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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성본 따르기
류주현
무남독녀 조카딸이 “상의드릴 말씀이 있다.”며 큰애비인 나를 찾아왔다. 꽤 충격적이고 뜻깊은 효녀스런 얘기였다. 결혼을 앞둔 나이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멋진 청년이 있는데 아버님이 학벌. 직장 등을 이유로 혼인을 극구 반대하신다는 것이었다. 누구 말도 듣지 않고 큰아버지 말씀만 들으시니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우선 조카 사윗감을 몇 차례 불러 식사를 하며 식습관, 말씨, 글씨, 걸음걸이 등을 살폈다. 그리고 선친 산소 주변 밭에 가서 내게는 버거운 퇴비 나르기, 나무 심기 등을 시켰다. 한 번도 안 해본 농사일을 진솔하게 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밭에서 삼겹살을 굽고 라면을 같이 먹는 모습에 정감이 갔다. 아우님에게 대포 한잔하자고 불러 제수씨도 같이 오시면 좋겠다고 해서 주흥이 무르익을 때, 우연히 조카딸 남자친구를 만났었노라고 했더니 거구인 동생 성격대로 벌컥 “형님 그놈 말씀은 하지 마세요.” 한다. ‘오직 딸 하나인 애비로서는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며 그날은 뒤로 물러섰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내 생일이라고 가족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조카딸도 미리 이야기한 대로 남자친구와 동행했다. 예견한 대로 동생은 “여기가 어디라고 데려왔냐!”고 화부터 낸다. “잔칫날은 지나가는 걸인도 불러 밥상을 차려주는 부모님을 생각하시게” 하면서 “오늘은 내 손님이니 식사나 하고 가시게!”하고 조카딸하고 그를 내 옆에 앉혔다. 동생도 하는 수 없이 “식사만 하고 빨리 가라”고 한다. 조카딸은 “아빠 알았어!” 하며 “큰아버님 큰절 받으세요” 하며 같이 절을 하고 “약주 한잔하세요”라며 교대로 법주를 따라준다.
얼마 후 두 사람이 찾아와서 동생의 완고함에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각자 회사에서 휴가를 내고 배란기를 맞추어 멋진 휴양지로 약혼 여행을 떠나거라! 그리고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오거라!” 했다.
3개월 후 예상대로 손이 귀한 집안에 새 생명을 잉태한 것이다. 조카딸은 임신한 거는 숨긴 채 남자친구 부모님을 찾아뵙고 “다른 모든 건 하시는 대로 따르겠어요. 다만. 한가지 자식의 성을 엄마의 성을 갖도록 허락을 해주세요. 1주일 내 연락이 없으면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큰절을 올리고 왔다고 했다.
다녀온 3일째 되는 날, 예비 시아버님께서 불러 찾아뵈었더니 “네 말대로 할 테니 아버님 허락을 받으시게!” 하셨다고 나에게 연락이 왔다. “이 아이가 그 집 대를 잇게 하는구나!” 하고 나는 내심 기뻐했다.
얼마 후 어머님 제삿날에 모두 모이게 되었다. 부모님 유지대로 “그저 동기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는 말씀을 다시 상기하며 나는 술이 거나해졌다. 조카딸도 제사에 참석해서 음식 장만하는 것을 돕느라 힘들어하기에 잠시 쉬게 했다. 속도 모르고 동생은 “젊은 애가 약해서 문제야!”라고 한다. 제사상을 물리자 다과상이 들어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을 한가지 한다”라고 하자 동생은 긴장하며 “형님 부탁인데 모두 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정말 고맙네! 약속했네! 제수씨도 들으셨죠?” 하고 “금전 문제도 아니고 부모 유택 옆의 산을 사자는 것도 아니다”라며 아우의 마음을 느슨하게 했다.
“첫째, 금연하실 것(3개월 시한. 보건소 교육) 그리고 미인 홍차(엘리자베스 여왕이 마시고 극찬하며 차 이름을 지었다 함) 한잔 마시고 얘기하세!”하고 말을 꺼냈다. “둘째, 조카딸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도록 적극 협조할 것”이었다. 침묵이 흐른 뒤 “형님! 저와 사돈 맺자고 하는 모모한 집안이 두 곳이나 있는데 저 녀석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 형님께 부탁드리려고 했다.”라고 한다. “좋은 차 한잔 더 하세”하며 나는 여왕이 홍콩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보이차 이야기로 잠시 숨을 골랐다.
“조카딸의 약혼 여행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이 새 생명을 잉태하기까지 그리고 그동안 선친 유택 주변 정리, 나무 심기 등 수차래 검증과정을 거쳤으며 이 모든 일은 조카딸과 예비 사위 그리고 내가 계획한 일이었다”라고 하자, 아우는 얼굴색이 변하더니 한동안 말을 못 했다. “형님이 어떻게? 제 편을 들어 주셔야지요!” 하며 탄식한다. “나는 내 사위보다 낫다고 생각하네. 내 사위는 고생을 안 해봐서 궂은일도 못 하고 위급상황 시 대처 능력이 부족하지만, 이 사람은 그렇지 않네! 본인의 학벌과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남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다네. 특히나 겸손하고 검소하고 건장하다네!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을 나는 느꼈네!” 하고 다독였다. “그리고 곧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이고 모든 혼사 비용은 사양하겠다고 하니 요즘 젊은이 같지 않은 기백과 독립심이 가상하지 않은가? 자식도 엄마 성을 따르듯, 데릴사위로 아우님을 친아버지로 알고 정성으로 모시겠다고 내게 맹세까지 했네! 더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있는 집 자식 사위로 보면 남 보기 좋겠지만, 있다고 건방지고 헛지랄이나 해서 딸년 눈물 빼고 친정에 드나들면 어찌할 텐가? 그 또한 못 볼 짓 아닌감?” 하며 지인 자식들 이야기를 하며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조카딸 뱃속에는 듬직한 손주 녀석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즈음 제수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번 더 밀어 부쳐달라”는 당부의 말씀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를 수 있었다.
지금 내 아우는 고흥에 살고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지금은 뱃속의 손주가 자라 제법 똑똑하고 착하고 건강한 초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사위는 장인 장모님을 친부모님 이상으로 모시고, 손주가 방학하면 대전서 고흥에 내려가 한 달씩 있다 온다고 했다. 더욱이 바깥사돈과 친구분들도 와서 바다낚시를 즐기신단다. 나는 아우에게 “황토방을 지어 그분들이 편히 계시다 가도록 해야겠다”라며 “나도 공사비를 내야겠다.”라고 너스레를 떨어본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참 어려운 혼사였다. 유교적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 세대가 아들이 엄마 성을 따르도록 하는 일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두 가족은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사랑은 국적도 없다 하지 않았는가? 성을 허물고 결혼한 두 부부는 행복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지고지순한 사랑과 그 결실로 얻은 손주는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것이다.
덕적도(德積島)
멀리 섬들이 보였다. 나와 함께 연안부두에 내린 세 명의 친구는 미지의 땅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육지에서만 살다 오래간만에 탁 트인 시원한 바다를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게다가 갈매기며 항구의 낯선 사람들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쇠도 소화한다는 20세의 젊은 혈기 왕성한 청년들에게 덕적도는 새로운 땅이며 희망이었다.
섬에 도착한 우리는 바닷가 송림 숲에 군용 A 텐트 두 개를 쳤다. 일렁이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장소였다. 이어 근처 민가 우물로 내려가 물을 길어오고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그런 후에 바닷길을 따라 산책에 나섰다. 정말 무인도나 다름없이 고요한 해변이었다. 그때가 1970년대 초이니 그럴 만도 했다. 우리가 이 섬을 여행지로 택한 이유는 군대 가기 전에 조용한 장소를 택해 우정을 돈독히 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캠프파이어를 위해 숲과 해변에서 나무를 주워 멋지게 불을 피웠다. 저녁 식사와 더불어 소주 파티가 질펀하게 벌어졌다. 안주는 고등어통조림에 김치, 양파. 감자 등을 넣고 끓인 김치찌개로 했다. 통기타를 치는 친구가 흥을 돋우자 모두 신이 나 고고장이 됐다. 술들이 거나해 소리소리 지르며 “해도 잠든 밤하늘에”로 시작하는 ‘나는 못난이’부터 ‘해변의 여인’, ‘가거라 삼팔선’, ‘두만강아 잘 있거라’ 등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러댔다.
나는 뱃멀미가 가시기도 전에 과음한 탓에 속이 거북하여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거렸다. 그래도 낫지 않자 나는 친구들의 권유로 마을상회로 내려갔다. 다행히 어촌상회에도 구급약이 있었다. 나는 가게에서 활명수와 소화제를 먹고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내가 식은땀을 많이 흘리자 주인아주머니가 “잠시 방에 누웠다 가요”라고 해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아주머니는 급히 나가 빨래를 걷으셨다. 정신이 좀 들어 쏟아지는 소나기를 하염없이 보노라니, 아주머니가 사립문을 열고 나가셨다.
“어머니가 어디 가시나요?” 했더니 따님은 빙긋이 미소 짓는다. 모녀만 사는 집인데 젊은 남녀 둘만 덩그러니 있으려니 매우 어색했다. 그녀는 탁자에 앉아 혼자 맥주를 먹으며 “속이 불편해 못 드시지요?” 하며 한 병을 비운다. 머쓱한 표정으로 퍼붓는 소나기를 보며 서 있으니 처자는 내 옆에 와 나란히 서는 것이었다. 설핏하게 분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엄마는요?” 했더니 몇 시간 있어야 오신단다. 논에 나가 물길을 보고 온다고 했는데, 아저씨 집에도 들릴 터이니 늦을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아는 시간은 뜨거웠다.
제법 시간이 지나자 큰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복통도 잦아들어 나는 텐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대자로 누워 자고 있었다. 나는 비설거지를 대충하고 바다로 향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해변을 걷다 보니 맞은 편에서 아까 본 아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 갔다. 우산을 같이 쓰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감정이 용광로 불처럼 타올랐다.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밀려오는 해일을 막는 거와 다름없었다.
나는 송림 숲을 뒤로하고 마을까지 그녀를 배웅하며 내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3박 4일 동안 그곳에 머물며 가게로 자주 내려갔다. 그녀는 이런저런 반찬을 주는 등 여러 도움을 주었다. 나에게는 꿈결 같은 나날이었다.
이젠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곳의 풍경도 그녀의 모습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가고 싶고, 보고 싶은 얼굴이다. 가녀린 몸매에 말수가 적고 눈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젠 그녀도 나처럼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배도 나왔을지 궁금하다. 그녀가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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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정동 출생, 전북대 경영대학원. «상상의 힘» 신인상(2026)
봄은 실눈을 뜨고
전 월 득
사월의 봄날, 따듯한 햇살을 머금고 자신 있게 웃어 보이던 꽃들의 향연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바람이 스치는 길목마다 화사했던 꽃잎들은 하나둘 흩어져 제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에 연록은 소리 없이 돋아나 산과 들을 차분히 물들이고 있다. 여린 잎들은 마치 신생아가 태어나는 것처럼 꼬물거리며 배시시 눈을 비비고 실눈을 뜬다.
바람이 스치는 길목마다 흩날리던 꽃잎은 어느새 조용히 땅 위에 내려앉았다. 떨어진 꽃잎들은 말없이 지난 계절의 기억을 더듬고, 연록들은 저마다 푸른 꿈을 키우며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나뭇가지 끝마다 연둣빛 잎사귀들은 마치 세상을 처음 만난 아이들처럼 여리고 투명하지만, 그 안에는 어느 꽃보다 단단한 생명의 기척이 숨어있다.
고고하고 기품 있는 목련화도, 정열의 꽃 동백도 소리 없이 떠난 자리에 어쩌면 쓸쓸함만 남았을 줄 알았지만, 봄은 늘 그 빈자리에 또 다른 빛깔을 채워 넣는다. 지는 꽃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던 마음도 잠시, 어느새 새롭게 피어나는 초록 앞에서 살며시 미소 짓게 된다. 계절은 끝나는 법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연록은 그렇게 말없이 피어나는 희망이다.
사라진 꽃들의 자리에 다투지 않고 빈 곳에 스며들어 다시 살아갈 이유를 조용히 찾는다. 고요 속에 차분하게 기다리는 동안 다른 생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연록은 서두르지 않는다. 자리를 차지하려 형제들과 다투지도 않고, 그저 어깨를 펼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전의 화려함을 대신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냥 제 속도로 천천히 결대로 빛을 받아들이고 바람을 익히며 자신의 시간을 열어간다.
비워진 줄 알았던 자리에도 이미 다른 숨결이 스며들었고, 눈에 잘 띄지 않던 변화들은 조용히 제 몫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서둘러 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생, 다투지 않아도 이어지는 생의 방식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지내던 자연의 질서인지도 모른다. 화려함이 지나간 자리를 아무 말 없이 채워가는 연록처럼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어느새 산과 들은 점점 푸르러 간다. 무르익은 연록 속에서 산 벚꽃과 찔레꽃이 함께 어우러져 저마다 봄날의 빛을 더하고 있다. 머지않아 산 벚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오롱조롱 벚나무 열매가 열리고 곧이어 까맣게 익어갈 것이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의 시간을 따라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나 또한 말없이 계절을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하니, 문득 어린 시절 콩밭을 매시던 엄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오빠가 없던 우리 집의 들일은 엄마의 몫이었다. 한학자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시골 일이 서투시니, 무논을 관리하실 뿐 밭일은 아예 돌아보지 않으셨다. 엄마 혼자 콩밭에 나가실 때마다 어린 나는 엄마를 따라다녔다. 산딸기를 따고 산머루를 따며 엄마의 말동무가 되어 오르락내리락했던 그 시절, 엄마의 콩밭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는 온종일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만 하셨다. 구부러진 오솔길을 한참 따라가면 뻐꾸기 울음소리 낭랑하게 들리고, 산골짜기 졸졸 흐르는 개울가에서 가재 잡고 다슬기 줍던 내 모습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홉 살 무렵, 엄마의 간식 바구니를 내려놓고 버찌를 따는 재미에 빠졌었다. 작고 맨질맨질한 버찌를 한 움큼씩 입에 넣으면 달콤쌉싸름한 맛에 매료되어 해가 지는 줄도 몰랐었다. 그때였던가, 엄마는 갑자기 일손을 놓고 딸을 찾아 산모롱이를 돌며 목청껏 부르시는 바람에, 고요하던 산골짜기는 쩌렁쩌렁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휘돌고 있었다. 덩달아 어디서 나타났는지 뻐꾸기가 머리 위로 맴을 돌며 빨리 엄마한테 내려가라고 엄호하듯 따라다녔다. 이제 와 생각하니, 철없던 내가 얼마나 엄마를 놀라게 했던 것인가 죄송함이 밀려온다. 엄마의 일손을 돕기는커녕, 엄마의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바쁜 일손을 놓고 허둥거렸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항상 땀에 젖은 옷을 입은 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던 엄마에게 지금쯤 옆에 살아 계신다면 맑고 따뜻한 온천욕 여행을 함께 다니며 맛있는 밥도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키오스크 앞에서 엄마의 식성에 맞는 음식을 콕콕 찍어 선택하는 재미에 빠져들고, 옛날 버찌를 따 먹던 추억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이미 멀리 떠나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잡을 수 없이 흘러간 세월이 아쉽고 원망스럽다. 우리 인생은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상실감이 너무나 크다. 나목들은 죽은 듯 침묵하고 있다가도 때가 되면 다시 강한 생명력으로 푸른 잎을 피워 올린다. 사라진 것 같던 생명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애지중지 가꾸시던 꽃밭에는 지금도 해마다 목단꽃과 수국이 환하게 피고 질 것이다. 이른 봄 붉게 돋아나는 함박꽃 새싹을 보면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뛰어가던, 나를 기다리고, 도라지꽃은 올록볼록 여문 듯 봉오리를 머금고 있을 것이다.
삽 작문 앞의 노란 골 단추 꽃잎 속으로 벌 나비가 숨어들고, 떨어진 목단 꽃잎 주워 족두리 만들고, 감꽃 목걸이를 목에 걸고 놀았던 이웃집 숙이는 지금쯤 무얼 할까. 아직도 아홉 살 소녀처럼 어른거리는 친구, 그도 나처럼 백발이 되었으리라. 고향은 있으나 쉽게 가지 못하는 그곳, 내 어린 꿈이 잠들어 있고 철없던 시절 엄마와 함께한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해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움이 돋는 푸르른 내 고향, 온 산에 진달래 만발하고 앞산에 싸리꽃은 올해도 파도처럼 일렁거리며, 나뭇가지마다 실눈이 뜨고 연록은 자라서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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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 수필 부문 신인상, «대전문학» 시 부문 신인상, ≪농축투데이≫ 문학상 수상, jwd5038@naver.com.
홀로 선 꽃(獨花)
이 정 진
저녁나절 산책길을 나섰다. 아직은 햇살이 뜨거워 걷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작은 개천을 따라 걷다 보니 길가에 가득 핀 푸른 수레국화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꽃들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초여름 햇살은 들판 위에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꽃밭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참을 바라보던 눈길은 결국 한곳에 머물렀다.
붉은 양귀비 한 송이가 푸른 꽃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스스로 드러내려 한 것도 아니고 다른 꽃들과 다투려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제 자리에서 피어 있었을 뿐인데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꽃으로 향했다.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짧은 한시 한 수가 떠올랐다.
藍菊間貴妃獨立
其華陽猜麗面焦
遇風懷惜暫止慰
夏始春末歲流然
푸른 수레국화 사이에 양귀비가 홀로 서 있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햇살마저 시기하는 듯 고운 얼굴은 그을려 있었고, 지나가는 바람은 안타까워하며 잠시 머물러 그 얼굴을 식혀 주는 듯했다. 여름은 시작되고 봄은 끝나 간다. 세월 또한 그렇게 흘러간다.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애써 뽐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가 느껴지는 것.
그러나 아름다움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 강한 햇빛은 꽃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었지만, 동시에 꽃잎을 말리고 그을리게 했다. 한때 곱고 매끄럽던 꽃잎 가장자리는 서서히 마르고 있었고, 붉은빛은 깊어지면서도 어딘가 지친 기색을 품고 있었다. 햇빛도 그 꽃을 시기한 것은 아닐까?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눈에 띄어서, 결국 가장 먼저 뜨거운 시선을 받게 된 것은 아닐는지.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꽃을 쓰러뜨리지 않았다. 그저 잠시 머물며 꽃잎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햇빛에 그을린 얼굴을 식혀 주듯, 아무 말 없이 위로하듯. 삶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며 때때로 강한 햇빛 아래 서게 된다. 기대와 책임, 경쟁과 시선 속에서 마음은 조금씩 지쳐 간다. 때로는 아름다움 때문에, 때로는 성실함 때문에, 때로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잠시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와 같은 곁에서 건네는 짧은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아무 말 없이 함께 걸어 주는 사람, 잠시 쉬어 가라고 등을 토닥여 주는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다. 들판의 양귀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봄은 끝나 가고 여름은 시작되고 있었다. 꽃은 조금씩 시들어 갈 것이고, 푸른 수레국화도 언젠가는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슬프지만은 않다. 계절은 본래 그렇게 흐르고 세월 또한 그렇게 지나간다. 꽃은 피고 지지만 그 순간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푸른 수레국화 사이에 홀로 서 있던 붉은 양귀비 한 송이처럼.
새벽
- 빈 종이 한 장
우리는 매일 새벽을 맞이한다.
나는 오랫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나의 새벽은 언제나 분주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머릿속은 이미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듯 순서를 매긴다. 무엇이 더 급한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 가늠하는 일은 어느새 오랜 습관이 되었다.
내 새벽의 공기는 효율과 속도라는 단어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오차 없이 움직이는 시계바늘처럼 하루를 준비했다. 그렇게 잘 짜인 궤도는 너무도 익숙한 나만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공간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전과는 다른 삶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조금은 느슨하고, 애써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줄어든 삶. 조금 늦는다고 해서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 계획으로 가득 찬 하루가 아니라 특별한 목적 없이 주어진 시간 속에 머무는 하루가 많아졌다. 계획 없는 휴일 같은 날들이 늘어났다.
예전의 나는 계획이 없다는 것을 게으름이나 나태함으로 여겼다. 목적 없는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길을 걸어도 목적지가 있어야 했고, 책을 읽어도 얻는 것이 있어야 했으며, 사람을 만나도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매일 아침 나를 움직이던 촘촘한 그물망에서 벗어난 삶은 휴일 아침처럼 평안하지만은 않았다. 무언가 불안했고, 혹시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패배감이 밀려왔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한동안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돌아보면 나는 시간을 보내는 일조차 하나의 질서로 여겼다. 타인의 시선과 나의 의지가 함께 쌓아 올린 그럴듯한 건축물 속에서 만족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삶을 생각해본다. 시간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그저 흘러가도록 두는 일. 나의 무의지가 오히려 나의 의지가 되도록 스스로를 가만히 놓아두는 일.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내 안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본연의 이끌림이 나를 인도하도록 허락하는 삶 말이다.
머리가 시키는 ‘해야 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가슴이 원하는 ‘하고 싶은 일’에 귀를 기울이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계획을 지워낸 삶에서는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길가의 작은 풀꽃이 눈에 들어온다. 그늘진 골목길의 정취에 마음이 머물고,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오래 귓가에 남는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으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잘못 들었다는 후회 대신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는 기쁨이 찾아온다. 효율의 세계에서는 비효율이 곧 낭비가 된다. 하지만 무계획의 세계에서는 그 모든 낭비가 오히려 온전한 나의 시간이 된다. 나의 무의지를 의지로 삼는다는 것은 아마도 내 안의 자연스러움을 다시 깨우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고,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젖어 드는 나무처럼 주어진 시간의 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몇 시까지 무엇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지금 마시는 커피의 쌉싸름한 맛이 살아난다. 창문 너머로 스치는 바람의 촉감이 선명해지고, 햇살 한 줄기마저 새롭게 다가온다. 그 순간만큼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 오롯이 지금이라는 시간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매일을 무의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분주한 아침과 철저한 준비를 요구한다. 해야 할 일은 남아 있고 책임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의 줄을 아주 가끔은 놓아주어야 한다. 내일의 새벽은 분명 오늘과 다를 것이다. 어쩌면 다시 습관처럼 순서를 매기고 구두끈을 매며 하루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언제든 숨을 수 있는 무계획의 여백 하나를 품고 있다면, 그 분주함마저 조금은 부드러워질 것이다. 채우는 삶에 미덕이 있다면 비워두는 삶에도 담대한 가치가 있다.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긴 채, 무의지가 이끄는 자유로운 풍경 속에 하루쯤 머물러 보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을 잠시 지워낸 그 빈자리에 비로소 평화가 번진다. 예전의 새벽은 해야 할 일과 바로잡아야 할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 한 장을 마주하는 새벽도 좋다. 의지로 채우던 시간만큼, 비워둔 시간 또한 삶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임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 나는 잔뜩 적힌 이정표 대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하얀 종이 한 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나만의 작은 일탈을 시작해 본다.
晨暫虛心 새벽, 잠시 마음을 비우다
晨氣計百端 새벽 기운에 백 가지 생각을 헤아리고
閑心影事脫 한가로운 마음에는 일의 그림자가 벗겨지네
休雲留處處 쉬는 구름은 곳곳에 머물고
風只無聲去 바람은 그저 소리 없이 지나가네
無爲非怠惰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고
任運是眞安 흐름에 맡김이 참된 편안함이네
今曉不履霜 오늘 새벽은 서리를 밟지 않고
白紙對碧天 빈 종이 한 장으로 푸른 하늘을 마주하네
오전
- 가장 빛나던 시간
오전은 아마도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출발의 마음은 굳고, 발걸음은 더욱 경쾌하다. 더 큰 힘이 되는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나 따뜻한 눈길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활기찬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은 생각보다 좋은 곳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우리의 출발점은 때로 어둡고, 목표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늘 먼저 걸어간 선배가 있고, 함께 걷는 동료가 있으며, 뒤에서 힘을 보태는 후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서도 용기를 낸다. 혼자라면 망설였을 길이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 걸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작은 용기가 되기도 한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결제를 맡길 일이 있다면 오전에 하라."
농담처럼 들리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오전의 사람은 오후의 사람과 조금 다르다. 마음에 여유가 있고, 인내심이 살아 있으며, 상대의 말을 한 번 더 들어줄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득 지난 세월이 떠오른다.
사회 초년병 시절, 결재를 받으러 가는 일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난감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고, 기안서를 고치고 또 고친 뒤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서류를 꺼내 놓고는 이것은 이렇게 되었고, 저것은 저렇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상사의 입모양과 표정을 살피며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등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오곤 했다. 그런데 상사는 서류를 잠시 훑어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여기에 사인하면 되나?”
순간 긴장이 풀리며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무 데나 하셔도 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날은 분명 오전이었다.
시작은 늘 절망보다 희망이 앞선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고, 어떤 난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살아 있다. 부족한 것은 경험이지, 의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전이 좋다. 나의 오전은 언제나 의기가 충만했다. 앞날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렵지 않았고,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오전은 나의 30대와 닮아있다. 결혼을 하고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으며, 연구원으로서도 어느 정도 새내기의 티를 벗어났다. 맡은 일은 점점 늘어났고 책임도 커졌다. 연구의 성과 또한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어느새 나는 공학자로서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논문과 특허에도 나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무엇보다 주위에 좋은 분들이 많았다. 내가 힘들 때 조용히 다가와 “나도 이런 때가 있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지나고 나면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라.”며 위로해 주던 선배님이 있었다. 동료들은 함께 고민하며 걸어 주었고, 후배들은 늘 내 편이 되어 응원해 주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어렵지 않게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보다 함께하는 사람이 더 많이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그 시절은 나의 가장 빛나던 시간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이든 해 보고 싶었다. 기회도 나에게 주어졌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만큼 후회가 없는 시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을 나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돌아보면 그때의 용기와 자신감, 그리고 패기는 하늘이 내려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지금의 내 모습 속에서 문득 서른 살 무렵의 나를 본다. 삼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눈가에는 굵은 주름이 생겼고, 머리에는 흰빛이 스며들었다. 세월은 얼굴을 바꾸어 놓았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내 안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마음속 어디선가 젊은 날의 내가 말을 건네는 듯하다.
“아직 늙지 않았다. 연구원의 삶이 끝나더라도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 충분히 잘 살아왔다.”
나는 오늘도 오전의 햇살을 바라본다. 젊은 날에도 같은 햇살이 비추고 있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바라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태양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햇살은 다르다. 그것은 단지 나를 비추는 빛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함께 걸어온 나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빛이다.
나는 오늘 오전의 소중함을 느끼며 나의 30대를 잠시 그려본다.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 행복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다. 어쩌면 사람은 지나온 길을 돌아본 뒤에야 그 시절의 빛을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난 이 오전의 시간을 애둘러 한시로 기록하며 옛날의 풍경 속으로 빠져본다.
午前追憶 오전을 돌아보며
靑壯心滿勇 젊은 시절 마음은 용기로 가득했고
行路常不孤 가는 길은 늘 외롭지 않았네
功名隨歲積 공과 이름은 세월 따라 쌓여가고
三子伴家樂 세 아이들은 집안의 즐거움이었네
惜昔渾未覺 애석하게도 그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네
今朝始知悅 지금에야 비로소 그 기쁨을 알게 되었고
回看方知幸 돌아보니 비로소 행복이었음을 알겠네
餘照號靑華 남은 햇살이 나의 그 시절을 부르네
다음의 뜻
며칠 전, 오랜만에 반가운 지인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한참 대화를 이어가던 중, 지인이 불쑥 한마디를 건넸다.
"우리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골프 라운딩 한 번 가시죠.“
골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척 반가운 제안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그분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한국 사람들이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릿속으로 여러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한국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빨리빨리'가 먼저 떠올랐고, 메뉴를 고를 때나 결정을 미룰 때 자주 쓰는 '아무거나'도 생각났다. 나는 두 단어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한국인의 급한 성미를 잘 나타내는 '빨리빨리'가 아닐까 싶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 대답을 들은 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뜻밖의 단어를 들려주었다.
“아닙니다. ‘다음에’ 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지인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우리가 나눈 "다음에 골프 한 번 치자"라는 말도 실제로 골프를 치자는 약속이라기보다는 서로의 관심사를 통해 친근함을 표현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분도 골프를 좋아하고 나 역시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일 뿐, 반드시 날짜를 정하고 필드에 나가야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에게 건네는 가장 무해하고도 따뜻한 친분의 표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인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수없이 많은 ‘다음’을 말하며 살아간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설 때 점원으로부터 "다음에 또 오세요"라는 인사를 받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헤어질 때는 "다음에 술 한잔 하자"거나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자"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옛 동료와도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며 돌아선다.
‘다음에’라는 말은 참으로 기묘하고도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다음’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보장된 미래도 아니고, 반드시 찾아오는 약속된 시간도 아니다. 내일조차 알 수 없는 인간이 기약도 없는 미래를 이토록 자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자주 다음을 이야기할까.
아마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만남이 여기서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이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짧은 세 글자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인에게 '다음에'라는 말은 거절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는 가장 부드러운 정서적 표현인지도 모른다.
당장 날짜와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나는 당신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라는 뜻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약속이라기보다 마음에 가깝다. 물론 모든 다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다음은 정말 찾아오고, 어떤 다음은 끝내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순간 서로가 “다음에 또 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 그 말 한마디를 건넬 만큼 서로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했다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지인의 짧은 한마디 덕분에 평소에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언어의 온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으로 누군가 내게 “다음에 한 번 봅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단순한 인사치레로만 듣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말 속에 담긴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우리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조용한 마음을 함께 읽어내려 한다.
오늘 밤, 오랫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거창한 이유도, 특별한 계획도 필요 없을 것 같다. 그저 한마디면 충분하다.
“우리 다음에 얼굴 한 번 봅시다.”
한시로 정리하며, 나는 다시 한번 '다음에'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본다.
次者 다음은
道人常言次 사람들은 늘 ‘다음에’를 말하고
未定幾時逢 언제 만날지는 정하지 않지만
一語留餘暖 한마디 말에 따뜻함이 남고
人情在其中 그 속에 사람의 정이 있네
짧은 세 글자이지만, 그 안에는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헤어지며 말한다.
“다음에 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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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 출생, KAIST 항공우주공학과 졸업,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서『주영송수상록』,
『현대적인 의미로 살펴본 중용』, ljung4321@naver.com
이름
오 병 남
내 이름은 ‘오병남’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병’ 자는 돌림자이고 '남' 자는 사내 남이다. 왜 여자 이름에 사내 ‘남’ 자를 붙였을까? 다섯째 딸이니까 다음에는 남자 동생을 보라고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 이름이 좀 낯설었다.
언니들보다 못생겼다며, 이 딸도 댁의 딸이냐고 이웃들과 친척들이 말했었다. 여름방학 때, 우리 집에 놀러 온 이종사촌 오빠는 나보고 ‘촌년’이라고 불렀다. 거기에다 이름도 남자 이름이니까, 나는 남 앞에 자랑스럽게 나서지 못하고 수줍어하였다.
어머니는 세 살 아래 남동생을 낳으셨다. 내 이름값은 한 셈이었다. 여자 이름으로 예쁜 이름도 많을 텐데 해님이나 달님, 달래, 나리, 초롱, 하늘 같은 이름은 어떘을까? 불꽃 ‘병炳’ 사내 ‘남男’인 ‘병남’이라는 이름 석 자가 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일학년 때, 지금도 잊히지 않는 특별한 이름도 있었다. ‘부돌’ ‘후남이’와 같은 이름들이었다. 아무튼 이름 때문인지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는 모르나 나는 집에서 잔심부름을 많이 하며 자랐다. 어머니도 과수원에서 낫질을 했으니 딸도 흉내는 내야 할 것이 아닌가? 낫으로 잡풀도 자르고 작두로 아카시아잎을 잘라 닭 모이로 주기도 했다. 때때로 톱질과 망치질을 할 때도 있었다. 늘 일거리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빨래며 밥하기, 시장보기는 늘 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칠십이 넘고 기운이 없어도 어릴 때 해 본 그 일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주말농장에서 가지와 고추를 따고 풀을 뽑는 일 등이다. 손으로 하는 일이 싫지 않고 재미가 있다. 젊은 시절에는 아파트에 도배도 했다. 80년대 초에는 집주인은 직접 도배를 해야 했다. 흙으로 형상을 만들거나 손빨래, 다림질, 재봉틀로 무엇을 만드는 일 등 모두가 재미있었다. 남보다 내 손은 작은 편이다. 내 손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내가 이름 때문에 일하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병남'이라는 이름은 나쁘지 않다. 사내처럼 일하는 여자는 요즘 세상에 너무나 많다. 여자가 대통령도 하고 장군도 한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집안 살림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말도 있다. 내 이름이 남자 이름이라 하여 싫어할 필요는 없다. 괜찮다. 이름을 남기고 가신 여성들도 많다. 나라를 구하신 분들도 있다. 세상에서 제일 값나가는 것은 ‘이름값’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내 이름 석 자 뒤에는 어떤 말들이 오갈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개 숙여 용서를 청할 일들이 많다. 그러기에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는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부끄러운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소나 닭이나 돼지에게는 이름이 없다. 개에게는 사람이 이름을 붙여 준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옆집에 사는 다섯 살쯤 되는 아이 이름은 ‘개똥이’였다. 개똥이 아버지는 농촌에서 붉은 고추를 많이 사다가 집에서 불을 지펴 말린 후에 시장에 내다 팔았다. 아이 이름을 천하게 부르면 아이가 천덕꾸러기가 되어 큰 병도 잘 이기고 튼튼하게 산다고 해서 자녀 이름을 천하게 부른다고 했다. 나는 이십 대 초에 시골에서 잠시 살았다. 그때 그 동네에는 ‘수정이’라는 아이가 살았다. 수정이는 집에서 ‘소쿠리'라고 불렀다. 수정이는 한쪽 눈이 초점이 잘 맞지 않아 그의 부모님이 그렇게 부른 듯싶다. 내 별명은 ‘개코’였다. 내 동생은 언제나 나를 부를 때 ‘개코야!’라고 불렀다. 그럴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응!"하고 대답했다. 그런 훈련 때문인지 누군가가 나를 무시해도 마음에 큰 상처 없이 잘 살아왔다.
“사람은 남이 불러주는 대로 사람값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여자 이름으로 ‘곱단이’가 좋다. ‘향단이’도 괜찮다. 만약 내 이름을 바꾼다면 ‘곱단이’라 하고 싶다. ‘별님이’라는 이름도 좋겠다. 별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며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모들은 귀한 자녀에게 예쁘고 아름답고 큰 의미가 있는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준다. 그러기에 내 이름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듬으며 살아가려 한다.
가끔 누군가와 전화로 이런 대화도 나눈다. “거기 오병남 씨 댁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오병남 씨를 바꾸어 주세요?". 라는. 그러면 나는 “저인데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제야 병남이란 이름이 주인에게 제대로 대접받는 것 같다.
무심천
‘무심천’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냈을까? 없을 ‘무無’ 마음 ‘심心’ 내 ‘천川’, 참 좋은 이름이다. 무심천은 가덕면에서 발원하여 남일면 쪽에서 내려와 청주 시내를 휘감고 돌아 까치내 쪽으로 흘러 금강과 합류한다.
무심천은 내 어린 시절을 에메랄드빛으로 가꾸어 주었던 추억이 깃들어 있다. 네 살 무렵, 아버지와 셋째 언니 그리고 내가 무심천에서 메기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 돌 틈에 숨어있는 메기를 맨손으로 잡아 도시락에 넣고 집으로 왔다. 예닐곱 살 무렵, 동네 아이들과 나는 무심천 냇가로 가서 물속을 헤엄치며 놀았다. 물속에는 말풀과 송사리 떼, 붕어 새끼들이 놀고 있었다. 가만히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고기를 잡아 고무신 안에 집어넣었다. 넓은 물에서 놀던 물고기가 좁은 고무신 안에 갇혀서 이리저리 맴돌곤 했다. 모래로 집을 만들기도 했다. 엄마 방, 언니 방, 내 공부방과 부엌을 만들고 자갈을 모아 살림살이를 시작했다 말풀을 뜯어와서 음식이라고 차려놓고 땡볕 아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동네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올 때면 고무신 안에 있던 송사리와 붕어 새끼가 지쳐 죽는 일도 있었다.
유월이 되면 무심천 변에는 귀리가 자라 내 키를 조금 넘길 때도 있었다. 푸른 물과 하얀 백사장 그리고 귀리밭 사잇길은 푸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가끔 종달새가 귀리밭에서 하늘로 날아올라 노래할 때면 넋을 잃고 종달새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무심천 둑이 청주 시내 쪽만 둘러쳐져 있고 서동 쪽에서 내려오는 곳에는 둑이 없었다. 무심천 주변에는 납작하고 허름한 집들이 줄지어 있고, 사람들은 청주시 쪽으로 가는 길을 걷기도 했다.
일학년에 입학한 우리는 체육 시간에 무심천에 가기도 했다. 일학년 삼백여 명은 모두 냇가로 가서 물놀이도 하고 모래밭에서 씨름도 하고 목욕도 했다. 동그랗고 하이얀 몽돌이 깔린 흰 모래밭은 너무도 깨끗했다. 맨발로 모래 위를 걸으면 내 조그만 발자국이 모래 위에 자국을 남겼다. 때때로 학교 운동장에 무심천 모래를 퍼다가 깔기도 했다.
여름날 저녁밥을 먹고 온 식구가 무심천 냇가에 가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했다. 무심천과 함께한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자랐다. 중학교 이학년 겨울방학 때에는 물을 가두어 만든 스케이트장도 있었다. 밤중에도 전깃불을 달아놓고 스케이트를 탔다. 스피커에서는 이미자 가수의 ‘섬마을 선생님’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리 반 아이들은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나오면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스케이트장에서 열심히 스케이트를 탔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 스케이트를 탔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없어서인지 잘 타지는 못했다. 내 친구들은 스케이트 대회에도 나가서 상을 타기도 했다. 이후에 무심천 둑은 완공되었고 자동차도 많아졌다. 무심천 둑은 자동차들이 다니는 도로로 변했다. 푸른 물은 어느새 검은 물로 바뀌었고, 무심천은 빨래도 목욕도 스케이트도 탈 수 없을 만큼 오염되어갔다.
가끔은 어린 시절의 무심천이 그립다.
육이오 전쟁 전, 우리 집은 석교동이었다. 아버지께서 큰 기와집을 지으셨다. 나는 석교동 2구 48번지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젊은 청년이 매일 무심천 둑에 나가서 트럼펫을 불었다고 했다. 그 젊은이는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지 못했고 트럼펫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무심천 둑을 걸어서 사직동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겨울에는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어른들이 지게에 사람 열 배쯤 되는 솔가지 나뭇단을 지고 와서 모충교 둑 위에서 팔았다. 그 나뭇단들은 마치 열병식 하는 것처럼 줄지어 있었다. 아저씨들은 흰 바지저고리가 추위를 막아내지 못해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을 쬐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무심천 둑을 걸어서 왔다. 아침에 보았던 그 나무꾼들은 보이지 않고 둑은 조용했다. 큰 솔가지 나뭇단은 누군가의 집으로 옮겨져 아궁이에서 타고 있었을 것이다.
무심천에서 나무꾼들이 사라진 것은 몇 년 후였다. 산림녹화 사업으로 전국이 나무 심기를 할 때, 무심천 둑에도 벚나무를 심었다. 세월이 흘러 벚나무는 자라났고, 나는 봄철에 피어나는 벚꽃을 보며 그 길을 걸어 다녔다.
내가 다닌 청주여중에는 ‘무심천’이라는 교지를 발간했다. 둘째 언니가 쓴 시를 무심천 교지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제목은 ‘거품’이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거품은 사라져간다”라고 시작되는 시였다. 아마도 육이오 전쟁을 겪고 굶주리고 헐벗었던 가난이 사춘기 소녀를 힘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에 무심천은 파라다이스였다. 유월 초쯤 되면 흰 모래밭 옆에 펼쳐져 있는 귀리밭은 바람에 술렁이고 종달새가 귀리밭에서 알을 낳아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그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흰 모래밭과 푸른 물 그리고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 있고, 종달새 노래하는 그 장면을 영화로 만들고 싶기도 하다.
내 어린 시절은 비록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깨끗한 자연이 나를 감싸주고 키워주었다. 무심천은 내 마음에 흐르는 추억이고 푸르른 꿈이다. 그 푸른 물과 하얀 모래밭 그리고 종달새와 물고기, 말 풀들이 있던 그곳으로 가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보릿고개
‘보리’라는 말은 정겹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보릿고개’라는 말은 눈물겹다.
나는 육이오 전쟁이 다 끝나지도 않은 1952년에 태어났으니 내 어린 시절은 가난하기만 했다. 살림살이며 집이며 모든 것이 파손되거나 누군가 가져가기도 했었다. 누구네는 피난 갔다오니까 세간살이며 집이 다 망가지고 마당에 빈 놋쇠 요강이 나뒹굴고 있었다고 했다. 마당 가에 돌을 주어서 솥 걸을 곳을 마련하기는 했는데, 당장 밥을 지을 솥이 없어서 빈 놋쇠 요강을 모래로 싹싹 닦아서 보리쌀을 씻어 넣고 밥을 지어 아이들에게 주니까 배가 고픈 자녀들이 게눈감추듯 정신없이 그 밥을 맛있게 먹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전쟁 끝에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어도 책가방을 들고 학교는 다녔다. 언니들의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금을 구하러 어머니는 여러 사람을 만나러 다니셨다. 외삼촌께서 술도가를 하셨기에 친정으로 가서 돈 좀 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돌아온 말은 “가시나들 시집이나 보내지 무슨 학교를 보내냐.”고 보기 좋게 거절당하셨단다. 아무튼 포기할 어머니가 아니시기에 또다시 아는 분께 부탁하여 두 딸의 입학금을 마련하셨다고 했다. 그 시절, 우리 어머니는 비록 딸이지만 꼭 학교 공부를 시켜서 여자도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단다.
내 어린 시절은 늘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쌀이 귀해서 보리밥을 해 먹었다. 남자 어른들만 쌀밥을 드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보리밥으로 배를 채웠다. 쌀이 귀한 것은 그 시절에는 논이나 밭이 구불구불하고 비가 안 오면 벼가 말라 죽는 천수답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소로 쟁기질을 하여 농사를 지으니까 쌀 수확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쌀은 귀해서 돈처럼 계산하기도 했다. 농촌에서 집에 일꾼을 두면, 일 년 품삯을 쌀 몇 가마니로 정해서 주기도 했다. 쌀이 모자라니까 당연히 보리쌀을 먹어야 했다. 보리밥은 소화가 잘되니까 쉽게 배가 고팠다. 밥 짓는 것도 번거로웠다. 보리를 물에 씻어 절구에 한참 찧어서 부드럽게 한 다음 물로 잘 헹구어 삶아내어 소쿠리에 반은 건져놓고 그 남은 보리 물에 쌀을 조금 넣어 밥을 지었다. 나머지는 우물 안에 걸개에 걸어서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밥을 지을 때 사용했다.
보리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빈 논을 갈아엎고 골을 맞추어 씨를 뿌린다. 밭에도 보리농사는 잘 되었다. 추운 날씨가 풀리고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날 때면 보리밭은 초록 줄무늬로 가득했다. 삼월부터 유월 말 보리타작을 할 때까지 도시 빈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농촌으로 양식을 꾸러 다녔다. 그렇게 빌어온 쌀이나 보리쌀은 다음 해 많은 이자를 붙여 갚아야 했다. 아낙네들과 여자아이들은 산이나 들로 나가 나물을 캐거나 뜯어와 삶거나 데쳐 먹기도 했다. 보릿고개는 그 시절 사람들이 넘기기 힘든 세월이었다. 유월 말쯤 보리가 다 익는데, 그때 보리를 베어 탈곡하고 방앗간에서 보리를 찧는다. 때때로 장마가 일찍 오기라도 하면 비에 젖은 보리는 썩기도 했다. 밀은 보리보다 더 비에 약하니까 썩기가 더 쉬웠다. 나의 남편은 중학교 일학년 때 수양 엄마네 집에서 하숙하는데, 비에 젖었던 밀을 빻아 만든 시커먼 국수를 먹었다고 했다. 먹기 싫은 국수를 먹은 후에는 꼭 배탈이 났다고 했다. 넘기 힘든 보릿고개도 통일벼가 나오면서 좀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꼭 도시락 검사를 했다. 쌀밥만 싸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잡곡과 보리를 섞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세월은 흘러 내가 할머니가 된 지금은 보리쌀이 훨씬 비싸고 잡곡도 비싸다. 쌀은 남아돌고 보관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간다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보리농사는 옛날처럼 배가 고파서 짓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챙겨 먹으려 짓는다. 새싹보리는 사람들이 건강해지려고 먹는 귀한 식품이 되었다. 그리고 관광자원으로 농사를 하기도 한다. 푸르른 보리밭을 보면서 도시 사람들은 세파에 찌든 마음의 빈구석을 채우기도 한다. 보리가 누렇게 익으면 그 빛깔은 어머니 품속처럼 따뜻하고 편안하다. 낟알들이 긴 수염을 달고 고개 숙인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보리의 물결은 시원하기도 하고, 마음 저 밑에 켜켜이 쌓인 먼지 덩이까지 다 훑어 내는 듯하다. 이제는 보리밭 구경도 쉽지 않다. 사람들은 딸기며 특수작물 농사를 해야 수익이 나기에 보리농사를 많이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잠깐 현도면에서 학교에 다닐 때였다. 주인댁 부엌에 가득 쌓아 놓은 보릿짚이 왜 그토록 따뜻했는지 모르겠다. 불을 땔 때는 마디가 타면서 탁탁 소리가 났다. 가마솥에서는 보리밥 냄새가 구수하게 풍겼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그 냄새는 어머니 냄새처럼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여름방학이 끝나면 보릿짚으로 여치 집을 만들어 오기도 했다. 노르스름한 그 작은 초롱은 귀엽고 앙증맞았다. 어른이 해주기도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아이들은 혼자서도 만들 수가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보릿짚을 빨강, 초록, 분홍, 노랑, 파랑, 연두, 남색으로 물을 들여 말린 후에 가위로 보릿짚 가운데를 길게 자른 후에 신문지로 덮어 놓고 두꺼운 책이나 무거운 나무판으로 눌러 하루 이틀 지나면 평평하게 펴져 있었다. 고운 색깔로 물들인 보릿짚을 가위로 잘라 무늬를 맞추어 나무판 위에 붙이면 훌륭한 예술품이 되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는 보리밭을 밟아주며 운동도 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도 보내기도 한 그 시절이 그립다. 쉽게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그 풍경들은 이제는 찾아다녀야 볼 수밖에 없다.
푸르른 하늘 밑에 넓게 퍼져있는 그 초록 바다는 언제나 내 마음을 푸르게 가꾸어 주었고 누렇게 익은 보리밭은 사랑과 감탄으로 내 영혼을 휘감았다. 보리밭에서 낫을 들고 수확하는 여인네들은 이제는 가고 없지만,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던 그 절절한 목마름이 오늘을 살게 한 밑거름이었다.
보리는 ‘추위에 강해서 서릿발 같은 땅에서도 버티어내고 기어이 봄이 되면 푸르름을 자랑하는 그 꿋꿋함은 우리 민족성과 닮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본다. 밟혀도 일어나고 추워도 잘 견디는 보리가 언제나 그리운 것은 왜일까? 보리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삶을 살아내는 의지가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봄철 초록 물결은 꿈을 꾸게 해주었고, 추수할 때의 황금물결은 흐뭇하고 따스한 어머니의 사랑과 평화를 느끼게 한다.
창화네 가족
나는 여덟 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우리 엄마는 입학하는 날에만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교과서를 사는 것도 내 몫이었다. 선생님께서 교과서값을 적은 작은 인쇄물을 주시면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돈을 받아 학교에 냈다. 책도 내가 알아서 받아왔다. 내 친구 엄마들은 매일 학교에 와서 자녀를 지켜보았다. 우리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세 번 학교에 오셨다. 2학년 때 시골 언니네 학교로 전학 갈 때, 그리고 여고 다닐 때 생활관에서 어머니를 초청한 날이다.
“왜 엄마는 학교에 자주 오시지 않으세요”라고 물으면 “애가 하나둘이어야지, 이제는 지쳐서 못 간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머니는 선생님을 뵈러 갈 때,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다닌 청남초등학교는 청주 시내 변두리에 있는 학교다. 동네가 모두 시골 분위기였다. 거기에다가 육이오 전쟁 중에 북한에서 넘어 온 피난민까지 살았으니까 살림살이가 모두 곤궁했다. 창화네 가족은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창화가 사는 집을 사람들은 ‘수용소’라고 불렀다. 내 친구 창화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창화네는 남동생 둘, 오빠 하나, 언니가 셋이었다. 창화 큰언니는 미국으로 갔고, 둘째 언니는 우리 큰 언니와 여고를 함께 다녔다. 창화 오빠는 중학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학교 공부가 끝나면 창화네 집에서 놀다가 왔다. 수용소는 한 가구씩 길게 연결된 집이었다. 화장실도 따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면 이웃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밥 냄새가 이웃집으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어느 때는 창화 어머니께서 밥을 차려주시며 같이 먹자고 했다. 보리밥에 오이냉국 그리고 별 반찬이 없었다. 창화 아버지는 내게 시계 보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창화 오빠는 청주 중학교에서 도 장학생이라고 했다. ‘도장 찍는 학생인가’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충북도청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창화 어머니는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시고 친절하신 분이셨다.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남자들은 변변한 직업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고 옷이며 먹거리가 없어 헐벗고 굶주리고 살았다. 누구나 하루 세끼 배를 채우는 일이 그날의 과제였다. 우리 어머니도 ‘어린 자식 여섯을 어떻게 먹이고 입힐까’를 생각하며 늘 애를 태우셨다. 반찬의 기본인 간장조차 없었다. 어머니는 용기를 내어 셋째 언니에게 주전자를 들려 보내 창화 어머니에게 간장을 얻어 오라고 했다. 피난살이에 지쳤을 텐데, 청화 엄마는 나 먹기도 아까운 간장을 주전자 가득 보내주셨다. 창화 엄마는 기독교 신자였다. 어느 날은 우리 엄마가 재봉틀이 없으니까 창화네 집으로 바느질을 하러 가셨다. 자녀가 많으니까 학교 교복이며 집에서 입는 웬만한 옷들은 모두 만들어 입혀줘야 했다. 누구 옷을 지으러 가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창화 엄마는 내 일처럼 걱정하고 도와주셨다. 창화 엄마가 셋째 딸에게 부탁하여 “내가 몸이 아프니 네가 저녁밥을 좀 지어 주겠니”? 라고 했다. 셋째 딸은 부엌으로 내려가서 밥을 지으면서 투덜거렸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나만 시킨다”고. 창화 엄마는 “병남이 오마니 눈 꺼먼 며느리 얻지 말아요.”라고 했다.
어느 추운 날, 학교에서 오다가 창화네 집에서 놀았다. 창화가 예쁜 바비 인형을 보여주었다. 바비 인형을 산타할아버지가 선물로 가져왔다고 했다. 그런 일도 있을까? 산타할아버지라는 말은 처음 듣는 단어였다. 내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착한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 있는 큰언니가 보내준 것이었다. 바비 인형은 누우면 눈을 감고 세우면 눈을 떴다. 금발에 오뚝한 코, 짙은 속눈썹 그리고 긴 다리. 내가 보아도 신기했다.
창화는 노래를 잘 불렀다. 그는 일학년 대표로 전교생이 모여 있는 운동장에서 노래했다. 창화네는 2학년이 될 무렵 서울로 이사를 했다. 창화의 둘째 언니 창옥 씨는 약사가 되고, 공부를 잘하던 창화 오빠는 S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고 했다. 몇 년 전 대통령 후보로 잠깐 소개되기도 했다. 창화는 선생님이 되었고 그 후 소식은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자식들 데리고 피난살이 하기도 힘들고 어려웠을 텐데,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기 것을 나누어 주고 도와주는 그 마음에 감사할 뿐이다. 창화 아버지도 친절하시고 자녀들에게 사람의 도리를 잘 가르쳐주신 분이셨다.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신 분들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배고프고 헐벗고 살았어도 이웃 간에 서로 정을 나누고 살았다.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상
어린 시절, 야트막한 산자락 밑 초가집에는 두 평쯤 되는 평상이 샘가에 놓여 있었다. 그 평상은 아버지께서 나무판자를 구해 오셔서 손수 만드신 것이었다. 호두나무 그늘에 놓인 그 평상은 우리 가족의 쉼터였다.
한여름 저녁밥을 먹고 목욕을 한 다음에 마당 가 샘 옆에 있는 평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쏟아질 듯 하늘 위에 떠 있었다. ‘저 무수한 별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을 노래했다. 밤하늘은 고요하고 동네도 조용했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언니들, 나, 내 동생이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피난 시절 무주 강가에서 보낸 이야기를 하셨다. 강가 풀섶에 굴처럼 은신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밤낮을 보내셨단다. 때때로 뱀이 나타나기도 해서 뱀을 쫓아내기도 했었다. 강가니까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짓고 아이들은 강에 가서 목욕도 했으니 견딜만했었다. 가끔 미군이 무주 읍내를 빙빙 돌며 비행기에서 이슬 같은 것을 뿌리고 나서 그다음에 폭격하여 무주 읍내가 불에 탔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외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었다. 무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다. 그것도 모르고 친정 동네로 피난 간 어머니는 전쟁을 마중 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십 대 인민군은 아직 어린 소년병이기에 소총 개머리판이 허벅지 다리까지 내려오고, 걸을 때마다 개머리판이 다리를 탁탁 치고 있었다. 전쟁터로 내몰린 그 어린 병사들이 어머니 눈에는 애처로워 보였다고 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잘 먹지도 못하고 한여름 비지땀을 흘리는 그들은 어느 집 귀한 자손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길을 갈 때면 인민군은 꼭 도민증을 확인했다고 했다. 아무튼 법과 질서가 다 무너진 그곳은 동네에서 인심을 잃은 사람들은 제명에 살지 못하고 모두 총살을 당했다고 했다. 누가 누가 나쁜 사람이라고 인민군에게 일러바치면 길을 가다가도 총에 맞아 죽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고 했다. 이런 판에 우리 어머니는 아무 분별력도 없이 국민학교 오학년 큰딸을 읍내 어머니 친정집으로 가보라고 심부름을 보냈었다. 한낮 조용한 그 읍내 골목은 쥐새끼 한 마리도 다니지 않는 긴장감 도는 그 시간이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낮이었으니 다행이지 밤이 되면 빨치산들이 나돌며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큰언니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골목길 담벼락에 바싹 붙어 걸으면서 할머니 댁으로 갔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살아계셨고 전쟁이 끝난 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폭격에 놀라서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중공군이 다시 남하했던 겨울, 어머니는 피난으로 피반령을 넘고 계셨다. 수많은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여 고개를 넘었다. 소를 몰고 가시는 아저씨의 발걸음은 빨라졌고 추위에 떨며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정신없이 앞으로만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 어머니는 길에 누워있는 여인을 깨우고 있었다. "이 봐요, 아줌마! 어서 일어나요". 하며 그 여인을 흔들어 깨웠다. 그 여인은 배가 남산만큼 불러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아줌마 어서 길이나 가시지요". 하였다. 사실 그 여인은 죽은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죽었으니 장례식도 무덤도 없이 불쌍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 전쟁 중에 불쌍하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 역사는 반복되나 보다.
어머니는 힘든 일이 생기면 “피난살이도 했는데 이게 뭐가 고생이냐?”라고 하시며 우리를 다독이셨다.
한두 시간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잠들기 바로 전에 방으로 가서 잠을 자기도 했다. 한낮에는 그 평상이 쉼터였다. 나물을 다듬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와서 쉬기도 했다.
여름밤은 샘가에 피어나는 봉숭아꽃과 잎을 따고 백반 가루를 섞어서 짓찧어 손톱 위에 올려놓고 아주까리 잎으로 손끝을 싸매고 실로 손끝을 묶고 하룻밤을 지내면 그 이튿날에는 손톱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모기장 속에서 잠을 깨어나서 내 손가락을 매었던 실을 풀었을 때 그 붉은 빛은 나를 황홀하게 했다. 손톱이 다 자랄 때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손톱물은 가을 끝자락까지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마당 가 샘 옆 평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린 자녀들을 온몸이 닳도록 사랑으로 키워주셨던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삼베 홑이불을 덮었던 그 평상이 꿈처럼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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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청주 출생, 청주교대 졸업, 한국미술협회 회원, 가톨릭 미술가회 회원, 대전사생회 회원,
시집『당신은 나에게 선물이었어요』
면벽삼년(面壁三年)
김 동 일
면벽삼년(面壁三年). 그대로 풀이하면 "벽을 마주 보고 3년을 보낸다는 뜻으로, 달마가 수행할 때 벽을 향해 오랫동안 좌선했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찰에서나 있을 법한 이런 경구가 내가 입학하는 고교 교정의 제일 편한 자리에서 바위에 우뚝 새겨져 있었다. 그러잖아도 국내 굴지의 공기업에서 설립한 특성화 공고로, 3년간 학비 지원과 졸업 후 해당 공기업 취업이라는 솔깃한 조건이 구미가 당겼지만, 전교생 기숙사 생활이라는 구속과 통제에 주눅이 드는 터에 신입생에게 면벽삼년은 근엄한 화두로 다가왔다.
‘그래, 눈 딱 감고 3년만 고생하자.’가난한 시골 변방의 내게 이 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공기업 입사와 더불어 졸업 후 전문대 특수목적학과에 진학할 수 있는 특전까지 주어지니, 벽이 아닌 더 답답한 무엇이라도 3년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였다. 이 때문인지 입학과 동시에 동기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대부분 전국 각지에서 공부 꽤나 했다는 시골뜨기들에게, 전교생을 연대·대대·중대·소대로 나누어 통제하는 군대 조직과 한 방에 여섯 명이 생활하는 기숙사는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불평할 새도 없이 다가오는 첫 중간고사에서 불꽃 튀는 경쟁을 해야 했다.
면벽삼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면벽삼년에 대한 고행의 다짐은 첫 중간고사 결과를 받아 든 날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명석한 친구들이 너무나 많았고, 손재주가 없던 내가 해야 하는 실습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내세워, 나머지 면벽삼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여러 생각 끝에 내가 선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로 여러 상을 섭렵했기에, 글쓰기는 명석한 친구들 틈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 될 수 있었다. 당연히 일주일에 한 시간씩 주어지는 HR 시간은 글짓기반을 선택했고, 이어진 학내 글짓기에서의 잇따른 수상은 징검다리처럼 교지를 편집하는 학도호국단 문예부에 발을 들이는 계기로 이어졌다. 또한 나는 여기서 인생의 스승이 될 만한 국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비넥타이에 올백 머리, 교과서의 시를 읽어 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던 선생님은 글뿐만 아니라 사진과 난초, 연극에도 조예가 깊으신 예술가적 풍모를 지니신 분이었다. 가끔씩 외출증을 끊고 나가 선생님 댁에 들러 그리운 집밥을 먹으며, “학교생활을 잘 이겨내라”는 선생님의 격려 속에는 어린것들이 집을 떠나와 만만치 않은 조직 생활을 해야 하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비교적 자유분방했던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는 좋았으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거나 운동화를 구겨 신고 다니는 습관으로 선배에게 걸려 호실로 불려가 봉걸레 자루로 얻어맞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런 일상적인 폭력은 위계질서를 내세워 전교생을 쉽게 통제하고자 했던 학교로서는 알고도 묵인하는 일종의 문화였고, 나는 이러한 폭력과 일상을 숨 막히게 하는 통제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태권도나 구보로 시작하는 아침 점호는 그렇다 쳐도, 한 시간씩 진행됐던 저녁 점호는 청소 상태와 군대 내무생활과 다름없는 각 잡힌 정리 정돈을 확인받는 시간으로, 힘든 하루를 마감하는 죽비와 같았다. 겨울에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서 한 시간씩 서서 점호를 받다가 발에 동상이 걸려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면벽삼년의 첫해는 부적응의 혼란 속에서 후딱 지나갔고, 나는 어쨌거나 보내야 하는 나머지 시간의 벽을 찾아 청계천 헌책방과 학교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심지어 실습 시간에 몰래 문예지를 읽다가 혼쭐이 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이미 성적에 초월했던 그 시기에 만난 시인과 소설가는 답답한 학교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 늘어 가는 필력에 친구들은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하기도 했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사랑의 체험 수기로 써서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마지막 면벽삼년의 1년은 마치 군대의 병장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교지를 출판하는 학도호국단 문예부라는 특전을 내세워 점호도 열외 될 수 있었고, 식당의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은 문예부 후배를 앞세워 컵라면을 먹는 호사도 누렸다.
내 문학의 각도도 순수문학에서 함석헌 옹이나 김동길 교수같이 시대에 날을 세운 민족 지도자나 지성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나는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기도 했는데, 명문 학교가 즐비한 서울 강남 학군에서 수필로 장원을 받았으니, 그간 미친 듯이 빠져들었던 독서와 습작의 시간이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또 전국적으로 응모한 글짓기에서 입상하여 만난 수상자 가운데 인연이 되어 지금의 아내를 만났는데, 글짓기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오랜 시간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서울과 부산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넘어 보잘것없는 내가 예쁜 아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나름 글재주 덕분이었으니, 변칙이었지만 나의 면벽삼년은 그렇게 많은 인연과 추억으로 남았다.
졸업 후 취업하여 전공을 등한시한 덕분에 고생은 했지만, 면벽삼년을 채웠던 문학적 소양은 회사 업무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군사독재 시절에 수많은 교육과 이상한 운동이 주창되어 일주일마다 교육 일지를 남겨야 했지만, 나는 고교 시절 닦은 필력으로 빈 공간을 멋지게 채워 상사에게 예쁨을 받았고, 회사 행사의 기관장이나 노조 대표의 인사말도 쓰게 되었다.
삼 년, 똑바로 앉아서 벽만 바라보지 않고 벽 너머의 세계를 꿈꿨던 나의 면벽삼년은 아직도 나의 화두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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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논산 출생, 부경대 산업경제학과, ‘울림’ 시동인, eastone04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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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월 석
올해도 어김없이 유월 농번기가 찾아왔다. 황량하고 거무스름한 들판이 농부들의 땀이 모여 연두색으로 변해간다. 나도 지난 주말에 고향에 가서 모내기를 도왔다. 모내기가 끝난 집 앞의 열네 마지기 논을 바라보니 눈이 맑아진다.
1980년대,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의 모내기 풍경을 생각해보면 아름다웠다. 추억은 아름답게 포장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때는 농사일을 돕는 것이 힘겹고 지루했다. 아이들만큼이나 그 시절의 농부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달팠다. 그게 바로 60년 동안 농사일을 해오신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삶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못자리의 볏모를 한 움큼씩 지푸라기로 묶어서 지게에 한가득 짊어지고 모내기할 논으로 날랐다. 아버지는 지게 바소쿠리 밑으로 줄줄 흐르는 물을 온몸으로 받으시며 좁은 논두렁길을 뚜벅뚜벅 걸어 다니셨다. 모내기 하루 이틀 전, 미리 암소와 호흡을 맞추신 아버지는 소에 쟁기를 달고 질퍽질퍽한 논을 가로지르며 써레질을 하셨다. 아버지와 소의 하모니로 일궈진 논에 물을 대 놓으면 평평한 호수 같았다. 파란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이 영화필름 지나가듯 정겨웠다. 나와 동생은 써레질한 논에 듬성듬성 볏모를 던져 놓았다. 누나는 집에서 밥을 짓고 새참을 준비했다. 논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농부 두 명이 못 줄을 팽팽하게 당겨 말뚝을 꽂은 뒤 십여 명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못 줄에 표시된 빨간 실을 보고 모를 심었다. 모두 일렬로 서서 리듬에 맞추어 손으로 모를 논에 꽂아 넣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모내기는 아침 새참, 점심, 오후 새참을 먹은 뒤 청개구리 떼가 합창을 하고, 별이 하나둘씩 보일 때쯤 끝이 났다. 그런데 지금은 이앙기 한 대가 볏모 여섯 포기씩 열 줄로 심는데, 그 속도는 손모를 심을 때와 비교하면 가히 빛의 속도였다. 요즘,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은 중간중간에 벼 모판과 비료와 농약을 전달해주면 된다. 대부분의 시간은 이앙기의 화려한 공연을 보고 있으면 그만이다. 넓은 논이 금세 연두색 잔디밭으로 변했는데 그 모양이 예술작품 같았다.
2년 전 미국에 사는 지인이 한국에 왔을 때 핸드폰에서 구글 지도 앱으로 미국 주소를 검색해보니 넓은 잔디밭과 전원주택이 보였다. 나는 연두색 양탄자가 예쁘게 보였는데, 지인은 관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넋두리를 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가끔씩 아이들과 집 뒤편의 잔디밭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도 한단다. 자기 소유의 잔디밭이지만 깎지 않고 방치하면 벌금을 낸다는데,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참, 그 미국에 사는 동생을 생각하니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각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2024년 7월 15일 저녁, 그녀가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에 서둘러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지인을 위해 미국에서 맛보기 힘든 음식을 대접하려고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친한 형님이 생선회를 사주겠다고 했다. 유성구 노은동 주택가에 자리한 횟집은 주인아주머니의 손맛이 좋았다. 하지만 욕쟁이 할머니처럼 말투가 거칠어 소심한 사람들은 가끔 삐지기도 한다고 들었다. 우리 네 명 중 세 명의 집은 식당에서 가까웠다. 오랜만에 만난 것도 반갑고, 신선하고 쫄깃한 횟감과 밑반찬이 맛있으니 술맛은 말할 것도 없이 일품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좋은 사람끼리 만나는 자리에 어찌 음식이 맛이 없겠는가? 우리는 소주 한 잔, 두 잔 마시면서 각자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나는 오늘의 주인공인 동생의 미국 생활이 정말 궁금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결혼 후 두 남매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직장에서도 일 잘하고 상냥한 친구로 소문난 동료였다. 하지만 그녀는 1년 정도 휴직을 하다가 대학교 교직원이라는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과감히 포기했다. 도전정신이 강하고 청년 시절부터 아메리카를 동경한 남편과 두 아이의 교육을 위해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동생의 집은 남편의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테네시주의 한적한 마을에 예쁘게 지어진 전원주택이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 보니 집 앞에는 넓은 아스팔트 도로가 있었는데 주차선이 없었다. 집집마다 픽업트럭이 한 대씩 주차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멀리 시장을 보러 다니기가 편리하기에 모두 픽업트럭을 소유한 모양이었다. 동생 전원주택 뒷마당에는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구글 지도로 마을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니, 근처에 슈퍼나 편의시설 등이 보이지 않았다. 규모만 컸지 마치 우리 고향의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 마을 사람들은 금, 토요일에 이웃집을 번갈아 돌아다니며 술 한 잔에 각자 만들어 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몇 시간씩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동생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어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에 다니며 친구를 사귀고 영어를 잘 구사하여 문제가 없었고, 남편도 기술이 훌륭하여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바쁘게 지내는데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 동생 혼자만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 오래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데도 그 무료함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한국에서 맞이하는 지인과의 만남이 그녀에겐 너무 행복한 시간인 모양이다. 의사소통이 잘되는 지인 세 명과 맛있는 한국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동생은 한국에 오면서부터 미국에 다시 갈 생각을 하면 마음이 답답하다고 했다.
우리는 횟집에서 1차 회식을 마치고 노은동에 있는 ‘역전할매맥주’ 집으로 이동해서 가게 중간에 자리를 잡고 높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맥줏집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는데, 한쪽 벽에 노란색 조명에 격자무늬가 비쳤는데 디자인이 한국의 전통 문양이었다. 생맥주를 시켜 마시다가 우리 네 명이 만난 것을 기념하려고 종업원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종업원이 찍어준 사진이 잘 나왔는지 확인하면서 형이 “5년 전에도 우리 여기에서 사진을 찍지 않았나?”라며 기억을 상기시켰다. 형은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어 결국 넷이서 찍은 사진을 찾아냈다. 우리 넷은 사진 찍은 날짜를 확인하고 까무러치게 놀라서 한참 동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찍은 사진에도 가게 한쪽 벽에 노란색 조명에 격자무늬가 선명했다. 우리가 앉아있는 곳은 5년 전의 그 장소였다. 게다가 날짜가 2019년 7월 15일이었다.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오늘도 7월 15일이었다. 5년 전 오늘, 1차로 반석동의 ‘돈돼지돈’에서 돼지고기를 구워 먹었고, 2차로 ‘월드컵경기장 볼링장’에서 2:2로 볼링을 친 다음, 노은동의 ‘역전할매맥주’에서 생맥주를 마셨었다. 이런 신기한 일이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우리는 미소 지으며 술잔을 더 힘껏 부딪치며 맥주를 마셨다. 이 사건을 계기로 네 명은 모임을 만들었다. 물론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모임이어서 ‘모임’이라는 의미가 무색하긴 하다. 우리의 모임 명은 ‘715’였다.
2026년 7월 15일, 2년 만에 ‘715’ 모임을 하게 된다. 총 세 번째 모임이다. 얼마 전에 그녀가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그리운 고향 대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즘은 친척들에게 인사를 다니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미국에서 외롭게 생활하다 보면 향수병에 걸리기 쉽다. 나도 1999년 8월부터 1년 동안 중국에서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잠 못 이루는 일이 있었다. 나는 유학 가기 전에 26개월 간의 군 생활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시켰기에 어려움 없이 유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셨는지 내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좋은 인연이란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아쉽고, 오래도록 만나지 않으면 그리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미국 동생이 가까운 친척이나 애인처럼 세 가지를 다 충족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만나면 반가운 사람임은 분명하다.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 세 명은 2026년 7월 15일을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 나는 이번에 ‘715’ 모임을 하게 되면 신선한 해물찜과 돼지고기를 무한으로 구워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예약하려고 한다.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는 맛볼 수 없는 풍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715’모임을 통해 동생이 미국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고 향수병도 치유되기를 기대해 본다. 당연히 올해에도 마지막 방문할 곳은 노은동 ‘역전할매맥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종업원에게 이렇게 부탁할 것이다.
“우리 네 명 멋지게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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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 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 moon5865@hanba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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