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보바지의 추억”
- 다 선 -
어느 시대의 사회상을 알아보는데 있어서 옷의 유행은 중요한 참고자료의 하나가 된다. 옷의 유행은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번져나기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그리고 삶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그 정도가 조금 낮아지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옷의 유행이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한다.
의복의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필자의 어린시절 어머니께서 즐겨 입으셨던 몸빼는 일본 군국주의의 산물이라고 한다. 몸빼가 일할 때 편하기 때문에 간편복으로 많이 입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몸빼는 여성들의 미적 감각을 살리는 데는 역부족했던 듯 아버님께서 어머님에게 몸빼를 입지 말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가끔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몸빼는 지금도 시골에서 혹은 도회지에서 일하는 주부들의 간편복으로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그리고 해외에서 전쟁 중 체류하던 동포들이 귀국선을 타고 돌아오면서 검청색 양복에 중절모, 그리고 검정 고무신 대신 구두를 신은 소위 마카오신사들이 멋스러운 남성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그리고 흡연문화도 바뀌어 아리랑담배가 유행을 하였고 이 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퍼머머리가 등장했는데 1947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는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괴상한 두발과 화장을 하는 여자 ...... 이러한 천박한 여성들은 ..... 깨끗한 삼천리 강산으로부터 말소시켜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 시대에는 미풍양속을 헤치는 경범죄에 해당했었던 싶다. 1950년대 초에는 물들인 군복이 유행했고, 청년들에게는 군복 밑단을 좁게 고친 소위 홀태바지가 유행 했으며 낡은 옷을 뒤집어 입는 우라까이 패션도 유행했다. 그러다가 육이오 전쟁과 함께 옷 선택 기준이 달라져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 강조되면서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면서 값싼 나일론이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나일론 소재의 낙하산이 주된 공급처였으나 1954년 태창방적이 나일론을 자체 생산하면서 나일론은 와이셔츠, 팬티, 양말까지 점령했으며 감이 도톨도톨한 곰보 나일론은 한복지에 까지 쓰였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1950년대 후반 일본에서 들여온 교토 비로도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대 인기를 얻었고 양장은 물론 고급 한복에도 값비싼 교토 비로도가 사용되어 나라에서는 급기야 교토 비로도 사용 제한령까지 실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7년 제일모직이 모직을 생산했다. 수입품의 3분의1 가격대 제일모직 원단 신사복이 나오면서 보통 남자들도 멋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해 반도호텔에서 최초로 패션쇼가 열렸고 미도파백화점에서 대한복식연구회 주최로 열린 첫 의류 세일에는 구름처럼 인파가 몰렸다. 그리고 50년대 중반에 들어온 영화 로마의 휴일은 모든 여성을 오드리 헵번으로 만들었다. 쇼트커트 헤어스타일, 끝단이 극히 좁은 맘보바지와 어깨부터 허리까지 몸에 착 달라붙는 프린세스 라인 등.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옷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좋은 지표가 되고 있다. 의복 연구가도 아니고 복장 전문가도 아닌 필자가 장황하게 의복의 변천사를 늘어놓는 것은 바로 오드리 헵번으로부터 유행된 맘보바지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필자가 중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는 정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가난한 세월을 보냈던 시절이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때도 복장검사라는 것이 있었다. 선생님들이 교문 앞에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상태와 두발검사를 하였다. 그 날도 등교를 하는데 교문에서 선생님들이 복장검사를 하고 계셨다. 나는 복장을 위반한 일이 없었으므로 평소처럼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고 교문을 통과해 지나가려고 하는데 학생부 선생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말씀 하셨다. “너, 왜 맘보 바지를 입고 다녀, 당장 내일 제대로 입고 오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하고 말씀 하셨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교실로 들어갔다. 당시 조금 유행을 앞서가는 일부 학생들 사이에선 맘보바지가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유행에 좀 둔감했던 탓에 맘보바지가 유행하고 있었는지 조차도 잘 몰랐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맘보바지가 유행하자 아마 선생님들께 단속을 시작하신 모양이었다. 그 날 수업이 모두 끝나고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불렀다.
“너, 오늘 아침에 학생부 선생님께 맘보바지 입었다고 걸렸었다며, 평소 모범생이 왜 그랬나, 내일 제대로 고쳐서 입고와. 알았지”하고 말씀 하셨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하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난 바지를 고쳐 입지 못한 채 다음 날 걱정을 하면서 학교에 갔다.
학생들 틈에 섞여 선생님들 눈을 속여 지나가려고 하는데 어제 그 선생님이 큰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다가오셔서는 “너 어제 나에게 걸렸었지, 맘보바지 고쳐 입고 오랬는데 이게 뭐야, 선생님 말이 말 같지 않냐”하시면서 다짜고짜 뺨을 세차게 때리셨다. 눈에서 불이 번쩍하면서 귀에서 대포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방비 상태에서 엉겁결에 얻어맞은 나는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나를 선생님은 들고 있던 막대기로 몇 차례 더 내리쳤다. 그리고 말씀 하셨다. “이, 자식 선생님 말이 말같지 않냐, 너 내일도 그러고 오면 정학 당할 줄 알아!”나는 간신히 일어나 옷을 털고 교실로 들어갔다. 너무 순간적인 일들이라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귀가 멍멍하고 아팠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담임선생님께 갔더니 의자를 내주면서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냥 서있겠다고 했다. 선생님께서 “너, 어제 선생님이 옷 고쳐 입고 오라고 했는데 왜 그냥 왔는지 말해 보아라”하고 말씀 하셨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그냥 서있었다. 그 때 아침에 나를 때리셨던 선생님이 교무실로 들어오시면서 나를 발견하시고는 담임선생님께 “저 자식, 내가 맘보바지 고쳐 입고 오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냥 왔어요. 적발자 명단을 드렸으니 교칙에 따라 엄격하게 처리해 주세요. 요즘 자식들은 말들을 들어 먹지 않아서 원!”하고 말씀 하셨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담임선생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넌 우리 반 모범생인데 왜 그랬냐, 선생님께 말해보아라” 담임선생님은 평소 나를 좋게 보아주고 계셨던지라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선생님, 저 맘보바지를 입은 것이 아니고요....” 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담임선생님께서 다시 말씀 하셨다. “너, 맘보바지를 입었잖아 지금”나는 용기를 내어 말씀드렸다. “선생님, 저 맘보바지를 입은 것이 아니고요, 1학년 때 산 교복인데 이제 작아져서 맘보바지처럼 되었어요. 2학년 때 이미 늘릴 대로 다 늘려서 더 이상 늘릴 수가 없었어요. 새로 사려고 해도 가정형편이...” 그리고 나는 그냥 울먹였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왜 진즉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사실 당시 집안이 너무 어려웠던 터라 차마 부모님께 새로 바지하나 사달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어 그냥 입고 다녔는데 학생부 선생님은 내가 유행하는 맘보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난 그 때 고막이 터져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나는 교수가 된 후에도 늘 그 때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가슴 속에 한 가지 결심을 지켜 오고 있다. 그것은 제자가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정확한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야단을 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결심 덕분에 난 지금 참 행복한 교수로 살아가고 있다. 20년 넘게 교단을 지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제자들과 얼굴을 붉힌 적 없이 교단을 지켜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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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선님의 글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는군요,,,,,,
다선님의 꾸밈없는 글을 보면서 한번더 생각해봅니다~~
다선님의 글들이 왜 그렇게 가슴을 적시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것 같습니다. 정말 이 시대 마지막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별명이 맞는 것 같습니다. 추억 속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이글을 읽으며 핑 도는 눈물을 감출수가 없네요. 그 어린 마음에 상처가......세월의 흐름속에서 잊혀질수 없는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해 가시는 모습, 정말 존경스러워요.
다선님, 왜 그렇게 수없은 용서와 끝없는 사랑을 배프셨는지, 그리고 기다리셨는지...가슴속이 징!징! 울립니다. 바라볼수록 높고 넓은 것은 하늘과 바다가 아니라 다선님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모든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해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다선님은 그러한 내면에서의 승화와 초월이 마음을 진동시키는 글을 잉태할 수 있도록 해 주는것이 아닌가해요.
오늘은 왠지 맘보바지의 추억이 내 마음을 더욱 울려줍니다. 늘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제자들을 대하시는 다선님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존경해요.
전 맘보바지를 참 잘 입었어요. 맘보바지 유행이 끝나고 나서는 나팔바지를 입고 동네청소를 하면서 다녔죠. 그 때가 좋았는데 선생님은 아픈 추억이 있으시군요. 제가 대신 위로해 드릴께요.
다선님 저는 예전에 이 글을 읽었었는데.....내용은 가물가물해졌고 만보바지 만세라는 제목이 남아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저도 오늘 흉내를 내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