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 9
군홧발에 짓밟힌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시청 앞에서 쿠데타군을 지휘하고 있는 박정희 소장. 박 소장 왼쪽은 박종규 소령이고 오른쪽은 차지철 대위다. 서울신문 포토 라이브러리 제공
1960년 ‘4월 혁명’의 횃불은 마산에서부터 밝혀졌다. 그 불길은 4월 18일 서울로 옮아 붙어 고려대생 시위로 점화되었고, 다음날 전국에서 활활 타올랐다. 고려대생 시위 때부터는 3ㆍ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외침으로 울려 퍼졌다. 사태는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4월 23일 장면은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장면이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며 목적은 이승만의 하야”였다. 그리고 비록 명목상으로 지내긴 했지만 ‘행정부 부수뇌’로서 도의적인 책임감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이의 불행을 틈타 정권을 잡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으로서 장면이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이승만은 “부통령이라는 존재를 위험시하여 물러나지 않고 발악적인 비극의 사태도 불사할지 모를 일”이었다. 장면이 사임하자 그제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 사퇴와 이승만의 하야가 이어졌다. 장면은 그 위중한 순간에도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위대한 풍모를 보여주었다.
군사 쿠데타로 막을 내린 ‘장면 정부’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운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은 장면 국무총리가 2차 지명으로 국회의 인준을 받은 1960년 8월 19일 탄생했다. 주권 재민의 완벽한 민주주의와 누구나 잘사는 민간 주도의 ‘경제 대국’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이듬해 5월 16일 일단의 정치군인들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9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집권 민주당 내 치열한 신ㆍ구파의 다툼으로 골이 더 깊어진 국무총리 인준 과정에서부터 파국은 배태되고 있었다.
- 1961년 5월 18일 중앙청에서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사퇴한 직후 심경을 털어놓는 초췌한 모습의 장면.
장면은 1961년 5월 16일 그날도 새벽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그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단군 이래 최초ㆍ최대’라는 국토종합건설 사업과 곧 발표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산적한 국무를 챙기느라 결국 자정을 넘겼다. 부인 김옥윤이 차려온 음식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함께 저녁 기도를 바친 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새벽 2시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張都暎, 1923~2012) 중장의 전화를 받았다. 임시 숙소로 쓰던 서울 중구 소공동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 809호실에서였다.
장도영은 “육군 30사단에서 장난을 하려는 것을 막아 놓았고, 현재 해병대와 공수부대 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 다리에서 막고 있으니 염려 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장면은 “한 주일 전에 내가 말한 그거 아닌가?”하고 물었다.
꼭 일주일 전, 장면은 대구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소장이 주동이 된 일부 군인들이 시내 중국음식점에 모여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내용의 정보를 입수하고 장도영에게 조사해 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장도영은 이미 한 달 전인 4월 10일 박정희로부터 쿠데타 계획서를 받아보고 전모를 자세히 알고 있었던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것 아니니 염려 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라며 거짓 보고를 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장면은 “염려 말라는 말만 말고 내게 곧 와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하게”라며 애걸하다시피 독촉했으나 장도영은 끝내 반도호텔에 나타나지 않았다.
총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장면은 부인의 손을 잡고 경호원 조인원(趙仁元) 경감과 함께 전용차로 일단 그 자리를 피했다. 박종규(朴鐘圭, 1930~1985) 소령을 조장으로 차지철(車智澈, 1934~1979) 대위 등 공수특전단 중대장 6명으로 구성된 체포조가 들이닥치기 10분 전이었다.
호텔을 나온 장면은 우선 길 건너 미 대사관문을 두드렸으나 그의 표현대로 ‘문이 절벽’으로 잠겨 있었고, 무교동 골목을 지나 한국일보사 맞은편 미 대사관 사택 문도 두드렸으나 열리지 않았다. 일단 안전한 곳에서 잠시 피신해 있으면서 정세를 보기 위해 혜화동 가르멜 수녀원으로 갔다.
- 1960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기념 촬영한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와 일곱 번째)을 비롯한 제2공화국 각료들.
쿠데타의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오고 있었다. 오전 10시 30분쯤 쿠데타군의 박정희와 유원식(柳原植, 1914~1987) 대령, 장도영과 체포된 국방부 장관 현석호(玄錫虎, 1917~1988)는 청와대로 대통령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을 찾았다. 윤보선은 쿠데타군 지도부와 현직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함께 접견실에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으나, “올 것이 왔구나!”라며 일찍 쿠데타를 인정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원주 1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 1921~2012) 중장과 6개 군단장에게 비서를 보내 진압군 출동을 막았다. 윤보선은 뒤이어 찾아온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 1900~1988)와 그린(Mashal Green) 미 대리 대사가 국군 통수권을 가진 대통령으로서 쿠데타 진압 명령 내리기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그 자리에서 그린이 윤보선에게 했던 “각하의 이런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 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라는 ‘경고’는 그대로 적중해 오늘까지 대한민국이 짊어지고 있는 업보요,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사실 윤보선은 그때 이미 유원식으로부터 1960년 말 쿠데타 계획과 쿠데타 성공 후 대통령직 보장에 대한 언질을 받은 후였다. 유원식은 “혁명이 일어나면 윤 대통령으로서는 즉시 국민 앞에 사죄 성명을 발표하고 사퇴하면 혁명위원회로서는 그대로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는 말을하였고 윤 대통령도 동의하고 ‘그대로 하겠다’고 언약했다.… (1961년 5월 16일 청와대에서) 장도영과 현석호가 나가고 세 사람만 남은 자리에서 윤 대통령에게 내가 ‘앞으로 여기 계시는 박 장군만 믿고 모든 걸 상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밝혔다(1962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국일보 ‘나는 그때 무엇을 했나’ 기고문 참조).
윤보선은 쿠데타가 성공하면 정권이 자기에게로 올 줄로 착각했으나 그도 ‘정치활동 정화법’에 걸려 쫓겨난다. 쿠데타 당시 장면과 쿠데타군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던 장도영 역시 그해 11월 2일 반혁명 사건의 ‘수괴’로 사형 선고를 받고 법정 구속돼 반년 정도 옥살이를 하다가 1962년 8월 29일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훗날 미시간대학 세미나장에서 장면의 막내아우 장극(張, 1913~2008)과 만난 장도영은 흠칫 놀라며 “아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고 한다.
무능한 정치인의 낙인을 스스로 받다
쿠데타가 시시각각 진행되는 긴박한 시간에 장면은 수녀원에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쿠데타 당일 그린과 통화했고, 다음날도 미 대사관측과 여러 차례 통화하며 사태 파악을 하고 있었다. 쿠데타 진압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으나 윤보선의 태도를 확실하게 알고는 모든 진압 계획과 조치를 포기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장도영도 그 기간 수녀원을 찾아가 보고하다가 장면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는 사실도 당시 수녀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장면은 그때 마음만 먹었더라면 얼마든지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 있었으나 끝내 유혈진압을 포기했음도 밝혀지고 있다.
5월 16일 새벽 장면에게 수녀원 문을 열어준 심 마리아(2013년 93세로 선종) 수녀는 “장 박사는 ‘무엇보다도 유혈 사태를 막아야 한다’면서 몹시 괴로워하셨다. 곁에서 지켜보다가 ‘어서 군부대에 연락하시라’고 거듭 말씀드리자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서로 피를 흘리게 해서는 절대로 안 돼요’”라고 하더라고 생전에 증언했다.
5월 18일 내각 총사퇴를 의결하는 제2공화국 제69차 마지막 국무회의를 마치고 명륜동 자택으로 돌아와 울부짖는 송원영(宋元英, 1928~1995) 공보비서관과 이성도(李聖徒) 비서관에게도 “이 사람들아, 피를 흘리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면 뭘 하겠나”라고 했다. 민주당 신파 소속이었던 장경순(張慶淳, 1927~2003) 제5대 민의원 의원의 증언도 같다.
“이주당 사건으로 구속되신 뒤 풀려나셔서 찾아가 여쭈었더니 ‘정치인과 종교인으로서의 갈림길에서 정말 고민했다. 결국 종교 쪽을 택했다. 정치 쪽을 택했을 수도 있지만 서울 시민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 종교인 입장에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탈권(奪權)의 낙인이 찍히고 무능한 정치인으로 매도될지라도 서울 시민을 희생시킬 수 없었다’고 하셨어요.” 장면은 이에 더해 진압에 성공했을 경우 쿠데타 가담자들을 처형해야 하는 문제까지도 고민하며 유혈 진압을 택하지 않았다고 유족들은 전한다. 신앙인 장면의 참 모습이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9일, 최홍운 베드로(전 서울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