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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붕 세 쁘레시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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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둡시다 스크랩 지옥의 역사5
아오스딩 추천 0 조회 9 08.08.29 15: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기계론적 우주The Mechanical Universe

카톨릭의 지옥Hell과 영벌electnal punishment이란  관념은 1564년 트렌토 공의회가  공포한
'교리 문답서Carechism'에서 단호하게 확인되었다. 그리고 브루노와 갈릴레이가 이단재판으
로 고통받는 것을 지켜본 카톨릭 교도들은, 교회 신조dogma 에 도전하는 것을 삼가게 되었
다. 그러나 세속 세계의 지식이 발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쉽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  혁명
초기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유럽 전역의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양 진영은, 과학과 역학 분
야에서 새로운 것들을 차례로 발견해 냈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더욱 두드러지는 과학과 성과를 올렸다. 당시 뉴턴과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던 르
네 데카르트는 예수회 학교에서 수도사들과 함께  공부한 사람이지만, 갈릴레이의 천문학적
발견들을 연구하고 갈릴레이가 옳다는 확신을 얻게 되자,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로 옮겨가
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18세기가 되면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네덜란드, 영구,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 시기에는 광학과 시계 제조술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 17세기 중엽에는 진자 시계
와 휴대  시계용  태엽이 등장했다  -  사람들이 수학과   천문학에 매료되면서, '기계적인
mechanical' '시계 장치식의clockwork' 또는 '시계공의watchmaker's 우주관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우주관에 따르면, 모든 자연현상은 신이 정한 자연법칙을 따르는 물질  운동
의 결과였다.  '초자연적' 역사, 법칙,  종교가 지배하던 그 이전의 여러  세기를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이들 정도였다. 칼뱅의 예정설calvinist predestination도 초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법칙이 무척 엄혹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기계적 우주관mechanical universe이 처음 등장한  것은 14세기 무렵이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은 갈릴레이의 발견들이었다. 그것을 다시  철학적으로 가다듬은 사람은 토마스
홉스였다. 그는 인간의 생명에 대해 "추잡하고  야만적이며 단명 하는"것이라는 영지주의적
정의를 내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홉스 그 자신은 장수한 편이었고 또한 이지 적이었
다. 그는 자기 책 때문에 다른 이들의 적대감을 샀지만 - 홉스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자주
비난받았다 -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다. 말년에 이르러 홉스는 찰스 2세의 비호를 받
았다. 찰스 2세는 어릴 때 홉스에게 수학을 배운 적도 있어서 항상 그를 아껴 주었다.
  홉스는 처음에 기하학에 빠져들었고, 그 다음에 역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
에서는 갈릴레이를 찾아가 천문학과 우주의 본질에 대해 토론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홉스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다. 과학을 타락, 변질시켜 종교적 성전으로 만드는 일 에는 관
심이 없었고, 단지 수학적 방법론이 갖는 논리적 순수성에  매료된 독창적 사상가였을 뿐이
다. 그는 유물론자였으며, 과학정신을 가진 왕립협회 회원들처럼 최초의 '영국 이신론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정작 왕립협회는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냉소적인 기질이나
미신에 대한  경멸은  ('리바이어던'의 제4부   어둠의 왕국에  대하여Of the   Kingdom of
Darkness'를 볼 것)18세기 분위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한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지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급진적 해석을 했다. '바닥
없는 '지옥의 구덩이가 '유한한' 지구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아사야' 14장 9절을
보면 지옥은 해저 심연일 것이라고 추측되며 '마태복음에 나오는 지옥 불은 단지 죽음의 고
통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홉스는 결국 구원받은 자들the saved만이 부활하고, 지옥에 떨어진 자들the damned은 영
원히 죽게 된다는 영혼 절멸설annihilation theory을 주장했다. 이것은  아우구스타누스 말한
천벌Augustanian damnation에 대립하는 두 가지 근대 기독교 이론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오리게네스의 노선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만인 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정신과 육체'라는 전통적인 이원론을 신중하게 재검
토하여 좀더 다루기 쉬운 이원론, 즉 이성지와 감각기의 대립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는 기독
교도였지만, 물질 세계는 영적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천지창조 이후로 하느님은  더 
이상 이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홉스와 갈릴레이의 뒤를 이어, 이 세계는
하느님이 세운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 장치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만일 세상이 불완전
하다면, 그 이유는 하느님만이 완전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세상의 고통이  원죄
에서 비롯되었다는 전통적 사고에서 교묘하게 벗어났다. 유물론에 대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성서의 기적들을 포함한 초자연적 현상들의 가능성을  부인했다는 점에서 홉스를 넘어섰고,
이것은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그는 거기서 일보 양보하여  하느님의 계시는 실증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미묘한(그리고 편파적인)이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회
의주의skepticism에 물꼬를 텄다.
  회의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람은 홀란드의 스피노자였다. 유대인이어서 그랬는
지도 모르지만, 그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기적은 물론  예정론과 자유의지freewill를 둘러싼
논쟁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멸의 영혼이나 천사의 존재에 대한  성서의
증거들을 부정하는 바람에 25세도 되기 전에 유대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
트의 기계적 우주관에서 자신이 발견한 세 가지 결함, 즉 초월적인 하느님, 정신 - 육체 이
원론mind-body duality, 자유의지에 대한  주장을 바로잡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하느님
대신에, 모든 것을 포함하며 그  자신은 숭배 받는 일에 무관심하지만  우리의 숭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우주론적 존재being of the universe'를 상정했다. 그 존재는 의식을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의지는 없으며, 최후의 심판이나 영원한 형벌
따위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럴 수 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정신과 육체는 본래 한 유기
체의 두 측면이고, 정신은 그것의 의식적 부분을 담당한다. 그러나 육체의 본능, 식용,  욕망
은 자유의지를 유린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에 변화를 준다.  사람은 자유의지나 감정이 아닌,
본능이나 희로애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선한  것은 개체나 종에게 유용
한 것이지, 하느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적은 자연적 사건들을 잘못 이해해서  생긴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정신의 어떤 부분은  영원하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의  전체적 사유 체계와
모순되는 듯하다. 그는 17세기에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비난받았지만, 18세기에는  똑같은
무신론자로서 수용되었다.
  좀더 전통적인 사고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난제는,  기계론적 우주 속에서 왜
그렇게 많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기 위해 창조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라이
프니츠는 '선을 택하느냐 악을 택하느냐에 대한 개인의 자유의지를 내포하는 데카르트식 합
리주의Cartesian rationalism'와 '칼뱅의 이중 예정설double predestination'을 융합하려  애썼
다. 하지만 나중에 하느님이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의 결합은 원래 천지창조 때부터 갖추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소 아르미니
우스적인 '낙관주의optimism'로 돌아섰다. 라이프니츠는 볼테르가 철학 콩트  '강디드candide
'에서 조롱한 지극히 낙천적인 팡글로스 박사('모든것pan을 설명함gloss',또는 '모든 것pan을
닦음gloss'의 뜻)와 같은 사람이었다. 팡글로스 박사는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세
상 중에서 최고"라고 선포한 사람이었다.
  과학 시대 초기 사람들의 과거의 지식과 현재의 새로운 지식을 통합하려고 힘쓴 반면, 볼
테르는 반 기독교적인 계몽주의 시대에 속해  있었다. 17세기의 과학자와 철학자들(그 당시
까지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었다)은 성서뿐 아니라 그 밖의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우선 그들은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그
들은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그들은 우주와  지구가 겨우 수천 년 전
쯤에 생겨났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보통 성서에 근거한 시간인  기원전 4004년을 우주의 시
작으로 추론했다. 그리고 '창세기'에 대략 서술된 것을 따라. 식물과 동물이 본래 고정된  기
계적 질서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진화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
의 놀라운 균형을 하느님의 신성 불가침한 솜씨, 예정론의 증거로 보았다. 이것이 이른바 논
증argument from design")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시계공의 우주는 아주  작았다. 로마 카톨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경도된 사람들은 모두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받아들였지
만, 행성은 아직 겨우 6개만이 알려져 있는 정도였고, 그 중에 케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여섯
번째 행성에 넣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모험적인 사람들은 수많은  별들 중에 또 다른 태
양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하의 성운들을  식별할 수 있을 만한
망원경은 당시에 없었다. 수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각각의 우주 안에는 수십 억  개의
태양이 있으며, 그 각각의 태양 주위를 수조 개의 행성들이 공전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로부
터 먼 훗날에나 등장한다.
  뉴턴은 홉스를 제외하고 대부분 뜻을 같이 한 영국인들의 모임이었던 왕립협회에서  가장
저명한 회원이었다. 그들은 데카르트에게 우주의 모형을  취해서 뉴턴을 주축으로 우주론을
확립하였으며, 그것과 성서를 조화하고자 노력하였다. 꾸준하고도 조심스럽게 그들은 칼뱅주
의의 영국 국교회에서 벗어나  그보다 단순한 이신론, 말하자면  자연조교natural religion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가장  출중했던 뉴턴은 신앙을 고수한 과학자로서  존경받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그의 개인 문서들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참으로 신앙이 깊으면서도 동
시에 진실하고 헌신적인 수학자로 알려졌던 뉴턴도 서서히 예수의 부활을 포함한  기적들에
대해 믿음을 잃었고 또, 삼위일체Trinity도 부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여기서 나타난 견
해는 로크의 견해와 똑같은 것이었다. 비록 뉴턴의 수학과 성서의 기적은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뉴턴은 지옥의 영원성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후의 심판 이후에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벌을 경우에 따
라 겁을 주기도 하고, 죄인을 바로잡거나  치유하기도 한다. 지옥은 확실히 겁을 주어  죄를
막는 억제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지옥을 의심하는 사람조차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히  하층민
들에게는 지옥이 쓸모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카톨릭의 연옥은 교정과 치유를 위한 것이었
다. 그런데 시간의 종말에 가서는  유한한 죄를 지은 사람이 무한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인
가? 이것은 치유도 억제도 아니다. 그것은 악의 에 찬 복수일 뿐이다. 이중 예정론을 거기에
더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전율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하느님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하나
님은 압도적 다수의 저주받은 자들을 창조하고("많은 사람들이 부름 받지만, 극소수만이 선
택받는다"). 구원의 교리로 그들을 놀리고, 그 자신이 창조한 죄의 상태를 이유로 영원히 벌
을 받게 할 뿐이다. 17세기 합리주의는 하느님에 대한 그런 견해를 용납하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이중 예정론을 정말로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자신이 아니
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처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애매한 형태의 자유의지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사리를 따질 줄 아는 많은 사람들은 영원한 징벌이 있다는 생각을 조용히 버
리기 시작했다. 홉스, 로크,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악한 자는 자신의 죄에
합당한 고통의 기간을 - 대략 천 년 정도- 겪은 후에 깨끗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직후에 영혼이 절멸annihilation한다고 생각했다. 소치니 파  교도들이
이렇게 믿었다고  한다.  유대인들도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었다.   1세기 전에  재세례파
anabaptists에게도 이와 비슷한 견해가 있었다. 이런 집단들이 이단 용의자로 몰린 반면, 18
세기에 이르면 데이비드 흄이 앞장서서 모든 종류의 내세를  부인하고, 임종의 침상에서 모
든 것이 소멸한다는 설(deathbed annihilation)을 내세웠다. 이것은 신앙심 깊은 보즈웰을 곤
경에 빠뜨렸다.
  자연과학적 방법이 중세처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왕립
학회에서도 종종 있었다. 1714년 토비어스  스윈든은 당시의 최신 이론에 입각해서  '지옥의
본질과 위치 탐구 AnEnquiry into the Nature and Place of Hell'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가 태양에 위치한다는 것을 논리적, 과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했다. 그의 고찰에  따
르면, 만약 지하세계가 지옥이라면 오랜 세월에 걸쳐 겹겹이  쌓인 영혼들이 이미 지하세계
의 모든 공간을 가득히 채워 버렸으며,  지옥의 불이 계속 탈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공기도
공급될 수 없었다. 오로지 태양만이 과거나 미래에도 변치 않고 그 많은 저주받은 영혼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맹렬하며 영구적이었다. 더욱이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의 중심
인 태양은, 지구 위쪽에 있다고 잘못 여겨져 온 최고천Empyrean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에 위치했다. 과연 명쾌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3년 후에 휘스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뉴턴의 뒤를 이어 수학
교수로 봉직했으나, 신앙이 비정통적이라는 이유로  쫓겨났다 -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의 천
문학적 원리들Astronomical Principles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s'을 발간했다. 이
책은 그가 뉴턴에게 헌정한 책이다. 뉴턴이 제시한 운동의 제2법칙이 휘스턴으로 하여금 혜
성은 정해진 궤도를 도는 천체이며, 그 궤도는 타원형이지만  기계론적 우주 안에서 계산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1705년 에드문트 헬리는 주기
적으로 나타나는 혜성 24개의 궤도를 계산하여 책으로 써냈고,  뉴턴의 혁명적인 수학을 이
용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한 혜성이 1758년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정확히 예견했다. 휘스
턴은 핼리의 헤성궤도 계산을 깊이 연구하고, 성서 등에 나타난 지옥의 증거, 특히 극단적인
열과 냉기에 대한 증거들을 종합한 결과, 혜성의 궤도야말로 - 그 궤도는 태양에 아주 가까
운 곳에서부터 멀리 "토성 근처의 차가운 지역"까지  펼쳐진다.- 고통의 장소인 지옥의 "표
면 또는 대기권"이라고 결론지었다.
  휘스턴은 영국 왕립협회의  동료들에게서 불신을 받자,  이전의 영혼 절멸설로  후퇴했다.
1740년 '지옥 형벌의 영원성에  대한 소고The Eternity of  Hell Torments Considered'에서
그는 지구 내부에 징벌 받지 않은 영역,  하데스를 설정하고- 이곳은 형벌은 없지만, 그 혼
란스러움을 생각하면 결코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 죽은 자들의 영혼은 모두 다 여기로 모
여 자기 행실을 개선할 기회를 얻는다고 썼다. 최후의 심판 때 ( 휘스턴은 천년왕국설의 신
봉자였다. ), 축복 받은 자들은 영적인 몸으로 승천하고, 극악무도한 자들은 죽을 당시의 병
들거나 손상된 몸으로 다시 돌아간다. 벌레의 등장도 이것으로 설명이 된다. 그 뒤에는 세계
종말의 거센 불길이 일어나서, "그들은 고뇌의 극한 속에서 소멸한다."고 한다.
 
  런던 성  바울  대성당의 주임사제였던   존 던(1573-1631)은  '이그나티우스의 비밀회합
Ignatius, His Conclaue'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예수회를 풍자했다. 그  무대는 지옥인데,
예수회 스타일의 지옥이 아니라 루키아노스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 낸
해학적인 지옥이다. 던은 마치 지옥의 변방인 림보와 연옥을 거쳐  정말 지옥에 갔다 온 듯
이 이야기한다. 또한 지옥의 마왕(루시퍼)이 이그나티우스 로율라와 환담을 나누던 도중, 새
로운 세계 질서라는 것을 만들어 낸  괘씸한 과학자와 사상가들을 재판하려고 하는  장면을
직접 봤다는 듯이 이야기를 써 나간다. 마왕과 로욜라가 괘씸히  여긴 자들을 보면 우선 코
페르니쿠스, 이어서 존 던의 관심을 끈 책들을 쓴 연금술 의학자 파라켈수스, 그리고 마왕을
교묘히 부추겨 이그나티우스를 저버리게 하게는 마키아벨리  등이 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
을 이용하여 마왕과 이그나티우스는 달 표면에 새로이 식민지를 세우고, 이그나티우스가 그
곳을 통치하기로 한다. 이 지옥은 바티칸이 유죄 선고를 내린 모든 이단자들을 수용하기 위
한 것이다.
  이 에세이는 즐겁게 보라고 쓴 가벼운 글이지만, 당대의 과학적 발견뿐만 아니라,  신대륙
발견에 대한 관심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거기에는 당대 사람들을 매
우 흥분하게 했던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  동방의 여행기들도 있었다. 존 던은 로마  카톨릭
신자로 자라며 예수회 수도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공
부했지만, 종교 때문에 학위는 받지 못했다. 그는 항상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홉스와 밀턴
이 갈릴레이를 찾아갔던 것처럼, 던은 오스트리아 벽지에 있던 케플러와 교제했다.
  던은 종교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강렬하고 고상한 시를  쓴 것으로 우리 기억에 남아  있
다. 그는 나중에 영국 국교회로 개종한 뒤 저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지옥 불로  신도
를 겁주는 설교자는 아니었다. 비록 말년에 이르러 과격한 성향을 띠긴 했지만, 그는 기질상
지옥불 운운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아래에 인용된 글은 존 던의 설교문으로서,  온건하
고 교양 있으며 과학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신앙심도 깊은 당시의 중산층 프로테스탄트들
이 선고받는 지옥의 고통poena damni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준다.
 
  하느님 그분은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과 같은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결국 말씀과
자비로 내 영혼 속에 들어오실 수 없으면, 심판을 내리시어 학질과 중풍으로 이 육신이라는
집을 뒤흔드시며 이 집을 열병과 열사병으로 불타게 하시고, 그 집에 거처하는 주인, 곧  내
영혼을 공포와 근심으로 짓눌러 떨게 하시면서 내게 들어오십니다.  나에 대한 당신의 목적
과 실천을 포기하고 그만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떠나 마치 내가 한 푼의 가치도 없었
다는 듯이 나를 내팽개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침내 이  영혼을 마치 연기처럼 증기처럼
거품처럼 사라지게 하십니다. 영혼이 연기나 증기나 거품이 될 리야 없겠지만,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중략)... 하느님의 모습을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저주보다 더
한 고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설교에서 '나'라는 일인칭을 사용한 것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던은 말로우와 셰익
스피어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까닭에, 그의 시와 산문은 모두 다가
오는 과학의 시대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시대 이후 사라진 지 오래 된 일종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에 대한 기대도  담겨
있었다.
  토마스 브라운(1605-1682)의 '의사의 종교Religio  Medici'에 나오는, 던에  필적하는 자기
고백적 문구는 던과 유사하면서도 약간 급진적인 영국 국교회의 입장을 드러낸다. 브라운은
다른 지상인들처럼 이신론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결코 지옥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회고하며, 하느님은 인간이 자신을 분노하게 했을 때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써만 지
옥을 사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겁에 질려 천국을 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느
님을 섬기는 자들은 천국을 향해 똑바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 무서워서 하느님에게 굽
실거리는 타산적인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를 전능하신  분의 사도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형편없는 노예일 뿐이다.
 
  한편, 수백 명의 청교도  설교자들은 아래에 인용한  크리스토퍼 러브(1618-1651)와 같이
청중을 위협하여 공포에 떨게 했다.
 
  여러분이 만약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도한다  할지라도, 한숨짓다가 허리가
부러질 정도가 된다 할 지라도,  여러분의 말이 한숨이 되고, 모든  말이 눈물이 되고, 모든
눈물이 한 방울의 피가 되다 할 지라도, 결코 아담이  잃어버린 하느님의 은총을 되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그  한가지 죄 때문에 하느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고, 그 분의 지혜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만 번의 설교와 만 번의 예배로도  되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러브'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극단주의자였던  그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는 설교보다 공포를 주는 설교가 훨씬 더 큰 효과가 있다."며 자신의 주장을 변호했다. 또
"억세고 문제 투성이인" 영혼들에 대해서는  "지옥불의 섬광만이 그들의 양심을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한편 온건한 성직자 로버트  버튼(1577-1640)은 '우울한 해부The
Anatomy of Melancholy'(1621)에서 "격노하여 고함을 질러대는  사제들" 때문에 병적인 절
망에 빠져 버린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그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성서에서 뽑은 구절을
제시했다.
  그러나 17세기의 모든 설교자들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침례교도인 존  번연
(1628-1688)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의 구원을  향한 여정을  그린 우화  '천로역정Piligrim`s
Progress, from This World to That  Which Is to Come'(1678)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
다. '천로역정'은 1792년까지 160판을 발행했고, 19세기를 통틀어 영어로 씌어진 책  중 성서
다음가는 베스트셀러였다. 거기서 지옥은 주변적으로만 등장한다. 번연의 두 번째 유명한 책
은, 초판이 나온  1658년부터 1797년  사이에 30판을  찍은 '지옥에서  들려오는 한숨소리A
Few Sighs from Hell' 다. 이 두 작품에 나타난 번연의 견해와 기법은 완전히 중세적인  것
으로서, 그 책들이 누린 큰 인기는 엘리트 층의 사고방식이 민중의 사고방식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입증한다. 실제 설교를 토대로 한 '지옥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는 환상적인 지
옥 주변을 청교도적인 공포의 웅변으로 채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뱃속은 불타는 역청 또
는 녹은 납으로 가득 차 있고, 빨갛게  달군 집게가 살을 갈갈이 찢고, 사지는 떨어져  나간
다. 그리고 기름에 튀겨지고 불에 그을리거나 구워지고 영원히 불에 타는 영혼들을  그린다.
당시 청교도 집안의 아이들은 흔히 번연 작품의 사본을 선물로 받았다.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18세기에는 지적활동의 중심이 영국에서 프랑스로 바뀌었고,  계몽주의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들은 프랑스 인이건 아니건 '필로조프(자유사상가)'라는 프랑스 어로 불렸다.  그들
중에는 물론 철학자도 있었지만, '필로조프'라는 프랑스 어가 반드시 영어의 '철학자'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철학자이기 전에 사상가이자 작가이자 논객이자  비평가였으며,
합리성과 과학에 대한 믿음, 그리고 억압을 벗어난 자유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문필가들
이었다. 여기서 억압을 벗어난 자유란  상당 부분, 제도화한 종교의 압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유치함을 타도하자Ecrasez   l`infame!"라는 볼테르의  구호에서  '유치함
l`infame'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데이비드 흄이 지옥의 공포란 사람들을 억압하는 장치
에 불과하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우매함, 기독교, 무지"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이었다.
  편의상 피에르 베일(1647-1706)을 첫 번째 '필로조프'라고 해 두자. 비록 18세기를 6년 밖
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18세기 식의 풍자적 말투를 썼고, 학문적 작업에서도 18
세기 특유의 방식을 취했다. 그것은 한 관점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와 의견을 부지런
히 수집하는 방식을 말한다. 때는 바로 존 레이(1627?-1705)가  '종species'의 개념을 해명하
여 동식물을 분류하는 유용한 방법을 확립한 때이며, 18세기의 지성인들은 필로조프이건 그
반대자들이건 사전, 백과사전, 목록, 총서, 일람표, 수집물  등 온갖 체계들을 열성적으로 만
들어 내던 시기다.
  프랑스의 필로조프들 중에 잘 알려진 이로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그리고 44권으
로 된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를 두   명의 과학자   달랑베르(1717-1783)와 뷔퐁
(1707-1788)이 있고, 다른 필로조프들과 심하게 다투고 끝내 그들고 절연한 루소가 있다. 영
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철학자 데이비드 흄,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그리고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이 있다. 미국에서는 선구적 영웅인 이탄  알렌(1738-1789)고 정치
이론가인 토마스 페인(1737-1809)을 들 수 있다.  한편 벤자민 프랭클린과 토마스 제퍼슨이
만든 '독립 선언문'은 계몽주의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정치 문서가 되었다.
  17세기 사람들과는 달리, 계몽주의 시대의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걸과들에 맞는 성서 구절
을 찾는 일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단, 성서를 비방할 때는 빼고 말이다.) 이런 태도는
진정한 경험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처음으로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뷔퐁은 단순히 몇 천년
전으로 한정되는 창세기 규모의 시간이 아니라 아득히 던  과거로 눈을 돌렸고, 천지창조가
6일만에 이루어 질 수는 없으며, 여섯 기에 걸쳐 완료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각종
보고서들과 온갖 상품들, 그리고  신세계와 극동 지역에서 점점  빈번하게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유럽은 편협한 시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꾸준히  전개된 번역작업을 통해
유럽인들은 과거와 타문화를 존중할 줄 알게 되었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철학, 과학, 종교
는 각각 다른 범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지옥에 대한 정통 교리를 논패하기 위해 필로조프들이 택한 과학적 접근 방법이 어떤 것
인지 알아보려면,   이것들 가운데  선두 주자   격인, 베일의  백과사전  '역사 비평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1697)이 도움이 된다. 사실상 에세이  모음집인 이 사전
에서 베일은 교리에 대항하는  평범한 논쟁뿐 아니라, 특이하게도  칼뱅주의 위그노 교도의
지도자인 피에르 쥐리외에 반대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쥐리외는, 하느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보여 주려고 죄짓는 것을 허용했다고 말했다. 베일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함으
로써 죄에 대한 증오를 보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고 반박했다. 쥐리외는 "이
성, 관습, 그리고 세상의 모든 법률에 기대어 볼 때도" 지옥은 필요하다고 논증하였다. 그러
나 베일은 동의하지 않았다.
  지옥에 대한 직접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그리 신중한 태도가  아니었으므
로, 베일은 '역사 비평 사전'에 지옥에 관한 항목을 넣지 않았다. 그 대신 베일은 이단, 타종
교, 무신론, 계시, 그리고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들에 관한 글로 위장하고 측면공격을 시도했
다. 그의 무기는 기지와 박학다식이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을 보면,  윤리와 도덕적인 삶은
고통을 주는 하느님(또는 신들)에 대한 두려움과 무관하며,  하느님(또는 신들)은 어떤 사람
에게는 신앙적 신비일지 모르지만, 다른 이에게는 음울한 미신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쥐리외는 칼톨리시즘을 비난하면서 초대 교회가 이단에 대해 일관되지 못한 태도를  취했다
고 지적했다. 베일은 그러한 쥐리외의 논법을 그대로 이용하여, 칼뱅주의 자체도 정통  신학
이 맹렬히 비난한 새로운 이단들을 그 어는 것도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못했다고 논증
했다. 베일의 주장 중에서 가장 아이러닉한 관점은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는 자
연스럽게 도덕을 갖춘 사람인데 반해서, 정작 사악한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신앙이 있
어야만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50년 후에는 디드로가 장대한 '백과사전Encyclopedie'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지옥에
대한 공격은 노골적이었다. '천벌Damnation' 항목을 보면, 정통 교리의 비 논리성이 모두 드
러난다. 예를 들면, 유한한 죄와 - 그것이 아무리 극악한 것일지라도 - 영원한 벌의 불균형,
최후의 심판 이후에 받는 형벌의 무의미함, 하느님의 자비  또는 그리스도의 희생이란 개념
과 양립하기 어려운 영원한 고통 등이 있다. 도덕적인 이교도, 고결한 미개인noble savages,
그리고 모든 프로테스탄트와 그 밖의 이단자들은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할까? 여기서
스윈든과 휘스턴의 주장을 진지하게 다루지만 결국 비합리적이라고 결론 내린다. '백과사전'
의 '천벌'항목에서 천벌에 대한  논증은 오직 하나뿐이다. "천벌의  증거는 성서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는 구절이다. 성서에 대한 디드로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듣기 좋은 설교 따위를
혹평한다.
  '백과사전'의 마지막 권은 1772년에 선을 보였는데, 그것이 나오기 전에 볼테르는 직접 편
찬한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을 출판했다. 그 사전은 베일의 것보다  훨씬 짧았
지만, 일종의 소론집이었다는 점에서는 베일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볼테르는 전적으
로 체제를 타파할 목적으로 그 사전을  썼다. 볼테르의 말에 따르면, "  '백과사전'은 혁명을
일으키기에 너무 크고 무거웠던 반면, 1764년 익명으로 출판한  자신의 값싼 소책자는 즉각
당국의 강한 비난을 살 정도였으니, 오히려 작은 책인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볼테르는 당면한 논쟁들에 참여하기보다는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는 그 사실
들에서 논리적이면서 파괴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냈다. 딱딱한 훈계들이나 '중국식 교리 문답
Chinese catechisms' 속에 담겨 있는 예리한 비판들은 죽음과  부활, 종말론, 묵시, 기적, 성
서적 '사실들', 그리고 철학적  이론 등 온갖 것을  담고 있다. 여기서  지옥 항목인 '앙페르
Enfer'는 다른 항목만큼 재미있지는 않지만 정확하다. 그가 볼 때 지옥은 페르시아 인, 갈대
아 인(메스포타미아 인 ), 이집트 인, 그리스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지, 형벌은 ' 네 새대'까지
만 이어진다고 믿었던 유대인의 발상은 아니었다. 또한 보통 재주로는 구약성서에서 지옥에
대한 희미한 증거도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볼테르는 말한다.  바리새파와 에세네 파 신
도들에게 지옥 신앙이 있었다는 것은 볼테르도 인정하지만, 그것도 원래는 그리스, 로마에서
온 것이라고 그는 단정한다. 그리고 교회의 몇몇 교부들이 "어떤 가난한 자가 염소 한 마리
를 훔쳤다고 해서 영원히 불에 타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며 지옥을 거부한 이야기
를 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지옥이라는 개념을 비웃는  한 사제의 해학적인 말
을 인용하면서, 지옥은 "당신의 하녀, 재단사, 법률가나 믿는 것이다."라고 말하다.
  사무엘 존슨(1709-1784)의 영어사전 'Dictionary'고 볼테르의 논법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
운 일이다. 신실한 영국 국교도인 존슨은 필로조프들을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흥
미로운 것은  그의  풍자소설 '라셀라스Rasselas'가   같은 해에  출판된 볼테르의   '캉디드
Candide'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옥에 대해, 각각 적절한  문구와 인용문들을 덧
붙여 여섯 가지 정의를 내리고, 일곱 번째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옥 : 여성명사. (어원은 색슨 어의 helle) 1. 악마들과 사악한 영혼의 장소  2. 선하건 악
하건 개별적 영혼들의 장소 3. 일시적인 죽음 4. 술래잡기 놀이에서 붙잡힌 사람이 끌려가는
장소 5. 재봉사들이 옷감을 버리는 장소 6. 극악무도한 세력들  7. 현대 작가들보다 옛날 작
가들이 곧잘 사용하는 어휘.

  이보다 더 정확하고 정중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즈웰이 존슨에 대해 한 이야기
중에 조금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이야기는 18세기의 교양인, 다시 말해 같은 사교 단체
나 보즈웰이 표현한 대로 '클럽'이라는 것에 속해 있던 사람들 사이에도 의견 차이가 있었음
을 어느 정도 알려 주고 있다.
  1784년 6월 12일 토요일, 문단의 대가 존슨, 사제인 아담스 박사, '학식 있고 신실한' 핸더
슨, 그리고 보즈웰, 이 사람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존슨이
공표했다.
 
  "나는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탓에 나  자신이 저주
받아야 할 사람들 중 하나가 될까 두렵습니다.(침울해 하면서)."
  아담스 박사 : "저주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존슨(흥분해서 크게) : "네, 지옥으로 보내져서 영원히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스 박사 : "나는 그 교리를 믿지 않소.... "
  존슨은 약간 동요하면서 우울한 기분으로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분명히 존슨은 그때 75세였다. 그런데 이의를 제기한 성직자 아담스 박사는 그보다 세 살
위였다.
  보즈웰이 데이비드 흄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위의 대화와 비교해  보자. 스콜틀랜드
철학자 흄은 죽기 7 주 전인 1776년 7월 7일 일요일에  보즈웰을 만났다. 보즈웰은 다소 재
치 없게 불멸에 관한 주제를 꺼냈다가, 흄이 불멸은 물론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
자 매우 놀랐다. "어떤 미래의 상태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하고 보즈웰이 묻자,
 
  그는 불 위에 있는 석탄 한 조각이 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영원
히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가장 비합리저인 꿈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완전히 사라짐에 대해
생각할 때, 한 번도 불안한 적이 없었는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미래에 자신이  사라지
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있지(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할 때도 불안함은
없다고 말했다.
 
  철저하게 정통 신앙에 뿌리를 둔 보즈웰은 당황하면서도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나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은 흐뭇한 것
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최근에 죽은, 내가 알고 있고, 흄도 높이 평가할  만한 사람
셋의 이름을 들었다. 그는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흐뭇한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들 중 아무도 죽은 후에도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가 상식을 거부하고 무엇이든 회의부터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바보스
럽고 불합리한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즈웰은 흄과 헤어졌지만, 그 대화에서 받은 인상은  한동안 그의 뇌리에서 사라
지지 않았다.
 
  물론 18세기에는 다른 방식으로도 지옥 이야기에 대한 흔적을 남겼다. 루키아노스가 창안
한 '사자들의 대화dialogue of the dead' 형식이 잡지나 소책자에  다시 살아났고, 종교와 정
치적 논평, 때로는 스캔들에 있어서까지 가장 인기 있는 풍자 형식이 되었다. 호가트William
Hogarth(1697-1764)와 고야Jose de Goya(1746-1828), 그리고 그 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화가들이 그린, 때로는 음산하기까지 한 풍자화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화의  참여자들은
보통 고전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거나, 또는 최근에 죽은 저명 인사들 이었다. 그 중  사
무엘 존슨 박사가 특히 인기가 높았다. 그 밖에 미노스, 플루토, 카이사르, 소크라테스, 몽테
뉴, 군주들, 주교들, 사교계 여인들, 애디슨Addison(1672-1719)과 스틸Steele(1672-1729)같은
저널리스트를 꼽을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가 지옥의 돈 후안을 그
린 '인간과 초인Man and Superman'은 이 대화들을 모델로 하였다. 죽은 자들의  대화는 20
세기 초의 잡지들에까지도 등장했다.
  돈 후안의 생애는 그의 악마적인 동반자인 파우스트의 생애에  필적할 만큼 화려했다. 돈
과 그의 아름다운 정부 그리고 지옥으로 던져버리는 석상이  처음으로 무대에 등장한 것은,
티르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라는 필명을 쓰는 스페인 사제가  1630년경 쓴 희곡 '세빌
리아의 호색가El Burlador de Sevilla'에서였다. 그 두 주인공은 모차르트의 '돈 지온반니Don
Giovanni'(1787)와 그 이후의 이런저런 작품들에서  계속 지옥에 사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우스꽝스러운 춤과 노래로 된 지옥의 가곡으로서, 토마스 쉐드
웰이라는 왕정복고 시대의 극작가가 돈 후안 연극 '난봉꾼The Libertine'(1676)의 향연 장면
을 위해 쓴 것이다.
 
  악마1 : 서둘러라 서둘러, 새 손님이 오신다.
          지옥의 가장자리까지 오셨다.
  악마2 : 새로 유황불을 지펴라,
          악마들아 모두 모여라.
          지옥에 있는 어떤 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한 자들의
          끔찍한 최후를 기다리자.
   악마들의 합창 : 그들이 오게 하라, 오게 하라.
          무시무시하고 영원한 불행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하라, 오게 하라.
  악마3 : 지옥에 떨어진 그 누구보다 더 사악한 그들이
          여기서는 눈물을 흘리고, 동정 받지 못할 신음을 하리라.
          여기서는 울부짖고, 끊임없이 한탄하리라.
  악마1 : 피와 욕망을 통해 그토록 잘 누렸던
         그들은 응당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길을 느끼게 되리라.
  악마2 : 끝나지 않을 격심한 고통 속에서
          지난날의 소행을 통곡한들 아무 소용 없으리.
  악마3 : 그들은 영원한 어둠을 보게 되고
          영원한 쇠사슬에 묶이리라.
  악마들의 합창 : 오게 하라, 오게 하라.
          무시무시하고 영원한 불행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하라, 오게 하라.
 
  거의 같은 시기에 윌리엄 마운트포트William Mountfort는 할리퀸과 스카라무슈를 등장시
킨 '익살극으로 엮어 본 파우스투스 박사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Doctor Faustus
Made Into a Farce'을 연출하고 직접 출연했다. 1724년에는 '광대 파우스투스 박사Harlequin
Doctor  Faustus'라는  가장  무도  무언극을  드루이   레인에서 공연하였다.   콜리 시버
(1671-1757)가 연출한 이와 비슷한 연극에 대해서  알렐산더 포프(1688-1744)는 '바보들The
Dunciad'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갑자기 고르곤들이 야유를 퍼붓고 용들이 노려보고
  뿔이 열 달린 악귀들과 거인들이 출정한다.
  지옥이 솟고 하늘이 내려와 땅위에서 춤춘다.
  신들, 도깨비와 괴물들, 음악, 격노와 환희,
  화염, 춤, 전쟁과 무도회,
  큰 불이 모든 것을 삼키고 나니 끝이 난다.
 
  전 유럽의 광장과 장터에서는 인형극장들이  아주 번성했다. 인형극은 이동이 쉽고,  배우
몇 명만으로도 (다급한 상황에서는 한 사람만으로도 )제작할 수 있었고, 비용이 적게 들었으
며, 정식 연극과 달리 국가  검열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비록 관중은 아이들로 붐볐지만,
이 극들은 아이들을 위한 것 이었다기 보다는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민중 유머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오늘날 텔레비젼의 시추에이션 코미디sitcom와 똑같이, 친숙한 배우들과  반복
되는 이야기에 의존했던 이 극들에서 독창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펀치와 주디'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최후의 인형극이지만, 그 전에 인기를 끌었던  것은 돈 후안과 파우스트
의 기적과 장난을 우려먹는  것이었는데, 관객이 지겨워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줄거리를
길게 늘일 수 있었다. 그런데 돈과 파우스트는 정작,  극의 실제 주인공은 아니었다. 관객들
은 그 둘의 광대 같은 하인들. 즉 한스 피켈헤링, 한스 부르스트 또는 할리퀸에게 갈채를 보
냈다. 이들은 제 주인들의 모험을  따르고 흉내내면서 관객들을 웃기는데, 마침내  악마들이
그 패거리를 지옥의 입으로 끌고 가려고 할 때, 이 촌뜨기들은 꾀를 써서 달아난다. 그때 관
중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박수를 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말로우의 희곡이 아니라 시장터
의 인형극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말로우의 희곡을 번안하여 공연하고 다니던
유랑극단이 인형극에 영감을 준 것도 사실이므로 말로우는 괴테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
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성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종교나 지옥  자체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도 않았다. 1732년 알폰소 데  리구오리는 카톨릭 교회들의 설교단에서  지옥 불로
설교할 설교자들을 양성할 목적에서  구세주회Order of Redemptorists를  창설했다. 다음은
그들의 교구 안내 책자인 '영원한 진리The Eternal Truth'에서 따온 것이다.
 
  그 불행하고 가련한 사람은 아궁이 속의 장작처럼 불 속에 휩싸일 것입니다. 그는 아래서,
위에서, 그리고 사방에서 화염의 깊은 나락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만지고 보고  숨
을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어디에서나 불에 닿고 불을 보고 불을 호흡할 수 있을  뿐입
니다. 그는 물 속의 물고기처럼 불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불은 그 저주받은 사람을 둘
러쌀 뿐 아니라 그의 창자 속에 들어와 모진 고통을 줄 것입니다.  그의 몸이 온통 불이 되
고, 몸 속에 있는 창자가 불타고, 심장은 가슴속에서 불타고, 혈관에서 피가  불타고, 골수마
저도 머리 속에서 불탈 것입니다. 신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모두  그 자신이 불 아궁이가 될
것입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대단한 설교자들이었다.  프랑스에서 백과사전 파  학자들이 파격적인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대단한 설교자들이었던 예수회원들 중에  그 유명한 아베 브
리덴과 다른 설교자들은 파리 전체에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자랑거리
역시 설교였고, 영국 국교를 따르지 않는  프로테스탄트와 극단주의자들이 거주지로 택했던
미국에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영국 국교도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정착했다. 메이플러워  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에 도착
한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의 계급 질서에 항거한 조합교회주의자들이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침례교도들도 즉시 독립해서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에 정착했다. 영국에서 박해받던 퀘
이커 교도들은 펜실베니아에 자리를 잡았고,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이 그곳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에서 그들과 합류했다. 존 웨즐리가 세운 감리교회는 뉴욕 주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
만 중앙교회는 많은 분파로 갈라지고 말았다.
  1730년대를 시작으로 복음주의 부흥 운동evangelical revivalism의  물결이 식민지 미국을
휩쓸었다. 이른바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으로 불리는 그것은  장로교회 복음주의자인
길버트 테넌트(1703-1764)와 더불어 뉴저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것은 유명한 조합교회
주의의 신학자, 조나단 에즈워즈(1703-1758)가  뉴잉글랜드 전체에 퍼뜨렸다. 그  뒤를 이어
칼뱅주의 감리교도인 조지 화이트필드(1714-1770)는 그 자신이 얘기한 대로 "정열과 명료성
과 힘"을 겸비한 선풍적인 방식으로 설교활동을 했다. 그들이 밝힌 목표는 "잠들어 있는 영
혼에게 공포의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청중들이 눈물을  흘리고 부르짖고 몸부림치고 졸도
하며 집단으로 개종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뉴잉글랜드의 성직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에서  뉴턴과
로크의 사상을 공부했고, 1723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연과학을 청교도주의의 틀
안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고, 상당한 성공도 거두었다. 그는 악과 형벌이 신의 위대한  계획
의 일부라고 생각한 철저한 구원 예정론자였다. 한편, 도취적인 면도 있어서 '공포의 설교'를
하는 데 능했다. 그의 첫 부흥 대집회는 1734년부터  1735년까지 메사추세츠 노셈턴에서 열
렸고, 대각성 운동이 절정에 달한 1741년에 그가 행한 '진노하신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
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설교는 특히 유명했다. 그는 "그들의 발
이 예정된 시간에 미끄러지리라."는 성서 원문에다가,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고서는 어떤 것
도 악한 자들을 한시라도 지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해석을 달았다.  이를 설명하면
서 하느님의 손에 달리 있는 가는 실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불길 위에 떠 있는 거미들의 전
율적인 이미지를 그려 보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죄악으로 부패한" 사람들이 일요일에 보이는 고상한 태도에 분노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죄지은 자들이 미래에 받는 피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는 벌The Future
Punishment of the Wicked: Unavoidable and Intolerable'이란 제목의 또 다른  설교의 끝을
이렇게 맺었다.
 
  머지 않아 당신은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위대하신 하느님의 진노와 지옥에
대해 들으면서 편안하고 평화스럽게 앉아 있다가 태평하게 자리를  뜰 당신들은, 이윽고 몸
을 흔들며 벌벌 떨고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무시하고 넘어간 것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중요한지를 납득하게 될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이
되려고 설교를 들을 필요는 없어 질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은 아주 정숙하고 태평하게 듣고
있는 하느님의 진노와 능력도 그때가 되면 얕보지 못할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화이트필드의 야외복음 전도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
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에드워즈의 견해를  온건하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격렬했다는
화이트 필드의 말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최초의 대각성 운동(나머지는 19세기에 걸쳐 몇 차례 일어났다. )은 미국 역사에 두 가지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각성 운동을 통해 해방된 감정이 곧바로 식민지 전체를 혁명
적 열기 속으로 끌어 들였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  열기를 천년왕국 시대의 출발점으로 보
게 했다는 것이다.
  2차적인 영향은 좀더 미묘한 것으로서,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도 예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부흥 운동가들이 엄청난 논쟁과 종교적 동요는 헌법 제정자들Founding Fathers에게도 예외
없이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 시대에 프랑스에서 한동안 살았던 프랭클린이나 제퍼슨 같은
이들은 종교적 열광을 혐오한 탓에  온건한 기독교마저 이탈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기독교에 동의했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철저한 이신론자가 되었고, 제퍼슨도 암묵적으로  그
러했다. 두 사람 모두 미국을 파벌주의와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종교의 다원주의
를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제퍼슨이 프랭클린의 도움으로 작성한 미국의 독립 선언문에서
는 "자연과 법과 자연의 신"이라고 까지만 언급할 뿐이었다. 이 형식에 대해서는 흄도 승인
했을 것이다. 미국 헌법에는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교회는  단
호하게 국가와 분리되었다.


지은이: 앨리스 K.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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