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욱(1897~1981) 박사가 걸어온 길
금강경으로 대중교화 한평생 바친 ‘스승’
“배고픈 나대신 다른 사람이 밥을 먹어줄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부처님 아들이라도 부처님의 지혜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수행하는 것을 미루지 마세요. 스스로 禪을 닦아 깨쳐야 합니다.
수시로 부처님을 부르고 기도하면 업도 소멸되고
열반하는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대중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수행을 강조했던
백성욱(白性郁)박사.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며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활동했던 그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불교였다.
수행에서 전법으로 이어지는 80여년의 삶 속에서
백 박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불법(佛法)을 공부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등대 삼아 고해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성욱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모 밑에 자랐다.
14세인 1910년 봉국사 최하응(崔荷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출가 후 경성 중앙학림에 입학한 그는 출가수행자로서 배움에 매진했다.
1910년대는 일본이 무단통치를 자행하던 시기,
중생을 품어야할 수행자가 일본의 통치아래 신음하고 있던
대중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성욱은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중앙학림 강사로 재직하고 있던 만해스님의 영향도 컸다.
만해스님과 함께 불교계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는
3.1운동 이후 김대용, 김법린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마침내 “선진문물을 익히고 대중을 교화하는 것만이
조선이 살 길”이라고 결론을 내린 성욱은
“장차 20만명의 조선청년을 깨우치는데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안고 유럽으로 떠났다.
1920년 성욱은 24세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 보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독일어. 라틴어 등을 익힌 그는
다시 남독일의 벌쓰불룩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고대 희랍어, 독일 신화사(神話史), 천주교 의식 등을 공부하며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25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부터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교수를 맡아 학인들을 지도했다.
후학양성에 힘을 쏟던 백 박사는 1928년 돌연 학교를 떠나
금강산에 들어갔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던 것일까.
금강산에서 그는 무섭게 수행했다.
안양암에서 홀로 지내던 백 박사는 〈대방광불화엄경〉 정근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하루 한 끼만 먹으며 1000일 기도를 하는 등
깨달음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홀로 수행한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동참을 원하는 대중들이 안양암으로 왔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 결국 지장암으로 거처를 옮겨
대중을 지도하고 수행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백 박사는 금강산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니 수행도 뜻대로 하기 어려웠다.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그는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다 광복이 되고 백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적극 동참한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 맺은 이승만과의 인연이 계기였다.
그는 한국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촉구하는
5만 여명의 서명이 담긴 연판장을 주한미군사령관에 전달,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 시기 그는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동국대의 틀을 마련했다.
1953년 8월 총장에 취임한 그는 8년 동안 본관, 과학관,
도서관 및 기타 부속건물 등 9000여 평의 건물을 신축했다.
‘고려대장경 보존동지회’를 맡아 고려대장경 영인사업에 착수했고,
동국대 장학회를 설립해 학생들을 후원했다.
강단에 서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금강경〉을 가르치고
대학원에서 〈금강삼매경론〉 〈보장경〉 〈화엄경〉 등을 강의했다.
1962년 5.16이 일어난 이후 총장직을 사임한 백 박사는
부천 소사동으로 내려간다. 그곳에 ‘백성목장’이란 간판을 걸고
농사를 지으며 중생구제에 나섰다. 법당도 한 채 마련했는데,
이곳에는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았다.
“불법이 있는 곳에는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목장생활은 단조로웠다. 1967년부터 3년간 이곳에서 수행한
홍익대 김원수 교수는 “아침저녁으로 정좌하고 앉아
〈금강경〉을 읽고 ‘미륵존여래불’을 정근하는 것을
공부의 기본으로 삼았다”고 회상했다.
목장에서는 누구나 새벽3시 전에 일어나야 했고,
눈뜨자마자 한 시간 가량 〈금강경〉 독송과 ‘미륵존여래불’ 정근을 했다.
4시에는 법회를 했다. 함께 지내는 3~4명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의문이나 느낌을 말하면 백 박사가 대답했다.
낮에는 울력을 했다. 당시 젖소목장을 운영했는데,
소젖을 짜거나 축사를 돌보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정신은 가만히 둬야 건강하고,
몸은 규칙적으로 움직여야 건강하다”는 백 박사는
낮에는 열심히 울력을 하고,
오후6시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금강경〉을 독송했다.
그는 “바친다”는 표현을 즐겼다.
제자들에게도 마음을 비우고 번뇌를 버리라고 하기 보다
늘 “바쳐라”하고 말했다.
“탐진치(貪瞋痴)를 갖고 있으면 병이 되고 참으면 폭발한다.”며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번뇌를 억누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그대로를 부처님 전에 바치라.”고 가르쳤다.
삼독심이지만 부처님 전에 공양하면 공덕을 쌓은 것이고,
부처님을 공경하게 되는 두 가지 득이 있다는 것.
“탐진치는 자신의 마음을 밝힐 밑천”이라며
탐심을 닦으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진심을 닦으면 자비를 배우고,
치심을 닦으면 지혜로워지기 때문에
결국 삼독심에 의해 마음이 밝아진다고 한 결 같이 말했다.
수행법으로는 앞서 얘기한
〈금강경〉 독송과 ‘미륵존여래불’ 정근이 주가 됐다.
이 두 수행법에 대해 인천대 정천구 교수는
‘보살의 현대적 화신-백성욱’에서
“백 박사는 미륵존여래불을 마음으로 읽고 귀로 듣다보면
자신의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게 된다는 말과 함께
〈금강경〉을 읽을 때도 부처님이 직접 마음 닦는 강의를 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고 부연했다.
백 박사는 제자들에게 1일 7독을 목표로 삼으라고 말하며
“〈금강경〉을 3회 이상 읽으면
무언가 뒤에서 밀어주는 힘 같은 것을 느낄 것”이라고 격려했다.
“정신은 대승을 본받고 생활은 소승의 조촐함을 배워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백 박사. 이 말처럼 그는 중생을 품을 줄 알았다.
홍익대 김원수 교수는 “수행하다 드는 생각이나 의문들,
하다못해 스트레스까지 받아주고 해답을 알려주신
자상한 스승”이라고 떠올렸다.
반면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수행자였다.
총장 재직 시 오후3시까지 모든 업무를 마치고,
이후부터는 수행하는 것 이외 일체 활동을 하지 않았다.
20여 년간 소사에서 생활하며 백 박사는
현대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전했다.
그가 부처님을 마음속에 그리며 ‘미륵존여래불’을 정근하고,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수행. “시간이 없어, 근기가 낮아”라는 말로
수행을 회피했던 불자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실천가능한 수행법을 일러주었다.
그는 또 “복은 받거나 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짓는 것”이라며 “복 짓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겠다는 마음먹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하고 생활하는 것 역시 수행이라고 알려줌으로써
일을 놓기 어려운 재가자들에게 구도의 길을 제시했다.
이런 그의 가르침은 지금도 수많은 재가자들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데 힘이 돼주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