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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평화의 길 3코스 제2부
석평로-갈릴리수양관-수정재-가자골-
연화사입구-아리수낚시터-연화봉입구-
후평1리마을-흑돈김포정-카페들길따라-
후평리수로-석탄리철새조망지-국은천-
한강방죽길-평화누리길쉼터-전류리포구
20241211
1.코스 소개 : 생략(제1부 참조)
2.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와 김포 석탄리철새조망지
제2부 : 석평로를 가로질러 석평로544번길 언덕에서 한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한강 건너편 지역을 처음에 북녘 땅인 줄 알았는데, 알아보니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통일전망대였다. 이제는 한강을 사이하여 파주시 지역을 바라보며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지역을 걸어가게 된다. 시암리 지역의 김포평야는 한강 서쪽에 광활하게 펼쳐지고 한강 건너편의 파주시 지역도 낮은 구릉이 있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들녘에는 철새들이 내려앉아 낙곡(落穀)을 쪼고 있고 겨울 한낮의 햇볕은 들녘을 따스하게 비춘다. 마음은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 발걸음이 가볍다.
하성면 시암리와 후평리를 경계하는 언덕 위쪽에 의령(宜靈) 남씨 남간(南簡, 1400~1440)의 재실인 수정재(守正齋) 앞에 수정재 건립 기념비, 그 동쪽에 예문관직제학 의령 남공 휘 남간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잠시 올라가 살펴 보았다. 의령(宜靈) 남씨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종중(宗中)에서 건립한 것으로 이 지역에 의령 남씨 직제학공파 후손들이 세거하는 것 같다. 이 골짜기 마을은 버스정류소 지명을 보면 가자골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가자골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형을 살펴보면 한강 안쪽에 드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고, 그 안쪽에 연화봉이 이어지며, 그 자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연화사에서 끊임없이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절과 관련된 지명인지 아니면 가재가 많은 골짜기 가재골이 가자골로 변한 것인지, 지명의 유래가 궁금하다.
평화의 길은 석평로를 따라 하성면 후평리 지역을 통과한다. 한강 서쪽에 드넓은 들녘을 품고 있어서 후평리(後坪里)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후평리 마을은 연화봉 동쪽과 남쪽 자락에 자리하여 한강 제방에 의하여 조성된 드넓은 간척농지를 바탕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후평리 들녘은 북쪽의 시암리와 남쪽의 석탄리, 마곡리, 전류리, 봉성리에 걸쳐 아득한 평야를 형성하여 광활한 김포평야를 이룬다. 김포평야는 김포반도 북쪽 하성면이 중심을 이루고 양촌읍과 통진읍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평화의 길은 후평리 마을을 지나 김포영야 들녘으로 나가 후평리 수로를 따라간다. 하성면 김포평야의 농업 용수는 국은천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갈래의 수로가 이어져 있는 것 같다. 평화의 길은 국은천의 수로를 따라 국은천이 한강에 합수하는 곳에 설치된 석탄리 배수펌프장으로 이어간다. 이 수로 주변의 드넓은 김포평야에 수많은 겨울 철새들이 몰려와 이곳에 떨어져 있는 낙곡을 먹으며, 겨울을 나는데 재두루미와 독수리도 온다고 한다. 이 철새들을 조망할 수 있도록 석탄리 국은천 옆 한강 제방에 석탄리 철새조망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조망지와 들녘에 재두루미 조형물을 조성하였다.
한강제방 철책길을 따라 석탄리, 마곡리, 전류리 들녘을 지나간다. 한강 동쪽에는 파주시 삼학산이 솟아 있고, 그 남쪽은 고양시 지역이다. 김포 석탄리와 마곡리 지역의 평야 안쪽에는 동성산과 태산, 그리고 더 서쪽에 김포의 최고봉 문수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김포평야와 겨울을 나는 쇠기러기와 큰기러기들의 비상과 휴식을 살피며 한강제방 철책길을 따라 남진한다. 정면에는 하성면 봉성리 봉성산이 동서로 길게 누워 있으며, 그 앞쪽 하성면 전류리포구가 평화의길 3코스 종점이다.
김포반도 최북단을 거쳐온 평화의길 3코스 탐방이 두려움의 감정을 일으키지만 오두산통일전망대를 확인하고 파주의 심학산을 보는 순간부터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은 철책이 이어지는 제방길이다. 평화의 길이, 진정한 평화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한강 양안의 철책이 사라지고 한반도에 평화가 넘쳐나야 한다. 그날을 희망한다. 그 희망이 남쪽만이 아니라 북쪽까지 퍼져 나가야 한다. 지금 건설 중인 경기제2외곽순환도로 김포-파주 구간은 철책 지하로 길을 뚫어 한강 하저터널을 건설한다고 한다. 한강 하류 지역 김포와 파주가 이렇게 연결되면 김포반도 북쪽과 경기 북쪽 지역은 일산대교와 행주대교까지 돌아갈 필요가 없이 곧바로 연결되어 양주와 연천, 포천 지역 그리고 김포와 강화도 지역의 연결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 길은 이 지역의 교통의 편리와 소통을 이어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앞으로 통일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석탄리쉼터와 전류리쉼터를 지나 전류리포구 앞으로 이어왔다. 봉성산은 앞쪽에서 손짓하고 전망대는 이마에 있는데, 그곳에 오르지 못하였다. 전망대에 오르면 한강을 경계로 한 김포와 파주시, 고양시 그리고 북쪽 오두산통일전망대와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는 뒷날을 기약해야 한다. 길동무들이 벌써 식당에 들어가서 길손을 독촉한다. 맛있는 점심과 소주를 위하여 발걸음도 가볍게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영화(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황지우(黃芝雨, 1952~)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전문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8.6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2분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석평로를 가로질러 석평로544번길을 따라 갈릴리교회 수양관으로 내려간다.
석평로544번길 언덕에서 한강 건너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조망한다. 들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낙곡을 쪼고 있다.
하성면 시암리 석평로544번길 언덕을 내려가면 오른쪽에 갈릴리교회 수양관이 자리한다.
하성면 시암리 석평로544번길을 따라 갈릴리교회 수양관 앞을 거쳐왔다.
하성면 시암리 석평로544번길을 따라 나즈막한 언덕을 넘어 석평로를 따라간다.
이곳은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한강 건너편은 경기도 파주시 지역으로 파주출판문화정보 국가산업단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시암리 들녘 뒤에 한강이 오른쪽에서 흘러와 왼쪽 나무 숲 뒤에 가려진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을 흘러서 임진강과 합류한다.
석평로544번길을 따라오면 석평로544번길은 끝나고 언덕에서 석평로와 만나 석평로를 따라 직진한다.
석평로를 따라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지역을 지나간다.
한강 서쪽 하성면 시암리와 후평리에 걸쳐 드넓은 김포평야가 펼쳐진다. 한강 건너 낮은 구릉 지역은 파주시 지역이다.
하성면 시암리 석평로에서 한강 건너편 왼쪽의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분명히 보인다.
오른쪽 언덕에 의령 남씨 남간의 재실인 수정재가 있다. 이 고개는 하성면 시암리와 후평리의 경계를 이룬다.
의령(宜靈) 남씨 남간(南簡, 1400~1440)의 재실인 수정재(守正齋) 앞에 수정재 건립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본 재실은 의령 남씨 7세손이신 중직대부예문관대제학 남공 휘 간의 재실로 관조이신 밀직공(휘 군남)의 6대손이시고 조선조 개국공신 1등이신 충경공(휘 재)의 차손으로 정종2년(서기 1400년)에 출생하시고 자호와 졸년은 전하지 않으며 세종실록에 「辛酉 직제학 공이 상소하기를 臣이 지사간원사를 제수하였으나 기력이 다하고 병세 날로 심하여 쾌유가 어려워 직사를 폐한지 오래되어 면직을 청하니 세종께서 짐은 병세가 깊은 줄 알지 못하였다 하시고 이조에 내려 "남간의 사람됨이 청렴결백하고 정도를 지켜 아부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동료들도 그 절행에 감복하여 "남간은 마땅히 풍헌(사간)에 으뜸이다.」라는 기록에 연유하여 수정재(守正齋)라 재실명을 삼고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지금에 이르러 준공을 보아 기념비를 세워 공의 영명하심과 명문거족을 이루신 음덕을 후세에 길이 기리고저 합니다. 20대손 정현 찬, 20대손 낙현 감수. 2000년 11월 1일(음 10월 6일)
수정재 동쪽에 예문관직제학 의령 남공 휘 남간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남간(南簡)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개국공신 남재(南在)이고, 아버지는 남경문(南景文)이며, 어머니는 방순(方恂)의 딸이다. 1419년(세종 1)에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형조좌랑에 올랐다. 1427년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좌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부사정(副司正) 성규(成揆)가 거짓으로 사정임을 자처하는 데 동성친(同姓親)인 우정언 성자량(成自諒)의 말만 믿고 전직(前職)을 조사하지 않아, 직무유기의 죄로 좌사간 김섭(金涉), 우사간 우승범(禹承範) 등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1430년 호조좌랑으로 다시 기용되어 공법(貢法) 제정에 관여, 전품(田品)을 9등으로 구분하여 징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지평이 되고 1432년 병으로 강화도에 휴양 중 정포만호(井浦萬戶) 도대평(都大平)으로부터 생선을 선물로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으나, 좌대언 김종서(金宗瑞)의 변호로 불문에 붙여졌다. 이듬해 우헌납, 1436년 장령을 역임하고 예문직제학을 거쳐, 1439년 지사간원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직무수행의 불능함을 들어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세종은 남간의 아부할 줄 모르는 절조와 청렴하고 성실한 성품을 가상하게 여겨 오히려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수정재 입구 언덕에서 걸어온 석평로를 뒤돌아보았다. 이 고개가 하성면 시암리와 후평리의 경계가 되는 듯.
수정재에서 내려와 하성면 후평리 가자골 버스정류소 앞으로 왔다. 지나온 후평리 가자골 마을을 뒤돌아본다.
하성면 후평리 가자골 버스정류소 옆에 평화의 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석평로를 따라 하성면 후평리 지역을 지나간다. 왼쪽 뒤 후평1리 마을, 중앙의 산은 연화봉이다.
석평로를 따라오다가 하성면 후평리 수정재 언덕과 가자골 마을을 뒤돌아본다.
후평리 들녘에 철새들이 낙곡을 먹고 있으며, 한강 건너편 파주시 파주출판문화정보 국가산업단지를 어림한다.
염불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며, 연화산 연화사를 가늠한다.
하성면 후평리 석평로에서 한강 건너 왼쪽의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전체 모습을 확인한다.
갈림길에서 왼쪽 아리수낚시터 앞을 거쳐와서 갈림길을 돌아보니 일행들이 석평로를 따라 통과한다. 이 길을 따라 들녘으로 나가도 되는데 평화의길 정코스를 따라가고자 갈림길로 되돌아가서 석평로를 따라 왼쪽으로 통과한다.
이곳에서 아리수낚시터 앞을 거쳐 한강 철책 방향으로 나갔다가 갈림길의 이정목 앞으로 되돌아왔다.
오른쪽에 아리수낚시터가 있는 이 길을 따라가도 후평리수로에서 평화의 길과 만난다. 이 길을 따라갔다가 되돌아왔다.
왼쪽에 아리수낚시터가 있으며 석평로를 따라간다. 오른쪽 무청을 말리는 철조망 울타리 뒤의 산은 연화봉이다.
해발 75m의 연화봉 (蓮花峰)에는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한강하구의 영토전쟁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승리하면서 이곳에 주둔하게 된 고구려 병사는 마을에 살고 있는 백제 낭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백제군이 반격하여 고구려군이 한수(漢水) 이북으로 패퇴하게 되자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그 후 낭자는 돌아오지 않는 낭군을 찾아 강을 건너다 그만 개펄에 빠져 죽었다. 낭자가 죽은 그곳에는 한 송이의 연꽃이 피어났으며, 사람들은 그 곳을 연화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연화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하성면 후평리 마을의 당산나무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킨다.
석평로를 따라 나즈막한 언덕을 넘어간다. 오른쪽에 연화봉 등산로가 있으며, 연화봉에서 한강과 임진강 조망이 좋다고 한다.
평화의 길은 석평로를 계속 따라간다. 오른쪽 석평로427번길을 따라가면 후평1리 마을로 이어진다.
석평로427번길은 후평1리 마을로 이어지고 중앙에 후평교회가 보인다.
고깃집 흑돈 김포정과 카페 선탠스 힐 입구에서 평화의 길은 석평로 왼쪽의 석평로420번길로 이어진다.
석평로420번길 바닥에 DMZ 평화의 길 워드마크가 그려져 있다.
평화의 길은 석평로420번길을 따라 후평리 들녘으로 나간다.
석평로420번길에 아담한 카페 '들길따라'가 있다.
카페 방 출입구 오른쪽 벽에 '여보게! 茶 한 잔 들고 가게' 액자가 걸려 있다.
아리수낚시터 앞을 따라오면 이곳에서 평화의 길과 재회한다.
후평리 수로 옆 석평로420번길을 따라 후평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왼쪽 위에 양심농장이 자리한다.
후평리 수로 옆 농로를 따라간다. 후평리 들녘 안쪽에는 후평3리 마을이 자리한다.
후평리 수로 옆 농로에서 연화봉과 걸어온 후평1리 마을을 뒤돌아본다.
후평리 수로 옆 농로를 따라왔다. 오른쪽 길은 차도와 자전거도로이며, 뒤쪽에 후평1리 마을과 연화봉이 솟아 있다.
후평리 들녘 너머에는 한강이 흐르고 한강 건너에 파주시 오두산통일전망대가 왼쪽에 보인다.
후평리 들녘 너머 한강 건너 중앙에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예술마을과 통일동산이 있을 것이다.
중앙 뒤의 심학산 왼쪽은 파주 출판국가산업단지, 그 오른쪽 지역은 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지역일 것이다.
후평리 수로 옆 농로를 따라오다가 후평리 들녘과 중앙 왼쪽의 연화봉, 후평리 마을을 뒤돌아보았다.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霞城面) 후평리(後坪里)는 한강이 남북으로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적암, 약산 등이 있다. 적암은 마을 안에 붉은 돌과 큰 바위가 있어서 붉은 바위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졌다. 약산은 좋은 약초가 많이 있으며 약수도 있어 약산이라 불려온 뒷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 두산백과
후평리 들녘 안쪽에 김포시 하성면 후평3리 마을이 자리하고 뒤쪽에 후평2리, 오른쪽 뒤는 후평1리 지역이다.
김포시 하성면 후평리에서 석탄리(石灘里)로 넘어왔다.
중앙 뒤 한강 건너에 파주의 심학산, 농로 오른쪽은 석탄리 지역, 농로 왼쪽은 후평리 지역이다.
김포시 새마을회에서 농촌살리기 체험장으로 운영하는 생명살림학습장이 수로 북쪽 들녘에 자리한다.
수로 안쪽 석탄리 들녘에 습지가 형성되어 마른 물억새들이 장관을 이룬다.
석탄리(石灘里)는 북쪽의 후평리와 남쪽의 마곡리 사이에 끼여 있다. 중앙 맨 뒤에 봉성리의 봉성산이 보인다.
김포시 하성면 석탄리(石灘里)는 한강이 남북으로 흐르며 그 물줄기들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대촌리, 어모루, 벽정 등이 있다. 대촌리는 평장사라는 중국사람이 정착하여 살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모루는 어부들이 사는 해변의 비교적 높은 지대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벽정은 물이 맑고 푸르른 아주 좋고 큰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 두산백과
수로 옆 농로를 따라가다가 왼쪽 뒤 석탄리철새조망지로 올라간다. 왼쪽은 후평리, 오른쪽은 석탄리 지역이다.
수로 건너편에 한국조류보호협회 건물이 있고, 그 왼쪽 뒤 제방에 석탄리철새조망지가 보인다.
평화의 길은 수로의 물을 조절하는 수문 위쪽으로 이어간다. 잠시 앞쪽의 한국조류보호협회 앞으로 가 보았다.
한국조류보호협회 김포지회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입구에 표석과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독수리, 흑두루미, 쇠기러기, 큰기러기,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말똥가리, 황조롱이 등을 소개한다.
재두루미의 생태와 국제동향, 그리고 도래지로서의 김포시 등을 소개한다.
새사랑, 자연사랑, 인간사랑. 다친 새들의 쉼터, 조류방사장. 한국조류보호협회 김포지회는 1980년에 조직된 듯.
한국조류보호협회 입구에서 하성면 후평리로부터 석탄리까지 걸어온 수로를 살폈다. 왼쪽 뒤에 후평리의 연화봉이 보인다.
후평리 들녘에 겨울 철새들이 낙곡을 쪼고 익고 공중에는 쇠기리들이 날고 있다. 한강 건너편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보인다.
한국조류보호협회에서 나와 수문 위쪽 길을 따라 석탄리철새조망지로 간다. 평화의 길은 오른쪽 한강 철책으로 이어간다.
석탄리철새조망지 뎈에 재두루미 한 쌍의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중앙 뒤 한강 건너에 오두산통일전망대가 보인다.
재두루미는 두루미목 두루미과, 몸의 길이 1,2m, 편 날개의 길이 1.8m 정도의 대형조류이다. 한국에서는 10월 하순에 찾아와 이듬해 3월 하순에 되돌아가는 드문 겨울새이다. 한반도를 지나가는 나그네새이기도 하다. 1945년 이전까지는 1천 마리 정도의 무리가 각지에서 겨울을 났으나 이후 점차 줄어들어 6·25전쟁 후 수십 마리 단위로 줄어들었고, 최근에는 불과 20~30마리의 무리도 보기 어렵게 되었다. 1968년 5월 30일 천연기념물 제203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5월 31일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203호, 지정일 : 1968년 5월 30일, 한강하류 재두루미 도래지 : 김포시 한강변의 충적퇴적 지역, 파주시 산남동 (면적 2314만 3464㎡)
후평리 들녘에 대형 재두루미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낙곡을 쪼는 철새는 주로 쇠기러기이며 큰기러기도 함께 있다. 중앙 왼쪽 뒤에 연화봉과 후평리마을이 가늠된다.
평화의 길은 석탄리철새조망지에서 나와 한강제방의 철책길을 따라 전류리포구까지 이어간다.
국은천은 하성면 마곡리에서 발원하여 석탄리 한강으로 합류한다. 중앙에 동성산, 왼쪽 뒤에 봉성산을 가늠한다.
국은천(國恩川)은 김포시 하성면 마곡리에서 발원하여 전류리 한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이며, 하천연장은 3.2km, 유로연장 4km, 유역면적 10.05㎢이다. 유역의 형상은 비교적 수지상을 이루고 있다. - 두산백과
국은천(國恩川)이 석탄리 들녘을 가로질러 한강으로 흘러온다. 맨 왼쪽에 동성산, 맨 오른쪽 뒤에 문수산이 가늠된다.
석탄 배수펌프장을 왼쪽으로 돌아나가 한강제방 철책길로 나간다. 중앙 뒤에 한강 건너 파주 심학산이 보인다.
한강제방 철책길을 따라 오른쪽 뒤 봉성산 앞 전류리포구까지 이어간다. 왼쪽 한강 건너에 파주 심학산이 보인다.
국은천의 수문교를 건너 석탄(石灘)배수펌프장을 돌아 한강제방 철책길로 나왔다.
한강제방 철책길을 따라 석탄리 들녘을 지나간다. 오른쪽 뒤에 하성면 봉성리 봉성산이 길게 누워 있다.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석탄리(石灘里) 들녘이 펼쳐져 있고, 중앙 맨 뒤에 문수산이 가늠된다.
수로가 석탄리 들녘를 가로지르며 철새들이 하늘을 날고 뒤쪽 중앙에 동성산(童城山)이 가지런하다.
하성면 석탄리 491-33 일원에 위치한 해발 113m 동성산(童城山)은 고려 때 토성을 쌓고서 그 이후 '동성산'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동성산 동남향으로 옥로전(獄擄田)이 있었고, 동성산 서남향으로 원산리 원수골에 약효가 신비한 약수터가 있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이 곳이 옛날 현이 있던 곳이 틀림없다. 여지승람 등 옛 문헌에도 동성현은 통진 동 20리에 있으니 원래 고구려 동자홀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동성으로 고쳤고 고려 공양왕 때 통진현에 귀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설명안내판
김포시 하성면 석탄리와 후평리, 멀리 시암리로 펼쳐지는 김포반도 북쪽 평야가 드넓다. 중앙 뒤에 후평리 연화봉이 보인다.
한강 건너 파주시 심학산 왼쪽은 파주시 문발동 지역으로, 파주출판도시(파주출판문화정보국가산업단지)가 자리하고있다.
심학산(尋鶴山)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서남단의 한강변에 위치한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심악산(深岳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교하현 소속으로 현 소재지 남쪽 21리 지점에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따르면 심악산은 교하군의 남쪽 15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맥(主脈)은 고양군의 고봉산(高峰山)이라 하였다. 한편, 『교하읍지』에서는 군의 서남쪽으로 12리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한강에 도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하군지도』에 심악산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군사상 요충지임을 강조하였다. 심학산의 서쪽으로는 자유로가 건설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가 입지하였다. 동사면 산록에는 심학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한강제방 철책길을 따라 정면 뒤에 보이는 김포시 하성면 봉성리 봉성산 앞쪽 하성면 전류리포구로 이어간다.
왼쪽 뒤 석탄 배수펌프장 앞을 거쳐 한강제방 철책길을 따라왔다.
한강제방 철책길 오른쪽에 평화누리길 석탄리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왼쪽 뒤 봉성산 앞 한강 전류리포구로 이어간다.
석탄리 들녘에 철새 떼들이 앉아 있고, 왼쪽은 하성면 마곡리 들녘이며, 정면 뒤에 동성산이 석탄리와 마곡리에 걸쳐 있다.
한강 건너 심학산 오른쪽 지역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지역일 것이다.
심학산은 파주시 교하읍 서남단의 한강 하류에 있는 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심악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은 홍수 때 한강 물이 범람하여 내려오는 물을 막았다 하여 수막 또는 물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메뿌리라고 호칭하였다. 조선 숙종 때 왕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가 궁궐을 도망 나왔는데 이후 그들을 이곳에서 찾았다고 해서 학을 찾은 산, 곧 尋鶴山으로 불리게 됐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심학산은 자유로변에 위치하고, 산을 오르는 데 1~2시간 걸리며,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쭉 뻗은 자유로와 한강, 김포, 관산반도를 조망할 수 있으며,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 대한민국구석구석
마곡리 들녘을 거쳐 수로가 흐르는 전류리 들녘으로 넘어왔다. 중앙 맨 뒤에 문수산이 확인되며, 오른쪽 산은 태산인 듯.
한강제방 철책길을 따라 하성면 전류리 들녘을 지나 전류리쉼터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봉송산이 솟아 있다.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顚流里)는 한강이 남북으로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구룡촌, 재촌, 신촌 등이 있다. 구룡촌은 산세가 용이 바다로 내려가는 모습이고 앞바다의 작은 섬 부래도(浮來島)는 거북이(龜)가 물에 떠 있는 모습이어서, 용과 거북이가 같이 만나는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재촌은 옛날에 재산이 많은 사람이 살았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신촌은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 두산백과
평화누리길 전류리쉼터 앞에 평화의길 종합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평화누리길 전류리쉼터 앞 한강제방 철책길에 경기둘레길 4코스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일산대교 9.9km 지점이다.
석탄리철새조망지로부터 평화누리길 전류리쉼터까지 한강제방 철책길을 따라왔다.
금포로 옆 한강변 보도를 따라 전류리포구 앞으로 이어간다. 정면에 봉성산이 솟아 있다.
해발 129m 봉성산(奉城山)은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동쪽의 봉성리에 위치한 산이다. 일명 국사봉(國思峯)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진류산(鎭流山)으로 통진현의 동쪽 24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문헌에는 전류산(顚流山)이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이는 진류산의 표기가 전류산으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류산에서는 정옥사(碇玉沙)가 출토되며, 압량사(壓梁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봉성산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의 명칭이 전류리인 것으로 보아 진류산에서 전류산으로 이름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전류리의 남쪽으로는 봉성리가 있으며, 봉성포천이 양촌면소재지와 봉성리를 지나 봉성사 남사면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봉성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에는 봉상산(鳳翔山)으로 되어 있다. 관련 지명으로 양촌면의 봉성배수펌프장이 있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정면 뒤에 봉성산이 길게 누워 있고, 지방도 제78호선의 일부인 금포로가 달린다. 한강 전류리포구 표지판 왼쪽에 DMZ 평화의길 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금포로(金浦路)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에서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봉성리까지 연결하는 서울특별시도 및 김포시도로, 총 연장은 18.495 km이다. 도로의 명칭이 유래된 것은 주 도로의 위치인 김포의 옛 지명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 구간에 걸쳐 국가지원지방도 제78호선의 일부를 이룬다.
한강 전류리포구 표지판 아래에 'DMZ 평화의길 4코스 및 평화의길 BI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1.'DMZ 평화의 길'은 남북평화 촉진과 접경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DMZ 인근 뛰어난 생태, 문화, 역사자원을 기반으로 인천시 강화군에서 강원 고성군까지 총 526km 구간에 이르는 세계적인 명품 도보여행길이다. 강화 평화전망대를 시작으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의 총 36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코스구성은 상시주노선, 예약주노선, 테마노션으로 구분되어 운영되고 있다.
2.평화의 길 4코스(15km/4시간 소요) : 철책과 자연을 벗 삼아 걸었던 김포에서의 마지막 길이다. 전류리 포구에서 한강을 따라 걷다보면 만나는 한강조류생태공원에서 철새와 텃새를 관찰할 수 있는 벌판과 숲, 생태습지 등의 자연을 즐기고 나면 김포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발걸음을 옮겨 일산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 고양으로 향한다.
3.평화의길 BI '평화와 생태의 길, DMZ 평화의 길' : 나란히 연결된 DMZ로고와 그 안을 관통하고 있는 길과 비둘기 조형이 어우러진 워드마크는 평화전망대에서 통일전망대에 이르기까지 평화와 통일을 잇는 길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DMZ 평화의길'의 지향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린계열 컬러를 투톤으로 조합한 DMZ워드마크는 생태환경의 보고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DMZ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의 길 로고는 브라운 컬러를 활용하여 걷고,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힐링을 주는 길의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DMZ 평화의 길 4코스 안내판과 함께 DMZ 평화의 길 3코스 탐방 완주를 기념한다.
전류리포구 광장 안쪽에는 어판장, 한강 철책 앞에는 김포시 관광안내도와 전류리포구 설명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전류리포구 광장의 한강 철책 앞에 김포시 관광안내도와 주요관광지 및 전류리포구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전류리포구는 한강하구에 위치한 포구로 김포대교에서부터 북방어로 한계선까지의 구간에서 고기잡이가 가능한 김포 한강의 최북단 어장이다. 이곳은 20여 척 어선들의 내수면어업으로, 어부들은 그물질을 통해 잡은 수산물을 사람들 앞에 정직하게 내려놓고, 아낙들은 잡은 만큼의 수산물을 파는 자연산 전문 포구이다. 또한 전류리포구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으로 생태의 보고로 바닷물과 강물이 뒤섞이기 때문에 서해에서 자라다가 한강 하구와 임진강으로 올라오는 황복이 잡힌다. 겉으로 보기에 작고 평화로운 어촌인 전류리는 한강 너머 북한 개풍군을 마주하고 있는 군사지역이다. 조류를 잘못 타 북쪽으로 넘어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해병대의 허가를 받은 27척의 어선만이 눈에 잘 띄는 붉은 깃발을 달고 조업을 하며, 고기를 잡으러 나가려면 매번 군부대 초병에게 출항 신고를 해야 한다. 예전에는 노를 저어 고기를 잡아야 했으나 지금은 엔진 출력 60마력까지 허용되고 있다. 전류리 포구에서는 봄이면 숭어, 웅어와 황복, 여름이면 간혹 걸려드는 농어와 0.5~1.0kg씩 나가는 자연산 장어, 가을이면 살진 새우,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참게가 일품이며, 겨울에도 사계절 별미인 숭어가 많이 잡힌다.
고려의 문신 민유(閔愉)를 소개하고, 전류리포구가 그려진 옛 지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저는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민유閔愉입니다. 대제학까지 지냈지요. 그런데 공민왕의 총애를 받은 승려 출신 신돈辛吨이 나를 비롯한 권세가들을 친원파라며 몰아내고자 난을 일으켰어요. 그래서 저는 난을 피하여 내려와 동성현童城縣(지금의 하성면 일대)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봉성산奉城山 기슭에 전류정顚流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학사學士 주사옹朱士雍 등과 함께 시와 술을 즐기며 살았어요. 그러나 마음은 늘 도읍인 개경에 있어 매일 산에 올라 고려의 사직을 걱정하고 국왕을 사모 했던 까닭에 봉성산을 국사산國思山이라고도 불렀답니다.
전류리포구(顚流里津,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 59번지 일원)(김포시 하성면 금포로 1928) : 현재까지 포구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강의 유일한 포구입니다. '전류顚流'는 '물이 뒤집혀 흐른다'는 뜻으로 이곳에서 바닷물과 강물이 하루에 두 번씩 교차하며 뒤섞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전류리포구는 제방도로를 만들면서 지금은 사라져 버린 부근의 봉성포奉城浦와 함께 과거에는 큰 포구마을을 이루고 있었 습니다. 주로 농어, 웅어, 장어 들을 잡아서 서울에 내다 팔았습니다. 또 이곳은 서해로부터 마포나루로 가려는 배들이 밀물을 기다리며 머물다 가는 기착지이면서, 마포에서 실어온 물건들이 들어오는 유통의 중심지였습니다. 포구 일대는 마포나루로 가려는 사람들과 파주 서패리 나루(심학나루)를 오가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습니다.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았던 만큼 먹을 곳, 쉴 곳이 필요했는데 조선시대에는 부근에 '전류참顚流站'이라는 공용숙박시설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전류리 주막'도 있었습니다. 근대기에는 돛배를 대신하여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황보환黃寶丸이라는 이름의 기선汽船이 기착했습니다. 이때에는 풀막(물가 근처에 지붕을 갈대나 풀로 잇고 임시로 이용하던 초막) 형태의 선술집이 5재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길동무들과 함께 포구식당에 들어가 가자미생선구이와 고등어조림에 점심을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식당 뒤 봉성산에 조성된 전망대가 보인다. 저곳에는 다음에 올라가서 한강을 조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