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행(學行)이라함은 학문(學問)과품행(品行) 즉,덕행(德行)을 겸비(兼備)한 바를 일컬음이니 이른 바 학덕(學德)을 말함이다. 이와같이 학문(學問)이 깊으면 도의(道義: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할 바른길 즉,道理 道德,道誼)에 투철(透徹)하여야 되며 만인(萬人:여러사람)이추앙(追仰:높이 받들어서 사모함) 하는 존재(尊在)를 이름이다.
文敬公 韓 修(문경공 한 수) 동영상 公의 字는 맹운(孟雲) 이요 號는 유항(柳巷)이다.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 장자(長子)인데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원년 (元年:서기1338)8월22일 태어났다. 학문(學問)과 행의(行義)로 세상(世上)의 존경(尊敬)을 받았다.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가장 친하게 지냈는데 그들과 화답(和答) 하였던 시집(詩集)이 세상에서 유행(流行) 하였다. 공은 문장(文章)에 능(能) 하였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썻다. 고려우왕(禑王)10년(1384)3월28일 세상을 떠났는데 나라에서 문경의 시호(文敬)를 내렸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묘지를 지었고 후손(後孫) 문순공 원진(文純公 元震)이 公이 지은 주경설(主敬設)의 발문(跋文:책의 끝에 적은글)을 지었다.
文靖公 韓 繼 禧(문정공 한 계 희) 동영상 公의 字는 자순(子順)이다. 관찰사 혜(觀察使 惠)의 셋째 아들인데 세종(世宗) 5년(서기 1423)에 태어났다. 학문(學問)이 정박(精博) 하고 식견(識見)이 고메 하였다.성리학(性理學)을 연구(硏究)하여 도덕(道德)이 날로 진취(進就) 되었으며 역학보해(易學補解)와 역학계몽(易學啓蒙)에 밝았다.성종(成宗)13년(서기1482년)에 세상(世上)을 떠났는데 나라에서 문정(文靖)의 시호(文敬)를내렸다. 사가 서거정이 공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文貞公 韓 忠(문정공 한 충) 동영상 公의 字는 여경(如卿)이요 號는 송재(松齋) 이다. 주부(主簿) 창유(昌愈)의 長子롤 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의 후손(後孫)으로 경서(經書)와사서(史書)를 널리 배우고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硏究)하였는데 조정암(趙靜菴),김충암(金沖庵),과결의형제(結義兄弟)가 되었다. 公의 유고(遺槁)가 있고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가 행장(行將)을 지었다.
參議公 韓 禹 臣(참의공 한 우 신) 公의 字는 하경(夏卿)이다. 참봉(參奉) 중해(中海)의 아들로 명종(明宗)11년(서기:1556)에 태어 났고 인조(仁祖) 7년(서기:1629)에 세상을 떠났다. 公의 학문(學問)이 뛰어나 세상(世上)에서는 관서부자(關西夫子) 라고 일컬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耳) 는 말하기를 公은 정말로 고정(考亭: 주자의호)학문(學問)의 정통(正統)을 이어 받았다고 하였고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말하기를 韓公의 예학(禮學)은 세상(世上)의 표준(標準)이다 라고 하였으며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는 말하기를 그 당시 대제학(大提學)을 公이 맡지 않고 누가 맡겠는가 라고 하였으며 서애 유성룡(西崖 柳成龍)은 公의 학문(學問)은 고정(考亭: 주자의호) 의심법(心法)이고 경륜(經綸)은 관중(管仲) 제갈양(諸葛亮) 재국(才局)이다. 하였고 우계 성흔(牛溪 成渾)은 公의 기상(氣象)이 비범(非凡)하고 도덕(道德)이 뛰어나니 우리들이 견줄바 아니다.라고 한 찬사(讚辭)가 줄을 이었다. 公이 타계(他界) 한후 영조(英祖)때 예조 참의(禮祖參議)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炯菴公 韓 胤 明(형암공 한 윤 명) 실록 공은조선 중기 의 문신이다. 참의공 전(參議公
) 의 4대손이다. 자(字)는사형(士
)호는 형암(
菴)이며, 1537년 정유생(丁酉生) 이일재 문하(李日齋 問下)에서 수업(受業)하였는데 타고난 자질(資質)이 수미(粹美)하고 조예(造詣)가 고명(高明) 하였으므로 추천(推薦)을 받아 왕손사부(王孫師傅:선조임금이 세자로 있을때)가 되었다.학문과덕행이 예의 명성이 있으셨으며, 율곡 선생과도 도의지교(道義之交)하셨고,(율곡선생의석담일기중)선조대왕의 사부(선조사부:동반시강원 정1품) 이셨으며,명종조에 도사에 오르시었다.배위는 의인 의령 남씨 부 참판 치욱의 따님이며,명종22년(서기1567)에 세상을떠났는데, 율곡이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묘는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내유동 선영 우등 최하부 묘좌 합조이시며,환석,상석,비석,동자석,망두석이세워져 있다.
判官公 韓 孝 胤(판관공 한 효 윤) 公의字는 근숙(謹叔)이요 號는 유음(柳陰)이니 여러고을 군수(郡守)를 지내고 후손(後孫)의 영귀(榮貴)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작(贈爵) 된 여필(汝弼)의 長子이다.중종(中宗) 31년(서기:1536)에 태어났다.명종22년 (서기:1567)에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홍문정자(弘文正字)를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내고 후손(後孫)의 영귀(榮貴)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작(贈爵) 되었다. 公은 경학(經學)을 연구(硏究)하고 예절(禮節)을 읽혔다.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를 대부분 참작(參酌)하여 정하였는데 이로 인(因)해 가법(家法)이 되었다. 公이 인조(仁祖) 18년(서기:1640)에 세상(世上)을 떠났는데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비문(碑文)을 짓고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久菴公 韓 白 謙(구암공 한 백 겸) 공의 자는 명길(鳴吉)이요 호는 구암(久菴) 이니 판관공 효윤(孝胤)의 장자로 명종 7년(서기:1552년)에 태어났다.광해(光海)때 양주(楊州)의 물이촌(物移村)으로 물러나 살았는데 학문(學問)과 행의(行誼)로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철향록 참조
협素齋 韓 孝 祥(협소재 한 효 상) 公의字는 경휴(景休)요 號는 협소재이니 참판공(參判公) 천뢰(天賚)의三子요 승지공 극공(承旨公 克恭)의 손자로 문정공(文靖公)의 5대손이다. 일찍이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소(疏)를 올려 우계(牛溪)가 무함(誣陷)을 받은 것을 변론 하였다. 公이 선조23년(서기1590)에 태어나 현종 6년(서기 1665)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고(遺稿)가 있다. 公의 학행(學行)이 고매(高邁)하여 도암(陶庵) 이재(李縡) 가 묘표(墓表)의 글을 지으면서 선생(先生)이라고 일컬었다.公의 배위(配位)는 여산 송씨(礪山 宋氏)로 감찰 부흥(監察 復興)의 따님이다. 공이 몰후(沒後)에 광주 세촌 탄동 선영 임좌(廣州 細村 炭洞 先塋 壬坐)에 초장(初葬)이었으나 도시계획으로 기유(己酉:1969)에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입봉(驪州郡 興川面 桂信里 笠峰)아래 생원공(生元公)墓 월편(越便)축좌(丑坐)에 配位와 합조(合兆)로 이장(移葬) 하였으며 구비가 있다.
僉知公 韓 必 迪(첨지공 한 필 적) 공의 자는 적부(迪夫)요 호는 청절처사(淸節處士)이니 처사(處士) 효삼(孝參)의 막내 아들(季子)이고 참판공(參判公) 천뢰(天賚)의 손자이다. 문정공의 육대손(文靖公6代孫)으로 선조 32년(서기:1599)12월 16일에 태어 났는데 타고난 성품(性品)이 청고(淸高)하며 학식(學識)이 뛰어 났다.정묘호란(丁卯虜亂)을 만나 인조 가 강도(江都:江華)로 피난갈 때 호위하였다. 병자,정축년이후로 벼슬을 버리고 충남 연기(燕岐)의 노팽정(老彭亭)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자제를 가르치고 후학들을 지도 하였다. 공은 일찍이 안씨 가훈(安氏 家訓) 여씨동몽훈 (呂氏童蒙訓)과 같은 글을 지어 후손에게 남겼다. 공이 숙종3년(서기1667)10월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시첩(詩帖)의 발문(跋文)을 지었고 증손(曾孫) 원진(元震)이 유사(遺事)을 엮었다. 公의 配位 강릉최씨(江陵崔氏)와 광주김씨(光州金氏)인데 공주 명탄면 부강(公州 鳴灘面 芙江) 남부용산(南芙蓉山) 先塋下에 公과 같이 신좌(辛坐)에 유택(幽宅)이있다
晦軒公 韓 如 海(회헌공 한 여 해)선조40년(1607)~숙종19년(1693) 21세 공(公)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휘(諱)는여해(如海) 요 자(字)는 호호(浩浩),호(號)는 회헌(晦幹)이다.전첨공 필후(典籤公 必厚)의 아들이고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仲)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7대손(7代孫)이다. 어머니 숙부인 경주이씨는 부원군 수일(府院君 守一)의 따님 이다.공은 선조40년(서기:1607)11월22일 서울 대사동에서 출생 했다.어려서부터 천성(天性)이 기의(岐薏: 재능이뛰어남)하였다. 벼슬길에 올라 27세인163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명경(明經) 태학(太學) 등에 전념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탐독(探讀)하고 학문을 닦으니 정자(程子)와주자(朱子)를 따르고 의리(義理)는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았다고 하였다.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항복하자 과거에 나가지 않고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니 송우암(宋尤菴),권수암(權遂菴)이 우러러 봤다. 현종9년(1688)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능 참봉(禧陵 參奉)이되고 그후 위솔(衛率) 공조좌랑(工曹佐郞)에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1671년 예산현감(禮山縣監)에 나가 치적(治績)을 쌓았으며 이를 그만 두고 본향(本鄕:여주신곡)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힙쓰니 모름지기 학행,효행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숙종(肅宗)19년(1693)졸하니 수(壽) 87이었다.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신곡 석탄공 묘하 묘좌향(驪州郡 興川面 桂信里 信谷 石灘公 墓下 卯坐向) 에 안장(安葬) 하였는데 1699년 10월3일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고산대하묘좌유향(忠淸北道 忠州市 金加面 岑屛里 古山臺下卯坐酉向)에 배위 (配位)증 정부인 광주이씨(光州李氏)와 이장(移葬) 합조(合兆)되었다.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의 찬갈(撰碣)이다. 계배(繼配) 증 정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는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석탄공신도비후강(驪州郡 興川面 桂信里 石灘公 新道碑 後崗)에 모셔졌다.공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공의 학행(學行)과 절의(節義)를 칭송흠모하는 충주 인근 여러고을 선비들이 광복후(1958)인곡사(仁谷祠)를 짓고 공을 배향(配向) 하였다. 아들은 이탄 재기(伊灘 載箕),계포 용기(溪圃 用箕),남애 원기(南涯 遠箕),진기(振箕), 통정 서기(通政 緖箕) 이다.
창우공 한 여 옥(蒼愚公 韓 如 玉) 공의 자(字)는 자강(子剛)이요 호(號)는 창우(蒼愚)이니 군수 필구(郡守 必久)의 二子요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仲)의 손자이다. 인조 仁祖14년(서기 1636)에 태어났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문인(門入)으로 학식(學識)이 넓고 행실(行實)이 독실(篤實) 하였다. 공이 숙종 11년에 타계 하니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가 묘갈명을 짓고 후손 문순공 원진(文純公 元震)이 행장(行狀)을 엮었다. 공의 배위 파평윤씨(坡平尹氏)는 (判書 挺原)의 따님으로 墓所는 여주 북성산하(驪州 北城山下)에 있으며 아들 수기(壽箕)는 효행(孝行)으로 뛰어났다.
竹亭公 韓 協(죽정공 한 협) 공의 자(字)는 화숙(和叔)이요 호(號)는 죽정(竹亭)이니 아버지는 유존(惟存)이고, 할아버지는 판관 윤종(判官 胤宗)이다. 참의공(參議公
) 의 六代損으로 선조 21년(서기 1588)에 태어났다. 공은 경학(經學)에 마음을 쏟았는데 추천(推薦)을 받아 대군(大君)의 사부(師傳)가 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정사(政事)를 어지럽히자 강진(康津)에서 숨어 살았는데은 여주 장화(驪州 長華)에 숨어 살았다는 유록(遺錄)도 있다. 호남(湖南)의 선비들이 그가 살았던 곳을 군자(君子) 마을로 이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공의 배위(配位)는 광주 김씨(光州 金氏)이고 아들은 수기(壽琦) 또한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을 내렸다.
鰲川公 韓 伯 愈(오천공 한 백 유) 공의 자(字)는 퇴여(退如)요 호(號)는 오천(鰲川)으로 아버지는 선(璿)이다. 숙종(肅宗)원년(서기1675)에 태어났는데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임술(壬戌:영조1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저술 한 문집(文集)이 세상에 간행 되었다. 사림(士林)들이 향사(鄕社)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철향록참조
韓 仁 箕(한 인 기) 공의 자는 덕중(德中)이니 태일(台一)의 장자(長子)로 을축년(乙丑年)에 태어나 신미년(辛未年)에 타계(他界)하였다. 공의 학행이 뛰어났으므로 그 고장 사람들이 용암사(龍巖祠) 건립(建立)하여 제사(祭祀)를 지냈다.主:유록(遺錄)에 있는 기록을 옮긴 것으로 확실(確實)한 연보(年譜)가 없다.
韓 垽 (한 은) 공의 자는 중징(仲澄)이요, 호는 만은(漫垽)이니 사헌부 집의, 이조참의追贈 문정공 6세손 삼등공 5세손 기미 광해11년1619,2,14일생이며 병조참판을 지낸 형길 의아들 관설헌(觀雪軒)허후(許厚)와 미수(眉叟)허목(許穆) 두 선생한테 수학, 양허선생은 모두 공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漫隱公門人 중에는 감사를 지낸 남악(南岳)권흠(權欽)등 다수 가있다. 을묘 숙종원년1675, 2,14일 남대(南臺:학문과 도덕이 뛰어나 이조에서 대관으로 천거된 사람)에 천거 되어 사헌부 지평에 제수 되었다. 시강관 이옥(李沃)이 숙종임금이 납신 자리에서 여쭈기를 전 지평 한은 이, 그 재능과 문학이 쑬만하니 강연 장소에 출입토록 별유(別諭)하심이 보익하여 도움이 많을 것입니다. 라고하고, 우의정 허목이 한은 은 고서를 많이 읽고 학문의 재주가 있음을 신 또한 안다하니, 임금께서 한은 이 있는 곳에 별유를 내려 속히 올라와 강론 경연자리에 출입 합이 옮다. 유명현, 이옥 이 주강에서 말하기를 전지평 한은과 전지평 이동규을 같이 경연에 차례로 출입하기를 청하니, 임금님이 말씀하기를 한은과 더불어 전부 경연에 출입함이 옮다 하였다. 공은 지평에 2번 장령7번 집의8번의 소명을 받았고 그 외 별유로 장악정 부호군 등 여러 중요 직을 수십 차례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임금에 돈면(敦勉)교지에, “너는 여러 번 소명을 사양하고 한번 도 올라오지 않으니, 나는 너무도 서운하다. 재변을 만나 몹시 걱정한 나머지 올바른 선비를 널리 구하고 있는데, 이때에 너는 한 결 같이 겸손한태도로 사양하고 물러나니 섭섭하다. 속히 올라와서 경석에 출입하여 글 뜻을 토론하여 나의 뜻의 부응하라.” 고하였고, 영상 퇴우당(退憂堂)김수흥은 공을 천거하면서, “전 장악원정 한은 은 평소에 명성이 있어 여러 차례 천거 되었으나, 시골로 물러가 끝내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의론과 씩씩한 기상은 소인배가 흉내 낼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특별히 포장해 등용함으로써 말세의 타락한 풍속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였다. 무진 숙종14년1688년6월 1일 70세로 생을 마치시니. 별치부(別致賻:정3품 이하의 臺侍喪事때 임금이 따로 돈이나 喪需用品을 하사함)하였다. 경오 숙종16년1670년, 상신이 경연자리에서 아뢰어 이조참의에 추증 되었는데, 증직교지에, “과거공부를 폐지하고 정업(正業)을 닦아 행의(行義)를 드러내고 념퇴(恬退)을 하였으니, 가상히 여길 만 하므로 특별히 표증(表贈)하노라.” 하였다. 공께서 출사을 아니함으로, 장남 世謙을 벼슬을 주어 그녹봉으로 공을 봉양케 하여 삼등현령에 이르고, 차남 世讓은 공이 서거후에 蔭官으로 발탁되여 담양부사, 상주목사, 남원부사을역임하였다.공의 자는 중징(仲徵)이요,호는 만은(晩隱) 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 형길(亨吉)의 아들로 고아해 11년(서기:1619)에 태어났다.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벼슬이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학행으로 소문이 났다.
執義公 韓 適(집의공 한 적) 공의 자는 달부(達夫)이다. 승지공(承旨公) 언윤(彦胤)의 長子로 명종 7년 7월26일에 태어났다. 공은 학식이 고매(高邁) 하였다. 광해군 4년 10월 12일 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후에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증직 되었다. 공의 배위 동래 정씨(東來 鄭氏)는 공묘와 쌍조로 승지공(承旨公) 묘하(墓下)에 그리고 계배 전주최씨(全州崔氏)는 承旨公 墓上 酉坐에 位置 한다. 아들은 승지 정칙(承旨 正則)이다.
韓 世 燁(한 세 엽) 공의 자는 여수(汝粹)이다. 공이 효종 3년에 태어나 숙종 2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몰후에 사림(士林)들이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縣令公 韓 翼 文(현령공 한 익 문) 공은 후유(後愈)의 아들이다. 학문(學文)이 출중 하였으므로 현령(縣令)에 임명 되었다.
秋月堂 韓 山 斗(추월당 한 산 두) 공의 자는 사첨(士瞻)이요,호는 추월당(秋月堂)이니 이는 自號이다. 충간공(忠簡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일취(日就)이다. 학문(學問)과 행실이 일세(一世)의 지표(指標)가 되었다. 정유재란때 창녕현 화왕산(昌寧縣火旺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죽어도 척화(斥和)해야 한다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렸다. 한권의 문집이 세상에 간행 되었고 풍기 노계서원(魯溪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철향록참조
精一齋 韓 如 琦(정일재 한 여 기) 공의휘는 여기요 자는 백규(伯圭) 요 호는 정일재(精一齋)이니 고위(考位)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필진(必震)이요 조고(祖考)는 학행으로 명망이 높은 협소재 효상이다. 공은 일찍이 신독재(愼獨齋) 김선생(金先生) 문하(門下)에 유학바 우암(尤庵) 동춘(同春) 兩先生이 애중(愛重)하여 호를 정일재(精一齋)라고 당호(堂號)를 지어 주었고 당호현판(堂號懸板)은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친필로 현재 종가(宗家)에서 보존중이다. 공은 재품(才品)이 초격(超格)하고 효우출천(孝友出天) 하였으며 숭유(崇儒) 박학(博學)하여 향유(鄕儒)들과 사계서원(沙溪書院)을 창건 향사 하였으며 가례규범(家禮規範)을 초(抄) 하였으니 가례요결(家禮要訣)과 제의(祭儀)가 곧 그것이다. 공의 배위 완산이씨(完山李氏)는 도사(都事) 사숙(士淑)의 따님으로 공과 합조(合兆)이고 아들 정우(廷羽)는 통덕랑으로 생부는 여해(如海)이다. 공의 학행을 참작 하여 통훈대부 상서원 부직장(通訓大夫 尙瑞院 副直長)에 제수(除授)하여 관직은 그뿐으로 오직 학문으로 일관하였다.묘: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신흥리, 공은 학행으로 명망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효행 또한 남달랐다. 공이 55세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 살이를 한후에도 일생을 육식을 금하고 오직 소싯으로 생을 마치니 후에 임금이 이소식을 듣고 정문을 내렸다.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동촌리 입구
月浦公 韓 日 休(월포공 한 일 휴) 공의 자는 경일(景日)이요 호는 월포(月浦)인데 부사 기(琦_의 아들이다. 선조(宣廟)25년에 진사(進士)로 칼을차고 의주에 이르러 임금의 기거를 살피었고 그 이듬해에 왜구가 물러가자 회덕(懷德)으로 돌아와 그 고을 사람들과 같이 학교를 수리 하고 풍속을 바로 잡았느데 그 고장 사람들이 산장으로 추대 하였다. 공이 광해 6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우암(尤庵) 송선생(宋先生)이 묘표(墓表)를 지었다.*충절록참조
韓 大 震(한 대 진) 공의자는 창경(昌卿)이다. 공은 형조좌랑(形曹佐郞) 성기(聖箕)의 아들이요 백탄(白灘) 여익(如益)의 손자로 현종(顯宗)13년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중후(重厚)하고 학식(學識)이 통달 하였다. 일찌기수암(淹貫)권선생(權先生)의 문하에서 수업(受業) 하면서 경서와 예서의 의문점을 많이 질문 하였다.유고가 있다는데 아직 살필길이 없다. 공이 경종(景宗) 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담곡(潭谷)송주상(宋周相)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공의 배위 해주오씨(海州吳氏)는 지평(持平) 두웅(斗雄)의 따님으로 공과 合兆의 유택(幽澤)이 고정(高亭) 선영(先塋) 축좌(丑坐)에 안장 되었고 아들은 장남이 후수(後洙)이요 次는 익진(翊震)에 系后한 後염,後落,後涑,後汶이다.
南塘 韓 元 震(남당 한 원 진) 실록 동영상 공의 자는 덕소(德昭)요 호는 남당(南塘)이다.공은 근수당(勤修堂) 유기(有箕)의 아들이요 청산 현감을 지낸 백탄(白灘)여익(如益)의 손자로 숙종 8년 9월13일에 태어났다. 임오년(壬戌年)에 황강(黃江)에 사는 권선생(權先生)을 찾아가 뵙자 권선생(權先生)이 시(詩)를 주었는데 그 시(詩)에 소년의 고재(高材)로 공자(孔子) 주자(朱子)배우니 그대처럼 경서(經書)에 해박한이 없다네 초야(草野)에 사는 나를 애써서 찾아오니 다행히도 만년에 외롭지 않네 그려 라고 하였다. 도백(道伯)과 어사(御史)가 번갈아 공의 학행(學行)을 조정에 추천 하였으므로 정유년(丁酉年)에 비로서 집의(執義)의 벼슬을 하였는데 항상 경연관(經筵館)을 겸직하였다.영조(英廟)28년2월8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문집(文集)19권 습유3권 기문록10권이 세상에 간행 되었다. 정조23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을 내렸고 순조(純祖)2년에 문순(文純)의 시호를 내렸다.문경공(文敬公) 병계 윤봉구(尹鳳九)가 공의 행장(行狀)을 지었고 산수헌(山水軒) 권진응(權震應)이 묘갈명을 지었다.* 철향록 참조
參議公 韓 啓 震(참의공 한 계 진) 공의자는 계명(季明)이요 호는 퇴수당(退修堂) 또는 묵수재(默修齋) 이니 생부는 근수당 유기(勤修堂 有箕)이고 종기(宗箕)에 계후한 현감 여익(如益)의 손자로 남당(南塘:元震)의 아우이다. 공이 경서(經書)와 예서(禮書)를 연구하고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여 정미(精微:자세한) 하고 온오(蘊奧:깊은뜻)을 많이 밝혀냈으므로 소년(少年)에 명성이크게 났는데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모두 학문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집안에 있을 겨를이 없었고 스승을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이름은 조정에 매여 있고 자취는 山林에 있었다. 벼슬은 호조참의였고 병계 윤공 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다. 공의 배우 여주이씨(驪州李氏)와 함평이씨(咸平李氏)인데 공과三合兆로 유택은 덕산 역촌(德山 驛村) 뒤 해좌(亥坐)이다. 公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였으니, 장남은 후락(後樂)이요 차남은 후득(後得),후익(後翼),이다.
進士公 韓 위(진사공 한 위)공의자는 여중(汝重)이니 승지공 정칙(正則)의 둘째 아들이요,집의공 적(適)의 손자로 인조 18년 12월29일에 태어났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학행(學行)이 뛰어났고 의리(義理)가 엄정(嚴正) 하였다. 김몽와(金夢窩) 김삼연(金三淵) 김농암 (金農巖)등 제공(諸公)과 친하였고 상소(上疎)하여 시류(時流)에 영합하는 무리들을 배척 하였으므로 사림(士林) 들이 존중 하였다. 공의 배위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현령(縣令) 연(煙)의 따님이고 아들은 進師公 의 兄인 서성군(西城君) 전의 셋째 아들 세기(世箕)가 계후(系後) 하였다.배위 전주이씨 묘는 공의 묘 상에 있다.
承旨公 韓 순(승지공 한 순) 공의자는 여관(汝寬)이니 사과공(司果) 이칙(彛則)의아들이요 (생부는정칙:生父正則)이요,집의공 적(適)의 손자로 효종 원년 2월12일에 태어났다. 진사공 위(瑋)의 아우로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공은 학식(學識)이 뛰어났고 행실(行實)이 두터웠는데 그의 중형(仲兄) 위(瑋)와 같이 학행이 있어 사적(事蹟)이 비슷하다. 공이 세상을 떠난뒤에 농암(農巖) 김공(金公)이 만장(挽章)을 짓기를 대중속에 그대를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네 라고 하였는데 선비들이 모두 존중 하였다. 공의 배위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선교랑 인행(宣敎郞 仁行)의 따님이다. 아들은 직제학 세장(直提學 世張)이다. 이, 묘역에는 옛부터 비석을 세우지 못하는 산혈(山穴)이라 하여 표석(表石)이 없다.
參奉公 韓 後 遂(참봉공 한 후 수) 공의 자는 중량(仲良)이요 호는 정수당(靜修堂)이니 태진(泰震)의 둘째 아들이요 근수당(勤修堂) 유기(有箕)의 손자로 숙종(肅宗) 27년에 태어났다. 병계(屛溪)의 문인(門人)인데 문장(文章)이 풍부 하고 학식(學識)이 고명(高明) 하였다. 정조(正廟) 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공의 문인 곽기제(郭旣濟)가 행장(行狀)을 짓고 영의정 홍석주(領議政 洪奭周)가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을 지었다. 공의 배위청주 곽씨(淸州 郭氏)로 묘는 공9公)과 같이 홍성군 서면 신리 신좌(洪城郡 西面 申里 辛坐)에 있고 유고(遺稿)가 있다고 전(專)한다. 아들은 성세(聖世) 이다.
韓 鳴 愈(한 명 유) 공의 자는 문팔(文八)이다. 사림(士林)들이 그의 학행(學行)을 추모(追慕) 하여 향사(햐鄕祠)에서 제사(祭祀)를 지내었다.
韓 思 愈(한 사 유) 공의 자는 중문(重文) 이다. 경엽(景燁)의 아들이자 봉곡(蓬谷) 기(琦)의 7세손(7世孫)이다.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의 문인(門人)이다. 학행(學行)으로 도백(道薦)의 추천(推薦)을 받았다.
韓 致 明(한 치 명) 공의자는 일승(日昇)인데 태장(泰章)의 셋째 아들이다. 경신년(庚申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문학(文學)으로 도백(道薦)의 추천(推薦)을 받았다.
提學公 韓 世 張(제학공 한 세 장)공이 자는 대경(大卿)이니 승지공 순의 아들이요 사과공(司果公) 이칙(彛則)의 손자로 숙종 12년에 태어 났다.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문학(文學)과 행실로 섬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영조 26년 12월26일 세상을 떠났다. 공의 배위(配位) 남양홍씨(南陽洪氏)는 공과 함께 侍墓洞 龍淵 直麓 酉坐에 합폄 하였고 계배(繼配) 안동권씨(安東權氏)는 文峰里 氷石洞 前麓 坐에 안장 되었다.가 서기1986년(병인) 청명절에 경기도 고양시 관산동 용연 상록(龍淵 相麓) 자좌(子坐)에 삼위 합폄으로 면봉 하였다. 공이 무육(武育) 하여 세기(世箕)의 셋째 아들 건(鍵)이 계후(系後) 하였다. 공의 묘역은 산혈(山穴)이 비석을 세우지 못하는 맥이라 전하여 오는 고(故)로 표석이 없다.
僉知公 韓 曄(첨지공 한 엽) 공의 아버지는 득인(得仁) 인데 문간공(文簡公) 상경(尙敬)의 9세손이다. 경전(經傳)을 탐색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서울에서 예산(禮山)엄하리(巖下里)로 물러나 은거(隱居) 하면서 후생(後生)을 가르치고 풍속(風俗)을 크게 변화시켜 마치 호중(湖中)에 풍속을 변화시킨 호안정(晧安定)과 같았다. 장수(長壽) 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의 수직(壽職) 벼슬을 하였다.
淸原君 韓 聖 輔(청원군 한 성 보) 광해 12년(1620)~숙종23년(1697) 22세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자는 여석(汝碩) 호는 이은정(理隱亭)이다. 청흥군 수원(淸興君 壽遠)의 아들로 청녕군 덕급(淸寧君 德及)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처사공 영원(處士公 榮元)의 따님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문인으로 학문은 물론이요 심성을 닦는데도 게을리지 않았다. 음보로 여러 관직을 거쳐 예안,공주, 남원, 진위, 대구, 성천,순흥,연안등 아홉 주군(州郡)과 가선대부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역임 하였다. 증조부인 청평부원군 응인(淸平府院君 應寅) 의 작위를 이어 받아 청원군(淸原君)에 습봉 되었고 경종때 아들의 현달로 정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공은 평소 부모 모심에 있어 화순(和順:고분고분하여 시키는데로 잘 쫓음)온유(溫柔: 마음이 따뜻하고 유순함) 하고 경애(敬愛): 공경하고사랑함) 와 지효(至孝: 지극한 효행) 로써 봉양(奉養: 부모를 받들어 모심) 하였고 현종 10년(1669)에 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여러 아우 들을 이끌고 4년간이나 여막에서 거쳐하면서 곡배(哭拜: 슬픔을 참을 수 없어 큰소리로 울며 산소에 성묘함) 하여 애훼골립(哀毁骨立: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여 몸이 바싹여윔) 할 정도로 효성을 다 하였다. 공은 우암(尤庵)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 성명과 이기의 관계를 설명한 유학)과 경사(經史: 성인이 지은책 즉 사서오경과 같은 유교의 성전과 역사책)에 통달 하여 학식(學識)이 고매(高邁) 뛰어나게 품위가 높음)하고 언언사사(言言事事: 모든말과 하는일)가 준정(峻正: 엄격하고 바름) 하였다. 숙종15년(1689) 우암이 모함으로 해를 입자 애석 통분(哀晳痛憤: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며 몹시 분개함)하며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9년간을 초야(草野:에서 묻혀 독서로 소일 하다)78세를 일기로 돌아가니 숙종예관을 파견하여 치제 하였다. 배위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전주리씨(全州李氏) 남원 양씨(南原 揚氏) 세분이었나 아들이 없어 조카인 청은군 배하(淸恩君 配夏)를 계후 입양 하였다. 부실에서는 진사(進士) 배로(配魯), 배우(配愚)가 있다. 공은 여러고을 수령을 엮임 하였는데 가는곳마다 선치수령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회덕 현감 재직시의 선정(善政)을 연원히 칭모(稱慕)하기 위하여 현종 11년(1670)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 큰 암석에 현감한공성보몰세불망(縣監韓公聖輔沒世不忘)이라 각자 하여 다소 훼손되었으나 3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보존(保存) 되어 있다.
韓 弘 祚(한 홍 조) 공의 자는 영숙(永叔)이요 호는 연재(捐齋) 또는 봉계(鳳溪) 라고도 한다. 공의 아버지는 윤원(允元)이요 할아버지는 엽(曄) 이다. 수암 권선생의(遂菴 權先生) 문하에서 배워 조예(造詣) 가 매우 높아 남당 원진(南塘:元震)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등 제현(諸賢)들과 선후(先後)를 다투웠는데 세상(世上)에서 팔현(八賢)이라고 일 컬었다.
進士公 韓 弘 濟(진사공 한 홍 제) 공의 자는 자명(子明)이요 호는 소포당(素圃堂)이다. 승지공 석휴(承旨公 碩休)의 아들이고,처사(處事) 유후(有後)의 손자로 참판공 계선(參判公 繼善)의 후인데 선계(生家)는 문정공(文靖公)으로 경전(經典)을 탐구(探究) 하여 깊은 뜻을 정통(精通) 하였고 천문(天文),지리(地理), 음양(陰陽),의약(醫藥), 병서(兵陣)에 이르기까지 큰뜻을 모두 통달 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 재명(才名)을 크게 떨치고 과거(科擧)에 일찍 합격하였는데 합격자의 명단을 발표 하기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증직(贈職)을 내렸다. 용인 이익(龍仁 李瀷)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다. 공의 배위 全州李氏는 진사 성형(進士 聖馨)의 따님인데 공과 합폄으로 풍양(豊壤) 선영하 건좌에 안장 되었다.
參判公 韓 聖 佑(참판공 한 성 우) 인조11년(1633)~숙종36년(1710) 22세 * 효행록참조
處士公 韓 處 定(처사공 한 처 정) 공의 자는 대재(大哉)요 호는 함광처사(咸光處士)이니 검교참판공 계윤(檢校參判公 繼胤)의 7대손으로 생부는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를 지낸 의립(義立)인데 함흥부 판관(咸興府 判官)하고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 증직 된 백부(白父) 의원(義元0에게 계후(系后) 하였고 조부(助父)는 충좌위 사과(忠佐衛 司果)를 지낸 인(認) 이다.공의 학행(學行)이 고매(高邁)하고 경륜(經論)이 뛰어났는데 그 사실이 존주휘편(尊周彙編)과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공의 배위는 全州 李氏로 현감 중엽(縣監 重曄)의 따님이다. 공의 유택은 홍성 신남면 궁대 해좌에 쌍조였으나 1974년 충북 청원군 부용면 등곡리 무소동 해좌에 면봉 합조하고 갈석을 놓았다.*좨주 임헌회가 찬한 묘표가 있다.
縣監公 韓 如 斗(현감공 한 여 두) 공의 자는 자중(子仲)이요 호는 독성옹(獨醒翁)이다. 참판공 필원(參判公 必遠)의 아들인데 생부(生父)는 승지 필후(必厚)이고 조부는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仲)이다. 공은 학문이 고명(高明) 하였는데 집에 문집(文集)이 소장 되어있다. 공의 높은 학덕을 일컬어 낙양 삼사(洛陽三士) 라고 칭송 하고 있다. 공이 광해 3년 12월22일에 나서 숙종 19년 1월28일 수 83에 세상을 버리니 관작은 교하 현감(縣監)이요 배위남양홍씨(南陽洪氏)는 참의 서익(參議 瑞翼)의 따님으로 묘는 신촌리 선영하 해좌(新村里 先塋 亥坐)에 공과 합조로 안장 되었고 영상 이의현(李宜顯)이 찬한 묘비가 있다. 아들은 현령을 지낸 백기(伯箕)와 가기(可箕)가 있다.
縣令公 韓 伯 箕(현령공 한 백 기) 공의자는 경오(卿五)요 호는 복천(復川)이니 인조 12년 현감 여두(如斗)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조12년 8월8일에 별세 했다. 대대로 학행이 있어 공 또한 우암(尤庵) 송선생의 문인(門人)이다. 학행(學行)이 탁월(卓越) 하였고 벼슬이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공의 배위는 (平山 申氏)인 도사 최(都事 最)의 따님과 순천김씨(順川金氏)인 완완의 따님인데 삼위가 각장(各葬)으로 공은 신촌 선영 건좌(新村 先塋 乾坐)에 평산신씨(平山 申氏)는 신촌 선영 해좌(新村 先塋 亥坐)에 그리고 순천김씨(順川金氏)는 신촌 선영 곤좌(新村 先塋 坤坐)에 안장 되었다. 아들은 첨지 중조(重朝)이다.
僉知公 韓 重 朝(첨지공 한 중 조) 공의자는 원규(元揆)요 호는 곡굉와(曲肱窩) 이니 현령 백기(縣令 伯箕)의 아들이요 현감 여두(如斗)의 손자이다. 공이 현종 원년 1월17일에 태어나 영조 14년 11월28일 수 79세로 별세 하였다. 공은 은거(隱居) 하며 후생(後生)을 가르쳐 인재(人才)를 성취(成就) 하였으므로 첨지(僉知)의 품계를 받았고 세상을 떠나자 공의효행(孝行)과 학문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의 증직을 내렸다. 배위 는 해평 윤씨(海平 尹氏)감찰 서(監察 서)의 따님으로 묘는 신촌선영(新村 先塋)에 공과 합조로 안장되었다, 아들은 봉사 명현(奉士 命玄)이다.
三隅黨 韓 敬 養(삼우당 한 경 양)공의자는 사함(士涵)이요 호는 삼우당(三過堂)이니 봉사 명현(奉事 命玄)의 아들이요 현령 중조(縣令 重朝)의 손자이다. 공은 도암(陶菴) 의 문인(門人) 인데 학식(學識)이 고명(高明) 하였다. 배위는 원주원씨로 도사 일계의 따님과 계배 平壤趙氏인데 原州 元氏가 楊州郡 下通面 九仙洞 酉坐에 合兆이고 平壤 趙氏는 楊根德皇谷 艮坐에 安葬 되었다. 아들은 현감 익상(縣監 翼商)이다.
橡村公 韓 永 箕(상촌공 한 영 기)공의자는 영숙(永叔)이요 호는 상촌(橡岡)이니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낸 여우(如愚)의 아들이요 참판공 필원(參判公 必遠)의 손자이다. 공은 학행(學行)이 뛰어나 세인(世人)의 추앙(推仰) 하였으니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가문의 후예이다. 배위 파평 윤씨는 진사 석의 따님으로 양위의 묘는 공주 석정 병좌에 합폄으로 안장 되었다. 아들은 정조(鼎朝) 익조(益朝), 제조(濟朝) 인데 제조(濟朝)는 숙부(叔父) 현기(顯旗)에게 入養 系后 하였다.
通德郞 韓 鍵(통덕랑 한 건) 공의 자는 중고(仲固)이니 生父인 세기(世箕)의 셋째아들로 제학공(提學公) 세장(世張)에게 입양 계후 (入養 系后)하여 승지공(承旨公) 순의 손자가 되었다. 공이 숙종 18년 11월14일에 태어나 영조 26년 4월1일 별세 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있는 가문에서 일찍이 경학(經學)과 예문(禮文)에 조예(造詣)가 깊어 세(世人)인이 추앙(推仰) 하였다. 공의 배위 安東 金氏는 사인 창기(士人 昌基)의 따님으로 묘는 高陽市 官山洞 龍淵中麓堂峴下에 공과 합폄으로 안장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묘역은 비석을 세울 수 없는 산혈(山穴)이라 하여 옛부터 묘비를 세우지 않고 있다. 아들은 문행(文行)으로 이름 높은 사복시 정(司僕寺 正) 명직(命稷)과명익(命益)이다.
寺正公 韓 命 稷(시정공 한 명 직) 공의자는 군필(君弼)이니 통덕랑(通德郞) 건(鍵)의 아들이요 제학공 세장(提學公 世張)의 손자로 경종 2년 12월 10일 태어나 정조 19년 12월2일 타계 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성망(聲望)이 있는 문중(門中)에서 또한 언행(言行)과 학식(學識)으로 세상(世上)의 존경(尊敬)을 받았다.공의배위 반남박씨(潘南朴氏)로 묘는 시정공(寺正公) 과 합조로 당초에는 고양시 관산동 용연중록(中麓) 유좌(酉坐)였으나 도시 광장으로 병인(丙寅:서기1986년) 청명절(淸明節)에 용연(龍淵) 상록(上麓) 자좌(子坐)에 면봉(緬奉) 하였다. 이곳 역시 산혈(山穴)이 碑石을 세울 수 없는곳이라 묘에는 표석이 없다. 아들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작된 광격(光激), 광숙(光淑)이다.
韓 遠 箕(한 원 기) 공의자는 자현(子玄)이요 호는 남애(南涯)이니 회헌공(晦軒公) 여해(如海)의 셋째아들이요 승지공 필후의 손자이다. 학덕으로 저세한 문중에 태어나 조용히 은거(殷居) 하여 학문을 강론 하고 사언원류(四言源流)를 저술 하였다. 공의 배위 온양정씨(溫陽鄭氏)는 현감 정양(縣監 正陽)의 따님으로 묘는 진잠 상남면 유천수 내리 임좌(鎭岑 上南面 柳川水 內里 壬坐)에 공과 합폄이다. 아들은 효행으로 이름있는 홍조(弘朝)와 정기(挺箕)에 계후(系后)한 인조(寅朝) 학행(學行)이 있는 우조(宇朝)이다.
韓 持 維(한 지 유) 공의자는 지국(穉國)이니 명직(命直)의 아들이요 학행(學行)이 높은 우조(宇朝)의 손자이다. 영조 45년에 태어나 현종 4년 8월21일에 별세 하였다. 공은 학문(學文)으로 고명(高名)한 집안출신으로 학식(學識)이 고명(高明) 하였는데 문집(文集)이 소장(所藏) 되었다. 공의배위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진사 흡(進士 翕)의 따님으로 묘는 금가면 사랑동 자좌(金加面 沙浪洞 子坐)에 그리고 공은 진안 칠남면 수내리 계좌(鎭岑 七南面 水內里 癸坐)에 안장(安葬) 되었다. 아들 근신(近新)은 백부(伯父) 중유(重維) 계후(系后) 라였고 차는 매신(邁新)니 계사(系嗣)하였으며 삼남 우신(遇新)은 방유(邦維)에게 계후(系后) 하였다.
持平公 韓 命 常(지평공 한 명 상) 공의 자는 군오(君五)이니 인조(寅朝)의 아들이요 현령 정기(縣令 挺箕)의 손자이다. 공은 학식(學識)이 정통(精通) 하였는데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우재 김두묵과(過齋 金斗默)과 교유(交遊)가 두터웠다. 공이 숙종 43년 3월1일에 태어나 정조 20년 6월25일에 별세 하였는데 일찍이 장릉참봉(長陵參奉)을 제수(除授) 하였으나 불사(不仕) 하고 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증직 되었다. 배위는 (全州李氏)와 단양우씨(丹陽禹氏)로 공과 각분(各墳)이다. 아들은 덕유(德維)이다.
通德郞 韓 廷 羽(통덕랑 한 정 우) 공의 휘는 정우(廷羽)요 자는 중범(仲範)이니 학행(學行)으로 이름난 정일재(精一齋) 여기(如琦)의 아들이요 의금부도사 필진(義禁府都事 必震)의 손자이다. 약관(弱冠)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硏究)하였다. 재품(才品)이 뛰어나 공과 더블어 수학(修學) 하는자는 모두 당대(當代)의 명사(名士)였다. 또한 효심이 뛰어나 주위의 칭송이 자자(藉藉)하여 향리에서 사표로 추앙을 받았다. 유고가 많았으나 수차 병란으로 소실되고 전해 오느 것이 없으니 한스럽다. 공의 배위 순응안씨(順應安氏)는 첨지중추 현도(僉知中樞 顯道)의 따님으로 묘는 공과 합조이고 아들은 지평(志平),성시(聖時),성조(聖朝)이다.묘: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양변리
韓 采 世(한 채 세) 공의자는 유양(有亮)이요 호는 죽포(竹圃)이니 후염(後濂)의 아들이요 통덕랑(通德郞) 익진(翊震)의 손자로 학행(學行)이 많은 문중에서 수학 하여 문학이 있어 추천 되었다. 배위 연안 이씨(延安 李氏)는 통덕랑(通德郞) 조익(朝翊)의 따님이다. 묘는 공과같이 응암중봉 신좌(鷹岩中峰 辛坐)이고 신제 이탁중(新齊 李度中)이 찬(撰)하여 행장(行將)이 있다. 아들은 경악(慶岳),경해(慶海), 경우(慶雨)이다.
直長公 韓 如 琦(직장공 한 여 기) 공의자는 백규(白圭)요 호는 정일재(精一齎)이니 인조 8년 3월20일에 태어나 숙종 35년 7월25일에 별세 했는데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필진(必震)이요 할아버지는 협소재 효상 (孝詳)이니, 선조의 음덕(蔭德)으로 직장(直長)의 벼슬을 하였다. 신독재(愼齎門)의 문하(門河)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문학과 행실로 세상에 저명하였다. 공에게는 동춘(動春) 송선생(송준길)이 쓴 정일재(精一齎)란 편액(扁額)이 전해오고 있다. 공의 배위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 도사(都事) 사숙(士淑)의 따님으로 묘는 안성군 서운동 신릉리 고현 임좌(安城君 瑞雲洞 新綾里 孤峴 壬坐)에 직장공(直長公)과 합폄으로 되어있고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찬(撰)한 묘비(墓碑)가 있다.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정우(廷 羽) 정익(廷翊)이다.
忠義衛公 韓 就 業(충의위공 한 취 업) 공의자는 취지(就之)이니 충의위(忠義衛) 원(瑗0의 아들이요 봉사(奉士) 기수(起壽)의, 손자이다. 공이 일찍이 사계 김장생 (沙溪 金長生)문하(門河)에서 유학(遊學) 하였는데 물욕(物慾)이 없고 차분 하였으며 행의(行宜)가 있었다. 공은 충의위(忠義衛) 로 있으면서 학문에 전념 하여 관직에는 큰뜻을 두지 않았다고 전한다. 공의 배위 진주 강씨(晋州 姜氏)는 부사용 집(副司勇 집)의 따님으로 묘는 공과 합조로 연산 서십리 반송 임좌(連山 西十里 盤松 壬坐)에 묘표(墓表)가 있다. 아들은 필훈 (必勳), 필범 (必範),필헌(必憲)이다.
韓 采 翼(한 채 익) 공의 자는 이원(而遠)이니 일위(一衛)의 아들이요 기(碁)의 손자로 호조참판공 계선(戶曹參判公:繼先)의 후손이다. 동춘(同春) 송준길(宋俊吉)의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였는데 행의(行義)가 있었다. 공의배위 월성 이씨(月城李氏)는 첨지(僉知)필방(弼邦)의따님이고 아들은 몽정(夢晶)이다. 공의묘는 청운동 신좌(靑雲洞 辛坐)요 배위는 유좌이다.
淸原君 韓 載 華(청원군 한 채 화) 공의자는 중숙(重叔)성숙(聖叔)이니 좌승지(承承旨)에 증직된 기(碁)의 아들이요 직장공 사립의 손자이다. 공은 효성과우애를 천성으로타고 났으며 학행(學行)이 고매(高邁)하였다. 공은 별세후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해 졌다. 배위 완산이씨(完山李氏)는 공과 합폄으로 양주군 장흥선영(楊州郡 長興先塋)에 유택(幽宅)이 있고 아들은 관(瓘),수(璲),규(珪),근(瑾),형(珩)이다.
旗隱公 韓 應 龍(기은공 한 응 용) 공의자는 운용(雲龍),운서(雲瑞)요 호는 기은(箕隱)이니 진사 상백(相伯)의 아들이요 도사 안국(安國)의 손자이다. 공은 천성(天性)이 고결(高潔) 하였다. 광주 기산(廣州 箕山)밑에서 은거(隱於)하여 날마다. 벗들과 같이 성리(性理)를 토론하였는데 하루내내 굳건한 기상이 있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공이 사는 마을을 건건리(乾乾里)라고 이름 하여 불렀다. 공의배위 순흥 안씨(順興 安氏)로 우윤 경(右尹 璟)의 따님이다. 공은 중종 33년에 태어나 학행으로 성망을 남기고 선조14년 9월14일에 세상을 떠나는데 묘는 화성군 반월면 건건리 산 54번지 해좌(華城君 半月面 乾乾里 山 54번지 亥坐)에 배위와 쌍조(雙兆)이다. 아들은 선전관을 지내고 장악원 정(掌樂院 正)에 증직된 예현(禮賢)이다.
韓 相 啓(한 상 계) 공의 자는 옥경(沃卿)이요 호는 동호산인(東湖散이人)다. 영발(英發)의 아들이요 수의부위(修義副尉) 규원(規元)의 손자로 후천 황종해(黃宗海)를 스승으로 섬기었으며 마음을 쏟아 학문에 힘썻는데 공이남긴 문집이 일편(一篇)을 남겼다. 공의배위 예안이씨(禮安李氏)로 묘는 보은군 동면 송곡 경좌(報恩郡 東面 松谷 庚坐)이고 공은 목천면 서가고개 묘좌(木川面 西加古介 卯坐)이다.
韓 百 休(한 백 휴) 공의 자는 언보(彦甫)요 호는 낙삼와(樂三窩)이니 아버지는 홍경(弘慶)이요 할아버지는 학행(學行)으로 이름이난 상계(相啓)이다. 성호(星湖) 이익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성리학(性理學)에 정력(精力)을 쏟았다. 그 고장 사람들이 추천하기를 서천(西川)의 화려(華閥)한 가문이요 큰언덕에 우뚝선 나무이다 라고 일컬었다 공은 저서 2권을 남겼다. 공의 배위 기계유씨(杞溪柳氏)요 아들은 명창(命昌)인데 보록(譜錄)에는 묘가 불전(不傳)이다.
韓 相 翊(한 상 익) 공의자는 익지(翊之)이니 광해1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효행이 뛰어난 준발(駿發)이요 할아버지는 부위(副尉) 규원(規遠)이다. 공의 학문(學文)이 높았으므로 공이 남긴 유고(遺稿)의 발문을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썻다. 공의 배위 진주강씨(晋州姜氏)로 교관 원록(敎官 元錄)의 따님이고 아들은 문학(文學)으로 이름있는 귀생(貴生)이다. 공은 양위(兩位)의 묘는 각각 계양 문경 자좌(桂陽 文景 子坐)로 되어있다.
設書公 韓 命 與(설서공 한 명 여)공의 자는 치수(致수)요 호는 천관재(天觀齋)이니 진사 종조(宗朝)의 아들이요 선훈(先訓)에 따라 벼슬하지 않은 재기(載箕)의 손자이다. 공은 학식(學識)과 행의(行誼)로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동궁에 들어기 경서와사서를 강론하였는데 깊은 뜻을 파헤쳐 설명하고 좋은 일을 개진하여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는등 보필을 많이 하였다. 공의 배위 덕수이씨로 묘는 공과 합폄으로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무선동에 있다. 아들은 건유 후유이다.
進士公 韓 健 維(진사공 한 건 유) 공의자는 도이(道而) 이니 설서(設書) 명유(命輿)의 아들이요 진사 종조(宗朝)의 손자로 영조 16년 3월 20일에 태어나 정조 19년 5일에 별세 하였다. 공의 아우인 후유(厚維)와같이 효성과 학문이 뛰어났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소(疏)를 올려 포상(褒賞) 할 것을 요청 하였다. 배위는 순흥 안씨(順興 安氏)요 종제(宗濟)의 따님이고 아들은 상신(商新),주신(周新),노신(魯新), 희신(羲新),택신(澤新)이다. 양위 묘는 여주 흥천 계신선영하 합조(驪州 興川 桂信 先塋下 合兆)이다.
校理公 韓 商 新(교리공 한 상 신)공의 자는 덕여(德汝)이니 진사 건유(健維)의 아들이고 설서공(設書公) 명여(命輿)의 손자로 영조35년10월 2일에 태어나 생원을 거쳐 문과에 급제 하여 교리를 지내고 정조18년 3월13일 36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그 당시 여론이 매우 애석해 하였다. 공은 경전(經傳)을 연구(硏究)하고 성리(性理)를 탐색하여 명망이 성대 하였다. 사교를 성토하는 것과 정도를 보호하는 것과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과 사물을 논하는 것이 모두 학문속에서 나옴을 터득 하였다.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승지 우진(承旨 羽晋)의 따님으로 아들은 응기(應琦)이니 생부는 주신(周新)이다. 공양위(兩位)의 묘는 여주 흥천면 신근리 계좌(驪州 興川面 莘根里 癸坐)에 合兆이다.
參奉公 韓 瑋(참봉공 한 위) 공의 자는 가헌(可獻)이니 광세(光世)의 아들이요 통정 극침(通政 克침)의 손자이니 공은 학행(學行)이 뛰어나 세인(世人)의 칭송을 받았는데 광해(光海)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하여 상소(上疏) 하자 극구 간(諫)하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流配) 되었다. 공은 참봉으로 벼슬을 더 하지 않고 87세의 수를 누렸다. 배위는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창녕성씨(昌寧成氏)인데 초배(初配李氏) 있는 공과 합폄으로 남촌 신리동 묘좌(南村 新里洞 卯坐)에 그리고 성씨(成氏)는 선영 좌편(先塋 左便)에 묘좌(卯坐)로 유택(幽宅)이 있고 아들은 필중(必中), 필영(必榮)이다.
校尉公 韓 寧 瑞(교위공 한 영 서) 공의호(號)는 침해헌 (枕海軒)인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을 지낸 준(浚)의 손자로 중종 29년 8월29일에 태어나 벼슬은 여절교위(勵節校尉)를 지내고 선조 36년 69세로 별세 하였다. 공은 선조(先祖)의 음덕(蔭德)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학행(學行)이 뛰어났고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과 도의(道義)의 벗이되어 명망이 높았다. 배위 여산 송씨(礪山 松氏)로 묘는 공과 합조(合兆)로 서산군 태안면 평리 자좌(瑞山君 泰安面 平里 子坐에) 있으며 아들은 예빈시주부 (禮賓寺主簿)기장(起章)이다.
主簿公 韓 起 章(주부공 한 기 장) 공의 호는 만은(晩隱) 이니 침해헌 (枕海軒)영서(寧瑞)의 아들이요 통정(通政) 준(浚)의 손자이다. 공은 광해 15년2월18일에 태어나 예빈시주부 (禮賓寺主簿) 하고 숙종 38년 7월 28일 별세 했다. 공의 학행(學行)은 세인이 우러렀고 행실(行實)은 독실(篤實) 하였다. 삼백당(三栢堂)이상승(李常承) 이 지은 공의 행장(行狀)에 조류(鳥類)중에 난새와 봉황(鳳凰) 같고 초목중(草木中)에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같아 날지 않아도 드러나고 태우지 않아도 향기가 풍긴다고 하였다. 공의 배위는 의성김씨(義城金氏)와 계배 문화 유씨(文化 柳氏)인데 김씨는 공과 합조로 남산리에 안장되고 유씨의 묘는 남산리 비석포 오좌(南山里 碑石浦 午坐)에 있으며 아들은 인우(仁佑),(인좌)仁佐,(인보)仁保,(인검)仁儉,(인급)仁伋,(인필)仁弼,이다. *공의후손이 서기1989(기사)에 청문사(淸門祠)를 짓고 향사(享祀) 하고 있다.
承旨公 韓 訓(승지공 한 훈) 公의자(字)는 사고(師古) 요 號는 죽총(竹
)이다. 참의공 전(
) 의 손자이다.공이 세조(世祖) 5년에 태어나 성종(成宗) 갑인년(甲寅年)에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수찬(修撰) 정언(正彦)을 거쳤다. 공이 정원(政院)에 참여(參與) 하여 왕(王)의 은총(恩寵)이 한창 융성할 무렵에 성종(成宗)이 승하(昇遐) 하였다. 연산조(燕山朝)때 공이 권력(權力)을 쥔 간신(奸臣)을 탄핵(彈核) 하였는데 사람들이 "조정(組廷)에 한모(韓某) 한사람 만 있다"고 말하였다. 무오(戊午士禍)년에 여러 현인(賢人)들이 피화(被禍)하였는데 公도 화(禍)를 입었다. 그뒤에 도승지(都承旨)의 증직(贈職)을 내렸다.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벽제면) 내유동*국역왕조실록1. 2. *지석1. 2. 3. *해설 *시와서책의내용
韓 壽 琦(한 수 기) 공의 자는 여규(汝圭)이다. 죽정 협(竹亭 協)의 아들이요 참판 붕(參判 鵬)의 손자이며. 참의공(參議公
) 의 七代損 이다. 공은 학문(學文)이 독실하고 행실(行實)이 가지런 하였으며 특히 부(賦)와 책(策)을 잘 써서 그 당시에 저명(著名) 하였다.(옛날에 공의 아들두제(斗濟)를 기록에 넣었는데 후손(後孫)들이 반대 하였기 때문에 개정 하였다.
獻納公 韓 范 齊(헌납공 한 범 제) 공의 자는 일지(一之)로 치량(致良)의 아들이고, 헌납(獻納)의 벼슬을 하였는데 일찍부터 학문(學問)에 종사 하였다. 기사사화(己巳士禍) 가 일어나자 사천(泗川)으로 귀양 갔다가 갑술년(甲戌年)에 풀려 났다.
韓 宅 揆(한 택 규) 공의 자는 계안(季安)으로 부제(富齊)의 아들이다. 신축년(辛丑年)에 의직(衣直)으로서 상소(上疏)하여 몽와(夢窩)등 제공(諸公)의 억울함을 변론 하였으므로 한쪽 사람들이 앙심을 품어 임인(壬寅)에 윤대영(尹大榮)의 탄핵을 입었다.
韓 鼎 揆(한 정 규) 공의자는 수보(受甫)이니 두제(斗齊)의 아들이요, 참의공(參議公
) 의 九代損 이고,죽정 협(竹亭 協)의 증손(曾孫)이다. 공이 일찌기 진사(進士)에 장원(壯元) 하고 문학(文學)과 언행(言行)으로 선비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韓 有 모(한 유 모)공의 자는 덕양(德陽) 이니 효신(孝新)의 아들이고 참판 붕(參判 鵬)의 9세손(九世孫)이다. 성리(性理)를 연구 하고 체험(體驗)하면서 행실(行實)을 독실(篤實)히 하였다.
韓 廷 老(한 정 로) 공의 지는 기경(耆卿)이니 교위(校位) 여회(校位) 의 아들이요 교위(校位) 필항(必恒)의 손자로 도암(陶菴)의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 하였는데 행실(行實)을 갈고 닦았으며 도암(陶菴)과 학문(學問)에 묵계(默契)가 있었다. 공의 배위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최씨(崔氏)인데 묘는 공과 삼합조(三合兆)로 천안군 북면 계란리(天安郡 北面 佳란里) 깊은골에 임좌(壬坐)이다. 아들은 진조(振朝),사조(師朝),임조(任朝)이다.
韓 師 朝(한 사 조) 공의 자는 화백(和伯)이니 학행(學行)으로 이름난 정로(廷老)의 아들이요 교위(校位) 여회(校位) 의 손자이다. 공이 숙종 19년에 태어나 김후(金厚)의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 하였는데 학문으(學文)로 추천되어 참보(參奉)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몽와(夢窩)가 귀양갈 때 교외(郊外)로 나가 전송 하다가 옥천(沃川)으로 귀양갔다, 공의 행장(行狀)은 박준흠(朴俊欽)이 지었다. 공의 배위 전주 이씨(全州 李氏), 경주김씨,순천안씨, 삼위이고 아들은 명두(命斗) 이다.
副正公 韓 景 琦(부정공 한 경 기)실록 성종(1472)~중종24년(1529) 16세 공의자는 치규(稚圭) 호는 향설당(香雪堂)이다. 양호공 보(襄胡公 堡)의 아들이며 상당 부원군 명회(上黨 府院君 明會)의 손자이다. 공은 성종(成宗) 3년(1472)에 태어났다. 동왕20년(1489)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하였으나 벼슬에 뜻이없어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았다. 조고(祖考) 상당 부원군의 훈음(勳蔭)으로 돈녕부 봉사(敦寧府 奉事)에 등용되어 장악원 주부(掌樂院 主簿),군자사옹(軍資司饔),충훈부 도사(忠勳府 都事))등을 지내고 돈녕부 정(敦寧副 正)이 되었다. 공은 요직을 회피하고 절의로 이름 높은 남효온(南孝溫),홍유손(洪裕孫)등과 어울려 시를 읊었으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사람 이다. 시명(試名)이 높았으니 저서(著書)로 향설당 시집(香雪堂試集)등은 유명하다. 중종24년(1529) 6월18일에 졸하니 58세였다. 배위 숙인이씨(淑人李氏)는 계림군 이(鷄林君 이) 의따님이고 숙인 언양김씨(淑人 彦陽金氏)는 부사공 극장 의따님이며 아들은 증참판 협이다. 공을 안장 할 때 광중(壙中)에 묻을 지문(誌文)을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찬하여 중종26년(1531)여름에 비를 세웠다. 공은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와 합조(合兆)로 상조(上兆)이고 계배 언양김씨는 하조(下兆)로 모두 증조비묘하(曾祖비墓下)에 있다.
遯菴公 韓 承 利(돈암공 한 승 리) 1477~1536 공의 자는 수지(遂之)요 돈암이니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낸 사무(士武)의 아들이요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손자이다.문한청백(文翰.淸白)으로 성망(聲望)이 높은 가문(家門)에 태어나 음사(蔭仕) 하여 충좌위 부사직(忠佐衛 副司直)에 올랐으나 연산(燕山)의 난정(亂政)을 피하여 은둔자적(隱遁自適)함이 처세(處世)에 마땅 함이라 판단(判斷) 하여 진양땅 정수(晋陽丁樹)에 터를 잡으니 곧 한촌(韓村)을 이룬 시초이다. 진양지(晋陽誌)에 돈암공은 고결(高潔)한 기품(氣稟)을 지닌 지조(志操)가 굳은 인물(人物)로 소개되고 있듯이 공은환정(宦情:벼슬할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學問)을 연마(鍊磨)하고 시경(詩經)을 두루 익혀 후진(後進) 계발(啓發)에 전념(專念)하여 학행(學行)으로 명망(明望)이 사위(四圍)에 높았다. 당대의 석학 정여창(鄭汝昌),조식(曺植) 선생과 교유(交遊) 하였으니 이로부터 후손중에는 명유 박학(名儒 博學)이 배출(輩出) 되었다. 공이 중종 32년10월28일에 별세 하니 수(壽)가 60이다.배위 수양오씨(首陽吳氏)는 공묘동원(公墓同原)에 쌍조(雙兆)이고 시향은 음 10월10일 이다.공이 낙남은둔(落南隱遁) 하여 비록 청한처사(淸寒處士)이나 고절(高節)한 기개(氣慨)와 학행(學行)이 제세(濟世) 안민(安民)의 표상(表像)으로 추앙(推仰)을 받으니 가(可)히 문한(文翰)의 후예롤 손색(遜色)이 없었다. 공이 처음 낙향(落鄕) 하여 이 재실터에 살았다 하여 재호(齋號)를 천산재(天山齋)라 하였고 후손들과 이 고을 선비들이 뜻을 모아 건립 하였으며 매년 3월15일에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고 후생(後生) 교화(敎化)를 위한 강례(講禮)를 베푼다.묘:경남진양군이반성면 평촌리 정수.
한 여 철(韓 汝 哲)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명(仲明). 사직 승리(承利)의 아들이다.품행이 매우 방정하고 효도가 극진하였다.1543년(중종 38) 생원이 되고, 1548년(명종 3) 부묘별시문과(부묘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그뒤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진주·곤양 등의 세 고을을 다스린 바 있는데, 모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1553년 무렵에 공조좌랑을 지낸 바 있으며, 이어 헌납 등을 거쳐 성균관사예에까지 이르렀다.
府使公 韓 琦(부사공 한 기)연산군10년(1504)~선조2년(1569) 20세 공의 자는 중온(仲溫)이고 호는 봉곡(蓬谷)이다. 장사랑 영년(將仕郞 永年)의 아들이고 사맹 태(司猛 泰)의 손자이며 이랑공 서봉(吏郞公 瑞鳳)의 7대손이다. 연산10년(1504)생이며 처음 청주 웅동(淸州 雄洞)에 거주하다 중년에 회덕(懷德)으로 이거 하였다. 중종 23년(1528) 진사 하고 동왕 35년(1540) 문과등제 하여 벼슬이 남상삼척부사(南床三陟府使)에 이르렀는데 처음 간신 윤원형(奸臣 尹元衡)과 동년 급제(同年 及第) 하였더니 윤원형이 자기의 편당을 하고자 하여 누차 간곡한 청을 하되 공이 거절로 불청(不聽) 하였더니 풍기군수(豊基郡守)때에도 또 무례한 시장(詩狀)을 보내는등 그외 권간(權奸)들의 모함이 심함에 조내(朝內)에 유(留)치 못하고 외임(外任)으로역행(歷行)하니 예산,진산,풍기,천언,삼척의 오군(五郡)을 다스려 도처(到處)마다 송덕가(頌德歌)가 들렸다. 구후 통훈대부 삼척도호부사 겸 강릉진관동첨절제사우영장(三陟都護府使 兼 江陵鎭管同僉節制使右營將)을 지냈다.계자서,여융잠,학자심지백일,구세동거부등의 서를 전작 하였다.퇴계 선생과 금계 황선생과 더불어 왕래한 서찰과시율이 많컨만 화재로 유실되고 약간의 귀서만 남았다.선조2년(1569)7월20일에 졸하니 향년66이었다. 아들은 진사 일제,별좌 일휴,참봉 일신,일흥,참봉일창이다. 공의배위 숙인 남양양씨는 찰방 홍의 따님으로 무기곡 남산하에 공과 쌍조이다. 공이 졸후 360년이 지난 1934년에 증손 사영이 글을 지어 비를 세웠다.묘:충청북도 청주시 수곡동 무기곡남산 13-1 세향일:(음)10월10일.
湖隱公 韓 三 傑(호은공 한 삼 걸) 연산11년(1505)~선조2년(1569) 공의자는 덕우(德祐) 호는 호은(湖隱)이다. 부사공 순명의 아들이고 판윤공 질의 손자이며 절제공 중손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화순홍씨로 진사 진석의 따님이다. 공은 연산11년(1505)생으로 중종20년(1525)에 성균진사하고 다음에 행숭인전참봉(行崇仁殿參奉)이다. 학문(學問)이 심오(深奧)하고 인품이 돈아하며 예악,천문,지리,역수,에 정박하고 훈가편(訓家篇)을 지었다. 선조2년(1569) 65세로 졸하였다. 방명(芳命)이 흥성사마안(興盛司馬案)에 등제(登載) 되고 흥덕향교(興德鄕校)에 배향(配享) 되었다. 배위 영인 남원 양씨는 참봉 인숙의 따님이며 아들은 부사 흡(府使 洽),유(濡),부사 준(府使 俊)이다. 공과 배위 영인 남원 양씨의 합조묘인데 이탄수 찬(李灘수 撰)의 단갈(短碣) 이 있다. 묘:전라북도 고성군 부안면 가산리 원덕산
通德廊 韓 汝 愈(통덕랑 한 여 유) 인조20년(1642)~숙종35년(1709) 20세 공은 숙종때의 문신이다. 자는 상보(尙甫)요 호는 둔옹(遁翁)이다. 절제도위 탁(節制都尉 擢)의 둘째 아들이고 현감 수성(縣監 守性)의 손자이며 이양공 명진(夷襄公 明진)의 6대 손이다. 공은 인조 20년 (1642)생으로 천성이 학업을 좋아 하였다. 벼슬 나가기를 싫어 하여 통덕랑에서 그치고 유학에 힘쓰다. 숙종 35년(1709) 68세로 졸하였다. 공의 효행이 극진하여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 실렸다. 경주석덕거유로서 선후천도설,건곤변삽십육궁해설,오앙로제설,조화논설,중용혹문설,문학결구장론설,주례직방씨의 등의 저서는 유명하다. 졸후 경상감사인 민응수(閔應洙)가 영조시대(英祖時代)에와서 경주고사인(慶州故士人)으로 보고되니 나라에서 지평(持平)벼슬을 내렸다. 배위 수원백씨(水原白氏)는 도사공 예신(都事公 乂申)의 따님이고 아들은 송(松)과,백(柏)이다. 묘는 부전이다.
淸平君 韓 堰(청평군 한 언)세종30년(1448)~성종23년(1492) 15세 공은 성종때의 문신이다. 자는 옥경(沃卿)이다. 이양공 명진(夷襄公 明진)의아들이고 감찰공 기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고녕현부인(古寧縣夫人)으로 시 문경 제(諡 文景 제)의 따님이다. 공은 세종30년(1448)음보로 등용되어 예종1년(1469)부사과로 진사시에 장원하고 성종 5년(1474)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사성이되고 1475년 형조참의 겸 부총관이 되었다. 1477년 천추사(天秋使)의 통사(通事) 조숭손(趙崇孫)에 관련되어 사직 되었다가1479년 행호군(行護軍)으로 복직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청평군(淸平君)으로 습봉(襲封)되고 1480년 이조참의,공조참의를 거쳐 판결사,장흥부사가 되었다.1485년 대사간 1486년 호조참의1487년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지내고 이어 도승지겸예문관직제학 대사헌,상서원정,병조참자,형조참판,이조참판,을 지내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다. 성종23년(1492)에 명황제가 태자를 책봉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반포하니 조정에서는 사은사와 황태자의 교육시킬 사람을 보내게 되니 학식이 많은 공을 6월3일 보내게 됬다. 그러나 공이 임무를 수행 하다 회동관(會同館)에서 그해 10월10일 졸하니 황제가 예부랑중(禮部郞中)인 임전(林전)을 보내에 치장케 하니 성종조도 조제(弔祭)를 의식에 따라 하였다.배위 정부인 밀양 박씨(配位 貞夫人 密陽朴氏)는 봉례랑 인경(奉禮郞 仁敬)의 따님 이고 아들은 첨정 홍윤(僉正 弘潤),현감 홍택(縣監 弘澤),선전관 홍주(宣傳官 弘澍),어모장군 홍연(禦侮將軍 弘演)이다.공은 성종23년(1492)10월10일 명나라 서울의 회동관에서 졸하였다. 수행 했던 큰아들 홍윤(弘潤)이 구(柩)를 안고 돌아오는데 황제는 예부낭중의 명지관 임전과 관리를 딸려보내11월에 이곳 계좌정향의 언덕에 치장케 하였다.임전이 황제에게 복명하기를"소가누워서 젖 먹이는 형상 으로 9대가 재상이 나올곳에 묘를 썻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그집안에 화(禍)와환(患)이 생길 것이니 예방하고 오라"고 하였다. 임전이 다시와서 산맥팔수룡(山脈八首龍:한묘산韓墓山)에 무쇠를 끊여 붓고 큰 돌로 괸돌고개를 만들어 사람을 통하게 하고 산혈(山穴)을 끊는등 예방을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신도비,문관석등 석물을 많이 보내왔다. 배위 정부인 밀양박씨(配位 貞夫人 密陽朴氏)와 쌍조(雙兆)이며 이 지역은 공에게 내린 사패지 이다. 묘표음기(墓表陰記)는 성종24년(1493)2월 제학 권 건 찬(提學 權 建 撰)이다.공의 신도비는 대리석류롤 명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부천시 향토유적이다. 묘비는 공의8대손 금천군수 숙이 약290년전에 세웠다.묘: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계수동 산 15 세향일 (10월5일음력)
承旨公 韓 輹(승지공 한 복) 중종5년(1510)~선조22년(1589) 17세 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자는 중진(仲進)이며,증시정공 계상(贈寺正公 繼常)의 둘째아들이고 부사공 희(府使公 曦)의 손자이며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증손(曾孫)이다. 어머니는 숙인 안동 김씨(淑人 安東 金氏)로 부사 성동(府使 誠童)의 따님이다. 공은 중종 5년(1510)생이다. 중종 35년(1540)생원,진사되고명종10년(1555)찰방(察訪)으로서 문과갑과(文科甲科)에 장원(壯元)하고 대구부사(大邱府使),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통훈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通熏大夫 承政院 右副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贊官)을 역임(歷任)하였다,선조때 명나라 천사(天使)가 내조(來朝)하여 아조(我朝)의명류학자(名流學者)를 찾으니 공과 율곡이이(栗谷 李珥),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을 응선(應選)한일이 있고 선조22년(1589)봉사(奉使)로서 명나라에다녀왔다.이해 8월16일 80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 숙부인 경주김씨 (淑夫人 慶州金氏)는 현령 귀손(縣令 龜孫)의 따님이며 아들은 첨정 응문(僉正 應文),현감 응인(縣監 應仁)이다.공의 유물(遺物)이 많은데 문과 갑과 장원교지(文科 甲科 壯元敎旨) ,문과 장원급제(文科 壯元及第) 후 금의환향(錦衣還鄕)하니 동구(洞口)에 솟대를세움에 지금도 솟대거리라 부르며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선정(善政)하니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으며 공 몰후(公 歿後)에 장만한 제기(祭器)가 지금도 있다. 공과배위(配位)는 어은리 현부인 묘하(漁隱里 顯夫人 墓下)에 쌍조(雙兆)이며 전의 이도형(全義 李道衡)이 묘명(墓銘)을 찬(撰)하였다.묘: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 세향일:음)10월11일.
靑蓮公 韓 智 源(청련공 한 지 원) 중종9년(1514)~명종15년(1560) 17세 공은 조선중기(中期)의 문신이다. 자는 사달(士達)이며 호는 청련(靑蓮)이다. 도정공 석(都政公 碩)의 아들이고 삼등공 사신(三登公 士信)의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증손자(曾孫子)이다. 어머니 정부인 파평 윤씨 (貞夫人 坡平 尹氏)로 증 이판공 지준(贈 吏判公 之俊)의 따님이다. 공은 중종 9년(1514) 11월30일생이다. 중종32년(1537)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39년(1544) 별시문과병과로 급제하고 검열(檢閱)정자(正子) 수찬(修撰)등을 지냈다. 명종3년(1548)이조좌랑(吏曹佐郞)이되고 교리(校理)겸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기주관(記注官),지제고(知制誥)가 되어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 하였으며 그뒤 지평(持平),교리(校理),헌납(獻納)등을 지냈다. 명종8년(1553년)에 호당(湖堂)에 뽑혀사가독서(賜家讀書)하였고 이때에 지은 조정암(趙靜庵) 선생의 신원상소(伸寃上疏)는 관학제유(館學諸儒)의 찬탄(讚嘆)하는 바 되어 사림(士林)은 물론 세인(世人)이 감탄(感歎) 하였다.그러나 윤원형(尹元衡)등 권신(權臣)에 아부하여 탐학(貪虐)을 일삼았다는 탄핵(彈劾)을 받고 사직(辭職) 하였다가 사실(事實)이 아님이 판명(判明)되어 1555년 복관(復官)되자 그 높은 지개(志槪)에 세인이 모두 감탄 하였다. 명종12년(1557)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된뒤 박천군수(博川郡守),인천부사(仁川府使),등의 외직(外職)을 역임(歷任) 하였다.공의 문장이 뛰어나 시문은 이태백,두보(李太白과杜甫)의 경지(境地)에 이르렀다.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삼체집 서문(三體集 序文)에 보면 윤결(尹潔)과 재명동시(齋名同時)하였다고 하며 송나라의 문장가 삼소(三蘇:蘇洵과 그의아들蘇軾,蘇轍의 세부자를말함)에 비긴다고 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당대(當代) 최고의 문학사(文學士)로 추앙 받았다. 후에 공의 손자 율헌공 명욱(栗軒公 明勖)이 간행(刊行)한 삼체집(三體集)에는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과동주 이민구(東洲 李敏求)가 찬서(撰書)하였다. 명종15년(1560)7월11일 졸하니 향년47세였다.아드님 도곡공 술(陶谷公 述)의 본작(本爵)및양란(兩亂)의 호성원종(扈聖原從)지공(之功)과 청난(淸難:李夢鶴의亂)의 공으로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세자좌빈객(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經筵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 藝文館 大堤學 世子左賓客)이다.배위(配位) 증정부인 무송윤씨(贈 貞夫人 茂松尹氏)는 감찰공 박(監察公 璞)의 따님이다. 아들은 도곡공 술(陶谷公 述)과 태항공 회(太巷公 懷)이다. 두 아들 모두가 당대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국난(國難)을 당하여 두아들이 함께 호종원종지공(扈聖原從之攻)을 행(行)하였다.공은 율동 후산 자좌(栗洞 後山 子坐)에 안장(安葬)되었는데 하조(下兆)이다.지문(誌文)이 있으며 손자안 율헌 명욱(栗軒 明勖)이 묘표(墓表)를 찬(撰)하였다.공의배 증 정부인 무송윤씨(贈 貞夫人 茂松尹氏)는00년12월10일 86세로 장수(長壽)하니 공묘(公墓)의 뒤(上兆)에 안장(安葬) 하였다.공의묘비(墓碑:栗軒 明勖 撰)가 마멸(摩滅)상태에 이르니 1986년3월개수(改竪)하였다.
柳陰公 韓 孝 胤(유음공 한 효 윤) 중종31년(1536)~선조13년(1580) 18세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자는 근숙(謹叔)호는 유음(柳陰)이다. 근수공 여필(郡守公 汝弼)의 아들이고 정선공 승원(旌善公 昇員)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현손(玄孫)이다.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문화유씨(贈貞敬夫人 文化柳氏)로 시정 엄(寺正 엄)의 따님이다. 공은 중종(中宗)31년(1536)8월22일생이다. 외숙(外叔)인 유정건(柳正建)을 찾아 공부하여 향시(鄕試)에 급제하고 명종22년(1567)에진사에 오르고선조3년(1570)식년시 병과(式年試 丙科)에 급제(及第)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573년 부정자(副正字)가되고 검열(檢閱)에 천거 되었다. 그후 대교(待敎),봉교(奉敎),에 승진되고 동왕9년(1576)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전중(殿中)으로 옮겨 성절하정(聖節賀正)으로 연경(燕京)에 갔다 와서 전적(典籍)이 되었다.다음해 종학사회(宗學司誨)로 경성판관(鏡城判官)에 나갔다.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에 승진되었으나 그만두고 선조13년(1580)5월3일 45세로 졸하였다. 증 영의정(贈 嶺議政)이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도(道)에 가깝고 의리(義理)에 찼다.후배들이 경전(經傳)을 모르면 이를 해결해 주었다. 주역(周易)을 배워 정미(精微)한곳을 탐색(探索)하여 발명한 바 많아 칭찬을 받았다.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에 권위(權威)가 있었다. 관혼상제(冠婚喪祭)도 예(禮) 대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학식이 뛰어나 세인이 우러러 봤다. 배위(配位) 증정경부인 평산신씨(贈貞敬夫人 平山申氏)는 예빈정 건(禮賓正 健)의 따님이고 아들은 구암 백겸(久菴 百謙), 증 참판 중겸 (贈 參判 重謙),서평부원군 문익 준겸(西平府院君 文翼 浚謙)이다. 공은 부평리 가마도 건좌(釜坪里 佳麻島 乾坐)에 안장(安葬) 되었다. 배위 증 정경부인 평산 신씨(配位 贈 貞敬夫人 平山申氏)는 선조41년(1608)5월 27일 졸하니 공과 합조이다.상촌 신 흠(象村 申 欽)이 지명(誌銘)을 찬(撰) 하고 진원부원군 서형 유근(晋原府院君 西坰 柳根)이 신도비명을 지었으며 만취 오억령 (晩翠 吳億齡)이 행장(行狀)을 지었고 아들 문익공 준겸(文翼公 浚謙)이 고 비 연보(考 비 年譜)를 지었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가 부인 묘지(夫人 墓誌)를 찬(撰)하였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진원부원군 서형 유근 찬(晋原府院君 西坰 柳根 撰)병조참지 오 준(兵曹參知 吳 竣)이 글을썻고 판중추부사 김상헌(判中樞府事 金尙憲)이 전서 하여 인조4년(1626)10월에 수립(竪立)하였다.묘: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가마도 건좌. 세향일:음)9월9일
橡村公 韓 永 箕(상촌공 한 영 기) 효종7년(1656)~경종1년(1721) 22세 공의자(字)는 영숙(永叔) 호(號)는 상촌(橡村)이다. 군수공 여우(郡守公 如愚)의 아들이며 참판공 필원(參判公 必遠)의 손자이고 문정공 계희희(文靖公 繼禧)의8대손이다. 어머니는숙부인 남양홍씨(淑夫人 南陽洪氏)로 좌상 중보(左相 重普)의 따님이다. 공은 효종7년(1656)생이다. 학식(學識)이 많아 여러번 학행(學行)으로 추천 되었다. 숙종때 벼슬길에 나감을 권유 받았으나 낙향하여 서봉(西峰)에 숨어 학식을 넓혔다. 경종1년(1721) 1월24일 졸이다. 배위 파평윤씨(配位 坡平尹氏)는 진사 해(進士 楷)의따님이고 아들은 생원 정조(鼎朝) 익조(益朝),제조:계현기후(濟朝:系縣箕后),이다.묘:충청남도 공주 석정 병좌 합조
石灘公 韓 孝 中(석탄공 한 효 중) 명종14년(1559)~인조6년(1628) 19세 공은 조선중기(中期)의 문신이다. 자는 경장(景張),호는 석탄(石灘)이다. 서울 출신이며 증참판공 천뢰(贈參判公 天賚)의 아들이며 별제공 극공(別提公 克恭)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5대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원주 변씨 (贈 貞夫人 原州 邊氏)로 병사 명윤(兵使 明胤)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 14년(1559)1월19일생이다. 선조23년(1590)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소촌도 찰방(召村道 察訪),성환도 찰방(成歡道 察訪),을 거쳐 동왕38년(1605)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급제 교서관권지정자(校書館權知正子)를지내고 광해군9년(丁巳)(1617)에 서원현감(西原縣監)이되어도둑을 잡은공으로 승진하여 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예조정랑으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 하였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이 공의 재능을 인정하여 당여(黨與:자기편당)로 만들려 하였으나 불응함에 (安岳郡守)로 좌천 되었다. 광해군14년(1622)동부승지에승진,토목(土木)의남설및궁금(宮禁:궁궐)의문란(紊亂)을 극언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샀다.인조반정(仁祖反正)후 직언(直言)을 평가받아 공조참의(公曹參議)를 거쳐 (左承旨)에 이르렀다. 공은 서원현감(西原縣監)때 한정승 효순(韓政丞 孝純)이 소장 하였던 족보 초안(族譜 草案)을 참고 하여 초교 정사보(初校 丁巳譜,1617)간행(刊行)에주역(主役)을 맡고 서문(序文)을 썻다. 공은 인조6년(1628) 2월16일 70세로 졸 하였다. 이조판서(贈 吏曹判書)에증직 되었다. 배위 증 정부인 전주이씨(配位 贈 貞夫人 全州李氏)는 감찰 언형(監察 彦亨)의 따님이고 아들은 필대(必大),참판 필원(參判 必遠),전첨 필후(典籤 必厚),군수 필구(郡守 必久),지평 필명(持平 必明) 이다.공은 흥천면 계신리 신촌 유좌(興川面 桂信里 新村 酉坐)에 안장(安葬) 되었다. 배 증 정부인 전주 이씨(贈 貞夫人 全州 李氏)는 인조 22년(1644)2월2일 88세로 졸하니 공묘(公墓)와 합조(合兆)이다. 묘비문(墓碑文)은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이 찬(撰)하고 신도비문(新道碑文)은 백주 이명한(白州 李明漢)이 찬(撰)하여 세웠다. 신도비(新道碑)를 보존(保存)하기 위하여 1985년4월에 비각(碑閣)을 세웠다.묘: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신촌 유좌 세향일:음)10월6일.
한 필 명(韓 必 明)1597(선조 30)∼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회이(晦而), 호는 서강(西岡).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효중(孝仲)이며, 어머니는 감찰 이언형(李彦亨)의 딸이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이다.1624년(인조 2)에 생원이 되고, 1628년에 의금부도사·세마 등을 거쳤다.1633년 위수(衛率), 1635년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가 파직되었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그뒤 장례원의 사평(司評)이 되었다가 음보로 창녕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164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예조좌랑에 임명되고 1643년에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고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협素齋公 韓 孝 祥(협소재공 한 효 상) 명종20년(1565)~선조38년(1605) 19세 공은 조선 선조때 문신이다. 자는 경휴(景休) 호는 협소재(협素齋)이다. 증 참판공 천뢰(贈 參判公 天賚)의 셋째 아들이고 별제공 극공(別提公 克恭)의 손자이다.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5대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원주변씨(贈 貞夫人 原州 邊氏)로 병사 명윤(兵使 明胤)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 20년(1565) 7월9일 생이다. 일찍 우계 (牛溪)선생(先生)의 문하에서 수도를 닦은 선비가 많으나 유독 공께서 강마도의(講磨道義) 하고 독학역행(篤學力行)하니 문장(文章)이 일취(日就) 하여 서법(書法)이 절륜(絶倫)하여 우계선생(牛溪先生)이 증시(贈試)에 이르되 유여종왕필(有餘鐘王筆)이요 전심선후천지구(專心先後天지4句)라 하였다.선조23년(1590)중사마생원(中司馬生員)에 급제 하였다.선조말년(宣祖末年)에 우계선생이 졸후 간인(奸人)들의 무고(誣告)로 죄안(罪安)에 오름에 공께서 홀로 항소(抗疏) 하였으나 오히려 왕이 과거정지(科擧停止)의 명(命)을 내림에 종차이후(從次以後)로 불사거업(不事擧業)하다 선조30년(1597)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정유재란때 남원에서 왜적과싸워 대승함에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栗)이 이에 전승비(戰勝碑)를 세우니 명필예가(名筆藝家)인 공으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쓰게 하였다. 남원에 있는 유총병송공비(劉摠兵頌功碑)는 바로 이것이다. 선조38년(1605)7월5일 41세 졸이다. 유고(遺稿)가 있으나 병화(兵禍)로 없어지고시서(詩書) 두권이 전해지고 있다. 배위 여산 송씨(礪山 松氏)는 감찰 부흥(監察 復興)의따님이고 아들은 도사 필진(都事 必震),교위 필항(校尉),필익(必益,),필승(必升)이다.공과 배위 여산 송씨의 합조묘이다.묘: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세향일:음)10월7일
佐郞公 韓 夢 逸(좌랑공 한 몽 일) 19세 공의자는 자진(子眞)이요 호는 봉악(鳳岳)이니 선조 정축(1577)에태어났다. 고위(高位)는 응(應)이요 조고(祖考)는 여준(汝俊)으로 돈암공 후(돈菴公 後)이다. 인조 갑자(1624)에 사마시에 올라 형조좌랑(形曹佐郞)을 고쳐 단성(丹城),고령(古靈),영춘(永春),등 세고을 수령(守令)으로 청백(淸白) 봉공(奉公) 하였다. 공은 일찍이 학문에 힘써 정한강(鄭寒岡 諱 述)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 고제자(高第子)가 되니 그 문하생들의 선망(羨望)이었다. 공이 영춘 고을 살이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후학(後學) 양성(楊成)에 힘쓰던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적병에게 함락 당함을 보고 행제소(行在所:임금이 일시 머무르던곳)으로 달려가 임금에게 문안 드렸다는 기록을 판서(判書) 정세규(鄭世規)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인조 을유(1645)에 수(壽)69하고 타계 하였다. 공의 배위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판관 정국(判官 鄭國)의 따님으로 공과 합조(合兆)이다. 공의 세읍(三邑:세고을)을 다스리는데 청백으로 봉공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의 청덕(淸德)을 기리기 위해 기적비(紀績碑)를 세웠다. 아들은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 시중(時重)이다. 공이 지방 수령(地方 守令)으로 재임 할 때 청렴(淸廉)하게 다스린공(功)을 기려 주민들이 공의 청덕(淸德)을 칭송하는 송덕비(頌德碑)를 산청(山淸) 노변(路邊)에 세웠다.묘:충북 제천시 금성면 양화리 선녀동 선녀봉
敎官公 韓 士 英(교관공 한 사 영)광해7년(1615)~숙종25년(1699) 23세 공의자는 군언(君彦)이고 호는 불온재(不온齋)이다. 학정공 준(學正公 峻)의 아들이고 별좌공 일휴(別坐公 日休)의손자이며 이랑공 서봉(吏郞公 瑞鳳)의 10대손이다. 광해 7년 (1615) 1월15일생이며 공이 생후 6월에 부친이 별세 하니 평생에 부친의 존안(尊顔)을 뵙지 못함을 항상 애통하게여겨 천지죄인(天地罪人)으로 자처(自處) 하였다. 모친(母親)이 풍비(風痺) 로 겨울이면 고통이 더욱 심함에 공이 밤을 새며 간호하니 세인이 대효(大孝)라 칭 하였다.공이 15,6세에 이르러 면학(勉學)이 어려웁더니 서당(書堂)에 가서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능통(能通) 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인조14년,1636)에 모친을 업고 산간설중(山間雪中)에도 무사히 피난하고 귀가(歸家)하니 세인(世人)이 효성(孝誠)을 감탄 하였다. 가도(家道)는 청빈(淸貧) 하되 봉양(奉養) 하는 물품은 풍비(豊備) 하더니 나아가 공의 효성을 감탄하여 도가(屠家)에서 선심을 쓰기를 모친의 종기(腫氣)가 위중할 때 우황(牛黃)을 돈도받지 아니 하고공헌(供獻)하여 곧 쾌차하니 더욱 더 봉선(奉先) 하는 정성이 지극하여 위토(位土)를 매입(買入)하고 제의(祭儀)를 갖추어 돈독한행실로 자제(子弟)를 훈시(訓示) 하였다. 숙종때 장사랑(將仕郞:조선조때의 문관의 품계를)지내기도 했으며 숙종 25년 (1699)6월21일 졸하였는데 수(壽)85이며 증동몽교관 (贈童蒙敎官)이다.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발 불온 재가훈(跋 不온 齋家訓)이있다. 배위 영인 전주이씨(令人 全州李氏)는 진사 훤(進士 萱)의 따님이며 아들은 우극(宇極),군수 익휘(郡守 益徽),생원 익저(生元 益著),서원장 익수(書院長 益壽) 이다. 공의 배위 영인 전주이씨(令人 全州李氏)는 동왕 16년(1690)4월10일 공보다.10년전에 졸하였다. 묘는 수찬공 묘계하 임좌(修撰公 墓階下 壬坐)에 합조(合兆)이며 오촌 송선생 치규 찬묘(鰲村 宋先生 穉圭 撰墓)이며 장방 서동 안산(長方 西洞 安山)에 정려(旌閭)를 내렸다.1992년 3월 청주시 수곡동에서 청원군 남일면 송암리 산18-1로 이장(移葬) 하였다. 세향일 음)10월10일
水使公 韓 석(수사공 한 석)1622~1620 21세 공의 자는 호이(浩而)이니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진사(進士)가 되어 관(官:벼슬)은 부율(副率)로 그친 후기(後琦)의 아들이고 촉체(蜀體:촉나라필법)로 명필이란 이름을 떨친 철(哲)의 손자이다. 일찌기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여러관직을 거쳐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에 오르니 일문의 영광이었다. 선대(先代)로부터 문장 명필(文章 名筆)이 이어져 세상에서 명필집안이라고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공은 또한 시문(試文)에 뛰어나고 초서(草書) 예서(隸書)에 능하여을 뿐 아니라 뜻이 고상(高尙)하고 기개(氣慨:일에 굽히지 않는 강한의지)가 높으며 절조(節操)가 굳으니 세인(世人)의 우러름을 받았다고 전(傳)한다. 공이 400년전 생존시 남긴 수사공(水使公) 일기(日記)가 전해온다. 묘는 배위 숙부인 전주이씨(配位 淑夫人 全州李氏)와 합조(合兆)이고 후배(後配:繼配) 숙부인 남양홍씨(淑夫人 南陽洪氏)는 동원 상우측(同原 上右側)이다.시향일:음)10월7일
縣令公 韓 佰 箕(현령공 한 백 기)인조12년(1634)~숙종2년(1676) 22세 공의 자는 향오(嚮五) 호는 복천(復川)이다. 현감공 여두(縣監公 如斗)의 아들이고 참판공 필원(參判公 必遠)의 손자이고,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8대손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참의 서익(參議 瑞翼)의 따님이다. 인조12년(1634)생이고 현종7년(1666)생원(生員)이되고 증산현령(甑山縣令)에 나갔다. 우암(尤菴)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행(學行)이 탁월(卓越)하여 세인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나 숙종2년(1676) 8월8일 43세에 졸하니 세인이 애석해 했다. 배위 평산신씨배위 (平山申氏) 는 도사 최(都使 最)의 따님.순천김씨(順川金氏)는 완의 따님이고 아들은 첨추 중조(僉樞 重朝)이다. 공의 묘는 신촌선영 건좌(新村先塋 乾坐)에 있고 배위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선영 해좌(先塋 亥坐),배위 순천김씨(配位 順川 金氏)는 선영 곤좌(先塋 坤坐)에 있다.
承旨公 韓 構(승지공 한 구)인조14년(1636)~숙종41년(1715) 조선중기의 문신,서예가 자는 긍세(肯世) 호는 안소당(安素堂),정유공 석원(廷臾公 碩元)의 아들로 청원위 경록(淸原尉 景祿)의 5대손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니 진사공 형(進士公 형)의따님이다 효종8년(1657)진사시에 합격하여 순능 참봉(順陵 參奉)으로 있다가 숙종(1675)증광문과 갑과로 급제 하였다. 그뒤 지평,장령,정언,헌납,집의,안주목사등을거쳐 동왕10년 승지에 올랐다.동왕15년 민비(閔妃)가 폐위되고 남인(南人)이 득세한뒤 아들 휘우공 중혁(輝羽公 重赫)이 김춘택(金春澤)과 민비 복위를꾀하다가 동왕20년 투옥되자 이에 연좌(連坐:한사람 죄 때문에다른사람들까지 범죄에 관련됨)되어 변방(邊方:시골변두리)에 유배 되었다.5년뒤 사면되어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며 동왕41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시(詩)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예(書藝)도 뛰어나 공이 졸한뒤인 정조6년91782)평안도관찰사 서호수(徐浩修)가 왕명에 따라 공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삼아 평양감영에서 8만여의 활자(活字)를만들어 한구자(韓構字)라 이름하여 규장각에 소장하였고 우의정 김석주(金錫胄) 일족의 문집인 잠곡집(潛谷集),낙전당집(樂全堂集),동강집(東江集),등이 모두 이 활자로 간행 되었다.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니 진(瑨)의 따님이다.슬하에 5남2녀를 생육(生育)하니 장남은 휘우공 중혁(輝羽公 重赫)이고,2남은 진사공 중엽(進使公 重燁),3남은 휘시공 중념(輝時公 重념),4남은 중집(重집),5남은 중선(重선)이다.
隱灘公 韓 致 相(은탄공 한 치 상)인조 22년(1644)~ 숙종39년(1713) 22세 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학자(學者)이다. 자는 군거(君擧)호는 은탄(隱灘)이다. 용와공 경오(傭窩公 儆吾)의 아들이고 수구공 빈(守邱公 빈) 의 손자 이며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8대손이다. 어머니는 의인 남양방씨(宜人 南陽 房氏)로 주부 원익의(主簿 元益의) 따님이다. 공은 인조 22년(1644)생이다 현종10년(1669)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생원(成均生員)이 되었으나 관직생활(官職生活)보다는 성리학 연구(性理學 硏究)에 뜻을 두고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썻다. 숙종(肅宗)6년(1680)성균관에서 수학(修學) 할 때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소청(疏請)하고 다음해 사람들이 함부로 사당(祀堂)을 세우는 것을 철거하도록 청하였다. 항상 옳은 것을 도왔고 사기.사교(邪氣.邪敎)를 배척 하니 별과 해처럼 빛났다. 숙종(肅宗)39년(1713)12월7일 남원 황죽리(南原 黃竹里)에서70세로 졸하였다.연천(漣川)의 돈암사(豚巖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배위 의인 전의이씨(宜人 全義李氏)는 통덕랑 시빈(通德郞 時賓)의 따님이고 의인 김해김씨(宜人 金海 金氏)는 감역 정하(監役 鼎夏)의 따님이다. 아들은 이기(以箕),누헌 정기(陋軒 靖箕) 이다.공은 남원시 도통리(道通里) 산2-1 후촌해좌(後村亥坐)에 안장(安葬) 되었다. 참판 소곡 윤광소(參判 素谷 尹光紹)가 갈명(碣銘)을 찬(撰)하고 판서 본종만계(判書 本宗晩啓)가 글을썻고 군수 정간(郡守 鄭杆)이 전서(篆書) 하였다.공의 의인 전의 이씨(宜人 全義李氏)는 현종(顯宗)15년(1674)6월8일 일찍 졸하니 근가동 조고묘 우자좌(勤佳洞 祖考墓 右子坐)에 안장(安葬)하였다. 공의 배 의인 김해 김씨(宜人 金海 金氏)는 숙종44년(1718)10월21일졸하니 남원시 도통리(南原市 道通里) 촌전대로변 유좌(村前大路邊 酉坐)에 안장(安葬) 하였는데 석의,석물(石儀.石物)이 있다.
通德郞公 韓 聖 憲(통덕랑공 한 성 헌) 인조 24년(1646) ~숙종46년(1720) 25세 공의 자는 집중(執中)이요 호는 제광(霽光)이다. 통덕랑공 익형(通德郞公 益亨)의 아들이고 별좌공 진영(別坐公 震英)의 손자이며 이랑공 서봉(吏郞公 瑞鳳)의 12대손이다. 공은 인조 24년(1646) 8월16일 유기 방정리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학업을 좋아하고 소시절부터 봉선지절(奉先之節)이 투터웠더니 숙종조에서 통덕랑(通德郞:조선조때 문관의품계)에 이르렀다. 공은 팔남매중의 장남으로 다음 벼슬을 마다 하고 향리인 방정리에 돌아와 향학과 유업의 계승, 후손계도(後孫 啓導)에 진성(盡誠)하더니 유기(遺基)에 살면서 시조 유택(始祖 幽宅)의 실호(失護)를 통분(痛憤)하여 묘재 가산(墓在 嘉山)이라는 문적(文跡)만을 보고 행보로 평안도 가산, 충청도 회인 가산, 등지를 역수광구(力授廣求) 하더니 숙종14년(1688)에 청주 가산에서 묘징(墓徵)을 우득(遇得)하여 급기야(及其也) 시조묘소(始祖墓所)를 청주병마절도사 한 근( 淸州兵馬節度使 韓根)과 합심전력(合心全力)하여 청원군 남일면 가산(淸原郡 南一面 嘉山)에서 심득(心得) 하였으니 오한(吾韓)에 대한 불후(不朽)의 공적(功績)은 영세불망(永世不忘)이리라 이에치제전(置祭田)과개봉축(改封築)등의 수호책(守護策)은 물론 시조유적 (始祖遺蹟)인 방정(方井),무농정(務農亭)등의 정화(淨化)도 이어나갔다.공은 문장력(文章力)이나 시(詩)에도 뛰어나 제방방정리척매기(堤防方正里斥賣記),척매방정제방시(斥賣方井堤防詩),명명자손설(命名子孫設),감흥인유소기(感興因有所期),제광부(霽光賦)등의 유고(遺稿)는 오늘날 후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숙종46년(1720) 2월9일 졸하니 수(壽)75세이다. 배위는 공인 전주이씨 (恭人 全州李氏),공인 고령 신씨(恭人 高靈 申氏),공인 경주 김씨(恭人 慶州 金氏)이고 아들은 병(棅)과 진사 건(進士 楗), 정 이다.공이 졸함에 청주 월오동에 초장 되었다가 순조2년(1802)봄에 공묘(公墓)로 합조(合兆) 되었다. 후배(後配) 공인 고령 신씨(恭人 高靈 申氏)는 숙종34년(1708) 4월20일에 졸하니 청주 가산(淸州 嘉山)에 초장 되었다가 1973년 4월에 공묘(公墓)와 삼합조 (三合兆)되었으며 계배(繼配) 공인 경주 김씨(恭人 慶州 金氏)는 공묘 북록(公墓 北麓)에 별봉(別封)으로 안장 되었다. 묘표(墓表) 등 석물(石物)이 있다.묘: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산38-1 세향일 음 10월15일
是窩公 韓 泰 東(시와공 한 태 동)인조24년(1646)~숙종13년(1687) 22세 *국역왕조실록 1. 2. 3. 4. 동영상 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노첨(魯詹)이며 호는 시와(是窩)이다. 장령공 진(掌令公 縝)의 아들이고 현감공 위겸(縣監公 위謙)의 손자이며, 참의공 전 의 9대손이다.공은 인조24년(1646)생이다. 현종7년(1666)생원이 되고 동왕10년(1669)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동왕14년(1673)정언(正言)이되었다. 그뒤 숙종6년(1680)지평(持平) 겸 지제교(知製敎:조선조때 임금이 반포하던 교서의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가 되었고1682년 진주사 서장관(陳奏使 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고 장령(掌令),집의(輯義)를 지냈다.1683년사성(司成)으로 있으면서 남학교수(南學敎受)를 겸하였는데 글씨를 잘쓰고 문장(文章) 됨이 기기(奇氣)가 탁월(卓越)하여 송(宋)나라 팔대가(八大家)인 유자후(柳子厚)와 같다고 하였다. 6월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로 있을 때 서인(西人)의과격파 김익훈(金益勳),김석주(金錫胄)등이 남인(南人)의 발본색원(拔本色源)을 위하여 남인 역모설을 조작하자 같은 서인으로서 조지겸(趙持謙)등 소장파와 함계 그 흉계를 폭로하고 처형을 주장 하였다가 이듬해 파직 당했다,이를 계기로 서인은 김익훈 등을 옹호하는 노장파(老壯派)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졌다.공은 1684 집의(執義)로 복직 되었는데 이는 병판 남약천(兵判 南藥泉)의 상소(上疏)의 힘을 입었다. 파직과복직을 여러번 거듭 하면서 1685년 부수찬(副修撰) 헌납(獻納)을 지내다가 다음해 집의(執義)와사간(司諫)을 지냈다. 숙종13년(1687)10월2일 졸하니 향년(享年)42 이었다. 공의 청백강직(淸白强直)한 절조(節操)를 포상(褒常)하여 부인 죽산안씨(夫人 竹山安氏)에게 매월 녹봉(每月 祿俸)을 주었다.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며 배위(配位) 증 정부인 연일정씨(贈 貞夫人 延日鄭氏)는 영한(榮漢)의 따님이고 후배 증 정부인 죽산안씨(贈貞 夫人 竹山安氏)는 적(績)의 따님이다.아들은 관찰사(觀察使) 를 지낸 월악(月嶽) 지(祉)이다. 집의시 피혐소계(執義時 避嫌訴啓)를 상소(上訴)하여 세상에 유명 하다.공이 공주시 서면 웅진서혈봉하 병좌에 안장 되니 영상 이종성 이 지명을 찬하였다.그러나 후세에 와서 어떤사유로 모르게 묻어 버렸다. 후배 증 정부인 죽산 안씨는 영조 7년(1731)7월8일 졸하니 공묘와 합조이다. 후세에 어떤사화가 있을까 염려되어 신도비를 매안 하였다는 전언으로 그 장소는 확인이 안되어서 1982년에 영상 이종성의 명문으로 비를 세웠다.공(公)의초배(初配)증 정부인 연일씨 (贈 貞夫人 迎日 鄭氏)는 영조(英祖)17년 (1741)5월 27일 졸하니 공주 월성 산하 효가 해좌(公州 月城 山下 孝家 亥坐)에 홀로 안장(安葬)하였다.묘:충청남도 공주시 서면 웅진 서면 혈봉하 병좌 세향일:4월5일.
月鐵公 韓 祉(월악공 한 지)蕭宗 1年(1675)~關宗 46年 (1720) 23世 *국역왕조실록 공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지(社)이고 자(字)는 석보(錫南),호(號)는 월악(月識)이다.공주(公州)출신이며, 시와공 태동(是商公 泰東)의 아들이고 장령공 진(掌令公 鎭)의 손자이다. 공은 천성(天性)이 학문(學問)을 좋아하였다.숙종(蕭宗)23년(1697)건원릉 참봉 (健元陸 參奉: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에 있는 조선 太祖陵의 參奉)이 되었고 동왕 25년(1699)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동왕 31년(1705)헌능 참봉(獻陵 參奉)으로 별시문과 을과(別試 文科 乙科)의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1707년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이 되었다.1713년 동지사(冬至使)인 조태채(趙泰采)의 일행으로 김상직(金相稷)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1714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고 그후 부수찬,부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赴任)하지 않았으며 1718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가 되었다.공은 관(官)의 귀감이 되었기 목민심서(收民心書)에 공이 감사(藍司)때 말한 네 가지가 실려있다. 경종 즉위년(景宗 卽位年 1720)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를 제수받았으나 부임 치 않고 이해 12월 5일 공주 효촌 병사(公州 孝村 丙舍)에서 졸하니 향년(享年)이 46세 이었다. 숙종 41년(1715)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을 때는 활포(八包)의 법을 엄히 지켜 역관(譯官)이나 비록 대관(大官)이라도 이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청렴결백 (淸廉潔白)한 성품(性稟)이었으며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높았다.영조 21년(1745)청백리(淸白吏)로 천거(薦擧)되었다.저서(著書)로《월악서소(月嶽書疏)》가 있다.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며 배위 (配位)증 정부인 연산 서씨(贈 貞夫人 連山 徐氏)는 통덕랑 재(通德郞 梓)의 따님이며 아들은 좌윤 덕필(左尹 德弼),통덕랑 덕길(通德郞 德吉),목사 덕일(收使 德一),생원 덕실(生員 德實)이다. 공(公)이 경종 즉위년 (1720)12월 5일 졸함에 용성산 축좌(龍城山 丑坐)에 안장(安葬)하였는데 여서 이성중(女壻 李成中)이 지명(誌銘)을 찬(撰)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묘하 (幕下)에 있다.공(公)의 배 증 정부인 연산 서씨(配 贈 貞夫人 連山 徐氏)는 숙종(肅宗) 44년(1718)1월 17일에 졸하였는데 공주 월성 산 하 효가 건좌(公州 月城 山下 孝家 乾坐)에 홀로 안장(安葬)하였다.
爾知公 韓 火+式(첨지공 한 식)24世 公의 字는 성빈(聖彬)이요 號는 용사(龍沙)또는 양정재(養正齋)이 니 父의 諱는 종헌(宗憲)이요 祖父는 우석(祐錫)인데 生父는 시형(時亨)이다. 公은 일찍부터 벼슬길에 뜻이 없었고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니 김퇴어(金退漁: 鎭商)門下에서 수학(修學)하여 송우암(宋尤菴:時烈)의 참된 학리(學理)를 깨달았고 소학(小學)의 실천철학을 탐구(探究)하니 퇴어공(退漁公)이 중히 여겼다. 公이 장차 진주 용암(晋州 龍岩)에 양정재(養正齋)를 짓고 강도(講道)하다가 타계(他界)하였다.公은 경종 계묘(景宗 癸卯:1723)에 출생하여 오직 학문만을 갈고 닦아 후진양성에 전념(專念)하다 정조 을묘(正祖 乙卯:1795)에 壽 73으로 타계하였다.나라에서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하였다. 공의 배위(配位)는 한산 이씨(韓山 李氏)와 달성 서씨(達城 徐氏)이고 아들은 광렬(光烈),광걸(光杰),광도(光도),광사(光賜) 이다.묘: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 장수봉
寒隱公 韓 錫 堅(한은공 한 석 견)1725~1788 21世 公의 諱는 錫堅01요 字는 견부(堅夫)요 호(號)는 한은(寒隱)이다.예빈윤공(禮實尹公 :連)의 후예(後裔:後孫)로 안천부원군(安1l|府院君:卿)의 11대손이니 고(考:아버지)는 구태(九兌)요 조고(祖考)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龍讓衛副護軍)한 만익(萬益)이다. 公은 천품(天稟:天性)이 총민(聰敏:슬기롭고 민첨함)하고 기국(器局:度量)이 굉심(宏深:넓고 깊음)하여 약관(弱冠:20세내외의 나이)에 경사(經史:經書와 歷史)를 읽고 경사(京師:서울)에 벗을 사귀며 벼슬길에 나갈 준비를 마쳤으나 당시는 당파(黨派)싸움이 심한 때라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英祖가 당쟁을 없애기 위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정 논의가 이론(異論)으로 분분하니 公은 벼슬길을 단념(斷念)하 고 표연(飄然:훌쩍 떠나는 모양)히 울산(蔚山)으로 내려와 냉천(冷良)에 자리잡았다.이로부터 公은 世上의 공리(公利)와 인연을 끊고 산수(山水)를 벗삼아 시(詩)를 옮으면서 고상(高尙)하고 깨끗한 행의(行誼)로서 평생(平生)을 보냈으니 가히 선비로서의표상 이었다고 칭송함이다. 공이 낙남 하여 240여년에 후손이 번연하여 현재에 이른다. 공이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니 울산군 능소면 중산리 산111-1번지에 안장 하였다.
敎官公 韓 敬 儀(교관공 한 경 의)英祖15년(1739)~純祖 21年(1821) 조선 후기(後期)의 학자(學者)이다. 휘(譯)는 경의(敬構)이고 호(號)는 치서 이다.영의정 상경(尙敬)의 후손으로,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진철(震喆)이며,어머니는 단양우씨(丹陽禹氏)로 상규(尙奎)의 딸이다.큰아버지 진유(震愈)에게 입양되었다.이장오(李章五)에게 사서를 배우고,뒤에 조유선(趙有善)의 문인이 되었다. 향시(鄕試)에 네번 합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뒤로는 벼슬에 뜻을 끊고,오직 경학 에 열중하여 장현문(張玄聞)·이춘위(李春위)등과 함께 여택회(麗澤會)를 조직,사서오경과《소학》《심경》《근사록》《성리대전》《강목》등을 강론하였다.예 악(禮樂)도수(度數)·역상(易象)등도 깊이 연구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고,지행일치(知行一致)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시문(詩文)에도 능하였다.뒤에 동몽교관(童豪敎官)에 추증되었다.저서로《치서집》6권이 있다.
參議公 韓 始 絡(참의공 한 시 유)英祖 25年(1749)~純祖 15年(1815) 26世 공(公)은 조선 정조(正祖),순조(純祖)때의 문신이다.휘(諱)는 시유(始格)이요 자(字)는 수민(秀民)이고 호(號)는 희현(希賢)이다. 수찬공 동(修撰公 箕東)의 아들이며 부사공 수형(府事公 守亨)의 손자이고 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의 16대손이다. 정조(正祖)10년(1786)문과에 등제(登第)하고 동왕 16년(1792)조봉대부 사헌부 감찰(朝奉大夫 司憲府 藍察)을 지냈다. 동왕 19년(1795)병조좌랑(兵曹佐郞),동왕 24년(1800)통훈대부 사헌부 지평(通訓大夫 司憲府 持平)을 지내다 몇년후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나갔고 그후 승정원 좌승 지 겸 경연관 참찬관 홍문관 수찬관(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官 參撰官 弘文官 修撰官)에 오르고 순조(純祖)9년(1809)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兵曹參議)에 이르렀다.순조 15년(1815)7월 1일 65세로 졸하였다.공(公)의 저서(著書)로《주자정서(朱子正書)》10권,《의례류집(疑禮類集)》12권7서(書),《석의(釋義)》27권,《희현집(希賢集)》5권,《중화문답(中和問答)》1권,《성리설(性理說)》4권이 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 경주 김씨(淑夫人 慶州 金氏)와 숙부인 예안 김씨(淑夫人 禮安 金氏)이고 아들은 장사랑 용우(將使郞 用友)이다.공과 배 숙부인 예안 김씨(配 淑夫人 禮安 金氏)는 목천북면 군단리 동력동 자좌 건 위 합조(木川北面 軍壇里 東歷洞 子坐 乾位 合兆)이며 배 숙부인 경주 김씨(配 淑夫人 慶州 金씨)는 목천면 응곡 오부인 산계하 자좌(木川面 鷹谷 吳夫人 山階下 子坐)이다.세향일:(음)10월8일.
縣藍公 韓 致 奫(현감공 한 치 윤)英祖 41年(1765)~純祖 14年(1814) 26世 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학자(學者)이다.휘(諱)는 치윤(致奫)이고 자(字)는 대연(大淵),호(號)는 옥유당(玉유堂)이다.한성(漢城)출신으로 증 승지공 원도(贈 承旨公 元道)의 아들이며 증 시정공(贈 寺正公 元道)의 아들이며 증 시정공 덕량(贈 寺正公 德良)의 손자이고 문익공 준겸(文翼公 浚謙)의 7대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증 숙부인 고령 신씨(贈 淑夫人 高靈 申民)로 참판 서(參判 逝)의 따님이다.공은 영조(英祖)41년(1765)11월4일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9세 때에 이미 글을 읽으면 그 뜻을 완전히 깨닫게 펼만큼 숙성하였다고 한다.또,어느 정도 성장한 청년기에는 시문에 뛰어난 명성이 있기도 하였다.그러나 그가 성장하였을 때는 남인의 정치세력이 이미 완전히 꺾여 있던 터라 벼슬에의 뜻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영조와 정조대의 탕평정국(湯平政局)이라 하더라도 그가 속한 남인들은 정치무대에서 힘도 제대로 쓸 수 없는 형세였기 때문에,대부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력하던 추세였다.이런 상황하에서 그는 1789년(정조 13)진사시에만 합격 하였을 뿐문과에는 응시를 하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하였다. 그런데도 그가 간혹 종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지체로도 불리는 것은아들 진상 (鎭象)이 동지돈녕부사가 되어 1887년(고종24)에 삼대추증(三代追贈)에 의하여 그에게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증직된 때문이다.1799년 10월 북경에 사행(使行)하는 집안 형님 치응(致應)을 수행하여,당시 학자들이 대부분한번은 가보고 싶어 하였던 선진문물의 본거지 북경에 약 2개월 동안 머무르면서,청나라의 문물을 살펴보 고 돌아온 뒤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더욱 정진시켜나갔다. 당시의 사행은 의례적인 외교적 차원의 통교(通交)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문화교류의 중요한 기회도 되었다.이러한 연유가 당시 학계에 새로운 학문적 조건을 지어주었던 것으로 보면,그의 북경여행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개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그뒤 이러한 학문적인 기틀을 가지고 한국사의 객관적 인 서술을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원편(原篇)70권이 바로 그것이다.이 책은 그의 만년의 10여년 동안에 걸쳐서 이룩한 업적이다.이밖에도 북경을 여행할 당시의《연행일기 (燕行日記)》와 많은 유고(遺橋)가 조선 말까지도 그 증손자인 일동(日東)에 의하여 간직되고 있었으나,이들의 유고는 오늘날 그 소장여부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50년의 생애 동안 젊어서는 시문으로 그 이름을 떨쳤고,중년에는 북경을 찾아 서 견문을 넓혔으며,만년에는한국사의 객관적인 편찬물을 이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 다.그러면서도 집안에서는 일찌기 죽은 형님 치규(致奎)의 식솔을 극진히 돌보았다. 조카 진서(鎭書)가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고,진사가 된 뒤 현감까지 나가게 된 것도 그의 보살핌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그는 학문의 교환에서 당색을 초월한 폭넓은 학우들을 사귀는데 노력하였다. 당시는 학문의 교관에서 학연(學緣)·지연·당색 등을 초월한 접촉이 많았다는 시대상 황에서도 연유하지만 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그가 죽은 뒤 상청에 보낸 만장(挽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그의 원만한 인격과 학문적인 업적을 기라는 바도 없지 않았다.즉,후대 김정희(金正喜)는 만장에서 그를 송대《옥해(玉海)》의 저자 왕응린(王應麟)과 청나라 초 기의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에 비유해서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고,한치응·홍명주 (洪命周)·심영석(沈英錫)도 그와같이 평가하였으며,김유헌(金格憲)도 그의 인품을 옥(玉)과 난(蘭)에 견주었다.또,이해응(李海應)은 그를 후한 때 은거하면서 학덕을 쌓 고 청빈하면서도 봉양(奉養)·우애를 일삼았던 모용(茅容)과,역시 같은 무렵 신선과도 견줄 만큼의 풍채와 학문과 덕행을 가졌던 곽태(郭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만장에서 그를 높이 평가한 이들은 거의가 당대 당상관으로 있던 지체높은 친구 내지는 그를 아끼던 인물이었지만,이밖에도 그를 기리던 사람들은 허다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역사》의 서문에서 유득공(柳得恭)이 그를 평가한 것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이와같이,그는 한국사학사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는《해동역사》의 저자라고 하는 위 치에서만이 아니라,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기에 걸쳐서 우리나라의 문화사적 측면에 서도 도외시될 수 없는 인물이다.그가전통적인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학문적인 분야를 개척하고 쌓아올린 성과는 당시의 학문적·사상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소홀히 할 수 없는 측면이라 하겠다.공은 순조(純祖)14년(1814)12월 26일 50세로 졸하니 증 호조참판(贈 戶曹參判) 이다. 배위(配位)증 정부인 안동 권씨(贈 貞夫人 安東 權氏)는 수덕(壽德)의 따님이고 증 정부인 봉화 정씨(贈 貞夫人 奉化 鄭氏)는 광옥(光沃)의 따님이며 아들은 진도(鎭圖), 진사 진모(進士 鎭暮),돈녕 진상(敎寧 鎭象)이다. 공과 배 증 정부인 안동 권씨(配 贈 貞夫人 安東 權氏)와 배 증 정부인 봉화 정씨(配 贈 貞夫人 奉化 鄭氏)와 삼합조(三合兆)로 충주시 소태면 인다동 묘좌(忠州市 蘇台面 仁多洞 卯坐)에 안장(安葬)되었다.실묘(失幕)이다.
縣藍公 韓 鎭 書(현감공 한 진 서)正祖 10年(1786)~高宗 7년(1870) 27世 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학자(學者)이다. 휘(諱)는 진서(鎭書)이고 자(字)는 유경(酉敬)이다.진사공 치규(進士公 致奎)의 아들이고 증 승지공 원도(贈 承旨公 元道)의 손자이며 문익공 준겸(文翼公 浚謙)의 八代孫,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3대손이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로 희영(希泳)의 따님이다. 정조(正祖)10년(1786)12월 22일 생이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 하였다.어려서 아버지를여의고는 작은아버지 현감공 치윤(致奫)에게서 문학과 도덕을 배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음사(蔭士)로 현감을 지낸 일이 있다고 전하여진다. 순조(純祖)14년(1814)치윤이《해동역사(海東繹史)》를 완성하지 못하고 졸하자 현감공 치윤의 유언으로《해동역사》원편의 초고를 정리하고 자료를 새로 수집하여 《지리고》15권을 속찬(續撰),1823년《해동역사》총 85권을 완성하였다. 고종(高宗)7년(1870)5월 26일 졸하였다. 배위(配位)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로 도사 유만(都事 有萬)의 따님이며 아들은 재원 (在源)이다. 공의 묘는 용인시 서봉리 자좌(龍仁市 棲鳳里 子坐)에 있고 배위(配位)달성 서씨(達城 徐氏)의 묘는 강천리 간좌(康川里 艮坐)에 있다.
贊成公 韓 弼 敎(찬성공 한 필 교)순조 7년(1807)~고종 15년(1878) 29世 조선 말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자는 보경(輔卿),호는 하석(霞石),태인공 증 판서 원리(泰仁公 贈 判書:元履)의 아들로 증 참판공(贈 參判公:用鼎)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 인 음성 박씨(陰城 朴氏)는 집의공 준흠(執義公:俊欽)의 따님이다. 공은 6살 때 아버지를 여이고 큰 형과 둘째 형도 일씩 세상을 떠나 외롭고 쓸쓸함이 깊었으나 어머니의 훈계(訓戒)를 받들어 학문에 힘쓰고 자신을 단속하였다. (1833)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외직으로는 재령·김포·신천군수와 서홍부사,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무고로 두차례나 유배된 일이 있다. 그러나 공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유배지에서 학문에 열중하다 3년만에 풀려났다. 내직으로는호조참의,돈녕부도정,오위장,부총관,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아들 문간공 장석(文簡公:章錫)의 현달(顯達)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공은 학문에 뛰어나 저서로 는 하석유고(遺稿)6권과 연보(年諸)가 있고 백졸재연보(百拙齊年諸)와 청평소보(淸平小諸) 등을 편집하였다. 또 선조들에 대한 제사와 추모하는 일에 독실(篤實)하였고 제례의식(祭禮儀式)에도 밝아 시조부군 세향시에 읽는 홀기(笏記)도 공이 강정(講定)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배위 증 정경부인 풍산 홍씨(贈 貞敬夫人 豊山 洪氏)는 좌의정,문간공 홍석주(左議政 文簡公:洪奭周)의 따님이다.슬하에 1남을 생하니 대제학,문간공(大提學,文簡公:章錫)이고 부실 진주 강씨(副室 晋州姜氏)의 소생으로 1남을 생하니 규장각 검사관 형석(奎章閣 檢査官 衡錫)이다.
文簡公 韓 章 錫(문간공 한 장 석)순조 32년(l 832)~고종 31년(1894) 30世 조선 말기의 문신이요 대학자로 자는 치수(雉綏),호는 경향(經香),미산(眉山),참판공 증 찬성 필경(參判公 贈 贊成:弼敬)의 아들로 태인공 증 판서 원리(泰仁公 贈 判書:元履) 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풍산 홍씨(豊山 洪氏)는 문간공 석주(文簡公:奭周)의 따님이다. 철종9년(1858)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동몽교관(童豪敎官),봉사(奉事),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전생서직장(典牲暑直長)에 올랐으며 고종8년(1871)감제(甘製)에 장원(壯元)하여 이듬해 정시 문과(庭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후 주서(注書),부수찬(副修撰),헌납(獻納),병조정랑(兵曹正郞),시강원 문학(侍講院 文學),부응교(副應敎)등을 역임하다가 용강현감(龍岡縣監)으로 나갔다.동왕 14년(1877)다시 부교리(副校理)로 있다가 이듬 해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다.상기가 끝난 뒤 오위장(五衛將),공조참의(工曹參議),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등을 지냈다 동왕 19년(1882)시강원 보덕(輔德)을 겸하였고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이듬해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이 되었다.동왕21년 (1884)신법(新法)이 행해지고 의제(衣製)가 바뀌니 전 가족을 이끌고 아산(牙山)황곡(黃谷)에 내려가 누차 올라오라는 왕명(王命)이 내렸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얼마 안되어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임명되었다. 동왕 23년 지춘추(知春秋),지경연(知經筵),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와 이조판서(吏曹 判書)에 임명되었다. 이 해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사직(離職)하고 상기를 마치니 양관(兩館)대제학(大提學)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세자좌빈객(世子左實客)에 임명되어 사직상소를 5번이나 올렸으나 왕은 이를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그후 또 규장각 제학,이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거쳐 동왕 27년(1890)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로 옮겼고 숭정대부에 올랐다. 동왕 29년에 다시 대제학에 임명되어 소경왕후(昭敬王后)의 존호(尊號)를 의정하고 사직하였다.그 후 판의금부사를 세 번,우참찬,좌부빈객을 각 한 번씩 내렸으나 혹은 병을 이유로 사양하기도 하고,혹은 억지로 나가기도 하였는데 오래 있지 않았다. 동왕 31년에 졸하니 향년 63세이다.왕은 공의 부음(訃音)을 듣고 제문을 지어 예관을 파견하여 치체(致察)하였다. 처음 시호(諡號)는 효문(孝文)으로 내렸다가 문간(文簡)으로 개시하였다. 배위 정경부인 한산 이씨(貞敬夫人 韓山 李氏)는 이조판서 효헌공 겸좌(孝憲公:謙佐)의 따님이다.슬하에 2남 4녀를 생하니 장남은 제학공(提學公:光洙)이고 차는 참의공(參議公: 昌洙)인데 증 제학공 윤석(贈 提學公 胤錫)에게 계후입양(系後入養)되었다. 부실에서 유1남하니 명수(明洙)이다.
學長 韓 尙 東(학장 한 상 동)光武 5年(1901~1976) 목사·신학자.경상남도 김해 출신.어려서 한학을 하였고 1910년 다대포실용학교 (多大浦實用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다음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8년 같은 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24년 전도인 박창근 (朴昌根)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가문에서 추방되어 1927년 다대포를 떠나 진주광림학교(晋州光林學校)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1928년 목회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피어선 기념성서학원에서 1년간 신학수업을 하고 나서 1933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졸업하였다. 1938년 10월 24일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에서“현정부는 정의 및 신의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못쓴다.”라고 신사참배 반대설교를 하였는데,이 때부터 경남교회의 신사불참배운동이 시작되었다. 1939년 1월 마산 문창교회로 전임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계속하던 중 마산경찰서 의 압력으로 1939년 3월 교회를 떠나 무임(無任)목사가 되었다. 이후 이인재(李仁宰)·주남선(朱南善)·최상림(崔尙林)·손명복(孫明復)·최덕지(崔德支)등 경남지역 목회자들과 함께 부산·마산·밀양 등지에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다가 1940년 7월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이 검속당할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1945년 광복과 함께 출옥하여 이기선(李基善)목사 등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교회재건을 위한 부홍회를 인도하기도 하였으나 공산당의 방해를 받자 1946년 월남하였다.부산에 도착하여 이미 구상한 바 있는 신학교 설립에 착수하여 주남선·박윤선 (朴允善)등과 함께 1946년 6월 진해에서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부산시 영도구(釜山市 影島區)의 고신대학(高神大學)의 시작이 되었다.그러나 1946년 12월 48회 노회에서 일제치하 경남교구장을 지낸 김길창(金吉昌)목사가 노회장으로 당선되면서 노회는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을 비롯한 고려신학교측 목회 자들은 경남노회를 탈퇴하여 1951년 경남 법통노회를 조직하였고 195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를 결성함으로써 세칭 고려파 예장총회가 조직되었다.이후 1960년 12월 이른바 예장 합동측 장로교단이 형성되었을 때 총회장에 당선되기도 하였으나 고려신학교가 서울의 장로회총회신학교와 합동됨으로써 애초에 신학교를 설립할 때 표명한 신학 교육의 정신이 흐려질까 우려하여 1963년 홍반식·오병세·이근삼 등과 함께 고려신학 교의 재건 및 교단환원운동을 주도하였다. 1969년 고려신학교 제9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1970년 고려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 을 당시 초대학장에 취임하였으며,1974년 1월 은퇴하여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어 일선 에서 물러날 때까지 신학교 및 교단 발전에 진력하였다.저서로는《주님의 사랑》과 설교집인《신앙세계와 천국》01 있다. 1976년에 졸하였다. 지금은 고신대학교(高神大學校)로 승격(昇格)되었다. 1997년 11월 한상동기념관(韓尙東記念館)이 세워졌다.
韓 路 檀(한 노 단)19l2~1985.(극작가·영문학자) 본명은 효동(孝東).서울출생.연극현장에서 보다는 대학강단에서 주로 활동하였다.일본 와세다대학(早稍田大學)영문과에서 셰익스피어·영미희곡을 공부하였다. 대학졸업 직후 중동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 는 한편 극작과 연출에 간간이 참여하기도 하였다.1943년 극단 성군(星群)에 참여하여 처음으로《신곡제》라는 작품을 연출하여 연극 경연대회에 참관한데 이어 광복(光復)후에는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서 셰익스피어와 영미희 곡론을 강의하면서 희곡창작과 번역에 주력하 였다. 과작이기는 하여도 죽기 전까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였는데,광복 직후에 무대에 올 려진 장막극〈전원비곡 田園悲曲〉을 비롯해서〈청홍소동〉〈교류〉·〈전유화〉·〈신바람 〉·〈초립동〉등을 발표한 바 있다.창작과 함께 각색과 셰익스피어 번역에도 주력하여 〈여성전선〉·〈자유부인〉·〈금삼의 피〉등을 각색하였고,〈햄릿〉·〈리어왕〉·〈오별로〉등 을 번역하기도 하였다.그의 작품은 대체로 그리스비극의 영향을 받았고,그렇기 때문 에 정통적인 극술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비록 부산대학교를 비롯한 동아대학교·국제대학 등 교직에 봉직하였지만,연극계의 이면에서 도움을 적잖이 준 연극인이다.즉,극단 신협이 피난시절에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원인 중에 한노단의 후원은 무시못할 것이다. 영문학자로서 희곡이론에도 밝아《희곡론》(1973)이라는 저서를 내놓은 바 있다. 포라이타크의《희곡의 기술》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이는 이 저서는 신극사상 최초의 본격 희곡개론서이기도 하다.
韓 仁 澤(한 인 택) 1903~1937.(소설가) 호는 보운(步雲).함경남도 이원 출생.상학(常學)의 맏아들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으며,한때 상업에 종사하다가 화신 연쇄점주식회사(和信連銷店妹式會社)의 편집계에 근무하였다. 1930년 처녀작〈동무들〉을《동아일보》에 연재하였으며,장편소설〈선풍시대 旋風 時代〉가《조선일보》에 1등으로 당선,연재되었다(1931.11.~1932.4.23). 그 뒤 단편〈고향 故椰〉(批判,1932)·〈파탄 破綻〉(女性朝鮮,1933)·〈모자 母子 〉(戰線,1934)·〈문인과 거지〉(朝鮮文學,1934)·〈월급날〉(新家庭,1934)·〈구부러 진 평행선〉(新東亞,1934)·〈상흔傷浪〉(新東亞,1934)·〈노선생老先生〉(朝鮮日報,1934.12.5.~1934.12.15)등을 발표하였고,〈선풍시대〉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선풍이후 旋風以後〉(新東亞 42,1935.4.)를 연재하였으며,〈모반자〉(農民,1935)·〈불우여인 不遇女人〉(新東亞,1935.6)·〈잃어버린 여우〉(新文學,1935)·〈마희 魔戱〉(新東亞,1935.5.)·〈해직사령 解職辭令〉(新東亞,1936.2.)·〈그 남자의 반생기(半生記)〉(朝鮮文學,1976)·〈탈출이후 脫出以後〉(新東亞,1936.9.)·〈크러취의 비가(悲歌)〉(朝光,1936.12.)·〈어화 漁火〉등 주로 경향적작품(傾向的作品)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선풍시대〉는 신문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고, 작품의 내용이 새로운 인물을 다루고 있어 꿈과 낭만에 홍분하여 있던 당시 젊은 독자 들을 매혹하게 한 소설이다. 이 밖에도〈괴로운 즐거움〉(朝光,1938.2.)·〈여사감(女舍監)과 송서방(宋書房)〉(野談.1939.4.)·〈보리밭 삽화(揷話)〉(1938)·〈뻐국새〉(1938)등의 작품이 있다.
韓 黑 關(한 흑 구)1909~1979.(수필가·번역문학가) 본명은 세광(世光).평양 출생. 1928년 숭인상업학교(崇仁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상과에 입학하였다.1929년 도미하여 시카고의 노스파크대학에서 영문학을,템플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였다. 수필〈젊은시절〉,시〈북미대륙방랑시편〉을《동광 東光》에 발표하는 한편,홍콩에 서 발간되던《대한민보 大韓民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였다. 종합지《대평양 太平洋》(1934)과 문예지《백광 白光》을 창간·주재한 것으로 전 하여진다.미국에 유학할 때 동인지에 영시를 쓰고 펠라델피아의 신문에 동양시사평론을 기고하 기도 하였으며,〈호텔콘〉(1932)·〈어떤 젊은 예술가(藝術家)〉(1935)·〈사형제 四兄弟 〉(1936)등 다수의 소설 창작과 함께 시작과 번역·평론을 병행하였다.1939년 홍사 단사건에 연루되어 피검된 일을 계기로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광복 후 1945년 월남하여 수필창작에 주력하면서 1948년에 서울에서 포항으로 거처 를 옮겼으며,이 무렵부터〈최근의 미국문단〉(1947)·〈이마지스트의 시운동〉·〈흑인문 학의 지위〉(1948)·〈윌터횟트맨론〉(1950)등 미국문학 및 작가론에 대한 평론을 발표 하였는데,특히《동광》·《개벽 開關》등에 흑인시를 최초로 번역,소개한 대표적인 전선자(轉信者)로 일컬어진다.저서로《현대미국시선 現代美國詩選》을 번역하여 1949년 선문사(宣文社)에서 출간하였다.〈하늘〉·〈바다〉·〈사랑〉(1949)을 위시하여〈 눈〉·〈보리〉(1955)·〈노년 老年〉(1965)·〈갈매기〉(1969)·〈겨울바다〉·〈석류 石榴 〉(1971)·〈들밖에 벼향기 드높을 때〉(1973)·〈흙〉(1974)등 100여편의 수필을 남겼 으며,수필집《동해산문 東海散文》(1971)과《인생산문 人生散文》(1974)을 각각 일지사(-志社)에서 출간하였다. 1958년부터 포항수산대학(浦項水産大學)교수로 재직하다가 1974년 동교에서 정년 퇴임하였다.자연물로부터 소재를 가져온 그의 작품은 서정적인 문장과 산문시적 구성 으로 아름다움의 진실을 추구하고 있으며,생명의 존엄성과 다른 생명체와 동등한 존재 로서의 인간의 겸손에 관심을 표명하였다.시적 구성의 아름다움과 작품에 일관하는 인생에의 관조는 한국수펠문학이 창작문학의 본령으로 자리를 굳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는 평가를 받는다.
韓 泌 錫(한 심 석)1913~1984.(의학자.교육자)평안남도 강서출신.1938년 경성제국대학 1부를 졸업하고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동대학 미생물학교실 조교.1945년부터 1970년까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냈다.1955년부터 1956년까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 내과학을 연구하였다.1943년 경성제국대학에서〈경성(京城)에서 유행하는 디프테리아 균형에관한 연구〉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64년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장 지내고,1965년에 대한병원협회 회장과 대한내과학과회장을 지냈다.「1970년서울대학교 총장,1979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그는 우리나라 내과학의 최고권위자로 그간 30여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고,1960 년 대한의학협회에서 제1회 학술상,학술원 공로상,정부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 고,여러 공직에도 참여하였다.또,그는 기독교신자였고 정년퇴직 이후에도 후진을 양성하였고,한가한 틈이 있으면 역사학에 대한 독서와 낚시로 여가를 보냈다.
韓 何 雲(한 하 운) 1919~1975.(시인) 본명은 태영(泰永).함경남도 함주 출신.종규(鍾奎)의 아들이다.1932년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1937년 동경 세이케이고등학교(成蹊高等學校)2년을 수료하였다.그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나병)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 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그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유랑의 생활을 하였다.그뒤 자신의 투병생활과 함께 1950년 성혜원(成蹊園),1952년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등을 설립,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그 뒤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도 경영한 바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활동은,1949년 이병철 (李秉哲)의 소개로《신천지 新天地》4월호에〈전라도길〉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 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시집《한하운시초》를,1955년에는 제2시집《보리피리》를,1956년 에는《한하운시전집》을 펴냈다.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그 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성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 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또한,혼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자서전《나의 슬픈 반생기》(1957),자작시해설집《황톳길》(1960),《정본(正本)한하운시집》(1966)등이 었다. 한하운시초 韓何雲詩妙 한하운(韓何雲)의 제1시집. 변형 A5판,70면.1949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되었다. 〈전라도길〉·〈손가락 한마디〉·〈벌〉·〈목숨〉·〈삶〉등 25편의 시와,그를 시단에 소 개한 이병철(李秉哲)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 나올 때 한하운은 방랑생활 중인 나병환자였다.따라서,이 시집과 그 뒤 에 발표된 그의 모든 시에는 나병환자라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그에 따른 처절한 체 험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그 체험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것이기에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만,한하운은 감상을 자제하고 그것을 객관화함으로써 표현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소록도로 가는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전라도길〉에는 이러한 특정이 잘 드러나 있다.특히,이 시의 제5연“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는 대목은 제6연의“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과 더불어 환자의 나병이 절망적 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 언어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하는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다.이러한 객관성은 환자의 비통한 체험에 대한 상상적 추체험(想像的 追體驗)을 심화시 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 시집에는 또 처참하게 버림받은 자의 애절힌 꿈을 민요적 가락으로 읊은 시도 수록되어 있다. 〈파랑새〉라는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소월시(素月詩)의 민요적 기풍을 방불하게 하는 이러한 경향은 제2시집《보리피리》에 수록되어 있는〈보리피리〉에도 계속 이어 지고 있다. 이 시집은 한국 신문학사에 등장한 최초의 나환자 시집으로서 특이한 체험을 객관적인 어조로 혹은 민요적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大學院長 韓 萬 春(대학원장-한 만 춘)(1921~1984) 32世 선생은 과학자(科學者)이다.휘(諱)는 만춘 (萬春)이고 독립운동가 기악(獨立運動家 基岳) 의 아들이고 교리공 정우(校理公 正愚)의 손자 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禮)의 18대손이다.1943년 경성제국대학교 이공학부 전기공학과 (京城諸國大學校 理工學部 電氣工學科)를 졸업 하고 1961년 영국(英國)노팅엄(Nottingham) 대학에서 공학박사(工學博士)학위를 받았다. 1943년 조선전기(朝鮮電氣)에 입사(入社)한 이후 발전과장(發電課長).기획과장(企劃課長) 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주로 대학에서 교수(敎授)활동을 하였다.1948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1952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1958년 인하공과대학 에서 강의를 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교수로 이공대학장,산업대학원장(産業大學院長),산업기술연구소장(産業技術硏究所長)등을 지냈으며 재직중 전기공학부문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1963년 김준현(金俊鉉)과 공동으로《배전공학(配電工學)》을,1964 년 안희도(安熙道)와 공동으로《발전공학(發電工學)》을 발간하였으며 1973년《전기통론연습(電氣通論演習)》을 발간하였다. 1981년《전산학개론(電算學搬論)》,《자동제어 시스템》등의 저서를 남겼다.또 한 학회활동도 활발하여 대한전기학회 이사,회장을 역임하였고 산학협동(産學協同)에 도 앞장서 전국경제인 연합회 기술조사센터자문위원,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기술 검정공단이사와 정부시책평가교수,동력자원부 정책자문위원도 지냈다. 교육,산업부문의 활동으로 국민훈장 동백장,동탑 산업훈장,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학술원 정회원에 선임되었다. 1984년에 졸하였다. 배위(配位)는 한산인 이정구(韓山人 李正求)의 따님으로 1923년 9월 28일 생이며 아들은 민구(民九),인구(仁九)이다.
韓 時 覺(한 시 각)1621(광해군 13년~?) 조선 중기의 화가.자는 자유(子裕),호는 설탄(雪灘).화원(畵員)으로 통정을 지낸 선국(善國)의 아들이며,사과(司果)를 지낸 시진(時振)의 형이고,화원 이명욱(李明都) 의 장인이다. 그 역시 화원(畵員)출신으로 도화서(圖畵暑)의 교수를 지냈다.1651년(효종 2)김명국(金明國)등 여러 화원과 함께 현종 명성후(顯宗 明聖后)가례반차도(嘉禮班次圖) 제작에 참여하였고,1655년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일본사행중 묵죽(墨竹)을 비롯하여 종사관 남용익(南龍翼)의 기행시화첩인《부상시화첩 扶桑詩畵帖》을 위하여 그곳의 실경을 그리기도 하였다.1682년(숙종 8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의 초상을 그렸는데,현존하는 작품은 모사본 으로 추측되기도 한다.그는 인물과 계화(界畵)·산수에 모두 능하였으며,특히 도일화원(渡日畵員)이었던 김명국과 마찬가지로 17세기 화단에 감필법(減筆法)으로 처리된 선종화(禪宗畵)를 남기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남긴〈포대도 布垈圖)〉등의 선종화는 그 당시 일본에서 풍미하던 것으로 그의 도일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이밖의 함경도에서 특별히 실시되었던 문무양시의 장면을 그런〈북새선은도 北塞宣恩圖〉는 인물과 건물의 묘사가 정확하고 활달하여 그의사실력을 보여준다.
韓 性 祺(한 성 기)1923~1984.시인 본관은 청주(淸州).함경남도 정평 출생.아버지는 탁영(鐸英),어머니는 이만길(李萬吉) 이다.1942년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충청남도로 발령을 받았다. 1944년 일본 문부성에서 시행하는 고등학교 교사자격 검정시험 서예과(書藝科)에 합격하였으며,1947년부터 대전사범학교에서 15년간 근무하였다.한때 신병으로 입산한 일이 있으나 계속 대전근교에서 죽을 때까지 시 창작에 전념하였다.한국문인협회 대전지부장을 역임 하였다.1952년《문예 文藝》(5·6합병호)에 시〈 역 驛〉과 1953년〈병후 病後〉등으로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그뒤《현대문학》 에〈아이들〉·〈꽃병〉(1955)으로 다시 추천을 받았다. 그뒤〈차중에서〉(現代文學,1955.7.)·〈도시 都市〉(文學藝術,1955.8.)·〈새벽〉(現代文學,1955.12.)·〈길〉(現代文學,1956.11.)등 역작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그의 시의 특징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사색적 탐구가 아닌 관조에 의한 하나하나의 새로운 발견과 재구성을 보여주며 참신성과 경이감을 풍긴다.“눈이 오고/비가 오고· //아득한 로선(路線)뒤에/없는듯 있는듯/거기 조그만 역(驛)처럼 내가 있다.”(‘역’ 에서)와 같이 일단 대상을 분리시켜 차분히 관조한 다음 자아와의 웅합을 시도한다. 제1시집《산에서》(培英社,1963)를 출간하였으나 문단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이어 제2시집《낙향 이후 落鄕以後》(活文社,1969)를 발간하였다.이 시집에는 약 20여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입산정양한 시기의 작품으로 거의 산과 나무·새 등을 제재로 하고 있다. 그밖의 시집으로는 제3시집《실향 失鄕》(現代文學史,1972),제4시집《구암리 九岩里》(1975),제5시집《늦바람》01 있고,《낙향이후》시선집으로《한성기시선 韓性祺時選》(1982)등이 있다.충청남도문화상(1965)·한국문학상(1975)·조연현문학상(1983)을 수상하였다.
韓 州 稿(한 주 고) 조선후기의 학자 이 집(李 潗)의 시문집.영본(零本)7책.팔사본.서와 발이 없어 자세한 경위를 알 수 없다.권1~6은 사(詞)1편,부(賦)2편 시 1,100여 수,권 7~17은 결본,권 18~21은 서(書)192편,별폭(別幅),별지(別紙),권22·23은 결본,권 24~26은 제문 56편, 축문 2편,애사 8편,뇌사2편,권27은 행장 4편,가장 1편,훈록(訓錄),잡저 1편,고사(告辭)7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시는 방대한 분량으로 벗들과의 화작과 만시,유람시와 영물시 등 다양하고 특색있는 소재로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부 중에 〈등고부 登高賦〉와〈연적화부 硯適花賦〉는 유려한 필치가 돋보이고,시 가운데는〈낙계 십경 樂溪十景〉·〈서호주중 西湖周中〉등의 연작시가 많다.〈야화 野花〉·〈효우 曉雨 〉·〈유학 留鶴〉·〈삼월매 三月梅〉등의 작품은 계절의 흥취에 얹어 경물을 옮은 서정성 짙은 작품들이다.그밖에〈진주담 眞珠潭〉·〈입만폭동 入萬爆洞〉·〈삼일포三日浦〉등 금강산 등지를 유람하며 지은 작품도 다수 있다.서(書)에는 심정로(沁‘廷老)·정 건(鄭 鍵)·이방언(李邦彦)·이희조(李喜朝)·김창집(金昌集)·민진원(閔鎭遠)·박필주(朴弼 周)·이 재(李 縡)등 당대 명망 높던 문인·학자들과 도서(圖書)·비문·의례(擬禮) 및 과거시험의 동향 등 다양한 내용으로 내왕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이 가운데〈답우상서 答右相書〉는 1719년(숙종 45)저자가 이천부사(利川府使)재직시 보낸 것으로 끝에〈이천부호적전결도수 책자 利川府戶籍田結都數冊子〉가 부기되어 있어,당시 이천의 인구와 토지현황을 살피 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또,4편의〈상진활당당상서 上眼恤堂堂上書〉와〈청진곡수어 사민판서서 請賑穀守禦使閔判書書〉는 목민 관으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의 궁핍을 근심하 여 여러 방면으로 조정에 구제시책을 요청 한 글로,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그밖에 당시 당파의 계보 등 정치사 에 참고될 만한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선훈 先訓〉에서는 아버지가 생전에 4형제 에게 베푼 가르침을 정리하였다.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韓 範 洙(한 범 수)1911~1984 대금산조·해금산조·퉁애산조의 명인.충청남도 서산출생.10세 전후에 단소를 배웠고,20세 전후하여 지방명인들로부터 대금산조를 배우다가 박종기(朴鍾基)에게 잠깐 배운 바 있다.박종기와 한주환(韓周煥)의 대금가락을 토대로 하여 한범수류의 대금산조를 개척하였다.1964년 이후 국립국악원의 국악사양성소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로 출강하면서 대금산조를 강의하는 한편,그의 대금산조를 토대로 하여 해금산조를 짜서 해금산조도 강의하였다.그의 문하에서 많은 대금산조·해금산조의 명인이 나왔다.1966년에는 국악예술학교 강사로 있었다.그는 젊어서 유동초(柳東初)로부터 퉁소시나위를 이어받아 퉁소산조도 만들었으나 후계자가 없다.
韓 成 俊(한 성 준)1875 고종 12 ~1941 고수·민속무용가.충청남도 홍성 출생.천호의 아들이다. 7세 때부터 외할아버지 백운채(白雲彩)로부터 춤과 북을 배웠다.14세 때부터 3년간 홍성 서학조(徐學祖)에게 줄타기와 땅재주를 배웠으며,이어 펙산골 수덕산의 박순조 (朴順祚)문하에서 20세가 넘도록 춤과 장단공부를 하였다.1894년 이후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한말에 개관한 원각사(圓覺寺)무대에 출연하게 되면서 서울에 정착하였다.원각사가 없어지게 되자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등의 단체에서 지방을 순회공연 하였다. 이 때 고수로서 15차의 창방(唱枋:콩쿠르)을 치렀으며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정정렬(丁貞烈)등 명창의 고수로 이름을 날렸다.또한,이때 궁중무용에 접하게 되어 후에 태평무(太平舞)·학무 (鶴舞)를 만드는 데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30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고,1934년에는 무용만을 전문하는 조선무용연 구소를 창설하고 제자를 기르는 한편,1935년에는 부민관(府民館)에서「한성준무용공 연회」를 가졌다. 그뒤 일본 동경을 비롯한 주요도시를 순회공연함으로써 무용을 일본에 소개하였고, 1941년에는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는 예술상(藝術賞)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는〈태평무〉〈학무〉〈신선무〉〈삼풀이춤〉〈한량무〉〈사공무〉〈농악무〉등이 있으며,제자로는 김천홍(金千興)김보남(金寶男)이강선(李剛仙)장홍섬(張紅心)한영숙(韓英淑)강선영(姜善泳)이매방(李梅芳)정인방(鄭寅旁)진수방(陳愁旁)김삼화(金三和)등이 있다.
知 濯(지 탁)1750(영조 26)∼1839(헌종5). 조선 후기의 승려. 청주한씨(淸州韓氏). 법호는 화악(華嶽). 삼각산에 오래 머물렀다 하여 삼봉(三峰)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상덕(尙德)이다.견불산 강서사(江西寺)로 출가하여 성붕(性鵬)의 제자가 되었고, 금강산과 보개산(寶蓋山)에 오래 머물렀다. 《수능엄경 首楞嚴經》을 만번 읽고 도를 깨쳤다. 행장에 의하면, 영특하여 불교학에 통달하고 꾸준한 행실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김정희(金正喜)와 교의가 두터웠다.문손(門孫)인 혜소(慧昭)는 《삼봉집 三峰集》 발문에서, “사미(沙彌)때 그를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뵈니, 칠순에 접어들었는데 용모는 단정하고 우아하였으며, 정신은 청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낭랑하고 만면에 자비를 띠고 사람들을 교화하므로 부처의 출세인듯 여겼다.”고 기록하였다.1839년 5월 5일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지장암(地藏庵)에서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한없는 세월 동안 여러 선행을 두루 닦으니,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는 공으로 돌아가네. 자가의 본래 일을 이루지 못하니, 구십년 세월이 허황한 꿈이더라(窮劫歷修諸善行 萬法歸一一歸空 自家本事未成就 九十年充幻夢中).”통도사(通度寺)와 운봉사(雲峰寺)에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고, 100여명 제자 가운데 화담 경화(華潭敬和)가 가장 뛰어났다.저서로는 문집인 《삼봉집》이 있다.
韓 基 昱(한 기 욱)1867(고종 4)∼1922. 민족항일기의 대종교 중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화(景化), 호는 호정(湖亭). 함경북도 경원출생.16세 때 노령(露領) 연추지(延湫地)로 이주하여 개간활동을 하였다.1906년 이상설(李相卨)이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세우자 숙감(塾監)으로 시무하였고, 다음해 연추지에 노령 최초의 한인학교인 선흥의숙(鮮興義塾)을 세워 청년들을 교육하였다.1912년 대종교를 신봉하여 북만(北滿)의 시교원(施敎員)을 자청하고 길림성 의란도 밀산(吉林省依蘭道密山)으로 이주하여 시교당(施敎堂)과 한흥의숙(韓興義塾)을 세웠는데, 북만일대의 한인교당과 학교로서는 이것이 또한 처음이었다.1921년 상교(尙敎)로 승진하였고,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 전리(典理)를 대행하였다.1922년 청구(靑溝) 이북, 연해주 이서의 교무를 맡아서 활동하던 중 비적들의 습격을 받아 가족과 함께 참사를 당하였다. 뒤에 생전의 공적이 인정되어 정교(正敎)로 추승됨과 동시에 대형호(大兄號)가 추증되었다.
韓 夢 弼(한 몽 필)1699(숙종 25)∼1782(정조 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언(代言), 호는 유헌(楡軒). 종성출생.아버지는 세혁(世赫)이며, 어머니는 평강채씨(平康蔡氏)로 정한(挺漢)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연원인 맏형 몽린(夢麟)에게 수학하여 경전(經傳)·전례(典禮)·성리학(性理學)·상수(象數) 등에 두루 정통하였다. 송시함(宋時涵)·유의양(柳義養)과 교유를 맺었다.1733년(영조 9) 증광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748년 학행으로 관찰사의 추천을 받아 희릉참봉(禧陵參奉)을 비롯하여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사도시주부(司#도42寺主簿)·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다.1754년 함창현감으로 있을 때 거듭 흉년이 들자 관고(官庫)를 열고 자신의 봉급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으며, 그 지방민이 송덕비를 세웠다.1758년 향리에 돌아가 은거하면서 경사(經史)·성리학·예학을 연구하며 후진교육에 힘썼다.1762년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773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저서로는 《유헌유고》 1책이 있다.
韓 範 洙(한 범 수)1911∼1984. 대금산조·해금산조·퉁애산조의 명인. 본관은 청주(淸州). 충청남도 서산출생.10세 전후에 단소를 배웠고, 20세 전후하여 지방명인들로부터 대금산조를 배우다가 박종기(朴鍾基)에게 잠깐 배운 바 있다. 박종기와 한주환(韓周煥)의 대금가락을 토대로 하여 한범수류의 대금산조를 개척하였다.1964년 이후 국립국악원의 국악사양성소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로 출강하면서 대금산조를 강의하는 한편, 그의 대금산조를 토대로 하여 해금산조를 짜서 해금산조도 강의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대금산조·해금산조의 명인이 나왔다.1966년에는 국악예술학교 강사로 있었다. 그는 젊어서 유동초(柳東初)로부터 퉁소시나위를 이어받아 퉁소산조도 만들었으나 후계자가 없다.
韓 相 龍(한 상 룡)1880(고종 17)∼? 친일 경제인. 본관은 청주(淸州). 서울출생. 규장각제학 관수(觀洙)의 아들이다.17세 때 관립 영어학교(英語學校)에 입학하였으며, 1899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립 세이조학교(成城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병으로 귀국하였다.1901년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02년 이 학교를 사직하고 평식원(平式院) 총무과장(정3품)에 임명되었다.이듬해 그 직을 사임하고 한성은행(漢城銀行) 우총무 취체역 총무과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성수형조합(漢城手形組合)을 창립하여 평의원이 되었다.1907년 경성상업회의소(京城商業會議所)의 정의원(正議員)·회두(會頭)가 되었고, 1909년 한국은행 설립위원이 되어 은행설립 준비차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갔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 금융계에 종사하여 한성은행의 전무·지배인으로 있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사·고문 등을 역임하였다.뿐만 아니라 각종 경제단체의 임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또한 경성부협의회·일본적십자사·경기도평의원·애국부인회 등 각종 정치·사회 단체의 임원으로 친일적인 행각을 하였다.그리하여 1927년에 중추원참의가 되었으며 각종 친일적인 행사를 주도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평의원으로 친일행위를 하였다.그의 이와같은 친일적 성향으로 일본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이래 수많은 훈장과 포장을 받았다.
韓 善 國(한 선 국)1602(선조 35)∼?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군필(君弼). 도화서(圖畵署)출신의 화원(畵員)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었다 한다. 역시 화원으로 교수(敎授)를 지낸 시각(時覺)은 그의 아들이다.1638년(인조 16) 인조장렬후가례의궤도(仁祖莊烈后嘉禮儀軌圖) 제작에 이징(李澄)·이기룡(李起龍)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유작(遺作)으로는 〈기우도강도 騎牛渡江圖〉(간송미술관 소장)가 알려져 있는데 소나 인물, 배경의 산수화풍이 중기에 유행한 김시(金 제)·이경윤(李慶胤)의 화풍을 따른 것이다.
韓 成 基(한 성 기)1899∼1950. 가야금산조의 명인. 본관은 청주(淸州). 전라남도 강진출생.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의 준기능보유자 한농선(韓弄仙)이 그의 딸이다.16세 때부터 김창조(金昌祖)에게서 산조를 배웠으며 전라남도 지방과 서울 등지에서 가야금 연주활동을 하며 제자들에게 전수시켰다.1930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 동경에서 거주하면서 오케(Okeh)레코드에 가야금산조를 취입하는 등 연주활동을 해왔다. 제자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기능보유자인 김죽파(金竹坡)가 있어 약간의 가락이 전해지고 있다.
韓 은(한 은)1619(광해군 11)∼1688(숙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징(仲澄), 호는 만은(漫隱). 인조 때 참판을 지낸 형길(亨吉)의 아들이다.성장하면서 학업에 힘썼으며, 허후(許厚)와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버리고 뜻을 경전(經傳)에 두었으며, 특히 《중용》을 중히 여겨 힘껏 공부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효행으로써 그를 조정에 천거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을 받았으나 벼슬이 뜻에 맞지 않는다고 출사하지 않았다.1675년(숙종 1) 이후 권고를 받고 남대(南臺)에 들어갔다가 1679년에 다시 지평·장령·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동안 특별한 유시가 있었으나 병을 핑계로 정사(政事)에는 한마디도 언급함이 없었다.평소에 명성이 높아 경신변국 이후 상신(相臣) 김수흥(金壽興)·이후정(李后定) 등의 추천을 받는 등 자주 천거된 바 있다. 그의 논의와 씩씩한 기상은 소인배가 흉내낼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그리하여 이와같은 사람은 별도로 포상하여 풍속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여 1685년부터 1687년까지 연이어 집의를 제수한 것이 여섯 차례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언젠가 문인(門人)이었던 감사 권흠(權欽)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사화(士禍)가 많아 유술(儒術)에 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단지 학문이 아직 미숙한데 이름을 앞서 퍼뜨리려고, 덕(德)도 미처 쌓지 못한데 책임이 먼저 무겁기 때문에 행동이 꺾이고 팔목잡힐 일을 저질러 간사하고 아첨하는 데 물들게 되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즉, 지금은 당론이 셋으로 나뉘어 예론(禮論)이 대단히 심하다. 필시 사람을 해치는 계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그가 젊었을 때 당(堂)을 일휴(日休)라고 이름하였으나 허목이 만은(晩隱)이라 하여 서신을 보냈기에 그대로 이를 호로 하였다.만은공행장
韓 哲 浩(한 철 호)1782(정조 6)∼1862(철종 13).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로(明老), 호는 보산(寶山). 아버지는 광진(光鎭)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명휘(命徽)의 딸이다.1825년(순조 2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27년 조경묘별검(肇慶廟別檢)으로 기용되었다.그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사헌부지평을 거쳐 1836년(헌종 2) 이조정랑이 되었다.이듬해 강령현감(康翎縣監)으로 나갔는데, 민정을 보살핀 공으로 이듬해 해주진관으로 옮겼다.1841년 선시관(宣諡官)이 되어 해주에 다녀오고, 1843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내고 과만이 되자 향리로 돌아갔다.1854년(철종 5)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862년 병조참의가 제수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말년에는 보산에 서당을 지어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저서로는 《보산집》 4권이 있다.
韓 昌 洙(한 창 수)1862(철종 13)∼? 조선 말기의 관료. 본관은 청주(淸州). 서울출생. 대제학 장석(章錫)의 아들로 내각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제학 윤석(胤錫)에게 입양되었다.1888년(고종 25) 8월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9월 승정원의 가주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고, 1893년에는 검열, 1894년 동부승지·예조참의·우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였다.1895년 4월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판사(判事)가 되었으나 갑오·을미 개혁시기에 관제가 개정되었을 때 학부학무국장(學部學務局長)이 되어 학부의 주요한 업무를 맡았고, 같은해 10월 14일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교장직을 겸임하였으며 1897년에 외국어학교 교장직도 겸섭하였다.또한,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1898년 6월 주차 영국·독일·이탈리아공사관〔駐箚英獨伊公使館〕의 3등 참서관(三等參書官)으로 약 1년 동안 근무한 바 있다.1899년 외교문제를 실무적으로 처리하는 외부참서관(外部參書官)이 되었고, 1900년 이후에는 창원감리 겸 부윤(昌原監理兼府尹)·중추원의관·무안감리(務安監理) 등의 여러 관직을 지냈다.또한, 1906년에는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1월에는 의정부외사국장(議政府外事局長)이 되어 외부의 실무적인 업무를 담당하였고 11월에는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이 되었으며 형법교정관(刑法校正官)으로서도 활약한 바 있다.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체결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수십년간 친일적인 언행을 자행하여 국민의 빈축을 샀다.1907년 이후 증보문헌비고감인위원장(增補文獻備考監印委員長)·문관전고위원장(文官銓考委員長)·내각서기관장·내각부동산법조사위원(內閣不動産法調査委員)·각부 관제조사위원장(各部官制調査委員長)·문관고등전형위원장(文官高等銓衡委員長) 등을 역임하였다.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과 이왕직(李王職)장관을 역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