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제일봉과 가야산소리길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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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산행의 즐거움을 증감한다. 비 내리는 숲속을 걸으면서 산행의 즐거움을 날씨 탓으로만 돌리면 자신이 초라하고 무력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 즐거운 날개를 달아야 한다. 긍정의 생각을 품어야 하고 즐거운 대화를 펼쳐야 한다. 그럴 것이 화창하면서 바람까지 실어 주면 좋을 법한데 그와는 반대로 실안개 사이로 가랑비가 날려 비옷을 꺼내 입기도 그렇고 안 입기도 한 그런 날씨가 좋을 리가 만무하기에 어쩌랴. 현실을 소화해 내야 한다.
청량동 어귀에서 청량사까지는 시멘트 바닥이다. 거리로 50분 소요됐다. 청량사는 해인사의 암자에 속한다. 2011년 봄 산행 때 다녀간 기억을 떠올리며 절 입구의 해우소에서 곧장 숲속으로 잠입하였다.
청량사에서 전망대까지의 계곡 길은 40분 거리. 전망대는 제 역할을 상실했다. 조망을 해친 박무가 주변 산을 통째로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무가 깔려있는 높은 산에 오르다보면 조망은 떨어지지만 군데군데 솟아있는 바위 틈사이로 분재 크기만 한 소나무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여기가 도솔천이 아닌가도 생각하게 된다.
재미없는 산행이 됐어요! 그나 정상엔 다 왔는가요? 후미의 신입회원이 숨을 할딱이며 궁금해 했다. 당 멀었어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경험자의 말은 진실했다. 정상은 승강을 반복해 50분 뒤에 닿을 수 있었다.
급경사를 이룬 철 계단이 많았다. 계단이 있어서 고맙단 사람과 귀찮다는 사람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험준한 산일수록 산객들에게 이렇듯 문답을 구하게 한다. 해인사는 연중 양기가 가장 강하다는 음력 5월 5일에 남산제일봉의 화기를 누르고 바닷물로 불기운을 잡는다는 뜻으로 소금단지를 묻는 행사를 몇 해 전부터 해오고 있다. 재난을 막기 위함이라 했다.
정상은 실안개 사이로 가랑비가 날렸다. 구월의 끝자락에서 차가운 기운이 일어났다. 하산을 서둘렀다. 하산 길에서 B코스 일행 일부와 마주쳤다. 역으로 정상을 넘어 갈 계획이라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가야산소리길로 갔어야 했는데 갑작스런 만남으로 반갑긴 하였지만 갈 길이 넉넉하지 못해 일행을 웃음으로 올려 보내고 치인주차장 이정표를 따라가 해인사공용터미널로 하산하였다. 1시간 10분 소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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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 차에다 배낭을 벗어놓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가야산 소리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계곡을 끼고 있었다. 쉼 없이 물소리로 이어지는 계곡에서 서서히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 단풍잎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가족이나 연인들이 거닐면 좋겠다는 생각이 났다.
물 수자 수석을 왜 목숨 수자 수석으로 쓰기도 하는 줄 아십니까. 수석에도 생명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 이런 계곡으로 탐석 행을 떠난 적도 많았지요. 토중석, 산수석 등을 수집 해다가 내가 직접 좌대를 깎아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지요. 송전선생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말씀하는 동안에, 조금 전 스님 한 분이 籠山亭(농산정)을 맴돌더니 계곡으로 내려가 스님 키만 큼 솟은 바위를 마주하고 있었다. 시공을 떠나 고운 선생의 정취를 느낀 중일까. 정자 건너편에 석벽이 있고 거기에 고운의 칠언절구 둔세시(遁世詩)가 새겨져있다는데 스님은 그 시를 찾아 지금 읽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농산도 시의 한 구절에서 빌었다고 했다.
인간이 보잘 것 없는 돌에 생명을 있게 한 것과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 위에서 계곡 주변의 풍광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말로 다 옮겨 담을 수는 없다.
가야산소리길은 느린 걸음으로 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2016.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