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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
동서양 시의 전통과 흐름
2. 서양의 시학
서양의 본격적 시론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가 처음 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양에서 문학을 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동양에서 사서삼경과 불서를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시학』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비극론이지만 모든 문학적 논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정설은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강의 목적으로 저술되었는데, 1부 「비극론」과 2부 「희극론」이 있었으나, 「희극론」은 웃음을 두려워하는 자의 손에 의해 없어졌다고 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면서 감정의 배설에 의한 정화(카타르시스)를 성취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희극은 우스꽝스러운 것의 미를 불러 일으켜 어떻게 격정의 정화에 도달하는지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금서를 둘러싼 살인사건과 이를 풀어내는 윌리엄 수도사의 지적 게임인데, 이 소설의 모티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모든 주제를 생물학적 관점에서 관찰하는 버릇을 가졌고 백과사전처럼 박식하였습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시학』에서 구성(Plot)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희극도 그렇지만, 서사시와 극시, 디튜람(찬가) 시, 그리고 많은 관악곡과 현악곡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방의 양식이다.”⁵⁾라고 하여 모든 예술형태를 모방양식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또 “시는 율어에 의한 인생의 모방이다.”라며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모방론적 관점의 시학을 확립했습니다. 이 정의는 서양 문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전주의와 사실주의의 핵심적 문학관이 되어왔습니다. 모방론적 관점은 시를 현실과 인생의 모방, 반영, 재현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특별한 체험이나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생활일상을 사진기와 같이 가능한 한 세밀화하여 사실적으로 그려낸다고 보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본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방은 인간과 자연의 보편적인 양상이나 법칙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의 진리나 본질은 자연과 인간의 삶 자체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자연의 변화나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구성도 자연이나 인생의 보편적인 원리와 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방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국가』에서 시가 사물의 외형을 묘사하기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시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순수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한 사물을 시로 모방하여 표현하는 것은, 모방품인 시가 진리로부터 3단계 멀어지는 것으로 배척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가짜로 그려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시인은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닌 모방본능을 잘 파악하여, 이러한 인간의 모방본능이야말로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여 주는 중요한 속성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현실의 모방이라든가 반영, 재현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현대 사실주의 문학은 여기에 계보를 대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사회학과 관련이 깊으며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⁶⁾
표현론적 관점의 시관은 낭만주의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워즈워스와 콜리지는 1798년 『서정가요집』 초판, 1800년에 재판을 냈는데, 거기에 실린 「서문」이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1802년에는 시적 용어에 관한 논문을 하나 더 붙였는데, 당시 시단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혁신적인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조화와 균형, 이성과 규범을 강조하던 고전주의를 극복하고자 이성보다는 감성과 의지를 강조하고 감상과 본능, 자연, 개성과 자아를 중시하는 낭만주의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며 변화와 상상을 중심으로 무한과 절대를 동경하였습니다.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로다.”라고 주창한 워즈워스는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에는 구별이 없으며, 농민이나 천민도 시의 제재로 가져올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의 소재와 언어를 일치시켜 종래의 기교에 치우친 문학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시가 무지개」입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지금 어른이 돼서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에 대한 경외로 이어질 수 있기를
해즐릿은 “시는 상상과 정열의 언어이다.”(『영국시인론』)라고 하고, 셀리는 “시는 가장 행복한 심성의 최고의 열락의 순간을 표현한 기록이다.”라고 했으며, 키츠는 “대중을 염두에 두고 시를 쓴 적이 없다.”하고, 밀은 “모든 시는 독백의 성격을 가졌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시가 자연스러운 상상과 정열,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로, 열락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의 연장으로 봅니다.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자들처럼 감각과 정서와 상상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감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사물을 그대로 즐기지 않고 그것을 희미하게 암시(상징)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보들레르입니다. 그는 “상상력은 인간의 기능 가운데 여왕”이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뱃사공들은 장난삼아서
크낙한 바다의 새, 신천옹을 잡으나
깊은 바다에 미끄러져 가는 배를 뒤쫓는
이 새는 나그네의 한가로운 벗이라.
갑판 위에 한번 몸이 놓여지면
이 창공의 왕은 서투르고 수줍어
가엽게도 그 크고 하얀 날개를
마치 옆구리의 노처럼 질질 끈다.
날개 돋친 이 길손, 얼마나 어색하고 기죽었는가!
멋지던 모습 어디 가고, 이리 우습고 초라한가
어떤 이는 파이프로 그 부리를 지지고
어떤 이는 절뚝절뚝 날지 못하는 불구자 흉내를 낸다.
시인 또한 이 구름의 왕자와 비슷한 존재,
폭풍 속을 넘나들고 포수를 비웃지만
땅 위에 추방되면 놀리는 함성 속에
그 큰 날개는 오히려 걸음에 방해가 된다.
보들레르, 「신천옹」 전문
이 시는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처세술이 부족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는 시인을 신천옹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창공에서는 왕자이지만 지상에서는 오히려 거대한 날개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새는 조롱을 받는 예술가의 처지를 상징합니다.
1910년대 흄과 파운드의 고전주의 시론이 모체가 되어, 심상(이미지)을 표현기법의 중요한 항목으로 삼아 일어난 문예운동이 있었으니 심상주의 운동입니다.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흄은 휴머니즘을 비판한 고 낭만주의를 반대하여 고전주의의 부흥을 도모하였습니다. 흄은 “시에서 지성을 중시하고 객관성을 강조하며, 명료하고 견고한 심상”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낭만주의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눈물이 넘치는 흐릿하고 ‘축축한’(damp) 시가 아니라 대상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묘사하는 ‘메마른 견고함’의 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낭만주의 시가 아름답고 슬프다로 서술했다면, 심상주의 시는 간결하고 뚜렷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흄은 시의 3대 목표를 정확하고 정밀하고 명확한 진술이라면서, 이를 위해 견고한 심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시어도 이러한 심상 창출을 위해 구체적인 언어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1912년 파운드가 편집한 시화집 『Some Imagist Poet』에서 심상주의자(이미지스트)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고, 첫 시집 반발이 심상주의 운동의 첫 산물이 되었습니다. 1915년 로웰이 주재한 『심상주의 시인선집』에서 심상주의 6개 강령이 채택되었는데, 6개 강령은 정확하고 일상적인 언어 사용, 새로운 감정에 맞는 새로운 운율, 자유로운 재제의 선택, 구체적이고 정확한 표현, 견고하고 명확한 시 창작, 대상 집중 등입니다. 이러한 운동은 1930년대 한국에 수용되어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등에 의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문학비평용어사전. 하』, 646~649쪽 참조)
1924년 브르통과 수포는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우리 친구들에게 전하길 갈망하는 새로운 표현형식에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고, 자동기록의 방법을 이론의 기초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927년에는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이 운동이 상상력, 꿈, 환상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신봉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들 시의 특징은 관계가 없는 심상들을 난폭하게 병치하여 “시민사회에 대한 깊은 회의”와 “물질화된 사회적 합리성”에 비판을 가하였습니다.
엘리엇과 리처즈의 평론 방법에 기원을 두고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까지 영미에서 주류로 떠오른 비평의 조류가 신비평입니다. 이들은 “시는 시로써 취급을 해야 된다”라며 텍스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문학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옹호하였습니다.
이들의 입장은 작가와 사회, 작가와 작품, 사회와 문학 등의 여러 관계에서 작품 자체의 가치와 의미를 최고 우위에 두었습니다. 작품 분석에 집중하면서 자세히 읽기를 강조하며 언어와 언어의 작용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들은 작품의 사회적 의미나 작가론적 경향의 해석보다 시어의 심상과 상징성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비평적 태도는 미국 강단에 급속히 퍼졌으며, 우리나라 역시 강단을 중심으로 신비평 이론을 열심히 수입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까지 우리나라 강단에서 지배적인 문학의 관점이 되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외국 이론의 수입을 통하여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을 폄하하는 오류를 빚기도 하였습니다. 현실을 수용하는 문학은 대개 문학성이 없어서 실패하기 쉽다는 편협한 생각을 낳게 했지요.
성장기를 미국에서 보내고 영국에서 여생을 마친 엘리엇(1888∼1965)은 평생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교양 있는 고전주의자였습니다. 20세기 영미시의 방향을 바꾼 그는 셰익스피어에서부터 보들레르까지 선배의 시들을 꼼꼼히 공부하여 기존의 시 형식과 문맥의 틀을 깨고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였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불모의 땅에서
라일락을 꽃피게 하고, 추억과
정욕을 뒤섞어,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어나게 한다.
겨울이 차라리 따뜻했었나니,
- 엘리엇, 「황무지」 부분
1922년에 발표된 이 시는 433행의 장시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황폐를 사람의 정신적인 황폐에 의해서 조명하려 하는 강렬한 심상에 의하여 구성하고 있습니다. 삶이 곧 죽음이라는 첫머리의 역설적 표현 외에는 유럽의 토착적 풍습이나 설화, 『성서』를 이해해야 시 전편의 이해가 가능합니다.
모방과 패러디, 인용의 대가인 엘리엇은 “예술의 형태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는 독자에게 사물, 상황, 사건을 통해 정서를 환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랑한다는 감정을 직접 진술하는 대신 이것을 환기하는 아름다운 장미 등의 심상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1960년대 초 예술소설, 고급소설의 죽음을 선언했던 미국의 문학평론가 레슬리 피들러는 중간문학에 대하여 말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합리성과 정치적 사실의 우위를 철저하게 신봉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신화와 열정, 감상과 환상이 지배하는 시대의 문학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⁷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담론의 축적은 학문을 빙자한 문학연구의 현실회피라는 문제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이규보가 말한 “의를 세우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짓는 것은 그 다음이다.”(設意最亂 綴辭次之)라고 하는 형식보다 내용을 중요시하는 동양사학과 대비되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문학관은 문학의 생산조건인 사회, 역사, 이념적 맥락과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문학을 하부구조(물적 토대)의 직접적 반영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대부분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문학이 계급, 권력, 이념, 물적 토대 등과 불가피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경제발전의 법칙과 예술의 발전 법칙이 꼭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보기도 합니다. 리얼리즘 이론을 체계화한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 루카치는 훌륭한 문학작품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객관현실의 필연적 자기운동법칙을 총체적으로 반영 혹은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학생산이론』의 저자인 마슈레 같은 사람은 문학을 현실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아닌 이념적 관계로 보았습니다. 문학은 이념 안에서 생산되지만 동시에 그것과 거리를 취할 뿐만 아니라 이념에 허구적 형식을 부여하여 허구적 모순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문학론은 한국에서 1970~80년대 본격적으로 형성된 민족문학과 민중문학 논쟁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문학비평용어사전 · 상』, 577 면 참조)
서양의 시학을 종합한다고 할 수 있는 멕시코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인 시인 옥타비아 파스(1914~1998)는 그의 시론집 『활과 리라』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시는 세련된 형식을 사용하여 말하는 기술이자 원시적 언어이다. 시는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한다. 시는 선대(先代)를 흉내 내는 것이며 실제의 모방이고 이데아의 모방에 대한 모방이다. 시는 광기이며 황홀경이고 로고스이다. 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놀이이고 노동이며 금욕적 행위이다. 시는 고백이다. 시는 본래적 경험이다. 시는 비전이며 음악이고 상징이다. 시는 아날로지이다. 시편은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 시는 교육이자 도덕이고 계시이며 춤이고 대화이며 독백이다.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 시는 순수하면서도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뿐이다.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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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역, 『시학』, 평민사, 1983, 34쪽,
6) 문학비평용어사전 · 상 611~612쪽 참조,
7) 월간 <기획회의>, 2009, 3, 25, 20쪽,
8) 옥타비아 파스, 김홍근·김은중 옮김, 『활과 리라, 솔, 1998, 13~14쪽.
2024. 2. 1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