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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9)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
삼상 6:1-18
엘리 시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습니다. 3만 4천 명이 전사하였고,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하나님의 법궤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와 그의 며느리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그 법궤를 어떻게 처리하였을까요?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가 다곤 신상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쟁이 곧 신들의 전쟁이었기에, 자신들의 신인 다곤이 이겼다고 생각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갖다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블레셋을 이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날 거대한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고꾸라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곤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다곤이 다시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고꾸라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걸쳐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다곤의 몸뚱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블레셋이 다곤 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다곤을 섬기며, 그 손목이 걸쳐져 있던 문지방을 밟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법궤를 가져다 놓은 아스돗 성읍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독한 종기가 퍼지게 하신 것입니다.
견디다 못한 그들은 그 법궤를 가드라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가드에서도 독한 종기가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법궤를 에그론이라는 마을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에그론 사람들은 ‘우리를 죽이려 하느냐’며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겁이 나서 아무도 법궤를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블레셋 방백들이 모여서 의논 한 결과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자”고 결론을 내었습니다.
블레셋의 어떤 성읍도 받질 않으니, 그 동안 법궤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1절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여기서 ‘지방’은 성경 아래 각주에도 있듯이 ‘빈들’을 말합니다. 언약궤가 사실상 재앙을 가져다주는 물건으로 생각한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서 들판에 일곱 달을 그냥 방치한 것입니다.
<복술자들의 제안>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점쟁이)들을 불러 ....
여호와의 언약궤를 어떻게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2절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러자 그들이 제시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3-9절>
3절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절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 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6절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절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절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절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제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냥 돌려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건제가 무엇입니까?
속건제란 타인의 권리나 재물을 침해했을 때 그 배상을 위하여 드리는 희생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속건제는 반드시 산 짐승의 제물의 피를 드림으로 자신의 허물을 용서함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백성들은 어떻게 속건제를 드립니까? 본문 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
속건제에 바치고자 한 제물은 금 독종과 금 쥐였습니다.
금 독종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발생한 독종의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들판을 망가뜨린 죄의 모양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재앙과 관련된 어떤 모양을 만들어서 신에게 바치면 ...
그 재앙이 사라지고 병도 낫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블레셋의 방백 수대로 금 독종 5개와 금 쥐 5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성읍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17-18절에 나옵니다.
<17-18절>
17절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18절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그러므로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제안한 속건제는 성경이 말하는 속건제가 아니고 단순한 배상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제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냥 돌려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속건제물을 돌려보내는 방법입니다.
새 수레를 만들고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아니한 젖 나는 암소 둘을 끌어다가
여호와의 궤와 속건제물인 금 보물이 담긴 상자를 실어 보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취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시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은 소가 제대로 수레를 끌 수 없습니다. 끄는 이도 없는데 말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자라다보니까 .... 겨울이면 좀 자란 송아지의 코뚜레를 뚫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어도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일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또 일부로 멍에를 메게 해서 끌고 다닙니다. 통나무라도 끌고 다니게 합니다.
이때 처음 멍에를 맨 소는 적응이 되지 않아 난생 처음 맨 멍에를 벗으려고 이러 저리 몸부림을 칩니다. 어느 정도 훈련을 시킨 다음에야 봄철에 현장에 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택한 소는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은 소입니다.
그런 소에 멍에를 메고, 수레 위에 하나님의 법궤와 속건제물을 담은 상자를 싣고....
낯선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라는 곳으로 보냈다고 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수레도 새 수레를 끌게 한 것입니다. 길이 들지 않았기에 빡빡해서 잘 굴러가지도 않습니다.
또 젖 나는 암소에게서 새끼를 떼어 놓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
갓 송아지를 낳은 암소는 새끼 송아지를 두고 길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새끼가 우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불가능한 방법을 제안하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아직도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했는지 의심하는 것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방법을 통해 과연 하나님이 그 재앙의 원인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큰 재앙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냐? 아니면 우연이냐?’를 놓고 그들은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0-12절>
10절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절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연적으로는,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암소들은 벧세메스를 향하여 바로 걸었습니다. 큰 길로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설명하면서 세 가지 특징을 언급하였습니다.
첫째, 울며 갔다는 것입니다.
새끼를 두고 어찌 울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돌아서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가는 모습입니다.
둘째,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고 걸었습니다.
마음은 좌우로 치우쳐 돌아가고 싶은데 하나님의 손이 막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셋째, 목적지인 벧세메스까지 정확하게 갔습니다.
사람이 앞에서 두 암소를 이끌어 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도록 내 버려 둔 것입니다. 성도님들 ! 이 두 마리의 소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벧세메스로 간다는 것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무슨 내비게이션이 달린 것도 아닌데 목적지까지 정확하게 찾아 갔습니다. 그것도 두 마리가 함께...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며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헌신예배 때 이 암소들의 헌신을 강조해서 설교하는 내용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을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헌신자들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요,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암소들은 전혀 헌신하고자 하는 의도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암소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블레셋 방백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반응>.....
‘여호와의 언약궤’가 돌아오는 것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13-15절>
13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절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두 암소는 벧세메스에 있는 여호수아의 밭 큰 돌에 이르자 멈추었습니다.
멀리 골짜기에서 밀을 베던 벧세메스 사람들이 다가가서 보니 놀라운 것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하였습니다.
이 말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 ‘여호와의 언약궤’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젖이 나는 암소 두 마리가, 새 수레에, 안내자도 없이, 벧세메스까지 온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수레를 패고, 그것을 땔감삼아 운반한 암소들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께서 이런 신비한 기적을 베푸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배한 것이.....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시거나 부족했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블레셋을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블레셋에게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맺는 말씀 –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
이 모습을 보던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은 어떻게 행하였습니다.
16절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그들이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요?
자신들에게 지난 날 임한 재앙은 ‘여호와의 언약궤’로 임한 것임을, 곧 하나님께서 내린 것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기적을 보고도 에그론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에그론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왔어야 합니다.
“우리도 다곤 우상을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단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비록 이방인이요, 하나님을 대적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경험한 후에는 겸허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한 사례를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람 장군 나아만의 고백(나병이 나은 후) – 왕하5:15a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느브갓네살의 고백(다니엘이 꿈을 해석한 후)– 단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 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블레셋 다섯 방백들은 결코 솔직한 사람들도,...
용기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강퍅한 사람들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실제로 처음부터, 즉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다곤 신상이 엎드러지고 목과 손발이 잘려나갔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왔어야 합니다. 독종이 돌고 들판에 들쥐가 들끓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왔어야 합니다. 그들의 강퍅한 마음은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의 기적을 보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에게 진 바알의 선자들(450명)과 아세라 선지자(400명), 이세벨도 결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왕상18장).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소위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도 강퍅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시오, 우주의 지배자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우리의 구세주 이십니다. 우직 우리 주님만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성도님들 안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강퍅하고 굳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하셔서(성령이 주시는 마음 – 겔11:19, 겔36:26),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만 따르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