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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해주세요
이 경 숙
남편이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매년 하지만 약식으로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싫다는 걸 우겨서 종합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보호자와 같이 오라는 전화를 받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평소에 늘 친절하던 의사는 그날도 나직한 말로 그러나 최대한 친절하게, 위암이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초기라서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하는데, 암이라는 소리에 놀라 그날부터 전국의 명의를 검색하여 큰 병원으로 가서 다시 검사도 하고 수술도 하고 싶은 마음에 아산병원을 가게 되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다. 그러나 일주일 만에 퇴원한 뒤로 한 달, 3개월, 6개월 단위로 추적검사는 끝없이 길었다. 남편이 환자다 보니 내가 운전을 해야 하는 데 힘이 들고, 평소에 같이 어딜 가도 운전을 맡기지 못하는 남편의 성격 탓에 우리 부부는 유성에서 동서울 가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틀 전부터 금식해야 하는 날도 있곤 해서 주로 아침 일찍 예매해놓고 갈 때가 많았다. 때로는 이른 검사 시간으로 새벽 첫차를 타는 일도 있었다. 20분 간격으로 있는 아침 버스는 며칠 전부터 예약해 놓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승객이 늘 만원이었다. 처음에는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생각했는데, 일 년 정도 병원에 다니며 우연히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아니고 대부분 노년의 부부들이 많았다. 그들은 같은 병원의 검사실이나 휴게실에서도 만났다. 함께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가족이나 지인들과의 통화내용을 엿들으며 우리 부부처럼 대부분 승객이 서울의 큰 병원에 가기 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아프면 아내는 보호자로, 환자 아내를 둔 남편은 그 보호자로, 꼭 부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처럼 마음의 기둥에 가는 실오라기라도 보태고 싶은 심정들이 되어 함께 가는 것이다. 버스의 앞뒤에 앉아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들으면서, 화장실에서 검사 결과를 가족에게 전하는 전화 통화에서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한 사이는 아니지만, 병명도 추측하게 되고 증상의 정도도 알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터미널에 내리면 서울에 사는 장성한 자식들이 병원에 동행하기 위해 나와서 기다리는 사람도, 셔틀버스를 타러 가는 사람도 모두 줄지어 병원으로 향한다. 그들은 지방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서울의 유명 의사를 만나서 생사의 절박함을 의지하고픈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얼굴에는 어느 사람도 명랑할 수가 없는 표정들이었다.
지난날, 나에게 터미널은 명절 휴가 때나 가는 곳이었다. 그때의 터미널은 나에게 고향 집에 가는 즐거운 날이거나 여행을 가는 설레는 장소였다. 차가 많지 않던 시절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기다려도 어딘가로 떠난다는 설렘으로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고, 혼자 가는 여행길도 마냥 행복했었다. 그러나 지금 터미널의 다른 풍경을 바라보는 나도, 남편도 말은 안 했지만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결과가 나온 날은 발걸음이 가볍고 검사 끝나고 먹는 밥맛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한 끼 식사조차도 하고 싶지 않은 생존을 위한 음식에 불과한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공부해서 받을 수 있는 성적표라면 열심히 공부라도 하련만 뜻대로 되지 않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검사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몸보다도 감정의 피로도가 더 높았다. 그러기를 5년, 남편이 완치라는 성적표를 받아드는 날 우리 부부는 동서울 터미널의 행렬에서 졸업했다. 남편이 수술을 받던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남편의 친한 동료 직원도 같은 병원에서 같은 수술을 받고 동병상련 서로 위로하면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돌연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함께 투병 중이던 우리 가족은 더욱 남다른 충격을 겪기도 하였다. 환자인 남편은 후배를 떠나보내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건강한 다른 동료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분이 떠나시고 다시 가는 병원에서 유난히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남편의 동료분이 황망히 떠나시고 난 뒤, 다시 가는 동서울행 버스에서 문득 삶의 경로를 생각하게 되었다. 정년을 일 년 남겨둔 남편은 지금 잠시 직장이 아닌 병원으로 경로를 이탈하여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날엔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경로 이탈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동서울로 가는 버스에는 누구는 제 자리로 돌아오고 누구는 그 행렬에서 영원히 경로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새벽 버스에 몸을 싣는다. 네비게이션을 켜고 운전하다 다른 길로 들어서면 친절하게 경로를 이탈했음을 알려주고, 어디쯤에서 유턴을 하든지 우회하는 도로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 제 자리를 찾아가는 길이 조금 더디더라도 지금 아픈 많은 환자가 다시 제 경로를 찾았을 때는 꼭 꽃길이길 기원해본다.
지금도 이른 새벽 동서울 터미널행 버스를 보면 그 안의 승객 중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늘도 병원 행렬에 몸을 실었을까가 먼저 생각난다. 아픈 사람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길 기원하며 버스에 부적처럼 커다란 밴드를 붙여주고 싶다. 그들이 모두 행복 터미널행으로 갈아타게 되길 빌며 본다.
모두 모두 건강했던 삶으로 꼭 유턴해주세요.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밭문학 작품상(2009),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asysook@hanmail.net
마음의 고향
진 재 훈
며칠 전 서천 수산물 특화시장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상가 전체를 다 태웠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그곳은 내가 직장생활 하면서 집을 떠나 전보 발령받아 처음으로 객지 생활을 하던 곳이라 많이 놀랍기도 하고 안타까움도 많았다. 생업으로 장사를 하던 많은 상인들의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화마에 휩쓸려 사라진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화재 진압 장면을 보면서 지인들과 희리산 휴양림 등산 후 술 한잔하고, 또 가족들도 놀러 와 싱싱한 해산물을 맛있게 먹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추억의 장소가 사라지게 되는 걸 보며 불이 얼마나 무섭고, 또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아 가는지 실감했다.
나의 첫 객지 생활은 고등학교 입학으로 고향을 떠나, 대전에서 생활한 것이 처음이다. 그 후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잡아 결혼하여 여기저기 둥지를 틀며 살아왔다. 그중 서천에 더 애착이 가고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다른 어느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색다른 추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에서는 주기적으로 년 말만 되면 순환 전보 문제로 직장 분위기가 항상 뒤숭숭했다. 한곳에 오래 근무한 직원은 대전에서 먼 지방으로 발령 나는 것이 전례가 되었기에 다들 좌불안석이었다. 나도 한 곳에서 오래 근무한 터라 늘 걱정이 많았지만, 용케 매년 고비를 넘겨 왔는데 2009년 말, 인사 태풍의 회오리바람은 비켜 갈 수가 없었다. 첫 직장 임용 후 대전을 벗어나 발령받은 곳은 바로 서천이었다. 그 당시 서천은 대중교통 편도 좋지 않고 시골 오지 느낌이 들어 무척 낯선 곳이었다. 더구나 외지에서 발령받은 사람이 많다 보니 회사 사택이 턱없이 모자라 개개인이 직접 본인 숙소를 구해야만 했다. 농어촌 중소도시다 보니 새로 지은 원룸 같은 깨끗한 숙박시설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 겨우겨우 군청 근처에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과거 여인숙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방이라 화장실 등 편의시설 자체가 좋지 않았다. 집을 떠나 한 번도 자취생활을 해보지 않은 터라 내심 불안했는지 아내가 한걸음에 달려와 기본적인 주방 기구 등 세간을 장만해서 이건 이렇게 사용하고 저건 저렇게 해서 끼니를 해결하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서천을 떠났다.
서천에서의 첫날 밤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방음이 되지 않아 옆 방에서 나는 생활 소음과 건물 곳곳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렇게 서너 달을 보내고 조금씩 객지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직장에서 처음으로 봄맞이 체육행사를 하게 되었다. 서천은 주변이 바닷가라 해안 근처 솔밭에서 족구 시합을 했다. 팀 대항으로 간단한 경기를 끝낸 뒤 술 한잔 곁들여 점심을 먹고 행사가 일찍 종료되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배도 부르고 모처럼 시간 여유가 있어 해 질 무렵, 근처 앞산에 올랐다. 그동안 주말마다 매번 집에 가느라 이사 온 지 몇 달이 지나도록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었다. 소화도 시킬 겸 운동 삼아 산책코스가 될 만한 곳을 찾아볼 셈이었다. 나지막한 산이라 쉽게 생각을 했는데 막상 올라보니 정상가는 길이 여러 갈래로 나 있어 헷갈렸다. 날도 점차 어둑어둑해져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참을 헤매다 서천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다다를 즈음, 산 중턱에서 농사일을 마치고 내려오시는 시골 어르신을 한 분 만났다. 길을 물어보던 중 연세가 75세로 아버님과 거의 동년배이시고, 자식 6남매는 모두 출가시켜 서울 대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대전에 큰딸, 아들이 살고 있는데 천안함 사건 때문에 나라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손주 둘이 육사, 해사 사관생도라 그런지 든든하다고 자랑까지 하셨다. 당신은 약주를 못 하심에도 인근 농막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술을 권하신다. 본래 친절하신 분인지, 아니면 자식이 사는 대전에서 왔다고 반가워서 그러시는지 무척 살갑게 대해 주셨다. 안주는 특별한 것이 없다며 밭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자라는 노란 유채꽃 줄기를 투박한 손으로 뚝 잘라 건네주셨다. 그런데 그 맛이 달착지근한 것이 체육행사에서의 술기운이 남아서인지 술안주로는 배도 부르지 않고 딱 안성맞춤이었다. 저녁노을을 등지고 하나둘씩 켜지는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며 생면부지의 촌노와 마주 앉아 술 한잔을 하니 마치 내가 신선놀음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술자리는 산 아래에 자리한 주인집에까지 이어지고, 술에 취하고 서천 인심에 취해 밤 깊어 가는 줄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술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데 낯선 초행길이라며,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길까지 안내해 주셨다. 숙소로 내려오는 길 양쪽에 핀 벚꽃과 더불어 나는 그날 서천의 정취에 흠뻑 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툭 던지시던 어르신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삶의 철학이 배인 한 마디가.
15년이 지난 지금도 유채꽃이 필 때만 되면 그날의 장면이 흑백 영화처럼 눈에 선하고 그 말씀 또한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이런 추억이 있기에 서천은 내 마음의 고향처럼 푸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과 동년배라 하셨는데 혹시 그 어르신이 아직도 살아 계신지도 궁금하다. 생존해 계신다면 한 번 찾아뵙고, 그때 다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라도 전해드리고 싶으나 마음뿐이다.
서천 수산물 특화시장의 화재를 보며 내 기억 깊숙이 잠들었던 마음속 고향을 떠올려 보며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더 나이 먹기 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실행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 옛날 인심 후한 술대접을 해 주신 어르신의 안녕을 빌어본다.
행복이란?
첫 번째 직장 은퇴 후 다시 시작한 두 번째 직장은 처음 사무직 때와는 다른 근무 패턴이다. 하루 혹은 이틀 근무지에서 지낸 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내 집의 편안함이 새삼스럽다. 퇴근 후 거실에 앉아 아내가 타 준 커피 한 잔을 들고 창밖을 보니 햇살 가득한 베란다 화분에는 어느새 피어나는 꽃들로 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가로수 연초록 잎새들이 햇살에 반짝이고, 느긋하고 평화로운 이 아침의 여유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과연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하기 위하여 애를 쓰지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나 또한 돌이켜 보면 행복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살아왔던 것 같다.
얼마 전 서재 정리를 하다 책꽂이 한켠 구석에서 ‘세오영(洗吾纓)’이라 적힌 색 바랜 대학노트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대학 생활 때 나의 괴롭고 답답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당시 생활에 대한 불만과 졸업 후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 찬 나를 채찍질하며 ‘머리의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로 새롭게 각오를 다지려는 과거의 나와 마주하니 그 시절의 나 자신이 안쓰럽고 가슴이 아련해진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 고시 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나 부모님과 가족의 기대와는 다르게 계속 낙방했다. 반면에 군에 가지 않고 계속 공부를 했던 동기들의 합격 소식에 더욱 마음이 초조해지고 불안했던 시기인 것 같다.
인생 60을 살고 보니 20대는 시야가 좁고, 생각은 편협해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했고 세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승자와 패자,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자 등 이분법적 사유 속에서 자신을 뒤처진 실패자의 모습으로 각인시켜 바라보니 나만 불행하고 우울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힘든 20대를 지나며 비록 고시는 포기했지만, 직장을 잡고 결혼도 해 안정적인 가정을 이룬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고 또 결혼을 통해서 가족이 생기니 삶의 방향성도 변한 듯하다. 젊어서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외부 시선에 초점이 맞춰져 명예, 승진, 부자 등 겉모습에만 치중했다면,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하든 내 주관적 만족에 더 의미를 부여하니 행복감이 훨씬 더 커진 것 같다.
퇴직을 앞둘 즈음 은퇴자를 위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이 지긋한 선배의 ‘노후 행복’에 관한 강의였다. 행복의 조건으로 ‘건처재우취(建妻財友取)’를 얘기했는데 건강, 처, 재물, 친구, 취미라는 내용이었다. 5개 중 4가지 요소는 이해가 됐지만 ‘배우자’에 관해서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나이 들어보니 행복을 위해서는 건강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듯하다.
엊그제 아내와 올해 처음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제천주변 명소 주말여행을 다녀왔다. 예전에 TV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갑자기 가보고 싶다 해서 마련한 여행이었다. 모처럼 집을 나서니 차창 밖 풍경이 연녹색 물감을 부은 수채화처럼 싱그럽다. 아내와 나는 자식 얘기, 주변 사람 건강 얘기, 그리고 하지 않던 정치 얘기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이 먹어서는 친구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뜻이 맞는 친구가 가족보다 더 가까웠을지라도 살아가면서 가치관이 변하고 달라지면 대화가 서먹서먹해지고 차츰 눈에서도 멀어진다. 그러나 가족은 다르다. 특히 가족 중 부부는 살면서 닮기 때문에 서로 생각하는 지향점이 같고 대화하기가 훨씬 편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부부들도 많은 듯하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아내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아내와 40여 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정치적 관심사와 여당과 야당의 호불호가 나와 비슷한 줄은 처음 알았다. 요즘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는데도 정치판이 시끄러우니 아내도 정치에 관심이 큰 것 같았다. 얼마나 그런 뉴스를 많이 봤는지 나랏일 보는 사람 중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평론가 못지않게 현실을 정확히 꽤 뚫고 있었다.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여행길이 지루하지 않다.
우리 부부는 여행 궁합이 잘 맞는 편이다. 내가 계획한 대로 가자고 하면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서 고맙다. 설령 조금 못마땅한 부분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여행을 끝내고 집에 와서 본인의 느낀 점을 조곤조곤 얘기하면 내가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다른 부부에 비해 갈등이 적은 편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또한 크고 거창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고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며 주변에 널린 행복을 찾아가는 마음의 눈을 갖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충북 청주 출생, 금강불교대 수료,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22), jhj43211@naver.com
산수연(傘壽宴)
오 월 석
거리를 걷다 보면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데 마음이 ‘찡’하다. 하늘과 같이 높고 건강하셨던 내 부모님도 언젠가는 저 어르신들처럼 되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토요일에 고향을 찾아가 부모님을 뵙고 있다. 그리고 매일 출근하면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는다. 농촌에서 일하다 보면 힘든 일을 자식들이 도와야 할 때가 있다. 산에 나무를 심는다거나, 고추 말뚝을 망치로 박거나, 기계톱으로 통나무를 잘라 땔감을 준비할 때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일한다. 최근에는 부모님의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것 같다. 아버지의 굴곡진 근육은 날이 갈수록 탄력을 잃고 있다. 내가 가끔씩 부모님의 고된 일을 돕는데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행복하다.
올해 2월 중순 경 아버지께서 전화를 주셨다. 주말에 모든 자식을 시골로 오라고 하셨다. 최근에 집에 크게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일로 ‘전체 집합’을 외치신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평소에 인자한 목소리로 자식들을 격려해 주시던 아버지여서 우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의 비장한 기개가 묻어 있었다.
2024년 2월 24일, 토요일에 공주집에 식구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어머니께서는 홍어 무침과 육개장을 맛있게 끓여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누나와 매형, 큰동생 식구들, 작은동생 식구들 그리고 우리 집 삼부자 모두 모이면 부모님 포함해서 총 16명이다. 오늘은 13명이 모였다. 전체 인원은 아니더라도 어른들은 모두 모였다. 우리는 말없이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아버지께서 거실 쇼파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아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을 모두 모이라고 한 것은 내가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부탁을 한 가지 하기 위해서다. 나는 부모님께서 농사짓고 함께 시골에 살자는 뜻에 따라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학교에 다니고 싶어도 못 다녔다. 80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를 위해 크게 돈을 쓴 것이 없다. 하지만 올해 80살 내 생일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모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그리고 며느리와 딸은 한복을 입고, 남자들은 양복을 갖춰 입어라. 손자들도 옷을 통일해서 입고, 그날만큼은 어른들이 다 드신 다음에 너희들이 식사했으면 좋겠다. 손자들은 어른들께 공손하게 술을 따라 드리기를 바란다. 이번 생일에 나를 위해 마지막으로 투자하는 것이니 너희들이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니? ”
모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나는 죄송한 마음이 너무 컸다. 직장 생활하며 빠듯하게 살다 보니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 한 번 가지 못했다. 아버지 회갑 때 온 가족이 제주도 여행 2박 3일간 것이 기억날 뿐 다른 이벤트는 없었던 것 같다. 누나가 막내 고모와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베트남 여행을 간 적이 있지만 나는 동행하지 못했었다. 매형, 누나, 동생들, 제수씨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네 아버지 팔순 잔치에 쓰려고 10년 동안 자식들, 조카들이 준 용돈을 장롱에다 차곡차곡 모은 돈이 500만 원이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들은 1인당 50만 원씩 새 옷 사 입고, 나머지 돈은 손자들 옷 사주고 한복 빌려 입는 데 보태 써라.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투자라고 생각하고 많이 신경 썼으면 좋겠다. ”
어머니께서는 말씀을 끝내고 미리 봉투에 담아 놓은 돈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엄숙한 분위기에 어머니의 봉투를 받았는데, 받고 나니 왠지 손이 부끄러웠다. 아버지 팔순 생신은 4월 24일이었다. 정확하게 두 달이라는 시간을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두 달이면 행사를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달력을 꺼내서 날짜를 확인한 뒤, 4월 20일 토요일로 날짜를 확정하고 각자 준비에 들어갔다. 누나와 큰동생은 식당 예약부터 전반적인 행사를 신경 쓰고, 제수씨들은 상차림과 한복 대여, 나는 행사 당일 인사말과 현수막을 준비하기로 했다. 누나는 조카들의 옷을 사주고 수건을 맞추는 등 행사를 준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행사 날 전문 밴드까지 불러서 행사의 흥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일주일 뒤에 나는 공주집에 가서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둘러앉아 노트를 꺼내서 초대할 사람들의 이름을 써보았다. 아버지의 친구들, 지인들, 친척들의 이름을 적으니 대략 120명 정도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행사 당일에 절대로 축의금을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우리의 생각도 부모님과 같았다. 아버지 팔순 잔치를 축하해주시러 오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행사장은 계룡산 갑사 인근에 있는 항아리가든으로 정했다. 식당 주인은 50대 여성분이었는데, 손수 식당 주변을 아름답게 꾸며 놓아 방문하는 손님들의 눈을 호강시켜 주고 있었다. 항아리와 예쁜 돌과 그리고 나무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배려해주신 두 달이라는 시간은 강물 흐르듯 흘러 드디어 팔순 잔치 날이 되었다.
행사 당일, 하늘이 무심하게도 아버지의 팔순 잔치를 시샘하듯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버지의 친구들, 지인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으셔서 비가 오면 참석률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되었다. 행사 준비는 모두 완벽하게 해 놓았는데 손님이 없으면 우리들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나는 먼저, 동네 어르신들을 마을회관에서 식당까지 모시고 오는 일을 맡았다. 마을에서 식당까지는 차로 20분 정도 소요되었고, 두 번 왕복해서 열 분을 모셔 왔다. 어떤 분들은 축의금을 안 받는다는 소식을 미리 알고 예쁜 화분과 화환을 행사장에 보내 주셨다. 나는 큰동생과 식당 서쪽 천장부터 바닥까지 현수막으로 유리문을 가렸다. 현수막에는 마을회관 사진과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집 사진을 배경으로 장식하고,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귀를 넣었다. 집안 지인의 동생인 밴드팀 사장이 가져온 커다란 스피커의 규모와 맑은 음질이 행사장을 더욱 빛나게 했다. 마이크 소리가 멀리까지 맑게 잘 전달되었다. 행사 시작 10분 전쯤 되니 사람들이 밀물처럼 식당으로 들어오셨다. 다행히 보슬비가 흩날리는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아버지의 지인들께서는 삼삼오오 자가용을 타고 행사장에 도착하셨다. 제수씨들이 정성 들여 장식해 놓은 팔순 잔치의 푸짐한 상차림을 앞에 두고 두 분이 나란히 앉으셨다. 상차림 뒤쪽 벽에는 ‘산수(傘壽)’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산수(傘壽)’라는 말은 팔순(八旬)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나이 80살 생일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식순에 의하여 마이크를 넘겨받아 아버지를 소개하는 인사말을 씩씩하게 읽어 내려갔다. 며칠 동안 고민하여 쓴 인사말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의 주인공이신 해정(海亭) 오세흥 선생님의 장남 오월석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부산, 서울, 목포, 덕산, 천안, 대전 등 전국 각지에서 아버지의 팔순 생신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간략하게 제 아버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해주 오씨 주산공파 28세손으로 1945년 음력 3월 16일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화은리 682-1번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0남매 중 다섯째이시며 오늘 2024년 4월 24일로 팔순)을 맞이하십니다. 오늘 건강하게 팔순을 맞이하신 것은 54년 전 아버지와 결혼하여 일편단심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고 맛있는 음식으로 남편을 보양해주신 제 사랑하는 어머니 남궁 용임 여사께서 계셨기에 가능했음을 밝혀두고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려서부터 조부모님, 부모님을 봉양하시며 고생하신 것을 이렇게 좋은 날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오늘 행사를 빌어 아버지에 대해 네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사랑을 베풀 줄 아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식구들과 만나고 헤어질 때면 항상 아메리카식으로 꼭 포옹해주십니다. 또한 제 지인들이 집에 찾아오면 꼭 한 명 한 명 일일이 악수해 주시면서 친근감을 표현해 주십니다. 친구, 지인분들과도 진솔한 정을 나눌 줄 아시는 분입니다. 또한, 마을 길에 예쁜 꽃을 심어 아름다운 마을로 만드는데 솔선수범하고 계십니다.
둘째, 주위 사람들이 인정해 주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현재 향포 점골마을 회장을 맡아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계시고, 2023년에는 공주시 계룡면 그라운드골프 회장에 취임하셔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동호인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공주시 계룡면 화은리 해주 오씨 종중(宗中)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시며 집안에서 인정받는 어른이십니다.
셋째, 끈기 있는 비범한 아버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99년도 봄에 2종 보통 자동차 운전면허증 시험에 도전하셨습니다. 13살부터 40년 동안 농사만 지으시다가 새벽에 일어나셔서 공부하시고 낮에 일하시면서 공부하셨습니다. 시험에 계속 떨어져 운전면허 원서 뒷면이 수입인지로 도배를 했어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도전하신 결과 그해 가을에 2종 보통 운전면허증을 취득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식구들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밤 농사, 콩 농사, 벼 농사, 깻잎 농사, 복숭아 과수원, 감 농사, 딸기 농사 등 농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너무 힘들어 포기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도 끈기가 있으면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아버지와의 경험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넷째, 여유를 즐기시는 아버지
조선시대의 유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는 애제자 황상이 있었습니다. 황상은 황무지를 개간해 모든 땅에 벼농사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다산 선생은 제자에게 “논 한 귀퉁이에 연못을 파 놓고 연꽃을 심어라. 평생 일 만하지 말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어 감상하며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산 선생을 모르시고 조언을 받지 않았음에도 운치 있는 정자를 지어놓고 농사일을 하시다가 쉬는 틈에 식구들, 친구들과 어울려 여유를 즐기며 살고 계십니다. 동호회 친구분들과 그라운드 골프대회, 한궁대회 등에 참가하시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트로트 가수 영탁의 ‘막걸리 한 잔’이 유행할 때 저는 아버지의 ‘맥주 한 잔’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일하시다가 아들들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격식을 따지지 않고 ‘맥주 한 잔’을 같이 마시면서 여유를 즐기고 계십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제가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아버지께서 문득 제게 말씀하시기를 “효자는 원래 부모가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씀이신가 갸우뚱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씀이셨습니다.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사시면 남들은 ‘자식들이 효도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팔순이 되어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저를 비롯한 모든 자식을 효자, 효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4년에 한 번 이사를 가곤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태어나서 80년 동안 한 자리에 둥지를 틀고 꼿꼿하게 마을을 지키시고, 자식들과 지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자식들을 대표하여 아버지께 경의를 표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해정 오세흥 님의 ‘해정’의 의미가 바다 해(海), 정자 정(亭)입니다. 오늘 아버지께서 바다같이 넓은 마음으로 이렇게 좋은 정자에 맛난 음식 준비해 놓았으니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고 참석하신 모든 분의 가정에 평화와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나의 인사말이 좀 길었던 것 같아 손님들께 죄송하기도 했지만, 80년이란 긴 세월을 한마을에서 태어나 살아오신 아버지의 행적과 흔적을 소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나의 인사에 이어서 오늘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분을 위해 행운권 추첨을 했다. 두루마리 휴지, 각 티슈, 청소기 등을 준비해서 나누어 드렸다. 오늘의 1등 상품은 최고의 선물인 청소기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제수씨들이 부모님께 선물상자를 드렸는데, 상자 뚜껑을 열자 풍선이 천장을 향해 올라가자 돈 줄기가 따라 올라가는 이벤트를 했다. 케이크 커팅식, 아버지 인사말, 그리고 가족 단체 사진 촬영까지 해서 1부 행사를 마무리했다. 일곱 명의 손자, 손녀들은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맞춰 입었는데, 등 뒤에 나이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상하를 구분했다. 손자, 손녀들은 할아버지의 부탁대로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열심히 손님들을 위해 음식과 음료를 날랐다.
2부 행사도 큰동생이 주도해서 진행했고 밴드와 함께 온 여가수의 화려한 의상과 훌륭한 노래, 춤 솜씨로 분위기를 최상으로 끌어 올렸다. 테이블에서 술을 드시던 어르신들과 친척들이 모두 무대로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고, 박수를 치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손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시면서 인사하셨다. 평소 과음을 하신 적이 없으셔서 오늘 너무 드실까 걱정했는데 술 양을 잘 조절하셔서 다행이었다. 친척들과 집안사람들은 대부분 한 곡 이상의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함과 동시에 건강을 기원하면서 부르는 노래임을 그들의 행복한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지인들과 친구들이 음식을 드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셨다.
중국 송나라 시대 유명한 정치가, 문학가, 시인이자 역사학자였던 구양수는 호가 취옹(醉翁, 술 취한 늙은이)이었다. 그는 말년에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하인과 지인들을 불러 마음 놓고 정자에서 쉬면서 노래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출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항상 술에 취해 있었기에 취옹(醉翁)이라는 호(號)를 갖고 있었는데, 사실은 취한 척하며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오늘 아버지께서는 구양수처럼 취옹이 되어 지인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며, 마이크 잡고 노래하는 것을 보며, 춤을 추는 것을 보며 행복해하고 계셨다.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은 위대한 당송 팔대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에게 빚진 것을 조금은 갚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다음 주쯤이면 계룡면에 해정 오세흥 선생의 팔순 잔치에 대해서 소문이 자자하게 퍼질 것이다. 어깨 펴고 목에 힘주고 다니실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기분이 좋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2017), moon5865@hanbat.ac.kr
꾀꼬리의 비밀
백 경 화
꾀꼬리가 대청호 주변에서 육추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찾아갔다. 그런데 꾀꼬리가 있다는 둥지 주변에 가보니 있어야 할 대포 카메라가 하나도 없다. 내가 장소를 잘못 알았나? 사진을 보니 새끼가 아직 떠날 때는 안되어 보이던데. 이곳이 아닌가? 하며 이쪽저쪽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사람도 꾀꼬리도 아무도 없다.
이 근방에 사는 지인한테 전화했다. “꾀꼬리가 있다는 곳에 와서 아무리 찾아도 꾀꼬리가 없어요.”하고 말하니 “아이고 언니! 어제 이소했어요!” 한다.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아침부터 두어 시간을 걸려 찾아왔는데 너무 서운해서 힘이 쏙 빠지고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그때 마침 샛노란 꾀꼬리 두 마리가 내 앞으로 날아와 작은 나무에 앉았다. “어머, 꾀꼬리가 왔네, 전화 끊어요.”하고 재빨리 삼각대 세우고 세팅을 서둘렀다. 그러나 촬영하려던 순간 꾀꼬리는 저쪽으로 쌩~ 날아가 버린다. 육추 장면은 못 찍었어도 어미라도 담을 욕심으로 쫓아다녔다. 그러나 꾀꼬리는 하늘 높이 날더니 야속하게도 저 멀리 금성마을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닭 쫓던 개처럼 한참을 우두거니 바라보다가 저 금성마을에 가면 유조와 어미들이 살고 있을까? 어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금성마을을 향해 걸어서 간다. 빤히 보이는 곳이지만 빙 돌아서 가려니 만만치 않은 먼 길이다. 땀이 등줄기에서 또는 얼굴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린다.
금성마을에 도착해서 노랑 꾀꼬리만 찾았다. 그러나 꾀꼬리는 보이지만 높게 날아다녀 사진은 담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빈손으로 터덜터덜 그냥 오는데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날 잘 아는 사진가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제 꾀꼬리 촬영하러 간다더니 잘 찍고 갔느냐고.
고생만 했던 이야기를 하며 꾀꼬리를 한번 가까이에서 보고 사진 좀 예쁘게 담아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그게 그렇게 소원이냐고 몇 번이나 물으셨다. 선생님은 내가 안 되어 보이는지 “내가 아끼는 장소가 있는데” 하시더니 혼자만 가서 소원을 풀고 오라고 장소를 알려 주셨다. 사진가들이 알고 몰려가면 새들이 오지 않으니 염려스러워서 하시는 말씀이셨다.
다음 날 바로 혼자 찾아갔다. 정말 있을까? 반신반의가 되지만 그 선생님은 실없는 분이 아니라서 믿고 설레는 가슴으로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갔다. 알려주신 대로 산길로 조금 올라가니 폐가가 있는 곳에 보리수나무가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가자마자 보이는 꾀꼬리, 두 마리의 꾀꼬리가 날아와서 보리수 열매를 따 먹으며 예쁜 모습을 취해 주었다. 와! 내가 그렇게 담고 싶었던 꾀꼬리가 내 앞에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가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꿈만 같다. 그렇게 촬영하기 힘들었던 꾀꼬리 두 마리가 내 바로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그런가 하면 직박구리, 물까치, 딱따구리 그 외 이름 모르는 새도 와서 새들의 낙원이었다. 비밀을 꼭 지켜야 한다는 선생님의 마음을 금방 알았다. 저렇게 평화로운 새들의 천국을 누구도 방해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외딴 산중의 폐가, 허술한 헛간에서 몸은 숨기고 처마 밑으로 렌즈만 내놓고 사진을 찍는다. 마당에는 풀이 우거지고 지저분한 헛간은 겨우 의자 하나 놓을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다. 새가 오지 않을 때는 금방 뱀이 나올까 봐 일부러 인기척을 하고 막대기로 옆에 있는 고무통을 두드리며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도 새들이 오면 무서움도 까맣게 잊고 몇 시간을 새들과 즐겁게 보냈다.
선생님과 약속한 비밀의 장소는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다. 평화스럽게 노는 새들을 보니 언제까지고 새들이 와서 마음 놓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비밀을 꼭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예쁜 꾀꼬리를 촬영하게 해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비밀은 잘 지키겠습니다.
오색딱따구리 유조의 슬픔
어제
엄마 아빠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징그럽고 무서운 괴물이 우리 집에 들어왔어요.
그 괴물은 우리 집에 들어와 단숨에 형을 집어삼켰어요
나머지 우리까지 잡아 삼키려고 덤벼드는데
사진가들한테 몰매 맞고 떨어져 도망쳤어요
엄마가 며칠 후면
우리 모두 밝은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고 하셨는데
우리 형 없어서 어떻게 해요
형이 너무 보고 싶고 불쌍해요
엄마 아빠는
끼니도 거르고 말도 없이 멍하니 계셔요
우리에게는 밖을 내다보지도 말라시며
문밖에서 지키고 내내 울고만 계셔요
세상은 누구나 살기 좋은 곳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슬픈 일이 어디 있어요
저만 배불리 잘 먹고 살겠다고
단란했던 남의 가정 파탄 내는 괴물들
이 세상에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문산 동고비와 곤줄박이의 육추가 끝나고 모두 이소하고 나서 대청호에 오색딱따구리가 둥지를 틀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이제 또 당분간 갈 곳이 생겨 마음이 부풀고 신이 났다.
우선 딱따구리의 아름다운 자태를 빨리 보고 싶고, 어느 곳에 둥지를 틀었는지 궁금하여 다음 날 찾아갔다.
상상했던 대로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오색딱따구리 한 쌍이 연신 새끼들의 먹이를 물고 와서 둥지로 쏙 들어가 먹이를 먹이고 새끼들의 배설물을 물고 나오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반갑다. 딱따구리야. 꼭 1년 만이구나.
그 후 며칠씩 걸러 두 번을 갔으나 새끼들은 아직 어려서 보지 못했다. 오늘은 날짜로 보아 새끼들의 얼굴이 나올 듯싶어 가려고 그곳에 자주 가는 지인한테 전화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린가? 딱따구리 집이 뱀의 습격을 받아 없다는 거다. 이럴 수가, 안타까워라. 한동안 딱따구리의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스러운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딱따구리 한 쌍의 지극정성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 일이 있던 다 다음 날 지인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어미들이 먹이를 물고 집에 들랑거리는 걸 보면 새끼가 있나 보라고. 해서 다음 날 찾아갔다. 뱀이 와서 시도하다가 실패했는지 아니면 한두 마리만 없어졌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미들은 집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한 마리씩 교대하면서 문 앞에서 지키다가 두 마리가 같이 집 앞에 있기도 했다. 번쩍이는 눈으로 이쪽저쪽 쳐다보며 몹시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 천적의 습격을 받은 것이 아직도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철저하게 지키는 모습이 역력했다.
날짜로 보아 새끼들이 날아갈 때가 되었는데도 새끼들은 아직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다. 어미들의 철통방어 속에 새끼들은 밖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후 늦게까지 촬영하는데 갑자기 어미새가 먹이를 물고 와서 새끼들을 끌어내는 몸짓을 한다. 그때 카메라 셔터를 짜르르 연타를 쳤다. 그 결과 새끼를 본 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딱따구리는 다음 날 세상 밖으로 날아갔으며 새끼를 본 사람은 그날 그 자리에 남아있던 나와 몇 사람뿐. 다음날 새끼들은 둥우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넓은 세상으로 네 활개를 펼치고 날아갔다.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 등,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펜 문학상 수상,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남편을 고자질합니다
김 정 자
결혼 10년 만에 주공 아파트 분양을 받아 잘살고 있다가, 시숙 어른의 보증으로 경매에 아파트는 넘어가고 25년을 월세방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 운 좋게 재건축 아파트를 분양받게 되어 13월 10일 이사를 했다. 평생 꿈꿔 왔던 방 3개, 화장실 2개, 창 넓은 거실, 정말 이제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마냥 좋았다. 그런데 이사는 왔지만 좋다고 생각할 여유도 없이 복잡한 작동 방법에 머리가 아팠다. 관리사무소에다 전화해서 물어보면 컴퓨터와 전화로 접수하라는데 그것은 더 어려웠다.
일단 주방 수돗물도 손을 대면 자동으로 물이 나오는데, 어쩌다 보면 제대로 손을 못 대면 물이 나오지 않고 물을 잠글 때도 어찌 잘못해서 계속 물이 나오고, 고무장갑을 끼면 작동이 안 되니 나이 든 우리가 쓰기엔 너무 불편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원 스위치 작동 방법을 몰라 주방에 불을 켜려면 거실 불이 켜지고, 어쩌다 보면 전체 불을 켰다가 끄기도 하고,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거기다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남편의 잔소리였다. “주방에 물기가 있다. 발걸음 소리도 조용하게 뒤발을 들고 걸어라. 음식 하는데 도마소리가 크고 김칫국물이 흘러내린다. TV 소리가 크다.” 등등. 그리고 거실에 앉아 리모컨을 독차지하며 잔소리를 한다.
내가 글이라서 다 고자질을 할 수 없지만, 개인택시를 하는 남편은 이사 온 후로 며칠 일도 나가지 않고 무엇을 가르쳐 준다고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잔소리를 듣다가 하루를 보내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는데, 정신이 없어 양치질을 하는 순간 냄새가 이상해서 보니 세수하는 폼으로 했던 것이었다. 남편 잔소리에 정신이 없어 그런 거라고 싸움은 시작되고, 이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는 잔소리를 듣다가 빨래를 널러 가야 하는데, 건조대가 있는 문이 두 개인데 급하게 한 개만 열고 나가려다 유리문에 얼굴을 부딪쳐 아파하고 있는 그 상황에도 남편은 유리문부터 확인하고 조심하지 않았다고 잔소리를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어떠한 방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남편의 잔소리가 시작되면 더이상 못하게 전화를 받게끔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몇 번을 며느리와 아들 그리고 지인들께 문자를 해서 남편에게 전화하는 수법을 써 잔소리를 멈추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한번은 너무 잔소리가 심해서 휴대폰 컬러링 노래가 나오면 잔소리를 하다 말고 전화 온 줄 알고 얼른 전화를 받으러 가서 “여보세요 하다가 발신자가 없으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잔소리를 멈추기도 했다.
몇 번은 속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더는 통하지 않았다. 이사 온 후 2주가 지나고 나니 하나씩 작동법이 익숙해지고, 집안 정리를 해놓고 나니 이제 조금씩 안정이 되는 듯했다. 새집에 이사 오면서 가전제품과 가구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고 왔지만, 남편을 바꾸지 못하고 와서 미우나 고우나 남편 지인부터 초대해서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열무김치와 백김치를 담그려고 주방과 식탁은 김치 담글 재료로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남편이 없을 때 하려고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오늘따라 손님이 없다고 일찍 집에 온 남편의 잔소리는 또 시작되었다. 왜 김치를 저녁때, 그것도 주방에서 담그며 소금이 식탁에 널려있고 고춧가루가 식탁 의자에 묻었냐고 난리가 났다.
이사 오기 전 같으면 크게 싸울 수 있지만,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참았다. 그러고 이틀 후 손님들이 오신다는 날에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데, ”어, 이봐! 오늘 메뉴가 뭐지? 거, 누구는 닭볶음탕을 좋아하고, 요즘 주꾸미가 제철인데 주꾸미 샤브도 하고, 아 맞다! 도다리쑥국도 지금 먹어야 여름을 잘 이겨낸다네! 이왕 초대 했으니 잘 좀 먹게 차려봐!” 하면서 남편은 거실에 앉아 리모컨 작동만 하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손님을 초대하는 날이라 꾹 참고 이것저것 사서 무거운 것을 들고 집에 왔다. 그런데 남편은 쇼파에 앉아 “어 바닥에 흘리지 않게 잘 들고 와!”라고만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을 바라보고 당장 나가라고 하고 싶었다. 늘 같은 행동을 해 왔던 남편이지만 좋은 집으로 이사 오면 조금이라도 변할 줄 기대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더 열 받고 웃기지만 웃지 못하고 슬픈 하소연 문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시골에 사는 올케언니가 농사지은 참깨로 기름을 짜서 이사 선물이라고 큰 음료수병에 가득 채우고, 오빠가 산에 다니며 좋은 약제를 캐서 담근 술이라며 선물로 보내왔다. 술은 집들이할 때 마시게 하고, 참기름은 아까워서 아들 집에 반을 나누어 보내려고 냉장고 깊숙이 넣어 두었다.
저녁때가 되고 손님들이 와서 정신없이 주방에서 일하는데,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나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서 거실로 갔다. 순간, 세상에 이런 일이! 남편이 초대한 손님들께 시골에서 보내온 아주 좋은 술인데 몇 년 숙성돼서 보약처럼 마시라고 내놓은 것이 참기름병을 내 논 것이었다. 한 잔씩 따르는 동안 참기름 냄새가 났지만, 술이 좋아서 술에서 나는 냄새인 줄 알고 건배를 하고 한 모금씩 마시고 나서 술이 아니고 참기름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아끼고 아꼈던 참기름이지만 어차피 따라놓은 것을 어쩌겠냐고 마음을 다스리고 이것저것 준비한 나물 반찬에 넣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손님들은 맛있게 드시고 애써 준비한 음식들이 많이 남았는데, 문제는 또 나를 힘들게 하는 우리 남편이었다. “어, 이봐! 음식이 많이 남았으니까, 지금 몇 사람 더 부를 테니 음식 좀 다시 잘 챙겨봐! 그리고 이 참기름은 어차피 꺼내놓은 거니까, 작은 병에 넣어서 조금씩 가져가라고 하고 그 좋은 술도 얼른 꺼내!” 정말 이런 남편과 40년을 살면서 참고 웃어넘기고 살았지만 가끔은 헤어지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좁은 집에서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울 때마다 죽도록 미워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지금 넓은 새집에서 살고 보니 잘 참고 살았다는 생각에 감사하다. 미웠을 때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사랑받는 아내와 존경받는 엄마의 자리에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이사한 지도 한 달이 지나고 남편의 잔소리도 조금씩 줄어들고, 모든 작동 방법이 익숙해지고 나니 넓은 창 너머 푸른 잎이 보이고 마음이 편해졌다. 온기가 있고 따사한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옛 추억에 젖어 보니 옥탑방, 셋방에 살면서 어린 아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을 먹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이제 좋은 집에서 남편을 이해하며 참기름의 고소한 향기와 봄 햇살처럼 따듯한 생활을 즐기고 싶다.
책 속에 내가 있다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오후다. 딱히 내 방이라 할 것도 없지만 작은방 한쪽에 오래된 원목 책장이 있다. 오늘 같은 날 가을비에 젖어 책 한 권을 읽고 싶은 생각에 책장을 둘러보았다. 여러 장르의 책들이 있지만, 과연 ‘저 많은 책을 내가 다 읽었을까?’ 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이야 가끔씩 보내주신 선생님들의 책들로 책꽂이에 빼곡히 꽂혀 있지만, 아이들을 키울 때는 지인들끼리 서로 책을 돌려가며 읽었다.
어쩌다 책을 읽다 보면 남편은 퇴근하고 와서 저녁밥을 먹고 텔레비전 앞에서 한숨 쉬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런 남편을 보고 책을 덮다 보면 한숨 소리와 TV 소리가 둘이 대화하는 것보다 더 자주 들렸다. 가끔 책 읽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책을 펼치면 한 달 동안 지출 내용을 계산해야 하고, 그러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책을 놓고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잔이 비워질 때쯤, 머리가 조금 맑아지면 다시 방치된 책에 손을 뻗어 책을 펼쳐 보았는데 언제 읽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어 놓은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때 책 내용이 중요해서가 아니고 나를 읽고 있다는 생각에 물결 모양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을 것이다. 인생의 힌트는 책에 있지 않을까 하면서도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책장 속에 꽂아 놓은 것들이 먼지 묻은 채로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풍요 속에 빈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점심 후 별일 없으면 커피를 마시며 너른 창문 밖 세상을 내다본다. 단풍이 곱게 물들고 그 앞으로 규모가 작지도 않지만 높지 않은 건물이 펼쳐져 있다. 바로 창 앞길에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노란 버스 한 대가 서고 대여섯 살 아직 젖내가 물씬한 네댓이 버스에서 내려 제 엄마인 듯싶은 젊은 여자의 손을 잡고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내가 일을 했기에, 유치원 하원 시간에 아이 손을 잡고 집에 온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돌아보니 미안할 뿐이다. 작은 몸집에 둘러맨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다음날 다시 유지원에 보냈던 무심한 엄마였다.
젊었을 때 쓰지 못하고 읽지 못했던 글들을 조각조각 퍼즐 맞추듯 맞추어 보니, 맑은 하늘에 붉게 물들어 가는 가을과 함께 그리움으로 펼쳐진다. 책이 없어 읽지 못한 아픔과 아쉬움이 늘 마음 한군데 자리 잡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찾아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년 충북 옥천 지용 문학축제에 부스를 하나 제공 받아 ‘새 책 줄게 놀러 와’ 코너에서 책을 나누어 주는 행사에 참여했다. 가을이라기에는 너무 더운 9월이디. 기온이 한없이 치솟는 더위 속에 그늘 한 점 없는 행사장에서 책을 무료로 나누어 주는데 땀이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보람이 있었던 것은 많은 작가가 아끼는 책들을 제공해 주시고 행사장에 오셔서 직접 사인도 해주시면서 함께 책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여러 장르의 책 속에는 새벽을 깨우는 농부들의 굵은 땀방울이 있고, 평생 고생하며 살아온 엄마들의 고된 삶도 묻어 있다. 석양의 아름다움보다 행사장의 뜨거움이 강렬했던 사흘간의 축제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휘청거리는 그림자가 나에게 ‘수고했다!’고 한다.
도심 곳곳에는 가을 행사가 펼쳐지고 아직 붉은색은 이른 것 같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단풍들이 아름답다. 작은 가지 끝마다 붉은빛을 피우는 식물의 생명력에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런 풍경들은 내가 읽었던 책 속에서 보았던 것이지만, 그때는 아름답다는 생각을 못 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새싹이 나와서 무성한 푸른 잎으로 덮듯이, 우리 아이들도 이제는 나의 푸른 지붕의 그늘이 되어주고 있다. 이제야 안도의 숨이 쉬어지고, 젊을 때 사는 게 바빠서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나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무게를 내려놓은 듯하다.
인생의 무게를 안고 살아왔던 때와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삶이 읽지 못하고 밑줄을 그어 놓았던 책을 펼쳐 보니,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것들이 책 안에 있었다.
* 충남 금산 출생, 동서문학상(2010), 대전문협 올해의 작가상(2022), 수필집 『그랬구나』, 『새참』등, kim-qhfma@hanmail.net
기억의 재생
이 대 영
‘가족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만큼 가족의 정체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기존의 가족에 관한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가족은 자아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며, 개인 활동에 울타리 역할을 한다. 그러기에 가족은 늘 개인에 우선해왔다. 가족공동체 사회를 형성했던 동양 문화권에서 개인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전히 동남아시아인들은 가족이 외국인 노동자로 갈 때면, 구성원 모두가 공항까지 나와 배웅하는 장면을 흔히 본다. 또한 한국으로 시집온 여성이 친정을 방문할 때면 친척은 물론 이웃까지 찾아와 환영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그러나 이제 한국에서 그런 풍경은 찾아보기 힘든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다. 윤년, 윤달이 되면 조상 묘를 파하여 화장장으로 모시는 공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한식이나 추석 즈음에 계곡마다 울려 퍼지던 예초기 소리도 현저히 줄고 있다.
요즘, 나는 유튜브를 통해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1일까지 이어진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즐겨보고 있다. 이때 10만여 건이 접수되어 5만여 건이 방송되었으며, 그중 1만 189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무려 138일인 453시간 45분 동안 진행된 생방송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 유산에도 등재되었다. 당시 집집마다 TV를 켜놓고 시청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이산가족의 심정이었고, 그들과 재회의 기쁨을 함께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방송을 보며 똑같은 표정과 감동, 그리고 눈물을 읽는다.
헤어진 사연도 다양하며 살아온 환경도 기구하다, 생사를 모르다가 30여 년 만에 TV로 마주한 이들은 서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그들은 기억을 재생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고향과 가족의 이름을 확인한 후 눈물을 쏟아낸다. 북한은 물론, 만주, 일본에서 국내에 들어와 수년을 살다가 만난 이들은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을까? 가장 안타까운 일은 고아원에 어릴 때 맡겨져 기억을 재생할 수 없는 경우였다. 심증과 확증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 긴 세월의 여백을 메울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싫어하고 감추는 어릴 적 흉터가 가족을 찾는 중요한 증표가 되었다. 흉터마저 없을 때는 가족의 증표를 찾는데 필요한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KBS 이산가족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이다. 방송이 한창 진행 중이던 8월 중순, 입대를 며칠 앞두고 방송국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물론, 방송국뿐만 아니라 창고 같은 대학입시학원이 있던 갈월동 근처의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그곳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소나기처럼 지나가던 대학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 안양에서 용산을 오가며 무수히 당했던 불심검문 속에서 책가방을 내던지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를 다독이며 울타리가 되어준 것은 가족이었다. 나는 6남매의 장남으로서 책무를 저버릴 수 없었다. 대학에 입학한 나는 우울했던 기억을 모두 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입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안양의 옹색한 자취방과 용산역 일대였다. 그러나 무거운 기억은 골목골목마다 묻어 있어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 무엇에 끌린 듯, 나는 여의도행 버스에 몸을 싣고 KBS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찾은 KBS 광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발 딛고 다니기가 민망할 정도로 광장은 온통 가족을 찾는 종이로 도배되어 있었다. 벽은 물론 차량, 기둥에 이르기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광장 구석에 조석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조리기구와 침구를 싸놓고 가족의 인적 사항을 적은 간판을 목에 걸고 앉아 있는 모습은 가슴 뭉클한 광경이었다. 거지 중 상거지의 몰골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버리려던 모든 것을 다시 챙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공사판에 다니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서 기억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잊혀진 것을 재생하는 일이 불가하다는 것도 알았다.
유산 상속으로 가족 구성원 간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음을 본다. 또한 그로 인해 상속 분할에 유감을 갖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이들도 보게 된다. 요양원에 있는 부모의 진료비 부담에 등을 돌리는 자녀도 있고, 이웃보다 교감 없이 살아가는 형제자매도 많다. 이혼이나 이별이 느는 반면, 가족을 찾거나 선산을 찾는 시간은 줄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가족 해체에 따른 문화현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가족은 자신이 힘들고 낙담할 때 위로와 힘이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모든 이에게 40여 년 전, 온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다시 보라고 권한다. 거기에는 촌수를 벗어난 아저씨나 동향 사람을 만나도 부모를 만난 듯 부둥켜안는 뜨거운 가슴이 있다.
세상에 ‘혼자’라는 말보다 외롭고 쓸쓸한 단어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폭염으로 푹푹 찌는 한낮에도 나는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을 보며, 바보처럼 울고 또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