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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3:12~18(288)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2023.3. 5
봄이 성큼 다가오는 3월의 첫 주일입니다.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남아 있지만, 3월이라는 그 말만 들어도 봄이 눈 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느낌입니다. 3월이라는 단어나 봄이라는 단어는 소망이나 희망을 상징합니다. 꽁꽁 얼어 붙은 땅과 살을 에는 강추위가 사라지고 새로운 싹들이 싹을 틔우는 3월은 모든 사람에게 소망과 희망을 주는 달입니다.
하지만 3월이 오고 다가오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꽁꽁 얼어 붙어 있는 얼음 땅과 같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소망과 희망을 쉽게 찾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들은 불안과 암울한 현실에 대한 불평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어느 때보다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코로나19의 끈질긴 괴롭힘이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장기적 경기침체는 나라 경제와 서민 경제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여기에 대한민국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는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출산 문제, 아이는 낳지 않는 반면 노령인구는 급속도로 늘어가면서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불안감 등이 우리 모두를 힘들고 어렵게 합니다.
70여 년 넘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것도 모든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데, 영남과 호남 동서로 갈린 지역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세대차이가 있고, 심각한 사회적 현상을 유발하고 있는 남녀갈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정도를 넘어선 노사갈등의 문제는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안감과 희망이 가라져 버리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소망과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 합니다. 저는 그래서 3월의 첫 주일 설교를 ‘소망’에 대한 것으로 정했습니다.
찬송가 488장(이 몸에 소망 무언가). 함께 부릅니다. “1)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후렴)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3)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4)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앞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바로 서리라.” 이런 놀랍고 충만한 소망의 은혜를 모든 분들이 받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488장을 작사한 분이 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목사님입니다. 1797년 영국에서 태어나서 젊은 시절 술과 폭력으로 허송세월하며 보냅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습니다. 삶은 무의미하였고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해서 우연코 들어간 교회당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 난 뒤에 새로운 인생을 성실하게 살면서 돈도 많이 모읍니다. 부자가 되어서 지역 사회에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선한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나이 50세에 모든 재산을 교회에다가 헌납하고 자신은 신학을 배운 후에 목사가 됩니다. 이 찬송가는 젊은 시절 자신을 구원해 주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작사한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있다면 너끈하게 이기고 견디어 낼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돈과 권력을 가졌다고 해도, 참된 소망이 그의 마음에 없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무너지는 서글픈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몸에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성도가 가져야 하는 이런 소망에 대해 언급을 하였습니다. 단순하게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건강해 지고 복을 많이 받는 소망만이 아닙니다. 이런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소망을 뛰어 넘어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12절,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여기의 ‘소망이 있으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말합니다. 돈을 많이 모아서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고, 더 좋은 가전 제품으로 바꾸는 그런 소망도 중요한 소망이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가질 때에 모든 일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질 때에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질 때에 현실에 다가오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같은 소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사가 나타난다고 바울은 증거하나요?
1.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애물이 사라지게 됩니다. (수건이 벗겨지리라)
16절 보세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라는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주께로 돌아가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진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얼굴에서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는 사도 바울을 공격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얼굴 앞에서 바울을 항상 공격하는 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의 전통을 따라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정면에서 도전하며 비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유대주의자들의 반대와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여러 이단들의 사설 때문에 교회는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어떤 이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의 말을 믿는 자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율법아래 얽매여서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헛갈려 했습니다.
이때에 바울이 말합니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말합니다. ‘언제든지(Anyone, 누구든지)’라는 원어 뜻입니다. 즉 누구든지 주님께 돌아가면, 즉 주님을 믿게 되면, 율법의 수건을 벗고 예수님과 나를 가로막는 수건을 벗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울이 몸담고 설교를 하였던 고린도교회에서는 구약 율법의 수건이 성도들의 얼굴을 가려 버렸습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는 구약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서 옭아매는 율법의 수건을 벗고 믿음의 자유를 누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 쓰고서는 주님이 없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의 수건을 쓰고 돈만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의 수건을 쓰고 정욕에 쌓여서 살아 갑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는 이들 중에서도 자신의 얼굴에 ‘이기심과 교만의 수건’을 쓰고서 올바르게 주님을 보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수건을 벗어야만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는데, 수건을 벗기는커녕 점점 더 두꺼운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덮어 버리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불신앙의 수건, 세상 욕심의 수건, 나만 생각하는 아집의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소망을 찾아 발견할 수 있으며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얼굴에 덮혀져 있는 수건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 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침례교의 목사이며, 변호사로 활동하고 여러 기독교 서적을 내어 미국인들의 영적 신앙을 이끌었던 러셀 콘웰(Russell Conwell, 1843-1925)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애틀랜타 근처 산악 지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20대 초반의 북군의 젊은 장교가 중상을 입고 쓰러져 방치되어 버립니다. 위생병은 그가 이미 죽은 줄 알고 치료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렇게 생명이 꺼져 가는 순간에 러셀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에게 기도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만일에 나를 살게 해주신다면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봉사하겠다”
인생의 위기가 닥쳐서야 비로서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위생병이 그곳을 지나다가 살아있는 그를 발견하고 치료를 하게 되면서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와 세 개의 종합병원을 설립합니다. 젊은 시절 철저하게 무신론자였고 기독교를 비난하였던 그였지만, 그에게 하늘의 소망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 마음을 가리고 있던 자만과 아집들이 벗겨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을 때에 나를 가로 막고 있던 모든 장애물들과 수건들이 벗겨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구절이 바로 이어지는 17절 말씀입니다.
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주의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주의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은 ‘주님을 믿을 때에 자유가 주어진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자유가 있다(엘류데리아)’라는 말인데,‘거리낌 없이 나아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도로를 가다 보면 가끔 도로에 공사하는 현장이 있어서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만 돌아가야 하는 길이지만 똑바로 직진하지 못하고, 내 발걸음을 돌려서 돌아간다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로에 막힌 장애물로 인해 잠시 돌아가는 것은, 내 안전을 위해 큰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내 인생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들이 있을 경우입니다. 내가 치울 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도무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보아도 도저히 풀어 나가지 못하는 장애물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좌절합니다. 이 장애물이 돈이 될 수도 있고, 내 아픈 몸이 될 수도 있고, 내 주변에 있는 가까운 지인이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이 장애물이 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 장애물이 나를 위협하여 내 삶을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사람이 내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나를 구해주는 구세주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바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내 앞에 장애물이 가로막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장애물로부터 내가 자유로와진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김태훈 선교사(49)의 간증입니다. 서울과학고를 거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합니다. 남들이 안 하는 간담도췌외과 및 소아외과 전공, 서울아산병원 촉탁의로서 억대 연봉과 보장된 미래를 누리던 잘나가던 의사였습니다. 이런 그가 국제협력 의사로 해외 진료를 자원합니다. 그리고는 남수단과 에티오피아에서 자비량으로 의료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병원 외과 전문의로 날나가던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2013년 7월, 히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아내와 아이 세 명과 미련도 없이 에티오피아로 훌쩍 떠납니다. 그렇게 아프리카 빈민국인 에티오피아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1년 3개월이 지난 2014년 파킨슨병에 걸립니다. 왼쪽 다리와 손에 마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 이어졌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으로부터 도파민을 대체하는 약물 처방만 받고 지냅니다.
김선교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자유롭게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몸이 비록 불편하지만, 몸의 불편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사랑에 늘 잠겨 생활하니 항상 간사한다고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세상의 질병을 초월하는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초월하는 자유입니다.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로 세상을 이기는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참된 소망입니다.
18절,“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여러 잡다한 수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지는 것을 경험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러 장애물의 수건이 벗어져서 온전하게 거울로 내 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내 얼굴을 보면 내가 잘생겼다고 자화자찬할 것이 아니라, 장애물의 수건을 벗겨 주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영광’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연이어 등장합니다. ‘주의 영광을 보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라는 말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육체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다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담대해집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기뻐하며 죽어간 것은 하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은 이 땅에서 겪고 있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조그마한 시련만 닥쳐도 담대함을 보이기는커녕 한숨부터 내쉬고 있지 않습니까? ‘고개를 떨구고, 문제를 키우며, 죽겠다’고 쉽게 말하는 크리스천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세상적인 문제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으로 더욱 담대하게 생활하는 3월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에는 목회자와 성경이 무척 귀했습니다. 선교사가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선교사가 방문하지 못하면 ‘조사’라는 분이 예배를 인도하면서 성경도 읽고 설교도 하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산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저녁 예배 시간에 교인들이 모이고 조사가 예배를 인도합니다. 성경 봉독 순서가 되어 시편 23편을 읽습니다. 산골에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조사는 어두침침한 등잔불 아래에서 겨우겨우 읽어 나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도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구절에서 <르>자를 넣어 잘못 읽었습니다. 단어 하나를 잘못 넣었는데 말씀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경 봉독을 끝내고 조사의 얼굴이 심각해집니다. 성경이 없어서 조사가 읽은 성경을 들은 교인들도 심각해진 것은 매일반입니다. 조사가 설교를 해야 하는데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저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자 교인들도 손을 들고 “아멘! 나도요, 나도요” 라고 외칩니다.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나는 그래도 좋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듯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구원의 참된 소망이 있기에 모진 삶의 현장 속에서도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참된 소망과 믿음이 이어지는 3월의 모든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