고 자신의 추억을 잇는 다리를 만든다니 사람들은 잔인하니 짝이 없다. 인간은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 나는 어찌 이렇게 떨어진다는 것이 싫을까 모르겠다. 사실 나는 떨어졌던 기억이 하나 없고 암벽 한 귀퉁이를 잡고서 그 암벽이 부서진 기억 그 이후의 기억은 내가 시력을 잃은 것처럼 내 머릿속에선 사라진 상태인데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 내가 떨어져서 이렇게 됐다고 하니 ‘추락’의 동의어 ‘떨어지다’라는 말에 공포감을 느낀다. 이 땅을 밟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나는 낙엽, 낙엽이 바람에 의존해서 움직이듯 나는 이 지팡이에 의존해 움직인다. 세상은 어둡고 누군가의 도움은 없다. 도움이라기보다는 연민의 온도로 느껴지는 그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겠지, 저 낙엽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 봄이 되어 잎이 자라기 시작하고 작았던 잎은 점점 커져서 내 손바닥만 해지면 어느새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기 시작한다. 노쇠해진 탓일까 아니면 세월의 탓일까? 나보다 한참이나 인생의 앞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하곤 한다.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되면 나는 더는 이 땅을 밟을 수 없어, 그때가 되면 저 하늘로 올라가서 훨훨 날고 있겠지, 내가 예전 클라이밍을 하던 시기에 만난 코치님이 해준 말이다. 그분은 내가 빛을 잃고 나서 수개월이 흐르고 돌아가셨다. 아직 그분 장례식에 가지 못한 것이 내 마음의 큰 한이 남는다. 내가 사고가 나고 침대 생활을 6개월 정도 병원 신세를 면하지 못했는데 주말만 되면 나에게 찾아오면서 했던 말은 ‘괜찮아’라고 묻는 것보다 조용히 내 손을 만져주셨다. 내 옆에 앉아 손에 굳은살을 어루만졌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주저리주저리 말을 했다. “운동한 지 얼마나 됐지?” 물어보고 내가 대답이 없으면 자신의 질문에 자기가 대답을 했다.
“한 7, 8년 됐나? 그곳에서 너를 처음 봤던 날이었어, 너는 대학교 졸업을 하고서 나에게 찾아왔지. 너를 처음 봤을 땐 취미로 배우고 금방 그만둘 사람 같았어.”
추억을 회상했는지 한동안 웃음소리를 내고는 말을 이어갔다.
“하하, 사실 넌 클라이밍에 재능도 없었어, 근데 아가 너는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하더라 많이 떨어졌지, 운동에 필요한 근육도 별로 없고 운동에 필요한 유연성도 부족했어, 배우는데 많이 어려웠을 거야 그렇지? 나도 알아, 그래서 너는 금방 그만둘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은 힘들어서 금방 포기하고 그만두거든, 또 남들 일주일 정도 걸리면 너는 한 달이 겨우 지나야 배우더라, 그래도 아가 1년 정도 배우고 났을 때 어땠니?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올라갔고 정상까지 오르는 시간도 꽤 단축됐지, 그때쯤 되어서 네가 나한테 말하더라, ‘코치님 여기 코스 다 끝냈어요. 다른 거 할 거 없을까요?’ 해맑은 표정으로 나한테 와서 다른 거 알려달라고 그랬지 그렇게 나는 너한테 볼더링을 알려줬는데 곧잘 하더라. 몇 번 떨어져도 계속 올라가서는 2년 정도 돼서는 실내 암벽장 코스를 다 끝냈지, 그렇게 너는 옆에 사람들을 계속 알려주고 다른 학생들이 계속 떨어져도 너는 ‘할 수 있다고’ 끝없이 말하더라. 사람은 떨어질 순 있어도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아가, 그러고서 네가 5년 정도 암벽을 타고 내가 너한테 여기 코치를 맡겼지, 그때는 내가 누군가 가르쳐줄 힘이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나도 나이가 꽤 됐잖아 그치? 이젠 누군가에게 물려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에게 코치 자리를 넘겼어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힘이 있고 떨어져도 다시 올라갈 힘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아가, 마지막으로 당부하마. 네가 실수했다고, 떨어졌다고 해서 네가 클라이밍을 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은 후회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지금까지 쌓아왔던 추억까지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코치를 만난 것도 내가 처음 벽을 올랐던 그 순간도,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기억을 간직하는 대신 나는 빛을 잃었고 한순간에 나는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 깊은 바다 속 모래 한 알에 불과하다.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다시 클라이밍을 하고 싶냐, 나는 더는 자신 없다고 했고 클라이밍은 하지 않더라도 다른 운동은 병행하라고 했다. 가만히 누워서 하는 요가나 필라테스라도 괜찮다고 했다. 몇 개월간 침대에 누워만 있어서 대부분 운동신경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주저리주저리 얘기했지만, 나는 한 동안 어머니가 억지로 끌고 나간 동네 산책 숨쉬기 운동이 전부였다. 그렇게 퇴원 후 밖의 삶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방구석 은둔생활이 시작됐다. 하나뿐인 아버지는 간신히 방문 밖을 나오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며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너한테 쓰는 돈이 아깝다.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아!”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굉장히 직관적으로 살아오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래 왔을 것이다. 아픈 나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머니가 내 기억을 살리려고 해주던 말이다, 외동인 내가 형편없는 대학을 간 것, 졸업 후에 아무것도 안 하고 운동에 몰두해 있는 나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 세상은 나를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의 기초인 가족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받아줄까 싶었다. 또 어머니가 내가 했던 말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는데 ‘오로지 이 세상에서 날 받아주는 건 벽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때 사실 조금 서러웠다고 했다. 어머니 자신도 나를 응원하고 있는데 라고 말을 덧붙였던 것 같다. 사실 그러한 아버지가 나를 벽 앞으로 끌고 간 것이 아닐까 싶다. 집으로 들어갈 때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아버지가 싫어서 항상 난 벽 앞에 마주 섰다. 이 사회는 보잘것없는 나를 받아주는 관용이 없다. 대학을 잘 나와야 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우리가 마주한 사회의 벽이다. 이것을 오를 방도란 보이지 않았다. 벽을 오름으로써 나는 벽을 넘었다는 희열이 있었다. 보이는 벽과 보이지 않는 벽의 차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항상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벽에 의존하면서 올라가 큰 성공을 하긴 했다. 남들이 원하는 대기업에 들어갔고 어머니나 자식 부양을 이 정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자식을 키우기엔 공감 능력이나 베푸는 능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되고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 나는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반 독립적인 생활이 시작됐다. 시간이 흐르고 방안에 암벽장비들이 가득 찼다고 어머니가 말해주었다. 암벽화, 초크, 카라비너 등 이것저것 많았지만 로프가 중요했다고 덧붙였는데, 내가 이러한 것들을 말할 때마다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고 어머니가 좋아하셨는데, 이때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했는데 특히 그 생명줄 얘기를 내게 다시 해주셨다. 암벽을 탈 때 이 줄은 생명줄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잘라내거나 완전히 교체 해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내가 사고가 난 것은 이 줄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코치님이 말해주셨다. 재수가 없었고 암벽 한 귀퉁이가 부서져서 한 번에 크게 떨어진 것이 문제라고 했는데 줄을 고정해놓았던 확보물이 내 무게와 자연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고정되어있던 못들이 다 빠져 버렸다고 했다. 확보물은 등반자가 떨어질 때 추락 거리를 낮춰주는 것인데 떨어지면서 벽에 부딪히고 또 그 벽에 부딪히고 내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 벽에 부딪힌 순간 기절한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앞을 볼 수 없는 경유를 듣고 나니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지상에서 내 생명줄을 잡아주던 파트너가 바로 병실에서 내 손을 잡아준 그 코치였는데, 파트너가 느꼈을 죄책감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증오가 컸기 때문에 나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도 듣지 않았을 터였다. 그것 때문에 장례식을 가지 않은 것도 아니고 가지 않았던 것에 후회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후회의 이유는 크나큰 좌절에 그를 용서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은 나에게 잘못했다는 사과를 하진 않았다. 그래도 마음에 큰 죄책감에 그랬을 것이다. 코치는 유난히 우리 아버지와 많이 닮아있었다. 자신이 실수해도 사과를 하는 관용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사람은 암벽장에서 누군가의 코치이자 멘토였다.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는 이유였다. 자신이 낙엽과 같은 세월의 위치에 서 있었지만, 저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다. 자연이 선사한 무게의 세월이 흘러가듯 단순히 그렇게 흘러가기만 했다. 마치 저 계곡에 흐르는 물줄기처럼 그 자체가 자연 이었고 자신의 세월을 전래동화처럼 우리에게 얘기해 주었다. 사실 그때 해주었던 얘기들은 대부분 잊어버린 상태다. 좋았던 것들은 무의식 속에 숨어있고 한때 무의식 속에 숨었던 것들은 페르소나처럼 자아 상태로 밀려 나왔다. 내가 벽을 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벽을 올랐을 때의 행복감보다는 후회가 밀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에 대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가 해주었던 말들이 물 들어올 때가 된 듯 들어왔기 때문이다.
코치님 당신이 나에게 선사해준 자연의 선물은 당신의 낙엽처럼 부서졌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 줄을 놓쳤던 것을 후회하지 마세요. 불교에서는 거미를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지옥 속 불구덩이에서 구해줄 유일한 동아줄을 내려주는 것이 거미라고 합니다. 우리와 같은 운명을 지낸 거미들 말이에요. 당신은 이 세상에 있을 때 단련된 힘을 가지고 그 지옥 속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저에게 신은 병실에서 만난 의사가 전부입니다. 그 의사조차도 당신을 구할 순 없었지만, 지금 저는 신께 기도합니다. 당신을 용서했으니 구해달라고 말이에요. 부디 좋은 곳 가서 행복하세요.
여기 동사무소 수업을 듣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라고 합니다. 드디어 당신께 보내드릴 수 있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어쩐지 제가 배우고 있는 점자들은 저희가 올랐던 벽들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벽을 무작정 올랐는데, 당신은 멀리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라고 하셨어요. 갈 길을 모르고 도착지도 모른다면, 벽을 오르는 중간에 지친다고 말이에요 사실, 이 글도 똑같아요.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어요. 우주를 탐험하는 느낌이에요, 이럴 땐 아이와 같은 호기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이들은 끈기로 사는 것이 아닌 호기심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탐구하고 경험하고 결국엔 만져봐요, 지금 저도 똑같아요, 어렸을 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촉감 놀이하는 것 같습니다. 30년 넘게 살면서 이런 촉감 놀이를 경험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끝을 모르는 우주를 탐험합니다. 수십 년 전 미국 나사에서 보이저호를 발사한 것이 태양계를 벗어났다고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근데 끝이 아니래요, 그렇게 저도 끝도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요. 저도 그 우주선처럼 아니 우주선을 이끄는 우주비행사로 검은 바다 속을 여행하고 있어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힘으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흐르는 시냇물 같지 않나요? 나의 동경의 대상인 코치님 저와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 썼는데 4페이지 정도 나온대요, 저보고 이젠 그만 말하라고 하네요. 당신과의 우주 탐험 재밌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편지를 끝마치고 수업도 마쳤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예전에 다니던 실내 암벽장으로 향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제나처럼 들렸던 노랫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 되어 울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삐져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가 들어가자 점점 조용해지더니 수군거렸다. 그 적막을 깨고 나에게 걸어온 익숙한 목소리 “아저씨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다들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까랑까랑한 목소리, 이곳에서 나에게 아저씨라고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다. 아마 내가 생각한 그 꼬마애가 맞을 것이다. “아저씨, 저 알겠어요? 내 목소리 알겠어요?” 연달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 목소리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응, 알지.” 여전히 나는 단답형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거의 3년 차 되어가는 은둔생활과 3개월간의 점자 수업, 의사소통 기능이 상실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어쨌든 그 목소리는 어지간해선 잊을 수 없는 것이 예민해진 내 청각을 유달리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격은 어른스러운데, 내는 목소리는 꾀꼬리처럼 명랑한 소리를 낸다. 독특한 목소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들을 때마다 기억이 난다. 누구인지 인식이 끝나고 난 뒤에는 “여긴 어쩐 일이야?”라고 물었다. 그 애는 항상 나에게 바보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똑같았다.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딨냐며 말이다. 나는 너스레 웃긴 했지만, 목소리에만 의존해서 많은 사람을 기억해 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 아이를 필두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나한테 다가와서 여러 가지 묻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듣기 거북했던 연민의 말들도 지금은 이 사회에 필요한 관심과 말로 생각을 하고 듣기 거북해하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 근데 지금 누구 이름을 말해도 기억이 잘 안 나.” 거의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 한꺼번에 질문을 하니, 여간 정신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없는 그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기란 예의가 없는 것 같아. 대부분 듣기 위주였다. 사람들이 내가 듣는 것에 예민한 것을 아는지 켜져 있던 노래도 꺼지고 그 뒤에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정신이 없어서 노래가 꺼진 줄도 몰랐다. 모든 질문에 “응”, “그래”, “그랬나” 등의 단답형의 말만 할 뿐이었다. 몇 분이 흐르고, 나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각자 운동하러 가라 하고 쉼터에서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었다. 잠깐 앉아있는데 그 아이의 경박한 발걸음 소리는 내 귀를 피하지 못했다.
“운동하러 가라니까 왜 왔어?”
“아…. 놀래려고 했는데 아깝다. 나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이제는 남들보다 잘 들리네. 그리고 그렇게 발소리 크게 내면 누구라도 알지 않을까?”
“에이, 항상 아저씨를 놀래는 건 어렵단 말이야. 예전에도 맨날 그러더니 그때는 아저씨가 나보고 코끼리가 지나가는 줄 알았다고 했는데. 또 코끼리가 벽을 어떻게 오르냐고 집에 가라고도 했어. 요즘에는 그런 말도 안 해주네. 재미도 없고 바보 같아.”
내가 그랬었나 하고 너스레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 애는 나에게 웃으라고 했다. 웃으면 덜 바보 같아 보여서 좋다고 하는데, 나는 내 모습조차도 볼 수 없으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저씨 근데 우리 진짜 친했던 거 알아요? 그래서 맨날 바보라고 놀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언제 처음 본지도 모르고, 예전에는 홀드 한 개 한 개 잡는 것도 어려웠는데, 아저씨가 매일 나 볼 때마다 알려 줬거든, 나한테 불쌍하다고 했어. 그거 하나도 못가냐고, 언제는 내가 벽에서 떨어져서 울고 있는데, 아저씨는 괜찮냐 물어보진 않고, 바보냐고 왜 떨어지냐고 말하더라, 내가 더 크게 우니까 그제야 미안하다고 하더라.”
그 아이는 “아직도 기억 안 나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까 “아직 바보 맞네”라고 덧붙이면서 ‘흥’ 콧바람을 내뿜었다. 나는 그 아이가 귀여웠던지 웃으면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손을 뻗고는 얼굴을 매만져주었다. 그 손길은, 그 애가 내 기억을 매만져주는 보답 같은 거였던 것 같은 느낌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민해진 내 손끝에 촉촉한 눈물이 떨어졌는데 그 애는 급하게 자신의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봐봐 아저씨, 머리로는 기억 못 해도 몸은 기억한다니까? 아저씨 맨날 귀엽다고 내 볼 꼬집고 쓰다듬어 주고 그랬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급하게 내 팔짱을 끼고 어딘가로 끌고 가더니 그 도착지는 벽 앞이었다. “아저씨 이 벽은 오를 수 있지?” 나는 두려움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보단 ‘떨어지면 어떻게’라는 우려가 더 컸다. 그 아이는 ‘아저씨는 할 수 있어.’ 아저씨는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거든. 예전에는 내가 매일 올랐던 벽들이다. 손으로 차근차근 짚었다. 어느 벽을 잡을지 몰랐다. 뒤에 어떤 사람이 “여기에요 선생님” 하면서 내 손을 잡고 처음 잡아야 할 것을 알려주었다. 그 전체의 길을 멀리서 보지 않아도, 빛을 비춘 것처럼 그 길이 보였다. 잡아야 할 홀드 색들이 떠오르고, 진행 방향이 몸에 배어 있던 터라 손이 그 방향으로 가고 가끔가다 틀리게 된 경우에만 지휘봉으로 돌다리를 두드리는 것처럼 소리로 알려주었다.
“선생님 다음이 마지막이에요!”
결국, 마지막을 잡아냈지만, 어떻게 내려가야 할 방법을 몰랐다. 온갖 두려움이 다시 떠올랐다. 이곳은 드넓은 황야, 나는 연약한 사슴이고 주변엔 사자들이 득실거린다. 이곳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죽게 될 것이라고 인지했다. 동물의 본능 중 하나는 살고자 하는 본능이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 여자애가 내 손을 억지로 풀어내고 뒤로 떨어졌는데 아프기보단 허탈함뿐이었다. 이 밑바닥은 푹신한 매트로 깔려있고 내가 올라갔던 곳은, 발을 살짝 올리기만 하면 올라갈 수 있는 낮은 위치에 있었다. 별것도 아닌데 나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보곤 어안이 벙벙했는지 속닥거리다가 그 애가 “잘했다!” 박수를 치고는 그 뒤를 이어서 많은 사람이 뒤편에서 박수치며 환호했다. 그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 그 아이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아저씨, 지금 보니까 바보는 아니네, 역시 선생님답다.”
※ 대전 출생, '한샘문학상' 소설 당선작(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