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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고려고종15년戊子)~1303.2.22(충열왕29년癸卯) 수 76처음 이름(初諱)은 경(璟)이다. 고종30년 癸卯(1243) 국자감시(國子監試)에 16세의 나이로 장원급제(壯元) 하였다. 후일 광정대부(匡靖大夫)에 까지 이르고,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거쳐 세자사(世子師)를 역임하고 치사(致仕). 원(元)나라 조정에서 중순대부(中順大夫) 첨태상예의원사(僉太常禮儀院事) 상기도위(上騎都尉)를 증직(贈職)하고, 고양후(高陽侯)에 추봉(追封)하였다. 공은 천성이 인자하고 어질었으며, 재상으로서 조심하여 삼가고 베풀줄 알았으며, 매사를 부드럽게 순리에 따라 행하였다(恭謹用儒衍). 고종,원종,충열왕 3대에 걸쳐 국사에 공헌하였음이 고려사에 전해지고(歷事高宗元宗忠烈三朝有相麗史有傳), 여지승람에 청주인으로 기록되었다(輿地勝覽錄公于淸州人物).
배위는 아선군부인(牙善郡夫人) 함종임씨(咸從任氏)로 父는 예빈주부(禮賓主簿) 전우(全祐)이고, 조부는 감찰어사(監察御史) 극화(克和)이며 증조는 예빈소경(禮賓小卿) 용비(龍譬)이다. 외조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 장헌공(章憲公) 금보(金浦) 정지(鄭芝)이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노인봉 동록에 소재하고, 예빈경공의 묘소로 부터는 20리의 거리이다. 묘 아래 근처에 한시랑제(韓侍郞堤)라는 저수지가 있다. 또 법성포 남쪽에 한시랑 유지도 남아있다. 재실은 모원재(慕遠齋)이고 歲一祭는 음력 3월 2일에 행한다.
韓康淸州人高宗時登第累遷監察御史出守金州(今金海府)前此田賦常不滿額守多坐罷康始至理屯田之廢者得穀二千餘石吏戢民安以最徵爲禮部郞中歷工部侍郞諫議大夫國子大司成翰林學士忠烈朝知密直司事轉判三司事時兩府議國事皆顧望莫有主者始置宰樞所司存以康爲之後以贊成事致仕又加中贊致仕王召康曰寡人在位己久今年還甲尤切愼兢卿宜條陳可行時事康請修宗廟備樂器以嚴時祀禁法司仰買市物掩骼埋胔放生禁屠止遊田之樂絶肥甘之奉於祈寒盛暑置醬粥以賑飢渴卒諡文惠子謝奇譜謝奇官至諫議大夫子渥泳初謝奇以禿魯花(다루하치)挈家入元泳幼長輩ㅇ事仁宗皇帝官至河南摠管以泳貴贈謝奇翰林直學士高陽縣候康僉太常禮儀院事高陽縣伯
公의 諱는 강(康)이요. 초휘(初諱)는 경(璟)이시다. 고려 高宗15년戊子(1228)에 출생하시고 高宗30년(1243)癸卯에 16세 소년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壯元)으로 발탁되셨다. 관직이 여러 차례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시고 외직(外職)으로 금주군수(지금의 金海)로 부임되셨는데 그 전부터 이 고을에는 전지(田地)에 부과된 세금을 항상 충당하지 못하여 군수가 즉결 처분으로 파면 당한 예가 많았다. 공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군용지(軍用地)로 두었다가 버린 토지를 잘 운용하여 2천여석의 곡물을 수확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고도 소정 세액을 충당(充當)하는데 항상 여유가 있어서 이속(吏屬)들도 일손을 거두게 되고 백성들도 가사(家事)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런 선정(善政)의 공적으로 예부랑중(禮部郞中)에 발탁되시고 공부시랑(工部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셨다. 충열왕(재위1275-1309)조에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 전임하시었다. 이 당시에 의정양부(議政兩府)에서 국사(國事)를 의정(議定)하는데 있어 피차가 간망(看望)하는 태도로 서로 미루고 주재(主宰)하는 자가 없었다. 이 까닭에 처음으로 재추소(宰樞所)를 설치하고 공에게 사존직(司存職)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후 다시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또다시 중찬(中贊)으로 승진하시고 연로하심으로 사임하시었다. 충열왕 22년(1296)丙申에 王이 公에게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王位에 오른지가 오래되어 이제 환갑을 당하니 송구한 심사가 더욱 간절하오. 경(卿)은 내가 할 일을 일일이 밝혀 말씀하여 주오" 하시었다. 公은 하나하나 조목을 들어서 진언(進言)하셨는데 "종묘제사(宗廟祭祀)는 先王을 받들어서 유덕(遺德)에 보답하는 일인 즉 지금 묘사(廟舍)가 퇴폐(頹廢)하여 비가 새고 제사 때 쓰는 樂器(악기)가 산실(散失)되었으니 有司(유사)에게 下命하여 廟舍를 수리하고 악기를 비치하여 시사(時祀)를 엄수토록 하실 것이요. 공상(工商)은 기물(器物)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요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인데 지금 정부 각 기관에서 수용하는 물품을 모두 시정(市井)에서 구입하는데 혹은 그 가격을 억지로 깎고 혹은 그 외상값을 보상하지 않아서 상공인들의 괴로움이 많은 즉 이것을 금하시고 잡아온 생물을 놓아주시어 생명을 살려주는 것은 이것이 증수(增壽)하는 방법이니 청하옵건데 도살(屠殺)을 금하고 수렵(狩獵)을 행락(行樂)으로 하는 일을 막으시고 기름지고 맛 좋은 음식을 절약하여 심한 추위와 더위에 토장죽이라도 장만하여 의탁할 곳도 없이 기갈(飢渴)이 심한 백성을 구호하시고 有司(유사)에게 하명하여 임자없는 시체라도 잘 매장하여 줌으로서 음덕(陰德)을 쌓게 하소서" 하였다. 이 때의 왕이 혼암(昏暗)하기 때문에 公(공)께서 이같이 실랄하게 말씀하셨으나 왕은 이대로 시행치 못하였다. 충열왕 29년(1303)癸卯년 2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6이요, 시호(諡號)는 문혜(文惠)公이시다. 公은 천성이 인자하시어 재상직(宰相職)에 있을 때도 온공(溫恭)하시고 근검하시어 유학(儒學)의 교풍을 바탕으로 충열왕을 보좌하여 훈업을 세웠고 사기(謝奇)와 보(譜; 일명 謝譜) 두 분의 아들을 두셨다. 사기(謝奇)의 관직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악(渥)과 영(泳)의 두 아들을 두시었다. 처음에 사기(謝奇)가 禿魯花(다루하치: 質子)에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元나라에 들어가니 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였으며 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官)에 이르렀다. 泳이 이같이 영달(榮達)함으로 元朝에서 부친인 사기(謝奇)에게는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를 증직(贈職)하고 조부(祖父)인 강(康)에게는 첨태상예의원사(僉太常禮儀院事) 고양현백(高陽縣伯)을 증직하였다.
高麗匡靖大夫都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諡文惠韓公神道碑銘
嗚呼此韓文惠公衣冠之藏也公諱康初諱璟韓氏本箕聖之后代序玄遠至諱蘭佐麗統合三韓諡威襄始居淸州始爲貫於公六代曰直長諱奕上將軍諱希愈禮賓卿諱光胤曾祖祖禰妣通儀郡夫人羅州陳氏戶長懿女宋理宗戊子生公癸卯試國子監壯元旣登第官至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始出守金州理荒廢屯田廩庾盈牣吏戢民安以治最爲禮部郞中歷工部侍郞轉判三司時 忠烈王置宰樞所議國事公實主之以贊成事致仕王召公曰寡人在位己久尤切愼兢卿宜條陳可行事公敷進以修宗廟備樂器嚴時祀禁橫濫掩骼胔放生禁屠止游田絶肥甘施賑恤王皆嘉納大德癸卯二月二十二日卒諡文惠追封高陽縣伯噫公之事行不應止此世遠蹟湮今據譜乘及麗史列傳祛其重複並互抄節所傳厪厪然因此厪傳所不傳可槪也配牙善郡夫人咸從任氏主薄全佑女四子謝奇寶文提學譜典校令謝壽守延俱直史館四女趙瑞平壤君張碩奇廷俱宰臣安戩郞將長房男渥右政丞上黨府院君諡思肅泳高陽候諡正惠浚平章事二房男弘時扶安君三房男沃郞將潭澤季房男敬彦密直事曾玄以下至今數十代甚繁衍只記其顯著非百尺碑所能盡記而惟國朝 神懿 昭惠 章順 恭惠 安順 仁烈六后妃皆以公裔爲姙似聖述實贊邦祿此不可以不書也猗休哉公墓在靈光治東老人峰下向東原亂後失傳 純廟年間搜信蹟薦苾芬其亦冥蔭攸騰也盖大墓之有大碑準格所宜也後孫特進官肯鎬與其宗基興謁余銘甚固辭以事偉文繊而不獲遂叙而銘曰 翼翼文惠間氣孕毓稟賦純正氣義卓犖富有其具高第蚤擢邦國棟樑儒門規矱入贊謨猷出著治績歷事累朝位躋宗秩年至致仕賜對前席爲問治要敷奏明晳救時之道經國之策盖公大本惟德之積德厚流光其理不忒愈遠益昌雲伋不億道學勳庸克世綿絡矧復鴻慶六誕沙麓關睢麟趾淑善其德福履之綏其誰與埒窈窕玆邱堂斧有恤間嘗失護旋卽契蕝水益瑩澈山益崱屴百世仰止豊碑穹屹我銘昭之載篆載勒石可泐兮宜光氣之靡終極
歲舍辛巳嘉排節 嘉善大夫內部協辦原任 圭章閣檢校直閣 楊州 趙重穆 撰
嗚呼라 여기가 한문혜공의 산소라. 공의 휘(諱)는 강(康)이요. 初諱는 경(璟)이다. 한씨는 본래 箕聖의 후예로 현원(玄遠)한 대수(代數)를 전하여 오다가 諱란(蘭)에 이르러서 고려조를 도와서 삼한을 통합하였으니 시호를 위양(威襄)이라하며 처음에 청주에 살았으므로 여기가 본관이 되었다. 諱란은 公으로부터 6대가 되신다. 직장 휘 혁(諱 奕)과 상장군 휘 희유(諱 希愈)와 예빈경 휘 광윤(諱 光胤)은 증조,조, 부가 되고 妣(母)는 통의군부인(通儀郡夫人)나주진씨(羅州陳氏)호장(戶長)의(懿)의 딸이니 송(宋)이종(理宗)戊子(고려 고종15년1228)에 公을 生하니 癸卯(高宗30년,1243)에 16세의 나이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壯元)으로 등제(等第)후 광정대부에 이르고 벼슬이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등을 역임하였다. 일찌기 금주수령(金州=김해守令)으로 도임하였을 때 荒廢한 둔전(屯田)을 합리적으로 운영하여 창고가 가득하니 관리들의 수검(收歛=세금을거두는일)을 멈추게하고 백성들도 태평하게 되어 최상의 치적(治績)을 쌓으셨다. 이로 인하여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발탁되었다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하고 삼사판사(三司判事)로 전임되었을 때 충렬왕이 國事를 논의하는 기관으로 재추부(宰樞府)를 설치하고 公에게 그 실무를 주간(主幹)토록 하였다. 찬성사(贊成事)로서 퇴임할 때 王이 公에게 묻되 과인이 왕위에 있음이 오래되었으므로 더욱 더 政事에 그릇됨이 있을까 염려가 되니 경(卿)은 내가 꼭 하여야 할 사항을 조목조목 진개(陳開)하여 달라하거늘 公이 "종묘(宗廟)를 수리하고 樂器(악기)를 비치하여 시사(時祀)를 엄숙하게 봉행할 것이며 관리의 권력 남용을 금하고 주인없는 시체를 묻어주고 생물(生物)을 놓아 줄 것이며 도살을 금지하고 수렵을 중지시키며 미미(美味)의 음식을 끊고 기아(飢餓)의 백성을 구휼(救恤)하시라" 고 진언하였더니 王은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大德 癸卯(충열왕 29년1303) 2월 22일에 卒하시니 諡는 문혜(文惠)요 고양현백(高陽縣伯)에 추봉(追封)되시었다. 슬프도다 公의 행적이 이것뿐이 아닐 터인데 세대가 오래되여 모든 사적(事蹟)이 인몰(湮沒)하였으므로 이제 족보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의거하여 중복되는 것은 제거하고 여기저기서 필요한 절목(節目)만을 가려내여 겨우 이런 정도만 전하게 되었으나 이것만 보더라도 전하지 못한 事蹟(사적)이 얼마나 많을까를 가히 추측할 수가 있으리라. 配位이신 아선군부인(牙善郡夫人)함종임씨(咸從任氏)는 주부전우(主簿全佑)의 여식이요. 아들이 4명 있으니 사기(謝奇)는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이요. 보(譜)는 전교령(典校令)이요, 사수(謝壽) 수연(守延)은 모두 직사관(直史館)이오, 4녀가 있으니 조서(趙瑞)는 평양군(平壤君)이요. 장석(長碩)과 기정(奇廷)은 재신(宰臣)이요, 안전(安戩)은 랑장(郞將)이다. 장남 謝奇의 아들 악(渥)은 우정승(右正丞)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시사숙(諡 思肅)이요, 영(泳)은 고양후(高陽侯)諡정혜(正惠)요, 준(浚)은 평장사(平章事)이다, 2남 譜의 아들 홍시(弘時)는 부안군(扶安君)이요, 3남 謝壽의 아들 옥(沃)은 랑장(郞將)이요. 담(潭)과 택(澤)이 있으며 4남 守延의 아들 경언(敬彦)은 밀직사사(密直司事)니 증손이하(曾孫以下)는 지금 數十世에 번연(繁衍)한 子孫 중에 현달(顯達)한 이만 기록하더라도 백척대비(百尺大碑)가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國朝의 신의(神懿), 소혜(昭惠), 章順(장순), 공혜(恭惠), 안순(安順), 인열(仁烈) 6后妃는 모두 公의 후예로서 태임태사(太姙太姒)같은 聖德을 繼述하여 국가의 복록(福祿)을 실찬(實贊)하시니 이 어찌 아니 쓸 수 있으랴. 진실로 아름답도다. 公의 묘소가 영광읍(靈光邑) 동편 노인봉 아래 東向局內인데 혼란통에 실전(失傳)되었다가 순조(純祖)년간에 신적(信蹟)을 얻어 다시 향화를 받들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蔭德이 유구(悠久)하게 뻗친 소치(所致)인지라 대체로 큰 산소에 큰 碑(비)가 있는 것은 당연한 準格(준격)인 것이다. 後孫(후손)되는 특진관 긍호(特進官 肯鎬)가 그 族人 기흥(其興)이와 같이 와서 내게 비명(碑銘)을 쓰라고 부탁하니 일인즉 크고 文章은 졸렬(猝劣)하여 사피(辭避)하다 못해 이 명(銘)을 서술(敍述)한다.
위대하신 문혜공은 靈氣타고 탄생하니 天品이 純正하고 氣宇가 탁월토다 翼翼文惠間氣孕毓 稟賦純正氣義卓犖
재능이 탁월하여 高等科擧 壯元하니 국가의 동량이요 유림의 師表로다 富有其具高第蚤擢 邦國棟樑儒門規矱
내직에서 議政이요 외직에도 선정일세 累代왕조 섬기면서 높은자리 歷典하다 入贊謨猷出著治績 歷事累朝位躋宗秩
노년으로 사직하고 임금앞에 마주앉아 치국대요 물을적에 明晳하게 奏達하니 年至致仕賜對前席 爲問治要敷奏明晳
時務를 닦는법과 國家經理 대책이라 公의가진 높은信條 積德累仁 根本이니 救時之道經國之策 盖公大本惟德之積
후한 끝에 경사남는 그이치가 틀림없네 갈수록 번창하여 후손이 천만이라 德厚流光其理不忒 愈遠益昌雲伋不億
道學君子 공훈명상 대를이어 綿綿하고 더욱 더큰 경사는 육왕비를 탄육하니 道學勳庸克世綿絡 矧復鴻慶六誕沙麓
금슬좋고 善化함은 정숙한德 있음이라 복록의 안정됨이 그뉘라서 따를손가 關睢麟趾淑善其德 福履之綏其誰與埒
요조한 이산등에 산소가 있었는데 중년에 실호됐다 도로찾아 奉尋하니 窈窕玆邱堂斧有恤 間嘗失護旋卽契蕝
물도더욱 맑아지고 산도더욱 높아졌네 백세를 慕仰하여 우뚝섰는 저豊碑에 水益瑩澈山益崱屴 百世仰止豊碑穹屹
銘을지어 밝히고자 이글을 새기노니 이돌이 부서져도 靈氣만은 영원하리 我銘昭之載篆載勒 石可泐兮宜光氣之靡終極
辛巳(1941) 8월 중순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辦) 원임(原任) 규장각검교(奎章閣檢校) 직각(直閣) 楊州 조중목(趙重穆) 지음
公의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德興理) 노인봉(老人峯) 아래 酉坐에 배위 아선군부인 함종임씨(配位 牙善郡夫人 咸從任氏)와 合兆이시다. 墓所가 오랫동안 실전 되었다가 영광읍 5리 主山 동편에 동향으로 자리한 큰 무덤이 있는데 옛날부터 인근에서 한시랑묘(韓侍郞墓)라고 구전(口傳)되여 왔고 또 신사동(薪寺洞)의 예빈경府君 산소와는 불과 20리 거리이며 墓아래에 한시랑제(韓侍郞堤)라고 칭하는 제당(堤塘)이 있으며 법성포 남방에 유허(遺墟)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그 洞名을 한시랑동이라고 칭하여 온다. 公께서 일찍이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하신 바 있으나 그 외에는 한씨로서 시랑직을 역임한 분이 없다. 그런고로 이 墓가 바로 公의 산소가 아닌가 하여 신사동 묘를 개봉축할 때 宗中에서 후손 철증을 파견하여 봉분을 파고 誌石을 찾아 보았으나 아무 표적도 없었고 官에 제소하여 모장(冒葬)한 자인 서시원등을 문초하여 옛날부터 전하여 오던 시랑묘 표석(侍郞墓 表石)의 소재를 추궁한 결과 묘역 부근의 부서진 비석 돌조각들에서 韓字 한 자만을 발견하였을 뿐이고 분명한 신적(信蹟)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즉 표석도 유실되었고 다른 신표도 없이 함부로 公의 묘소라고 결정할 수가 없어서 이런 기록만을 보존 한 채 後日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에 純祖22년 任午(1822)에 후손인 영광군수 기유 (耆裕)와 무안군수 익상(益相)과 경철(慶喆)이 그 동리에 가서 극력탐색(克力探索)하여 신적(信蹟)을 얻어서 위토와 재실을 세워 제사(歲一祀)를 봉행토록 하였고 6년후 戊子에 법성첨사 도유(法聖僉使 道裕)와 전라수사 응호(全羅水使 應浩)가 表石을 건립하였고 己未年(1919)에 후손 규철(圭喆), 규해(圭海), 영태(永泰)가 石儀를 重修하였으며 丙戌年(1946)에 모원재(慕遠齋)를 중건하고 매년 3월 2일 제사를 행한다.
이 戶口는 文惠公이 67세 되시던 忠烈王20年甲午年(1294)당시 지금의 호적부와 같은 公簿로서 주소 성함, 본관, 생신, 관직이 소상할 뿐 아니라 부친 예빈경(禮賓卿) 광윤(光胤),조부인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 의장부별장(儀仗府別將) 희유(希愈), 증조 상의직장(尙衣直長) 증금자광록대부(贈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혁( 奕), 어머니 통의군부인(通議郡夫人) 나주진씨(羅州陳氏), 배위인 아선군부인(牙善郡夫人) 함종임씨(咸從任氏), 장남인 조정대부(朝靖大夫)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지제고(知製誥) 사기(謝奇)까지 등재되어 있으며 특히 부,조, 증조까지 소급하여 존휘와 관직을 명백히 신망할 수 있는 사적공부이므로 여기에 첨록하고 시조 이하 직장공 이전까지의 계대가 소명될 사적 기록이 발견되기를 빌면서 이 호구 원문을 게재한다.
至順二年辛未正月 日東部上奉香二里甲午年戶口準戶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致仕韓康古名璟年六十七淸州父追封金紫光祿大夫守司空左僕射朝請大夫禮賓卿光胤故祖檢校神虎衛上將軍行儀仗府別將希愈故曾祖尙衣直長贈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奕故母通儀郡夫人陳氏故羅州外祖戶長陳懿古名世長故妻牙善郡夫人任氏故咸從縣父內侍登仕郞禮賓主薄同正任全祐一男宣授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朝靖大夫右司議大夫知製誥謝奇故典儀府上奉香二里甲午年戶口良中匡靖大夫僉議中贊致仕韓康乙准爲內敎
程夫子銘顔樂亭有曰水不忍廢地不忍荒盖顔子樂處古未嘗亭後賢不忍其就泯亭而銘而俾寓百世羹墻况祖先杖履攸曁子姓追慕仰止之心豈敢食息忘諸懷也惟此靈光九峀山下韓侍郞洞上黨韓氏先祖遺墟也至今七百餘載沼平臺空鞠爲茂草而樵兒牧笛跼躋乎其傍行路不禁咨嗟後孫之齊恨尙復如何乎哉此所以碑于玆而紀其事也仍竊惟念靈光之以韓侍郞稱洞者三陳良支莊山下禮賓卿公諱光胤之墓畝長老人峰下文惠公諱康之葬並此地而謹按南塘文純公所撰禮賓卿公墓碑曰居民傳說公謫居于此歿仍藏焉文惠公譜註曰法聖浦南有韓侍郞遺址又曰吾韓氏無歷踐侍郞獨公中經工部侍郞且攷慕遠齊所藏古蹟則以爲後孫希孟粹德偶過此處討得韓侍郞洞名心忽感動因緣得兩大墓所在侍郞洞云其祖考精英感誘後仍卽其理然也旣禮賓卿公賦鵬遐邦文惠公之陪隨孝德之不容己然洞號之不曰禮賓而曰侍郞者禮賓卿公先歿文惠公久留故云然耶此不敢臆質也往在 崇禎四癸未後孫弼祚慶裕營立小石全無事實之載刻埋沒極矣與顔樂之廢荒奚異哉今換他石稍移淨處而竪之揭其面曰韓侍郞洞紀績碑書其陰如右於是海山映輝草木動彩千載如一日祖先之靈庶幾陷降懽悅於山光水色之中曰子有後而不棄其基也文純公卽禮賓卿公十七代孫諱元震而今此之役以宗議捐花樹契資爲之用云
癸未三月 日 竪(1943년 3월 세움)
정부자(程夫子)가 안락정(顔樂亭)을 銘하여 이르되"물도 차마 버릴 수 없고 터도 차마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 것은 顔子의 즐겨 살던 곳에 옛날에는 정자가 없었는데 후현(後賢)들이 그 장소의 유서마저 인몰(湮沒) 될까 염려하여 정자를 세우고 銘을 찬술(撰述)하여 영원토록 慕仰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니, 하물며 조상이 기거하시던 장소에 자손들의 추모하는 심정이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여기 영광군 구수산(九峀山) 아래의 韓侍郞洞은 상당한씨(上黨韓氏) 先祖의 옛터이다. 지난 700여년에 늪(沼)도 대(臺)도 빈터가 되고 잡초만 무성하여 초부목동(樵夫牧童)들이 다닐 뿐이어서 오가는 행인들까지도 탄식하게 되었으니 후손들의 통한이야 어찌하였으리. 그리하여 이 비석을 세우고 그 사적을 기록하는 바이다. 조용히 생각하여 본 즉 영광에 한시랑이라는 동리가 3개소인데 진량면(현재 법성면) 지장산 아래 예빈경(禮賓卿) 諱 광윤(光胤)의 묘소와 畝長面(현재 묘량면) 노인봉 아래의 문혜공(文惠公) 諱 강(康)의 묘소와 이 동리가 아울러 동일한 명칭을 쓰게 되었다는데, 생각해 본 즉 남당(南塘) 문순공(文純公)께서 撰한 禮賓卿 碑文에는 公께서 이곳에서 귀양살이 하시다가 별세하시니 여기에 장례를 모셨다는 부근 주민들의 전설이 있다는 구절이 있고 문혜공의 족보방주(族譜傍註)에는 법성포 남쪽에 한시랑유지(韓侍郞遺址)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우리 한씨 중에서 시랑직(侍郞職)을 역임한 분이 없고 오직 公께서만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한 바 있으며, 다시 慕遠齋에 소장된 고적조(古蹟條)를 살펴보면 후손 희맹(希孟), 수덕(粹德)이 우연히 이 곳을 지나다가 한시랑동이라는 洞名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심정이 감동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양대의 산소가 시랑동에 있음을 알 게 되었다 하니 이는 祖考의 영령이 후손의 감정을 유발케 한 자연스러운 事理라 하겠다. 앞서 예빈경공께서 원격(遠隔)한 지방에 계시니 문혜공께서 시종한 것은 효도의 의당 있음직한 일이요 그리고 동명을 예빈이라 칭하지 않고 시랑이라 한 것은 예빈경공이 일찍이 별세 하신 후에도 문혜공께서 장기간 거류하신 까닭이 아니었겠는가. 전에 崇禎四癸未(순조 23년,1823)에 후손 필조(弼祚), 경유(慶裕)가 短小한 表石을 세웠으나 사실을 기재한 것이 없고 土沙중에 깊이 매몰되었는지라 서두에 말한 顔樂亭의 폐황(廢荒)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지금 새로운 碑로 바꾸어 정결한 장소에 옮겨 세우고 전면에는 한시랑동 기적비라 새기고 후면에는 이 글을 새긴다. 이제야 바다와 산이 빛나고 초목도 곱게 채색을 발휘하여 천년전의 일이 오늘 일같이 새롭게 되었으니 선조의 영령께서 산광(山光)과 수색(水色)이 영롱함 속에 함강(陷降)하시면서"나에게도 후손이 있어 이基地를 버리지 않도다" 하시며 기뻐하시는 듯하다. 文純公은 즉 예빈경공의 17대손인 諱 원진(元震)이요. 이 역사는 宗中이 합의하여 화수계(花樹契) 자금으로 소요경비가 마련된 것이다.
1943년 癸未 3월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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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원재(측면) |
문혜공 신도비(1941년에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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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원재(문헤공의재실) |
문혜공묘비;우측의 비는 1828년 건립된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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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공(諱강) 묘소 ;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노인봉 동쪽 기슭에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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