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읍[Ganghwa-eup , 江華邑]
요약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북동부에 있는 읍.
위치면적(㎢)행정구분행정관청 소재지인구(명)
북쪽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개풍군, 동쪽으로 염하를 사이에 두고 김포시 월곶면(月串面)에 면하고, 남쪽으로 선원면(仙源面), 서쪽으로 송해면(松海面)·내가면(內可面)·하점면(河岾面)에 접한다.
1973년 7월 1일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5년 3월 강화군이 인천에 편입됨에 따라 인천 강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읍의 서쪽 경계에 군내 고봉 중의 하나인 고려산(高麗山:436m)이 있다. 읍의 사방에 각각 당산(堂山)·견자산(見子山)·남산(南山)·북산(北山) 등이 있어서 분지를 이루므로 육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기가 쉽다. 많은 역사적인 사건을 경험한 지역으로서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이 침입했을 때부터 1270년(고려 원종 11)까지는 임시수도였으며, 그 후 병자호란 때에도 많은 왕족들이 이곳으로 피란한 적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인삼이며, 순무·배추·양배추·오이 등을 재배한다. 1970년 1월 강화대교(694m)가 가설된 후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동락천(東洛川)을 경계로 북산 산록의 관청리(官廳里) 일대에는 관공서·학교·주택이 들어서 있고, 동락천 건너 신문리(新門里) 일대에는 시장·상점·공장이 입지해 있다. 강화대교를 통해 김포 등과 연결된다.
국가유산으로는 강화동종(江華銅鍾:보물 11-8), 강화산성(山城:사적 132), 강화 고려궁지(高麗宮址:사적 133), 고려고종홍릉(高麗高宗洪陵:사적 224), 갑곶돈(甲串墩:사적 306),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사적 424),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천연기념물 78), 용흥궁(龍興宮:인천유형문화유산 20), 연미정(燕尾亭:인천유형문화유산 24), 강화 유수부 동헌(留守府東軒:인천유형문화유산 25), 강화 유수부 이방청(吏房廳:인천유형문화유산 26), 강화 석수문(石水門:인천유형문화유산 30), 강화향교(인천유형문화유산 34), 강화외성(인천유형문화유산 37), 갑곶나루 선착장석축로(船着場石築路:인천기념물 25), 강화 대산리(大山里) 고인돌(인천기념물 31), 김상용순절비(金尙容殉節碑:인천기념물 35), 진무영지(鎭撫營址), 청련사(靑蓮寺), 황형사당(黃衡祠堂), 윤집택지(尹集宅址), 고려중성(高麗中城) 등이 있다.
〈용흥궁〉 조선 후기 철종(哲宗)이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에 살던 집으로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축조하고 옥호를 용흥궁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잠저구기(潛邸舊基) 1동(棟), 내전 l동, 외전 2동, 비각 등이 있으며, 팔작 주심포 건물이다. 〈강화 석수문〉 원래는 1676년(숙종 2) 강화산성 상수문(上水門)으로 서문 옆에 축조하였던 것을 1900년대에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4단의 기단 위에 11개의 각석으로 홍예(虹霓)를 틀고, 홍예 사이에는 직사각형 대석으로 8층을 쌓아 단단히 축조하였다. 갑곶진(甲串鎭)의 통로였다. 〈김상용순절비〉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한 김상용의 충의비(忠義碑)이다. 글씨가 마멸되어 1698년(숙종 24) 김창국(金昌國)이 새 비석을 세우고 먼저 것은 묻었는데, 1976년 발견되어 현재는 2개가 나란히 서 있다. 〈강화 유수부 동헌〉 조선시대 강화 유수부의 동헌(東軒)으로 1638년(인조 16) 유수 김신국(金蓋國)이 개건하였다. 1769년(영조 45)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는데, 현재는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평 24칸의 관아(官衙)로서 1977년에 보수하였다. 〈강화 유수부 이방청〉 1654년(효종 5) 유수 정세규(鄭世規) 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한 건물인데, 1783년(정조 7) 개수하여 계홀당(桂笏堂)이란 당호(堂號)를 게시하였다. 1915년부터 현재까지 등기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구조는 ㄷ자형으로 팔작집이다. 〈연미정〉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고종 때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공부시켰고, 조선 중기 중종 때는 무신 황형(黃衡)에게 하사하여 학생들을 수학시켰다고 하며, 1744년(영조 20) 강화유수 김시난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정묘호란 때는 이곳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강에서 흐르는 물이 갑곶과 승천포로 합류하면서 마치 제비꼬리의 형상을 이루고 있어 연미정이라 한다. 목조 와가로 팔작지붕에 겹처마이며, 면적은 약 40㎡이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4-11-1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