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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31-36(46)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2024. 3. 24
2000년에 밀리니엄 열풍이 불어 올 때에 개봉된 오래된<그린 마일 The Green Mile>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1930년대 미국 교도소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인데, 깊은 감동을 주는 영화입니다. 폴 행크스가 주인공으로 나온 <폴>은 교도소 간수들의 책임자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형언도를 받은 사형수들을 전기의자가 놓여있는 사형장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영화제목 ‘그린 마일’의 뜻은 ‘푸른 길’이라는 뜻입니다. 언뜻 보면 파란 잔디가 바닥에 깔려져 있는 아름다운 길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 그린마일(푸른 길)이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영화에서는 교도소 안에서 푸른 잔디가 깔려져 있는 길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교도소에서 그린마일이라 부르는 말은 사형수가 사형을 언도 받기 위하여 걸어가는 길을 <그린 마일>이라 부릅니다. 초록색 잔디가 깔린 길도 아닌데도, 그린마일이라 불리는 바닥에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초록색의 길을 지나가면, 그 끝에 사형장이 있습니다.
사형수의 나이가 현제 얼마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린 마일>은 사형수가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걸어가는 마지막 길입니다.
어느 날 존 커피라는 사형수가 폴이 관리하는 교도소로 이송되어 옵니다. 산만한 덩치를 가진 흑인으로서 쌍둥이 여자 아이를 살해한 잔인한 살인범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린여자아이를 잔인하게 죽인 살인범이지만, 폴은 이 덩치 큰 사형수를 통해서 진기한 일을 여럿 겪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사형수가 진짜 살인범이 아니라 흑인이라서 억울한 누명을 쓴 것으로 파악합니다. 하지만 폴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존 커피에게 사형이 집행됩니다.
정말로 잔인한 죄를 짓고서 사형언도를 받는 사형수도 그린 마일을 걸어서 사형장으로 들어 갑니다. 존 커피처럼 생긴 인상이 험하고 외형적인 모습 때문에 억울하게 사형수가 되어 그린 마일을 걸어서 사형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사형수들은 그린 마일이라는 좁은 통로를 통해 세상의 걸음을 끝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그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우리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길도 다 이와 같은 길이 아닌가?’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생이란 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어떤 길은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함으로 걸어갈 때도 있었고, 어떤 길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 다르게 원하지 않는 결말을 맺게 하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모습으로 길을 걷는 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마지막 길, <나의 그린 마일>을 다 걷고 난 뒤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걸어가셨던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전도를 위하여 수많은 길을 걸어 다니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로 많은 길을 걸어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이 먼 여정의 끝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 가셨습니다. 골고다로 올라가는 길, 그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가 예수님에게는 그린 마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행하는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걸어가셨던 길을 다시 걸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분은 나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님이 걸어가셨던 길을, 내가 편하게 걸어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걸어 올라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맨발로 걸어가던, 두 발로 서서 걸어가던,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가던지, 무릎으로 가는 길이든지,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를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겪으셨던 고난과 슬픔을 함께 겪는 마음으로 걷는 길이 바로 순례의 길입니다.
성지순례 가서 내가 잠깐 지고 가는 십자가는 곧 내려 놓을 수 있습니다. 잠시 메는 고통이 있지만, 금방 십자가를 벗어 놓고 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멈추지 아니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이 번 주간은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주간의 한 주간을 주를 위해 어떤 길을 걸어 갈 것인지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짓는 길이 아니라, 힘들더라도 예수님이 원하는 믿음과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마 7:13-14절을 보십시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 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문만 넓고 좁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길 또한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습니다. 걸어가기 힘든 좁은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반면, 활개치고 다니기 좋은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생명의 길, 영생의 길,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로 걸어가기를 소망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면서 예수 믿는 것도 소중한 것이지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올바른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33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최후의 만찬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이제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그러자 수제자인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마음으로 큰 목소리를 내어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에게 말하는 이 고백은 칭찬받아 마땅한 고백입니다.
한 목소리로 크게 따라 해 보십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멋진 고백이지요. 꼬투리 하나 잡을 수 없는 좋은 내용입니다. 베드로에게 이런 충실한 내용의 고백을 들었다면, 예수님은 당연히 베드로를 칭찬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칭찬하지 않고 도리어 베드로의 배신에 대해 말씀합니다.
34절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은 베드로더러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부렁하지 말라는 대답입니다.“너는 나를 결단코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내가 단언하건대, 너는 오늘밤이 지나기 전에 나를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던진 이 말은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게 만드는 말입니다.
수세자로서 칭찬 받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도리어 베드로의 배신에 대해 못을 박아 버립니다. 여러분이 베드로였다면 어떤 마음과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마도 큰 실망을 하였을 것입니다.
젊은 청춘 남녀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기야!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지. 나는 자기만 쳐다보고, 자기만 생각하면서 무지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줘”라고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고백을 받은 남자가“웃기는 소리 그만 해”라고 일언지하에 면박을 주면서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추정하건대 대판 큰 싸움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그 커플은 곧 깨어지는 슬픔을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에 대해 냉담한 표현으로, “오늘 밤 지나기 전에 너가 나를 3번이나 부인할거야”라고 대답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런 연인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자신의 고백이 진실 되지 못하고, 엉터리라고 말씀하는 예수님에 대해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3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예수님과 함께 죽는다고 말합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 내 목이 달아난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 베드로에 이 우렁찬 고백에 대해 다른 제자들도 간이 동조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결국 베드로의 이 사랑 고백은 어떻게 되었나요? 100% 틀림없이 실천되었나요? 아니면 순전히 허풍이요 거짓말인가요? 안타깝게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이 아름다운 고백은 허풍이요,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향한 고백은 진실해야 합니다. 허풍이요 거짓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 한마디를 하더라도, 내가 목숨 걸고 지킬 수 있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내 신앙고백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940년대 일제 강점기 시대에 한국교회는 엄청난 수난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신사참배문제 때문에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임을 당하고, 모진 고난을 받던 시기입니다.
이 와중에 삼척군 북평읍 천곡감리교회 최인규권사도 고난을 당합니다. 일본경찰은 온갖 회유와 고문을 가했지만, 40세에 예수 믿어 늦깍이 신자인 최권사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경찰서장은 마지막 수단으로 최권사에세 <똥지게>를 지게하고, 가슴에는 “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최인규이다”라는 팻말을 붙여 이 거리 저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멸시와 모욕을 줍니다.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최권사의 친구였던 차국성이란 전도사가 경찰서장을 찾아가 “최인규는 원래 정신병자였으니 용서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차전도사의 청원서를 본 일본 경찰서장은 차전도사를 불러 놓고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으라. 최인규가 미친 것이 아니라, 내가 보니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로 핀잔을 줍니다. 믿음을 저버리고, 신앙을 내팽게친 체 일신의 영달을 도모한 차전도사에 대한, 일본경찰서장이 던지는 충고의 말입니다. 한국교회사에 나오는 박해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들이 듣고 감탄하는 제 아무리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라도, 지켜지지 못하는 고백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랬습니다. 우리 덕민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지키고 실행하는 신앙고백을 드리는 성도가 되길 축원 드립니다. 특히 이번 고난 주난 특별 새벽기도회를 맞이하여, 기도로 하나님에게 다가서고,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 하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기도로 준비합시다.
예수님은 어떻게 다가오는 고난을 준비하고 대비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 고난을 오로지 기도로 준비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는 예수님입니다.
36절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특히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이라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따로 나가서 자신만의 기도공간을 만들어 거기서 기도에 전념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모습이 이어집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는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목숨을 걸고 드렸던 기도였습니다. 이런 전심전력하는 기도의 모습을 보였던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과 달리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제자들은 세상 아랑곳 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가서 모진 고난을 겪은 후, 십자가 사형이 주어진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기에 기도에 전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에 몰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 번이나 찾아와 깨울 동안 계속하여 육신의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내 몸이 피곤하면 잠을 자야 합니다. 밤에 푹 잠을 잘 자야만,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 낮에 활동적으로 일 할 수 있습니다. 내 육신의 잠은 자야 하지만, 영혼의 잠은 자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잠들어 버리면 바로 사탄의 올무에 빠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드리고, 내가 드린 신앙고백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애를 쓰는 성도라면, 하나님에게 당연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내 힘과 내 의지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 안 됩니다.
종교개혁가요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요한 칼빈>은 “기도하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하였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 말입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당연히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지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오늘 부활주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기도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은 죄라는 칼빈의 말처럼 이번 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새벽마다 나와 기도하시고, 집에서 기도하시고, 직장에서 기도하시고, 내 모든 시간 속에서 기도의 끈을 놓치 않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미국 커네티컷 작은 시골 마을에 <실비아 마리>라는 소녀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믿은지 얼마 되지 않아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집안 침대에 누워 바깥출입을 전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병상을 방문한 목사님은 “소녀에게 병상에서나마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을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데, 많은 마을 사람들이 교회를 찾게 되었고, 작은 시골교회는 큰 부흥을 하게 됩니다. 소녀는 여전히 병상에 누워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주일이면 교회에 갔다 온 부모님에게서 누가 교회에 출석하였다는 이야기만 듣습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난 후, 소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아이가 죽고 난 뒤에 침대를 정리하던 부모님은 이상한 종이 한 장을 발견합니다. 소녀의 배개 밑에서 56명의 이름이 나란히 기록된 종이가 발견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아이는 병상에서 마을에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56명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명단을 적어서 침상에서 날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이름 앞에는 빨간 십자가 표시를 해 놓았는데,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응답받고, 그 분이 교회에 출석하였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표시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는 죽으면서 56명의 어른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하나님에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기도로 신앙고백을 실천하고, 기도로 고난주간을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