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 시절, 그 때를 아십니까
김 종 선
나의 빈방엔 나의 취미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장비가 어수선하게 널려져있다. 이방에 들어서서 한쪽 벽에 걸려있는 등산장비를 볼 때마다 30여 년의 나의 산행추억이 생각난다. 특히 골동품이 되어버린 장비를 지금의 장비와 비교해 보면 엄청난 변화와 격세지감 마저 느껴진다.간혹 후배들의 장비에 대한 투정에 “야 임마 우리들은 예전에 무엇도 없고 무엇도 없는 장비를 갖고도 다니고, 그것도 신주 모시듯 하면서 다녔어”하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의 산행 경험으로 근대 등반을 생각해 보면 장비의 발달과 함께 등반기술 또한 많은 발전을 해왔으나 최근 10∼20년 사이에는 등반기술보다 장비의 발달이 보다 빠르게 발달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특히 암/빙벽의 전문 등반에서는... 1970년 대학에 입학하여 친구들(장기활 회장을 비롯한 대학 친구들)과 처음으로 야영(2박 3일의 치악산 종주등반 - 그 당시는 학생 시위로 인하여 연중 행사로 휴교령이 발동될 때였다) 등반을 가기로 하였을 때였다. 11월 중순 초겨울, 통행금지 시간을 피해 12시전에 산 속에 들어서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장비는 발에는 운동화 또는 군화, 그리고 남대문표 크레타 정도였고 옷은 청바지, 군복, 또는 모가 조금 섞인 닉커복, 상의는 스웨터에 솜이 든 파커, 머리에는 스키용 털모자와 털실로 짠 방한모(바라클라) 정도였다. 등에 맨 배낭은 륙색과 어택배낭, 그 배낭 속에는 코펠과 군용반합 (후라이팬으로도 사용 가능한 것도 있음) 석유 버너와 알콜버너, 2인에 하나씩 군용 닭털 침낭, 두꺼운 천으로 되어 두장을 단추로 연결하여 사용하는 군용텐트, 고무 코팅된, 목만 나오는 군용 판쵸우의(비박 텐트로도 사용)를 넣고 마음 뿌듯하게 아무런 불안감 없이 산을 올랐다. 밤 11시경 신림역에서 상원사로 오르는 길목의 마지막 마을을 지나며 야영을 하려던 우리는 심야의 방문객에 놀라 짖는 개들 소리에 방문을 열고 내다 본 산촌의 인심에 잡혀(막무가내로 이렇게 추운 날씨에 산 속에서 자면 큰일 난다는) 첫날밤이 무산되기도 하였지만.... 언젠가 소백산을 오를 때 동네 꼬마들은 카시미론 솜을 넣은 파커를 보고 바람이 들어 있는 옷이라고 쑥덕거리기도 하였던 그 시절, 그 당시 다운파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운 파커는 원정을 다녀온 산악인이나 입는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옷뿐만 아니라 모든 외제 장비는 남대문의 전문 장비점에 어쩌다 하나씩 진열되었고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뜨이는 대로 팔려 나갈 때였다. 그러다 보니 원정등반이 아니더라도 외국에 나가 장비점만 들러 봐도 큰 자랑거리였다. 왠만한 원정등반은 사용하던 장비를 국내에서 되팔아 경비를 보충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한 장비가 지금은 어떠한가? 운동화, 군화, 발목이 천으로 된 정글화라면 더더욱 좋았던 그런 시절, 조금 형편이 좋아져서야 을지로 2가의 송림화점에서 크레타나 비브람을 맞추어 신던 날은 어떠한 등반도 해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후 몇몇 등산화 제조업체(RF. K2 등)가 생겨 등산화를 대량 생산하면서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업체의 경쟁이 품질 향상으로 이어졌고 요즘은 전문화 되어 수많은 유형의 등산화가 선보이고 있다. 특히 프라스틱 이중화와 릿지화의 출현, 방수 투습원단을 내장한 등산화, 밑창 재질의 발달과 몰딩의 발달로 용도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밑창을 부착시킨 등산화등 어떤것을 선택해야 할지 정신이 없을 정도다. 이제 적설기 등반시 텐트 속에서 또는 모닥불가에 앉아 등산화를 말리다 끈을 태우던 모습은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고의 등산복같이 느껴졌던 청바지와 군복이 지금은 어떠한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전 부터 등산교범에는 입지 말라고까지 하고 있으나 더러움 덜 타고 질긴 것이면 어떤것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가볍고 다기능의 원단이 개발되면서 용도에 맞게 전문화된 제품들이 일일이 체크할 수도 없이 많아졌다. 특히 고어텍스를 시점으로 수많은 방수, 투습의 원단이 발명되어 소비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가볍고 촉감 좋은 실크내복, 땀을 신속하게 흡수, 방출하는 내복, 가볍고 보온력이 좋은 폴라택 원단의 다양한 의류, 사방으로 신축성있는 스판의 다양한 의류, 방수 투습의 윈드스토퍼, 양질의 다운을 사용한 파커등, 수많은 의류가 다양한 형태로 산악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시절이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나 6.25전쟁 다큐멘타리에서나 나올 것 같은 텐트는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아 혼자서 텐트를 메고 다니기 쉽지 않았다. 두 개의 지주(폴)와 여러 개의 팩을 사용하여야 지탱되고 밑으로 바람이 통하여 강풍에 텐트가 날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계절과 밤낮, 바람의 방향에 따라 산바람이니 계곡바람이니 하며 텐트의 입구 방향을 정해야 했다. 그러한 텐트가 마터호른 초등시 사용한,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시킨 윔퍼 텐트의 발명으로 조금은 나아졌으나 공간성이 떨어졌다. 결국 텐트도 질기고 가벼운 합성섬유와 가볍고 내구성 강한 알루미늄과 지퍼를 사용하며 경량화되기 시작하였고 밑바닥이 붙은 제품이 출시되었다. 좀 더 나아가 화이버그라스 후레임이 등장하여 콘센트형 텐트가 출시되었고 지주(폴)가 필요없고 바람의 저항을 균일하게 받는 돔형 텐트가 나오게 되었다. 더욱 강해진 드랄륨후레임을 사용하는 지금은 어떠 한가? 다양한 규격과 디자인, 가볍고 내구성이 강한 제품들이 전문화되어 생산되고 있다. 지형에 관계없이(팩이 필요 없는) 설치가능하고 혼자서도 쉽게 설치와 철거가 가능한(단 몇분만에) 제품들과 후라이가 따로 필요 없는 방수, 투습 원단의 텐트까지 소비자들이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나의 초창기 야영은 이러한 군용 텐트에 판쵸 우의를 텐트 밑에 깔고 최고의 매트리스로 사용한 것이 군용 모포였다. 무겁긴 했으나 더러움이 덜타고 무엇보다도 질겨 웬만한 충격에는 찢어지지 않았고 또한 당시엔 더 좋은 마땅한 제품도 없었다. 보온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이나 깔았고(낙엽이나 솔잎) 커다란 미군용 침낭엔(소지한 침낭이 없어) 둘씩 들어가 잠을 자도 넓게만 느껴졌다. 아직도 군용 모포를 갖고 산에 가는 사람이 있을까? GO-STOP이나 치러간다면모를까. 은박 메트리스와 발포 수지 메트리스가 등장(80년대 초반 한·미 팀스피리트 군사 훈련이 끝난 뒤 군용 매트리스가 남대문·동대문 시장으로 흘러나와 산악인들이 구입하여 사용하였다)하였고 좀더 가볍고 효율적인 요철이 있는(일명 빨래판) 매트리스로 발전하여 지금도 많이 애용되고 있다. 지금도 매트리스의 탄력과 규격을 조정하며 계속적으로 좋은 제품들이 생산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부피와 무게를 더더욱 줄인 에어 매트리스가 생산되었고 에어 매트리스 또한 품질 개선을 거듭하며 두께가 50∼60mm에 길이가 180∼190cm가 되어도쉽게 공기가 자동 주입된다. 스폰지를 잘라 비닐을 씌우고 나일론 천으로 다시 커버를 만들어 직접 매트리스를 만들어 갖고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또한 습기에 약한 닭털 침낭은 하룻밤만 지나면 젖어있고 잘 마르지 않아 점점 무거워지고 성능이 떨어져 추워진다. 땀이 많은 사람(특히 장기활)은 자고 나면 흠뻑 젖는다는 표현이 맞는다. 한 번은 눈 덮인 설악산 잦은바위골에서 세명이 누울 만한 장소가 없어 얼어버린 계곡의 담(潭) 위에서 자고 나니 스폰치 메트리스를 뚫고 얼음에 체열이 전달되어 역으로 얼음이 녹아 스폰지를 타고(커버인 비닐도 엉성했지만) 침낭이 젖어 등판 쪽이 얼어 붙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래도 다음날은 모닥불에 말리고 김이 무럭무럭나는 침낭속에 다시 들어가야 했다. 침낭이 조금은 대중화되면서 카시미론 침낭이 등장하였고 이후 타크론, 신슐레이트 섬유로 내부소재가 바뀌었다. 신슐레이트 소재도 기능성 제조로 퀄로필로까지 발전하였으나 아직까지도 천연 제품인 다운제품이 가장 성능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침낭의 외피도 방수 투습의 원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운 침낭은 예전에도 구입할 수 있었으나 귀했고 가격도 비쌌다. 이러한 다운 침낭을 (침낭뿐 아니라 모든 첨단 등산장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 자유화 이후 많은 산악인들에게 알려 지고 국가 경제가 좋아져 수입 자유화가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좋은 제품을 접한 국내 업체들이 근래에는 좋은 제품을 개발, 생산 해내고 있다. 예전에는 외국에서 장비를 구입하여 국내에 되팔면 여행 경비가 떨어졌다느니 하지만 요즘은 외국에서 잘못 구입하면 국내 가격보다도 더 비싸게 구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장 변화가 없는 장비는 코펠인 것 같다. 겉모양으로는 거의 시대의 흐름을 못 느끼나 세트 구성과 재질에는 그런 대로 변화가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코펠 내·외부가 코팅처리되어 음식물이 눌어 붙지않게 된 것과 뚜껑을 후라이팬으로 사용하던 것을 같은 크기로 따로 만들어 부피를 늘이지 않고 내용물은 늘었다는 점이다. 재질을 티타늄이라는 최경량, 최강도의 합금으로 만든 제품도 있다. 버너의 발달은 형태가 별로 변하지 않아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나 주목할 만한 발달을 해왔다. 70년대 이전 최고의 버너는 콜멘버너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미군용 휘발유 버너였으나 구하기 어려웠고(버너보다도 휘발유 구하기가 더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저질의 자동차용 휘발유와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사용자로 인하여 폭발 사고가 많았다. (연료 분사 조정 레바를 조금씩 여닫으며 노즐을 가열해야 하나 자동차용 휘발유는 발화점이 높아 가열이 늦어 레바조정을 잘못하여 휘발유가 넘치기 시작할 땐 이미 연료탱크에서 분사된 휘발유의 양은 버너를 덮고도 남는 양이었다.) 이럴 즈음 스웨덴제 스베어, 옵티모스 석유 버너와 오스트리아제 포에브스 525와 625 제품이 성능과 안전성에서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개선된 점은 첫째, 알콜 또는 메타(고체알콜)를 이용하여 예열을 할 수 있게 하였고 연료 또한 석유로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최대의 단점은 너무나 비싼 가격에 판매된다는 것이었다. 70년대 초 한학기 사립대학의 등록금이 6만∼6만 5천원 이었는데 버너의 가격이 6∼7천원 이었다. 그런 와중에 액체 알콜을 사용하는 알콜버너가 잠시 등장하였으나 낮에 불꽃이 보이지 않아 연료를 보충시키다 연료 폭발로 화상을 입는 사고가 많이 발생하여 고체 알콜(깡통에 고체 알콜을 넣어 깡통에 삼발이 대용 생철을 끼고 사용)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열 효율이 낮고 연료를 많이 소지해야 하며 바람에 약하여 산에서 (특히 동절기)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스베어나 포에브스같은 버너도 알콜을 따로 지참해야하며 연료탱크에서 노즐까지의 연결 부위를 충분히 예열하지 않으면 석유가 기화되지 않아 연료탱크 석유가 흘러 버너가 폭발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최고의 버너였고 70년대 후반에는 스베아 버너를 모방한 국산 버너(시나브로, 알프스, 라이온 등)가 생산되어 1/3∼1/4가격에 판매되었다. 80년대에는 영국의 GAZ사의 EPI가스버너가 출시되어 커다란 휴대용 가스렌지만 보아오던 산악인들에게 콤펙트한 모양은 소유욕을 자극하였다. 가스 또한 겨울에 거의 쓸모 없는 부탄에서 푸로판을 혼합한 동계용 연료가 나왔고 연료통에 버너를 직접 조립하여 안정감 있게 사용할 수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산악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사랑 받는 가스 버너를 국내의 많은 업체들이 생산함으로서 싼값에 쉽게 구입할 수 있으며 라이타를 따로 사용하던 첫 제품과 달리 전자 점화 장치가 부착되어 편리해졌다. 그러나 연료가 가스이기 때문에 동절기 사용에 불편함은 여전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예열이 필요 없는 콜맨 휘발유(석유 겸용까지) 버너가 등장함으로써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연료가 수입되지 않아 화공약품으로 비슷한 옥탄가의 화이트 개솔린(?)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서 연료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러한 콜맨 버너는 70년대 이전의 군용 휘발유 버너와 비교해보면 연료탱크에서 노즐 사이에 스프링 코일이 내장되어있는 관을 만들어 연료가 기화되기 전이라도 분쇄되어 아주 작은 입자로 분사되게 했으며 그 관이 버너의 가열 부분을 지나므로 점화와 동시에 기화되게 하여 어떠한 추위에도 사용가능 하게 설계되어있다. 키스링과 륙색을 메고 산을 오르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요즘도 그 모습은 간혹 대학 산악부 신입회원들이 설악산이나 한라산 훈련 등반시 보여준다. 기능에 관계없이 무조건 많이만 넣을 수 있게 만든 옛날 보부상의 봇짐과 같은 키스링 색을 메다가 영국의 가리모 어택색을 본따 만든 빨간색의 배낭을 구입했을 때에는 내용물이 많건 적건 그것만을 메고 산을 오르고 싶었고 아무리 많은 장비를 넣어도 무겁지 않은 듯 하였다. 멜빵도 조정이 안되고 허리 벨트도 없는 배낭이었건만.... 지금의 배낭들은 어떠한가? 원단의 발달로 웬만한 비에는 내용물이 젖지도 않고 버클, 지퍼, 웨빙 등 부속 자재도 발달하여 배낭을 몸에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다용도 기능은 물론이고, 특히 발달된 부분이라면 내용물의 용량에 따라 배낭의 크기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고 체형에 맞추어 후레임을 넣기도 하고 멜빵을 상하 조정이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등판에 젖어드는 땀의 발산을 돕기 위해 견고하면서도 착용감 있는 소재로 등판의 통풍을 용이하게 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최근에는 성형 몰드물을 사용하지 않고 배낭 제작 후 액체 상태의 수지를 주입시켜 굳혀서 착용감을 증대시킨 제품(아크트릭스)도 있다. 이러한 일반등산 장비의 발달보다도 더욱더 발달을 거듭한 전문 등산 장비는 더 이상 발달할 것같지 않은 느낌마저 준다. 70년대 초 처음 바위를 대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 당시 우리의 암벽등반 장비는 청짜로 불리우는 직조(짠) 로프와 골드라인이라는 꼬아만든 로프 각 40m짜리 2동과 미군용 스틸카라비나 10여개, 앵글하켄, 나이프 하켄 몇개, 봉봉, 햄머 정도였다. 설악산에서의 릿지등반과 선인봉과의 첫대면 당시를 상기해 보면 지금의 장비는 새가 되기 위한 장비같다. 두동의 로프는 손실이 두려워 하강기 사용도 못하고 듈퍼식 하강만을 고집하였고 제동기가 없어 볼트와 하켄에 의지한 바디 빌레이를 가장 선호했으며 간혹 하프크로브히치 확보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직벽이나 오버행 등반은 레다를 사용해야만 등반이 가능했던 시절, 도봉산 짱구바위(강적크랙이 있는 바위)에서 훈련할 때는 몇 개 안되는 카라비나 때문에 하켄에 비나를 걸고 하나의 카라비너에 두 개의 레다를 걸고 올라갔다. 균형이 완벽하지 않으면 체중이 카라비너에 결려 개폐가 되지 않아 고생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곳의 확보점에 퀵도르를 이용하여 두 개의 카라비너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두랄미늄 제품의 가볍고 강도 높은 제품들이 많아 한곳에 큰 힘이 걸려도 쉽게 개폐 된다. 70년대 중반 상국이가 일본을 다녀오며 구입한 에델바이스 9mmx40m 로프는 우리들의 보물이 되었다. 안전벨트가 귀했던 그 시절에는 테이프 슬링으로 급조하여 사용하기 일쑤였고 잘해야 낙하산 부속품의 50mm 테이프슬링에 용접한 원형 고리를 달아 허리에 차는 정도였다. 그것도 못하면 로프를 직접 매듭하여 허리에 두르고 등반하였다. 선인봉 첫 대면에서 3명이 허리길을 40m 로프 한동과 카라비나 몇 개로 로프로 직접 매듭하고 등반을 했었다. 이러한 등반 방식이 상황에 따른 로프 처리 기술을 숙달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허리부분만 강조하여 추락시 허리에 많은 하중이 걸렸으나 티롤하네스의 출현으로 엉덩이 부분으로 조금 분산되었으며 요즘은 허벅지 부분으로 많은 하중을 분산시키는 벨트가 애용되고 있고 상하단이 모두 있어 온몸으로 분산시키기도 한다. 체격에 맞추어 허리 부분과 허벅지 부분을 분리 조립하는 제품도 있다. 로프의 발달은 마닐라 삼에서 나이론 제품으로 바뀐 것이 가장 주목할 발전이고 외형상으로는 별다른 발전이 없는 것 같지만 내피와 외피를 분리하여 안전에 염두를 두었다. 직조 방법의 발달로 아름다운 칼라, 다자인 뿐만 아니라 신장력, 인장력, 복원력이 보강되었다. 습기에 강한 드라이제품이나 매듭을 많이 하는 부분에 강도를 높이고 부드럽게 직조한 제품(베알 프로그램)도 있고, 최근엔 카본섬유를 함유하여 강도를 극대화하여 5mm로프가 일반 로프 9mm이상의 강도를 유지한 로프가 출시되고 있다. 암벽 등반장비의 최대의 이변이라 할 수 있는 획기적 변화는 뭐니뭐니해도 후렌드의 출현이다. 우드팩을 밟고 봉봉을 설치하고 앵글하켄을 두드리던 그 모든 상황이 후렌드의 출현으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후랜드는 계속 발달되어 “TCU”와 “캠어럿”을 전하고 있다. 암벽등반에서(거벽등반 까지도) 대부분 후랜드 세트만을 주렁주렁 달고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확보 기기도 많은 발달을 거듭하여 확보자의 신체에 충격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제동이 되는 제품들이 많이 출시되었다. 그중 펫츨사의 그리그리와 튜브는 많은 국내 산악인이 애용하고 있다. 수많은 제동기, 확보기, 등강기, 하강기의 장비를 적절하게 혼용하여 상황에 대처하는 기술의 발달도 한몫하고 있다. 이 모든 장비는 경량화 되어가고있고 -쥬마- 라 불리우는 어센더가 펫츨사의 “티블록”과 와일드 컨트리사의 “로프맨”과 같이 극소화된 제품도 있다. 암벽장비뿐 아니라 빙벽장비의 발달은 더욱 두드러졌던 시대라 할 수 있다. 픽켈 한 자루만 들고 희방폭포를 스탭 컷팅으로 올랐고 픽켈을 후등자에게 내려주고 다시 오르고 하던 시절, 픽켈은 그야말로 등산 장비중에 최고의 상품대접을 받았다. 외제 픽켈은 꿈도 못 꾸고 국내 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모레내 금강(MK) 제품만 갖고 다녀도 우쭐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엔 외제 픽켈은 성능과 기능에 관계없이 장비점에 진열되기 무섭게 팔려 나갔던 때였다. 한 번 눈에 띄면 돈을 마련할 때까지 제발 팔지 말아 달라고 사장님께 부탁하고 수시로 확인하였고 부족하나마 돈이 마련되면 뛰어가 깍고 깍은 뒤 부족한 금액은 외상까지 하면서 픽켈을 손에 쥐면 밤새 잠못 이루며 어루 만지던 기억이 새롭다. 상국이, 기활이와 셋이서 동계 설악산 등반을 나섰을 때 우리는 세 자루의 픽켈(드메종설벽용, 금강 두자루)과 캐신아이스 바일 1자루, 3벌의 아이젠(샤레와 프레스 12발, 스투바이 주물 10발, 금강 8발), 확보물로서는 스크류 3개(굵은 철사 같은) 금강 후크 5개, 아이스하켄 3개가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런 확보물도 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후론트 포인트가 없는 아이젠은 발이 다 들어가도록 스텝을 파내야 했기에 그 당시 브레이드가 있는 픽켈은 필수였다. 요즘은 후론트없는 아이젠도 없지만 브레이드없이 해머가 달린 바일이 선호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말로 픽켈의 발달은 대단했다. 해마다 기능이 보강된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획기적인 제품은 스텐다드 픽크에서(톱니 3∼4개) 톱니의 수를 늘여 속빈 얼음에서도 안정감 있게한 것이고 픽크의 윗 부분에도 2∼3개의 톱니를 만들어(샤르레모제 제품 까바루) 샤푸트를 당길때 지렛대 역할을하여 픽켈이 쉽게 빠지는 것을 보강하였다. 그후 허밍버드 햄머와 빅버드 바일이 나오면서 고드름의 수직 빙폭들이 등반되기 시작하였다. 짧고 날카롭고 스텐다드 픽크에 비해 훨씬 각이 예리한 픽크의 등장은 고드름질의 수직 빙폭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픽크가 약해 잘 부러지고 샤프트가 짧아 타격시 손등이 빙면에 부딪히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자 바로 이어 역곡선형 픽크(일명 바나나픽)가 장착된 햄머와 바일(바라쿠라, 0-X, 피라나 등)이 출시되었고 빙폭의 상황에 따라 픽크를 교체할 수 있는 모듈러 시스템의 조립형 바일이 출시되었다. 고드름형 빙폭에서 손을 보호할 수 있는 곡선형 샤프트도 출현하였고 최근엔 가볍고 가는 샤프트에 픽켈 회수시 용이하게 픽의 끝이 반대로 조금 꺽인 것(그리벨), 오른손과 왼손의 힘의 방향에 따라 톱니의 방향을 조정하여 당길 때 얼음에 째밍되고 반대로 밀면 회수가 쉽도록 효과를 증대시킨 제품(카지다)도 있다. 최근 서서히 불고 있는 믹스클라이밍의 바람에 맞춰 헤드 부분을 캠으로 사용할 수 있게 보강시킨(트랑고사) 제품도 있다. 픽켈과 바일뿐만 아니라 확보물의 변화 또한 대단한 것이다. 한 개의 확보물을 설치하려면 주변의 얼음이 온통 떨어져 나가야 했고 회수시에도 온 힘이 다 빠져야 했다. 확보물 설치에 드는 힘이 등반에 비해 몇 배 더 힘든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회수는 더더욱 힘들어 부실한 확보에도 서로 선등하려고 하기도 했다. 나이프 록하켄처럼 생긴 아이스 하캔에서부터 철사같은 스크류, 갈고리같은 후크만을 사용하다 샤레와사의 바트호크가 출현했을 땐 과히 획기적인 제품이라고 극구 칭찬하며 너도나도 구입하려 했으나 그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 무른 얼음에서는 괜찮았으나 강빙이나 속이 빈 고드름 얼음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웠고 그런 대로 설치는 한다 하더라도 추운 날씨로 설치 상태에서 얼면 주변의 얼음을 모두 부셔야만 했는데 어떤 경우는 약 20∼30분이 소요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즈음 70년대 말 상국이가 일본에서 파이프 스크류 6개와 타니 아이젠 2벌을 사왔을 때 온통 빙벽이 우리들 세상이 될 것만 같았다. 파이프스크류 3개는 시몽사 제품이었고 3개는 ICI사 제품이 었는데 얼음의 파손이 적은 것은 시몽사 제품이었다. 강빙만 아니라면 파이프를 통하여 얼음이 쏙쏙 빠져 나오며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박히는 스크류가 신기하기도 했다. 스크류의 두께가 두껍고 나선의 간격이 클 수록 얼음의 파손은 컸고 파이프 속의 얼음을 다시 녹여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 그후 회전시 어려움을 없엔 때려 박아 설치 할 수 있고 쉽게 제거 할 수 있는 스나그가 출현하여 등반이 무척이나 빨라졌다. 요즘은 티타늄으로 얇고 가볍고 굵게 만들어 설치 때에 햄머가 필요 없이 한 손으로 돌려 설치하고 회수하며 바로 녹여 얼음을 제거하게 됨으로서 해머로 타격시 균형과 해머의 분실 등을 고려한 확보줄(일명 탯줄)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손목걸이 역시 웨빙테이프로 바느질하거나 매듭하여 사용하던 것을 손목의 압박을 줄이고 쉽게 넣고 뺄 수 있는 다양한 손목걸이가 생산되고 있다. 픽켈의 발전과 더불어 아이젠의 발전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근대 등반사에서 아이젠의 역사는 그리벨이 후론트 포인트가 있는 아이젠을 발명한 것이 최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하나, 둘 꽝꽝”, 삐올레 깡, 망쉬, 람프 , 라마스,. 앙크르, 트락시옹 등의 등반기술을 익히던 때, 그러한 기술중에 앙크르와 트락시옹을 무용지물화 시켜버린 후론트 포인팅 등반은 수직빙폭에 도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론트가 없는 아이젠으로 커다란 스텝을 만들었고, 후론트가 있는 아이젠도 밴드를 보부상들의 짚신 신 듯 칭칭 동여매고 등반을하다 보면 후론트가 좌우로 45°정도 돌아가고 심지어는 등반중에 벗겨지기도 하여 빙벽에 매달려 다시 밴드를 조이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불편함이 프레스 제품의 아이젠이 나오면서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밴드의 미끄러움으로 풀리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80년대 중반 아이젠의 역사를 또다시 바꾸는 획기적인 제품이 출시되었다. 로우캠프사의 “푸트팽”은 12발 (스파이크 10개에 푸론트 2개) 아이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파이크가 20개가 넘었고 후론트 스파이크도 가로에서 세로로 변형시켰으며 후론트 스파이크에 톱니를 넣었다. 조정이 가능하여 등산화에 딱 맞게 조절하여 부착했으며 칭칭 동여매던 아이젠 밴드를 스키의 바인딩과 같이 원터치로 탈착이 가능하게 하였다. 이로써 아이젠의 모든 불편함을 해소하는 반면, 후론트의 세로 변형은 얇고 가는 고드름형 빙폭에서도 얼음의 파손을 줄이고 안정감있게 박히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아이젠에 빨간색 프라스틱 밑판의 시각효과와 킥킹시 들리는 경쾌한 금속음은 클라이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푸트팽 제품을 약간 변형시킨 정도의 아이젠이 출시될 뿐이다. 프론트 스파이크의 간격을 조절하거나 교환이 가능하게 하였고, 두 개의 후론트를 하나로(모노 씨스템)하기도 하였고 믹스등반에 필요할 경우 힐킹(뒷꿈치 부분)이 가능하게한 제품도 있다. 또한 프레스보다 주물제품이 얼음에 잘 박히는 점을 이용한 주물 제품(그리벨)도 출시되고 있다. 이러한 장비의 발달이 산악인들의 등반기술을 앞질러 근래에는 새로운 장비에 숙련한 기술을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더욱 발달된 장비가 출현함으로써 애써 익힌 등반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어떠한 장비가 발명되어 산악인들을 놀라게 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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