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장. 지구 한 바퀴를 돌아
I. 스페인으로 가는 여정
“전에는 넷을 셌지만, 이제는 셋이야.”
인야가 2주 정도 머물렀던 콜롬비아 친구 ‘후안’의 집을 나서며 혼잣말을 했다.
6개월 넘게 남미 여행을 하던 그는, 이렇게 행장을 차리고 나설 때마다,
“하나, 둘 셋, 넷.” 하며 짐의 개수를 세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혹시라도 짐을 빠뜨릴 경우를 대비한 자신만의 안전한 출발 방식이었던 것이다.
‘라파 누이’ 섬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큰 가방을 포함한 네 덩어리였지만,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서 큰 짐 가방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셋으로 줄어 있었다.
등에 멘 가방 하나, 앞으로 멘 휴대용 작은 가방 하나, 그리고 그림 도구와 스케치 북이 든 ‘스크랩 가방’ 하나.
큰 가방이 줄어 단출할 것 같은데도, 등에 멘 가방 무게가 가볍지 만은 않아... 썩 자유로운 느낌은 아니었다.
인야가 보고타의 ‘엘도라도(El Dorado)’ 공항으로 가는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다행히 비는 공항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멈춰주었지만.
밤 0시 15분 비행기였는데,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나온 상태라... 너무 일찍 도착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 공항 대합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인야는 이번 여정에 대한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실 이번 스페인 행은, ‘미국 경유’를 피해 유럽(스페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행로를 택한답시고 정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값싼 항공료 때문이었겠지만,
보고타를 출발해 두 곳에서 비행기를 내려 갈아타고 거의 이틀에 걸친 긴 여정을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에 가려면 북반구로 넘어가야 하는 경로인 건 분명하겠지만.
그런데 인야의 첫 번째 중간 기착지는, 하필이면 미국이었고... 그것도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이었다.
어차피 인야에게 미국은, 들러야 하는 운명의 장소인가 보았다.
보고타에서 자정 넘어 출발했던 비행기는 뉴욕에 아침 7시에 도착했다.
‘자가 환승’이었기 때문에, 짐을 찾고 출국심사까지 끝낸 상태로 공항으로 나오자마자... 인야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환전소였다.
‘남미 여행’ 내내 ‘너무 오래된 낡은 지폐’라는 이유로 남미 국가에서 환전을 거부당했던 ‘100달러 지폐’ 한 장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그만큼 그 일이...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던 인야에게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천만 다행으로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려준 환전소에,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겠는가.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다음 환승지인 노르웨이의 ‘오슬로’행 비행기가 뉴욕에서 밤 11시 55분에 출발이어서, 시간 계산을 해 보니... 약 열일곱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라고?’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고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이미 정해진 행로를 바꿀 수도 없는 문제라...
그래서 바로, 낮 시간에는 뉴욕으로 나가 시내를 그냥 배회하려고도 했었다. 어딘가 가는 것도 다 돈이라, 없는 돈에 뉴욕의 명소를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짐을 맡겨야만 몸을 움직일 수 있을 터라, 공항 짐 보관소에 갔더니...
웬걸?
짐 하나에 16불씩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짐 두 개면(등가방과 미술재료 등이 들어있는 '스크랩가방'을 들고 다닐 수는 없을 것이어서) 32불이었는데,
‘최소한 점심이라도 사 먹어야 하고 또 교통비도 들어가다 보면... 잘은 몰라도 100달러 정도는(아껴도) 들 텐데...... 그렇다면 내가 여태까지 사용하지 못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직해 왔던 이 100달러 지폐를 여기 뉴욕에서 다 날려 보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돈이면,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어쩌면 현지 국내여행 한 곳 정도의 왕복 항공권(교통비)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지 몰라......’ 하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뉴욕 도심 관광을 포기하기로 했다.
결국 뉴욕 공항에서 그 긴 시간을, 꼼짝없이 보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한심하기도 했고, 짜증스럽기도 했다. 더구나 그 이유가 돈 때문이란 것이......
그렇지만 인야는,
‘하긴, 하루 종일 뉴욕 도심을 돌아다닌다고 해봤자, 피곤하기밖에 더 하겠어?’ 하는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거나 위로하면서,
‘그러고 보면, 어차피 이런 것도 다 ‘새옹지마’일 수 있어......' 하고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그나마 먹는 건, 보고타에서 미리 '견과류'등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물 한 병(큰 거)만 있으면 견뎌낼 수 있을 터라 물을 샀는데,
공항에서 산 물은 한 병에 5.5달러나 받는 것이었다.
그래도 물을 사는 것으로 그 낡은 지폐를 사용했고, 거스름돈을 받기는 했다.
그렇게 공항 청사에서 시간을 때우는데,
‘이럴 때, 글 정리라도 좀 해 두자!’며 공항 청사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 문서 정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전이 깊어가면서 유리 벽을 투과했던 햇볕이 너무 세져서, 모자까지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발의 느낌이 뭉뚝해서 살펴보니... 발이 팅팅 부어 있는 것이었다.
지난 밤 내내 비행기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던 결과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제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아서, 인야는 거의 하루 종일을 그저 햇볕을 피해 의자 두어 곳을 바꿔가면서 앉아 있었을 뿐이다. 화장실을 갔던 두어 차례를 제외하곤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는데,
벽에 딱 붙어 움직이질 않는 한 일본청년으로 뵈는 젊은이가 있기에,
‘저 친구는 저기서 뭘 한다지?’ 하고 궁금했었는데,
가만 보니 그의 호주머니에 전선이 보이고 뭔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아!” 하고 인야가 알아차렸던 것은, 공항 청사 내 그쪽 벽면에 전원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청년은 핸드폰 충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도 이렇게 멍하니 앉아있지만 말고, 핸드폰 충전이라도 해놓자. 지금 5시가 넘어갔으니 두 시간 정도 충전해 놓으면 90%는 육박할 수 있겠지?’ 하면서, 그 전원 구멍에 자신의 핸드폰 충전 장치를 꼽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길게 느껴졌는데도, 아직도 밤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미리 준비해 둔 먹거리가 있어서 배가 고프거나 목이 탈 일은 없었는데,
밤 9시 반 넘어 체크인을 하면서야, 겨우 그 끝이 없을 것 같던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슬로’행 비행기가 이륙하는데 보니, 뉴욕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하긴, 밤 풍경이야... 전기(불)만 있으면, 어딘들 아름답지 않을 수 없겠지......’ 하기는 했다.
뉴욕에서 스페인 마드릳까지 직행으로 갔다면 쉽고도 빠른 노선이었겠지만, 북쪽인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경유하는 여정이다 보니...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좌우간 지구를 옆으로도 위아래로도 빙빙 돌아가는 행로이기도 했다.
그렇게 연거푸 이틀 밤의 비행 여정으로, 인야의 발이 마치 풍선 같은 모습으로... 푸르딩딩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마침내 아침이 되고 있는 '오슬로'에 도착했다.
약간 흐린 날씨였는데, 노르웨이는 어느새 나무들에 단풍이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여기는 가을 냄새가 풍기는구나!’
칠레만 해도 봄이 오는 길목 같았는데, 며칠 사이에 콜롬비아의 여름을 지나... 이제는 노르웨이의 ‘가을’을 접하게 되는 신기하고도 먼 여행길이었던 것이다.
거기서도 인야는 세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뉴욕에서보다는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기에... 기다린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스페인 '마드릳'행 비행기가 떴다.
더구나 운이 좋았던지 좋은 좌석이 걸려, 창밖에 보이는 풍광 사진을 얼마든지 찍으며 갈 수 있었다.
비행기의 이륙과정의 바깥 풍경만 봐도, 노르웨이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주로 널찍한 전원 풍경이 보였는데, 너른 경작지 군데군데에 자리한 집들이 동화 속 같기도 했지만, 나라가 깨끗한(인야가 젊은 시절 노르웨이 여행을 했었다.) 만큼... 풍경도 아름다웠다.
그런 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갔는데, 졸다가 보니... 지상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한 쪽은 바다였고 거기 역시 전원적인 풍경이었는데,
아마 '네덜란드' 쯤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비행기는 다시 구름 속에 파묻혔다.
또 졸면서 눈을 뜨니,
그 아래는 '프랑스'인 것 같았는데, 그때부터 인야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후엔 스페인이기 때문이었다.
막 ‘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초 유럽의 대도시 공항들을 폐쇄하던 바로 그 즈음, 운 좋게도 거의 막차였던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인야에게는... 근 3년 만에 오는 길이었다.
결국 '피레네 산맥'을 지났고,
갑자기 안개속으로 비행기가 들어가는 것 같더니,
조금 개는가 싶었는데, 역시 스페인은... 지금까지의 유럽의 풍경과는 그 색감 자체부터가 달랐다.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엷은 암갈색 톤의 녹색에서, 붉은 황토 빛의 얼룩무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점점 마드릳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마침내 비행기가 마드릳 상공을 선회하며 착륙을 준비할 때, 도시의 상징처럼 우뚝 솟아 있는 '네 탑'(Cuatro Torres) 건물들이 기울어진 창밖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던 인야는(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순간, 인야는 버릇처럼 눈을 감곤 한다.),
“덜커덩!”
물론 약간의 충격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양호하게 내려앉는 느낌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이번에도 무사히 닿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바라하스(Barajas)’ 공항에 도착을 했다.
'내 스페인 시절 초창기에는 무조건 '바르셀로나'가 기착지이자 목적지였었는데, 친구 '산티아고'를 알게 될 무렵부터는... 아무래도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마드릳(Madrid)을 이용하곤 하지.' 하면서도,
‘아, 이틀에 걸친 멀고도 험한 여정을 거쳐 스페인에 도착하긴 했구나. 근데, 이제는 ‘남미 여행’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상태지만, 뭔가... 새로운 시작의 느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2장. 지구 한 바퀴를 돌아
I. 스페인으로 가는 여정
"전에는 넷을 셌지만, 이제는 셋이야."
인야가 2주 정도 머물렀던 콜롬비아 친구 '후안'의 집을 나서며 혼잣말을 했다.
6개월 넘게 남미 여행을 하던 그는, 이렇게 행장을 차리고 나설 때마다,
"하나, 둘, 셋, 넷." 하며 짐의 개수를 세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혹시라도 짐을 빠뜨릴 경우를 대비한 자신만의 안전한 출발 방식이었던 것이다.
'라빠 누이' 섬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큰 가방을 포함한 네 덩어리였지만,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서 큰 짐가방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셋으로 줄어 있었다.
등에 멘 가방 하나, 앞으로 멘 휴대용 작은 가방 하나, 그리고 그림 도구와 스케치북이 든 '스크랩 가방' 하나.
큰 가방이 줄어 단출할 것 같은데도, 등에 멘 가방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아... 썩 자유로운 느낌은 아니었다.
인야가 보고타의 '엘도라도(El Dorado)' 공항으로 가는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다행히 비는 공항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멈춰주었지만.
밤 0시 15분 비행기였는데,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나온 상태라... 너무 일찍 도착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 공항 대합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인야는 이번 여정에 대한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실 이번 스페인행은, '미국 경유'를 피해 유럽(스페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행로를 택한답시고 정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값싼 항공료 때문이었겠지만,
보고타를 출발해 두 곳에서 비행기를 내려 갈아타고 거의 이틀에 걸친 긴 여정을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에 가려면 북반구로 넘어가야 하는 경로인 건 분명하겠지만.
그런데 인야의 첫 번째 중간 기착지는, 하필이면 미국이었고... 그것도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이었다.
어차피 인야에게 미국은, 들러야 하는 운명의 장소인가 보았다.
보고타에서 자정 넘어 출발했던 비행기는 뉴욕에 아침 7시에 도착했다.
'자가 환승'이었기 때문에, 짐을 찾고 출국 심사까지 끝낸 상태로 공항으로 나오자마자... 인야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환전소였다.
'남미 여행' 내내 '너무 오래된 낡은 지폐'라는 이유로 남미 국가에서 환전을 거부당했던 '100달러 지폐' 한 장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그만큼 그 일이...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던 인야에게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천만 다행으로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려준 환전소에,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겠는가.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다음 환승지인 노르웨이의 '오슬로'행 비행기가 뉴욕에서 밤 11시 55분에 출발이어서, 시간 계산을 해 보니... 약 열일곱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라고?'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고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이미 정해진 행로를 바꿀 수도 없는 문제라...
그래서 바로, 낮 시간에는 뉴욕으로 나가 시내를 그냥 배회하려고도 했었다. 어딘가 가는 것도 다 돈이라, 없는 돈에 뉴욕의 명소를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짐을 맡겨야만 몸을 움직일 수 있을 터라, 공항 짐 보관소에 갔더니...
웬걸?
짐 하나에 16불씩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짐 두 개면(등가방과 미술 재료 등이 들어있는 '스크랩 가방'을 들고 다닐 수는 없을 것이어서) 32불이었는데,
'최소한 점심이라도 사 먹어야 하고 또 교통비도 들어가다 보면... 잘은 몰라도 100달러 정도는(아껴도) 들 텐데...... 그렇다면 내가 여태까지 사용하지 못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직해 왔던 이 100달러 지폐를 여기 뉴욕에서 다 날려 보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돈이면,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어쩌면 현지 국내여행 한 곳 정도의 왕복 항공권(교통비)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지 몰라......' 하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뉴욕 도심 관광을 포기하기로 했다.
결국 뉴욕 공항에서 그 긴 시간을, 꼼짝없이 보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한심하기도 했고, 짜증스럽기도 했다. 더구나 그 이유가 돈 때문이란 것이......
그렇지만 인야는,
'하긴, 하루 종일 뉴욕 도심을 돌아다닌다고 해봤자, 피곤하기밖에 더 하겠어?' 하는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거나 위로하면서,
'그러고 보면, 어차피 이런 것도 다 '새옹지마'일 수 있어......' 하고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그나마 먹는 건, 보고타에서 미리 '견과류' 등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물 한 병(큰 거)만 있으면 견뎌낼 수 있을 터라 물을 샀는데,
공항에서 산 물은 한 병에 5.5달러나 받는 것이었다.
그래도 물을 사는 것으로 그 낡은 지폐를 사용했고, 거스름돈을 받기는 했다.
그렇게 공항 청사에서 시간을 때우는데,
'이럴 때, 글 정리라도 좀 해 두자!' 며 공항 청사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 문서 정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전이 깊어가면서 유리 벽을 투과했던 햇볕이 너무 세져서, 모자까지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발의 느낌이 뭉뚝해서 살펴보니... 발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이었다.
지난밤 내내 비행기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던 결과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제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아서, 인야는 거의 하루 종일을 그저 햇볕을 피해 의자 두어 곳을 바꿔가면서 앉아 있었을 뿐이다. 화장실을 갔던 두어 차례를 제외하곤 그렇게 멍하니 앉아만 있었는데,
벽에 딱 붙어 움직이질 않는 한 일본 청년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있기에,
'저 친구는 저기서 뭘 한다지?' 하고 궁금했었는데,
가만 보니 그의 호주머니에 전선이 보이고 뭔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아!" 하고 인야가 알아차렸던 것은, 공항 청사 내 그쪽 벽면에 전원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청년은 핸드폰 충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도 이렇게 멍하니 앉아있지만 말고, 핸드폰 충전이라도 해놓자. 지금 5시가 넘어갔으니 두 시간 정도 충전해 놓으면 90%는 육박할 수 있겠지?' 하면서, 그 전원 구멍에 자신의 핸드폰 충전 장치를 꽂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길게 느껴졌는데도, 아직도 밤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미리 준비해 둔 먹거리가 있어서 배가 고프거나 목이 탈 일은 없었는데,
밤 9시 반이 넘어 체크인을 하면서야, 겨우 그 끝이 없을 것 같던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슬로'행 비행기가 이륙하는데 보니, 뉴욕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하긴, 밤 풍경이야... 전기(불)만 있으면, 어딘들 아름답지 않을 수 없겠지......' 하기는 했다.
뉴욕에서 스페인 마드릳까지 직행으로 갔다면 쉽고도 빠른 노선이었겠지만, 북쪽인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경유하는 여정이다 보니...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좌우간 지구를 옆으로도 위아래로도 빙빙 돌아가는 행로이기도 했다.
그렇게 연거푸 이틀 밤의 비행 여정으로, 인야의 발이 마치 풍선 같은 모습으로... 푸르딩딩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마침내 아침이 되고 있는 '오슬로'에 도착했다.
약간 흐린 날씨였는데, 노르웨이는 어느새 나무들에 단풍이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여기는 가을 냄새가 풍기는구나!'
칠레만 해도 봄이 오는 길목 같았는데, 며칠 사이에 콜롬비아의 여름을 지나... 이제는 노르웨이의 '가을'을 접하게 되는 신기하고도 먼 여행길이었던 것이다.
거기서도 인야는 세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뉴욕에서보다는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기에... 기다린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스페인 '마드릳'행 비행기가 떴다.
더구나 운이 좋았던지 좋은 좌석이 걸려, 창밖에 보이는 풍광 사진을 얼마든지 찍으며 갈 수 있었다.
비행기의 이륙 과정의 바깥 풍경만 봐도, 노르웨이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주로 널찍한 전원 풍경이 보였는데, 너른 경작지 군데군데에 자리한 집들이 동화 속 같기도 했지만, 나라가 깨끗한(인야가 젊은 시절 노르웨이 여행을 했었다.) 만큼... 풍경도 아름다웠다.
그런 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갔는데, 졸다가 보니... 지상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한쪽은 바다였고 거기 역시 전원적인 풍경이었는데,
아마 '네덜란드' 쯤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비행기는 다시 구름 속에 파묻혔다.
또 졸면서 눈을 뜨니,
그 아래는 '프랑스'인 것 같았는데, 그때부터 인야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후엔 스페인이기 때문이었다.
막 '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초 유럽의 대도시 공항들을 폐쇄하던 바로 그 즈음, 운 좋게도 거의 막차였던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인야에게는... 근 3년 만에 오는 길이었다.
결국 '피레네 산맥'을 지났고,
갑자기 안개 속으로 비행기가 들어가는 것 같더니,
조금 개는가 싶었는데, 역시 스페인은... 지금까지의 유럽의 풍경과는 그 색감 자체부터가 달랐다.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엷은 암갈색 톤의 녹색에서, 붉은 황토빛의 얼룩무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점점 마드릳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마침내 비행기가 마드릳 상공을 선회하며 착륙을 준비할 때, 도시의 상징처럼 우뚝 솟아 있는 '네 탑(Cuatro Torres)' 건물들이 기울어진 창밖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던 인야는(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순간, 인야는 버릇처럼 눈을 감곤 한다.),
"덜커덩!"
물론 약간의 충격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양호하게 내려앉는 느낌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이번에도 무사히 닿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바라하스(Barajas)' 공항에 도착을 했다.
'내 스페인 시절 초창기에는 무조건 '바르셀로나'가 기착지이자 목적지였었는데, 친구 '산티아고'를 알게 될 무렵부터는... 아무래도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마드릳(Madrid)을 이용하곤 하지.' 하면서도,
'아, 이틀에 걸친 멀고도 험한 여정을 거쳐 스페인에 도착하긴 했구나. 근데, 이제는 '남미 여행'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상태지만, 뭔가... 새로운 시작의 느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