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월 상달의 달빛을 지고
이 경 숙
어릴 적,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할머니는 햇곡식이 나오는 날이면 언제나 조상님께 올리고 나서야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은 햇감자나 옥수수 등을 장독대에 잠시 올려놓고 감사기도를 하는 약식일 때도 있었고, 가을날 추수가 모두 끝나면 시루떡 등 음식을 장만하여 가신제(家神祭)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꼭 우리 집안의 소원을 말하며 소지(燒紙)를 촛불에 붙여 올리곤 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소지가 둥둥 떠오르며 남김없이 모두 타 버려야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지, 할머니는 덜 타고 떨어지는 불이 붙은 소지를 맨손으로 떠받치며 두 손을 마주 비비며 간절하게 주문을 외우곤 하셨다. 그런 가을이면 우리 집 곳간은 풍성해졌다. 눈이 많이 내리는 긴 겨울을 날 채비를 하고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 행복한 휴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한 가지 남은 겨울 채비가 있었는데 그것은 땔감이었다. 집집이 뒤란에 장작을 그득하게 쌓아놓은 것과 달리, 우리 나뭇가리는 늘 빈약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 집에는 무거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올 사람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추수를 마치고 뒷산에 올라 소나무 가지나 잡목들을 잘라서 한 단 한 단 묶어 여기저기 쌓아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여러 날을 힘들게 나뭇단을 만들어 놓으면, 어느 날 그것을 옮겨주는 고마운 이들이 따로 있었다. 가을이면 지나가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속담도 있듯이, 저마다 바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우리 집 일을 낮에 도울 수 없는 동네 젊은이들이 달밤에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뒷산에 해놓으신 나무들을 지게를 지고 와서 옮겨주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그것을 우리 집에서는 울력이라 불렀다.
밤에 산에 올라 지게로 나무를 지어 나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달빛이 아주 밝은 날 하곤 했다. 점차 추워지는 날씨에 하얀 달빛 아래 동네 어른들은 줄줄이 산에 올라 나무를 지어 날라다 나뭇가리를 만들어 주셨다. 그러면 어머니와 나는 부엌에서 불을 때며 뜨거운 국물을 끓이고 막걸리를 대접해 드렸다. 한 짐 한 짐 나무를 지고 오신 아저씨들이 부엌 바닥에 놓인 상에서 막걸리를 한 사발씩 드시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분들의 힘쓰는 소리와 고함이 하얀 달빛을 타고 올라 대낮처럼 뒷산이 울렸다. 그렇게 온 동네 젊은 어른들로 하여 하룻저녁 순식간에 우리 집 뒤란에 커다란 나뭇가리가 탄생하곤 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겨우내 한 단 한 단 나뭇가리에서 빼다가 밥을 짓고 여물도 끓이며 따스한 겨울을 보냈다.
울력이라는 용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마을 사람들이 길흉사가 있거나 일손이 모자라 가사가 밀려 있는 집을 위하여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협동 관행”이라고 쓰여 있다. 용어를 먼저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먼저 돕기를 시작하여 그런 아름다운 풍습이 만들어져 그것은 울력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우리 가족들에게,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에게 울력이라는 말은 너무나 고맙고 가슴 따듯한 단어였다.
그때 그 아름답던 청년들은 이제 모두 다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신다. 참으로 순박하고 재미있게 말씀을 잘하시던 오달이 아저씨. 상수 삼촌, 명섭 아재 등 그 시절 정답던 얼굴들이 그립다. 그 옛날처럼 시월 상달의 달빛 아래에서 따끈한 마음을 우려 막걸리 한 잔 대접하며 한 분 한 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가을의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던 그 젊음의 지게 위에는 무게를 모르는 사랑 한 짐 밖에 또 무엇이 있었을까.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발아의 시간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꽃 그림이 그려진 씨앗 봉투를 발견했다. 오래전 다이소 구경하러 갔다가 씨앗을 파는 코너에 내가 좋아하는 라벤더 씨앗이 있길래 사 왔던 걸 미루고 못 심어 서랍 속에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날짜를 보니 2년도 넘었다. 심으면 나오려나 하는 기대로 작은 화분 두 개에 나눠 심어놓았다. 씨앗은 본래 햇빛이 많을 때 잘 발아하는 상추나 파 같은 광발아 종이 있고 음지에서 발아가 더 잘되는 암발아 종이 있는데, 라벤더는 어두운 곳에서 발아가 더 잘되는 식물이라 빛이 잘 들지 않는 베란다 가장 어두운 곳에 차광해 두었다. 금방 나오는 씨앗이 아닌지 작디작은 씨앗은 두어 달을 물을 주고 관심을 가져도 전혀 기척이 없었다.
한 이십여 년 전 호주에서 보랏빛이 광활하게 펼쳐진 라벤더 농장에 간 적이 있었다. 농장 초입에 차가 진입하는 순간부터 얼마나 향기가 좋던지 주차장에서 막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처음으로 라벤더가 어떻게 우리 생활 속의 향기로 만들어지는지 직접 보고 그 향기에 빠졌다. 국내에서도 요즘은 대규모로 재배하는 곳이 많아져서 눈도 호강하고 우리 생활에 밀접한 향기 용품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수종이 되었다, 그때 처음 본 호주의 광활한 보랏빛 라벤더에 매료되어 여행에서 돌아와 한동안 나는 허브에 빠졌다. 베란다 가득 허브 화분으로 채운 적도 있었다. 애플민트, 유칼립투스 베르가못 페퍼민트 등 크고 작은 화분에 저마다 다른 향기의 허브들이 음식과 차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때는 농장에서 화분에 심어진 묘목을 사서 키웠기에 씨앗을 심어 본 적은 없었다.
라벤더 씨앗의 봉투에 있는 사진처럼 크게 키워 꽃을 피우는 상상을 하며 정성껏 물을 주고 기미를 살폈다. 혹시나 여린 싹이 나오는 순간을 놓칠세라 매일 들여다보길 한 달이 넘어도 씨앗은 소식이 없었다. 흙을 파 뒤집어 볼까 하는 갑갑증이 일기도 했지만, 버즘나무처럼 몇 년이나 땅속에서 있다가 껍질이 닳아야만 싹이 트는 나무도 있으니 더 기다려보자고 인내할 즈음, 연녹색의 아주 작은 싹들이 뾰족뾰족 올라오기 시작했다. 2년 이상 건조상태에 있던 라벤더 씨앗이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찌 된 건지 잘 자라는 묘목처럼 여린 싹들은 정성을 들여도 빨리 크지 않았다. 매일매일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며 라벤다 잎의 모양새를 갖추길 기다려도 더디기만 하던 어느 날, 그것은 라벤더가 아니라 흙에 따라온 잡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망한 마음에 화분 하나를 거꾸로 쏟아 뒤집어 버렸다. 이름도 없는 잡초는 무참히 뭉개지고 라벤더 씨앗은 흔적도 없었다. 남은 다른 화분도 마저 엎어버릴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 그냥 구석에다 밀어놔 버렸다. 봄 내내 물을 주며 정성을 들이고 보라색의 향기로운 나무로 자라날 거라 상상했던 마음이 볼품없는 잡초에 농락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의 정성이 헛되이 되어버리는 일들이 어디 이 작은 화분 하나뿐일까마는 그때마다 받았던 당혹스러움이 작은 화분 하나에게 내 마음도 들킨 것만 같아 허탈했다.
불볕더위가 지나갈 즈음 베란다 한 귀퉁이에 밀어 놓았던 남은 잡초화분의 지지부진하던 풀이 갑자기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라벤다를 염두에 두고 싶어서 넓고 얕은 화분에서 키가 쑥쑥 크니 제 키를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더니, 초가을 아주 작은 꽃봉오리가 맺히고 주황색 코스모스가 피었다. 작년 가을 산책길에서 받아온 씨앗이 들어가서 봄부터 여름까지 기다렸다가 제철이 되니 물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한 극한 환경에서 빈약하지만 꽃을 피워 냈나 보다. 창문을 열면 보이는 곳에 놓인 서너 송이의 빈약하지만 작고 앙증맞은 주황색 꽃을 바라본다. 뿌리가 얕아서 흔들리는 모습이 애처롭지만 예쁘다.
모든 씨앗은 제각각 발아의 시간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도 짧거나 긴 발아의 시간이 있다. 가을에 발아하는 꽃씨인지도 모르고 봄부터 뿌리고 조급해하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이며 인내해야 하는 긴 발아의 시간이 필요한 인연이 있다. 내가 무엇을 심고 있는지도 모르고 발아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한 적은 또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아직 발아되지 못한 인연의 씨앗을 엎어버리는 일들도 많았다. 누군가에게 나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작은 라벤더 씨앗 하나의 울림으로 초가을 볕 아래서 나 자신을 돌아본다.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밭문학회 작품상, 한국농촌문학상, ≪농축투데이≫ 문학상 수상, asysook@hanmail.net
가슴으로 낳은 꽃
김 동 일
자식은 삶의 가장 큰 약속, 해약할 수 없는 계약이라 했던가. 나는 25년 전 그 계약에 서명했다. 이미 두 아들이 있었지만, 돌이 채 되지 않은 딸아이를 막내로 품기로 한 것이다.
생후 5개월, 고아원에서 처음 만난 딸은 세상의 빛이 낯선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 만남은 숙명처럼 오래 준비된 것도, 충동적 선택도 아니었다. 어느 날 TV에서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는 미국 가정을 보았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아이를 천사처럼 품은 그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아를 수출하던 우리 사회의 현실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마침 두 아들은 손이 덜 가는 시기였다. 아내와 상의 끝에 우리는 딸아이를 품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집은 새로운 꽃을 맞이했다.
공개 입양 모임에 참석하며, 우리는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레 입양 사실을 알게 하려 했다. 그러나 남들이 하기 힘든 일을 했다는 작은 자부심은 곧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만난 부모들의 이야기는 내 결심을 무겁게 흔들었다.
무릎 아래 다리가 없던 세진이는 풀밭을 뒤뚱뒤뚱 달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고통을 삼키면서도 빛을 품고 있었다. 훗날 세진은 장애인 수영 선수로 우뚝 섰다. 뇌수막염으로 하루 스물네 시간 돌봄이 필요한 아이의 부모는 지친 얼굴 대신 희망의 언어를 품고 있었다. 연구원 부부는 상담 자리에서 스트레스로 굳어 있었지만, 다음 해 딸을 입양한 그들의 얼굴은 환한 빛으로 달라져 있었다.
우리 집에 딸은 웃음을 데려왔다. 총명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딸은 가족의 자랑이었고, 이웃들의 사랑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딸은 외모와 습성까지 우리와 닮아갔다. “밖에서 낳아 입양을 가장한 게 아니냐”는 농담을 종종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춘기의 파도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딸은 학교를 떠나 대안학교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라는 고백을 내게 내놓았다. 그 순간, 오래 감춰온 비밀은 장벽처럼 무너져 내렸고,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오래 눌러둔 눈물을 터뜨렸다. 비밀의 짐은 그렇게 비로소 내려졌다. 돌아보면, 고아였던 딸을 잘 키우면 내 죄가 가벼워지리라 했던 생각은 오만이었다. 딸은 나의 죄를 씻어준 존재가 아니라, 내 삶을 길러준 꽃이었다. 내가 베푼 사랑보다 받은 위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이제야 고백한다.
딸은 가슴으로 낳은, 내 삶이 품은 가장 빛나는 선물이다.
돌을 찾아서
휴일이면 배낭을 메고 돌을 찾아 나선다. 혼자일 때는 생각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돌밭을 훑는 즐거움이 있고, 여럿이 함께하면 수석이라는 공통의 화제로 웃음이 오간다. 돌밭에 둘러앉아 나누는 막걸리 한 사발의 맛은 그 어디에도 견줄 바가 없다.
수석이 될 만한 돌은 대개 강이나 하천에서 발견된다. 한때 풍부했던 남한강의 돌들은 4대강 사업 이후 거의 사라져, 탐석인들에게는 애석한 추억이 되었다. 이제는 비교적 가까운 괴산 달천을 찾지만, 이미 많은 이들의 발길이 지나간 탓에 장마가 돌밭을 새로 뒤집어 놓기 전에는 수석 한 점 얻기조차 쉽지 않다.
하천의 돌이 고갈되자 사람들은 계곡으로 눈을 돌린다. 돌씻김은 부족해 수마감은 떨어지지만, 원석이 지닌 생생한 질감이 있다. 운 좋게 마음에 드는 돌을 발견해 배낭에 지고 오는 날이면,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가끔은 혼자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돌을 번쩍 들어 올리기도 한다. 그때면 어딘가에서 힘이 솟아나는 듯하다. 돌이란 게 그렇다. 물가에 있을 땐 그저 평범한 돌에 불과하지만, 내 손에 안겨 자리를 잡으면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 빛을 낸다.
요즘은 바닷가로도 향한다. ‘해석(海石)’이라 불리는 바닷돌은 파도에 씻겨 유리알 같은 피부를 지니고, 그 표면에 문양이 드러나면 귀한 수석이 된다. 대부분 먼 길이지만, 내일의 명석을 만날 기대에 설레어 새벽잠을 놓치기 일쑤다. 그러나 해안의 돌밭 또한 수많은 탐석인의 발길로 비워지고, 현지인의 단속을 피해 산책하는 척하며 몇 점 주머니에 주워 담을 때도 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돌밭을 거니는 기분은, 수석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신적 사치이자 고요한 명상이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웠다. 석신(石神)께서 한 점 점지해 주신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빈손이라도 자연과 벗하며 걸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가벼운 허탈함이 스며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탐석 중 누군가 좋은 수석을 만나면, 그것은 곧 뒤풀이의 이유가 된다. 그 돌이 ‘격을 갖춘 수석’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돌의 주인은 뒷풀이 비용을 부담하지만, 동료들의 부러움과 축하에 대한 답례로 기꺼이 호주머니를 연다.
매년 봄이면 수석회와 전국 연합단체들이 석신제를 연다. 돌밭 한 켠에 음식을 차려놓고, 건강한 탐석 생활과 좋은 수석 한 점을 점지해 달라 기원하는 의식이다. 나는 석신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미친 듯이 돌밭을 헤매다 우연히 명석을 만나면, 그것이야말로 석신의 뜻이라 여긴다. 또한 나는 ‘돌 주인’은 따로 있다고 믿는다. 수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서, 뜻밖에 귀한 돌을 발견할 때면 ‘석신께서 나를 돌 주인으로 택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돌밭에서는 때로 하늘을 떠도는 구름을 바라보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서로 어깨를 기댄 산맥의 곡선과 돌 틈에 핀 들꽃의 자태를 눈에 담아오기도 한다. 저녁 어스름 속, 배낭에 돌을 지고 그림자를 이끌며 돌아오는 길, 돌 향기에 취한 내 발걸음은 언제나 즐겁다. 나는 이 즐거움을 평생 곁에 두고 살아가려 한다.
나의 수석(壽石) 사부(師父)
나의 첫 수석 사부(師父)는 아버지였다.
80년대 초, 큰 유행을 탔던 수석 열풍은 수석 산지와 거리가 멀었던 충남의 시골에도 불어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인근의 하천을 찾곤 했다. 당연히 방안의 한켠에는 수석장이 놓여졌고, 선물 받은 여러 산지의 수석과 아버지의 서툰 솜씨에 자리를 잡은 수석 좌대가 민망함의 한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지방의 유수한 대학을 나오신 아버지는 부족한 경제적 재능을 난, 분재와 더불어 수석을 취미의 한 축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풍류의 젓가락을 세월의 장단에 맞춰 두드렸던 것이다.
억지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수석 탐석을 나섰던 나는 아버지 머리맡에 있던 수석 참고서를 곁눈질하여 보았던 터에 제법 어린 나이에 수석의 기본을 접하게 되었고, 수석은 애증과 여러 가지 복합한 공식으로 대입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유일한 좋은 기억과 추억의 편린으로 남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빚과 더불어 아버지가 남긴 수석을 군말 없이 물려받게 된 것도 수석과 함께했던 짧았지만 좋은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수석은 아버지와 함께 내 젊은 시절에서 벗어났고 나는 치열한 생활의 전선에서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나의 두 번째 수석 사부(師父)는 수석 가게를 하는 K 사장님이었다. 수석과 인연이 깊었는지 나의 처가 집은 수석 산지로 유명한 여주였고, 4대강 사업 이전이라서 강가에는 석질이 좋은 남한강의 수석이 눈에 밟히곤 했다.
처가 집에 갈 때마다 산책 삼아 강가를 노닐면서 어릴 적 아버지와의 향수에 이끌리듯 수석을 주워와서 무심하게 담장에 놓아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처가 집의 담장에서 맵시가 있는 수석을 골라 어찌어찌 찾아간 수석 가게에서 나는 K 사장님을 조우하게 되었다. 당시 유명한 개그맨과 이름이 같았던 K 사장님은 웃기는 재주는 없었고, 시들해진 수석 열기 탓에 수석 판매보다는 수석 좌대를 만드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다행히 수석 가게는 우리 집과 멀지 않아 회사 퇴근 후에는 수석 가게로 다시 출근하여 애주가였던 K 사장님과 술잔을 기울이며 수석 얘기로 긴 밤을 함께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수석 가게를 드나들던 수석 동호인들과 만나 탐석을 함께 다니며 나의 본격적인 취미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주 휴일에는 금강으로 가서 탐석을 하고는 수석 가게로 와서 탐석한 돌들에 대해 K 사장님의 감정을 받아 선택된 돌들은 K 사장님의 좌대 위에 앉혀져 나에게 보는 즐거움을 안겼다. 고백하건대, 지나고 보니 제대로 격을 갖추지 못한 돌들이 과분한 좌대의 호강을 받았으나 실은 K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수업료를 나는 그런 식으로 대신한 것이다.
좌대를 만들 때 나오는 분진과 톱밥을 변변치 않은 마스크 한 장으로 버티던 K 사장님은 고희를 한해 앞두고 돌아가셨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수석 선생님은 나에게 수석을 대하는 진심을 몸으로 알려주며 떠나갔다.
나의 세 번째 수석 사부(師父)는 현재 진행형이다.
금강을 벗어나 더 많은 수석 산지를 접해보고자 가입한 온라인 수석 카페의 전국 회원이 모이는 행사에서 우연히 만난 K 형님은 내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나보다 네 살 위의 K 형님은 사업실패로 상심한 세월을 수석 탐석으로 극복하며 보기 드문 명석을 많이 소장한 탐석의 달인이었고 수석의 고수였다. 연인처럼 불꽃으로 만난 나에게 K 형님은 자기 집에 초대해 한 점 한 점의 수석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과 탐석한 수석과의 스토리텔링으로 더 높은 경지로 가고 싶은 나의 수석 생활에 지팡이가 되었고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또한 애주가였던 형님 집에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오롯이 수석 한 가지 얘기로 나의 갈증을 채워주며 본인만이 알고 있는 보물 같은 탐석지에 나와 동행하여 돈 주고 살 수 없는 많은 비기를 전수해 주었다. 이윽고 K형을 통해 알게 된 좋은 석우들과 수석 동호회를 만들었고, 수석 생활의 진정한 가치는 탐석이라는 공감대를 나눠 가지며 지금도 매주 인근의 산과 계곡, 하천을 함께 누비고 있다.
오랫동안 같이 수석 생활을 하려면 술을 줄여야 한다는 나의 잔소리에도 어김없이 술잔을 벌컥이는 거침없는 K 형님의 호방함이 세월의 잔 서리에 꺾일 법도 하련만, 나의 세 번째 사부 K형님은 지금도 탐석지에서 날아다니고 있다.
* 충남 논산 출생, 부경대 산업경제학과, ‘울림’ 시동인, eastone0401@gmail.com
포대 속의 별빛
전 월 득
주머니 속을 굴러다니는 동전은 언제부턴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지갑에 넣기엔 거추장스럽고 손에 쥐자니 그 가벼움이 더 없이, 하찮고 귀찮다. 나 어릴 적 1960년대, 우리집 에선 소중히 대접받던 동전이었다. 십 환짜리 동전 하나만으로도 노트와 연필을 함께 살 수 있었다. 지폐는커녕, 동전도 귀해서 용돈을 받은 기억도 없다. 학교 앞 노상에서 굽는 국화빵이 먹고 싶으면, 작은 헝겊 주머니에 보리쌀이나 쌀, 한줌을, 책보자기에 담아가서 물물교환하여, 받아먹곤 하였다. 그렇게 부드럽고 달콤했던 국화빵을 십환 짜리 동전 하나만 있으면 맘껏 먹을 수 있었는데 보리쌀 주머니를 가지고 다닐 만큼 귀했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초 내가 국민학교 4학년 1학기 봄 소풍, 부여 백마강을 건너 고란사로 단체여행을 갈 때도, 나는 엄마한테 22환을 받아 좋아하며 뛰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 돈으로 나룻배를 타는 비용도 내고, 알사탕 한 줄도 사고, 친구가 가져온 강낭콩 넣은 개떡 한 조각도, 사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돈을 건네주지 않아도 충분히 나누어 먹을 수 있었던 것을 친구와 동전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동전의 값어치가 귀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화폐가치와 물가상승 요인에 의해 그때의 십 환은 현재의 1원이 되고 1만 원에서 2만 원이 넘는 물건값에 해당하는 변동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작은 동전 하나도 누군가의 삶을 이어주던 순간이었고,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제 몫을 톡톡히 지켜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세상사도 동전처럼, 푸대 속에 흩어져 굴러간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것도 잠시, 무심한 발길에 차이거나 쉽게 잊히기도 한다. 권력과 명예 부와 성공마저도 한때의 빛일 뿐, 결국 시간 앞에 서는 작은 쇳조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주 눈앞의 가치에 흔들리고 순간의 편안함을 쫓아 소중한 것들을 내던지곤 한다.
어느 순간부터 동전은 지폐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발길에 차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침내 푸대 속에 쌓이는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동전은 여전히 한줄기 ‘의’를 품은 별빛이다. 나는 그 모습에서 제 뿌리를 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의 무게에 따라 기울어지던 변절자들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동전은 처음 세상에 나올 때는 모두 같은 빛을 띤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반짝임을 잃고 바닥에 구르고 결국 포대 속에 던져진다. 변절 또한 다르지 않다.
누구나 처음엔 같은 맹세와 신념을 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권력과 이익 앞에 인기영합주의를 표방하며 스스로를 헐값에 내어준다. 동전이 천대받는 까닭이 사소함에 있듯이, 변절자들의 몰락 또한 대단한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작은 욕심, 순간의 편의, 눈앞의 안일함이 그들을 낡게 만들고, 마침내 시대의 푸대 속에 무가치한 쇳조각으로 굴러가게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 땅에도 많은 동전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총 칼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충신들이 있었던가 하면 은전 몇 닢에 눈이 멀어 제나라를 버린 이들도 있었다. 후자의 삶은 한때의 부귀영화를 누렸을지 모르나 후세의 기억 속에서는 이미 녹슨 동전처럼 잊히고 말았다. 그들이 얻은 부와 권세는 순간의 빛이었으나, 민족 앞에서 저울질 된 무게는, 끝내 보잘것없이 가벼웠다.
그러나 동전은 천대받으면서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작은 가치를 채우고 계산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몫을 한다. 하지만 변절은 다르다. 그것은 공동체를 잇는 힘이 아니라 균 혈을 내는 칼날이다. 천대받는 동전은 세월이 흘러도 화폐의 가치를 간직하지만, 변절은 시간 앞에서 모든 가치를 잃고 오히려 부끄러움의 증거로 남는다. 나는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볼 때마다 역사의 푸대 속에 묻힌 이름들을 떠올린다. 외면받아 마땅하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그것들은 오래전 무대의 막이 내려진 후에도 무심히 남겨진 소품처럼 세월의 구석구석에 끈질기게 자리한다. 그 누구도 땅에 떨어진 동전을 주우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더러움의 대상으로 발길로 차 버리고 만다. 한때는 고사리손으로 돼지저금통에 소중히 모으며, 년 말 불우이웃 돕기에 한몫하던 때도 있었다. 시대가 반영하듯, 사람도 한때는 우상이었고 존경받던 인물이 부지불식간에 사회를 어지럽히고 혼탁하게 만든 죄인으로 낙인되는 것을 종종 보고 있다. 동전은 다시 손에 쥐면 쓸 수 있지만, 변절은 어떤 손길로도 다시 빛을 되찾을 수 없다. 역사는 묻는다. 당신은 끝내 어떤 무게로 남을 것인가 푸대 속에 던져진 쇳조각일 것인가, 아니면 어두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내는 별빛일 것인가, 요즘 아이러니한 세상을 바라보며 한 치 앞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니다. 동전이 푸대 속에서도 쓰임을 다하듯 세상사 어려움 속에서 작은 선의와 진심, 원칙과 성실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고 때로는 먼 미래에 빛을 발하리라, 푸대 속 동전처럼 그 가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세상에 남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길가에 흩어진 동전을 주워든다. 그것은 단순한 쇳조각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흘러가는 시간과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세상사의 무게를 담은 상징이다. 푸대 속에 굴러다니는 이름 없는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빛나는 별이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세상은 그렇게 작은 별빛들로 이어져 있다. 불현듯 스쳐 가는 순간조차, 세상은 그렇게 작은 별빛들로 이어져 있다.
감사와 희망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이 오늘도 나를 깨운다. 그토록 뜨거웠던 열대야도 이제는 기세를 꺾고 뒤안길로 물러설 모양이다. 어제의 피로와 작은 근심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렇게 하루를 다시 열 수 있는 내가 고맙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흔들리면서도 묵묵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나에게 작은 미소를 건넨다. 야심 차게 시작한 일들, 다시 도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리라, 햇살이 내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을 때 나는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선물 같음을 느낀다.
가끔은 여전히 두렵고 서툴러서 내 안의 빈틈이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도 나를 단단히 빚어가는 과정임을 안다. 어둠을 지나야 새벽을 맞이하듯 나 또한 이 길 위에서 조금씩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오늘의 나를 품에 안으며 내일의 나를 향해 작은 불빛을 켜본다 그 빛은 언젠가 크게 타올라 나를 지켜줄 희망이 될 것임을 믿는다.
며칠 전에는, 국제 시 낭송 예술인 연합 5차 전국 예선 대회가 경기도 부천에서 열렸다. 나는 지난번 4차 대전대회에 이어 두 번째 출전이었다. 시를 창작하는 것을 넘어 낭송까지 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야심 차게 시 낭송 수업에 참여하지만 나에게 쉬운 일은 없는 것 같다. 여러 날을 두고 열 번 백 번 외우고 또 외우며, 고저, 장단, 강약, 완급, 포즈를 되뇌며 연습한다고 하였지만, 만족한 점수를 받지 못했다. 수삼 년 전부터 열성을 다한 경연자들 앞에 나는 초라 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들 왈 “조직의 쓴맛을 알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모두가 다 겪고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니 조급해하지 말라”며 격려하시는 것이 고마운 말씀이었다. 누구는 5년째, 7년째, 계속 즐기면서 지치지 않고 노력하며 도전 중이라는 말이 위안이라면 위안으로 들렸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것에. 초보자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을 익히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작했을 뿐이라는 마음으로 분발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았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작은 기적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간 인연들, 때로는 나를 단련시킨 시련들, 그리고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발걸음들이 모두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흔들릴 때마다 다시 나 자신에게 감사하며 일어나고 싶다. 어제의 내가 오늘을 세워주었듯, 오늘의 내가 내일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나는 나의 길을 감사와 희망 속에서 걸어가고자 한다. 나에게 모든 것은, 이제야 시작이다. 누구에겐 노년이라 탄식하겠지만 나는 지금 꿈이 살아 움직이는 청년과도 같은 열정이 있다.
인생은 70부터란 말이 나에겐 적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젊은 날에 갑작스런 남편의 병고로 다섯 식구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그 나이에 맞는 가족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만 하며 살았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남편을 간호하며 손등이 닳도록 가위질하고 미싱 발판을 밟아 삼 남매 학업 마치고 결혼시키고 보금자리 마련해 준 삶이 헛되지 않은 것은,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 되고 있다. 애지중지 사랑하며 키운 자녀들이 나에게 희망이었듯 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인생의 큰 보람이라 여기며 날마다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엄마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즐기라는 자녀들의 응원을 받으며 마음 편히 여기저기 취미생활에 열정을 다할 수 있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 그들의 웃음은 내 삶을 지탱하는 빛이 되고 그들의 손길은 내 마음을 위로하는 바람이 된다. 하지만, 그 행복의 뒤편에는 언제나, 먼저 떠나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아릿하게 남아 있다. 남편을 향한 애절함은 세월이 흘러도 옅어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져 나를 감싼다. 보고 싶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애절함이 가슴속에 고요히 쌓여 때로는 눈물이 되어 흐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가 남겨준 사랑이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버틸 수 있었고, 자녀들과도 함께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감사한다. 그대가 남겨준 흔적에, 그리고 여전히 나를 지탱해 주는 숨결 같은 기억에,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그리움과 감사가 어우러진 마음으로 남편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일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리라, 인생의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것이다. 남편은 하고 싶었던 취미와 여가생활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 세상을 하직하여 남은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다. 함께 누려야 할 혜택을 누려보지 못한 아쉬움과 그리움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나를 사랑하고 자녀들에게도 한(限)을 남기지 않으려고 할 수 있는 모두를 찾아 즐기며 후회 없이 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말한다. 지금 너희들이 제 몫을 다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주므로, 나 또한 현재의 화양연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뜻하지 않은 변고를 만났다 해도 슬퍼하거나 애통해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모두 내려놓고, 오늘이 있음에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 충남 부여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상상의 힘≫ 수필 부문 신인상, ≪대전문학≫ 시 부문 신인상, jwd5038@naver.com.
대둔산에 올라보니
이 정 진
글을 쓰는 시간은 언제나 평온했다. 매일 한 수 이상의 한시를 짓고, 짧은 수필을 써 보며 습작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내가 문학창작과 기행을 함께 배우는 문학 교실이 있다고 말했다. 평소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던 나는 “시간도 없는데 무슨 수업이냐”며 가볍게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습작한 시 몇 편을 들려주며 느낌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아내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계속 시를 보여주고 감정을 묻는 건 …
스토킹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 말이 뜻밖이었지만, 묘하게 가슴을 찔렀다. 나는 글을 쓰면서도 정작 누구와도 나누지 못한 채 혼자서만 감정의 숲을 헤매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배움과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평생교육원의 문학창작 강좌에 수강 신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장을 다니는 나에게 평일 수강은 쉽지 않았지만, 작은 용기를 내어 오전 휴가를 내고 첫 수업에 참석했다. 낯설지만 따뜻한 얼굴들이 나를 맞았다. 그분들의 눈빛에는 삶의 여유와 깊은 시간이 묻어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문학 수강이 시작되었다.
나는 30년 이상을 항공기 구조와 진동을 연구해 온 공학도다. 지금도 무인기 관련 분야에 몸담고 있다. 문학은 어쩌면 나와는 먼 세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언어의 세계에 발을 디딘 일은 곧 기쁨이 되었다. 동료 수강생들은 이미 등단한 시인이거나,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문학으로 펼치는 분들이었다. 누군가는 시 낭송 무대에 서고, 누군가는 미술 전시회를 열고, 또 누군가는 수필집을 펴냈다.
그 열정은 내가 닮고 싶은 미래의 얼굴이기도 했다. 교수님은 조용하고 단단한 열정으로 우리의 창작을 격려하고 이끌어주었다. 그분들과 함께하는 문학기행의 일환으로 이번 가을 우리는 대둔산으로 향했다. 원래 계획은 군산 채만식 문학관이었지만, 여러 사정이 겹쳐 목적지가 대둔산으로 바뀌었다.
대둔산은 대전에서 한 시간이면 닿는 호남의 명산이다. 기암절벽이 능선 곳곳에 서 있고, 계곡은 깊고 맑다. 가을이면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붉은 단풍이 산 전체를 물들인다.
입구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단풍빛과 은행잎빛 옷을 차려입은 이들은 가을빛 한 조각이라도 놓칠세라 연신 카메라를 눌렀다. 그들의 얼굴에는 근심 대신 순수한 해맑음만 가득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세상의 근심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라나는 것임을. 그리고 그 뿌리는 대부분 헛된 욕망임을.
케이블카는 6분 만에 우리를 구름다리로 데려다주었다. 걸음으로는 두 시간이 필요한 길이었다. 문명의 편리함은 우리의 발을 가볍게 해주지만, 너무 쉽게 얻은 정상은 금세 시야를 좁힌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쉬움에 길들면, 쉬운 것만을 갈망하게 된다. 성취의 과정에서 오는 기쁨을 잃고, 결과만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구름다리를 건너 작은 봉우리 정상에 섰을 때, 멀리 펼쳐지는 산하를 보며 한시 한 구절을 생각했다.
埈峰抵身
埈峰抵身見遠地 - 준엄한 봉우리, 몸을 낮추니 멀리 땅이 보인다
昔虛妄影拂頭裏 - 지난 허망한 그림자, 머릿속을 스치고
峯上雲漸散隨風 - 봉우리 위의 구름은 바람 따라 서서히 흩어지고
幽藏塵消爲煙悠 - 깊이 감춰 둔 세속의 미련, 연기되어 사라져 그윽하게 멀어진다
높이 선다는 것은 스스로를 낮추는 일이며, 멀리 본다는 것은 먼저 내 허망함을 비워내는 일임을.
동행한 어르신들은 세월을 낚는 어부처럼 자신의 지난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고 있는 듯하다. 아픈 기억은 계곡 아래로 흘려보내고, 기쁜 기억은 가슴 깊이 담아두는 모습. 다가오는 쇠약함을 두려움 대신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말 없는 배움이었다.
나는 대둔산의 문학기행에서 ‘낮춤의 미덕’을 새롭게 배운다.
낮출 때 비로소 멀리 볼 수 있으며, 비울 때 가볍게 걸을 수 있고, 멀리 돌아볼 때 비로소 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문학기행의 하루였지만, 산과 바람과 단풍은 나에게 가장 깊은 문장을 남겼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온 마음의 층위에서 피어난다. 그리고 그 마음은 언제나 ‘낮추는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다시 기록해 둔다.
* 전남 광주 출생, KAIST 항공우주공학과,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 ljung4321@naver.com
말의 위로, 말의 상처
민 정 옆
우리는 늘 말속에서 살며 말로 삶의 나날들을 자기만의 색깔로 채워 간다.
말에는 그 사람만의 색깔과 그 사람만의 향기가 담김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사람만의 색깔과 향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나날들이 쌓여 가면서 더 짙어지고 더 그윽해져 간다.
말을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의 색깔이 보이고, 그 사람의 향기가 맡아진다. 자신의 색깔과 향기가 소중하면 다른 이의 색깔과 향기도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보고, 덜어내고, 때로는 보완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색깔과 향기를 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공감하고 경청하는 자세가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한다. 관계에서 나이와 경험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 또한 그에 비겨 경중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연륜만큼 지혜롭고 값진 건 없지만, 그렇다고 어린 사람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없다고 속단하며 함부로 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대하며 깨달은 지혜이다. 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걸 더 밝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학생도 있고, 나보다 더 좋은 생각을 제안하는 학생도 있으니 함부로 할 수 없음이다.
존중과 배려로 공감하며 소통할 때 따뜻한 위로가 되는 말은 크게 힘이 되고, 기운 나는 응원이 된다. 그 황홀함을 뭐에다 비길까? 목마른 사람에겐 감로수가 되고, 땀 흘리는 사람에겐 손부채를 쥐여 주는 것 같다.
Talk low ……,
talk slow ……,
and don't say too much!
나지막이, 천천히 말하고, 너무 많이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더 눈 맞추고 공감하며 경청하려고 한다. 사소한 것 같아도 이것만 잘해도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관계를 잘 이어갈 수 있으리라.
오늘도 난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며 경청하고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공감하며 소통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마음을 기울인다.
또 하나, 말에도 가시가 있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찔려 아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늘 생각해야 한다. 쓰다고 다 충고가 되고 값진 말은 아니다.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당사자는 되레 칭찬만 받으려고 하지 충고를 하면 외면을 한다고 그런다. 상처를 준 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한 거다. 그래서 충고할 때는 더 가려서 말하고 더 완곡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칭찬보다 어려운 것이 충고나 조언이다. 아픈 말도 아프지 않게 말하는 법을 익혀야겠다. 몸에 생채기가 나면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하지만 말의 가시에 찔린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 줄을 모른다. 영혼이 다치면 위로만으로는 치유가 되지 않고 또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픔으로 남는다.
말의 따뜻함과 상처 사이에서, 그 범접할 수 없는 말의 힘을 다시 생각하는 오늘이다.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학교 대학원 박사 수료, 전)중등 국어 교사, ≪열린시학≫ 신인상
고스톱
오 월 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요즘 핸드폰에서 가장 많이 보는 문자다. 11월 초순을 지나서 일주일 간격을 두고 직원 두 명의 아버님이 별세하셨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부고(訃告) 소식이 단체 카카오톡이나 문자 메시지에 공지되면 그 공지글 밑으로 위의 문장이 천장에서 커튼 내려오듯 길게 쭉 도배된다. ‘삼가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고인(故人)께서 저승에 가셔서 복을 받으시길 기원하는 의미인데, 이 문장 말고는 마땅히 다른 표현을 찾기도 어렵다. ‘94년도 군대에서 복무할 때 선임병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힘들 때면,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전투경찰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공중전화에서 고향 집에 전화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몸이 힘들고 마음이 시퍼렇게 멍들어도 군대에서 벌어진 일을 부모님께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멀리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의 답답한 속이 뚫렸고, 아버지의 목소리는 악마 같은 선임병에게 물린 독을 치료해주는 해독제가 되었다. 20대 초반 시작된 부모님과의 통화는 30년이 지난 지에도 계속되어, 이젠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내가 지금 전화하는 도구와 목적이 ’95년도와 두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예전에는 공중전화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카드나 동전을 사용했고, 지금은 손쉽게 핸드폰을 사용한다. 그 당시에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고 힘든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통화했고, 지금은 ‘효도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걱정되어 전화를 드린다. 이제는 내가 보호해드리고 싶어서 소통한다. 그런데 아직 나의 역량이 부모님을 온전히 보호해드리기에는 부족해서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갖고 산다.
강원일보 「박종호 칼럼」에서 읽은 내용이 흥미롭다. 몇 년 전 중국의 한 대학이 기말고사에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매일 1km라고 가정한다면,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의 길이는 얼마일까?’라는 문제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정답은 ‘1km’였다. 평균수명과 양육 기간을 따져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2만 805km로 계산했다. 반면 부모와 함께하는 자식의 시간은 갈수록 줄어든다. 계속 제곱근을 해야 해, 결국 부모가 우리에게 하루 동안 주는 사랑에 불과한 1km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문제라 무척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시간이 갈수록 부모님은 자식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자식은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맞다. 애완동물을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2km 이상이라도 늘리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이 칼럼을 읽고 반성하며 조금 더 늘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나는 두 아들과 소통하면서, 현재를 재밌게 사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는 그림그리기, 블록쌓기, 동화책 읽어주기, 장난감으로 놀아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에는 베란다에 비비탄을 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 주었다. 베란다 가장자리에 2m 길이의 화선지에 한자를 쓴 다음, 화선지 윗부분을 1.8m 정도 되는 막대에 붙여 벽에 고정하면 하얀 화선지가 멋지게 늘어져 예쁘다, 비비탄 총알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화선지 뒤에 얇은 커튼을 쳐서 총알의 속도를 줄게 했다. 바닥에 상자를 깔아 총알이 커튼에 부딪혀 떨어지면 모이도록 설계했다. 화선지에 쓰인 한자를 내가 불러주면, 아이들이 그 글자를 비비탄총으로 쏘아 맞히는 일종의 게임이었다. 처음에 내 의도는 일석삼조(一石三鳥)였다. 아이들에게 한자도 가르치고, 학업에 지친 스트레스도 풀어주고, 나와 소통하는 것이었다. 10정 이상 되는 비비탄총은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셨던 이종사촌 누님이 원가로 주셨는데, 내가 가게를 방문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덤으로 선물을 주시고 비비탄 총알도 수천 발을 주셨다. 사촌 누님은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 이모였다. 하지만 회갑이 조금 넘은 올해 여름, 천사 같은 누님은 오랜 지병을 앓다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 난 아이들을 데리고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故人)께 인사드렸고, 아이들이 이모의 따뜻한 친절을 잊지 않기를 바랬다.
우리는 일요일이면 KBS 방송국의 <개그 콘서트> 프로그램을 보며 과자를 먹으면서 즐거웠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서 중·고등학교를 가면서 이런 일들이 너무 시시하게 느껴졌는지 큰아들은 텔레비전의 예능프로그램을 보느라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작은아들은 컴퓨터게임과 핸드폰 ‘유튜브’ 채널에 빠져있다. 나 또한 월, 수, 금요일에는 퇴근 후 테니스를 치고, 지인들과 약속이 자주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전화 통화, 붓글씨 쓰기, 인문학 독서, ‘유튜브’에서 전 세계의 예능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삼부자는 서로 소통이 줄어들었다. 각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지 몰랐다. 우리가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시간은 짧은 아침 식사 시간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고스톱을 쳐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각자 동전을 모아두는 저금통이 있으니 현찰은 준비되어 있었다. 명절에 어른들이 고스톱 치는 것을 구경하며 곁눈질로 배운 시절이 10여 년이라 같이 게임 하는 것도 문제가 안 될 것이었다. 나도 청소년 시절에 누나, 동생과 셋이서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며 우애를 다지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부모님 몰래 쳤던 그 긴장감 넘치던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고스톱을 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우리 가족은 명절에 모여서 고스톱을 자주 쳤다. 공무원 생활을 한 형은 3점에서 5점만 나면 스톱하고, 자기 패가 좋지 않으면 치는 것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결국에는 돈을 번다. 자기가 딴 돈을 구경하는 조카들에게 주지 않고 챙겨가는 것을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형의 방식으로 치면 고스톱 게임이 정말 재미가 없다. 코레일 다니는 동생은 한 판을 크게 먹고 보자는 방법으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계속 ‘원고’, ‘투고’, ‘쓰리고’로 밀어 대다가 독박을 자주 당하는 편이다. 나도 동생과 비슷한 방식으로 쳐서 돈을 따본 일이 별로 없다. 난 돈보다는 스릴과 재미에 초점을 둔다. 친척들끼리 돈 몇 푼가지고 졌다고 기분이 상할 것도 없다. 1점에 100원이고 상한가는 1만 원인데 3시간을 친다고 가정하면 상한가는 세 번도 안 나온다. 돈을 잃어도 1만 원 이상 잃는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모두 나이가 들면서 무릎이 아프다고 명절에 모여도 고스톱을 치지 않는다.
올해 봄부터 아들들과 이불을 깔아놓고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오씨(吳氏)들은 승부욕이 꽤 강한 편이다. 고스톱을 치는 방식은 복잡한 것은 없애고 단순하게 치기로 합의를 보았다. 예전에는 재미있는 고스톱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전두환 고스톱’은 내가 ‘쓰리’(바닥에 있는 두 장의 패를 모두 가져가는 것)를 하거나, 남들이 ‘싸놓은 것’(내가 친 패와 같은 종류의 패가 나와 세 장이 된 상태)을 가져오면 상대방의 가장 좋은 패를 가져올 수 있는 독재식 고스톱이다. ‘심형래 고스톱’은 내가 가진 패를 뒤집어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치는 방법이다. 나는 상대방의 패를 볼 수 있지만, 나는 내 패를 볼 수 없는 방식의 고스톱이다. ‘90년대에 여러 가지 고스톱이 유행했었다.
고스톱 게임은 도파민을 만들어내는 매력을 갖고 있다. 아이들에게 고스톱 게임을 하자고 하면 대부분 참여한다. 난 고스톱을 치면서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묻거나 어떤 친구들과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를 묻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주 유용한 정보를 많이 얻어서 아이들을 동태를 파악할 수 있다. 나 또한 직장 생활하는 것, 테니스를 하면서 재밌었던 얘기 등 아빠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는지 이야기해 준다. 서로 삶에 교집합이 많이 생기면서 할 이야기도 많아졌다. 게임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과일도 깎아 먹고, 라면도 끓여 먹으면서 부자지간의 정을 쌓아간다. 앞으로 오랜 시간 내가 아이들과 같이 있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아이들은 각자의 보금자리에서 살아갈 것이다. 내가 공주에 계신 부모님과 떨어져 산 세월이 35년이 지난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난 지금 아이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중요하고, 그 매개체가 되어준 고스톱 게임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나는 10여 년에 걸쳐 1년에 두 번 문학 동인지에 수필을 게재하고 있다. 시인, 수필가, 동시 작가, 소설가, 서예가, 사진작가, 여행작가 등이 모여 각자의 인생 경험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한 권의 작품을 만든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긍정적인 빛을 비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 작품을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바쁜 일상에도 꾸역꾸역 글을 쓰며 도태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힘든 시절 문예지에 글을 기고하며 내 마음의 응어리진 한(恨)을 풀어놓았고, 훌륭하신 문인들과 필담하며 많이 배웠다. 특히 ‘필봉담’ 문인들은 나의 특급 지인이 되어 지금도 나를 밀어주고 끌어주고 계신다. 어느 날, 나는 고향의 시냇가를 걷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빛을 간직하고 있다. 혼자 있을 때는 마음속의 빛이 약하여 멀리까지 비추지 못하고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소통이 잘 되는 사람들 몇 명이라도 모이면 마음속의 빛이 강해져 멀리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우리 삼부자가 고스톱 게임을 하며 서로 찐하게 소통하며 만든 빛이 모여 자꾸 짧아지는 부모님과의 시간을 아름답게 비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 수필 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 moon5865@hanbat.ac.kr
바가지
오 병 남
바가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별로 귀하다는 생각은 아니 한다. 그저 부엌 한켠에서 뒹굴고 있다가 필요하면 물도 푸고 쌀도 씻고 먹거리도 담고 늘 부엌에서 무슨 일에 쓰일지 몰라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군인이 명령을 듣고 즉시 행동하듯 언제라도 주인 눈 안에 있다가 즉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어릴 적 내 별명은 종고래기 딸이었다. ‘종고래기’는 조롱박의 사투리다
종고래기는 아주 작은 바가지인데 부뚜막에 놓여 있다가 간장도 푸고 국자 대신 국도 푸고, 쌀이며 여러 식재료를 풀 때 요긴하게 쓰는 물건이었다. 종고래기 딸은 청소며 잔심부름을 했다. 언니들의 심부름, 어머니의 심부름을 했다. 어느 때는 저녁밥을 먹고 언니들이 설거지가 하기 싫으면 나보고 하라고 했다. 추운 겨울 부엌에서 설겆이 하는 것은 좀 귀찮은 일이다. 아무튼 종고래기 딸은 가족들에게는 만만한 아이였다.
지금은 바가지가 모두 화려한 색깔의 플라스틱이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모두 천연 바가지였다. 둥그런 모양이며 누우런 색깔이 퍽 따듯하고 다정한 느낌이다. 우리 집에는 쌀을 푸는 바가지가 있었다. 그 바가지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한창 클 때까지 있었다. 겉은 거의 빨간색에 가까운 색이었고 금이 간 바가지를 굵은 실을 꼬아서 실로 꿰맨 것이었다. 바가지는 쌀 한 되를 담을만했다. 시장에서 쌀 한 말을 사 오면 어머니는 늘 그 바가지로 다시 쌀을 한 바가지씩 되어보셨다. 아홉 번 하고 반이면 쌀의 양이 적당하다고 했다. 깨진 바가지를 소중하게 다루고 한쪽이 금이 더 생기면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실을 꼬아 바가지를 붙이셨다.
“깨진 바가지 위하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더 깨질까 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픈 마누라가 더 아플까 봐 조심하며 살아냈던 옛날 아버지들 이야기다. 마나님이 죽으면 ‘어린 자식들을 누가 돌봐야 하나?’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아무튼 플라스틱 바가지가 나오기 전에는 바가지가 소중한 물건이었다.
어머니는 봄에 박씨를 구해 오셔서 심으셨다. 박씨에서 새싹이 나오고 덩굴이 올라오면서 초가지붕이나 산비탈을 타고 자란다. 여름날 초가지붕 위에서는 하얀 박꽃이 핀다. 박꽃은 달밤에 보면 더 아름답다. 달빛 아래 피어있는 박꽃은 여인이 소복을 입고 다소곳이 누구를 기다리는 듯하고 고요한 달빛 속에서 들려오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하얀 박꽂을 보고 있으면 어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긴 편지를 보내면서 꿈을 꾸라고 격려하는 듯했다.
추석 무렵이면 박이 보름달만큼 자란다.
어머니는 박을 잘라 껍질을 벗기고 썰어서 들기름을 붓고 볶아서 나물 반찬을 해주셨다. 박나물은 부드럽고 맛이 순하다. 나물 중에서 귀티 나는 양반처럼 품격있는 나물이다.
추석이 지나고 찬 바람이 불면 박은 초가지붕 위에서 더 단단해지고 커진다. 큰 박은 혼자 들기도 무거울 만큼 자란다. 크고 작은 박들은 꼭지를 낫으로 자른다. 수확한 박들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은 한 가족처럼 다정한 느낌이다. 어머니는 박 한가운데에 정확하게 금을 그어놓고 톱으로 자르셨다. 두 쪽으로 갈라진 박은 속살이 하얗고 씨가 줄지어 박혀 있다 어머니는 속을 숟가락으로 대충 파내셨다. 그리고 흙과 물을 박 속에 넣으셨다. 박 속이 다 썩어 속을 파내면 바가지가 제모습대로 나온다. 어머니는 그 바가지들을 깨끗이 씻은 후에 가마솥에 물을 붓고 삶으셨다. 때를 쏙 뺀 바가지들은 맑은 물에 다시 헹구어 햇볕에 잘 말렸다. 살이 보송보송한 바가지들은 다락방에 고이 모셔놓고 필요할 때마다 쓰셨다.
농촌에서는 한참 모내기하고 바쁠 때는 바가지에 음식을 담아서 일꾼들을 대접했다. 사발처럼 무겁지도 않고 가벼웠다.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논밭으로 나갈 때 혹시라도 길을 가다가 넘어질 때도 사발처럼 잘 깨지지 않으니까 쓰기에 편했다.
막걸리도 바가지에 담아서 마셨다. 무더위 속에 일을 하고 논 가에 앉아 밥을 먹으면 으레 졸음이 쏟아진다. 나무 그늘 여기저기에서 일꾼들은 낮잠을 잔다. 아낙들은 집으로 와서 바가지 그릇을 씻고 새참 준비를 해서 또 논으로 나간다.
어느 때인지 모르겠으나 어머니가 아끼던 바가지에 구멍이 났다. 메워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나 고민 끝에 구멍을 두 개를 더 내어 탈을 만들었다. 바가지에다 색칠도 하고 끈을 달아서 얼굴에 쓰고 머리도 흔들고 몸도 흔들었다. 하회 탈춤 흉내를 내었다. 재미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천연 바가지가 귀하다.
플라스틱 바가지가 값도 싸고 오래 쓸 뿐만 아니라 가볍고 잘 깨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쓰기에도 편리하다. 그러나 어머니 치마 속처럼 따듯한 느낌은 전혀 없다. 옛날 부엌에서 여인들은 아궁이 앞에서 바가지에 밥을 담아서 밥을 먹었다. 소여물도 주고 길쌈도 하고 시아버지 바지저고리도 꿰매야 하기에 편하게 앉아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한평생을 바가지와 함께 살다 가신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그리운 것은 바가지가 품고 있는 넉넉한 품이다. 플라스틱 바가지가 감히 표현 못 하는 그 부드러운 색감과 곡선이 유난히 그립다.
달밤에 핀 박꽃의 아름다움을 요즈음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 공원에 박을 심고 가꾼다면 얼마나 운치가 있을까? 쫓기듯 사는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선물할 것이다.
비 오는 날
내 어린 시절에 비 오는 날은 농부님들이 바라고 바라던 단비일지라도 나에게는 좀 걱정스러운 날이었다. 새 검정 우산 두 개는 아버지와 큰 언니가 쓰고, 직장으로 가셨다. 셋째와 넷째 언니는 비닐 우산중에서 좀 쓸만한 우산을 쓰고 고등학교와 중학교로 갔다. 우산 살이 부러졌거나 찢어진 우산은 나와 내 동생이 사용했다. 학교 가는 거리도 가깝지만, 아직 어리니까 우산이 좀 안 좋아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머니는 우산도 없이 집안일을 하셨다. 때때로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갈 때 비가 오면 비를 맞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는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머리를 감싸고 집을 향하여 뛰어가야 했다.
어느 날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책가방을 메고 손에는 크레파스를 들고 집으로 향하여 뛰어갔다. 수용소 골목길로 막 들어서려는데 손에 들려 있던 크레파스가 갑자기 쏟아지며 땅에 흩어졌다. 나는 오는 비를 다 맞으며 크레파스를 모두 거두어 크레파스 상자 안에 넣고 집으로 왔다. 젖은 옷을 벗고 몸을 닦으면 어머니는 늘 먹을 것을 주셨다. 찐빵이며 옥수수 또는 감자나 장떡, 그 밖에 과일이나 마실 것을 주셨다. 딸이 비를 맞고 오는 것에 대하여 어머니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셨다. 오히려 비가 오면 좋아라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꽃모종을 하시지 않았던가? 아이들이 크려면 비도 맞고 눈도 맞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우산이 부족해도 크게 걱정은 안 하셨다. ‘육이오 피난길에서 강가 모래톱 숲속에서도 먹고 자고 했으니, 오는 비를 맞는 일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비가 오는 날, 학교 교실 유리창 너머로 우산을 들고 서 계시는 친구 어머니들을 볼 수 있었다. 속으로는 부러웠다. ‘내게도 누가 우산을 가지고 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날도 집에 가려는데 비가 왔다. 교실 문을 열고 학교 현관에서 집으로 가려는데 넷째 언니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참으로 고맙고 반가웠다.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 언니가 나를 위하여 학교까지 왔다는 것에 감동했다.
큰비가 오고 난 후에는 집 뒤란 방공호에는 물이 넘실거렸다. 육이오 전쟁 중에 누군가 파놓은 것인지, 아니면 일제시대에 판 것이지 잘 모르겠으나 방공호를 그리 깊게 판 것이 아닌 것을 보면 육이오 전쟁 때 판 것 같았다. 우리 집 뒤란은 굵은 모래처럼 생긴 흙벽인데 삽으로 파면 그 흙뭉치가 떨어져 나올 만큼 석벽이 무른 편이었다. 아버지는 그 흙벽을 삽으로 긁어 앞마당 낮은 곳에 채우셨다. 집 뒤가 바로 산이니까 큰비가 오면 산 쪽에서 물이 흘러 내려왔다. 나는 졸졸 내려오는 물줄기에 호박잎 대롱을 심어 놓고 대롱에서 내려오는 물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나와 동생은 물싸움을 하곤 했다. 먼저, 흙을 쌓아 물을 가둔다. 물줄기 아래에도 댐치럼 튼튼하게 흙을 쌓아 놓는다. 위의 흙담을 무너뜨려 물이 아래로 흘러 아래 흙담이 무너지면 이기는 것이고 안 무너지면 지는 게임이었다.
우리에게는 장난감이 곧 물과 흙이었다. 여름날 비가 오면 일부러 물이 고인 웅덩이에 신발을 적시며 뛰어놀기도 했다. 어머니는 크게 나무라지도 않으셨다. 강아지가 눈이 오는 날 뛰어다니듯 나도 물웅덩이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어머니는 부엌에서 부추, 고추, 애호박을 썰어 밀가루와 섞어 반죽해 놓고 부침개를 부쳐주셨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부침개 굽는 냄새에 더없이 흐뭇한 정다움으로 다가왔다. 열 두서너 살 무렵이 되자 나도 비가 오면 어머니처럼 부침개를 부쳤다. 식구들이 두세 개씩은 먹으니까 스무 개쯤 부쳐야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매운 고추와 깻잎 그리고 부추를 썰어 넣고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넣고 장떡을 구우면 매콤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그리고 과수원 밭에서 금방 따온 옥수수를 쪄 먹으면 그 맛이 구수했다. 가끔 이웃들에게 부침개며 찐 옥수수를 건네주기도 했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은 기분이 좋은 날이기도 했다. 처마 끝에서 내려오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저 빗물이 흘러서 어디로 갈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비가 그친 후에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장단은 자연스러운 음악이었다. ‘쏴’ 하며 쏟아지는 빗소리는 나에게 정다운 교향곡이었다.
요즈음 아이들의 비에 관한 생각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아파트에서 살아 비가 온다 해도 생활에 큰 변화는 없다. 그래서 생각도 각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비에 대한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와 이웃의 숨결이 스민 그런 비에 대한 기억 말이다.
옛 친구들
어린 시절 금천동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살았다. 내 나이가 대여섯 살쯤인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집은 셋방살이를 했다. 벽장 문을 열면 울긋불긋한 무서운 그림이 있었다. 내가 보아도 그 그림이 너무 무서웠다. 우리가 안채에 살고 집주인은 행랑채에 살았다.
우리 집 주인은 무당이었다. 저녁부터 굿을 하면 새벽 네 시까지 밤을 새웠다. 어느 때는 낮에도 굿을 하였다. 시퍼런 작두 위에서 무당이 춤을 추었다. 장수 옷을 입고 머리에는 장수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입으로는 주문을 외웠다. 돼지머리도 있고 과일과 떡도 있었다. 놋대야 비슷한 것을 밤새 두드려대며 시끄러웠다. 너무 괴로운 우리 엄마는 무당굿 하는 뒷마당에서 굿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셨다.
그 시절 산 아래에는 지붕이 검은 큰 기와집이 있었다. 그 집에는 순오가 살았다. 순오 아버지는 양조장에서 술을 배달하는 일을 하셨다. 순오네는 할머니가 살림을 하셨다. 순오는 순오보다 서너 살 위의 오빠가 있었다.
순오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그러다가 나와 자주 싸움을 하였다. 순오는 엄마가 집에 없었다. 엄마는 1년에 한두 번 밤에 몰래 왔다가 갔다. 순오는 엄마가 왔다면서 자랑을 하였다. 순오 할머니는 순오와 오빠를 키우면서 살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순오 할머니가 순오 엄마를 몹시 해서 못 살고 나갔다고 했다. 우리 둘째 언니가 순오 머리를 잘라주었다. 순오 할머니가 고맙다며 무우를 주셨다.
순오네 행랑채에는 명실 언니네가 살았다. 순오 옆집에는 영숙이가 살았다. 영숙이네는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영숙이는 오빠가 일곱, 언니가 하나였다. 모두 9남매였다. 가끔 영숙이네 집에 놀러 갔다. 영숙이 여섯째 오빠가 내게 술찌게미를 먹으라고 했다. 내가 안 먹으니까 안 먹으려면 네 집으로 가라고 했다. 영숙이네는 한겨울에 방안에 이불을 깔아놓고 대여섯 명 식구들이 낮잠을 자기도 했다. 영숙이네는 여름이면 향나무 아래에 의자를 놓고 오빠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였다. 영숙이 언니도 노래를 잘하였다. 순오와 영숙이와 나는 함께 놀았다 소꿉놀이, 엄마 놀이 춤도 추고 싸우기도 했다.
우리 집은 무당이 우리 엄마한테 “당신 때문에 굿이 안되니까 나가달라”고 했다. 기분이 언짢으신 아버지께서 급하게 집을 얻으셨다. 오막살이 초가집이었다. 우리 엄마는 울면서 그 집을 청소하셨다. 그 집은 순오와 영숙이가 살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영숙이와 나는 나이가 차서 초등학교에 갔다 같은 학년인데 반은 서로 달랐다. 순오는 5학년이 되어서야 우리 학교에 왔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는데 무능한 아버지 밑에서 집에만 있다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순오는 학교 공부를 잘했다. 영숙이는 늘 일등을 했다. 졸업할 때는 영숙이가 전교 일 등을 했다. 그런데 영숙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영숙이 막내 오빠는 중학생이었다. 영숙이 오빠는 엄마가 없으니까 방황을 했다. 그런 오빠를 영숙이는 걱정을 했다. 영숙이는 반듯하게 학교생활도 하고 나무랄 데 없이 생활을 잘해나갔다. 영숙이와 나는 나란히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도 갔다. 고등학교에서도 영숙이는 공부를 잘했다.
어느 여름날 우연히 길에서 순오를 만났다. 순오는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입술에 연한 핑크 루즈를 발랐다. 순오는 자기는 병원 간호보조사로 일한다고 했다. 순오 오빠는 이발소에 다녔다고 했다. 이발소 손님들 머리도 감겨주고 잡심부름도 하면서 틈이 나는 시간에 독학으로 공부하여 서울에 있는 k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순오 오빠를 모두 칭찬했다.
그 뒤에 순오를 가끔 길에서 만났고 그 뒤로 영 만나지를 못했다. 영숙이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영숙이는 서울로 갔다. 큰오빠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영숙이는 나이가 같은 조카가 있었다.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셨으니 여러 오빠 집을 다니며 학교 공부를 했다. 중학교는 셋째 오빠 집에서, 고등학교는 넷째 오빠 집에서 다녔고 대학교는 큰 오빠 집에서 다녔다. 큰오빠가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어린 동생을 2년 동안 데리고 살았다. 영숙이는 교대를 졸업하고 바로 독립을 하였다. 그리고 결혼하고 잘 살았다. 영숙이는 서울 여자가 되었고, 나는 시골 여자가 되어 서로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40년 만에 갑자기 전화가 왔다. 반가웠다.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그와 내가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서로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며 밤을 보냈다. 모범생이었던 그녀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몇십 년 후에 만났어도 변한 것이 없었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주눅 들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 그녀가 대견스러웠다. 슬하에 아들과 딸이 있고 손자가 셋이 있다고 했다. 남편도 살아 있고 자녀들이 모두가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옛날처럼 여전히 성실하고 바른 여자로 남아있는 그녀가 기특했다. 요즈음 아이들처럼 우울증이니 트라우마니 하며 야단법석도 없고, 꿋꿋이 자기 인생에 충실하게 살아낸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모두가 칠십이 넘은 나이가 되었으니 어른으로 성장하여 아름답게 살아내야 한다고 다짐해본다.
순오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까? 아마 그도 열심히 자신을 돌보며 성장하고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길가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우리 아파트 정문 앞 맞은편에는 할머니 두 분이 농사지은 오이, 고추, 열무, 호박, 토마토를 팔고 계신다. 나도 할머니니까 그분들을 나는 ‘아줌마’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 두 분 중에서 한 분에게 욕쟁이 할머니라고 불렀다. 농협 바로 앞이라서 때로는 도로 순찰하시는 아저씨들이 와서 장사를 못 하게 하셨다. 그때에는 채소들을 모두 거두어 집으로 가야 했다. 가끔 묵 장수, 그릇 장수, 요구르트 장수들도 물건을 팔고 헌 옷 장수들도 옷을 팔았다. 지나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욕쟁이 아줌마는 이웃에서 장사하시는 분들과 가끔 다투셨다. 자리다툼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좀 무시하는 분들과 싸움이었다. 그럴 때마다 육두문자가 나왔다. 나는 그 아줌마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는 옷이라도 좀 깨끗하게 빨아 입고 말씨도 친절하면 물건도 더 잘 팔릴 텐데”라고 생각했다. 머리는 수세미 같고 말씨는 거칠었으나, 아줌마 속마음은 꾸밈이 없고 단순했다.
어느 날인가 아줌마가 나에게 하소연했다. "우리 서방인가 그 인간은 나만 괴롭히고 돈도 잘 안 주고 나가서는 돈을 잘 쓰니 나만 괴롭다."라고 했다. 나는 아줌마가 딱해서 "우리 집에 가서 옷을 좀 나누어 주고 싶다."라고 했다.
아줌마가 우리 집으로 오셨다. 내가 살이 좀 빠져서 전에 입던 옷이 커서 안 입는 옷들이 있었다. 아줌마에게 외출복이나 일할 때 입을 수 있는 옷을 잘 챙겨주었다. 아줌마는 그 옷을 가지고 가셨다. "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호화롭게 사는 줄 알았더니 아줌마는 생각보다 알뜰하다."라고 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친절하게 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아줌마는 때때로 몸이 아프다고 했다. 손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고 했다. 내가 바라던 대로 옷을 맵시 있게 입고 다니시지 않았다. 내 욕심이었다. 여전히 머리는 수세미 같고 말씨는 거칠었다. 나는 다시 아줌마에게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두 해가 지난 후였다. “아줌마 옷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옷을 드려도 될까요” 하고 물으니 아줌마는 좋다고 했다. 내 몸 치수보다 큰 옷들을 골라서 드렸다. 그리고 저녁 무렵, 농협 앞 길가에 나가보니 내가 준 옷 보따리가 길가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왠일이냐?’고 아줌마한테 물으니까 아주머니 남편께서 “남의 옷을 가져오는 것은 기분 나쁘다”라며 길가에 버렸다고 했다. 나는 다시 그 옷들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옷을 제자리에 걸어놓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옷에 대한 감각이나 생각이 모두가 다를 텐데, 너무 일방적인 내 생각만 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아주머니의 남편 입장에서는 불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 일 이후, 가끔 그 아주머니 남편을 만날 때 그분은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텐데, 아저씨 마음만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아 미안했다.
아파트 앞 길가에는 장사꾼들 말고 헌 가방 헌 구두를 고치는 분이 계신다. 한 평쯤 되는 좁은 공간에서 구두 수선을 하거나, 가방 수선을 하신다. 큰 언니가 주신 어깨에 메는 가방이 접촉 부분이 끊어져 고쳐달라고 갔었다. 아저씨는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셨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그 좁은 공간에서 신발을 고치고 가방을 고치신다. 아저씨는 아내와 헤어져 살고 있었다. "삼시 세끼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어보니까 "밥은 밥솥이 알아서 해주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반찬도 내가 잘한다."라고 했다. 불편한 몸으로 살면서 모든 것을 다 해내고 사는 그분이 참 대견했다.
가끔 주말이면 철판구이 돼지고기며 순대 장수도 그곳에 트럭을 받쳐놓고 팔고 있다. 초여름 한 철 수확한 오디를 노부부가 가져와서 판다. 누구라도 눈치껏 장사를 한다. 사람들이 발로 많이 밟는 그곳은 물건 팔기 좋은 곳이다. 그곳에서 누구는 반찬거리를 사고, 누구는 농사지은 채소를 팔아먹고 사는 것이다. 자주 만나는 그곳 사람들이 서로 이웃이 되고 정이 오고 간다. 큰 마트에서 느낄 수 없는 따스한 온기가 있다. 욕쟁이 아줌마가 어느 때는 아침밥도 제대로 못 드시고 오셨다기에 바나나를 한 덩어리 사드렸다. 아줌마가 고맙다며 잘 먹겠다고 했다. 한여름에는 열무를 팔러 오는 할아버지도 계신다. 손수 가꾸신 싱싱한 근대, 아욱, 대파, 열무는 오전에 다 팔린다. 사람들이 마트 물건도 좋지만, 직거래 농산물을 더 좋아한다.
내가 물건을 살 때는 원칙이 있다. 절대로 물건값을 깎는 일은 없다. 모든 사람이 물건값을 깎으면 상인은 엄청 손해를 볼 것이다. 그리고 더 달라고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더 달라고 하면 그 역시 손해가 많다. 백화점보다 좋은 것은 때때로 말하지 않아도 못난이 오이나 호박을 덤으로 줄 때가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정은 늘 부족한 것이다. Al가 지배하는 세상은 사람들을 기계처럼 다루어질 것이다. Al가 못하는 일은 정을 나누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고 가는 인정 속에 행복할 것이다.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 마음에 따스한 온정이 늘 함께하기를 빈다.
어린 날의 농촌 유학
신탄진에는 금강이 흐른다. 어린 시절에도 신탄진과 현도면 사이에 다리가 길게 놓여있었다. 초등학교 삼학년, 어린 나는 청주에서 버스를 타고 문의면 금강 나루터까지 와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내 손에는 작은 된장 항아리가 들려 있었다. 나루터에서 언덕길을 올라와 한참을 걸으니 신탄진에서 현도면으로 가는 다리가 나왔다. 그 긴 다리를 건너 신작로를 걸었다. 때는 유월 중순쯤 되니까 제법 날씨가 따가웠다. 비포장도로 가에는 자갈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길은 저 멀리 하얗게 광목을 펼쳐 놓은 것같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된장 항아리가 너무 무거워서 좀 쉬기도 하며 뙤약볕을 걸어갔다.
고개를 넘고 보니 내가 사는 동네가 보였다. 논둑길을 걸어 언니가 사는 자취방으로 왔다. 내가 사는 마을 이름은 매봉마을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논둑길로 15분쯤 걸어가면 그곳에 현도초등학교가 있었다. 나보다 열 살 많은 둘째 언니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일곱 살 내 남동생도 이곳에서 일학년으로 입학했다. 나는 삼학년으로 청주 청남초등학교에서 전학을 온 것이었다.
내가 다녔던 청남초등학교는 청주 시내에 있는 다른 학교보다 매우 시설이 낙후되어 있었다. 이유는 주성 중앙 석교는 일제가 공들여 지은 학교였다. 학교 운동장이나 교실이 잘 정돈되어있고 학교 안에 작은 동물원이며 꽃밭 모든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운동장도 넓고 나무들도 많고 선생님들도 실력이 좋다고 했다. 청남초등학교는 민족진영 선각자들이 돈을 모아서 학교를 세웠다고 했다. 그 시절 우리 학교는 청주시 변두리 학교였다.
어머니는 어린 두 남매를 잠시 둘째 딸 학교에 다니게 했다가 2학기에 석교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키려고 현도초등학교로 보낸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믿어주신 것 같았다. 10살 어린 딸이 충분히 자기 몫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러기에 여름날 된장 항아리를 들려 보낸 것이리라.
농촌에서 생활은 재미가 있었다 저녁 해가 지면 동네에 있는 선배 언니 오빠들은 아이들을 불러 모아 긴 장대를 걸어놓고 높이뛰기 훈련을 시켰다. 부드러운 흙이 맨발바닥에 닿는 느낌은 아주 좋았다. 나는 아이들과 곧 친해져서 흙담장 아래에 공깃돌을 잔뜩 쌓아놓고 공기놀이를 하였다. 오월이 다가오자 학교에서는 학예회를 하였다. 우리 반에 명숙이와 주희가 언니 자취방에 모여와서 학예회에 쓸 장식물을 만들기도 했다. 언니는 때때로 집에 늦게 올 때도 있었다. 나는 언니가 오기 전에 미리 작은 솥에 밥을 앉혀놓고 솔가지로 불을 때서 밥을 해놓고 기다렸다. 언니는 오학년 언니에게 고전무용을 가르치고 오기 때문이었다.
봄이 한창 무르익을 때는 학교 가는 길가에 물웅덩이에는 개구리알이 뭉쳐있는 것이 보였다. 버들가지가 휘늘어지고 클로버꽃이 필 무렵이면 올챙이가 논에서 제법 자라고 있었다. 내 동생과 나는 주인집에 있는 낡은 체를 가지고 논으로 나가서 올챙이를 훓어서 깡통에 담아 가지고 와서 어미 닭에게 주었다. 병아리를 깬 어미 닭은 올챙이를 잘도 쪼아 먹었다. 어미 닭을 따라다니던 병아리 중에는 실수로 큰 분뇨통에 빠져 죽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주인집 아저씨가 애처러워하기도 했다. 어느새 여름이 다가왔다.
우리 세 식구는 학교 옆 교장 선생님 관사로 이사를 했다. 관사는 일본식 집이었다.
방 한 칸은 교장 선생님께서 사용하시고 또 한 칸은 언니와 조 선생님 그리고 나와 내 동생이 한방을 썼다. 관사에는 목욕탕도 있었다. 여름날 더워서 목욕을 하고 있으면 동네에 남자아이들이 몰려와서 유리창을 막대기로 치기도 했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누워 계셨다. 그리고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잘 못 알아들었다. 흰주가 뭐냐고 내가 자꾸 물으니까 흰 죽이라고 똑똑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흰죽을 쑤어다 드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교장 선생님께서 그 죽을 얼마나 잘 드셨을까? 과연 괜찮았을까?’ 생각해본다.
여름은 아름다웠다. 아카시아 숲길을 걷다 보면 진보라색과 감청색 중간쯤 색상을 입고 있는 잠자리가 날고 있었다. 잠자리 색상이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잡고 싶었다. 학교 운동장은 내 놀이터였다. 저녁 무렵 운동장에 가면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새 친구를 발견했다. 개미였다.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개미들이 어디로 가는지 구경하였다. 그리고 학교 옆에 작은 동산이 있었다. 거기에는 적송이 많이 있었고 휘늘어진 가지에는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긴 새끼줄로 매달려 있는 그 그네는 내가 타기에는 너무 커서 겁이 나서 타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민 선생님이셨다. 얼굴이 하얗고 안경을 쓰고 계신 남자 선생님이셨다. 교무실에서 우리 반으로 오실 때는 슬리퍼 소리가 유난히 컸다. 따각따각 소리에 선생님이 오시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선생님 슬리퍼는 아마 헌 구두를 잘라 재활용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선생님도 여동생이 있었다. 그 여동생은 넷째 언니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언니는 작은 냄비를 나에게 주며 네 담임 선생님께 쌀을 좀 꾸어오라고 했다. 냄비를 들고 선생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갔다. 선생님은 학교 안에서 살고 계셨다. 선생님께서 하얀 쌀을 내게 담아주셔서 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주말에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텃밭에는 예쁜 도라지꽃도 피어있고 마당 가 꽃밭에는 황매화도 피어있었다. 그리운 엄마 품에서 하루를 보내고 내 동생과 언니, 나는 또 현도면 매봉마을로 갔다. 그리고 방학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어느덧 여름방학이 시작되어서 나는 집에서 놀고 지냈다. 개학이 되어 학교를 가는데, 석교학교에는 갈 수가 없었다.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부정한 일을 정리한다기에 학군이 어긋나는 학생들은 무조건 자기가 배정받은 학교로 다시 가야 했다. 석교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모조리 청남 학교로 옮겨와야 했다. 아무튼 시설이 허름한 그 학교를 그래도 재미있게 다녔다. 어린 시절 잠깐이었지만, 농촌에서 살았던 추억은 내게는 아름다웠다.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큰 언니가 만들어 입혀준 붉은 줄무늬 치마와 초록 물방울무늬가 있는 여름 윗옷은 시골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옷이었다. 잠깐이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경부선 철길이 동네 뒷산 쪽으로 지나갔다. 사람들은 기차가 지나가면 시간 짐작을 했다. 둘째 언니는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노트에 글을 쓰는 일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망초꽃을 보며 해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기도 했다.
봄 소풍은 현암사가 보이는 금강 가로 갔다. 몽돌이 깔려있고 푸른 물이 흐르고 있던 그 풍경들. 놀라운 것은 현암사 가는 그 길에서 보이는 산 풍경이었다. 온통 붉은 산이었는데, 군데군데 진달래가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문둥이가 숨어 있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육이오 전쟁 때 혹시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인민군과 싸웠던 격전지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바라던 학교에는 못 다녔지만, 그보다도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무지개 언덕 너머 아름다운 꿈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도 가끔 그 다리를 차를 타고 갈 때가 있다. 현도면 매봉마을을 지나갈 때면 어린 시절 이 생각나고 저 동네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명숙이 주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도 궁금하다.
* 충북 청주 출생, 청주교대 졸업, ≪상상의 힘≫ 수필 부문 신인상, 한국미술협회 회원, 가톨릭 미술가회 회원, 대전사생회 회원,
시집『당신은 나에게 선물이었어요』
![문학 [동행]](http://t1.daumcdn.net/cafe_image/cf_img2/img_blank2.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