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시조집, 『바람 속에서 피는 꽃』, 그루, 1991.
약력
-경북 상주군 내서면에서 태어남.
-계명대학교교육대학원 졸업(한문교육 전공)
-196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
-시조집 『제3악장【(1966)
시인
들리지 않는 소리 듣고
보이지 않는 빛을 보며
가냘픈 벌레 소리에도
잠들지 못하면서
황폐한 세상의 길가에
꽃을 심는 농부여
농부
궂은 비 맞아가며
일궈 놓은 논밭뙈기
밭 갈고 씨 뿌리고
붇돋우고 거둬 들이는 손
세월의 이랑이랑에
꿈을 심는 시인
노송
도끼질 톱질에도
끄떡 않고 견디면서
두 팔이 다 잘려도
다리로 버티고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초연히 역사 속에 섰다
몰아치는 폭풍 속에
의지로 맞서고
세상이 흔들어도
제자리 지키면서
꿋꿋이 수난의 시대를 살아 온
이 땅의 말 없는 주인
사방에서 유혹하여도
푸른 뜻을 지켜 왔고
보호색으로 살아 온 세월을
한 색깔만 고집하면서
굴욕을 참고 살아 온
뜻이 높았던 선비들
분재
시대의 가위질에
무참히 잘려 나간 손
크면 크다고 자르고
억세면 억세다고 자르고
정해진 틀에 맞추려고
마구 자르는 가위질 소리
힘으로 억눌러서
재갈을 물린 뒤에
꼼짝을 못하도록
철사로 동여맨 다음
온몸을 묶어 놓고 길들이는
가위를 쥔 사람들
깊은 산 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던 나무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목숨
잘라도 또 다시 돋아 나는
자유를 향한 의지여
독도
조국의 먼 발치에
받돋음하고 서서
고독을 쪼아먹고 사는
한 마리 바다 갈매기
뭍으로 향한 날개에
몰아치는 바람 소리
염원은 바위에 부딪혀
물보라로 부서지고
밀려왔다 밀려가며
밤낮 깨어 있는 바다
달무리 뜨는 밤에는
그리움으로 물드는 가슴
꽃게도 오징어도 잠든
칠흑빛 밤을 틈타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바다 건너 이리떼들
오늘도 동해를 지키는
역사의 파수병이여
난
기름진 땅을 피하여
돌 틈에 세월을 묻고
티끌 한 점 묻을 세라
세속을 등지고서
분수를 스스로 지키며
뜻을 지키는 선비여
→시조집 제일 앞에 실린 작품임.
헤엄
세상살이 모르면서
겁없이 뛰어들었다
망망한 바다에서
혼자 치는 서투른 헤엄
닿을 듯 닿을 듯하다가
아득히 멀어지는 피안
버릴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오직 단 한 번의 삶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
깜빡이는 등대불
얼마를 헤엄쳐 가야 할지
숨이 점점 가쁘다
말없이 구경꾼처럼
보고만 있는 물새들
세상에는 손잡아 줄
돛단배 한 척 보이지 않는데
희미한 불빛을 향해
오늘을 헤엄쳐 가는 사람들
섬
종일 문을 열러 놓아도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고
소음이 파도 되어
밀려왔다 밀려가면
세상은 망망한 바다
나는 한탄 외로운 섬
가을바람
모두가 바람이었네
세월도 내 젊음도
매미 소리에 취하여
한여름 조는 사이
너와 나 앉았던 자리
자취마저 찾을 수 없네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한
내 삶은 바람이네
이제 정신차려 보니
가을 속에 내가 섰네
설익은 모과 두어 개
가지 끝에 매단 채
매화
눈 쌓인 겨울 속에서
홀로 피는 봄
보는 사람 하나 없어도
수줍어 얼굴 붉히고
말없이 돌아앉아서
매무매 여미는 여인
들꽃
누가 몰래 와서
뿌려 놓고 간 씨앗
하늘이 내려 주는
은혜를 받아 마시고
해마다 제철이 되면
피고 지는 꽃이여
그늘진 응달에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그 모진 운명을
꿋꿋이 견디면서
한 톨의 보람을 위하여
오늘을 흙 속에 묻는다
자연이 가꾸고 거두는
섭리의 들판에서
제 나름 삶을 꽃피운 뒤
자취조차 남김없이
마음을 비우가 살다가
이름없는 민초여
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을 막는 또다른 문
문 안에도 문이 있고
문 밖에도 문이 있다
그 숱한 문에 갇혀서
문을 찾아 헤맨다
민들레꽃
잡초 우거진 길섶
무너진 돌담 서리
돌봐 주는 이 없어도
혼자 내 터전 지키며
이른 봄 양지쪽에 모여
무리지어 사는 민초들
세상은 넓어도
발붙일 곳이 없어
바람에 흩날리며
허공을 떠돌다가
어디든 터를 잡고서
뿌리 내리고 사는 삶
이웃끼리 함께 모여
서로 등을 비비면서
살림에 쪼들려도
인정만은 푸근하게
말없이 고난을 견뎌 온
이 땅의 착한 백성들
문 ‧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막아 서는 또 다른 문
문 안에 문이 있고
문 밖에도 문이 있네
그 많은 문을 두고도
문을 찾아 헤맨다
고목
가진 것 다 벗어주고
담 밑에 숨죽이고 서서
몰아치는 서릿바람을
온몸으로 막고 있다
해마다 봄을 기다리면서
긴 겨울을 견딘다
푸른 여름 풍성한 가을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봄볕 실컷 쬐어 보지 못한 채
사철 겨울을 살면서
비바람 노상 맞아도
팔자로만 여긴다
품안에 감싸 기른 것들
뿔뿔이 흩어 보낸 뒤
기댈 언덕도 없이
바람받이에 혼자 서서
세상일 눈감고 귀 막고서
멍하니 선 내 어머니
겨울 대추나무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것
다 떨어 주고 나서
걸쳤던 헌옷마저
아낌없이 벗어 주고
겨울을 맨살로 견디는
늙은 내 어머니
남장사
고향 먼 발치에
등불 하나 걸어 두고
세월의 강물자락
무념으로 다스리며
한 천 년 귀먹은 채로
졸고 앉은 돌부처
남장사 오백나한
원을 사뤄 밝힌 촛불
불두화 핀 환한 둘레
번져 가는 범종 소리
노악산 물드는 낙조
번뇌를 씻어내리는 물소리
아내
겉은 울툭불툭
이쁜 데 하나 없어도
세월에 깎이어서
미운 정 고운 정도 들고
천천히 뜨거워져서
오래 식지 않는 뚝배기
학
-이호우 시인
이승의 변두리에서
깃들일 가지조차 뺏기고
하늘 향해 날이오르다가
벽에 부딪혀 부러진 죽지
기인 목 가는 다리로 섰던
평생 목마른 삶
붓을 칼 삼아 휘두르며
썩은 데를 도려내고
어두운 거석구석을
등불되어 밝히다가
할 말도 다 못한 채로
영셩 붓을 던져 버리고
노닐던 낙강가엔
자취 감춘 나룻배
길이 넘게 대로 자라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엣가락 흥얼거리며
쉼없이 흐르는 낙옹가
게걸음
걸음을 잘못 배워
옆걸음으로 걸어 왔네
바로 걷지 않는다고
꾸짖던 아버지 목소리
어버이 세상 떠난 뒤엔
꾸짖는 이조차 없네
파리
권세 앞에서는
두 손 싹싹 빌다가
가엾어 살려주면
제 세상인 양 날뛴다
한치의 앞도 못 보는
약삭빠른 무리여
굼벵이
느리다고 비웃지 말고
힘없다고
짓밟지 말라
내 목숨이 소중하면
남의 목숨도 귀한 법
쇠고기 몇 근 값밖에 안 쳐주는
약한 자의 목숨 값
의암
썩은 것은 다 흘려 보내고
새로 태어난 남강
물빛은 변하여도
흐름은 옛가락인데
의암은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역사를 지키고 섰다
탈춤
온갖 탈을 쓰고
억지 춤을 추고 있다
방안에서 거리에서
분장을 짙게 하고
제 모습 탈 속에 감추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남의 장단에 춤추는
역사의 꼭두각시
쓸개도 밸도 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며
슬픔을 소맷자락으로 가리고
오늘을 춤추는 사람들
덩더쿵 덩더더쿵
세상은 한 마당 춤판
근심 걱정 다 떨어 버리고
어깨 들썩거리면서
신들인 광대가 되어
한 세상을 살거나
봄비
겨우내 얼었던 가슴
녹여 주는 그대 입김
눈쌓인 골짜기에
실개천도 흘려 놓고
피아노 건반을 치며
잠든 개구리 깨우는 소리
잔디
모진 겨울 속에서도
살아 남은 이름없는 목숨
밝히면 밝힐수록
단단해지는 역사의 등뼈
허리는 끊었어도
뜨겁게 뛰는 심장
한 뙈기 박토 위에
뿌리 깊이 내리고
헛벗은 산하 누비며
세월을 가꾸면서
이 땅의 가슴 빈 자리마다
꿈을 심는 민초들
그릇 ‧Ⅰ
속이 웅숭 깊으면
겉이 허술하고
겉이 매끈하면
안이 되바라지고
세상을 샅샅이 뒤져도
흠이 없는 그릇은 안 보이네
가족
가끔 칼국수 타령하는
시골서 자란 팔십 노모
라면을 밥보다 좋아하는
철부지 아이들
불현 듯 수제비국이 생각나서
아내 눈치 살피는 남편
한복에 비녀 꽂고
고무신 신는 어머니
몸에 잘 맞지 않아도
양장 입는 아내
날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거울만 보는 딸들
새벽 일찍 어머니 기척 없으면
가슴 덜컥 내려앚고
아이들 방에 기침 소리 나면
자다가 이불 덮어주고
아내가 몸져 누우면
연탄불 걱정을 한다
한솥밥 한이불 속에서
얽혀 사는 피붙이들
슬픔도 즐거움도
서로 반씩 나누면서
한 끝만 살짝 튕겨도
함께 우는 거문고
씨앗
언 땅에 엎드려셔
봄을 기다린다
땅 속에 묻혀서도
꿈은 늘 푸르고
돌자갈 모래밭에서도
악착같이 뿌리 뻗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도
햇볕 한 번 구경 못하는
그늘진 곳에서도
태양을 향해 고개 내미는
절망할 줄 모르는 의지여
안개
앞도 뒤도 안개 속
우리네 삶이란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은유의 장막
세상엔 희미한 불빛만
바람에 흔들릴 뿐
먼 데서 바라보면
생활은 한 폭 풍경화
안개에 가려져서
서로 못 보는 사람들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도
서로 모르는 안개 속
☞ ‘한치’, ‘먼데서’는 시조집에는붙여쓰기로 되어 있으나, 임의로 고침.
갈림길
험하고 가파른 길
쉽고 평탄한 길
쉰 몇 해 그 갈림길에서
헤매다 보낸 세월
하직도 제 길을 못 찾고
갈림길에 서 있다
안경알
먼지 낀 내 마음을
날마다 닦고 있다
닦아도 닦아내어도
먼지는 여전히 쌓이고
갈수록 흐려져 가는
내 마음의 안경알
팽이
바로 서라고 똑바로 서라고
호되게 종아리 치시더니
아버지 가신 뒤론
때려 주는 이조차 없어
똑바로 가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내 걸음걸이
첫날밤
온누리 깊이 잠든 밤
방파제를 몰래 넘어와서
그리워하던 섬을 안고
알몸으로 뒹구는 파도
하늘도 땅도 숨을 죽인 채
신방을 지키고 있다
물개는 물개끼리
새우는 새우끼리
하나로 어울려서
축제에 들뜬 시각
큰 둑이 터진 해변엔
환희에 찬 신음소리
힘이 넘친 파도는
후줄근히 힘이 빠진 채
시간의 사타구니를 빠져
슬몃슬몃 물러간 뒤
격정이 스쳐간 모랫벌엔
뒹굴고 있는 허무의 껍질뿐
큰기침 소리
할아버지 큰 기침에
여닫히던 솟을 대문
큰기침 사라진 뒤
잔기침 소리 들리더니
지금은 어른 없는 집안에서
높아지는 아낙네 목소리
변신
젊을 때는 앞만 보고
덤벼드는 멧돼지
중년엔 지나간 세월만
돼새김질하는 지친 황소
늙어선 욕심을 다 버리고
눈감고 졸고 앉은 바위
망월동 묘지
오월을 노래 부르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 비둘기떼
티끌을 쓸어 버린 광주 하늘에는
눈감지 못한 숱한 눈동자
조국의 가슴에 안겨서
영원히 잠든 젊은 넋들
□ 해설에서
「자기 성찰의 떨림과 울림」 / 문무학
따라서 ‘자기 성찰의 떨림과 울림’이 이 시집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각을 달리하여 시조의 형식과 기교의 면에서 살펴보며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조 형식 운용이 상당히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 열림은 꼭히 그 잘잘못을 따지긴 성급하지만 운율을 살리는 것이 시조의 특성을 가꾸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음으로 그의 시가 난해와는 아주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 아니다. 따라서 좋은 시조의 조건에 난해성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난해성을 제거하는데 시인 정재호는 소박하고 직접적인 비유로 대응하고 있다. ‘문제란 그 사람 자체다’라는 뷔퐁의 말을 생각하지 않아도 그의 소박하고 직접적인 비유는 그의 문체가 되고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그네」적 수업이 이 시조집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 비유의 방법이 그의 문체가 되어 버린 것 같지만 그것을 꼭 장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이 시조의 작품에서 삶에 대한 그의 끝없는 고뇌와 방황이 대상이 되고 있지만 작품이 효용론에 경도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것 또한 그의 문체처럼 오랜 세월 교단을 지키는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원로시인의 작품에서 받는 느낌은 그리 단순하지 아니하다. 연륜의 그에 묻힌 시인 정재호의 삶의 지혜가, 시의 행간에서 기료를 넘어 반짝이고 잇기 때문이다.
시인 정재호가 자기 성찰을 통해 삶의 진실에 접근해 가는 그 떨림과 울림으로 이 글을 읽었다.
1991년 초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