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81학번으로 학교 다니면서도 구박을 받고 생활했지요.
81년부터 졸업정원제가 시행되어 정원의 30%를 더 뽑고 나중에 자른다는 제도로 말미암아
수도권대학 인원이 대폭증가하였는 데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교수님들의 찡그린 얼굴을 보게되었고
졸업정원제 학생들은 기존과 너무 판이하다는 평과함께 수업시간에 보자는 말로 걱정을 하게 만들었지요.
강의실도 많지 않은데 인원증가에 따라 캠퍼스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s대 출신들이라 경영학과 학생들이 cpa시험보는 것을 못마땅하게 보았지요.
상아탑은 아카데믹해야 하고 순수해야 한다며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학점은 취직을 걱정하게 만들 정도로 박하기만 했지요.
다행히 군대 제대후 와보니 우리학교 출신 김교수님이 오셔서 cpa를 권장하시고 계셨습니다.
제 얘기를 풀어봅니다.
80년대 학생들은 정치 경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따라 데모도 많이했고 따라서 개인적으로
고시를 합격하여 입신양명하려는 뜻이 없었던 때라 취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군대갔다왔다가 신촌로타리에서 데모에 참가했던 동기는 마포경찰서에서 A급 전범이 되어 나왔고
친구는 2년을 갈고 닦는 끝에 공인회계사 1차 수석합격을 맛보는 일도 벌어졌다.
취업을 미루고 대학원을 옮겨 다른 대학으로 갔다가 그 대학에서 왜 좋은 대학을 나두고 여기 왔냐고
구박하여 그놈의 텃세 때문에 석사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졸업후 900포인트인 증시를 보고 증권회사에 들어갔다가 3년만에 480포인트에 손들고 나온 경력이 생겼다.
처음 연수원에서 찍혀 연구원요원이 객장에 영업사원으로 배치되었고 2년후에야 에널리스트로 복귀가 되었다.
밥만 먹으면 떨어지는 객장에서 버티기 힘들어 자진하여 나왔지만 이미 처자식이 있는 지라
중소기업에 취업하려했지만 다 거절당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자격증을 따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동대문에 있는 세무사무소에 갔었는 데 1차 합격했다는 이력서에 세무사님이 경계하는 눈초리를 느꼈다.
결과는 낙방 ~
우선 공인회계사를 준비하기전에 경영지도사를 도전하여 합격하였고 증권회사에 다닌 경력으로 증권분석사를
합격하였다. (대부분 공인회계사와 과목이 유사하다)
공인회계사는 1차도 되지못하고 세무사가 1차에 합격하고 난후 4인가족의 가장인 나는 방향을 틀수 밖에 없었다.
당시 모 학원에서 회계원리 원가회계 중급회계를 강의하며 그 강사료로 틈틈히(?) 중앙경상학원에 가서 수강을
하는 기구한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 주경야독
하지만 돈버는 것을 위해 중소기업진흥공단 컨설팅부에 경영지도사로 등록하면서 컨설팅을 나면서
수업준비를 병행했지만 2년차에 2차에 떨어졌다. 이제 돈도 다 떨어졌다
3년차 동시 패스를 노리고 전력질주 하였으나 학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주경야독하는 상황에서 역부족이었다.
4년차 이대로 넘어질 수 없어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데 제 밥그릇을 걷어찼다고 노발대발하시면서
부자지간 절연을 하였던 아버지가 돈을 구해주셨다. 당시 마이너스 통장 2천만원 다행히 부도는 넘어가고
아버지가 마지막이라고 전하는 말을 들으면서 난생처음 고시원에 입소하여 공부를 하게되었던 것이다.
96년 합격 그리고 돈을 벌어야 하기에 수습기간에도 컨설팅을 하며 수습을 대충받았기에 개업후 뼈저린
대가를 치뤄야 했다. 거래처는 많아져가는 데 직원통솔도 않되고 거래처는 매달 2~3건 씩 세무조사받고
돈은 들어오는 것 같은 데 통장에는 돈이 없었다. 전산은 하나도 모르겠고 직원에 메달려야 했다.
게다가 세무서 직원들의 등살에 에휴~ (결국 독학하여 현재 전산세무회계 시험 출제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덕에 세무사고시회에서 전산을 가지자하여 키컴에 세무사 두명을 파견하였는 데 내가 참여하였다.
당시 윤정기 세무사와 난 같이 전산강의를 수습세무사들에게 하였는 데 내 뼈져린 경험을 토대로 강의하였다.
경영지도사들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정말 끈질기에 일을 해낸다.
국가공인이지만 세무사보다는 척박한 환경에서 보장이 되지 않았기에 손수 영업하며 뛰어다녀야 했다.
선배들이 하는 말 " 보험설계사 아줌마들 보이지 않니?" 산꼭대기에 아줌마 둘이 티코를 끌고와 영업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경영지도사는 보험설계사 처럼하면 성공한다고 일러주셨다.
세무사무실을 지경에서 33번째로 개업후 영업에 대한 부담은 하나도 없었다. (현재 150개 정도의 사무실이 있다)
사장들이 무엇을 원하고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 지 설명만 하면 영업은 거져되었다.
개업당시 세무사들은 영업을 뛰지 않았던 때라 프라이드를 타고 공단을 뒤지던
나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고 2년만에 230업체를 돌파하여 동기 중 선두에 섰다.
난 자신있게 말한다. "경영지도사 같이 악착같으면 세무사는 밥 잘 먹고 살 수 있다."
개업후에도 자격증 취득은 계속되어 6개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다 경쟁자이지만 우호적인 세력도
된다. 적어도 나에게 바가지는 씌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 세무사님들이 전화가 와서 차 좀 바꿔라 세무사 위신깍인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결국 지역세무사 임원에 의해 윤리정화위원회에 회부되었다.
결국 가격을 인하하지 않고 가격을 올려 수임한 덕에 징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
그 많은 명의대여는 왜 그리 많았던지 --
그 후 지역세무사협의회에 나가지 않는다.
세무사를 하면서 세무서과세적부심사위원도 하였고 동시에 검찰 자문위원도 하였던 나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었고
정치계에 입문을 권유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거절은 했지만 정말 오해도 많이 받았다.
지역신문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오해받지 않았을 텐데 "지역을 이끌어가는 100인"에 좋은 결과가 나와
정당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세무사가 세무조사를 받았다. 영업정지 6개월 정말 청천벽력 같은 결과였다.
사형선고
국세청에 원망이 갔다. 내가 해결해준 것만 해도 얼마인데 나를 죽이다니 --
거래처를 30개만 남기고 다 정리를 하였다 겨우 수습은 잘 되었지만 그 후로 난 그 지역에서 벗어나 서울에
와서 기업고문 3년, 그리고 전국을 돌며 강의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지역 세무서에 있는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잊어버리라고 미안해 했지만 난 그 지역이 정말 싫어졌다.
고등학교까지 나온 내 고향인데도 말이다.
난 현재도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한다. 그것도 남들이 돈 않된다고 하지 않는 농촌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중기청에서 가끔 컨설팅 거리도 주어서 비자금도 만들고 ㅎㅎ
세무사무소 업체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을 보았지만
2002년 부터 내 거래처는 한 번도 세무조사를 받지 않았다. 배고프면 발 뻗고 잘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강의로 인해 내 생활비와 용돈을 벌며 사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과거 고시회 임원은 맡아보았지만 향후에도 세무사회 임원은 맡지않을 생각이다.
작년에 국세청장상을 받았다. 과거의 누가 있어 걱정이 되었지만 잘 넘어갔다.
국세청있는 선배가 말했다. " 조직에 배신을 당한 적이 없으면 결코 조직에서 클 수 없다."
첫댓글 파란만장하시네요! 선배님. 언제 또 만나뵙고 좋은 말씀 듣고 싶습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시길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제가 가슴에 새겨 둬야 할 문단이 있네요..건강하시길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선배님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설같은 이야기네요. 힘내십시오. 화이팅~
형님! 프랑스에서도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거래처가 천정부지로 많다가 세무조사를 받고 다시 일어서셔서 오늘의 모습이 마치 소설의 주인공같으시고, 인생 자체가 드라마입니다. 저도 많은 걸 느낍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에피소드가 글 한편에 모두 담겨있습니다. 앞으로는 나눠서 자주 써 주신다면 저희 후배 세무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명근 형님 ! 해피 추석보내세요-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