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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부산 문학회원 여러분을 ‘사람과의 대화’시간에 뵈었으면 합니다.
안녕하신지요?
‘<수필> 부산’을 받고 너무 기뻤습니다. 날이 갈수록 동인회가 발전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강중구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동인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여전히 어여쁘지 않은 며느리 삿갓 쓰고 으스름달밤에 길 나서듯, 남에게서 박수 받지 못할 일이 아닌 줄 알면서 이래저래 바빴습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 성당과 교회, 일반 노인 학교/ 초량 시각 장애 복지관 등에 다니면서 노래 부르고 떠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시원찮은 원고가 웬만큼 모아져서 두 권의 졸저로 묶게 되었습니다. <열아홉 살 과부가 스물아홉 살 딸을 데리고>(수필집)/ <천주교야 노올자>(신앙 유머 수필집) 등등. 지금 인쇄 중이니 곧 고고의 성을 울리게 되겠지요. 지역과 종교에 편견을 덜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따라서 주제는 화합이라 외람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친 김에 평화의 마을 장애 가족/ 삼랑진 성당 노인 학생/ 덕성 토요 노인 대학생(제가 설립한 학교)/ 초량 시각 장애인 등과 문우/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모신 가운데 ‘사람과의 대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일정/ 시정을 적어 안내합니다.
제 글재주야 천하가 알 듯, 설레발만 치는 꼴이라 수필이라 이름 붙이기도 무엇합니다. 그러나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들과 어울리면 한없이 편한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그들에게 볕뉘라도 비춰 줄 동인 여러분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틈내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일시 :1010년 8월 14일 14시-16시 10분
2. 장소 : 서면 영광 도서 문화 시랑방
3. 내용: 진행(사회) 등을 저자 자신이 하되
가. 평화의 마을 장애인 20명 제창
나. 시각 장애 복지관 가족 5명 악기 연주와 노래
다. 노인 학생 30명 제창
라. 저자 노래 5곡(팝송/ 가요/ 가곡/ 동요/ 민요)
마. 저자의 인간과 문학
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학의 기능
사. 2분 축사(강중구 회장님 등 10명)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졸저 2권은 곧 보내 올리겠습니다.
<천주교야 노올자(16번 째 졸저)>는 <열아홉 살 과부가--->(15번째 졸저)와는 달리 跋文을 어느 친구가 썼습니다. 졸저의 본문 내용이나 개요를 과찬해서 적은 畏友의 정성이 너무 고마워 아래에 옮깁니다. 꾸지람하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책이 나오기 전이라 친구의 실명을 밝히지 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이원우의 <천주교야 노올자>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 묶음/여기서 기적을 본다
베드로(전 부산 가톨릭 문협 회장)
이원우 아우구스티노 형제는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친구다. 학교에서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 오던 그의 이병(罹病)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의 1천 장짜리 논픽션 <죽음의 여행 그 종점> 초안에서 이런 고백을 읽은 적 있다.
교장으로 무사하게 정년퇴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만 사고가 난 것이다. 지병(持病)을 앓는 어린이가 내 방에 와서 신신(失神)지만,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법적 도의적 책임 문제가 거론되고 학교가 난장판이 되었다. 신문이며 방송에서는 연일 이 문제를 들고 나섰다. 나 자신이 거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내 자살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팽개쳐져 있는 나 자신을 보고 놀랐다.
그는 문단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왕성하게 해 오던 사회 활동도 접었다. 한번은 전화가 왔는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러는 게 아니가?
“낯선 지방에 선바람쐬듯 하는 일상입니다. 죽음이라는 세계가 낯설지 않아요.”
그렇게 와병 중인 그가 부산 가톨릭 문협에 입회하고 싶다는 전갈을 해 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자연히 그와 만나는 기회가 잦아졌고, 그동안에 그가 겪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전략) 지금도 혼신의 힘을 쏟아 투병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딸애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면, 땅에 묻힌 지 오래일 겁니다.”
그는 틈날 때마다, 기상천외라 해도 과언이 아닐 ‘투병 생활의 이모저모를 들려주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책이라고 썼다는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를 한 권 내밀었다. 거기에 실린 글 중 한 토막. (어떤 수련원에서 노인 학교 제자에게서 듣는 이야기다)
“선생님 참 잘 오셨어예. 내가 천주교를 25년 믿었다 아닙니꺼? 그런데도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 었습니데이. 여기 와서 얼마 안 있어 아픈 몸이 나았는기라예. 선상님, 그런데 여기 오다가 안 오면 몸 이 더 아픕니데이.”
아 참, 여기서 그의 어찌 보면 거의 무모한 교직 생활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당시 그의 말대로 대문 밖이 저승길임을 절감하면서도, 소위 노인 학교라는 데에 줄기차게 매달려 있었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토요일 오후마다 무료로 운영해 오던 노인 학교였다나? 그를 보고 던진 말에 그는 충격을 받는다. 세상에 오다가 안 오면 더 아프단다. 그 말을 제자가 했다?
그가 느끼던 혼란을 짐작할 만했다. 평생을 시각 장애인으로 사셨던 어머니를 따라 60여 년이나 불자(佛子)로 지내오던 터였다. 그런데 딸이 가톨릭 집안으로 시집을 가기 때문에 이왕이면 딸을 따라 신앙을 바꾸려고 고민하던 터에 그 딸의 초등학교 은사 어머니가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저자의 제자다. 도무지 촌수(?)를 종잡을 수 없는 그런 덫에 걸렸고, 우여곡절 끝에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딸의 애원이 아닌 늙은 제자의 강권에 휩쓸렸다면,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닐 거라는 증거는 이 책 여기저기서 찾아낼 수 있다.
충격적인 그의 고백,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수도 없이 노인 학생들 뒤치다꺼리하고, 수백 명을 먼저 저승에 먼저 보냈다는 것이다. 그린데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여 여러 군데 노인 학교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입심을 자랑하고 있다. 그에게 ‘부활’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데 인색치 말자.
그는 별난 사람이다.
분명 힘에 부대낄 일인데도 일단 손을 대기만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 그걸 단순한 고집이라고 폄하하기도 무엇하다. 병마와 싸우기 전에도 그는 자신조차 의아스럽게 생각했다고 했을 만큼 외도를 많이 했다. 오직 본업인 교직 생활에 충실했었더라면, 그저 평범한 교장으로서 정년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문학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는, 문학 그 영역을 기웃거린 게 1970년대 후반이었다. 연보(年譜)를 보면, 초등학교 교사들의 전문지 <새교실> 지우문예 문을 3년 동안 두드려 열었고, 다시 <수필 문학> 초회 추천을 받는다. 그리고 83년도 봄호 <한국 수필>에서 2회 천료, 정식 기어코 수필가로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무려 5년 동안 한 우물을 판 결과다. 가끔 소설에도 손을 대는 것 역시 여기(餘技)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좀 더 열정을 쏟고 공부를 하면, 거기서도 탑을 쌓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의 너무나 다양한 체험이 이를 뒷받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더 밝혀 보자.
천둥인지 지둥인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무엇이 무엇인지 통 분간할 수 없다는 때에 쓰는…….그가 재임 중에 벌인 사회 활동은 장삼이사가 감당하기 너무나 버겁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유네스코 부산 부회장과 사무국장 ․ 북구 문협 회장과 문화 예술인 협회장을 맡았고 가요 콘서트 열세 번, 부산 노래 취입 두 번, 노인 ‘민간 외교 사절단’ 연(延) 197명을 인솔, 동남아 5개국을 순방하였다. 아동 도서 1,500부를 들고서. 2,000회에 가까운 노인 학교 강의며 여성 대회 ․ 주부 대학 ․ 포럼 ․ 학부모와 현직 교사 대상 연수 실적이 있다. 문학의 정의가 가치 있는 체험의 기록이라면 그의 과거사는 분명 큰 자산일 수 있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하겠다.
문학의 본질을 따지기 전에 외형적인 열정은 그가 여태 14권의 저서가 말해 준다. 수필집 ․ 자전 소설집 ․ 논픽션 ․ 세상 풍자집 ․ 민요집 ․ 신앙간증집 등등이다. 거기다가 그는 이번에 수필집 <열아홉 살 과부가 스물아홉 살 딸을 데리고>와 신앙 유머집이랄 수 있는 이 <천주교야 노올자>를 상재 중이다.
그는 06년도 생사의 갈림길에서(저자의 말에 의하면 옴나위없이).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를 내어 놓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유품으로 여긴 것이다. 두 번째 취입한 부산 노래 열아홉 곡 씨디와 함께. 그 절망의 순간순간은 <승리의 길……>에 구구절절이 나타나 있다. 앉지도 눕지도 기대지도 못하면서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면서 주님께 매달리면서 버텨내었더란다. 장기며 사체 기증을 서약해 놓은 뒤였다.
그러다가 3년 전 주교좌 성당 중앙 성당) 오랫동안 쉬고 있었던 노인 학교 강의를 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기적을 체험했다. 겉옷이 젖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지만, 기운을 차린 것이다. 그러니까 본 <천주교야 노올자>는 그가 영세를 한 2004년 9월 이후에 교회 안팎에서 맞닥뜨렸던 갖가지 사연들을 저자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가 섭리며 주님의 역사하심을 많이 접해 왔음을 우리는 이 책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 구원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순간에 가톨릭 신자라면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더러 있다.
성모송(聖母頌)을 배웠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휘하여 빌어 주소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지금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데, 성모송마저 ‘이제와’ 죽는다니 이게 뭐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성모님이시여, 지금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이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바로 이 뜻이 아닌가?
부끄럽지만 무식한 나로서는 이 기도만 나오면 무서웠다. ‘평화 방송’에다 채널을 고정시켜놓고 보니 어김없이 수녀들이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하고 묵주를 들고 성모송을 바치고 있었다. 거짓말 좀 보태어 그게 공포가 되어 다가왔다.
신앙 선배를 잡고 하소연을 했다. 어김없이 초보자(?)가 뭐 그런 데에 신경을 쓰느냐는 퉁명스런 반응이 되어 되돌아왔다. 사제도 안 가르쳐 줬다. 모두가 무딘 탓일까?
영세 후 어느 날 인터넷에서 영어로 된(In English) 성모송을 찾아보았다. 있다! Holly Mary, Mother of God, pray for us now and at the hour of our death. 물론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이 부분에서 저자가 당시 얼마나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언제 숨이 멎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에 우리말로 된 성모송을 접하고, ‘이제’라는 부사(副詞)와 ‘죽음’이라는 명사의 합집합이 그야말로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영어로 된 성모송을 입수하고 나서 그는 안도(安堵)한다. now와 at the hour of our death 사이에 접속사 and가 끼어듦으로써 그의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마침내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까지 등장시켰는데, 지금 그리고 저희가 죽을 때까지 성모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뜻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낭만에 대하여’의 ‘이제 와’에서 ‘와’는 동사(動詞)다)
그렇게 죄 의식에 너무 빠졌을 때, 이웃 몫까지 자기가 덮어쓰려하게 된다. ‘저희’지 ‘제’가 아닌데, 남의 죄까지 자기 죄처럼 여기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소위 신앙생활마저 못하게 만드는 세심증이란 게 그런 것이다. ‘제가’는 단수고, ‘저희’는 복수다. 인터넷을 통해 영어로 된 기도문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리라.
삼랑진을 떠날 때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26년 전이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일로 삼랑진 성당에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 평화의 모교(母校)의 학구인데 거기 1년 전에 인연을 맺었다가 이번에는 성당에까지 이어지나니, 내 입에선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면 ‘신음 소리’ 대신 ‘탄사’라 썼을 것이다. 지금은 성당 교육관에서 노인 학생들을 앞에 두고 한 달에 한 시간 강의를 하게 되었다.
제2의 고향 삼랑진,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의 대부분은 물론 20여 년 교직 생활도 거기서 했다. 특히 송진 초등학교는 그가 12년 근무했고, 모교다. 삼랑진 성당과의 사이에 담 하나뿐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
저자가 구태여 밝히지 않는 이유를 다그칠 수 없으니 생략하지만, 그 송진 초등학교에서 그는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냈었다. 그런데 그가 천주교 신자가 되어 오순절 평화의 마을을 거쳐 삼랑진 성당의 노인 대학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평생 앞을 제대로 못 보셨던 시각장애인인 저자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노인 학생들 대부분이 알고 있다.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만지고 잤다는 저자, 1년에 몇 번에 지나지 않지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웃 절에 다니던 저자, 어릴 때 딱 두 번 친구 따라 성결 교회에 가 보았다는 저자가 천주교의 메신저가 되어 오순절 평화의 마을과 삼랑진 성당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것이다. 내가 섭리며 역사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덧붙이는 이유 중 하나로 이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평화의 마을이며 삼랑진 성당에의 행보는 절대 본인의 의도가 아니었다. 특히 바로 이웃한 성당에서 노인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다니, 불가사의한(?) 일로 여겨지는 게 당연하다. 저자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주님께서 노래라는 달란트를 주셨고, 25년 노인 학교에서 쌓은 내공이 있었기에 삼랑진 성당과의 인연이 새로 시작되었다고.
타관서 지은 죄 회개도 못하고서
허망한 겉 명예로 탕자처럼 지내다가
오늘도 쥐엄나무의 열매만을 탐한다.
이 시조는 저자가 오순절 평화의 마을- 자신이 살던 집에서 겨우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에 처음 들르면서 창작한 것이다. 사실 평교사로 삼랑진에 근무하다가 부산으로 전출한 지 26년여, 교장도 지냈고, 문단에도 데뷔했으며 각종 사회단체의 장을 맡기도 하였으니 명예를 얻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라면 주님 앞에서 지은 죄(한 어린이의 생명을 잃게 한 도의적인 책임이 가장 큰 죄라 하였다) 때문에 자신이 병자가 되어, 죽음 직전에 귀향하는 마음으로 평화의 마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탕자 ‘흉내’를 낸다는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우리는 성경 속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 있다. 저자는 평화의 마을을 들먹이며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태어난 곳으로 돌린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인용하며 평화의 마을 뒷산 어느 나무 밑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게 저자가 탕자를 닮고 싶은 명분이다.
그러나 50년 만에 고향에 유택을 마련하고 누워 계셨던 부모님을 지난해에 밀양 성당 천상낙원에 모셨다. 생전에 저지를 불효 때문에 그 기막힌 수목장(樹木葬) 결심이 흐트러질 수도 있다고 했지만, 저자가 어느 물리적 환경을 통해 저승으로 떠나든 그건 주님께서 결정하실 문제다. 다만 저자는 시신 및 장기 기증을 약속한 터라 1년 동안 의과 대학에서 해부 실험용으로 누웠다가 화장장(火葬場)을 경유해서 부모님 밑에서, 영면에 들고 싶다는 글을 이번 수필집 <열아홉 살 과부가---->에도 썼다.
작년 가톨릭 문학상 시상식 때 저자는 축가를 불렀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다. 저자가 부산 어머니 오케스트라(고신대 오충근 교수 지휘)와 협연 때 선보였던 노래라 했다. 그런데 끝나고 나서 기막힌 사실 하나를 공개(?)했다. 하루 수백 번도 넘게 죽었다가 깨어났던 그 시절, 밤마다 꿈에 나타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도 ‘순수(純粹)’에 젖은 적이 없다는 자괴지심, 그러니까 그 무서운 죄의식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했을 땐데, 말 한 마디 사랑 고백밖에 한 게 없는 그 여인을 향한 마음은 예외였더란다. 50년 전의 과거로 회귀하는 두려움과 그렇게 속절없이 싸워야만 했다. 그의 생사는 모르지만, 78년도에 영세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부터 ‘허황된 순수 꿈’에서 탈출하게 되었다나? 성경에 일곱 형제와 여인 이야기가 나온다. 아하 바로 그 얘기구나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 이제 Eros와 Agape가 어떤 것인가를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천 년 세월도 주님께는 눈 한번 깜빡이심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 한 자연인의 50년 세월, 그렇게 애증(愛憎)에 뒤틀려 허덕이는 저자를 주님께선 평화의 마을에 데려다 놓고 다독이셨다. 그것 또한 섭리 아니고 무얼까?
그 평화의 마을에서 340명 가족들과 서슴없이 어울린다, 반찬도 나누어 먹을 정도로. 그에 대한 호칭도 갖가지,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아저씨, 교장 선생님, 자문위원님, 형님, 형제님 등등이다. 그들 중에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이원우라는 동명이인이 있다. 한자도 똑 같다. 당연히 저자가 형님이다. 그가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오가는 동안에 배달 사고도 나기 일쑤다. 저자는 평화의 마을에만 가면 정말 마음이 평화스러워진단다.
섭섭하게도 이 책에는 없지만 이번에 같이 낸 <열아홉 살 과부가 스물아홉 살 딸을 데리고>에는 ‘대자 장가보내기’라는 제목의 ‘기막힌’ 글이 있다. 그의 대자는 젊었을 때 순간적인 판단의 잘못으로 몸에 문신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장가를 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신부가 첫날밤에 기절초풍을 할까봐 염려스러워서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저자가 한 달에 한번씩 가서 노래와 웃음 치료를 하는 시각 장애 복지관 ‘애덕의 집’에서 신붓감을 구하는 것! 신부는 앞이 안 보이니 신랑의 ‘용틀임(?)’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대신 시집만 와 주면 대자는 온갖 희생과 봉사로 아내를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애덕의 집에 가게 된 것도 사연이 있었다. 부산진 역 앞 무료 급식소에서 노래를 좀 불러 줄 수 없겠느냐는 어느 신부(神父)의 청이 있었는데, 거기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서 기다리던 끝에 누가 애덕의 집에 그를 인도해 간 것이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 일요일 그는 부산 최고의 레크리에이션 지도자, 한국에서의 휘파람 연주 1인자 등과 함께 거기 들른다.
그런데 거기서의 정서는 남과 다를 수밖에. 명문 부산 중학교 3학년 때 가출을 결심하고 감행하기 직전까지 방황하던 초량 1동에 위치한 애덕의 집, 거기 모이는 여든 명 가까운 장애인들 속에 언제나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幻影이긴 하지만) 등등에서 그는 지난 70년 세월을 반추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가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한다고 했다. 그분 아니시면 엄마(항상 그렇게 부른다)를 어떻게 뵐 수 있겠느냐며 반문하는 그다. 여담이다. 야유회를 따라가면 커플의 지퍼를 내리고 소변기에 정조준(?)하는 것을 도와 줄 일도 생기는데, 그게 저자에겐 ‘잘난’ 사람들과의 교유(交遊)보다 행복한 노릇이라니, 못 말릴 일이로다.
여기 실린 백여 가지는 대개가 원고지 10장이 안 되는 짧은 것들이다. 체험 아닌 인용이 많아 수필이라고 이름붙이기 곤란한 것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이 무심코 지나칠 일들도 그는 놓치지 않고 원고지에 옮겨 충격을 주고 있다. 우리는 심 봉사가 딸 청이를 기르기 위해 젖동냥을 했다는 이야기에 친숙해져 있는데, ‘로마의 자비’에는 감옥에서 딸이 아버지에게 젖꼭지 물려 젖을 먹여 살려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는 몇 군데 노인 학교에서 이를 구연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안이 벙벙해 있더라는 것이다. 박수? 나올까말까 했다니 어리둥절하다. 자비의 뜻을 음미해 보지 않아서 그러리라. 모든 신부는 서품을 받을 때 부복(俯伏)을 한다. 그 순간 장내에 음악이 흐르고 예비 사제들 위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고 하는 장엄한 간구가 퍼진다. 모두가 소리 없이 흐느끼긴 하나 화두(話頭)는 자비다. 로마의 자비와 뭐가 다를까?
이 <천주교야 노올자>는 참 재미있는 책이기도 하다. 지면 관계상 하나만 예를 들자.
나폴레옹의 남성 심벌이 1억원에 팔렸는데, 거기 신부(神父)가 깊숙이(?) 개입했다나? 그런데 아뿔싸 그 길이가 겨우 3.8센티미터란다.
이 책은 선교(전교) 교재나 매체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천주교에 귀의하려는 사람에게 우선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오랜 신앙생활을 한 교우들한테도 저자가 줄줄이 엮어낸 체험들이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리라 믿는다.
저자는 지금 살아서 아프기 전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주님을 굳게 믿는 그의 일상에 동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천주교야 노올자> 후속편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