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관찰
따뜻한 관찰이란 자기 내면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걸 말한다.
사실 이건 정말로 이려운 일이다. 내면에서는 순간순간 사악한 생각이나, 어두운 생각이나, 부끄러운 생각이나, 흉칙한 생각이나, 포악한 생각이나 감정 등이 불쑥불쑥 불거진다. 이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본다는 건 정말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면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할수록 절망감이 밀려오고 우울해진다. 내가 이 정도의 사람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이런 자신을 묵묵히 자신으로부터 분열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똑바로 눈을 치켜뜨고 따뜻하게 관찰하는 건 언감생신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서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건 종교나 명상 등을 통해 추악한 내면을 지우려고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기도해서 마음이 선하게 될 일이면 이 사람은 얄궂은 신을 믿는 거다. 어떻게 신은 기도해야 들어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들어주겠는가. 이건 정말로 신을 이상한 존재로 모독하는 일이다.
신의 존재를 추측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지만, 짧은 인간 소견으로 추측한다면, 선 뿐만 아니라 악도 신에게서 나온 걸로 보는 게 맞다. 그리고 신은 선과 악을 통합할 뿐만 아니라 이걸 초월한 걸로 이해해야 이 세상이 이해된다.
이런 논리로 보면, 신은 인간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과 우주 만물에 심어놓은 신적인 본성에 따라 세상이 움직인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생로병사는 신에게는 관심 밖이다. 믿든 안 믿든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병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지 않은가?
신의 은총을 말하는 건 결국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두려움을 에둘러 표현하는 걸로 보인다. 자기가 두려운 세상에서 산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의 은총이란 것도 자기가 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그것에 따라 신이 움직인다고 해석하기에 결국 신을 믿는 건 자기를 숭배하는 것이다. 잘 되고 성공할 때는 신의 은총이라 하고 실패하고 잘못됐을 때는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에 따뜻한 관찰은 어떤 상황이든 자기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적인 삶이요 수행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