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다고 새들아 슬퍼 마라’(1)가 아니고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퍼 마라’(2) 라고 되어 있다. ‘꽃이 진다’고 직접화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꽃이 진다’ 라고 말하는 이는 ‘새들’이다. ‘꽃이 진다고 새들아 슬퍼 마라’ 라고 했다면 꽃이 지는 것을 보는 이는 새들이 아니라 제 삼자가 된다. 새들이 슬퍼한다는 것도 제 삼자가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순전히 제 삼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서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퍼 마라’ 라고 하게 되면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아는 이는 새들이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것도 새들이다. 제 삼자인 詩的시적 話者화자는 새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울지 말라고 말을 건네고 있다.
(1)은 객관적인 서술이라면 (2)는 새의 입장에 공감함과 동시에 새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른 분위기와 뜻을 전해준다.
바람에 꽃이 흩날리는 것은 꽃의 탓이 아니라고 새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새들은 꽃이 지는 것을 바람의 탓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잘못된 판단이라고 일러준다. 꽃이 지게 하는 것은 봄이라고 그 정체를 밝히고 있다. 봄이 가면서 훼방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가노라’도 초장의 ‘꽃이 진다’와 마찬가지로 봄이 ‘(내가) 가노라’ 라고 말하는 직접화법으로 볼 수도 있고(가), ‘(봄이) 가노라’ 즉 ‘봄이 가느라고’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나). (가)처럼 봄이 위세를 부리면서 가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봄이 가면서 훼방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위세를 부리던 시절이 지나고 그냥 가지를 않고 바람을 불게 해서 꽃이 떨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봄을 시샘하는 이는 누구인가? 새들은 봄을 시샘하지 않는다. 새들은 봄이 그렇게 하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봄을 시샘하는 이는 시적 화자이다. 시적 화자는 봄이 가면서 자기 마음대로 훼방을 놓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매우 주관적인 판단이다. 봄이 위세를 부리고 있다고 보는 것은 이 사람에게 위세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새들을 향해서 뭘 모르고 있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지만 이 시적 화자는 봄이 훼방을 놓고 있다고 잘못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시적 화자나 새들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새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처럼, 이 시적 화자도 역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상태에 있다. 새들이 꽃이 지는 것을 바람의 탓으로 보는 것은 그래도 바람이 불면 꽃이 떨어진다고 하는 객관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가 훼방을 놓는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새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현명한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실은 이 시적 화자가 새들보다 더 미련한 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