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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친구
전 월 득
햇살은 눈이 부시고, 점점 가을이 물들어가는 속도가 빠른 결실의 계절이다. 스산한 바람이 옆구리를 스치며 숱한 여름날의 기억을 몰고 저만치 떠나가는 고요한 날, 평소 자주 만날 수 없던 친구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토요일에 점심이나 같이 먹고 하루를 함께 보내자는 내용이었다. 오랫동안 코로나19에 자유롭지 못했던 외식 거부감도 사라지고 날씨마저 오감을 자극하는 가을날, 친구의 목소리는 가문 하늘에 단비와도 같았다. 마침 만학도의 등교도 하지 않는 휴일이니, 마음 편하게 하루를 즐길 수 있어 더 좋았다. 반가움에 이왕이면 교외로 나가 자연을 즐기고 싶은 생각이 번뜩 스쳤다. 대전의 명소 장태산 휴양림 쪽으로 가자고 제안하였다. 오래전 남편과 갔을 때는 처음 개발 단계라 식당 한 곳이 오픈하여 쌈밥 정식을 먹었던 추억이 있는 곳이기에, 20여 년이 훌쩍 지나간 현재는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하던 중이었다.
토요일 아침 10시경, 출발할 때부터 날씨는 참으로 화창하였다. 맑은 하늘의 뭉게구름과 따스한 가을 향기에 투영된 나의 마음이 초롱초롱 빛나는 기분을 감싸 쥐며 3시 40분쯤 미끄러지듯 달려서 장태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이미 자동차들이 즐비하고 타지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온 여행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잘 조성된 숲속으로 산책로와 등산로가 여러 갈래로 쭉쭉 뻗어 이국적 분위기를 느끼며 가슴은 설레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양 길가에, 목판에 서각 된 시인들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윤동주 님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유명 작품도 있고, 시를 사랑하는 무명인들의 작품도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친구와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천천히 음미하며, 숲속의 맑은 공기와 시가 주는 감동에 취하여 감탄을 연발하였다. 시를 배우며 예술에 관심을 갖고 사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울창한 숲 사이로 비추는 하늘은 더 투명하여 맑은 공기를 호흡하면서 유유자적 원형 스카이 워크 정상에 올랐다. 첩첩이 둘러선 산야는 하늘과 맞닿은 듯 오색 물감을 풀어 헤친 거대한 수채화 작품처럼 경이로웠다. 친구 역시 자연이 주는 환상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이 가을을 극찬하고 있었다. 점점 많은 사람이 자꾸 모여들어 중앙부위의 미세한 흔들림을 감지하고 겁이 많은 나는 서둘러 사진을 찍고 바로 내려와야 하였다.
여기저기 숲속의 벤치에는 등산객들이 간식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함께 자리에 앉아 배낭을 열었다. 나는 맛집에서 맛있게 점심 식사하리라는 생각만으로, 초 간단히 챙겨갔다. 그러나 나의 실수는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세상을 살아왔나를 실감하게 하였다. 친구는 내가 좋아하는 생밤까지 한 움큼, 이것저것 챙겨와 산에서 나눠 먹는 즐거움도 한껏 누리게 해주었다. 간식 후에는. 집에서 생각조차 못 했던 등산로를 걸어 보기로 하였다. 이 얼마 만인가? 약간 경사진 곳일 뿐인데도 한참을 오르고 나니 내려갈 때가 두려워 돌아서야 했다. 등산 경험이 풍부한 친구는 사부작사부작 잘도 올라갔지만 나를 위해 중도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평평한 옆길로 들어서니, 1973년부터 메타스쿼이아를 조림하여, 흉고 직경 최대 79cm, 최대 수고 38m에 이른다는 산림욕장이 울창하여 외국의 거대한 밀림 속에 들어선 듯, 놀라웠다. 처음엔 우수독림가 임창봉 님에 의해 조림된 사유림을 최초 자연휴양림으로 지정, 승인받고 현재는 대전광역시에서 시민의 숲으로 관리 중이라 한다. 하늘다람쥐, 감돌고기, 이끼도룡뇽 등이 서식하여 국가산림 문화자산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숲속의 힐링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았다.
아뿔사, 이럴 수가! 주변에 식당이라고는 단 한 곳, 그것도 젊은이들이나 즐기는 함박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 한 집뿐이었다. 아침부터 운전하느라 수고한 친구에게 맛있는 밥이라도 사려고 했던 마음이 파괴되면서 오전에 황홀했던 가을이 순식간에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황당했지만 어쩔 도리 없이 간단한 함박스테이크로 식사를 마치고 따라 나온 커피와 과일주스도 마셨다. 친구는 가끔은 이런 식사도 이색적이라며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마음 너그럽게도, 좋은 날씨와 맑은 공기를 함께 마실 수 있어 좋다며 모처럼 나왔으니, 계룡대에서 열리는 셰계 군 문화엑스포 축제에 가보자는 것이었다. 대전에서 오래 살았지만, 스프링 벽들처럼 앞만 보고 뛰어왔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늘은 궁금했던 숙제들을 푸는 날인가? 하며 기분이 참 좋았다. 오후 2시 30분, 시간대도 적절하였다. 친구와 함께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과 차 창밖으로 보이는 오색 창연한 너울들, 신선한 바람이 안겨주는 달콤한 향기를 마시며 지금까지 살아있음에 감사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교통의 흐름도 원활하여 바로 계룡대 축제장에 도착하니, 군용 장갑차와 군 관련 무기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었다. 북적이는 인파와 드넓은 광장에 다국적 군악대의 퍼레이드는 저절로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세계 18개국 국기들이 각자의 상징색으로, 위용을 떨치며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커다란 천막 부스와 텐트가 설치되어 흥미로운 볼거리도 많았다. 수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군 문화엑스포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각 나라의 국기들은 알록달록 가을 하늘 아래 더 선명하고 아름답게 빛나며 우리의 사진 배경색을 멋지게 비춰주었다. 입장료 일만 원의 행복은 오래오래 가슴속에 영원할 일이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상공에는 비행기도 날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여러 대의 공군기가 편대를 이루어 에어쇼라도 해준다면 더욱 신기할 텐데’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내가 살고 있는 집주변에서 보기 드문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어디서 그렇게 많이 몰려왔는지 놀라운 일이었다. 노인들보다 젊은이들이 훨씬 많다는 것은 나라의 장래에 희망이 보이는 것이라 고무된 생각도 해보았다. 부스 안에는 6.25 당시의 상황, 참전용사들의 사진, 맥아더 장군의 모형이 전시되고 낡은 철모와 구멍 난 물통, 녹슨 총구와 총알. 너덜너덜한 군화 밑창 등, 말없이 산화한 병사들의 소지품들이 마음을 ‘찡’하게 하였다. 마감 시간은 5시였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질서정연하게 출구를 향하고, 물방개 떼처럼 가지런히 서 있던 자동차들이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우리도 이제 집을 향하여 거북이처럼 천천히 앞 차를 따라나섰다. 부실했던 점심을 만회하려고 신선하고 따끈한 낙지연포탕을 먹기로 하였다. 요즘 같은 첨단시대에 검색조차 해보지 않은 실책을 교훈으로 간직하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퍼 주면서, 금빛처럼 빛난 하루의 스토리를 차곡차곡 마음속에 정리하였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이토록 찬란한 가을이 나에게 몇 번이나 더 찾아와 안겨주려나? 참 좋은 친구와의 동행은 다음 해의 가을을 기대하게 한다.
가을 문학기행
사계절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이 왔다. 따라서 가을 문학기행도 어김없이 가기로 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몇 년 전만 하여도 여행 가는 것이 두려워 어떤 핑계를 대면서라도 피하려 했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로 돌아섰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바꾼 것이다. 이제는 보고, 듣고, 먹고, 즐길만한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리라는 생각이다. 마침 교수님께서 문학기행 일정이 나왔다는 메시지를 띄우셨다. 쾌히 승낙하고 날짜를 기다렸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옥순봉 출렁다리, 청풍나루 유람선, 산지 매운탕 등이었다. 솔깃하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생소한 여행지라 신선하게 다가왔다.
마침내 10월 25일 9시, 문학반 일행들과 현충원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전날 남신 회장님과 노 선생님께서 개인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하신다는 소식에 철렁,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도 안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풀 꺾인 기분이었지만 남신 회장님께서 꼼꼼히 챙겨주신 간식 가방을 들고 현충원역에서 합류하였다. 25인승 버스에 열다섯 분이 함께 출발하였다.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함께한 문우님들은 오랜만이라 더욱 반가웠다. 언제나 여행길에 만나면 더 밝은 표정들이고 더 건강해 보여서 좋다.
청명한 가을 날씨는 참으로 쾌청하였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형형색색으로, 가을은 나에게, 끝없는 무지개를 선물해 주었다. 2시간 남짓 달려서 청풍호에 도착하여 문화재단지를 둘러보았다. 천혜의 배경을 드리우고 넓은 문화재단지는 잘 조성되어 있었다. 모처럼 만난 문우님들과 기념 촬영도 하고 모두들 즐거워하였다. 함께한 중국인 유학생 한 명도 신기한 듯 여기저기서 포즈를 취하며 즐거워하였다. 요즘 내가 학교에서 중국어를 흥미롭게 배우는 중이라 말을 걸고 중국어로 대화를 해보고 싶었는데 한국어를 너무 잘해서 슬그머니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는 다 같이 커다란 유람선을 타고, 충청북도 충주호, 다목적댐을 관광하였다. 충주호는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를 거쳐 서해로 빠진다고 한다. 담수 27억 5천만 톤, 길이 78km로 약 200리 뱃길, 평균담수 40m~60m, 최대 깊이 130m로 내륙의 바다로 불린다고 하였다. 1978년 착공하여 1985년 약 7년 4개월 만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큰 다목적댐이라고 하였다. 선장님의 재치 있는 해설을 경청하며 유유자적 강바람에 몸을 싣고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단양 8경을 감상하였다. 선장님의 명승지 해설은 귀를 쫑긋하게 하였다. 오른쪽을 돌아보고 구담봉 정상에 거북이 두 마리가 있으니 찾아보라 하였다. 수놈 거북이를 찾으면 무병장수하고 왼쪽을 돌아보고 암수 두 마리 중 한 마리만 찾아도 100세는 무난히 살 수 있다고 하였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봐도 한 마리도 찾지 못했다. 제비봉 높이는 해발 721m, 옥순봉, 형제봉, 구담봉, 도담 3봉, 신선봉 등등 여기저기 있다지만 제대로 구분하여 찾지는 못했어도 가을 단풍의 비경에 매료되어 황홀함을 느꼈다. 우리나라 곳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믿는다. 넓은 충주호, 한 바퀴를 관광하고 선착장에 내렸다. 수많은 관광객, 틈 사이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남 선생님께서 다가오시며 케어 하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손을 내미셨다. 반갑고 쑥스러웠다. 김순길 회장님은 처음부터 백오 작가님 팔을 꼭 잡고 안정감 있게 걷고 계셨다. 연세 드신 명년 형님은 교수님이 바싹 다가서서 안전을 책임지고 계셨다. 어느 모임보다, 감성이 풍부한 문인들과의 여행은 한결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받으며 기분이 ‘업’ 되곤 한다.
점심은 민물매운탕이었다. 현지에서 잡아 올린 토종 자연산 미꾸라지와 새우 메기의 진 맛은 일품이었다. 옥순봉 출렁다리를 건너는 스릴감도 너무 좋았다. 푸른 하늘과 가을바람이 주는 상쾌함을, 좋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살아가는 동안 느낄 수 있는 최대의 행복감이었다. 출렁다리 끝자락 작은 가게 막걸리 한 잔의 타임은 여행의 백미였다. 나는 얼마 전에 들었던 “청바지?”를 외쳤다. 알고 보니 의미심장한 얘기였다. 청춘은 바로 지금이다. 그래, 누구나 청춘을 싫어할 리 없을 것이다. 나도 이대로 청춘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금싸라기 같은 하루의 여행은 그렇게 세월 속으로 흘러가고 있다.
참 좋은 가을
귓가에 시원스럽게 울려 퍼지던, 매미 소리가 자취를 감추고 나면, 계절은 어김없이 풍요로운 가을을 몰고 온다. 거친 비바람, 불가항력적인 태풍이 지나갔지만, 올해의 가을도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여름내 땀 흘린 농부들의 마음을 흥얼거리게 한다.
나는 가을에 태어났고, 내가 태어난 가을을 참, 좋아한다. 유난히 요즘 며칠째 하늘은 청명하여, 온화한 햇빛이 더 풍성한 가을을 예고한다.
예술을 즐기며 사랑하는 나에게 딸내미는 잊지 않고, 가을 음악회를 즐기라며, 한 달 전부터 베르디 오페라 갈라 대전 공연 티켓을 예매해 주었다. 가끔 혼자서도 즐기는 예술의 전당 음악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특히 좋아하는 정명훈 베토벤 합창교향곡 9번은 전 석이 매진된 것을 여러 번 시도 끝에 한자리 구했다기에 흔쾌히 가기로 했었는데, 아쉽게도 현재 수업 중인 학교 기말고사와 겹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 일주일 뒤에 있는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갈라 ‘라트라비아타’ ‘리골레토’ 공연 티켓을, 좋은 친구들과 함께 가라고, 3장씩이나 예매해 주었다. 들뜬 마음으로 평소 고마웠던 지인과 친구들에게 연락하며 멤버를 찾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간에 같은 취미를 갖은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보답 차원에서 함께하려던, 지인 한 분은 서울 딸 집에 출장 중이고, 또 한 분은 오페라의 장르가 맞지 않아 허사였다. 현재 학교 친구들은, 목요일, 평일이라서 안 되고,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시험공부에만 열중했으니, 좋은 때를 놓치지 않고 내가 나를 보은 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 결석을 하더라도 음악회는 꼭 가고 싶었다.
생각하니, 지난번 서천 나들이에 수고하신 문학반 N 선생님께 보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기며, 오페라 음악회를 좋아하시는지 여쭤보았다. 다행히 반가워하시며 날짜와 시간도 구애받지 않으셔서 역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며 즐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사모님과 함께 가고 싶었는데 취미가 다르신 듯하여 그냥 둘이서 가기로 하였다. 남녀가 유별한데,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칠순이 훌쩍 넘도록 잘 살아왔으니 그 누가 나를 탓하랴?
예술의 전당은 바로 집 근처, 도보로 10분 거리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 오후 여섯 시쯤 예술의전당 주변 맛집에서 예의 바르신 N 선생님 페이로 저녁 식사를 가볍게 마치고 천천히 걸어서 공연장으로 갔다. 7시 30분, 예정된 시간에, 2층 가장 좋은 정중앙 로얄석, 정해진 좌석 번호로 안내받아 나란히 앉았다. 번번이 혼자 와서 숨죽이며 관람하던 것을, 옆자리에 친분이 있고 취미가 같은 분과 내가 좋아하는 공연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설렘으로 더한층 충만한 공연을 기대하고 있었다.
막이 오르자 대전 시립교향악단 전임지휘자인 류 명우님의 지휘에 맞춰 100여 명이 함께하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꾀꼬리 같은 소프라노 가수들이 번갈아 나와 성악 극을 마음껏 노래하였다. 테너, 바리톤, 총 여덟 명의 주인공들이, 홀로, 또는 짝을 지어, 무대 중앙을 거닐어,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며 때로는 그윽한 표정 연기와 함께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하며 열정적인 공연에 충실하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리골레토 <여자의 마음>, <사랑의 묘약> 등을 공연할 때는 내 마음도 쿵쾅거리고 어깨마저 들썩거렸다. 관중석에서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며 식을 줄을 몰랐다.
음악회는 몇 년 만이라는 N 선생님도 즐거운 표정으로 박수를 열심히 치며 즐거워하셨다. 살그머니 귀엣말로, 오케스트라 무대 쪽을 향하며 무슨 생각이 드냐는 질문에 나는 순간 멈칫하였다. 뜻깊으신 N 선생님 왈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단원들의 재능과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열정이 있었겠냐”는 감탄의 말씀을 해 주셨다. 아무 생각 없이 공연에만 집중하던 나는 N 선생님의 식견이 남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0분간의 공연은 삽시간에 끝나고 집으로 향하였다. 다른 때에는, 화려했던 공연이 끝나고 나면, 왠지 허전한 맘으로 터벅터벅 쓸쓸히 혼자 걷던 길을 오늘은 N 선생님과 나란히 걸었다. 가로등 불빛도 환히 비추고 발걸음도 한층 가벼웠다. 대로변 차도를 걸을 땐 행여 차에 치일까 안쪽으로 밀어주는 N 선생님의 배려에 보호받는 느낌으로 두 배로 즐거웠던 음악회로 간직하며, 바람도 서늘하여 참 좋은 가을날을 두고두고 기억하리라.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부문 신인상, jwd5038@naver.com.
치매
이대영
나는 낮잠을 즐긴다. 충분한 낮잠은 언제나 안온함을 가져다준다. 나는 오후 두 시만 되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몸이 나른해진다. 그러면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침대에 몸을 맡긴다.
오늘도 그랬다. 아침부터 배추밭에 비료와 물을 준 탓인지 나른한 오후가 나를 방으로 이끌었다. 선잠이나 꿈을 꾸는 시간도 아까운지, 나는 깊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연한아? 연한아!”
이게 웬일인가? 이웃집 아주머니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단잠에서 깨어났다.
“연한아! 연한아?”
틀림없는 명순이 엄마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급하게 토해내는 고양이의 울음도 들렸다.
“연한아? 연한아! 어디 갔디야?”
그는 키위나무 아래를 지나 뒤뜰에 있는 우물 주변까지 살피고는 도로 마당에 내려서는 듯했다.
“연한아! 연한아! 어디 갔디야? 금방 들어오는 것을 봤는디!”
이번에는 지팡이로 땅을 내리치며 ‘연한이’를 외쳐댄다. 나는 얼마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아직 잠이 덜 깬 이유도 있었지만, 일어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돌아갈 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지팡이를 연신 두드리며 이번에는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주방 싱크대 옆에 놓인 쓰레기통을 걷어찼는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거실로 들어서자 안방은 물론, 이웃하고 있는 방문까지 열어보는 듯했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지, 거실 소파에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디야? 분명히 들어오는 걸 봤는디!”
그는 무언가를 한참 중얼거리더니 급기야 내가 있는 건넌방 문까지 열어젖혔다. 나의 인내심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사람이 대답을 하지 않으면 돌아가든지 해야지! 이렇게 무턱대고 남의 집에 들어와 소리 지르고 다녀도 되는 겁니까?”
그는 팬티 바람으로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슈!”를 연발하며 밖으로 물러났다. 나는 씩씩거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은 이미 천 리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그의 중얼거리는 음성과 땅을 짚을 때마다 내는 지팡이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연한이’는 내 조카의 이름이다. 읍내에서 장사하는 여동생이 시골집에 한동안 맡겨두었었기에 이웃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부를 때 명순 엄마가 쓰는 호칭이었다.
그가 치매 증세를 보이면서 마을에서도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는 우리 집 마당에서 “연한아!”를 외치다가 아무도 없자 아랫집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하는 행태 그대로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연한아! 연한아?”를 외쳤었나 보다. 그러자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두 아이가 겁에 질려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고 한다. 그런데 “연한아! 연한아! 어디 갔디야!”를 외치던 그가 걸어 잠근 현관문 손잡이를 지팡이로 연신 내리치자 놀란 아이들이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구조요청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모는 파출소에 신고하여 경찰이 출동했고, 떠들썩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많이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 집이었다. 어찌 보면 그가 갈 수 있는 곳이 우리 집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남편과 큰아들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그의 곁에 없었다. 그리고 두 아들과 딸은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고 소아마비인 막내딸이 그의 유일한 동거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명순 엄마에게 요양시설로 가라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그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침해 초기에는 딸이 도로 위에 넘어져서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나의 아버지께서 과일 먹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자기 딸의 팔을 완강히 끌어당겨 팔이 부러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집 키위나무 아래서 주기적으로 이 이야기를 반복했고, 그로 인해 언쟁이 일어나곤 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의 부음을 이웃에게 알리기도 했고, 방금 일어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도 했다. 자녀들도 처음에는 오해하여 이웃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보이기도 했으나, 그에게 치매 증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인지한 후부터는 마을 어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다녔다.
치매는 후천적으로 기억, 언어, 판단력 등 여러 영역의 인지 기능이 감소하여 일상생활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임상 증후군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는 몇 년 전에 백 세를 넘긴 할머니가 계신 친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다른 사람은 다 기억하지 못해도 유일하게 내 친구만은 알아본다는 말에 감동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읍내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손자와 동행한 할머니는 세상 모든 것을 기억에서 지웠어도 손자만은 마음속에 담고 있어 내 가슴이 뭉클했다.
이제 나도 새로운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 그동안 기억한 것을 더 망각하는 나이가 되었다. 때로는 기억력 저하로 치매를 걱정하기도 하지만, 힌트를 듣거나 곰곰이 생각하면 서서히 떠오르는 것들이 있기에 중증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러나 누구라도 노화와 함께 지적인 기능이 서서히 감퇴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다행히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그리고 충분한 수면을 하는 것도 효과적인 예방법이라니 다행한 일이다. 나는 글쟁이에 잠꾸러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나친 음주와 흡연을 삼가라는 조언에도 귀 기울일까 한다, 또한, 건전한 수준의 게임도 건망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니 가끔은 화투 놀이도 해야겠다.
오늘도 지팡이 소리와 함께 금속성의 그녀 목소리가 들려온다. “연한아! 연한아? 어디 갔디야?”하며 기억을 버리는 소리가. 살아 온 삶을 조금씩 덜어내며 몸을 가벼이 하는 소리가.
의미부여
이 경 숙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 여인의 삶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되었다. 지리산 기슭에서 시골집을 개조하여 민박집을 운영하며 홀로 살고 있는 여인이었는데, 집이 예뻐서 들여다보다가 실패의 짊을 지고 산속으로 들어왔다는 그 사연이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되었다. 그 여인은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하길 30년 동안 했었다고 한다. 20대에 시작한 응모는 결혼을 하고도 계속되었고, 미국에서 이혼하고 홀로 돌아와서 힘든 노동으로 생활을 이어 가면서도 계속했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포기하게 된 이유는 뜻밖에도 노안이 오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게 되었고, 그제야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인생의 실패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여행을 하면서 자신을 다시 찾고 지리산에 정착해서 민박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글 대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이 주는 색감이 참 아름다운 것이 내 취향이었다. 이제야 글을 쓰는 일이 자신의 재능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보고 있다는 모습이 오히려 활기차 보였다.
거리를 지나가다 창밖을 보면 무슨 무슨 백일장이라는 현수막들이 가끔 보인다. 5, 6월이면 유난히 많이 보이는 백일장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난 늘 어딘지 모를 긴장감이 먼저 들곤 한다. 오랫동안 내 것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내 것이 아니지만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미련 같은, 더는 오지 않을 아쉬운 마음에 오래 눈길이 가곤 한다. 학창시절 읽고 쓰는 일을 좋아했던 내게 백일장은 늘 학교를 빛낼 나의 임무였다. 5월이면 부모님이나 스승의 은혜가 주제가 되고, 6월이면 호국영령들에 대한 보은이 주제가 되고, 한글날이나 개천절 등 기념일에 맞는 주제는 해마다 어김없이 똑같은 레퍼토리로 식상하고 재미도 없는 글들을 강요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청소년 시절 참 많은 백일장을 섭렵하게 되고, 크고 작은 상을 받으며 소위 말하는 문학소녀가 되었다. 독후감 경시대회 같은 것도 있었는데 지금도 그때 함께 했던 동기들을 만나면 따로 수다를 떨 정도로 즐거운 추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직장과 결혼으로 바쁘게 살면서 자연스레 잊어갔던 백일장을 다시 만난 것은 아주 우연한 날이었다. 유치원생 아들아이의 사생대회를 위해 데리고 간 공원에서 일반인 백일장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백일장이라는 친근한 행사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예정에 없었지만, 아이가 그림을 그릴 동안 현장 접수를 하고 돗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옛 감성으로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그날의 제목이 ‘6월’이었다. 학창시절 참 많이 나왔던 주제 6월. 학생이던 나에게 6월은 6.25 사변으로 기인한 반공정신이나 현충일에 추모 글을 당연히 강요한 주제였다. 늘 신선함 없는 타성에 젖은 교육적 내용만 강요하는, 테크닉의 변화 이외에는 없는 주제에 신물이 났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그 날 내가 써냈던 글의 내용은 서른여섯 살을 지나는 내 인생의 6월이었다. 막연히 한 사람의 삶에 계절을 붙인다면 서른여섯 그때쯤의 내가 건너는 시간이 6월일 것이라는 생각을 담담히 적어 본 것이 심사위원의 눈에 들었던지 그저 가볍게 그림 그리는 아이 옆에서 오랜만에 설레어본 시간이 뜻밖에 장원이라는 상을 안겨주었다. 그날 심사를 하셨던 원로 작가는 내게 기대하는 것이 참 크셨다. 당장 문하생으로 들어와 다시 공부하길 재촉하셨다. 나 자신의 삶보다는 남편이나 아이를 위한 시간을 살던 내게 그날의 일탈이 다시금 문학소녀의 감성을 일깨워 주었다.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던 날이었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는 일은 표현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더구나 심사를 받는 일이란 더더욱 그렇다. 돌아보면 누군가에게 내놓지 않는 글일 뿐, 그 어느 시절도 글을 쓰지 않은 적은 없었던 듯하다. 많이 읽을수록 쓰고 싶어지는 글쓰기란 가장 큰 위로이자 안식처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습관처럼 되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가장 나다운 시간이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전할 때도 말보다 먼저 글로 표현하는 것이 편했고, 진심을 전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글이 우선이었다.
유튜브 속의 그 여인이, 도전하고 싶었던 큰 관문은 비록 통과하지 못했지만, 평생 글을 쓰면서 보냈던 그 시간만큼은 헛되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도전을 중단했지만 나를 만나는 시간에 펜을 놓지 못하는 한 그분은 영원한 작가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오래된 흙담집 지붕 위로 늙은 감나무가 몇 개의 감을 매달고 있는 그녀의 지리산 민박집에 찾아가 묵어보고 싶었다. 이젠 내 인생의 여정도 6월에서, 더운 여름을 지나 그 감나무처럼 잎 떨어뜨린 계절이 되었지만, 그녀를 만나면 같이 문학소녀로 돌아갈 것같은 감성에 젖어 들었다. 다 가지고 다 이루어 만족하는 삶을 산 사람은 얼마나 되랴. 그저 언제나 하고픈 일이 있음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여정이리라. 그것이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조차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을을 지나는 나이에 깨달음이 아닐까. 애써 의미를 부여해 본다.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asysook@hanmail.net
낙엽 한 장 속의 단상
김 현 주
무심히 걷다가 문득 발끝에 툭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낙엽 한 장에 발걸음을 멈춘다. 벌써 가을이? 캄캄했던 머릿속 꺼진 불이 갑자기 켜지는 느낌이다. 고개를 들어 늘어선 가로수를 바라보니 하나, 둘 새 옷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거리의 풍경들이 조금씩 낯빛을 바꾸어 가는 계절! 저만치 가을이 오고 있다. 어둡고 암울한 팬데믹 시대를 살다 보니 계절이 오가는 것도 잊은 채 지내는 것 같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코로나의 터널도 끝이 보이고, 폭우와 태풍으로 뜻하지 않은 커다란 피해와 아픈 상처를 남긴 요란한 여름도 슬그머니 물러나고 있다. 세상은 어수선하고 온갖 사건 사고들로 아수라장이어도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한다. 머지않아 노란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카펫처럼 깔릴 것이고, 울긋불긋 곱게 물든 단풍이 우리에게 손짓할 것이다. 그동안 코로나로 움츠린 채 마음껏 외출하거나 여행할 수도 없었는데, 올가을에는 어디론가 떠날 수 있을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이제 코로나 시대가 끝나고 엔데믹 시대가 온다고 한다. 전대미문의 코로나로 인해 사회는 물론 개인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일상의 통제는 함께, 같이 모이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바꾸었다. 혼밥, 혼술, 혼영이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다. 코로나가 안정이 되어도 코로나 이전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 같다. 오랜 변화에 길들여진 지금 어쩌면 변화 이전에는 몰랐던 편안함이 있기 때문 아닐까?
그중의 하나가 마스크 쓰기인 것 같다. 코로나가 주춤해지고 방역이 완화되어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괜찮다고 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닌다. 자신을 적당히 감추고 다니는 게 편한 점도 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외출할 때 화장을 하게 되는데 마스크를 쓰니 화장을 안 한 쌩얼로 외출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지난겨울 마스크를 쓰고 다닌 덕분에 감기 환자가 줄어 내과가 울상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음식점이나 반찬가게는 의무적 마스크 착용이 오히려 위생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면하는 곳에서는 코로나가 끝나도 여전히 마스크를 쓰는 것이 좋을 것도 같다.
마스크 쓰기가 모두를 위한 방역 기준이니 지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유난히 마스크 쓰는 것이 싫고 거부감이 심하다. 무엇보다 마스크를 쓰면 숨쉬기가 힘들고 갑갑하다. 폐활량이 작아서인지 K94는 질식할 것만 같아 아예 쓸 엄두도 못 내고 일반 마스크를 쓰는데 그것마저도 거북하다. 그렇다 보니 정말 꼭 필요할 때만 쓰게 된다. 나는 식당이나 커피숍, 버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를 출입할 때 외에는 거의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특히 자연 속에 있을 때는 마스크를 벗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 벗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눈치껏 쓰다가 벗곤 한다.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니까 접촉의 위험이 있을 때 착용하면 된다는 게 내 논리다.
코로나가 한창 심할 땐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모든 곳의 출입이 금지되고 괴물 취급을 당했다. 가능하면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게 되었고 누구를 만나는 것도 꺼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외부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고 예전보다 통제도 느슨해져 다행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자유롭게 숨 쉬며 활보할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여럿이 함께 모여 할 수 있는 모든 문화적 행사나 모임, 축제를 앗아갔다. 코로나가 완화되면서 축제나 문화 행사가 조심스럽게 재개되고 있지만, 예전의 분위기로 돌아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여행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어오고 있다. 일정한 다수의 사람이 모여 함께 가는 단체 관광보다는 개별적이거나 가족이나 친구 등 소그룹으로 자연 친화적인 여행을 선호하는 쪽으로 변화해 가리라 본다. 이런 요구에 적합한 한적하고 공기 맑은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 중 하나가 정원 관광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고 문화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원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게 된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북적대는 관광지나 도심보다는 수목원이나 정원을 더 찾아 힐링과 여유를 즐기고 있다. 마침 정원 관광 활성화를 위한 일환으로 정원 마케팅사 자격 과정을 수료하는 분들과 함께 몇 군데 정원 현장 견학을 인솔할 기회가 있었다. 코로나로 단체 행사나 관광이 중지되었다가 가을이 되면서 조금씩 풀려 진행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방역 기준에 따라 45인승 버스에 20명 이내로 탑승하여 행사를 이끌었다. 함양의 하미앙 밸리, 거창의 이한메 미술관, 이수미 팜밸리 등 개인들이 가꾸고 관리하는 민간정원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민간정원이 많았고 그 정원을 관리하는 주인의 철학과 정원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따라 정원도 다양한 모습으로 가꾸어졌다. 대부분 정원 안에 팬션이나 레스토랑, 카페를 열어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경제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개방해 찾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 듯하다.
인상적인 곳은 이한메 미술관의 정원이었다. 동양화를 그리는 화가 분이 작업실이 필요해 폐교를 구입하여 화실로 개조하였단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학교를 드나들다 보니 운동장에 꽃이나 잡초들이 제멋대로 무성해져 풀을 뽑고 정리해야 했고, 나무도 사다 심게 되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이제 화가분은 화선지에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자연 속에 생생한 정원을 가꾸는 게 본업이 되었다 한다. 화가인 남편분은 나무만을 심어 가꾸고 싶은데 유치원 원장으로 은퇴한 부인이 꽃을 좋아해 운동장 여기저기를 일구어 꽃을 심었다며, 정말 훌륭한 정원은 꽃이 없이 나무만으로 이루어진다는 말도 해주셨다. 몇몇 정원을 둘러보며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는 일이 아름다우면서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가을의 초입이다.
전 세계를 온통 흔들어 놓았던 코로나는 끝나가지만, 여전히 세상은 혼란스럽다. 경기 침체와 금리 인상으로 살림살이는 팍팍해지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눈만 뜨면 들려오는 정치권 이야기는 국민에게 피로감과 실망감을 안겨줄 뿐이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라는 노랫말처럼 사는 게 점점 심드렁해지고 재미있는 일도 없다. 그냥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듯하다. 도심 속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말없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저 나무처럼, 나 또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그 속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길섶의 구르는 낙엽을 보며 올가을 풍성하고 낭만적인 멋진 풍경을 기대해 본다. 친구와 함께 옛 추억을 소환하며 낙엽이 수북이 쌓인 가을 길을 걷고 싶다
함무니 다코!
손녀딸이 태어나 두 돌이 되어 가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몇 번이나 가려고 하였지만, 코로나라는 복병이 가로막고 있어 갈 수가 없었다. 아들은 커가는 딸애를 영상통화로 보여주며 엄마가 안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전하곤 했다. 기다렸던 예쁜 손녀였기에 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막힌 하늘길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항공 길이 열렸다는 소식에 서둘러 표를 예약했다. 드디어 손녀딸을 보러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떠날 준비를 하며 나는 설렜다. 코로나로 심드렁하게 지내던 일상에 갑자기 활기가 넘쳐났다. 처음 만나는 손녀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이었다. 손주가 다섯이지만 딸은 처음이라서 여아를 위해 무얼 사본 적이 오래다. 여기저기 분주하게 오가며 사주고 싶은 것들을 골랐다, 여자아이니까 제일 먼저 머리핀이랑 머리띠를 샀다. 요즘은 예쁜 것들이 참 많다. 이것저것 고르다 보니 한 바구니였지만 자주 못 본다는 생각에 욕심껏 챙겼다. 아직 어리니까 외출복보다는 내의랑 실내복을 샀고 목도리랑 장갑도 샀다. 마음으로야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고 싶을 만큼 귀하고 소중하지만 어린 손녀에겐 그다지 필요한 것이 많지는 않다. 할머니가 보러 가는 것이 가장 큰 선물 아닐까? 아들 손주들만 있던 터라 딸아이를 낳은 것은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랬기에 태어났을 때 바로 가려고 했지만 가지 못했고 백일에도, 돌 때도 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코로나가 주춤해지고 해외여행이 조금씩 풀리며 아들이 사는 북해도에도 직항이 열린 것이다.
짐을 줄인다고 줄였지만 결국 캐리어 두 개에 배낭과 보스턴백까지 네 개를 들고 나섰다.
항공 규정상 위탁 수하물 기준이 15kg까지여서 추가 중량을 늘려 예약을 했음에도 공항에서 부치며 추가 비용을 지불했다. 3년 만에 가는 아들 집이다보니 챙겨가야 할 것도, 가져다주고 싶은 것도 많았다, 더구나 가서 김장을 해 줄 생각으로 일본에는 없을 것 같은 젓갈과 고춧가루, 양념까지 가방에 넣어가려니 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기내에는 작은 캐리어 한 개와 핸드백 정도만 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무리해서 큰 가방 두 개를 들고 탔다. 다행히 별 무리없이 탑승을 했고, 무겁고 힘들었지만 무사히 삿뽀로 공항에 도착했다. 헌데, 문제는 세관을 통과 하면서였다. 혼자서 커다란 짐이 네 개나 되다 보니 세관이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일본어가 서툰 나에게 가방의 짐이 무어냐고 묻기에 아이들 줄 선물과 주로 먹는 거라고 말했다. 가방 하나를 열어봐도 되냐고 하기에 그러라고 하면서 쉽게 열 수 있는 배낭의 지퍼를 내렸다. 대부분 옷과 책이었는데 거기에 마지막에 챙겨 넣은 귤 한 봉지와 마른 대추가 문제가 되었다. 항공 규정상 생과일이나 축산물은 반입이 금지된 품목이다. 세관원은 여권과 귤, 대추를 가지고 어디론가 갔다. 한참을 기다려왔는데 귤은 안 된다며 대추만 돌려주었다. 손녀딸이 귤을 좋아한다기에 한 봉지 가져왔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입국장을 나가게 되었다.
아들네 가족은 미리 와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렸고, 3년 만에 눈물의 상봉을 했다. 세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가 안 나와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며 웃는다. 며느리가 안고 있던 손녀딸을 내게 안겨 주었으나 처음 보는 할머니가 낯설어 울며 엄마 품으로 돌아간다, 낯설음이야 당연하고 손녀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큰아이는 그사이 많이 컸다. 한국에 들어와 태어나서 2년을 살다가 일본으로 갔는데 올해 초등학생이 되었다니 기특하고 대견하다.
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려 드디어 아들 집에 도착했다. 올 1월에 집을 사 이사를 했는데 한적하고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해 살기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어려 복잡한 도시보다 시골 정서가 느껴지는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나 역시 번잡한 도회지보다는 작은 소도시에서 여유 있고 소박하게 살아가길 원한다.
짐을 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자 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무엇부터 해 먹을까 하다가 하기 쉬운 김치찌개랑 야채전을 만들었다. 며느리도 가끔 통화를 하면서 한국에 오랫동안 가지 못한 아쉬움을 얘기하곤 했다. 그 속엔 한국에 대한 향수와 먹었던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음을 알기에 이번엔 와서 그간 못 먹은 한국 음식을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손녀딸과 친해지기 위해 가지고 온 머리핀이랑 소품을 풀어 함께 해보면서 낯을 익혔다. 영상통화로 보아 와서 그런지 처음만 낯설어했을 뿐 금방 친해졌다. 볼수록 예쁘고 신기했다. 내가 딸을 낳아 키울 땐 엄마로서 미숙했고 경험도 없는 터라 제대로 엄마 노릇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작고 인형 같은 딸을 기대했는데, 딸아인 보는 사람마다 잘 생겼단 소릴 들을 만큼 우량아에 또래보다 컸다. 직장 생활을 하며 육아를 했으니 아이를 여유롭게 돌보기보다 의무감에 쫒기는 듯한 돌봄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돌이켜 보면 아쉬움도 있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눈앞의 손녀딸은 앙증맞게 작고 귀엽다. 며칠 있음 두 돌인데 말을 하기 시작해 한국말과 일본말을 섞어가며 제법 의사 표시를 한다. 머리핀, 목도리, 장갑, 꼬까 등등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면서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꼬물거려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손녀딸과 함께 있으니 시간이 흘러가는 줄 모른 채 아주 오랫동안 내가 여기 머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꿈에 그리던 손녀딸과의 만남은 이렇게 편안한 행복감을 선사해 주었다.
한 열흘 아들 집에 머물며 내내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전업주부로 살아온 것이 아니어서 음식을 잘하거나 요리에 능숙한 건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고국에 가지 못한 아들에게 고향의 맛을 전해 주고 싶었다. 한국이 통째로 왔으니 먹고 싶은 것은 다해 줄 거라며 없는 호기까지 부렸다. 마음은 그랬다. 며칠 외국 여행만 해도 집밥이랑 된장찌개 생각이 간절한데 3년이 넘도록 엄마가 해준 밥을 먹지 못했으니 그 간절함이 오죽할까 싶어 부엌데기를 자처했다. 김치찌개, 닭볶음탕, 동그랑땡, 갈비찜, 매운탕에 혼자서 해본 적 없는 김장 김치를 담는 것까지 아들 부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단호박죽도 끓여 보았고 수제비도 만들어 먹었다.
손녀딸이 두 돌 되는 날에는 미역국에 전을 부치고 잡채를 만들어 한국식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열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들은 우리 부부가 일본에 와 함께 살아주길 바란다, 나도 한편으론 더 나이 들기 전에 외국 생활을 조금 해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은 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몇 년 후에 와서 살기로 약속했다. 아이들을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손녀를 돌봐 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하려면 내 삶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와야 하는데, 쉬운 결정은 아니다. 처음 낯설어했던 손녀딸과는 함께 놀아주며 며칠 사이 정이 흠뻑 들었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들네 가족을 보니 눈물이 핑 돈다. 이별은 슬프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떠나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남편이 그사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딸 집으로 가 며칠 있다가 왔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그래도 보고 싶었던 손녀딸을 보고 온 여운으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저녁만 되면 어김없이 손녀딸한테서 영상 전화가 걸려온다. 아들이 퇴근하면 할머니한테 전화하자고 한단다. 영상 속 손녀가 두 팔을 벌리며 “함무니 다코!”(할머니 안아줘) 한다. 닿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나고 목이 메인다. 영상 안에서 팔짝펄짝 뛰며 재롱을 부리는 손녀 세아짱! 세상의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런 선물이다.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라렴!
* 대전 출생, 수필가, 한밭문학회 사무국장, hl3evs@hanmir.com
권여사님
오 월 석
몸 상태가 최악의 상태를 막 벗어났다. 며칠 전부터 숨을 들이쉬어 배가 볼록해지면 위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호흡을 조심조심 신경을 써서 해야 했다. 내가 8년 전쯤 앓았던 위경련 증상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진료를 받으면서 링거를 맞으면 어떻겠는지 먼저 물었다. 의사 선생님도 약을 먹는 것보다 링거를 맞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하셨다. 돈은 좀 더 써야 하지만 난 이전의 아픈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여 빨리 낫는 길을 택했다. 링거를 맞고 이틀이 지나니 몸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올 11월은 주말을 제외한 휴일이 단 하루도 없었다. 하지만 내 일정은 다른 달에 비해 너무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인도네시아 출장 4박 6일, 몽골 출장 5박 6일, 경기도 대부도로 가족여행 1박 2일, 충남 보령으로 시골 동네 청년회 모임 1박 2일, 어머니 생신, 애인과의 약속, 경상남도 통영시로 외국인 유학생 60여 명을 인솔하여 다녀왔다. 나는 몸을 최대한 움츠려 활동 동선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공주에서 또 한 건의 일이 생겨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윗동네 점골에 사시는 권 여사님이 갑자기 경기도 의정부로 이사를 가신다는 것이다. 내가 중년의 나이가 되다 보니 경험상 오늘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 아이들 돌잔치, 학교 졸업식에서 사진 찍는 일, 동생들의 결혼식 참가 등이 그런 일에 속한다. 나는 저녁 6시에 퇴근하자마자 노은동 농수산물 시장에 들러 188번 단골집을 찾았다. 과일가게 주인아주머니는 오른발에 깁스를 한 채로 목발로 버티고 서 계셨다. 과일상자를 나르다가 떨어트려 발등에 맞았다고 하셨다. 안부를 짧게 주고받은 뒤, 난 제일 좋은 단감 한 상자를 샀고 시골집에 계시는 부모님 드실 망고와 과일을 몇 개 샀다. 아주머니는 운전하며 먹으라고 비닐봉지에 귤을 몇 개 넣어주셨다. 나는 차를 공주로 몰고 가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운전하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행동이 어리석었던 것 같다. 위경련을 두 번이나 겪다니…
손자병법에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이 있다. “한 번 이기고 또 한 번 지는 것은 병가에 늘 있는 일이다.”라는 뜻인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으므로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최대한 똑같은 실수를 두 번 이상 하지 않으려 신경을 많이 쓴다. 이번에 실수로 두 번째 위경련을 경험했지만 나 자신에게 조금은 관대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나의 위경련은 몽골 출장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증상이 금요일 02시에 일어났음에도, 나는 03시 49분 버스로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해외 출장 일정이 첫날부터 빡빡하게 짜여 있었다. 07시 20분발 비행기를 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교통 일정은 모든 게 순탄했다. 3시간 40분을 비행해 몽골 울란바토르에 내리니 온 세상이 하얀 겨울왕국이었다. 여름에 왔을 때는 온통 녹색의 나라였는데 이번에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몽골은 예전에도 느꼈었지만 해발 고도가 1,300m 이상이다 보니 피로감이 심하다.
첫째 날은 7월에 우리 학교를 방문했던 몽골 우수 교사단 여덟 분이 오셔서 한국 음식과 보드카로 대접해 주셨다. 두 번째 날부터 점심, 저녁 식단이 온갖 고기로 깔렸다. 게다가 올 7월 방문했던 분 중 가장 직위가 높으신 바양걸구 의장님이 3일 연속 저녁을 같이 해주셨다. 내 뱃속은 소고기, 양고기, 말고기, 닭고기, 염소고기, 돼지고기가 항상 소화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다. 고기가 다 소화되기 전에 다시 새로운 고기가 채워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몽골 사람들은 정말 고기를 좋아했고 주식이 고기임을 이번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날씨는 최저 영하 19도까지 떨어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5박 6일 동안 몽골 분들의 정성으로 내 배는 기름졌다. 내가 올 7월에 한국에 오신 몽골 손님을 정성스럽게 접견한 것에 대한 보답인 것 같았다.
몽골에서 귀국하는 날은 정말 김치찌개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에 와서 몸무게를 달아보니 1kg이 빠져있었다. 몽골에서 점심, 저녁을 온통 고기를 먹었는데 오히려 몸무게가 빠지다니 정말 신기했다. 이전에 텔레비전에서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황제다이어트가 이런 것인가? 보람차고 의미 있었던 해외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밤 9시에 대전에서 대학교 친구와 동생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동네까지 와서 맥주 한잔하겠다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피곤했지만 나를 보겠다고 오는 지인들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맥주집으고 갔고, 조카가 정성스럽게 갖다준 생맥주를 4잔씩 마셨다. 지인들과 만난 지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야기가 시루떡처럼 많이도 쌓여있었다. 한 겹 한 겹씩 지난 일들을 웃으면서 벗겨내다 보니 시간이 밤 00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우린 연말의 모임을 약속하고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다음 날 출근하니 사무실 썰렁하게 느껴졌다. 몽골의 그 추운 날씨에서도 느끼지 못한 한기를 한국에서 느꼈다. 내 몸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간신이 하루를 버티고 집에 가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작은아들은 학원에 가고 큰아들은 친구와 약속이 있어 외출 중이었다. 저녁을 무엇을 해 먹을까 0.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얼큰한 김치라면을 끓여 먹고 싶었다. 신김치를 물에 넣고 끓이면 라면 스프를 절반만 넣어도 간이 딱 맞는다. 사실 몽골에서부터 한국에 돌아가면 라면을 먹고 싶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얼큰한 라면을 뜨거운 상태에서 급하게 빈속에 밀어 넣었더니 결국 문제가 발생했다. 그동안 농축되었던 위의 피로가 위경련으로 발산한 것이다. 위가 꾹 뭉치는 느낌이 나더니 숨쉬기도 힘든 것이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바늘을 가져오라 하고 중지를 실로 꽁꽁 묵었다. 양 손을 같은 방식으로 묶고 바늘로 땄다. 검은 피가 몽글몽글 동그랗게 밀려 나온 모양이 붉은 구슬 같았다. 그리고 또 양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 푹 들어간 곳을 꽉 눌렀더니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아들에게 내 목 부위에서 등줄기를 따라 한 뼘 아래쪽 부분을 손바닥으로 세게 치라고 했다. 내가 남들에게 처방해 주는 것은 쉬운 데, 내가 날 처방하려니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서둘러 응급처치를 하니 속이 좀 편해진 느낌이 들어 잠을 청했다. 대학 다닐 때 중국어 학원을 같이 다니던 한의사한테 배운 것을 지금도 잘 써먹고 있다. 다음 날 근무 중 외출을 달고 나가서 링거를 맞았더니 조금씩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애마가 30분을 달려 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께 동네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렸다. 평일에 아들이 무슨 일로 왔는지 물으시기에 권 여사님께 인사드리러 왔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오지랖도 넓다고 하신다. 졸음운전을 밥 먹듯이 하는 아들이 걱정되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권 여사님과 친하시긴 하셔도 아들의 건강이 먼저라고 생각하신다. 통화 중에 어머니께서 내게 집으로 직접 오지 말고 동네 집안 형수님 집에 들러서 저녁을 먹고 오라고 하셨다. 형수님 댁에 찾아가 노크하고 문을 열어보니 옻탐을 하시는 어머니를 제외한 많은 분이 권 여사님과 옻닭 만찬을 하고 계셨다. 그분들 중에 나의 아버지도 계셨다. 내가 형수님 댁에 들어서니 모두 반겨주셨고 나보고 제일 젊다고 옻닭과 노랗게 우러난 옻국물을 그릇 한가득 퍼 주셨다. 닭은 우리 집에서 아버지께서 1년 이상 키우신 것을 손수 잡으셔서 가져오신 것이었다. 내일 경기도로 떠나는 총무님에 대한 아버지의 정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현재 향포마을 30여 가구의 동네 회장님이셨고 권 여사님은 총무를 맡으셔서 1년 정도 두 분이 완벽하게 동네의 행사를 잘 치르셨다. 그런데 아쉽게도 권 여사님이 7년여간 살았던 우리 향포점골 마을에서의 생활을 오늘로 마침표를 찍고 예전에 20년 이상 살았던 의정부로 다시 이사를 가신다고 한다. 7년 전 우리 동네에 사는 아주머니의 남동생 집에서 연로하신 친정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하여 오셨었다. 아주머니는 3년간 어머니 병시중을 들었고 4년 전에 어머니는 하늘의 별이 되셨다고 한다. 아주머니의 형제자매는 모두 9남매였는데 병간호를 하는 아주머니의 생활비를 십시일반 주었었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그 돈줄도 마르게 된 것이다. 동네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어서인지 몸의 오른쪽을 못 쓰는 중풍이 든 남편까지 우리 동네 동생 집으로 모시고 와서 동네에서 살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시골에서 할 일이 없어 경제적인 문제가 쌓이다 보니 결국 의정부의 한 교회 부설병원에서 간병인을 관리하는 직책을 제안하여 가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옻닭을 여유 있게 먹으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하는데 동생 집에서 계속 전화가 왔다. 아주머니 곁에서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내일 이사하는데, 짐을 얼른 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아주머니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급하게 옻국물을 마시고 일어나시는데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집을 나서며 동네 분들에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모두 너무 덤덤하여 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이별 회식을 지난 며칠 전부터 수 차례 한 상태였다. 동네 분들은 모두 약주를 하셔서 혼자 걸어서 어둑어둑한 산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내가 태워다 드린다고 하니 너무 좋으신 모양이었다. 동네의 어둑어둑한 시골길을 차로 3분 정도 올라가니 환하게 불이 켜진 집 현관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아주머니를 내려드리기 건에 가방에서 내가 5년 전에 출간했던 수필집 “형사남궁”의 빈 페이지를 열고 아주머님의 성함을 여쭈었다. 나는 아주머니의 성씨가 ‘권 씨’인 것만 알고 있었다. 7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이름 석자를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의 성함을 쓰고 이렇게 써 드렸다. “향포 동네에 오셔서 7년 동안 제 부모님의 벗이 되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책을 전해드리고 단감 한 상자를 어깨에 메고 현관에 가서 아주머니 동생에게 전달했다. 아주머니 남편은 내게 고맙다고 무척 밝고 크게 인사하셨다. 처남 집에서 얹혀산 몇 개월이 아무래도 불편했던지 내일 떠날 생각을 하니 좋은 것 같았다. 주의 깊게 보아하니 아주머니의 남동생도 슬픈 표정은 아니었다. 남동생은 집과 터를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소리를 아주머니에게 여러 번 이야기 했다고 한다. 땅이 워낙 넓고 건물이 큰데다 외진 곳이라는 생각에 부동산에 내놓아도 보러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아주머니께 인사하고 내려오면서 마음이 후련해진 느낌이 들었다. 빌린 돈을 다 갚았을 때 느끼는 후련한 감정이랄까? 동네에서 아주머니와 가장 친한 나의 어머니도 아주머니의 상세한 인생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신다. 그러하니 내가 아주머니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좋은 기억들로 꽉 차 있다. 아주머니는 어머니의 농사일을 시간 날 때마다 도와주셨고, 아버지를 도와 동네 총무 일을 잘 해주셨고,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차리면 꼭 혼자 사시는 노인분들을 모셔다 챙겨주셨다. 권 여사님이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은 80대 중반의 한 할머니는 서운하셔서 점심도 안 드시고 계속 눈물을 훔치셨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가을에 누런 들판 논두렁을 걸어 다니며 메뚜기를 잡아 볶음 요리를 해 주셨다. 내 동생들과 맥주를 소화제 삼아 같이 마시며 농담도 잘하셨다. 동네에서 잡은 민물고기 매운탕도 아주 잘 드시고 어떤 음식이든 척척 잘 만들어 내놓는 요리사였다. 매주 일요일 교회에 꼭 가셔서 예배드리는 권 여사님은 교회 권사이시기도 하다.
나는 이전에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서 많은 경험을 해보았다. 다음에 다시 보자고 해놓고 영원히 못 만났던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에서 유학 생활하며 다음에 다시 꼭 보자고 했던 많은 친구들, 군대 동기들, 대학교 친구들도 22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가 대부분이다. 권 여사님과도 그런 인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모님과 동네 분들에게 친절했던 아주머님께 나는 작은 성의를 전해드리고 싶었다. 우리나라가 좁다고는 하지만 아주머니도 직장이 생겨 전념해야 하고 몸 불편한 남편을 두고 공주 시골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 간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를 뵙고 인사드리고 대전으로 나오는데 내 몸 상태가 어제보다 훨씬 좋아진 느낌이다. 대전 내 집에 들어와 어머니께 안전하게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렸는데 아주머니께서 어머니께 전화하셔서 아들 책을 받고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셨단다.
내 책을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 권 여사님께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다. 앞으로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에서 의정부에 대한 어떤 소식이 들리면 권 여사님이 생각날 것 같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 (2017), moon5865@hanbat.ac.kr
내가 시를 쓰고, 사진을 찍는 이유
- 포토에세이 <앵글 속으로 스며든 이야기>*
백 경 화
안녕하십니까?
요즘 하늘은 푸르고 구름도 예쁘고 넓은 들녘에는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이 가을 속으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 보고 싶은 계절입니다. 어느 곳을 가든 사진 찍기에 딱 좋은 날입니다.
저는 오늘 사진이란 주제로 간단하게 제가 사진을 좋아하게 된 동기와 사진을 촬영해서 어떻게 쓰였는지 제 경험과 소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70대 중반을 넘어선 여자로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시를 쓰는 백경화입니다. 오늘 강연의 주재는 사진이지만 이론이 아닌 제 생각과 사진을 어떻게 일구고 어떻게 쓰였는지를 쉽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사진을 찍게 된 동기
사진은 언제나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내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다닐 때나 여행이 아니어도 예쁜 꽃을 보면 카메라를 바짝 대고 사진을 찍습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 예뻐서. 또는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두고 보려고. 그런 마음에서 사진을 찍지 않습니까?
여행을 다니면서 보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는 다 머리에 저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찍어서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가끔 들여다보면 다시 한번 여행을 다니는 기분으로 마음이 설레고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면 말로 표현해야 하는데 말로서 참 아름답고 멋있더라. 열 번을 말해도 듣는 사람은 별로 감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잘 찍어온 사진이 있다면 눈으로 보고 ‘아∼ 이런 곳이 있구나. 아름답고 멋지다’고 하며 감동합니다.
여행기도 금방은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쓰지만 얼마 후에 쓸려면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사진을 보며 글을 쓰면 그때의 생각들이 솔솔 떠오릅니다. 그런가 하면, 화가는 그림의 모티브로 밑그림을 만들려고 사진을 찍습니다. 어쨌든 사진은 당장 찍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그 사진이 귀한 기록사진이 되기도 하고 상상력을 유발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사진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고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40대 초반부터 저는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대전 YWCA 등산반에 가입하여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꼭 전국의 높고 낮은 유명한 산을 다니면서 사진 촬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범위를 넓히어 외국 산행까지 도전하여 10여 군데는 다녀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카메라는 당연히 나의 동반자가 되어 나의 눈과 귀를 열어 주었습니다. 집에 오면 곧바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인화해서 보며 산행기를 썼습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사진을 찍지 못한 날의 산행기는 얼마간 지나면 벌써 다 잊어버리고 별로 쓸 말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한없이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느끼면서 카메라를 꼭 갖고 다녔습니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고 있으면 그 사진 속에서 그날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술술 따라 나옵니다. 그때마다 산행기를 한 편씩 써서 컴퓨터에 저장하고 인쇄해서 파일에 끼어 놓은 것이 100여 편이 넘었습니다. 그때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우연히 내 파일에 넣어 둔 산행기와 여행기를 보고 대학교에 시와 수필을 배우는 곳이 있는데 같이 다니자고 해왔습니다. 나는 그 친구를 따라 대전대학교 정보사회교육원 문예창작반에 등록하여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오래전에 작고하신 문학박사 박명용 교수님과 지금도 가끔 문학회서 만나고 서로 안부를 전하고 있는 정순진 교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고 교수님께 제가 그동안 써 놓은 산행기를 보여 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며 제 얼굴을 보시더니 “백 여사님, 다시 봐야 되겠네요” 하시면서 “당장 책을 내도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학교에서 정문으로 나오는데 내 몸은 공중에 뜬 느낌으로 발길이 휘청거렸습니다. 아니 내가 책을 내다니. 그때의 기쁨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때 무렵, 저는 그동안에 산에 다니며 자연을 보고 시를 썼던 시로 서울에 있는 문학지에 출품하여 신인문학상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하였습니다. 그 후에 바로 360여 페이지 분량의 산행기를 기록한 글과 흑백사진을 넣어 <산의 향기를 찾아서>란 산행수필집을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산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서 책을 낸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신선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행기를 내고 난 후. 인터넷에 나의 시와 글을 인용해 카페에 올린 글이 여러 군데서 보았습니다. 내 불로그의 방문자도 많았습니다. 검색창에 등산가들이 많이 검색해서 인기가 좀 많았습니다.
그 후로 두 번째 시집, <술래잡기>란 시집도 사진을 넣어 냈고, 세 번째 발간한 시집은 포토시집으로 시 한 편에 사진 한 장씩을 넣어 완전 컬러판으로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란 시집을 냈습니다. 그때 시인들은 사진을 넣으니 좋다고 하고, 사진가들은 사진에 시를 넣으니 너무 좋다고 많이들 부러워했습니다. 반응이 좋아서 사진가의 보람을 맘껏 느꼈습니다.
세 번째, 사진은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삶의 활력소다
사진은 일단 촬영 날짜를 잡아, 놓으면 그 순간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날짜를 기다리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어떤 모습일까? 어떤 모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리는 시간도 참 행복합니다. 카메라에 사진을 가득 담아 돌아오는 길은 아주 귀한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오는 것처럼 가슴이 뿌듯하고 기쁩니다.
대자연의 풍경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새롭고 아름답습니다. 잠을 못 자고 아침밥을 먹지 못했어도 현장에만 가면 기운이 솟아납니다. 풀잎 하나도 앙상한 나무가 서 있어도 딱정벌레가 나뭇잎을 다 갉아 먹어도 경이롭고 고귀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차곡차곡 카메라에 담으며 온종일 자연의 속삭임을 들으며 이야기하다 보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 한 편이 탄생하기도 하지요.
아름다운 대자연은 이렇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누구든지 반겨 주는데 어찌하여 많은 사람은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느 선물이 이토록 내 가슴에 떨림을 줄까.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집에 와서는 남편에게 보았던 하루를 신이 나서 떠들어 댑니다.
밤에는 종일 뛰어다니며 촬영한 사진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컴퓨터에 올리고 보느라 밤을 꼬박 세는 날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촬영한 사진을 보고 있으면 잠이 내게 와서 잠을 청하다가도 너무나도 열심히 컴퓨터만 보고 있으니 살며시 달아나 버립니다. 그렇게 다니며 촬영해온 사진을 보며 시도 만들고 에세이도 만들어 제 블로그에 차곡차곡 올립니다.
네 번째, 사진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며 시는 나의 동반자다
이번에는 제가 얼마 전에 출간한 포토에세이 <앵글 속으로 숨어든 이야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포토에세이 집을 출간하는 과정부터 출간하고도 무척 바빴습니다. 그동안에 틈틈이 써 놓았던 포토에세이를 묶어 집을 만들어 주려고 출판사에 알아보았습니다. 컬러사진을 넣어 내려 하니 책값이 보통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가 좋아하는 사진인데,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새벽부터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한 나에게 기쁨을 준 애들인데, 생각하니 사진이 모두 자식같이 소중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망설이니 정리해 놓은 에세이 속의 사진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애들의 눈빛을 보니 도저히 그냥 말수가 없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 아름다운 집 하나 멋지게 지어서 모두 모여 살게 하자. 마음속으로 결정했지요. 그렇게 하여 <앵글 속으로 스며든 이야기>인 포토 에세이집을 지었습니다. 다행히 서울 예술문화위원회에서 창작지원금을 받았기에 부담을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책을 내고 지인들과 작가들한테 붙이고, 이틀 후부터 축하의 메시지가 연이어 봇물이 쏟아지듯 핸드폰으로 왔습니다. 또는 우체국을 통해 축전으로도 오고 손편지로도 10여 통이 넘게 오고, 심지어는 유명 작가님이 본인의 그림과 글씨로 내 책의 시어를 넣어 시화를 그려 보내 주셨습니다. 나를 위해 바쁜 시간을 내어 정성스럽게 그린 시화와 손편지는 나를 너무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축하의 메시지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기쁘게 해 줄 힘이 있구나. 정말 고마워 저도 일일이 답장을 해주느라 일손을 놓고 며칠간은 핸드폰을 손에 잡고 지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내가 좋아서 찍은 사진이며 부족하기만 한 글인데 타인들이 즐겨 보며 일일이 축하의 글을 주는 것을 생각하니 과연 사진과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저는 처음에 원고를 출판사에 맡기고 와서 가슴이 떨려 잠을 못 잤습니다. 나의 일과를 내 생각대로 쓴 것인데 누가 읽어 줄까? 걱정하면서 용기를 내어 책을 냈습니다. 다행히 반응이 생각보다 몇 배나 좋았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해주시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진과 글로 승부를 걸어 성공했다는 축하의 글이 손편지로 왔는데 과찬인 줄 알지만 너무나 기뻤습니다.
다섯 번째, 사진과 글쓰기는 노후에 가장 잘 든 보험이다
포토에세이 집은 주로 카메라를 갖고 산책하며 사사로운 사물을 찾아 관찰하고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속에서 무언가를 추구하며 얻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만나는 꽃과 새들을 보고, 산 위에 올라 대자연의 풍경을 보고, 느낌을 그날의 일기처럼 기록한 글로 엮은 것입니다.
카메라로 새들을 연속 촬영하다 보면 새들의 사는 모습이 오롯이 보였습니다. 어미들의 모성애와 새끼들의 재롱떠는 모습은 한 가정의 단란한 모습을 떠올리는 가족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정과 사랑이 넘쳐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4시간 정도를 꼬박 서서 촬영하고 옵니다.
사진은 우리 눈으로 보고 찍지만, 사진이 아니고는 그렇게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멀리 있는 나무속 새들도 망원렌즈로 보면 아주 정확하게 새끼들의 입 코 눈까지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진은 정말 매력이 있고, 하면 할수록 손에서 뗄 수 없는 나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나이 들어 가장 잘 든 보험이 시인이 되는 길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시인이 되고 나이를 먹고 보니 그 말에 일리가 있고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 더 보태어 사진작가도 노년의 보험 중에 최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사진이 제 인생에서 너무나 행복을 주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두 가지 보험을 들었으니 노년을 보내는 데는 걱정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마리의 토끼를 양손에 잡고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잘 지키며 튼실하게 키우기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오늘 사진에 대해서 두서도 없이 말씀드렸는데 지루하시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껏 제가 해왔고 보고 느낀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포토 포엠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 대전문인협회, 대전국제펜문학회 회원, 꿈과 두레박, 한밭문학회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 이 글은 2022년 10월 12일 ‘대전북포럼’ <작가와의 만남>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가을 어느 날
우 지 강
가을은 오색찬란하고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시절에는 가랑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단풍이 단장하며, 가벼운 안개가 피어올라 사람들에게 시와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가을은 시의 정취가 넘치는 계절이다.
‘서리 맞은 단풍이 2월의 꽃보다 붉다(霜叶红于二月花)’와 같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시구들은 모두 가을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가을은 한가롭고 가뿐한 계절이다.
도연명 (陶渊明)의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고(采菊东篱下), 유유히 남산을 본다(悠然见南山)"는 가을의 경쾌함과 상쾌함을 잘 보여준다.
가을은 수확이 가득한 계절이다.
황금빛 벼 이삭과 풍성한 열매는 이제 황금 가을을 대변한다.
가을은 조용하고 그리움을 자아내는 계절이다.
번화한 여름철을 거친 후 사람들은 이미 열정과 분방을 추구하지 않고 점차 침전과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시와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 시절에 한밭 가을 문화 축제를 참여한다. 초가을이지만 벌써 서늘한 기운이 완연히 느껴진다. 나는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뛰어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익숙한 길이지만 초가을의 정경은 한층 더 아름답다. 아름다운 가을 풍경과 함께 어느새 나는 집합지에 도착했다. 만난 사람은 모두 문화계의 선배들이었다. 선배님들의 친절함은 이역만리 타향에서도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교수님들의 열정적인 노래와 함께 우리의 문화체험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 가을이 주는 풍광에 취해있는 동안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시와 그림 같은 가을 풍경이다. 산과 물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에 특유의 문화 고적까지 더해져, 나는 대자연의 신기함과 인류 문명의 위대함을 느낀다. 문화의 숨결이 어린 돌계단을 밟으며 마음속에는 더욱 고대문명에 대한 경탄이 충만해진다. 동행한 분들의 세심한 설명은 나로 하여금 옛사람들의 문화에 대해 더욱 숙연하게 했다.
다음 행로는 배를 타고 마음껏 유람하는 것이었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이백의 절묘한 시가 생각났다.
양안의 청산이 마주 보고(两岸青山相对出)
외로운 돛이 해가 저물고 있다(孤帆一片日边来)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짧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이러한 문화체험을 통해 나는 가을의 오색찬란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시와 그림 같은 가을을 직접 느낄 수 있었으며, 자연이 선사하는 가을의 아늑한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을 어느 날 떠난 여행에서의 선배들과의 만남과 분위기는 내 미래의 인생이 가을처럼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게 할 것이다.
* 중국 산둥성(山东省) 지닝시(济宁市) 출생, 산둥경제학원(山东经济学园) 졸업, 한밭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niuzhig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