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사무엘을 통하여 다스리신 하나님
빼앗겼던 하나님의 궤가 돌아온 후(1-2) 처음 나오는 말씀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3상) 하고 사무엘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1장에서 태어나 유 소년기(3-4장)를 거쳐 4:1절에서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한 이후로 나타나지 않다가 7:3에서 장년이 되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 장에는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6, 15, 16, 17)는 말씀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세우셔서 그를 통하여 다스리심을 뜻합니다. 즉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가 된 것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기자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4:22)고 말한 대로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사무엘을 통하여 다시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7장의 주제가 “사무엘을 통하여 다스리신 하나님”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6)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둘째 단원(7-12) 에벤에셀의 하나님
셋째 단원(13-17) 사무엘의 다스림
첫째 단원(1-6)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3)
먼저 1-2절 말씀을 간략하게 나마 살펴보아야만 하겠습니다. 장 나누기를 했을 때 1-2절은 6장에 속했어야 할 말씀인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블레셋 땅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2상)고 말씀합니다. 오랜 동안을 방치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게 될 때에 우리를 의아케 하는 것은 사울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하더라도(대상 13:3) 어찌하여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은 사무엘의 사명과 결부시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사무엘은 왕이 아니라 왕의 앞에 보냄을 받은 길 예비자인 것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른 후에 언약궤를 운반하여 왕의 옆에 두고 하나님의 대리자로 나라를 다스릴 신정왕국(神政王國)이 도래하기까지는 머물러 두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집니다.
이제 사무엘의 장년기의 사역을 살펴보십시다. 그의 공적인 첫 사역은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3)한 하나님께 돌아가는 운동, 곧 회개운동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친 길 예비자 세례 요한과 상통합니다. 이방 신들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고 외칩니다. 그렇게 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5)하고 미스바 성회가 개회되었습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6).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로 마음을 물 붓듯 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애2:19
이는 오랜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는 놀라운 각성입니다. 그들은 블레셋에게 패하였을 때에도 “어찌하여 패하게 하셨는고”(4:3) 하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법궤를 빼앗기는 극한 상황 중에서도 이러한 회개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했던 그들이 사무엘의 등장과 함께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 쏟듯 하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고 통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단원(7-12) 에벤에셀의 하나님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7)
그리하여 어떻게 하였습니까? 또다시 하나님의 궤를 동원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8) 합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9상), 사무엘이 먼저 한 일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어린양을 취하여 번저를 드린 것입니다. 백성들이 요구한 것은 제사가 아니라 기도였는데 어찌하여 번제를 먼저 드려야만 합니까?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번제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는가를 보아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9하)고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와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제”의 구속사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시 강조합니다만 구약시대의 제사제도란 단 번에 드려주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히 10:1)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노니”(히 10:19). 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사무엘은 정확히 이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사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은 블레셋 공포에 시달려 왔습니다. 삼손을 사로잡은 자들도 블레셋이요, 법궤를 탈취한 자들도 블레셋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한지라”(10)합니다. 회개하고 번제를 드리고 부르짖으매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12). 돌을 왜 세웠으며 어디에 세웠습니까? 배은망덕하기 쉬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4:1에 보면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합니다. 그때는 대패하고 하나님의 궤까지 빼앗겼으나 바로 그곳에서 대승을 거두게 해주셨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13).
사무엘은 바로 그곳에 불망비(不忘碑)를 세웠던 것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셋째 단원(13-17) 사무엘의 다스림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15)
본 단원에는 “다스리다”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3:20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선지자로 세우심을 보았습니다. 7:9에서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대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을 사사(다스림)로 세우심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다스리셨습니다.
①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동안에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을 막아주셨습니다(13).
②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성읍들을 회복하였습니다(14상).
③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동안에 평화가 있었습니다(14하).
④ 하나님과의 교제(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가 잘 이루어졌습니다(17).
이제 물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의 가정을, 섬기시는 교회를 누가 다스립니까? 이럴 경우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다스려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맞는 말이면서도 부족합니다. 저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정을 다스리시지 않으십니다”고 역설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구원하셔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형제로 하여금 가정을,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통하여 다스리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맡겨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딤전 3:4-5).
형제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 직무를 가정에서 수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고 가정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대적을 막아주실 것입니다. 잃었던 것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가정에 화평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오르락내리락 하는 교제가 끊임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얼마나 모르고 있습니까?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모자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