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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바라밀경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지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들 천이백오십 사람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밥때( )가 되자 가사( )를 수( )하시고 바리때를 드시고 사위성으로 들어가시어 그 성 안에서 밥을 비실 적에 차례로 빌어 빌기를 마치시고는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진지를 잡수시고 나서 가사와 바리때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강설) 이 대목은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회상하면서 한 말이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시자 여러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생기므로 이 폐단을 막기 위해 많은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잘 기억하는 아난존자로 하여금 부처님 말씀을 외우게 하고 대중은 듣고서 틀림이 없음을 재확인하는 사업을 벌였으니 이를 (결집)이라 하는데 이 대목은 (아난)존자가 결집의 형식에 맞추어 한 말씀이다.
이와 같이라 함은 틀림없다는 뜻이요, 내가 들었다 함은 아난 자신이 들었을 뿐이요 결코 자기의 견해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 말이다.
어느 때라 함은 부처님이 말씀하시고 청중이 듣던 그 시각을 가리키는 말이니 여러 국토와 중생들의 시간 단위가 다르므로 그저 어느 때라고 하였다.
사위국은 풍성한 문명이라 번역하며 그 때 부처님이 계시던
코살라 나라의 서울이었다. 그러므로 코살라국이라 해야 옳겠지만 그 때 인도 남쪽에 또 다른 코살라라는 나라가 있었으므로 이 나라는 그 수도의 이름으로 나라의 명칭을 삼는 것이 상례였다.
기수급고독원은 절 이름이니 기수는 기타태자가 시주한 숲이란 뜻이요, 급고독원은 급고독원이란 장자가 시주한 절이란 뜻이다.
급고독원은 수달다를 번역한 말인데 당시에 생존했던 장자로서 불쌍한 이에게 보시를 많이 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원이란 중원의 약자로서 절을 뜻하니 중원은 승가람을 번역한 말이다. 수달장자가 부처님께 절을 지어 드리려는데 그 후보지는 제타태자의 소유여서 그를 팔라고 청했다. 그러나 태자는 팔 의사가 없어서 엄청난 값을 불러 장난을 했다. 그러나 장자는 거침없이 그 많은 값을 내고서라도 사겠다 하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전 인류의 스승이신 부처님께 절을 헌납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감동이 된 태자는 그 지상물인 숲 값은 감면하고 자기의 이름으로 헌납할 것을 제의하자 이를 수락하여 제타태자의 숲과 급고독 장자가 세운 절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큰 (비구)라 함은 덕 높고 점잖은 비구란 뜻이니 비구는 (포마),(정계),(걸사)의 세 가지 뜻이 있다. 포마는 악마를 겁나게 하는 이라난 뜻이요, 정계는 계행을 깨끗이 지닌다는 뜻이요, 걸사는 걸식으로 삶을 이어간다는 뜻이니 부처님의 제자 중 (성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이백오십사람이라 함은 이 경을 말씀하실 때 당시에 있던 제자들은 다 모였음을 뜻하니 처음에 (교진여) 등 다섯 사람이 제도 되었고 다음에 (가섭파)등 삼형제를 합친 일당 천사람을 제도하셨고, 세 번째로 (사리불)등 이백사람을 제도하셨고, 마지막으로 (야사)등 오십 사람을 제도하셔서 정확히 말하면 1,255명이지만 대충 말씀하신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 하는 것이니 극히 조직적 이면서도 이론적인 면이 있다. 이 형식은 어느 경에나 첫 머리에 두어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옮기노라 한 아난존자의 뜻을 밝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하였으므로 이 부분을 (증신서) 또는 (통서)라 한다. 따라서 이 증신서에는 대체로 여섯 구분이 있어 이를 육성취의 법이라 하는데 육성취란 여섯 가지 조건이 구비함으로써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
①이와 같이 틀림없다는 뜻이요
②내가 들었을 뿐이요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함이요
③어느 때라고 함은 시간이요
④부처님이라 함은 말씀의 주인이요
⑤사위국 기수급고독원이라 함은 장소요
⑥천 이백 오십 사람이라 함은 대중이니 이 여섯 가지는 마치 (현대논리)에서 육하원칙과 같다 하겠다.
그 때 이하로는 위의 증신서에 대하여 별서라 하니 이경의 동기로서 특징 지을 수 있는 부분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증신서의 부분은 모든 경에 공통되었지만 별서의 부분은 그 경마다 부처님이 그 경을 말씀하시게 된 동기가 다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이야 말로 이 경의 동기라 해야 할 것이니 이 경의 동기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진지를 드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신 일이다.
그 때라 함은 부처님과 대중이 다 한 자리에 모였던 때요, 세존이라 함은 십호 중 하나로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란 뜻이요.
밥 때라 함은 진지를 잡수실 시각이니 (사시) 즉 10시,11시 사이이다. 옷이라 함은 가사이니 부처님이나 제자들이 입는 법복이다. 법복에는 (안타회)와 (울다라승)과 (승가리)의 세 종류가 있는데 외출하실 때 입는 옷은 승가리다.
바리때라 함은 (발다라)의 우리말이니 한자로는 (응량기)라 번역하며 분량과 색깔이 모두 법도에 맞는 그릇이라는 뜻이어서 부처님이나 스님들의 밥그릇이다.
사위성이라 함은 위에서 말한 코살라 나라의 서울을 가리킨 말이요, 밥은 비신다 함은 부처님과 (승단)의 생활은 (걸식)으로 유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니 이는 첫째로 밥을 빌어 먹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상대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을 교화하게 되며 또 자기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제거한다 하였으니 이 일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다. 차례로 빈다함은 한 번 걸식을 나가면 일곱 집 이상을 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가난한 집을 빼거나 부잣집을 찾거나 하면 평등치 못한 행위가 되므로 차례로 빌어서 계율을 준수하는 준엄한 자세를 보여주신 것이다.
빌기를 마쳤다 함은 일곱 집이 다 찼다는 뜻이니 이는 밥의 분량을 표준한 말이 아니다.계시던 곳이라 함은 본래의 자리이니 많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기 위함이요
가사와 바리때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셨다 함은 이제까지의 활동을 중지하고 곧 이어 (선정)에 드실 준비를 하시기 위해서 이니 부처님은 더러움이 다 하셔서 발을 씻을 필요가 없지만 세속의 법을 따라 몸을 깨끗이 간직하는 규범을 보이신 것이요,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함은 (길상초)자리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셔서 삼매에 드셨다는 말이니 이는 부처님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인 동시에 이 경이 생길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자리에 앉으신 것이 이 경의 (근원)이 된다는 이유는 이 경은 (지혜) 즉 (반야지)를 개발하는 것이 목적인데 위에서 법도에 맞추어 걸식을 하신 것은 계요, 자리를 하고 앉으신 것은 정이다, 계에 의해 정이 생기고 계와 정이 구족하여야 지혜가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모든 경을 말씀하시려 할 때엔 반드시 선정에 드셨으니 (화엄경)을 말씀 하실 때는 (해인삼매)에 드셨고,(열반경)을 말씀하실 때는 부동삼매에 드셨고,(무량수경)을 말씀하실 때는 (대적정미타삼매)에 드시는 등 무수한 삼매 즉 선정이 있는데 이제 (반야경)에서 드신 선정은 (등지왕삼매)라 부르는 것이다.
②선현이 수행하는 법을 물었다
(과목해설) 선현은 수보리를 번역한 말이니 잘 나타났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많은 제자 가운데 지혜와 행덕이 가장 훌륭한 이 열 분을 뽑아서 십대 제자라고 한다. 곧 선행을 가장 잘 하시는 두타제일 마하가섭존자, 지혜제일인 사리불존자, 신통제일인 목건련존자, 지계제일인 우바리존자, 설법제일 부루나존자, 해공제일 수보리존자, 천안제일 아나율존자, 다문제일 아난존자, 밀행제일 라훌라존자, 논의제일 가전연존자의 열 분이다. 그 가운데 특히 수보리 존자는 공의 이치를 가장 잘 아는 이로서 알려진 분이다.
이 경은 반야지를 개발하는 것이 주안이라 한 것은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이 반야지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공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반야지란 분별하는 의식이 끊어진 절대적인 지혜를 이르는 말이다.
너와 나, 크고 작은, 밝고 어두움 등 상대적인 사변적 지혜 즉 말이나 생각으로 따져서 아는 지혜가 다한 곳에 나타나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것이 공하다는 원리를 알아야 하나니 이 경에서는 시종 모든 것이 없어서 공하다고 되풀이 하여서 아무데도 집착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런 법문을 문답하여야 되므로 특히 수보리 존자께서 나서서 질문을 던져 부처님과의 대화자가 된 것이다.
선현기청분 제2
이 때 점잖은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일어나서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보살들을 잘 염려하여 보호해 주시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해 주십니다. 선부촉 세존이시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키오리까?
(강설)이 때라하면 부처님이 자리를 펴고 앉으신 때요.(점잖다)함은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우두머리인 장노란 뜻이니 수보리존자를 높이는 칭호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은 제자로서 스승께 법을 물으려고 표시하는 예의이니
첫 째 : 자리에서 일어나고
둘 째 : 오른 어깨를 벗고
셋 째 : 오른 무릎을 꿇고
네 째 : 합장하고
다섯째 : 공경히 여쭙는 다섯 가지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합장은 두 손을 모으는 것이니 불교에서 경의를 표하는 의식의 근본이요, 희유는 처음 보는 일 또는 장하십니다. 등의 뜻이 있으니 찬탄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과 입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시하고는 희유하십니다 하였는데 부처님은 걸식에서 돌아오셔서 진지를 드시고 자리에 앉으셨을 뿐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는데 수보리는 무엇을 보았기에 그토록 최상의 탄사를 표했을까? 진리는 언어나 문자 이전에 있기 때문이리라 법대로 걸식을 하시고 다시 자리를 펴고 앉으신 일 그대로가 말없는 설법이요, 사자후인 것이다.
이 심오한 이치를 간파한 수보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희유하십니다. 하였으니 부처님으로서는 뜻밖의 추적자를 만났다고나 할까 어쨌든 이 한마디가 말세에 태어난 우리들로 하여금 무한한 법열을 얻게 해 주신 점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래는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의 그 하나로서 범어 다타아가도의 번역이니
여래의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뜻이다. 우리는 진여와 멀어진 채 살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진여의 모습을 되찾아 진여의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 무엇하려 우리들 앞에 나타나셨는가? 우리들을 교화해 주시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수보리께서도 보살들을 잘 염려하여 보호하시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하신다 하였다.
보살이란 보리살타의 준말이다. 각유정으로 번역되며 각이란 깨달음이요, 유정이란 중생이니 이 두 낱말이 복합된 명사입니다.
이를 다시 세밀히 나누면, 첫째 깨달은 중생, 둘째 중생을 깨우쳐 줌, 셋째 깨달을 중생이 되며 보살은 어느 정도의 수행이 완성되었으므로 깨달은 중생이요, 아직 깜깜한 중생들을 위해서는 헌신적인 봉사로서 그들을 구제해야 하므로 중생을 깨우쳐 주는 이라 하고, 다시 자기의 수행을 완성하려는 욕망도 멈추지 않으므로 깨달은 중생이라 합니다.
보살의 정의가 이러하듯 보살의 세계를 잘 표현하는 말로서 상구보리하화중생( ) -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시는 분이란 말이다.
보살의 서원이 이러하므로 공부가 다 이뤄진 보살들에겐 지혜의 힘을 더 보태주어 자기의 수행이 더욱 깊어지게 하시고 교화하는 방편의 힘을 더 보태주어 자기의 수행이 더욱 깊어지게 하시고 교화하는 방편의 힘을 더 보태주어 중생들을 교화하도록 해 주시므로 잘 염려하여 보호해 주신다 하였고 공부가 아직 익숙하지 못한 보살들은 지혜 있는 보살에게 인권하여 도중에서 후퇴하여 소승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시므로 잘 당부하여 위촉하신다 하였다.
부처님의 이러한 선권방편을 잘 알고 있는 수보리이므로 이 때를 당하여 찬탄하는 말씀을 드리고는 이어 현재나 미래의 어떤 수행자가 수행하는 도움이 될 일을 물었으니 선남자 선여인은 대승의 법을 배우려고 결심한 대장부적 기상이 있는 남녀를 통칭한 말이니 보살이란 말과도 같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범어의 소리번역이니 무상, 정변, 정각이라 번역하여 이를 다시 다른 말로 하면 최고의 진리가 된다. 이러한 최고의 진리를 배우고 닦으려는 마음을 낸 보살이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며 마음을 한 곳에 머물러도 망상이 자꾸 솟아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엔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보살로서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깨달아 얻으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키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서는 부단히 수행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머무르기와 수행은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니 이 두 가지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마음을 항복시키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의 물음은 두 가지이지만 사실은 세 가지를 물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위의 보리유지 삼장이 번역한 금강경에는 이 대목에서 ①어떻게 머무르며②어떻게 수행하며③어떻게 마음을 항복시키리까 하였다. 그렇다면 머무름과 수행은 별문이요, 항복은 총문이 되니 이 세 가지 물음과 이에 따른 대답을 도표로써 예시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수보리야 네 말과 같이 여래는 보살들을 잘 염려하여 보호하시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해 주시나니 자세히 들어라 말해 주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이렇게 머물러 있어야 하며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되느니라.
네 세존이시여 자세히 듣고자 소원이옵니다.
(강설)수보리의 물음에 좋은 말이다. 하신 것은 쾌적한 물음을 해 왔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당시와 미래의 많은 사람들께 이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렇게 머무르고 이렇게 항복시키라 하신 것은 수보리의 물음에 따른 대답을 이렇게 라는 말로 묶어서 예시하신 것이니 즉 다음과 같이 정도로 알면 될 것이다.
그런데 수보리는 만고에 눈 밝은 장로이므로 이 기회를 놓칠세라 예, 예 감사합니다 더 자세히 듣고자 합니다. 하여 말 없는 법의 바다에서 끝없는 파도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마치 영산회상에서 어느 날 부처님이 백만 대중에게 설법하시기 위해 법상으로 오르시니 때마침 문수사리가 대중에 있다가 얼른 얼어나서 사뢰기를 법상의 법을 자세히 살피건대 법왕의 법이란 이러이러 하십니다. 하니 부처님은 이내 자리에서 내려 오셨다는 것과도 같다. 이때 수리불은 무엇을 보았기에 부처님께 그런 찬사를 보냈으며 부처님이 잠자코 자리에서 내려오신 뜻은 또 무엇인가? 오늘 여기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희유하십니다 한 것과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진리는 말 이전의 것이라 하겠다.
③ 부처님이 마음 머무는 법을 보여주심
(과목해설) 위에서 수보리가 물은 두 마디 가운데서 어떻게 머무르리까? 한 것은 다시 세분하여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는가? 어떤 수행을 쌓아야 되는가? 로 나누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항복시키리까? 한 물음은 위 두 가지 일에 모두 공통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제 이 대목은 부처님께서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네 가지 마음에 머무르되 네 모양다리에 걸리는 마음을 항복시키라 하신 내용을 말씀하셨다.
대승정종분 제삼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응당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되나니 이른바 세상에 있는 온갖 중생인 난생, 태생, 습생, 화생과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십류중생)을 내가 모두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도록 하리라 하라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강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보살은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리까?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키리까? 한두 가지 물음에서 첫째 물음에는 마음을 어디에 머무르리까? 하는 뜻과 어떻게 수행을 하리까? 하는 두 부분의 뜻이 있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키리까? 한말은 위의 두 부분에 공통된 방법으로서 총이 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는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안정하려 해도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참된 머무름이 아니요, 마음을 닦으려 해도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참된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키라고 전제하셨으니 이는 보살마하살의 수행 요체이다. 마하살은 큰 보살이란 뜻이니 보살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내용은 어떤가 네 가지 마음에 머물러 여섯 가지 바라밀을 닦되 네 가지 모양다리에 걸리지 말라는 것이다.
네 가지 마음이란 광대한 마음, 으뜸가는 마음, 항상한 마음, 뒤바뀌지 않는 마음이니 보살은 이러한 네 가지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첫째 광대한 마음이란 온갖 중생을 몽땅 제도하려는 생각이다. 중생이란 범어의 살타를 번역한 말로서 유정이라고도 하니 중생이란 뭇 인연에 의하여 살아가는 존재란 뜻이요 유정이라 함은 마음이 있는 생명체란 뜻이다. 유정이건 중생이건 모두가 생명체를 통칭하는 말로서 범부와 성현에 공통하는 말이거니와 대체로 깨닫지 못한 무리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
불교에서는 중생을 12종류로 나누어 태어나는 형태에 의한 분류로서 난생은 알로 낳는 것, 태생은 태로 낳는 것, 습생은 습시에 의하여 낳는 것, 화생은 형체에 구애 없이 이 몸 그대로가 가서 태어나는 것이니 천당이나 지옥에서의 경우와 같다. 다음은 빛깔과 생각이 있고 없음에 따른 분류로서 유색은 빛깔 있는 것, 무색은 빛깔 없는 것, 유상은 생각 있는 것, 무상은 생각 없는 것이요, 다음은 정체가 알송달송한 것을 성분에 따른 분류로서 비유색은 빛깔이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 비무색은 빛깔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 비유상은 생각이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 비무상은 생각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12종류에서 지금은 비유색과 비무색은 생각이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허공이나 토목에 붙은 정령이므로 제외했거니와 나머지 열 가지 종류의 중생만 하더라도 극히 많은 수효이겠는데 이들을 모두 제도하리라 하는 것이니 그 아니 광대한가.
둘째 으뜸가는 마음이란 광대한 마음에 의하여 중생을 제도하되 임시 적당히 끝내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끝까지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 하는 것이다.
무여열반은 더 닦아야 할 일이 조금도 남지 않은 마지막 경지이니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모든 번뇌가 다한 부처님의 경계인 것이다.
열반은 범어의 음역이니 멸도 또는 원적이라 번역하며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12류 중생이 몽땅 이르게 하리라 해야 한다.
셋째 항상한 마음은 중단 없는 마음이다. 광대한 마음, 으뜸가는 마음이 어느 시각까지 존재하다가 중간에 멈추면 보살의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느니라. 하셨으니 마무리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게 하였더라도 내가 그 많은 중생을 제도 했노라 는 생각을 내면 벌써 너와 나의 차별을 느낄 때의 그의 수행은 멈추게 된다. 그러나 항상한 마음에 머무른 보살은 내가 제도한 중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항상 피로할 줄을 모른다.
넷째 뒤바뀌지 않는 마음이니 네 가지 모양다리에 걸리지 않는 마음이 뒤바뀌지 않는 마음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으신 뜻은 무슨 까닭에 자신이 제도한 중생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의 존재를 보지 말아야 영원히 물러나지 않는단 말인가 함이니 그 이유로서는 보살이 네 가지 모양다리에 집착되면 벌써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러면 네 모양다리란 무엇인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니 이는 모두가 (나)라는 고집이 남아 있는 현상들이다.
첫째 아상이란 (나)가 있다는 고집이 남아 있는 현상들이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다섯 가지 쌓임 즉 오온의 임시 집합체일 뿐이요, 실체가 없거늘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공통된 병폐이다.
둘째 인상이란 나는 사람이요 축생이나 귀신이 아니다. 나는 지금의 이 몸으로 장차 인연 따라 육취에 왕래하게 될 것이다 하는 막연한 고집이다.
셋째 중생상이란 나는 오온의 뭇 인연에 의하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고집이니 나에게는 괴로움이나 즐거움 따위가 끊임없이 닥쳐온다고 생각하는 상태이다.
넷째 수자상이란 나는 일정한 기간 동안은 살아있게 되리라는 막연한 고집이니 속담에 하루 죽을 줄 모르고 천년 살줄만 안다는 예와 같다.
이상의 네 가지는 비록 넷이 있으니 결국 (나)가 있다는 생각 하나로 공통되나니 (나)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너를 의식하게 되고 나와 너가 갈릴 때에 절대한 참 이치는 보지 못하고 뒤바뀐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와 같이 뒤바뀐 생각에 빠진 이를 어찌 보살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보살이란 모든 일에 앞서 먼저(나)를 비워야 되나니 (나)를 비우지 않고는 비록 만행을 두루 다 닦아도 모두가 악마의 짓이라 한 옛 어른의 말씀도 있다.
④ 부처님이 마음 닦는 법을 보이심
(과목해설) 위의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가 물은 두 마디 가운데 어떻게 머물러 있어야 하리까? 한 말은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는가? 어떤 수행을 하여야 하는가? 의 두 가지라 했는데 이 대목은 어떤 수행을 하여야 되는가? 에 대한 대답이다.
이 대목에서 보살이 하여야 할 수행으로서는 여섯 가지 바라밀 즉 육도라 하였고 이의 완성을 위하여 네 가지 모양다리에 집착되지 말라 하신다.
묘행무주분 제 사
또 수보리야 보살이 온갖 법에 대하여 마땅히 머물러 있는 생각이 보시를 해야 하나니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 향, 미, 촉, 법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이렇게 보시를 행하여 모양다리에 머물지 않아야 되느니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알 보살이 모양다리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을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동쪽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 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동쪽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 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과 네 간방과 위아래에 있는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 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모양다리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도 그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가르쳐 준대로만 머물지니라.
(강화) 온갖 법은 물질과 정신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이니 일정한 본체와 형태가 있어서 그를 대하는 이로 하여금 어느 일정한 견해를 내게 하므로 법이라 한다.
머무른다 함은 걸린다는 뜻이요, 모양다리라 함은 겉모양 또는 형식 위주의 행동이다.
보시는 범어로 단나의 번역이니 육바라밀의 하나로서 인자한 마음으로 남에게 모든 것을 주어 기쁘게 하는 일이다.
이 보시는 종류로 보아서 ①재시, ②법시, ③무외시로 나누니 재시는 물질의 보시오, 법시는 진리를 일러주는 보시오, 무외시는 안심할 수 있는 안도감을 주는 보시이다.
그리고 보시의 형태로 보아서 유주상보시와 무주상보시가 있으니, 유주상보시는 마음에 보시한다는 자취가 있는 보시오, 무주상보시는 아무런 자취도 없는 즉 머무름이 없는 보시로서 여기서 권장하는 보시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온갖 법에 머물러 있는 생각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하셨다.
그런데 보살이 닦아야 할 덕목이 한량이 없는데 어째서 보시만을 말씀하셨을까 더구나 어떤 수행을 하리까? 한 물음에 대하여 여섯 가지바라밀을 닦으라 하셨다고 하였으니 이 보시와 여섯 가지 바라밀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보시 하나가 여섯 가지 바라밀과 동일하다.
여섯 가지 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이니 보시는 남에게 주는 일, 지계는 계율을 잘 지키는 일, 인욕은 괴로움을 참는 일, 정진은 꾸준히 노력하는 일, 선정은 마음 안정시키는 일, 지혜는 진리를 발견하는 일인데 위의 세 가지 보시와 견주어 보건대 여섯 가지 바라밀의 첫째 보시는 물질 보시요, 지계와 인욕은 무외시이니 계율을 지키고 인욕을 하는 이에겐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요, 정진과 선정과 지혜는 법보시이니 정진, 선정, 지혜를 통하여 바른 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시 한 가지는 육바라밀 나아가서는 보살의 온갖 수행의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온갖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하라 하셨다. 이것이 보살의 수행의 전부이다.
그러면 온갖 법이란 어떤 것들인가? 색, 성, 향, 미, 촉, 법, 육진이다.
색은 빛, 성은 소리, 향은 냄새, 미는 맛, 촉은 촉감, 법은 법진이니 이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양 접촉하는 대상들이다.
이들은 항상 우리들로 하여금 본심을 빼앗기고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도적들이다. 그러므로 온갖 법에 머물지 않는 실제 방법으로서 이들 여섯 가지에 머물지 않을 것을 당부하셨다.
그러면 이런 모양다리들에 머물면 어찌되는가?
첫째. 자기의 소유라는 생각이 나고,
둘째. 지난 일에 대한 대가를 기다리고,
셋째. 미래에 있을 보답을 기다리게 되어 올바른 보시를 할 수 없다.
이들은 모두가 (나)라는 생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네 가지 모양다리이므로 모양다리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하라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즉 어째서 모양다리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라 하는가? 그렇게만 하면 복덕이 한량없기 때문이다.
복덕이란 수행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이니 머무름 없는 보시에 의해 얻어지는 복덕은 너와 나를 따지는 사변적 지혜를 떠나 허공보다 넓은 반야지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모양다리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의 공덕은 시방의 허공보다 크다 하셨다.
(과목 해설) 이 경의 구성 요령은 수보리가 속으로 의심하고 겉으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인데 그 의문의 구비는 무려 27종이다. 이 스물 일곱 겹의 의문은 모두가 앞의 말씀과 연관되어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니 옛 어른들의 말씀에 넝쿨 반야라 한 말이 있는데 실로 적절하다 하겠다.
이 스물 일곱 겹의 의문을 이십칠단의라고 하는데 예부터 금강경을 공부하는 아주 중요한 과제로 되어 왔다.
불멸 천년쯤에 북인도 건타라국에 무착보살이 출현하여 이 금강경의 깊은 뜻을 뒷세상의 중생들에게 쉽게 일러 주기 위해서 일광정이라는 삼매에 드시어 도솔천에 계신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고 80게송을 받아 왔다.
무착보살은 이 게송에 준하여 금강반야론 2권을 짓고 이것을 그의 아우 천친보살 곧 세친에게 전해 주었다.
세친은 다시 금강반야바라밀경론 3권을 짓는 가운데 27가지 의문을 세워서 이 경의 뜻을 바로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삼았던 것이다.
다음에 스물일곱겹의 단의법을 경문 해설과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부처가 되려고 보시하는 것도 모양다리에 걸리는 것 아닌가?
이제 그 첫째 의문으로서 보시를 한다는 것도 모양다리의 것이 아닐까? 하였으니 위의 묘행무주분에서 말씀하시기를 모양다리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 하신 일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보시등 육바라밀을 행하는 목적은 장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부처가 되려는데 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아무데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된다는 말씀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만은 여전히 머무름이며 집착이기 때문이다.
또 설사 모양다리에 머무르지 않는 수행이 이루어졌다 하여도 부처는 분명 32상을 갖춘 인간이시다. 어찌 머무름 없는 수행을 쌓아 모양 있는 부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원인과 결과를 다를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위의 말씀은 상당한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여리실견분 제5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몸매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못 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몸매로서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여래께서 몸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몸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겉모양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양이 모양 아닌 줄 알면 실로 여래를 보리라.
(강화) 이런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부처님은 다정하게 수보리야 하고 부르신 다음 몸매를 여래 즉 부처라 할 수 있겠느냐 하셔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여셨으니 이런 형식을 무문자설이라 한다.
무문자설이란 묻지 않아도 자진해서 말씀해 주신다는 뜻이니 부처님의 자상하심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몸매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하신 뜻은 수보리가 의문에 맞서 그럴 수 없다는 의지를 강력히 보이신 말씀이다.
따라서 몸매란 말은 원문의 신상을 번역한 말이니 몸의 안팎 모양 즉 부처님의 서른 두 가지 뛰어난 모습을 뜻한다. 서른 두 가지 모습(32상)이라함은 정상육계로부터 족하평면에 이르는 특이한 부분들이니 부처님이나 전륜성왕에게만 갖추었다.
그러므로 이 경 뒷부분에 가서는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하시기도 하였다.
부처님의 이러한 내심을 잘 아는 수보리는 지체 없이 못하옵니다. 하고는 이어 무슨 까닭인가 하는 스스로의 질문을 붙여 풀이하였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몸매란 것은 겉 모양다리를 떠나서 실제로 존재하는 청정법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부처는 몸매가 있을 것이다 했던 것은 사실 수보리 자신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다그쳐 물으심을 받아 얼른 기선을 돌려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에게 물으신 부처의 32상이 구족한 모양다리의 부처인데 내가 지금 알기로는 부처는 모양다리 없는 청정법신이여야 되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대답하셨으니 가위 우문현답이라 하겠다.
수보리의 이 말씀은 부처님이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수보리의 말씀을 인가하시고 또 강조하는 뜻에서 게송 하나를 말씀해 주셨으니 게는 범어로 가타의 음성 번역이요 송은 게의 뜻 번역이니 운문체의 문장이란 듯으로서 이런 경우를 화범쌍창이라 한다. 화범쌍창이라 함은 동일한 내용을 중화의 말과 범어로 동시에 제창한다는 뜻이니 게는 범어요 송은 중국말이기 때문이다.
게송은 경전 구조의 한 부분으로서 경전의 교리나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데 쓰인 운문체의 부분이다. 여기에는 본문에 있던 것을 정리해서 운문으로 바꾸어 좋은 경우도 있고 분문과는 관계없는 사실이 게송으로만 나타나는 두 가지 사례가 있으니 전자를 응송이라 하고 후자를 고기송이라 한다.
그런데 경 하나에는 여러 게송이 나오는 것이 상례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하는 것을 사구게라 한다. 이 경은 지금의 이 게송을 사구게라 하니 예부터 많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이 사구게를 분석하면 첫째와 둘째 구절은 현실의 허망함을 말씀하시고 셋째와 넷째 구절은 허망한 내면에 허망치 않는 존재 이 사구게는 이 경의 골수 일 뿐 아니라 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성 싶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에 공, 가, 중 삼제의 원칙에 의한다.
공은 모든 현실을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모든 물건을 부수거나 태워버린 뒤에 허공의 상태가 되는 완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 모두가 잠시 인연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요 절대한 실체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에 가는 유라고 하니 공의 경우의 반대 현상이다. 모든 사물이 공한 자리에, 모든 사물의 현상은 그대로 임시 거짓으로 모인 인연이 존속하는 한 존속함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공의 반대 현상인 유이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흔히 있다고 말하는 따위의 완유는 아니다.
마지막의 중은 중도이니 공인 동시에 유요 유인 동시에 공임을 바로 알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공묘유를 말한다.
한 개의 거울로써 예를 들자 거울 속의 그림자는 아무리 울긋불긋 하여도 모두가 실체가 공하다. 그 공하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거울에 일시적인 인연에 맞아서 한 사물이 비친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다음 거울 속의 그림자가 공하여 실체가 없는 것임은 알았으니 엄연히 비쳐진 그림자는 분명 다양하고 그 다양한 그림자는 보는 이의 감정을 돋우기도 낮추기도 자재자유한다. 그러므로 아주 없다는 생각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있는 그림자의 상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가이다.
그렇다면 거울속의 그림자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나 현실로는 없지 않으니 없는 듯 하되 있고 있는 듯 하되 없다. 그러므로 공이라 할 때에 공에 치우치지 않고 가유를 전제한 공이어야 하며 있다할 때에 있다는 사실에만 치우치지 말고 공을 전제한 가유이어야 한다.
이렇게 바르게 보는 방법이 곧 중도이다.
이제 이 경의 사구게를 풀이 하였거니와 다시 삼제에 의하여 쪼개어 보면 첫째와 둘째 구절은 공이요, 셋째 구절을 가요, 넷째 구절은 중이라 하겠는데 독자 여러분의 견해는 수긍이 되실지 모르겠다.
첫 구절에서 온갖 겉모양이라 함은 부처님의 32상을 비릇하여 모든 형상 있는 총 망라한 것이요,
둘째 구절에서는 모두가 허망하다 함은 그러한 겉모양들이 모두가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인연에 따라 임시 건립된 것인데 우리들의 허망한 분별 때문에 실제로 있는 것이므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구절에서 모든 모양이 아닌 줄 안다 함은 위의 두 구절에서 말씀에 의하여 눈앞에 보이는 겉모양들이 보기에는 있는 듯 하나 실제에는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것이니 이런 경지를 진공묘유라한다.
즉 참으로 비었을 때에 모든 것이 구족하다는 것이다. 마치 거울 위의 티가 하나도 없을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이 다 비칠 수 있는 경우와도 같다.
넷째 구절 바로 여래를 본다 함은 진리를 발견한다는 뜻이니 셋째 구절의 결과이다. 위의 첫째와 둘째 구절에서 온갖 겉모양이 모두 모두 허망하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모든 겉모양이 허망하다면 허망치 않은 존재는 어디에서 있는가? 모든 형상을 떠나서 되겠구나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허망을 떠나서 진실을 찾는 것은 치우친 것이다. 오로지 온갖 모양들이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뿐이라고 확실히 알 때에 비로소 그 허망함 속에 내재한 진실 즉 진리를 보게 된다고 하여 겉모양이 모양이 아니라고 보려는 폐단이 생길 것을 막으려 하기도 하였다.
이상으로써 부처님의 32상을 포함한 모든 겉모양은 허망하고 그 겉모양들이 허망한 줄을 바로 이행할 때에 진리를 발견하고 참 부처를 얻는다 하였다.
그럼으로써 이 대목의 의문이 풀리는 것이다. 즉 우리가 구해야 할 부처는 모양으로 거론할 바가 아니라 모양을 초월한 자리에서 참 모습을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토록 깊은 법을 누가 믿으랴?
(교막해설) 이 대목은 위의 묘행무주분에서 말씀하시기를 모양다리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하셨고 바로 위의 여리실견분에서는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본다 하셨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머무름 없는 수행을 원인으로 하여 모양다리 없는 부처를 이루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얼마나 어려운 말씀인가? 그러므로 이 대목의 이름을 (그렇게 깊은 법을 누가 믿으랴)하였으니 이는 곧 없음으로써 없음을 얻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겠다는 뜻이다. 이런 의문은 주로 오는 세상의 중생들이 문제가 된다.
즉 부처님 당시로 보면 미래인 오늘날의 우리들 말이다. 요즘 같이 약삭빠르고 야박한 세상에 법문을 믿고 그 말씀이 진실이라고 여길 이가 과연 있을까 하여 질문의 발단을 열어 나간다.
정심희유분 제6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혹 어떤 중생이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 진실이란 믿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런 말을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나중 오백년에도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는 이 말씀에 믿음을 내어 이것을 진실이라 여기리니 이런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백천만 부처님께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도 잠깐 동안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중생들은 이렇게 한량없는 복덕을 받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 중생들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전혀 없으며 법상도 없고 비법상도 없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 중생들이 만일 마음이 모양다리에 걸리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만일 법상에 걸리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되나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일 비법상에 걸리더라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법상에도 걸리지 말아야 하고 비법상에도 걸리지 말아야 하나니 그러기에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 비구들은 나의 설법을 뗏목같이 여기라 하였나니 법상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상이겠는가?
(강화) 이 물음에 답하는 말씀으로 부처님은 그런 말을 말라 하시어 일축하시고 오는 세상에도 믿는 이가 있을 터인데 그들은 분명 여러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것이라 하셨다.
말씀이라 함은 위의 사구게요, 멸도는 세상을 떠신다는 말이요, 나중 오백년은 지도론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첫째 오백년엔 해탈뇌고이니 도를 얻는 이가 많고, 둘째 오백년엔 선정뇌고이니 도를 얻은 이는 적어도 선정을 닦는 이가 많고, 셋째 오백년엔 다문뇌고이니 지식에 의한 이론만 많고, 넷째 오백년엔 탑사뇌고이니 절이나 탑을 세우는 일이 성하고, 다섯째 오백년엔 투쟁뇌고이니 싸움이 성하리라 하셨는데 나중 오백년은 곧 다섯째 오백년으로서 요즘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불자들이 명분이야 어쨌든 크고 작은 싸움에 걸려 세상을 떠들썩하고 있으니 과연 이 경의 말씀을 진실이라 믿고 수도에 전념하는 자 있다면 그는 부처님께 칭찬받아야 할 보살이리라.
이렇게 온 세상이 흐렸는데 나 혼자 맑듯이 나중 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다면 그는 이 경을 진실이라 믿으리라 하셨으니 계는 악을 멈추고 선을 기르는 작용이 있어 능히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공덕이 있다.
계의 종류로서는 삼귀의계, 오계, 구계, 이백오십계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한 마디로 말하면 역시 악을 그치고 해탈을 얻는 방법이며 삼업을 잘 간직하는 사업이다.
복을 닦는다 함은 선을 익히는 일이니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으니 자연 지혜가 생겨서 이경의 참 뜻을 알게 될 것은 당연한 추세라 하겠다.
그러므로 보리유지 삼장이 번역한 경에는 계를 지니고 복을 닦아 지혜가 이루어진 이는 이 경을 진실이라 믿으리라 하였다.
그러면 그토록 어려운 때에 태어나서 이 경의 참 뜻을 믿는 이는 어떤 공덕을 쌓은 사람인가? 많은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라 했다.
선근이라 함은 삼업으로 지은 착한 업이 착한 결과를 부르는 것이 마치 뿌리를 심으면 열매를 얻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법상종의 말에 따르면 믿음, 부끄러워함, 탐욕 없음 등 셋을 착한 일이라 하는데 이 세 가지가 차츰 자라나게 하므로 선근이라 한다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선근을 얼마 동안이나 닦으면 그토록 험악한 말세에 태어나서도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는가 한 해, 두 해도 아니요 한생, 두생도 아니다 여러 부처님이 번갈아 태어나시는 동안 쉬지 않고 닦아야 한다 한 부처님과 부처님의 사이는 얼마인가 하면 석가 부처님과 미륵부처님의 사이가 오십육억 칠천만년이라 하니 그 지루한 세월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세월동안 선근을 닦았으므로 세상이 아무리 시비의 소용돌이에 빠졌더라도 개의치 않고 조용히 이 경에 귀를 기우린다. 오래 할 수가 없으면 잠깐이라도 진실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 함은 위에서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더욱 믿게 하려는 계산이니 선근을 심은 중생은 나중 오백세에도 이 경을 그대로 믿으리란 말이 너무 추상적이고 방편의 말씀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할까 하여 다 본다 함으로써 그저 막연히 짐작이 아니요 다 안다 함으로써 눈앞에 의해서 보는 것뿐이 아니라 하셨다. 부처님은 거짓이 없다.
진실의 상징인 여래의 명예를 걸고 이 사실을 보증한다. 그러니 마음 놓고 콱 믿으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세상 사물을 관찰하는데 네 가지 기준이 있다. 이를 사량이라 하는데 현량, 비량, 사량, 성언량이다.
1. 첫째 현량은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소를 보고 소인 줄 아는 것이요.
2. 둘째 비량은 조그마한 단서에 의해 추측하여 아는 것이니 담 넘어 뿔을 보고 그 밑에 소가 있는 줄 아는 것이요, 사량은 잘못된 측정이니 현량과 비량에 공통된다. 현량의 경우 담 넘어 뿔을 보고서도 말인줄 알았을 때엔 사현량이라 하고 비량의 경우 담 넘어 뿔을 보고서도 죽순인줄 알았을 때에 사비량이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현상계를 관찰할 때의 일이요 부처님의 말씀이나 그 밖의 다른 성인들의 말씀에 의해 그대로 믿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성언량이라 한다.
예컨대 극락세계에 연꽃이 있다던가 지옥이 어떠 어떠 하다던가는 현량이나 비량으로 알바가 아니라 성언량에 의해서 인식하여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경우도 성언량이다. 즉 오늘날 말세란 말을 흔히 하지만 개중에는 이 경의 말씀을 진실이라고 믿는 자 그는 과거에 많은 선근을 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성언량에 의해서 믿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함은 위의 말을 다시 되풀이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자는 뜻이다. 즉 말세에 태어난 중생이 이 경의 말씀을 진실이라 믿고 한량없는 복덕을 받는다는 것은 기정의 사실로 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그토록 많은 복을 받게 된다 말인가 그 대답으로서 ① 그들은 아집과 법집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아집은 (나)라는 고집으로서 사상을 말하니 사상은 (나)가 실제로 또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고집이기 때문이다. 법집은 법상과 비법상을 복덕을 받는가 하는 뜻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모양다리에 걸렸더라면 사상에 집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즉 모양다리의 각 부분인 사상에 집착되었거나 설사 사상의 경지를 벗어났더라도 사상을 벗어난 법을 알았노라 하면 그는 또 법상이다. 그러나 이 수행자에게는 그런 병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 한량없는 복을 받는다.
가리킨 말로서 나는 바른 법을 따르고 그른 법은 버리노라, 나는 법을 알았노라, 나는 아집을 여의었노라 하는 따위의 고집들이니 아집은 거칠고 드러난 것이요, 법집은 섬세하고 숨은 것이다.
어쨌든 이 두 가지 고집이 다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복을 받는다.
② 두 번째로 무슨 까닭인가 함은 다시 위의 말을 규명하자는 것이니 즉 어째서 법상도 없고 비법상도 없으면 한량없는 복덕을 받는가 하는 뜻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모양다리에 걸렸더라면 사상에 집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즉 모양다리의 각 부분인 사상에 집착되었거나 설사 사상의 경지를 벗어났더라도 사상을 벗어난 법을 알았노라 하면 그는 또 법상이다.
그러나 이 수행자에게는 그런 병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 한량없는 복을 받는다.
③ 셋째 무슨 까닭인가 함은 위의 말씀을 다시 규명하려는 뜻이니 위에서 말하기를 법상에 걸리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된다 한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법상에 걸렸는데 어째서 아상, 인상 등 사상에 집착된다 했을까 법상은 아상 등 사상을 끊은 뒤에 나타나는 현상이니 마치 고등학교 졸업에 낙제하면 초등하교 졸업장도 무효가 된다는 이론과 비슷하다 한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서 법상에 걸렸을 경우뿐 아니라 비법상에 걸렸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찌 법상에 걸리고서 아상에 집착되지 않으랴 하였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일은 이 행상이 소승 아라한의 경우가 아니라 대승의 이집, 아집과 법집을 기준 삼은 것이다.
소승에서는 이미 아집을 다 끊었으면 법집이 남았더라도 아집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의 경우는 지금 강술한 바와 같이 법집이 남은 정도가 아니라 법집도 다 했다고 생각되는 비법상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비법상에 걸리기만 하면 아집의 바탕인 아상은 여축없이 솟아난다 마치 모래 둑을 쌓아 강을 막는데 한 곳에서 터지건 두 곳에서 터지건 터지면 흙탕물이 내리 쏟는 사실은 동일한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들을 결론지으려는 뜻이다. 법상이건 비법상이건 모두가 바른 수행은 되지 못한다. 오로지 치우침 없는 중도라야 한다.
마치 땟목을 강에 띄웠을 때 그 뗏목이 강 어느 한쪽에 닿아서 걸리면 뗏목의 효과는 끝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설법도 항상 뗏목같이 중도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셨다.
이렇게 중도의 법을 바로 알아 행하는 이에겐 법이라는 법상도 군것이거늘 틀린 법이라는 비법상을 버리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모양다리 없다면 어떻게 설법했나
(과목해설) 위의 여리실견분에서 말씀하시기를 모양다리로써 여래를 보지 말라 하셨는데 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부처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유위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석가여래는 어찌하여 제자들에게 외치기를 나는 도를 깨쳤다. 나의 생사는 끝났다, 나는 부처이다 나를 따르라 하고 설법을 하였는가 모양다리가 없는 부처님이 어떻게 모양다리 있는 설법을 했을까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에는 상당한 모순이 없지 않다 하게 된다.
무득무설분 제7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여기느냐. 여래가 설법한 것이 있다고 여기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뜻을 알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할만한 일정한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말씀하셨다고 할만한 일정한 법도 없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가 잡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도 비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그러냐 하면 온갖 현인이나 성인들이 모두가 무위의 법에서 여러 가지 차별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강화) 수보리의 이 의문을 풀어 주시기 위하여 다정한 말씨로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하시고 이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또는 설법을 한 적이 있느냐 하셨으니 이렇게 말씀하신 뜻은 법을 얻은 바도 없고 말씀하신 바도 없음을 은연중에 강조하셨다.
부처님의 이런 내심을 잘 아는 수보리는 그렇다 할 일정한 법이 없다고 하였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일정한 법도 없으며 말씀할 일정한 법도 없다니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왜 그런가 어느 일정한 법만을 보리라 하거나 설법이라 한다면 그 밖의 법은 보리나 진리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진리나 설법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보리의 대꾸는 맞은 말씀이 된다.
무슨 까닭인가 함은 방금 수보리 자신의 말에 일정한 법(무유정법)이 없다한 것을 다시 규명하려는 뜻이다. 즉 어째서 일정한 법이 없는가? 함이니 이의 대답으로서 여래의 말씀은 잡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여래의 말씀은 진리요, 진리는 있는 듯 하되 찾으면 없고 없는 듯 하되 사물의 일 마다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잡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하였다.
잡는다 함은 얻는다 또는 소유한다는 뜻이요 말한다 함은 설명한다는 뜻인데 진리는 이런 것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법도 아니다 함은 온갖 법이 일정한 형체는 없지만 그 형체 없는 이면에 실상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가 얻었다 할 일정한 법도 없고 여래가 말했다 할 일정한 법도 없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함은 다시 자기의 말에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잡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업고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다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 뜻을 다시 규명키 위한 말이니 이의 대답으로서 무위의 법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무위라 함은 유위와 조작이 없는 법이란 뜻이니 허공이라던가, 열반이라던가, 진여가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무위의 법은 평등한 진리이거늘 이에 이르는 성인이나 이르는 중인 현인이나 이르지 못한 범부들의 정도에 따라 갖가지 분별이 생겼다는 것이다.
마치 둥근 달은 하나인데 보는 이에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 같이 무위의 법은 하나인데 성인이나 현인들에 의해 차별이 생겼을 뿐이지 진리 자체가 잡을 수 있다거나 잡을 수 없다거나에 속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인은 범부의 지위를 지나 곧 성인의 지위에 오를 보살이요, 성인은 십지이상 등각, 묘각에 이른 보살들과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까지의 성문을 말한다. 부처님은 대성이어서 이 성현의 위에 계신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말씀은 잡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이유는 무위의 법이기 때문이다.
단 말할 수 있다거나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위의 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의 분별일 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의 첫 머리에서 부처님이 물어시기를 내가 얻은 법이 있느냐? 말한 법이 있느냐 하셨는데 수보리의 답변 속에는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 주로 거론 되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그 이유는 얻음과 말함은 선후의 차이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옛 어른은 말한다. 즉 말할 수 있는 이는 반드시 깨달아 얻은 이라야 되기 때문이란 말이다.
의법출생분 제8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쌓아두고 모두 보시에 쓴다면 그 사람이 받을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말하여 주면 그 복덕은 저 칠보를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리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여러 부처님들과 부처님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강화) 이상으로서 불법은 말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것임을 알았으나 그렇다고 아주 공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다시 수보리야 하고 불러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하신다.
삼천대천세계라 함은 우주를 말하니 구사론에 말하기를 사대주와 일월과 사대주와 해와 달과 소미로와 욕천과 수미산과 육욕천과, 범세와를 각 일천이 초선천, 초선천을 모두 천 곱하면 이름이 일소천계요, 소천계라 부르고, 차(이)소천의 천배를 즉(?)이 소천 세계를 천곱하면 중천계요, 중천세계라 부르고 차-이의 천배가 대천이니 즉(?)중천의 천배가 대천세계니 개동일성괴니라 하였다. 모두가 똑 같이 생겼다 사라진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구조설로서 넓고 넓은 공간에는 향수해라는 바다가 있고 그 바다에는 여러 개의 사대주가 그룹을 지어 존재하는데 사대주라 함은 남섬부주, 서구다니주, 북구로주, 동불파제니 한 대륙을 동, 서, 남, 북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대주를 중심으로 하여 여덟겹의 바다가 있으니 이를 팔 향수해라 하고 그 향수해 사이마다 일곱겹의 산이 둘려 있으니 이를 칠금산이라 하는데 바깥쪽으로 마지막의 것을 철위산이라 하여 해와 달보다 높이 솟아 마치 어떤 집의 높은 담과도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옆의 사대주도 그 구조가 같으므로 결국 철위산과 철위산이 인접해 있게 되고 철위산 사이에는 해와 달이 비치지 못하여 지옥을 이룬다고 한다.
그리고 한 사대주 복판에는 수미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는데 그 높이는 팔만사천 유순이다. 한 유순은 평균 육십리에 해당한다 하며 해와 달은 그 수미산 중턱의 높이를 오간다 한다.
그리고 한 사대주 즉 한 철위산이 둘러싼 공간 위를 육욕천이 덮고 있으며 육욕천은 욕심이 있는 중생이 사는 욕계에 속하는 여섯 층의 하늘을 말하니 곧 사왕천, 야마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이다.
이 육욕천 위에는 범세천이라 하여 색계의 네 하늘이 있으니 색계라 함은 욕심이 없어진 이가 태어나는 하늘이다. 이 하늘은 사람들은 얼굴이 예쁘고 미색이 훌륭하다 하여 색계라 하는데 그 네 하늘이라 함은 초선천, 이선천, 삼선천, 사선천이다.
이 가운데 초선천의 넓이는 한 철위산 범위와 대등하니 이것이 한 사대주의 우주권이다.
이러한 사대주권이 천이 모이면 한 소천세계요 이 소천세계가 천이면 중천세계요 이 중천세계가 천이면 대천세계가 되니 여기서 말한 삼천대천세계는 곧 대천세계이다.
그러니 얼마나 넓은 공간인가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넓은 공간에다 칠보를 가득히 채운다 했다. 칠보라 함은 금, 은, 유리, 호박, 진주, 자거, 마노 등 값진 보물들이다. 이것들을 몽땅 아낌없이 보시에 쓴다니 그 공덕이 많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수보리도 매우 많겠나이다 하고 이어 무슨 까닭인가 하면 하고 자기 말의 이유를 풀이하였으니 무슨 뜻으로 복덕이 많다 하였는가 하면 세속제에 의하기 때문에 많다고 하였다.
불교에서 이 세상의 온갖 이론을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말하니 세속제와 승의제이다. 세속제라 함은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언어라는 뜻이요, 승의제라 함은 현실을 초월한 진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수보리의 말씀에 복덕의 성품이 아니라 함은 승의제의 복덕이 아니란 뜻이요 복덕이 많다 함은 세속제로 말하기 때문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 복덕은 세속제로 보아서는 많다 하겠으나 승의제로 보아서는 많다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라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칠보를 보시한 사람 이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라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칠보를 보시한 사람 이외에 다른 어떤 사람의 예를 들어서 이 경의 공덕이 얼마나 수승한가를 말씀하신다.
사구게는 이미 위에서 설명한 바 있거니와 전편을 대표할 만한 짧은 시구이다. 이 짧은 시구 하나만 읽어도 그 공덕이 그토록 위대하니 전편을 다 읽은 공덕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여기서 받아 지니고 남에게 준다 함은 오품제자의 한 부분이니 오품제자라 함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의 법을 듣고 기꺼이 믿음을 내는 수희품, 부처님의 법을 즐기어 읽는 독송품, 그 법을 남에게 이야기하여 주는 설법품, 마음으로 진실한 법을 관찰하면서 육바라밀의 법을 두루 실천하는 겸행육도품, 그리고 나와 남이 진실의 경지에 이르도록 육바라밀의 행을 구체적으로 닦는 정행육도품등 다섯 종류의 불제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받아 지닌다 함은 수희품이요, 남에게 말해 준다 함은 설법품의 제자를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함은 경을 지니는 복덕이 많은 보물을 보시한 공덕보다 나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밝히려는 뜻이니 그 해답으로서 이 경은 여러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이 나왔기 때문이라 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이 경을 읽고 지니면 부처가 되거나 부처님의 법을 얻게 되기 때문이란 뜻이 된다.
물질인 칠보를 보시하는 것은 유위의 복을 받을 뿐이요 부처가 되는 보리를 얻지는 못하지만 이 경을 지니면 마음이 열려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에서 나왔다는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것이 실체가 있어서 우리들이 더듬거나 찾을 수 있는 대상의 것은 아니다. 다만 세속제에 의해서 말을 하자니 부처다, 법이다 할 뿐이다.
말일 진실로 불법이라 할 것이 있다고 여기면 그것 또한 놀라운 집착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수보리야 하시어 정신 차려 듣게 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불법이란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 하셨다. 즉 세속제에 의하여 말을 하자면 불법이라 하겠지만 승의제 편으로는 불법이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성문이 지위를 얻은 것은 붙잡음이 아닌가?
(과목해설) 위의 무득 무설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말한 법은 모두가 붙잡을 수도 없고 법도 아니요 비법도 아니라 하셨는데 이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붙잡아 얻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도 없다지만 많은 성문들은 오랜 수행 끝에 제각기 자기의 지위에 올라 그에 알맞은 설법을 하셨으니 그것이 어찌 얻음이나 말함이 아니겠는가 하게 된다.
여기서 성문이라 함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부류에 따라 나누어 호칭하는 삼승의 하나이니 삼승이라 함은 성문, 연각, 보살이다.
성문은 부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제자라는 뜻이니 여기에는 부처님의 음성 뿐 아니라 부처님의 교법을 보고 따르는 부류 즉 요즈음의 우리들의 경우도 포함된다.
다음 연각이라 함은 이 세상에 부처님이나 부처님 법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태어나서 주위의 사물이 변천하는 인연의 현상을 보고 우연히 진리를 깨닫는데 그 깨달은 내용이 역시 우연히 불교과 똑 같은 부류이다.
마지막의 보살은 태어나는 시기에 관계없이 나 보다 남을 먼저 제도하려는 서원을 가지고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부류이니 이는 첫 머리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 삼승 중 성문은 고, 집, 멸, 도 등 사성제를 수행의 목표로 삼고 연각은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등 십이인연을 수행의 목표로 삼는데 모두가 착한 원인으로 즐거운 과보를 받으려는 자기 본위의 수행이므로 이 두 가지를 소승이라 하고 반면에 보살은 나의 수행 못지않게 중생 제도의 염원이 두터워서 주로 육바라밀을 수행의 목표로 삼으므로 대성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삼승 중 성문만을 거론한 이유는 가장 손쉬운 계층을 들어 예로 삼았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지루하지만 성문에 관한 일을 좀 더 이야기 하려 한다.
성문이라 함은 범어 슈라이바카의 번역이니 칠생 육겁동안 사제의 법을 닦아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 사과를 얻어 열반을 얻은 부류의 성인들이다.
처음의 수다원이라 함은 열 여섯 가지 마음(십육심)으로 팔십팔종의 견도혹이란 번뇌를 끊고서 처음으로 성인의 지위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문으로는 입류라 하였다.
십육종의 마음이라 함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통하여 고, 집, 멸, 도 등 사제를 닦아 나아가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말하나 욕계에서 한 사제를 닦고 색계와 무색계를 합쳐서 한 사제를 닦아 여덟이 되고 낱낱 제에 인과 지가 있어 모두가 십육이 된다.
인이라 함은 확인한다. 추진한다는 뜻이요, 지라 함은 완전히 성취한다는 뜻인데 욕계에서는 모든 제에다 법자를 붙이고 색계 무색계를 합쳐서 상계라 하는데 상계에서는 류자를 붙이나 류는 유래한다는 뜻으로서 상계는 욕계에 유례 하여 안다는 뜻이다.
이 십육심의 설명이 좀 지루해진 것 같아서 다음과 같은 도표로서 마무리하려 한다.
이러한 십육심으로 끊어야 할 팔십팔종의 견도혹이라 함은 도 즉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번뇌이니 이의 주요 성분은 탐-탐욕, 진-성냄, 치-어리석음, 만-교만, 의-망설임 등 다섯 가지 무거운 번뇌(오둔사)와 신견-내가 있다는 고집, 변견-치우친 고집, 사견-인과를 무시하는 고집, 견견-위의 세 가지 고집을 옳은 것이라 하는 고집, 계금취견-(잘못된 수행방법을 옳은 방법으로 아는 고집)등 다섯 가지 가벼운 번뇌(오리사)이다.
전자를 오둔사라 하고 후자를 오리사라 하는데 우둔사는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있는 번뇌요, 오리사는 수행하는 과정에서만 나타나는 번뇌이다.
어쨌든 열두 가지 번뇌가 삼계에 두루 퍼져서 사성제를 닦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먼저 욕계의 경우를 살펴 보건대 고제를 닦는데 십종 번뇌가 구족하고 집제와 멸제에는 신견과 변견과 계금취견이 제외되어 각각 칠이 되고 도제에는 신견과 변견과 제외되어 팔이 되니 모두가 합치면 삼십이가 된다. 즉 욕계의 견도혹은 삼십 이종이란 말이다.
그런데 집제에서 신견, 변견, 계금취견을 빼는 이유로서 집제는 괴로움의 원인을 규명하는 방법인데 이미 닦은 고제에서 이 몸은 괴로움 투성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으므로 이 몸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견과 이 몸이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변견과 갖은 방법으로 잘못된 수행을 해서 괴로움을 면하려는 계금취견은 더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도제에서 다시 계금취견을 넣은 이유로서 도제는 도를 실천하는 과정인데 여기서 혹 잘못된 방법을 옳은 방법으로 착각할 수 있겠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 색계와 무색계의 경우를 살펴 보건대 욕계의 경우와 같으나 진 즉 성냄은 무조건 제외된다. 그 이유로서는 천당에는 모두가 즐거워서 성낼 일이 없으므로 성냄이란 번뇌가 있을 수 없다 한다.
그러므로 고제에서 구, 집제와 멸제에서 각각 육, 도제에 칠이 되어 도합 이십팔이 되며 색계와 무색계이므로 오십육이 된다.
다시 말하면 상계의 견도혹은 오십육종이란 것이다. 이것을 다시 위에서 말한 욕계의 삼십이혹과 합치면 팔십팔혹이 된다. 이것이 수다원이 끊어야 하는 번뇌이다.
이렇게 복잡한 번뇌를 끊고서 얻은 지위가 수다원이니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겨우 첫 자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마지막인 아라한이 끊은 번뇌는 얼마나 위대하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들은 무엇인가를 분명 얻었다고 해야 되겠는데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에 불법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구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함이 이 대목의 발단이다.
이상무상분 제 구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의 과위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다원은 입류라 하지만 실로는 들어간 일이 없으니 색, 성, 향, 미, 촉, 법에 들지 않으므로 이름을 수다원이라 하나이다.
(강화) 이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부처님은 수다원의 예를 들어 수다원이 자기가 수다원의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하겠느냐 하셔서 수보리가 아닙니다 함으로써 단락을 짓는다.
무슨 까닭인가 함은 수보리 자신이 자기가 부처님께 대답한 말씀의 뜻을 다시 해명키 위한 것이니 다시 말하건대 수다원 자신인 나는 수다원의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지 않는데 어째서 수다원이란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가 하는 뜻이다.
이의 해답으로서 수다원은 색, 성, 향, 미, 촉, 법 등 6진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임시 부르는 이름일 뿐이라 했다.
수다원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입류라 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거니와 입류란 성인의 축에 처음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찌 하여야 성인의 축에 드는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십육종의 마음으로 팔십팔종의 번뇌를 끊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다시 쉽게 말하면 6진에 끌려들지 않아야 된다.
6진은 색, 성, 향, 미, 촉-(촉감의 대상),법-(의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대상)등 여섯 가지가 마음을 흘리게 하는 먼지와 같다는 뜻이니 6진에 들어가면 성인의 무리에서는 나와야 되고, 성인의 무리에 들어가면 역시 6진에서는 나와야 된다. 그러므로 입류는 곧 출진-(육진에 나온다)이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6진에서 벗어난다 함은 6진에 끄달리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는 성인인 수다원이 어찌 나는 이미 수다원의 지위에 올랐노라 하는 티가 남았으랴 만일 그런 티가 있다면 이는 곧 6진에 들었다면 이미 성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의문은 풀렸다.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어야 성인이며 성문이다. 6진에 끄달려서 얻은 바가 있다면 벌써 성인은 아니다.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르는 이를 세속제에 따라 수다원이라 부를 뿐이다. 수다원뿐 아니라 성문의 네 과위 중 나머지 세 과위도 이와 동일하다. 얻은 바가 없어야 한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사다함이 과위를 얻었노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다함은 일왕래라 하지만 실로는 왕래함이 없으므로 이름을 사다함이라 하나이다.
(강화) 사다함은 일왕래라 번역하니 한번 다녀간다는 뜻이다. 성문의 네 지위 중 둘째 과위로서 이 지위에 오르면 이 인간 세상에는 한번만 더 왔다 가면 열반에 이르러 생사를 면한다는 뜻이다. 위의 수다원은 십육종의 마음으로 삼계에 두루해 있는 팔십팔종의 견도혹을 끊었지만 이 사다함부터는 다시 삼계의 수도혹을 끊는다.
수도혹이라 함은 도를 닦는 과정에서 감정이나 의식의 미세한 작용이 일어나 도를 닦지 못하게 하는 번뇌이다. 앞의 견도혹을 후천적인 악습이라면 수도혹은 선천적인 악습이다.
이 수도혹은 욕계의 탐, 진, 치, 만-(교만)과 색계와 무색계의 각각 탐, 진, 치, 만등 도합 십종이 주체가 되는데 너무나 세밀하여서 그 대로는 끊기가 어려우므로 욕계에 속하는 네 가지 번뇌(탐, 진, 치, 만)를 일률적으로 아홉 등분하여 차츰 끊나니 이를 욕계의 구품소혹 또는 사혹이라 하는데 사다함은 이 구품 중 6품까지를 6생에 걸쳐 끊는다.
구품수혹이라 함은 상상품, 상중품, 상하품, 중상품, 중중품, 중하품, 하상품, 하중품, 하하품이니 먼저 상상품을 끊기 위해 이생 즉 두 차례 태어나고 다시 상중품, 상하품, 중상품은 각각 일생씩이 걸리며 중중품, 중하품은 합쳐서 1생에 끊고는 사다함이 되어서 나머지 하상품, 하중품, 하하품을 끊기 위해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나야 되나니 나머지 삼품은 1생에 끊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사다함을 일왕래 즉 한번 다녀간다고 한다.
이상 이야기한 것을 다시 도표로써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사다함이 되기 위해 오랜 세월을 닦았고 또 여러 겹의 번뇌를 끊었으니 그 과위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다함 자신이 그런 과위를 얻었노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하면 이미 사다함이 아니다. 왜냐? 아직 그만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와도 그림자 같고 가도 그림자 같이 그렇게 왕래하는 이를 세속제에 의하여 말을 하자니 사다함이라 부를 뿐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아나함이 과위를 얻었노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나함은 불래라 하지만 실로는 다시 오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하나이다.
(강화) 아나함은 성문의 셋째 지위로서 불래라 번역하니 인간 세상에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계의 구품수혹 중 앞의 6품을 끊고 사다함이 된 이가 나머지 3품을 끊기 위해 다시 태어나서 1생 동안에 다 끊어 아나함이 되고서는 색계의 제4선천안의 일부인 5나함천(무번천,무열천,선현천,선견천,색구경천)에 가서 태어난다.
이렇듯 거룩한 과위를 얻었지만 그들은 내가 아나함의 과위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이 없다. 그 이유는 위에서와 같이 진실로 이 세상에 다시 오지 않게 된 이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직 분별하는 마음이 남은 것, 어찌 아나함이라 하겠는가? 다만 세속제에 그들을 아나함이라 부를 뿐인 것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라한이라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 한다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되는 것입니다.
(강화) 아라한은 성문의 마지막 지위로서 수행이 극치에 이른 성인이라 아라한은 무적, 불생, 응공이라 번역하니 무적이라 함은 번뇌의 도적이 아주 없어졌다는 뜻이요, 불생이라 함은 다시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요, 응공이라 함은 인간과 하늘에서 어떠한 공양이라도 받기에 타당하다는 뜻이다.
이 아라한이 끊을 번뇌는 색계와 무색계의 수도혹이니 탐, 진, 치, 만 등 네 가지가 주축이 된다. 이미 아나함의 과위를 얻은 이가 5나함천에 태어나서 살피니 아직 상계의 수도혹이 남았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냥 끊기는 너무 미세하여 색계의 것을 넷으로, 무색계의 것도 넷으로 도합 여덟으로 대분하고 이들 여덟 몫을 다시 각각 아홉 등분으로 나누니 모두가 72품이 되는데 이 중에서 71품까지를 끊으면 아라한향이라 하고 72품을 다 끊으면 아라한이라 한다.
이렇게 멀고도 어려운 수행과정을 지나서 된 아라한이니만치 나는 아라한이 되었노라 하고뻣내도 무방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실로 어떤 법도 아라한이라 불리울만한 것이 없다. 그것이 아라한의 경지이다. 그렇건만 세속제에 따라서 아라한이라 임시 부를 뿐이다. 만일 아라한 자신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의 과위를 얻었노라 한다면 이는 4상에 집착된 것, 범부와 다를 것이 무엇이랴, 그러므로 성문들이 과위를 얻는 것도 모양다리에 집착되는 것이라 하는 의문이 맞지 않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일러서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중에 제일이라 하셨는데 이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기 때문입니다마는 저는 내가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라고 생각지는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 한다면 세존께서는 저를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마는 수보리가 실로 그러지 않았으므로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강화) 위에서 성문이 네 과위마다 얻었다는 생각이 없으므로써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4상이 없으므로 성인이 되는데 내가 성인의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하면 도리어 4상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는 네 과위의 성문뿐 아니라 수보리 자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얻었노라 하는 생각이 없으므로 만이 참으로 얻는 것이다.
무쟁삼매는 다툼이 없는 삼매란 뜻이니 다툼이 없다함은 욕심의 번뇌가 다하여 스스로가 공의 원리에 편안히 머무는 이의 경지이다.
이 경지를 삼매라 하니 삼매는 번역하면 정이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수보리는 공의 원리를 잘 알기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수보리 자신이 내가 무쟁삼매를 얻었다. 나는 욕심의 번뇌가 다했다 하는 따위 생각이 있으면 부처님은 자기에게 욕심을 여윈 아라한 중에서 제1인이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라 하여 얻은 바가 없어야 참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아란나행은 고요함을 즐기는 수행이니 공의 원리를 알아 고요한 곳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말한다.
⑤석가 부처님도 연등불의 설법을 듣지 않았나
(과목해설) 위의 무득 무설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말한 법은 모두가 붙잡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하신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부처님의 법이 붙잡아 얻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석가 부처님은 어떻게 91겁 전에 연등불을 만나 설법도 듣고 공양도 하고 발심도 하여 수기를 얻었는가? 하는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스물칠곱 겹의 의심 가운데 다섯 번째 의심이 된다.
장엄정토분 제 십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 부처님께 법을 얻을 것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 부처님께 실로 아무른 법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
(강화) 연등 부처님은 옛날에 석가 부처님이 어느 바라문 수행자로 태어났을 때 값진 꽃 다섯 송이를 사서 공양하고 또 부처님이 지나시는 길이 질기에 자기의 머리카락을 펴서 밟고 건너시게 하였는데 이때 연등 부처님은 네가 앞으로 91겁 뒤에는 부처가 되리니 석가모니라 하셨다 한다.
여기서 겁이라 함은 가장 긴 시간의 단위이니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인 찰라와 정 반대되는 말이다.
이 대목의 의문을 풀기 위해 부처님은 먼저 수보리가 생각하는 바를 꼬집어 물어서 그 생각을 뒤집어 엎으셨으니 너는 내가 연등 부처님께 법 즉 수기를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하신 것은 받은 바가 없다는 뜻을 강조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이 뜻을 잘 아는 수보리는 아니옵니다. 하여 얻은 바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어째서 얻은 바가 없는가? 분명 연등 부처님께 설법을 듣고 깨친 바가 있어 수기까지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연등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음성뿐이요 석가보살이 들은 것도 음성일 뿐이다. 음성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거짓된 것일 뿐 진실은 아니다.
부처님이 오늘에 부처가 되신 것은 진실을 얻었기 때문인데 진실은 얻었다던가 못 얻었다 든가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아무 것도 얻은 바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렇거늘 석가가 연등에게 얻은 바가 있으라 하는 생각을 하다니 잘못이로다. 따라서 위의 대목은 성문의 경우를 밝히셨고 이 대목은 부처님의 경우를 밝히셨으며 다음 대목은 보살의 경우를 밝히셨음에 유의하면 또한 흥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⑥보살들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얻음이 아닌가?
(과목해설) 위의 무득 무설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말씀하신 법은 모두가 붙잡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하셨는데 이에 대하여 의문하기를 성문들이 과위에 오른 것, 부처님이 수기를 받으신 것들은 모두가 얻은 바가 없으므로써 참으로 얻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무수한 보살들이 태어나서 6바라밀을 비롯한 만행을 두루 닦아서 국토를 장엄한 일은 어찌하겠는가? 그것이야 얻음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다.
여기서 국토라 함은 세간 즉 세상이란 뜻이니 세간에는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세간이니 단순이 국토를 말한다.
둘째는 중생세간이니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세계를 말한다.
셋째는 지정각세간이니 깨달으신 성인들의 세계를 말한다.
세간의 개념이 이러하므로 국토를 미화하는 일도 장엄이거니와 중생세간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지정각세간으로 바꾸어 나가는 일도 장엄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장엄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라 봐야한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들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장엄이 아니므로 장엄이라 이름 하나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꼭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고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아야 하나니 아무데도 머무는데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강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하셨으니 실은 장엄한 바가 없음을 강조하시기 위한 복선이다.
불국토라 함은 한 부처님의 교화하실 국토라는 뜻이니 곧 하나의 삼천대천세계를 말한다.
장엄이라 함은 아름답게 단장한다는 뜻이니 형상장엄과 제일의상장엄 등 두 가지가 있다.
형상장엄이라 함은 단순한 국토미화요, 제일의상장엄은 정신세계의 승화를 말하니 참된 법을 추구하여 수행에 힘 쓴 것을 뜻한다.
부처님의 이런 뜻을 알아차린 수보리는 얼른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 그 이유를 해명키 위하여 무슨 까닭인가 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무슨 까닭으로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했다 할 것이 없다 했는가 하는 뜻이다.
장엄이 아니다 함은 형상장엄이 아니기 때문이요 장엄이라 이름한다 함은 제일의상장엄이어야 장엄이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진정한 장엄일수록 생각이나 말로 헤아릴 바가 아니다. 그런데 보살이 이제 자기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을 하랴
장엄한 것도 없고 장엄했다는 것도 없는 것이 참 장엄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의문은 정당하지 못하다. 수보리의 이런 대답은 물론 부처님의 뜻에 계합되었다. 그러므로 아무런 수정 없이 참 장엄의 실제 방법을 보여 주셨으니 아무데도 머무르지 말고 청정한 마음을 내라 하셨다.
색, 성 등 6진의 어디에도 마음을 머무르지 않아야 하되 전혀 마음이 없는 목석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참 마음 즉 진실한 바른 지혜만을 내라는 것이다.
아무데도 머무름데 없이 마음을 내라 한 이 구절은 참으로 위대한 교훈이다.
어디에도 집착되지 말고 모든 사물에 자유로이 적응하란 말씀이다. 마치 맑은 거울에 아무른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되 모든 물상이 자유로이 비치 듯 그럴 때의 거울이 무엇이나 다 비치는 것, 이것이 진짜 거울이요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 없이 장엄하는 것이 참 장엄이 아니겠는가
옛날 육조 혜능 선사는 속인의 몸으로 시장에 땔나무를 팔러 갔다가 옆집 서재에서 어떤 사람이 이 대목을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열렸다 한다.
머무는데 없이 마음을 내라 망설이면 벌써 머무름이요, 티다.
⑦ 보신을 이루신 것도 얻음이 아닌가?
(과목해설) 위의 무득 무설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의 말은 모두가 붙잡을 수도 없다 하신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부처님의 말씀을 얻을 수 없다 함은 화신이 중생들의 편의를 따르기 위해 방편으로 말했을 뿐이지 실제에는 말씀하신 바가 없다고 말씀하신 바가 없으므로 얻을 수가 없다는 뜻은 이미 장엄정토분 첫 머리에서 풀이하여서 알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화신뿐이 아니라 보신도 있다.
보신은 중생들과 관계없이 우주의 본 체계에 의하여 십지 이상의 오른 보살들을 위해 나타내시는 몸이다. 그러니 보신 부처님은 얻은 바가 있다고 해야 되지 않을까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잠시 보신과 화신에 관한 일을 좀 더 자세히 풀이해 두어야 되겠다. 불교에서 부처님을 말할 때에 의례 3신을 말하니 3신이란 법신, 보신, 화신이다.
법신은 진리의 본체에다 붙인 이름이니 명호는 비로자나이시고 계시는 국토는 법성토이다.
보신은 부처님들의 과거 수행 결과로 얻은 지혜에다 붙인 이름이니 여기에 또 자수용신과 타수용신이 있다. 자수용신이라 함은 스스로가 얻은 법에 대한 즐거움을 스스로가 즐기는 몸이요, 타수용신은 초지 이상의 보살들을 위하여 나타내는 몸이다. 보신의 이름은 노사나요 그의 국토는 적광토이다.
다음 화신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몸이니 우리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와 똑 같은 몸으로 변화해 나타나신 몸이다. 그의 이름은 석가모니이시고 그의 국토는 예토이다. 그러나 세 부처님은 따로따로 그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3신이 일체이거늘 다만 세 측면에서 보였을 뿐이다. 마치 맑은 거울의 본체와 티가 없는 상태와 모든 것이 잘 비치는 상태와의 세 부분과도 같다.
그렇거늘 수보리는 무엇인가를 얻은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화신이 얻은 바가 있지 않을까 하였다가 틀리니 이제 다시 초지 이상의 보살들을 위해 나타내시는 몸인 보신은 분명 무엇인가를 얻은 바가 있을 것이라 했다.
수보리야 가령 어떤 사람이 몸이 수미산 같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엄청나게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오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님을 말씀하셨으므로 큰 몸이라 이름하셨기 때문이옵니다.
(강화) 이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미산 같이 몸매를 가진 사람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다. 수미산은 묘고라 번역하니 위에서 삼천대천세계를 풀이할 때에 이미 약간 설명한 바와 같이 이 4대주 복판에 솟은 팔만사천유순의 놓은 산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몸이 그와 같다면 실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다. 그 사람이란 보신을 뜻하니 수미산이 높고 묘한 것처럼 보신은 복과 지혜가 맑고 둥글어서 측량하기 어려우므로 견주어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하면은 수보리가 자기의 말뜻을 다시 풀이한 것이니 즉 엄청나게 크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뜻이요 몸 아님이라 함은 유루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란 뜻이니 유루의 몸이라 함은 형체와 생멸이 있는 몸이란 말이요, 큰 몸이라 이름하셨다 함은 무루의 몸이기 때문이란 뜻이니 무루의 몸이라 함은 형체도 없고 생멸도 없는 몸이란 말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께서 큰 몸이라 말씀하신 것은 유루의 몸을 뜻함이 아니라 무루의 몸을 뜻하시기 때문에 크다 하신 줄로 압니다 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보신을 이루는 곳은 형태도 작위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 얻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수보리의 의문은 저절로 풀렸다.
그러나 이렇게 거룩한 경지는 너무나 멀고 어려워서 설사 알아보려는 생각을 내였다가도 도중에서 겁을 내어 중지하려는 이도 있을 것이니 이는 법에 큰 손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각을 달래주어 모처럼 낸 큰마음을 도중에서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아무리 위대한 공덕을 갖춘 보신 부처님의 경지라도 이경의 4구게만 받아 지니고 외우면 찰나에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무위복승분 제십일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처럼 많은 항하사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 수효가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대단히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그 항하들만 하여도 엄청나게 많겠거늘 하물며 항하의 모래이겠습니까?
(강화) 항하는 천당래라 번역하니 천당에서 직접 흘러나온 강이란 뜻이다. 히말라야 산에서 흘러나와 동으로 흘러 벵골 만으로 들어가는 강이니 지금의 갠지스 강이다. 갠지스 강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큰 강인데 이렇게 큰 강에 있는 모래만치 많은 항하의 모래 수효가 많지 않겠느냐? 하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강은 당시 부처님께서 머무시던 기원정사 앞을 흐르고 있었으므로 많은 수효를 표시하는 경우에는 자주 예로써 들어졌었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수효를 들어서 무엇에 쓰려는가? 다음 대목을 살펴보자.
수보리야 내가 지금 참 말로서 말하노니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그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에 쓴다면 그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강화)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항하, 그 많은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 실로 놀랄만한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다 칠보를 가득히 채워 놓고 그것이 다하도록 보시를 한다니 그 공덕이 의당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도 대단히 많겠습니다 하였는데 부처님의 저의는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부처님이 이렇게 많은 세계, 많은 칠보, 많은 보시를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 다음 문장을 보면 알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에서 4구게만이라도 받아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주면 그 복덕은 앞에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니라.
(강화) 보시는 지극히 많이 하고 지극히 짧은 4구게만 읽어도 그 공덕이 낫다 하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보시는 유루의 복을 이루거니와 경을 지니면 지혜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부처님의 어머니이며 이 경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 계신 탑이나 절이다.
다음 대목에서 그 까닭을 풀이하신다.
존중정교분 제십이
또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말하되 4구게만 설명하더라도 온 세계의 하늘무리나 세상 사람이나 아수라들이 모두가 공경하기를 부처님의 탑과 같이 할 것이어늘 하물며 어떤 사람이 끝까지 다 지니어 읽거나 외울 때이겠는가?
수보리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이고 희유한 법을 성취하게 되리니 이경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이나 혹은 거룩한 제자님들이 계신 곳이 되느니라.
(강화) 많은 보시를 한 것보다 짧은 경을 지닌 공덕이 더 낫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 경은 부처님을 내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인간뿐 아니라 하늘이나 아수라들 까지도 지극한 공경을 바치는 대상이다.
하늘무리가 공경한다 함은 도리천의 왕인 제석이 항상 반야경을 좋아하여 하늘무리들을 자기의 궁궐인 선법당에 모아 놓고 이 경을 강설해 주었는데 간혹 어디를 가서 참석치 못하면 하늘무리들은 왔다가 빈 자리에 놓인 경에 대하여 절만 하고 간다.
아수라들이 이 경을 공경한다 함은 아수라는 비천 또는 무단이라 번역하니 하늘무리가 아니다. 또는 단정한 품위가 없다는 뜻이다.
이들은 제석천왕과 함께 도리천에 사는데 복은 하늘무리와 같으나 못 생긴 점이나 싸움을 좋아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에게는 예쁜 여자가 있으나 좋은 음식이 좀 부족하고 하늘무리에게는 좋은 음식이 있으나 예쁜 여자가 없다. 그러므로 이 두 세계에는 항상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즉 하늘무리는 여자를, 아수라는 음식을 탐내어 치열한 싸움이 계속된다. 요즘도 싸움이 치열한 것을 아수라장이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응추 사이에도 반야경을 듣고 공경하는 점에선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저 막연히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계신 탑이나 묘당같이 여긴다는 것이다.
탑은 원문의 탑묘를 번역한 말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탑과 묘당이 된다. 탑이란 부처님이나 스님네가 살기 위한 큰 건물인데 그 꼭대기에 요즘 탑과 같은 장엄구가 붙어 있으므로 요즘의 탑과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묘당이란 성현의 용묘 즉 형상을 모신 방이니 법당 같은 곳이다. 어쨌든 모두가 공경의 대상인데 이 경의 4구게만 읽어도 그 자리는 그대로 부처님이 계신 탑 같은 공경을 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높아서 따를 이가 없고 제일이어서 모든 법에 뛰어났고 희유하여서 퍽 드문 법을 성취하여 한 걸음 더 부처님께로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루의 복이나 이루는 보시 따위로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여법수지분 십삼
그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며 우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경은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들은 받들어 지니라. 그 까닭은 무엇이겠느냐 수보리야 부처가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곧 반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강화) 짧은 4구게를 지녀도 그리 많은 보시를 한 공덕보다 훌륭하다는 둘째 이유로서 이 경의 내용과 제목이 뛰어났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름은 그 내용을 표현하는 것 내용이 훌륭하므로 이름도 훌륭하다 어떻게 훌륭한가 금강은 쇠 가운데서 가장 굳은 것으로서 다른 모든 것을 부술 수는 있으나 다른 무엇에게도 부수어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이 경은 번뇌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가장 견고하여 물들지 않는 법임을 보였고 번뇌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가장 밝은 법임을 보였고 번뇌의 넝쿨을 제거하는 가장 날카로운 법임을 보였다는 뜻에 견주었다.
반야는 지혜라 번역하니 이 지혜는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모든 지식과 관념을 초월한 절대적인 지혜다.
어리석음에 상대되는 지혜를 분별지라 하는데 이 반야는 무분별지를 뜻한다. 이 무분별의 반야지혜를 드러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이 경이다. 바라밀다는 도피안이라 번역하니 저 언덕에 이르른다는 뜻이다.
나도 죽는 생사의 번뇌가 우굴거리는 우리의 현실을 이 언덕이라 한다면 모든 번뇌가 아주 사라진 열반의 세계를 저 언덕이라 한다.
이상을 다시 정돈하면 금강같이 굳은 무분별의 지혜로 무명의 어리석음을 끊고 열반의 저 언덕에 건너 갈 수 있는 법을 말씀하신 경이란 뜻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함은 경의 제목을 일러 준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뜻이니 부처님은 평소에 모든 법이 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어찌하여 경의 이름까지 지어 주시고 또 이 이름으로 받들어 지니라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것에 대비한 말씀이다.
그 이유로서 이름은 곧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라 하셨으니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것은 이름뿐이란 뜻이요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함은 이름이 아니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받아 지니기에 편의하게 하기 위하여 이름이 없는 곳에 구태여 이름을 붙였을 뿐이란 뜻이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곳, 이것이 바로 반야지의 경지이다. 모든 중생을 이 경지로 이끄는 경이기에 잠깐만 읽어도 그 공덕이 크다는 말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법을 말한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법을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강화) 이 경의 4구게만 지녀도 훌륭한 공덕이 되는 셋째 이유로서 부처님은 깨달으신 진리를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에서 경의 제목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시고는 이름만이 반야바라밀이지 실제로 반야바라밀이라고 집착할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내용까지도 말씀하신 바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내용은 곧 공의 진리뿐 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속의 법에 따라 설명하자니 설법이 이루어졌을 뿐이거늘 말씀하신 바가 있다고 하면 벌써 진리와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티끌이 아니므로 티끌이라 하며 여래가 말한 세계가 아니므로 세계라 이름하느니라.
(강화) 다음은 이 경의 4구게만 읽어도 항하사 수효의 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 것보다 더 많은 공덕을 얻은 넷째 이유로서 보시는 번뇌의 근원이고 경을 지니는 것은 지혜의 원인이 된다고 하셨다.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리란 것은 우리 모두가 공감한 일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어째서 하셨을까?
여래가 말한 티끌은 티끌이 아니므로라 함은 번뇌를 일으키는 티끌이 아니라 단순한 먼지라는 뜻이요, 여래가 말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므로라 함은 번뇌의 덩어리가 아니라 단순한 땅 덩어리라는 뜻이니 이는 모두가 감정이 없는 무정물로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보시는 복을 받게 하고 복을 받으면 번뇌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보시는 번뇌를 일으킬 씨앗이어서 단순한 땅덩이만도 못하거늘 하물며 지혜를 얻어 번뇌를 벗어나는 원동력이 되는 이 경에 미칠 수가 있으랴 함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보지 못하리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므로 삼십이상이라 이름하니이다.
(강화) 이 경의 공덕이 훌륭한 다섯째 이유로서 경을 지니면 모양다리를 여의는 결과를 얻는다 하였다. 방금 위에서 말하기를 보배를 보시한 복은 번뇌의 씨앗이라 하니 혹자가 생각하기를 보시를 하는 뜻은 부처가 되려는 것이다.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가 한다. 이런 생각을 막기 위해 부처님은 삼십이상으로서 여래를 보겠느냐 하셔서 여래는 겉모양으로는 볼 수 없음을 시사하셨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은 어째서 삼십이상으로는 여래의 법신을 보지 못하는가를 해명하려는 뜻이요,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므로는 법신의 형상이 아니라 화신의 형체이기 때문에 삼십이상이라 하신다는 뜻이니 진정한 부처는 이 경을 지녀 지혜의 눈이 열려야 된다. 겉모양만 따르는 보시로는 겉모양만 있는 화신의 삼십이상을 얻으리니 전륜성왕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상으로서 이 경을 지니는 일은 진정한 법신 부처를 이루는 길이며 따라서 그 공덕 또한 끝없을 것을 알겠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목숨을 보시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이 경에서 한 4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여 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많으리라.
(강화) 이 경의 4구게만 지녀도 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 공덕보다 낫다는 다섯 가지 이유를 말했는데 그들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물질의 보시는 유루의 복만을 이루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다시 생각하기를 물질의 보시가 유루의 복을 이룬다 함은 몸 밖의 재물을 보시했기 때문이리라 만일 몸으로써 보시를 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 아닌가 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항하사 수효의 몸으로 보시하여도 이 경의 4구게만을 읽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니 그 이유는 무루의 지혜를 얻는 방법이 아니면 얻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무루의 지혜를 얻는 방법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하여도 최상의 공덕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겠다.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있다면 자기의 목숨을 흔연히 내놓아 보시하는 것보다 더 할 것이 있으랴. 그것도 한몸 두몸이 아니라 항하사의 수효같이 많은 목숨이겠는가? 그 많은 목숨의 보시가 한 4구게에 미치지 못한다니 말이다.
이상적멸분 십사
그 때에 수보리가 이 경 말씀하시는 것을 듣자 뜻을 잘 알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뜻 깊은 경전을 말씀하신 것은 제가 지혜의 눈(혜안)을 뜬 이후로 아직까지 일찍이 듣지 못하던 바이옵니다.
(강화) 수보리는 공의 이치를 잘 알기로 손꼽히는 큰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르기가 퍽이나 어려운 경지인데 그는 이 땅에서 이르는 초인간적인 성자이다. 그도 아직까지 이렇게 심오한 말씀은 처음 듣는다면서 눈물을 흘렸거늘 캄캄한 우리들이 어찌 숙연치 않으랴 지혜의 눈이라 함은 공의 진리를 보는 눈이니 다섯 가지 눈의 하나로서 성자들의 지혜를 말한다.
첫째, 천안은 아무리 먼 곳의 것이라도 막힘없이 보고
둘째, 육안은 우리들의 보통 눈이니 가리어진 안의 것만 보고
셋째, 법안은 세속제의 법만을 두루 보고
넷째, 혜안은 공의 이치만을 막힘없이 보고
다섯째, 불안은 모든 사물의 차별을 평등하게 보는 눈이다.
이러한 혜안을 얻은 수보리에게도 이 경의 공덕이 이토록 거룩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였으니 이 경을 바로 아는 일이 퍽이나 어려운 과정은 보신을 이루는 원인인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믿음이 깨끗해지면 실상을 깨달으리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은 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실상이라 말씀하시나이다.
(강화) 이 경의 공덕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이제야 안 수보리는 다시 다른 사람의 예를 들어 이 경의 위대함을 설명했으니 이 경을 듣고 믿음이 깨끗해진 이는 제일 희유한 공덕을 이룬다 했으니 이를 다시 바꾸어 말하면 이 경은 실상을 깨달아 제일 희유한 공덕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깨끗해진다 함은 이 경의 이치 즉 공의 이치를 의심 없이 믿고 나머지 여러 가지 다른 법에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다는 뜻이요 실상이라 함은 진리의 참 모습이니 즉 법신, 보신, 화신의 참 모습이다.
이와 같이 실상을 깨달아 알려면 이 경을 바로 알면 족하다 실상을 알면 화신 뿐 아니라 보신도 얻을 바가 없는 것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어찌 구태여 보신은 얻을 바가 있으리라고 의심을 하겠는가 그러나 실상을 깨닫는다 해서 실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실상은 진실한 모습이란 말이나 실상의 본체는 모습 없는 모습이다. 모습이 없지만 세속제에 따르기 때문에 이름만이 실상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세존이시여 이 실상은 상이 아니라 했으니 실상은 일반 유위법의 형상과는 다르다는 뜻이요 실상이라 말씀하신다 함은 실상이라 이름했을 뿐이란 뜻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 경을 듣고 그대로 믿어 받아 지니기는 어렵지 않으나 만일 다음 세상 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 그대로 믿어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하리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전혀 없기 때문이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아상이 곧 상이 아니요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을 말하오면 온갖 상을 여윈 이를 부처라 하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강화) 항하사 수효의 몸을 바쳐 보시하여도 이 경의 한 사구게를 읽은 것만 못하다고 한 또 하나의 이유로서 이 경은 사상을 공하게 하여 부처님과 같아지게 하는 공덕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르므로 이 경을 믿기가 어렵다. 부처님 당시도 그렇거니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나중 오백세에 태어난 중생들은 더구나 어렵다.
그런데 그들은 만일 의심 없이 믿었다면 그의 공덕은 희유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한 것은 말세에 태어난 이가 설사 이 경을 믿는다 한들 희유 하다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뜻이니 그 이유는 그가 이 경을 의심 없이 믿는다는 것은 사상이 없어졌기 때문이요 사상이 없어졌다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온갖 번뇌가 모두가 (나)가 있기 때문인데 (나)가 없어지면 아무런 번뇌도 없는 제일 희유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나)가 없다고 깨닫는 것을 아공이라 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어떻게 해서 아상 등 사상이 없어지는가 하는 이유를 풀이한 것이니 그 이유는 사상은 곧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상 등 사상의 본체는 마음과 마음에 달린 마음의 법인데 이들 사상이 이미 없어졌으니 마음과 마음의 법이 혼자 남을 수는 없다. 이를 다시 말하면 아상등 사상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아는 관념마저 없는 것이기 때문이란 뜻이다.
이렇게 사상이 없어졌다는 관념마저 공해진 것을 법공이라 한다.
그 까닭을 말하면 함은 무슨 이유로 아상 등 사상이 없어진 아공과 사상이 공한 줄 아는 관념마저 없어진 법공을 얻어지는가 함을 밝혔으니 그 이유로서 모든 상이 공해지면 구공이라 하는데 구공을 얻은 이를 부처라 하기 때문이라 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이 경은 부처가 되는 최후의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말세일지라도 이 경을 믿고 지니는 이는 곧 부처라는 것이다.
그러하니라는 이상과 같은 수보리의 말씀이 부처님의 뜻에 부합되므로 동의 하시는 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으며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으로 알지니라 어째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하는 제일 바라밀은 제일 바라밀이 아니므로 제일 바라밀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니라.
(강화) 몸을 보시한 공덕보다 이 경의 사구게를 지닌 공덕이 더 훌륭한 또 하나의 이유로서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으면 그는 꼭 희유한 사람으로서 제일 바라밀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그런 이가 그다지 쉽지 않으니 이 경이 수승하다는 것이 반증된다.
어째서 그런가 함은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는 이를 희유한 사람이라 한 이유가 무엇인가 함이다.
그 이유로서 이 법은 모든 법문에서도 제일 바라밀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제일 바라밀이라 함은 으뜸가는 법문이라 뜻인데 여기서 제일 바라밀이 아니라 함은 승의제에는 제일 바라밀이랄 것이 없기 때문에 한 말이요 제일 바라밀이라 이름한다 함은 세속제로 한 말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이 경은 언어나 문자로 이뤄진 세속제로는 도저히 그 본체에 이르를 수 없는 경지를 말해 주고 있다.
오로지 바로 믿고 받아 지니어 마음이 공해지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마음이 진정 공해진 자리에는 아무런 이름이나 자취가 있을 수 없다.
아집도 법집도 삼신부처도 바라밀도 모두 없다. 그러나 세속제에 의해서 본다면 만상이 역력하니 모든 언어와 문자는 세속제에 의해서 끝없이 전개하며 장관을 이룬다.
⑧ 이 경을 지녀도 괴로운 과보는 면치 못 하는 것 아닌가
(과목해설) 위의 여법수지분 끝 부분에서 말하기를 항하사 같이 많은 몸을 보시하여도 몸을 괴롭히는 형식적인 고행에 불과하므로 경을 지니는 공덕만 못하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 경을 지니는 것도 보살의 고행의 일종이니 역시 괴로운 과보를 면치 못할 것 아닌가?
더구나 부처님께서도 전생에 보살행을 닦으실 적에 경을 읽기도 하고 설명도 했지만 가리왕의 환란을 면치 못했던 것인가 그런데 어찌 경 지니는 공덕만 훌륭하다고 맹종하라는가 한다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하노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을 갈기갈기 찢길 적에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옛날에 몸을 찢길 적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성을 내어 원망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또 저 옛날 오백세 동안 인욕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 때에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강화) 이 대목에 대하여 부처님은 인욕바라밀의 정의를 풀이해 주셨다. 인욕은 6바라밀의 하나로서 온갖 굴욕스러운 조건이나 견디기 어려운 환경을 잘 참음으로써 마침내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이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이라 한다.
그런데 하필 이 대목에서 인욕바라밀을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괴로움은 참된 인욕을 행할 때 모두 극복된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또 여래께서도 과거에 수행하실 때에 괴로움을 당한 것은 사실인데 인욕바라밀로써 겨우 극복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경을 외운들 괴로움을 면치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에 인욕바라밀의 참 모습을 말씀해 주시므로써 이런 의문들이 풀리게 하셨다.
인욕바라밀의 참 모습이란 무엇인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등 사상이 아주 없어졌으므로 너와 나의 차별을 보지 않고 너와 나의 차별이 없으므로 성낼 대상과 기뻐할 대상을 보지 않는다. 너와 나의 차별도 없고 참아야 할 대상도 보지 않거늘 무엇을 참았기에 인욕바라밀이 있다 하겠는가 칼을 들고 허공을 치니 칼만 공연히 번득일 뿐 허공이 어찌 쪼개지거나 참는다 할 것이 있으랴 부처님의 인욕바라밀이 바로 이러 하였으니 이것이 인욕바라밀의 참 모습이다.
이러한 인욕선인께서 괴로운 과보를 받았으리라는 의문은 아주 잘못된 것, 황하사의 수효 같은 몸을 보시하더라도 (나)가 없는 무상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공연한 고행이어서 괴로운 과보를 면치 못하거니와 이 경을 믿고 지니는 보살의 고행은 너와 나가 없는 참된 인욕바라밀을 알게 하니 헛된 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함은 승의제에는 인욕바라밀이라 할 것이 없다는 뜻이요 무슨 까닭인가 함은 어떻게 하여야 이런 참된 인욕바라밀을 행할 수 있는가 함이니 아상등 사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가리는 극악이라 번역하니 지극히 포악하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전생에 바라문으로 있을 때의 임금이었는데 그는 일방적인 오해로 바라문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때 바라문은 무상의 이치를 잘 알아서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런 참된 인욕은 어느 한 생에만 행한 것이 아니라 오백세를 번갈아 태어나면서 계속 수행을 쌓았다 하였으니 이 참된 인욕은 쉽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되겠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온갖 모양다리를 여의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지니 빛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닳임과 법진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아야 하나니 마땅히 머무름 없는 마음을 낼지니라 만일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으면 이것은 머무름이 아니니 그러므로 여래는 말하기를 보살은 마음을 빚에 머무르고서 보시 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들은 마땅히 온갖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보시하여야 하나니 여래는 온갖 모양다리가 곧 모양이 아니라 하며 또는 온갖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 하느니라.
(강화) 이상으로써 부처님은 참된 인욕바라밀을 행하므로 인하여 가리왕의 박해를 받을 때에도 아무런 성냄이 없었으며 오백생 동안 계속하여 인욕의 행을 닦아도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는데 그 원인은 이 법에 의해 사상이 아주 없어진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따라서 이 경을 지니는 고행은 단순한 보시의 고행과는 달라서 사상을 여의게 되고 사상을 여의므로써 어떠한 괴로움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므로 말세에 불도를 닦으려는 보살은 반드시 모양다리에 걸리는 집착을 떠나서 보리심을 내라 하셨다. 모양다리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면 어떠한 괴로움이 닥쳐와도 잘 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살의 본원은 위로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건지는 일인데 모양 다리에 걸리는 집착을 여의지 못하고는 온갖 사물이 괴롭게만 느껴 질 것이요 온갖 사물이 괴롭게 생각 될 때엔 그의 보살행은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모양에 걸리지 말아야 보살행을 즐겁게 완성할 수 있다.
모양다리에 머무른다 함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빚과 소리등 6진의 경계에 마음을 끄달려서 허망한 생각을 낸다는 뜻이요 머무름 없는 마음을 내라 함은 아무데도 끄달리지 않는 보리심을 내라는 뜻이요 만일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으면 이것은 머무름이 아니라 함은 만일 마음이 빛과 소리등 6진에 머무르면 이는 벌써 보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요 그러므로 여래는 말하기를 보살은 마음을 빛에 머무르고서 보시하지 말아야 한다. 했느니라 함은 묘행무주분에서 하신 말씀이니 보살은 어떻게 수행하리까 하는 물음에 답하신 대목인데 지금의 이 대목에선 머무름 없는 마음을 내라 하였지만 따지고 보면 보살행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표현은 다르지만 원리는 머무름 없는 보시와 동일하므로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자신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수보리야 보살들은 온갖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보시를 하라 함은 참된 인욕의 실제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니 인욕은 괴로움을 참는 것임은 이미 알았으나 그 중에도 내 마음에 거슬리는 중생이 많은 것은 실로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보살은 그들을 이롭게 해 주려는 생각 하나가 간절하므로써 만이 그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지 않고 보살행을 끝맺게 된다.
그러면 이럴 때의 생각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온갖 모양다리가 곧 모양이 아니라 한다 함은 아집이 없어진 상태이니 모양다리는 5온의 낱낱 모습에 (나)가 있다는 생각인데 그러한 모양다리가 곧 모양이 아니라 하니 (나)의 모양다리(아집)는 본시 없는 것임을 알아 아공을 얻는다. 온갖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 함은 법집을 여윈 상태이니 온갖 중생은 5온의 법이 구족한 상태를 말하는데 그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 하니 오온의 법칙이 있다고 여기는 집착(법집)이 공하여져서 법공을 얻는다.
이와 같이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한 줄 알면 어떤 중생이 나와 거슬린다고 하여 참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이 경을 지니는 공덕은 마침내 아공과 법공을 얻어 온갖 괴로움을 모두 거뜬히 초월케 하거늘 그 어찌 헛된 고행에다 견주어 말하랴?
⑨ 말은 허무한 것 그것으로 어떻게 진여를 깨치랴?
(과목해설) 위의 의법 출생분에서 말하기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하여도 이 경의 한 4구게만을 읽고 지닌 공덕만 못하다 하였고, 존중정교분에서는 말하기를 황하사 수효같이 많은 몸을 보시하여도 이 경의 4구게를 읽고 지닌 것만 못하니 경을 지니면 보리를 얻고 보시로는 고행에 불과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 말씀에 의하여 다시 의심하기를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원인이요 보리는 결과이며 결과인 보리는 무위의 법으로서 실체가 있고 원인인 부처님의 말씀은 유위의 법으로서 실체가 없다 하겠으니 본체 없는 원인으로써 어떻게 본체 있는 결과를 얻겠는가 그렇거늘 어째서 이 경을 지니는 것이 보리를 얻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가 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된 말만 하는 이 이며 실다운 말만하는 이 이며 여실한 말만하는 이 이며 속이지 않는 말만 하는 이 이며 다르지 않는 말만하는 이 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법은 진실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니라.
(강화) 이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보리야 하고 불러서 여래의 말씀은 의심 할 여지가 없으니 믿고 따르면 결정코 보리에 나간다는 것을 확신케 하셨다.
참된 말이란 대상의 보리법등이니 중생은 누구나 불성이 있다는 말씀 따위요 실다운 말이란 소승의 4제법 등이니 인과의 법칙을 설명함이요 여실한 말이란 대승에는 진여의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 등이요 다르지 않은 말이란 중생은 끝내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등이니 이런 말들은 모두가 중생을 속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부처님의 이런 말씀을 진실로 믿지 않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나 진실한 말씀이란 것 역시 세속적인 언어를 빌려서 붙인 이름일 뿐이요 실제로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얻은 이 법은 진실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라 하셨다.
진실이 아니라 함은 언어와 같이 본 성품이 없다는 뜻이요 거짓이 아니라 함은 언어와는 달라서 본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또 육조선사께서 대유령 마루턱에서 도명선사에게 선도 생각지 말라 악도 생각지 말라 하신 것과 같다 하겠으니 선을 선이라 생각할 때 벌써 집착이요 여래의 법이 진실하다 하였을 때 그 진실이란 말은 이미 집착으로 변하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자취를 떨어버리신 것이다.
⑩ 진여가 두루했거늘 어째서 얻은 이도 있고 얻지 못하는 이도 있는가?
(과목해설) 이 대목은 위의 무득 무설분에서 말하기를 일체 성인들은 모두가 무위의 법에 의하여 차별을 이룬다 한 것에 의하여 생각하기를 무위의 법이라면 진여를 뜻하는 것이고 진여라면 어디에나 두루하였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 진여를 얻은 이도 있고 얻지 못한 이도 있어서 차별이 생기었는가 한다.
수보리야 어떤 보살이 법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마치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고 어떤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눈 밝은 사람이 햇볕 아래서 여러 가지 물건을 보는 것 같으니라.
(강화) 이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얻은 이와 얻지 못하는 이의 차별은 보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살들이 마음을 법에 머무는가 안 머무는가에 달렸다고 하셨다. 법에 머문다 함은 집착이 있다는 뜻이요 법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집착이 없다는 뜻이니 지혜 있는 이와 지혜 없는 이의 차이는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과 밝은데 있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지혜 있는 이는 어찌하여 지혜가 밝아지는가 마음이 밝기 때문이요 마음이 밝아지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이 경의 뜻을 아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 경의 공덕을 다시 한번 말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 선남자나 선여인들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아시고 다 보시나니 모두가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이루느니라.
(강화) 이 경의 공덕을 찬탄하신 것은 여러번째 이거니와 오는 세상에 이 경을 지니면 그 사람의 공덕을 다른 이는 모르고 부처님만이 아신다고 하였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드높고 위대한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수승한 공덕이 있는 경이니 무조건 기뻐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려는 마음을 내어야 되겠다. 이와 같이 이 경은 하늘의 태양과도 같이 평등하여 누구나가 바르게 알면 진여를 발견하여 아무런 장애가 없게 되고 큰 공덕을 이룬다. 이 말은 그저 막연히 듣기 좋게 하는 말이 아니라 부처님은 직접 보시고 자세히 아시기 때문에 자신코 하신 말씀이라 했다 이는 마치 이상적멸분의 끝 부분에서 하신 말씀과도 비슷하니 이 경의 수승함을 총괄해서 강조하신 말씀이다.
지경공덕분 십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나절에 항하사 수효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점심나절에도 항하사 수효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나절에도 항하사 수효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렇게 한량없는 백천만겁동안 보시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으로 그러다고 하지만 아니하여도 그 복이 저 보시한 복보다 더 많거늘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에게 일러주기까지 함이겠느냐.
수보리야 중요한 뜻만을 들어서 말하건데 이 경에는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많은 공덕이 있나니 여래는 이를 위하여 대승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하여 이 경을 말했으며 가장 높은 마음을 낸 이를 위하여 이 경을 말했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여러 사람들에게 일러주면 여래가 이 사람을 다 알고 보나니 모두가 한량없고 말할 수 없고 끝없고 생각 할 수 없는 공덕을 이루리니 이런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감당할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소승법을 좋아하는 이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소견에 집착되므로 이 경을 듣지도 못하고 읽고 외우지도 못하고 남에게 일러 주지도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디에나 이 경이 있으면 온갖 하늘 사람 세상사람 아수라들이 공양을 올리니 이곳은 곧 부처님의 탑과 같으므로 모두가 공경히 예배하고 돌면서 꽃과 향으로 그 곳에 흩으리라.
(강화) 항하사 수효의 몸으로 보시한다는 말은 이미 여법수지분에서 말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아침나절에 항하사 수효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이렇게 한량없는 백천만억겁 동안 보시한다한 것은 차츰 보시의 내용은 많아지고 보시한 시간은 길어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경을 지닌 공덕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 그러다고 하지 않는다 함은 정신희유분에서 진실이라 여긴다 한 것과 같이 이 경의 뜻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기만 해도 그 복이 위의 보시보다 더하다는데 하물며 5품제자의 행을 갖추어서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에게 설명해 주는 공덕은 말이야 해서 무엇 하겠는가
중요한 뜻만을 들어서 말한다 함은 이 경의 공덕을 끝까지 다 말하면 듣는 이가 놀라 자빠질 것이며 또는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러니 딱 한마디로 잘라서 말하자면 이 경에 두 측면의 큰 공덕이 있다.
첫째는 말이나 생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불가사의 공덕이 있으니 스스로가 깨닫기 때문이요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량 공덕이 있으니 그와 견주어 대등 할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에는 그토록 많은 공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은 이토록 깊은 뜻이 있으므로 아무에게나 말해줄 수 없고 오직 대승의 마음을 낸 이와 가장 놓은 마음을 낸 이에만 말해준다 했으니 대승의 마음이라 함은 많은 중생과 함께 부처를 이루려는 서원으로서 소승의 반대가 되는 말이요 가장 높은 마음(최상승심)이라 함은 일체 중생은 오직 부처일 뿐이요 다른 것 즉 성문이나 연각은 애초에 있을 수도 없다고 믿는 교리니 위에서 대승의 마음이란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권교에서 말하는 방편의 대승인가 여길까봐 다시 가장 높은 마음을 낸 이라 하였다.
여래가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본다 함은 이 경을 에누리 없이 믿는 사람이 이룰 공덕을 부처님은 다 아시고 또 분명히 보신다고 잘라서 말씀하신 이 구절은 이상적멸분의 끝 부분에서 부처님의 말씀이 틀림없음을 강조하신 것과 같은 대목이다.
어쨌든 이 경을 바로 믿고 지니는 이는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감당한다 하였으니 내가 믿고 지니고 또 남에게 이야기해 주는 이는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하는 이리( )가 구족하여 이 땅에 불법의 명맥이 끊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무슨 까닭인가 함은 어째서 대승의 마음을 낸 이에게만 말씀하시고 어째서 이 경을 지니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감당한다 하는가 하는 뜻이니 이의 대답으로서 대승의 법이 아닌 소승의 법에 마음이 끌린 이는 사상에 집착되어 이 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승법이라 함은 대승에 반대되는 말이니 남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수도하는 작은 근기를 말하니 이런 근기에게는 이 경의 높고 넓은 말씀이 바르게 이해될 수 없으므로 대승의 마음을 낸 이에게만 말씀해 주신다 하였다.
어디에나 이 경이 있으면 온갖 하늘사람 세상사람 아수라들이 공양한다 함은 존중정교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경은 곧 법신 진여를 드러내셨고 법신 진여가 있으면 반드시 화신, 보신이 병존하신다고 봐야 된다. 그러므로 이 경이 계신 곳은 삼신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추앙되어야 한다는 뜻이니 무수한 몸으로 공양한 공덕보다 이 경을 지니는 공덕이 더 수승한 이유를 설명하는 한 방법인 것이다.
중국 수나라 익주 땅 신번현 왕자촌이란 곳에 구씨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 어느 날 마을 동쪽들에 나아가 사방 허공에다 글씨를 쓰니 마을 사람들이 묻기를 무엇을 쓰시오 하니 금강경을 씀니다. 무엇 때문에 허공에다 쓰시오 하니 하늘무리들이 보고 읽으라는 뜻이외다 하였다. 이 일을 아는 이가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살았는데 매양 비가 쏟아지면 그 글씨 쓴 밑의 한간 정도만이 젖지 않으므로 목동들이 항시 비를 피하되 그 까닭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덧 당의 고조 무덕 연간에 이르러 서역에서 비상하게 생긴 범승이 왔는데 이곳에 이르르자마자 허공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아무런 법단도 없거늘 어째서 절을 하시오 하니 법승이 도리어 묻기를 그대는 이 동네 사람인가 예 그렇소이다. 그렇다면 퍽이나 무식하군 여기는 금강경이 있어 하늘무리들이 항시 와서 둘러싸고 공양을 올리고 있거늘 어째서 함부로 더럽히시오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비로소 구씨 경 쓰던 일을 회상하고 집을 지어 보호하였는데 간혹 하늘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끼는 이가 있었다.
이와 같이 이 경은 곧 부처님이어서 있는 곳 그대로가 절이나 탑과 다름이 없으므로 한 구절만 바로 믿어도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모두가 공경히 예배하고 돌면서 꽃과 향으로 그곳에 흩으리라 함은 공양하는 의식이니 예배는 절이요 돈다 함은 공경할 대상자를 오른쪽으로 세 번도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꽂과 향을 흩는다 함은 아주 거룩한 공양일 때엔 하늘에서 청, 황, 적, 백 네 가지 꽃과 향을 흩는다 하니 이를 천우사화라 한다.
능정업장분 십육
또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서도 남에게 천대를 받으면 이 사람은 지난 세상에 지은 죄업으로 악도에 떨어질 것이거늘 금생에 남의 천대를 받는 탓으로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하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강화) 이 경을 받아 지니면 무량한 공덕을 얻을 뿐 아니라 지난 세상에 지은 나쁜 죄업까지 소멸하고 반면에 속히 불도를 이루게 하는 공덕도 이 경에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절에 다녀도 재수가 없다는 사람을 본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웃의 아무개는 평생토록 염불이라곤 전혀 모르고 동네 안에서 궂은 욕은 다 먹어도 잘만 사는데 절엘 다니고 경을 읽어도 유난히 재수가 없으니 부처님의 영험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는 이 구절에서 마음을 다시 정돈해야 한다. 우리의 오늘의 행복과 불행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전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전생의 죄가 많아서 금생에는 지독한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는 악도에 떨어져야 할 사람인데 금생에 경을 받아 지니는 공덕으로 약간의 구박을 받는 것으로 그 나쁜 죄업을 소멸하고 오는 세상에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부처를 이룬다 하니 그 아니 다행한 일인가 그러므로 괄시를 받아도 물러설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된다. 악도라 함은 전생에 지은 나쁜 업에 의하여 태어나게 되는 나쁜 세상이니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하며 죄업이라 함은 죄를 지은 행위를 말한다.
수보리야 나는 지나간 세상 한량없는 아승지겁 동안 연등불을 만나기 전에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부처님을 만나서 모두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그냥 지내 보낸 적이 없음을 기억하거니와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다음 말법 세상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은 공덕은 내가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산수나 비유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강화) 이 경을 지니는 공덕이 많다는 것은 누누이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말씀하셨거니와 여기서는 부처님 자신이 과거에 많은 부처님을 모시고 섬겼던 공덕보다 말세에 누군가가 이 경을 믿고 지닌 공덕이 더 수승하다 하였으니 복으로는 보리를 얻을 수 없지만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설명한 공덕은 남과 내가 모두 보리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아승지는 무수라 번역하니 인도에서 많은 수효를 표시하는 단위의 하나이다.
겁은 시분이라 번역하니 시간이란 뜻으로서 아주 오랜 세월을 표시하는 단위의 하나이다.
인도 고대의 일반적인 해석으론 4억 3천 2백 만년이라 하고 불교의 학설로는 반석겁과 개자겁 등 두 가지가 있는데 모두가 엄청나게 긴 시간을 뜻한다.
산수는 셈이요 비유는 비교이니 모두가 수효의 단위이기도 하며 나유타는 역시 극히 많은 수를 표시하는 수량의 단위이다. 나유타만큼 공덕을 쌓아도 경을 지닌 복보다 못한 이유는 지혜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도 있거니와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로서 4상이 있는 상태와 4상이 다한 상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다음 말법 세상에서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공덕을 내가 모두 말하면 이 말을 듣는 이는 마음이 미치고 어지러워서 믿지 아니하리라 수보리야 이 경은 이치도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고 과보도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느니라.
(강화) 보시의 공덕과 이 경을 지니는 공덕의 차이는 어떤 수효나 비유로도 다 말할 수 없다. 만일 다 말한다면 듣는 이의 거의가 미칠 것이라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 경은 이치나 그 결과나 모두가 깊고 깊어서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 대목의 첫 머리에서 진여가 두루했다면 어째서 얻은 이와 얻지 못하는 이가 있는가 했는데 원래 두루한 진여를 얻는 이는 마음이 맑아졌기 때문이요 마음이 맑아지는 이유는 법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요 법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요 지혜가 있게 된 이유는 경을 들었기 때문이다 했다 그러므로 진여를 얻거나 얻지 못하는 이유는 경을 들었는가 듣지 못했는가에 달렸으므로 이 경은 진여를 얻게 하는 공덕이 있어 부사의 하다고 결론을 맺으셨다.
⑪ 머무르고 닦고 항복시킴도 (나)가 아닌가?
(과목해설) 위의 여러 대목에서 보살은 네 가지 마음에 머물러서 6바라밀을 닦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도록 항복시켜야 된다는 내용으로 말씀 하셨다 이에 다시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나)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니 (나)가 없으면 머무르고 닦고 항복시키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라는 주체가 없이 하는 수행은 공연한 헛짓이 아니겠는가 한다.
구경무아분 십칠
그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어떻게 머물러야 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키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였거든 의당 이러한 마음을 낼지니 내가 온갖 중생을 열반에 이르도록 제도하리라 하라 온갖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지만 실제에는 한 중생도 제도될 이가 없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참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수보리야 실제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강화) 이 대목은 얼핏 보기에는 대승정종분의 말씀과 같으나 내용은 다르다. 위에서는 단순이 어떻게 머무르고 어떻게 수행하리까? 하였지만 여기의 뜻은 어떤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면 진정 (나)가 없어야 하는데 (나)가 없다면 무엇이 그 마음을 항복시키오리까 함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진정한 보살이라면 (나)가 없다고 하셨으니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보살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중생을 제도하였노라 하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거늘 어찌 (나)가 있어야 머무르고 닦고 항복시킬 수 있다 하겠는가.
무슨 까닭인가 함은 무슨 이유로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는가 하는 뜻이니 그 해답으로서 아상 등 4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함은 어째서 제도할 중생도 없고 제도한다는 생각도 없는가 하는 뜻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법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은 낸다거나 안 낸다 할 분별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너와 나의 차별이 끊어진 적멸의 상태이다. 이런 마음을 낸 이가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노라 한다면 그는 벌써 보살이 아니다.
그러기에 실제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법이 없다 하셨다. 즉 보리의 마음을 낸 바가 없는 상태가 바로 보살의 마음을 낸 상태란 뜻이다.
그러므로 (나)가 없으면 누가 머무르고 닦고 항복시키랴 한 의문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
⑫ 부처님의 인행도 보살이 아니었나?
(과목해설) 바로 위 대목에서 말씀하시기를 실제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법이 없다 하셨으니 보리의 마음을 낼 법이 없다면 보리의 마음을 낼 이가 없단 말이요 보살이 없단 말이 아닌가 그러나 부처님은 과거 연등불께 보살로서의 수행을 쌓으시던 인행의 시기를 겪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어째서 보리의 마음을 낼 이가 없다 하시는가 한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불에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얻은 것이 있느냐?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뜻을 알기로는 부처님이 연등불에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얻은 것이 없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진실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있다면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지 않았으련만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없으므로 연등불이 내게 수기하기를 네가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셨느니라.
(강화) 이 대목의 말씀은 위의 장엄정토분과 비슷하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위에서 말씀하신 요지는 부처님께서 연등불께 얻은 법이 따로 없다는 것이고 여기서의 요지는 부처님께서 연등불께 얻은 바가 없으므로써 진정한 보살이였었다 하였으니 얻은 바가 없다는 말은 곧 보살이 있으리라는 의문을 막아주는 말씀이다.
연등 부처님 회상에세 보살행을 하시던 일은 장엄정토분에서 약간 언급하였거니와 수보리의 생각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법이 없다지만 부처님도 연등불께 보살행을 하시지 않았던가 하므로 여래가 연등불에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바가 있느냐 하셔서 얻은 바가 없다는 뜻을 시사하셨는데 이 뜻을 얼른 알아들은 수보리는 곧 아니옵니다. 왜냐하면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뜻을 알기로는 연등불에게서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렇다 얻은 바가 있으면 이는 모양다리요 분별이다. 모양다리와 분별이 없기에 수기를 받았지 그러한 티가 있었다면 연등불의 수기를 받아 오늘의 부처님이 되셨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 그러하니라.그러하니라. 하셔서 수보리의 말을 전적으로 공명하셨다.
수기라 함은 부처님이 보살이나 성문에게 이 다음 세상 언제 어디서 무엇 무엇이라는 부처가 되어 어떠 어떠한 교화를 펴리라고 예언하시는 일이니 이 수기를 받는 이는 마음에 걸림이 없어야 된다.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 따위의 걸림이 말이다.
석가세존께서도 연등불의 수기를 받으실 때 예외일 수도 없었다. 아무런 걸림도 티도 없으므로써 받을 수 있었다 아무런 티도 걸림도 없는 이에게 내가 보살이로다 하는 생각인들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이도 없다는 말씀이 잘못이 아니다.
⑬ 원인이 없다면 부처도 법도 없지 않을까?
(과목해설) 바로 위의 대목에서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없다하니 듣는 이가 생각하기를 아무것도 없는 것이 보리인가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의심하기를 보리는 부처가 되는 원인이니 보리를 닦으므로써 그 결과로 부처가 되는 것인데 이제 보리가 없다하면 그를 닦아 증득할 부처도 없을 것이요 따라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법도 없을 것이로다 하였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여래란 것은 모든 법이 진여라는 뜻이니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거니와 실제에는 부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 가운데 참된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말하기를 온갖 법이 아니므로 온갖 법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데 어떤 사람의 몸이 동떨어지게 크다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의 몸이 동떨어지게 크다 하신 것은 아니므로 큰 몸이라 하시나이다.
(강화) 첫 머리에서 어찌하여 그런가 한 것은 어째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없으므로써 연등불의 수기를 받게 되었는가 함이니 위의 대목 끝 부분에서 하신 말씀에 연유한다. 즉 보리를 얻은 바가 있으므로써 연등불의 수기를 받아 오늘의 석가모니가 되셨다면 가하겠지만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으셨다니 어리석은 생각에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여래란 것은 모든 법이 진여라는 뜻이니라 하였다. 진여는 위에서도 말했거니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진리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인격화 시켜 부른 것이 부처요 이를 실천요강으로써 부른 것이 보리이다. 그러므로 보리를 얻을 수 없다 한 것도 결국 진여의 한 측면을 드러내기 위한 말씀일 뿐이었으니 보리를 얻을 수 있다거나 없다거나에 관계없이 진여는 항상 존재하며 진여가 항상 존재하는 한 여래도 항상 존재한다 하셨다.
그리하여 이 대목의 의문에 답하는 한편 부처도 법도 없으리라는 의문을 풀어주신 것이다. 다음 구절에 사람들은 여래가 보리를 얻었다 하지만 실제에는 얻은 바가 없다 하신 것은 위에서 여래는 곧 진여이어서 항상 존재한다 한 말씀을 듣고 생각하기를 여래가 항상 있다면 보리도 얻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보리를 얻어야 부처가 되니까 말이다 한다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실제에는 얻을 바가 없다 하시어 얻은 바가 없는 것이 곧 보리라는 뜻을 보여 주셨다.
다음에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 가운데 참된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다 하신 것은 부처가 없으리란 의문은 풀렸지만 법이 없으리란 의문은 아직 풀지 않았으므로 하신 말씀이니 보리가 있는가 없는가를 의심하면 모두가 집착이기 때문이다. 보리를 얻었을 것이라 하면 있다는 집착인데 여기서 얻을 바가 없다하니 다시없다는 집착이 생겼다 그러므로 보리는 진실도 아니요 허망도 아니라 하셔서 두 집착을 여의게 하셨다. 진실이아니라니 있는 것이 아니요 허망이 아니라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온갖 법이 모두 불법이라 하시니 온갖 법은 좋거나 나쁘거나 범부거나 성인 따위 모든 법을 말하는데 이 모두가 불법 이외의 것이 없다.
이 모든 법이 모두가 진여로서 바탕을 삼았기에 모두가 불법이다 단 이 원리를 모르는 이에겐 불법이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보리를 얻을 수 없다면 부처도 법도 없으리란 의문은 당치 않은 말이 된다.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가 모두 거울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온갖 그림자는 모두가 거울의 그림자인 것 같다.
그러나 모든 법이 모두 불법이라 하셨으나 불법과 온갖 법의 정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나 이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진여의 정체를 임시 세속적인 표현을 빌려 불법이라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온갖 법이 아니므로 온갖 법이라 한다 하셨다.
끝으로 어떤 사람의 몸이 동떨어지게 크다 하셔서 진여의 본체는 말이야 어쨌든 엄연히 존재한다는 뜻을 보이셨으니 동떨어지게 큰 몸은 마치 장엄정토분의 끝 부분에서 몸이 수미산 같은 이라한 것과 비슷한 말이니 위에서는 진리의 본체인 보신불을 뜻한 말이요 여기서는 얻을 수 있기도 하고 얻을 수 없기도 한 보리의 상징인 부처의 본체를 가리킨 말이다.
동떨어지게 큰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얻을 수 있다 건 얻을 수 없다 건 말에 관계없이 초연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는 사람이다.
진여인 부처는 이 사람과 같이 우리들 중생 세계에 존재하신다. 그러나 그 동떨어지게 큰 몸은 역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큰 몸이 아니므로라 하였고 진여의 본체는 없지 않으므로 큰 몸이라 하시나이다. 하여 동떨어지게 큰 몸도 제일의제에는 있을 수 없으나 세속제로 보아서야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이상으로써 보리가 없다면 불법도 없으리라한 의문은 참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보리의 정체요 보리의 정체가 존재하니 불법은 엄연히 존재한다 하여 불법이 없으리란 의문을 막으셨다.
⑭ 그렇다면 아무도 중생을 제도하거나 국토를 장엄하지 못할 것 아닌가?
(과목해설) 위의 대목 즉 제⑫항의 의문에서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은 법이 없다 하신 것에 의하여 생각하기를 보리를 얻을 수 없다면 아무도 불법을 닦을 수도 없을 것이요 불도를 이룰 수도 없을 것이요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할 수도 없을 것이요 불국토를 장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살들은 어째서 발심하고 수행하여 중생들을 제도해서 청정한 열반에 들게 하고 나아가서는 불국토를 장엄하려 하는가 한다. 이렇듯이 이 의문과 바로 위의 제⑫항은 다 같이 제⑪항에서 일어났으나 그 내용이 약간 다르므로 여기서 끊는 법을 따로따로 제시하였다 또 이 의문은 위의 장엄정토분의 세 가지 의문 즉 제⑤,제⑥제⑦항과도 비슷하나 거기서는 주로 부처님의 성불과 중생제도를 말씀하였고 여기서는 주로 보살들의 발심과 수행에 대한 의문을 말씀하신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들도 역시 그러하여 만일 말하기를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면 보살이라고 이름하지 못할지니 무슨 까닭이냐 수보리야 진실로 보살이라고 이름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여래가 말하기를 온갖 법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리라 하면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할 지니 무슨 까닭이냐
여래가 말하는 불국토의 장엄은 장엄이 아니므로 장엄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 와 (법)이 없음을 통달하면 여래는 그를 참말 보살이라 이름 하느니라.
(강화)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국토를 장엄한다고 생각하면 참 보살이 아니니라 하였으니 역시 그러하여라 함은 위의 제 ⑫항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없다 한 것에 의하여 제⑬과 제⑭항에서는 아무도 수행할 이도 없고 불법도 없지 않겠느냐 하였는데 그와 같은 이론으로서 여기서는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거나 국토를 장엄하는 일도 그러하여서 실로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국토를 장엄할 것이 없다고 하여 이야기의 서두를 내신다 그러므로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 하리라 하면 보살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하셨다.
무슨 까닭인가 함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면 보살이라 할 수 없는가 함이니 보살이라고 이름 할 아무런 법도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란 (나)니 (너)니하는 상대적 관념이 없어져서 마음이 지극히 청정한 이에게 붙이는 이름인데 내가 중생을 제도하리라 해서야 보살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보리를 얻을 수 없다면 아무도 중생을 제도하거나 불국토를 장엄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한 의문 중에서 보리는 참으로 얻을 것이 없어야 참 보리요, 중생은 제도한 것이 없어야 참 제도라는 대답을 얻게 된다. 그러기에 결론 부분에서 부처님은 자기가 평소에 하시던 말씀을 다시 인용하여 온갖 법은 아상, 인상 등 사상이 없다고 하노라 하셨으니 이 아무런 모양다리도 없는 실체에 부합된 이가 보살이요 이제 부합된 중생제도가 참 제도요 이에 부합된 장엄이 참 장엄인 것이다.
중생 제도의 경우과 같은 논리로서 국토 장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니 여래가 항상 말씀하신 불국토의 장엄은 (나) 와 (너)가 있는 상대적인 장엄이 아니라 (나) 와 (너)의 상태가 끊어져서 평등하고 둘 아닌 장엄이라야 참 장엄이라 한다고 하셨다.
그럼으로써 보살의 정의를 다시 밝히셨으니 보살이 (나) 와 (법)이 없음을 통달하면 참 보살이라 한다 하셨다.
그런데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이 위의 장엄정토분에서 제⑥항의 의문으로도 말씀됐고 여기서도 말씀해서 중복되는 감이 있으나 위에서는 부처님이 그런 일을 어떻게 하셨는가 함이요 여기서는 보리의 법을 얻을 수 없다면 누가 이런 보살행을 하겠는가 함이니 위에서는 얻을 것이 있으리란 집착에서 연유된 법문이요 여기서는 불국토를 장엄할 사람 즉 보살이 있어야 되겠다는 집착에서 연유된 법문이다. 그리하여 참 보살은 참으로 중생제도를 한 바도 없고 불국토를 장엄한 바도 없어야 된다 하셨다.
⑮ 그렇다면 부처님들도 법을 보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과목해설) 이 대목은 위의 구경무아분의 후반인 제 ⑭항의 의문을 해답한 말씀에 연유하였으니 그 대목에서 말하기를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 하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 하면 보살이 아니라 한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이 말씀은 결국 (나) 와 (너)의 차별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나) 와 (너)의 차별을 보지 않는다면 결국 부처님까지도 아무런 법을 보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지혜의 눈이 없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일체동관분 십팔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육안을 가졌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육안을 가지셨나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천안을 가졌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천안을 가졌나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혜안을 가졌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혜안을 가졌나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법안을 가졌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법안을 가졌나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이 어떠하냐? 여래가 불안을 가졌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불안을 가지셨나이다.
(강화) 육안은 육체적인 눈이니 우리들의 눈과 같은 것이요, 천안은 초인간적인 눈이니 가리운 곳이나 아주 먼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이요, 혜안은 참된 근본 지혜로써 진리를 분명히 밝혀보는 지혜의 눈이요, 법안은 참된 후득지로써 중생 교화에 능숙한 방편의 눈이요,
불안은 불성이 끝까지 원만해진 궁극의 눈이니 부처님만이 가진 눈이다.
범부는 육안이 있으니 가리워진 안의 것만을 보고 2승은 천안이 있으니 하나의 삼천대천세계까지 본다 2승의 혜안은 아공(나가 공하다는 원리)만을 얻고 보살의 혜안은 아공과 법공(법이 공하다는 원리)의 일부를 알고 보살의 법안은 중생을 교화하되 지위마다에서 못 제도하는 중생이 약간 있으나 부처님의 육안과 천안은 무수한 세계를 환히 보며 부처님의 혜안은 3공(아공, 법공, 구공)의 이치를 꿰뚫어 보시고 부처님의 법안은 모든 중생을 몽땅 제도하신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뛰어난 공능을 종합하여 불안이라 하였다.
이러한 다섯 가지 눈을 가지신 부처님은 실로는 모든 법이 있다고 보시지 않으나 경계를 분명히 아는 눈이 없지는 않으니 이러한 눈들로써 맑게 그리고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고 할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법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참으로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부처님의 바른 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항하의 있는 모래를 부처가 모래라 말 하느냐?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모래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한 항하에 있는 모래 수효가 많은 것 같이 그렇게 많은 항하가 있고 이 여러 항하 있는 모래 수효가 많은 것 같이 그렇게 많은 항하가 있고 이 여러 항하에 있는 모래 수효와 같은 불세계가 있다면 이런 불세계는 많지 않겠느냐? 엄청나게 많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렇게 많은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노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모두가 마음이 아니므로 마음이라 이름 할 뿐이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강화) 부처님도 법을 보지 못하리라한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섯 가지 눈을 갖추어서 모든 법이 다 얻을 바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보시므로써 부처님이 되셨다고 하셨고 이에 다시 온갖 중생들의 마음씨를 다 보시되 실로 보시는 바가 없으므로써 참으로 부처님의 공능이 구족하다고 하신다.
항하의 모래 그 모래만치 많은 항하 그 항하만치 많은 불국토 그 불국토 안에 사는 온갖 중생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형태인가? 그런데 부처님은 그들이 부리는 온갖 심성을 환하게 다 아신다니 참으로 위대한 어른임을 알겠다. 따라서 부처님이 아무런 법도 보지 못하리란 의문은 공연한 기우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중생들의 온갖 마음을 다 아신다 해도 마음의 개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슨 까닭인가 하고 자문하셨으니 즉 어째서 부처님이 많은 마음들을 다 아시는가 함이다. 이의 대답으로서 마음은 제1의제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제에 따라서 마음이라 했을 뿐이라 했다.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라 함은 허망한 마음씨란 말이요, 마음이 아니라 함은 허망한 마음씨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요, 마음이라 이름 할 뿐이라 함은 허망한 마음이 공하여 실체가 없는 곳에 참 마음은 변함이 없으므로 마음이라 한다 하였고 참 마음에서 볼 때엔 부처님의 마음이나 중생들의 마음에 공통된 바가 있으므로 모두 아신다.
끝으로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함은 모든 마음이 모두가 허망한 마음씨여서 실체가 없어서 찾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상으로써 부처님은 다섯 가지 눈으로 모든 환경을 다 보시고 중생들의 마음씨도 다 아신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본다거나 안다는 실체가 있지 않다.
실체가 없음을 잘 앎으로써 부처님은 참으로 다 보시고 다 아시는 것이다.
⑯ 복덕이 뒤바뀌이면 마음도 뒤바뀌지 아니겠나?
(과목해설) 바로 위 대목인 제 ⑮항의 의문에서 말하기를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 마음이 아니므로 마음이라 이름할 뿐이라 한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이는 우리들의 마음은 모두가 뒤바뀌고 허망하여서 참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란 뜻이다. 이미 이와 같이 우리들의 마음은 뒤바뀐 전도임이 확실하다면 이 마음에 의해 닦는 복덕도 뒤바뀜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찌 복덕을 착한 법이라 해서 닦을 필요가 있으랴 한다.
법계통화분 십구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쌓아 놓고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받는 복이 많겠느냐?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받는 복이 매우 많겠나이다. 수보리야 만일 복덕이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하련만 복덕이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말하였느니라.
(강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 공덕이 많다는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여 이경을 지니는 공덕이 수승함을 드러내었거니와 여기서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의 보시로 얻어지는 공덕이 많지 않겠는가 하여 매우 많습니다 함으로써 진실한 복덕의 정의를 설명하였으니 올바른 보시는 그 복의 성품이 공하여 모양다리를 여의고 뒤바뀜(전도)이 없이 진실하다는 것을 설명하셨다.
위 대목에서 모든 마음은 모두가 허망하고 뒤바뀌어서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하였으나 이 허망한 마음이 원래 공한 줄 알고 집착 없이 행하는 무주상보시는 그 복의 성품 역시 모양다리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양다리가 없으므로 부피도 수효도 없어서 매우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 복덕이 있는 것이라면 복덕이 많다하지 않겠지만 복덕이(실체가) 없으므로 많다고 하느니라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 것은 복덕의 성품이 공하므로써 많다고 한다면 위에서 말한 허망한 마음의 성품도 공한 것이니 역시 많다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덕은 부처님의 지혜로써 바탕을 삼아 공의 성품에 부합되므로 공의 이치를 깨달을 때 복이 많아지고 허망한 마음은 뒤바뀌어서 공의 성품에 어긋나므로 공의 이치를 깨달을 때에 허망한 마음은 몽땅 사라진다. 마치 한 덩어리의 어름은 물이 임시 언 것이므로 얼음이란 것의 정체는 허망한 것이다.
이 허망한 얼음은 물을 바탕으로 하여 돌덩이 같은 물체를 이룬 것이므로 그 물체가 허망한 탈을 벗고 공으로 돌아갈 때 물은 많아지고 돌덩이 같이 굳던 본체는 몽땅 사라지는 것 같다. 이상으로서 이 대목의 의문이 모두 풀렸을 것이다.
즉 우리의 마음이 허망하듯이 우리가 닦아야 할 복덕도 뒤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나 뒤바뀐 마음에 끌리지 않고 행하는 무주상보시의 뒤바뀜이 아니라 무량한 복이 된다는 것이다.
⑰ 무위의 법이라면 어떻게 상호가 있을까?
(과목해설) 위의 무득무설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온갖 현인이나 성인들이 모두가 무위의 법에서 여러 가지 차별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한 것에 의하여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부처님은 형상이 없어야 하겠는데 어째서 서른 두 가지 몸매(삼십이상)와 여든 가지 살결(팔십종호)을 갖추시어 부처님이라 칭호를 얻었는가 하게 되었으니 이는 법신을 색신으로 오인한 의문이다.
이색이상분 이십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부처를 모두 갖춘 살결(구족색신)로써 볼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두 갖춘 살결로써 볼 수 없사오니 무슨 까닭인가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두 갖춘 살결이란 모두 갖춘 살결이 아니므로 모두 갖춘 살결이라 하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를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구족제상)로써 볼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두 갖춘 거록한 몸매로써 볼 수 없사오니 무슨 까닭인가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는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가 아니므로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라 하옵니다.
(강화) 무위의 법에 의해 차별을 이루었다 하니 무위란 유위 조작 없는 진여를 말한다. 이러한 무위의 법에 의해 성현도 부처님도 나오셨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의문이 무위에 의해 나타나신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서른 두 가지 모두 갖춘 몸매(삼십이상)와 여든 가지 모두 갖춘 살결(팔십종호)이 구족한 상호를 얻어 부처님이란 칭호를 얻었을까 하였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수보리의 이런 생각을 무찌르기 위하여 부처를 모두 갖춘 살결로써 볼 수 잇느냐 하셨으니 이 말씀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형체가 없는 무위의 법신불을 모두 갖춘 살결로써 볼 수 있겠느냐 함이니 원래 법신은 형상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얼른 깨달은 수보리는 못하옵니다. 하였으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로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두 갖춘 살결이란 승의제에 속하는 법신불을 모두 갖춘 살결로써 볼 수 있겠느냐 함이니 원래 법신은 형상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얼른 깨달은 수보리는 못하옵니다. 하였으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로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두 갖춘 살결이란 승의제에 속하는 법신불이지 세속제에 속하는 화신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체가 있는 육신(색신)으로는 참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한 것이다.
마치 거울 속에 아무 것도 없어야 모든 것이 다 비칠 수 있듯이 모두 갖춘 살결을 떠나서야 참 부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일 어떤 형태의 육신이라도 부처라 할 것이 국한되어 있으면 그 외의 것은 부처가 아니어야 되기 때문에 참 부처일 수는 없다.
이런 논리는 다음 구절에서도 동일하니 단 모두 갖춘 살결(구족색신=팔십종호)과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구족제상=삼십이상)만이 다르다. 첫 구절은 모두 갖춘 살결이 없으므로써 모두 갖춘 살결이 나타나고 다음 구절은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가 없으므로써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두 갖춘 살결이라 함은 부처님의 체질에서 보통 사람보다 좀 잘 생긴 부분 여든 가지를 골라서 이르는 말이요,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라 함은 부처님의 체질에서 특수하게 뛰어난 부분 서른두 가지를 골라서 이르는 말이니 이 살결(호)과 몸매를 합쳐 상호라 한다.
⑱몸이 없으면 어떻게 설법하나?
(과목해설) 이 대목도 역시 위의 무득무설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온갖 현인이나 성인들이 모두가 무위의 법에서 여러 가지 차별을 이루었다 한 것에 의하여 생각하기를 성인이나 현인이 실제로 없다면 부처님은 몸이 없다는 말이거늘 어떻게 설법을 하셨는가 한 것이니 말씀할 부처님의 몸이 없는데 어떻게 그에 의해 나오는 설법이 있으랴 한 뜻이다.
이 대목은 바로 위 대목인 제⑰항의 의문에서 무위의 법이라면 어떻게 상호가 있을까 한 것과 쌍벽을 이루니 위의 대목은 어떻게 몸이 있을까 함이요, 이 대목은 어떻게 설법한 음성이 있을까 함이어서 몸과 음성과의 관계를 이룬다 그리하여 몸 없는 몸과 말 없는 말이 참 몸이요 참 설법이란 내용으로 대답하여 두 가지 의문을 모두 풀어 주신다.
그런데 이 대목과 같이 부처를 겉모양으로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이 위의 무득무설분과 장엄정토분과 여법수지분인데 처음은 화신불이 설법을 하는가 함이요 둘째는 연등불께 얻은 법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함이요 셋째는 보신불이 설법을 하는가 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의문과 중복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비설소설분 이십일
수보리야 여래가 생각하기를 내가 말한 법이 있다 하리라고 너는 생가지 말라 그런 생각을 말지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이 있다 한다면 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 나의 말뜻을 모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법을 말한다는 것은 말할만한 법이 없으므로 법을 말한다 하느니라.
그 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나 오는 세상에 이런 법문을 듣잡고 믿음을 낼 이가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도 아니요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중생이라 중생이라 한 것은 여래가 말하기를 중생이 아니므로 중생이라 하느니라.
(강화) 부처님의 정체가 무위라면 어떻게 상호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몸이 없으므로써 몸매가 구족하다 하여 막으신 것이 위 대목이거니와 이 대목은 다시 부처님의 몸이 없다면 어떻게 설법의 소리가 있을 수 있는가 하여서 부처님의 설법하신 음성이 분명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수보리에게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 하리라 하느냐 하셔서 그런 생각을 말라 하신다.
부처님의 몸은 없으되 구족하다 한 것같이 부처님의 음성도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으되 또렸또렸하게 들린다. 이것이 부처님의 설법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함은 어째서 그런 생각 즉 여래께서 법을 말씀하신 법이 있다는 생각을 말라 하셨는가 한 것이니 부처님은 모든 법의 공한 이치를 잘 알아서 아무런 집착 없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거늘 누군가가 그 설법의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님의 본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비방하는 짓이라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님의 참 설법인가 말할 만한 법이 없으므로 법을 말한다 하느니라 이것이 부처님의 참 설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법문을 누가 알아들어야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 없다 했고 말씀하신 바 없음은 곧 법신이라 했고 법신은 형상이 없다 했으니 말이다. 이는 마치 정신희유분에서의 말씀과도 비슷하나 먼저 것은 모양다리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믿을 이가 없겠다는 뜻이요. 여기서는 부처님의 본질과 설법과의 정의에 대한 풀이를 믿기 어렵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수보리가 어떤 중생이 오는 세상에 이런 법문을 듣잡고 믿음을 낼 이가 있겠나이까 하였다.
이때 수보리 존자에게 혜명이란 칭호를 붙인 것은 지혜로써 생명을 삼기 때문이란 뜻이요 믿음을 낸다 함은 바로 믿어 물러서지 않는 경지에 이르른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만일 이런 법을 의심 없이 바르게 믿는 이는 중생도 아니라 하였으니 범부의 중생이 아니란 뜻이요 중생 아님도 아니라 했으니 성인의 무리에 속하는 중생이 아니지도 않다는 뜻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함은 어째서 중생이 아니라 하기도 하고 중생이라 하기도 하는가 함이니 이에 대한 부처님의 해명에 중생이라 중생이라 거듭 외치시고는 중생이 아님으로라 함은 캄캄하게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요 중생이라 한다 함은 그 사람의 성품에 성인의 씨앗이 들어 있기 때문이니 이를 다시 말하면 중생이라 할 것이 없지만 중생이라 말하는 이유는 어러석은 바보 중생에 국한 시킨 뜻이 아니라 중생이면서 성인의 종자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거룩한 중생이란 뜻에서 중생이라 부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는 세상에 이 법을 믿는 중생은 겉모양은 비록 중생이지만 거룩한 중생이라 하여 믿을 이가 있다는 것과 믿음을 내야 한다는 것을 겸하여 강조하셨다.
⑲ 법이 없으면 어떻게 닦고 증득하는가?
(과목해설) 위의 무득무설분과 구경무아분에서 모두 말하기를 보리를 얻을 수 없다 한 것에 의하여 생각하기를 보살은 발심하여 등각 묘각에 이르기 까지 차츰차츰 지위에 맞게 보리를 얻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어째서 한 법도 얻을 수 없다고 누누이 하셨는가 한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법을 증득한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신다.
무법가득분 이십이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은 얻으신 바가 없기 때문이옵니까? 그러하니라.그러하니라.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에서 조그만한 법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강화) 보리의 법이 없다면 어떻게 닦아 증득하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얻은 바가 있다면 벌써 망상이다.
아무 것도 없을 때에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바른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심행선분 이십삼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나니 아상도 없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이 온갖 착한 법을 닦으면 즉시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야 착한 법이란 것은 여래가 말하기를 착한 법이 아니므로 착한 법이라 하느니라.
(강화) 또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늘고 줄음, 크고 작음 따위 상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절대 평등이 있을 뿐이다. 이런 평등한 법에 대하여 나는 깨달았다 너는 깨닫지 못했다 하는 식의 잡념이 있다면 이는 모두가 그 법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4상이 없이 온이 바로 바른 깨달음인데 기어이 깨달음의 대상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 잘못이란 뜻으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흔히 본래 부처라 해서 인과를 무시하는 듯한 사람을 본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는 점을 이 기회에 말해두고 싶다.
비록 이 법이 평등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한다지만 아무런 수행도 않는 장삼이사가 모두 바른 깨달음이란 것은 아니다.
단 4상이 없는 상태에서 온갖 착한 법을 닦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착한 법이란 것 역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착한 법이 아니므로 착한 법이라 하느니라 하였다. 승의제로 봐선 착한 법이 아니지만 세속제로 보기 때문에 착한 법이라 부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리를 얻을 수 없단 말이 무득무설분과 구경무아분과 바로 위 대목인 무법가득분와 이 대목 과에서 모두 네 차례 나오는데 문장은 같으나 내용은 모두 다르니 무득무설분은 석가 여래께서 과위를 얻은 것이 있으리란 의문에 대한 것이요, 구경무아분의 후반인 제⑫항의 의분에선 선혜선인이 연등 부처님에게서 수기를 이룬 바가 있으리란 의문에 대한 것이요, 마지막의 무법가득분에선 닦을 것도 있고 증득할 것도 있으리란 의문에 대한 것임을 덧붙여 둔다.
⑳ 말씀하신 바가 무기이거늘 어떻게 성불의 원인이 되겠는가?
(과목해설) 바로 위 대목의 정심행선분에서 말하기를 온갖 착한 법을 닦으면 즉시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한 것에 인하여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어째서 전부터 가끔 말하기를 이 경을 지니면 보리를 얻는다 했을까 착한 법을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은 가하겠지만 경을 지니어 보리를 얻는다는 말은 틀린 것 같다.
왜냐 경은 음절 낱말 구절 문장(성명구문) 등 네 가지로 구성되어 착한 법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네 가지는 무기이어서 선도 악도 아니다.
이런 무기의 성품인 경의 말씀을 원인으로 삼아서 착한 법의 극치인 보리를 얻는단 말은 마치 자갈을 삶아서 떡을 얻으려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의문에도 까닭은 없지 않으니 착한 원인으로 착한 결과를 받고 악한 원인으로 악한 결과를 받는다는 것은 일반상식이지만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인 문자로써 원인을 삼아 선의 최상급인 보리를 얻는단 말은 이해할 수 없단 말이니 그리 무리한 소리는 아니다.
여기서 무기에 대한 풀이를 좀 더 하고 지나가야겠다. 우리들의 일상 활동을 그 성격으로 구분하면 선과 악의 두 측면뿐이다.
그런데 이 무기란 것은 선도 악도 아닌 행동이다. 예를 들자면 숲속의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와 나아가서는 잠결에 몸부림을 치다가 빈대를 꿰뜨려 죽였을 때의 행위도 이 무기에 속한다. 어쨌든 선도 악도 아닌 형태로서 좋건 나쁘건 하등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말씀인 이 경은 무기의 성품인 음성 낱말 구절 문장의 집합체이니 이 경을 지니고 읽는 것만으로는 보리를 얻을 원인이 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복지무비분 이십사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 안에 있는 여러 수미산들처럼 그렇게 클 칠보로 보시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에서 4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일고 외우고 남에게 일러 준다면 앞의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수효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강화)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경을 지니는 공덕이 끝없음을 말씀하셔서 경 자체는 무기의 성품이지만 이로 인해 바른 견해를 얻고 이 견해에 의해 바른 수행을 하여 마침내는 보리를 얻게 된다 하셨다.
마치 거울 속에 나타난 자기 얼굴의 그림자는 무기이지만 그를 보고 바른 판단을 하여 자기 본 얼굴의 자태를 바르게 아는 것 같다 하겠다.
그런데 이 대목의 의문은 이상적멸분 제⑨항의 의문에서 말은 허무한 것 그것으로 어떻게 진여를 깨치랴 한 것과 비슷한데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위에서는 유위의 법은 본체가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요 여기서는 무기의 성품은 원인이 되지 못하리란 의문이니 분명 다르다. 그러므로 양의 소명태자께서 이 경을 삼십이분으로 나누실 때 전자를 이상적멸분 후자를 복지무비분이라 하여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도 없다 하셨다.
(과목해설) 이 대목도 역시 정심행선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다 한 것에 의하여 생각하기를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지만 부처님은 이미 설법도 생을 하셨으니 높고 낮은 음이 생겨서 평등이 않는가 한다.
화무소화분 이십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너희들은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생각한다고 여기지 말라 수보리야 그런 생각을 말지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진실로 어떤 중생도 여래가 제도 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을 여래가 제도할 것이 있다면 이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말하기를 아상이 있다한 것은 곧 아상이 아니거늘 범부들은 아상이 있다고 여기느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는 말하기를 범부가 아니라 이름이 범부라 하느니라.
(강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고 생각하리란 생각을 말라 하셨다.
무슨 까닭인가 함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말라 하는가 하는 뜻이니 실제에는 여래가 어떤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여래가 중생을 제도한 바가 그토록 전혀 없다 하는가 중생이란 5온이 일시적인 집합체에다 붙인 거짓 이름이어서 이름도 공하고 실체도 공하다.
이 공의 본질은 바로 법계와 부처의 근원이며 중생의 바탕이다.
그렇다면 부처와 중생은 본질면에서 모두가 공이요 평등하다.
누가 누구를 제도한단 말인가 기어이 부처와 중생의 차이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부터가 대단히 잘못되었다. 그러므로 소명태자는 화무소화분 즉 교화를 하되 교화한 바가 없는 때문이라 하였고 무착은 이 대목을 부처님의 크신 교화방법이라 판단하였다.
그렇지만 여래가 분명 중생을 제도하였는데 어째서 없다 하는가 이는 곧 여래에게는 아상 등 4상이 남아 있음으로써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중생을 여래가 제도한 것이 있다면 이는 곧 여래가 4상이 있다는 것이니라 하였다. 이를 다시 고쳐서 말하면 여래는 4상이 없으므로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상이란 것 또한 괴상한 존재이어서 세속제로는 있으나 승의제로는 없다. 범부라는 것 역시 그리하여 있는 듯 하되 없고 없는 듯 하되 있다.
왜 그럴까 역시 세속제와 제1의제의 측면에서 보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니 이 상이 있음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이 난다 하시고는 다시 아상이란 것이 실제로 있는 것으로 집착될까하여 아상이 없다 하시고 범부들이기에 본래 없는 아상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시고는 다시 범부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으로 집착할까봐 범부가 아니라 해서 어디에도 마음이 머물지 못하게 하셨으니 범부는 지혜가 얕아서 진리를 증득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을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한 바가 없다는 말씀이 대승정종분과 구경무아분에서 두 곳에 이 대목이 나오는데 첫째는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여의라는 뜻이요, 둘째는 중생을 제도하는 이가 바로 (나)가 아니던가 하는 의문에 대함이요, 셋째는 (나)가 없다면 누가 중생을 제도하리요 하는 의문에 대함이요, 마지막은 참 법계는 평등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이 맞지 않겠구나 하는 의문에 대한 것이니 멀리 들으면 한곡의 교향곡이어서 들을 만 하더니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으니 솔바람 냇물소리 어지럽구나 하는 옛 어른의 싯귀와도 같다 하리라.
모양다리 만으로도 참 부처님을 짐작해 알 수 있지 않을까?
(과목해설) 위의 이색이상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모두 갖춘 살결(구족색신)로는 볼 수 없다 하시고 또 모두 갖춘 거룩한 몸매(제상구족)로도 볼 수 없다 하셨으니 이는 법신은 끝내 모양다리가 아니다. 그러나 모양다리가 부처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 모양다리가 없는데서 모양다리가 나타났으므로 모양다리는 법신을 여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의심하기를 모양다리가 없는데서 모양다리가 나타났다면 모양다리만 봐도 모양다리 없는 참 부처님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 모양다리 없는 참 부처님은 이면이요 모양다리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치 산 너머에서 솟는 연기를 보고 그 밑에 불이 있는 줄 아는 것 같이 모양다리에 의해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법신비상분 이십육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일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여래라고 하리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뜻을 알기로는 삼십이상으론 여래를 보지 못하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1. 겉모양으로 부처를 찾거나 약이색견아
2. 목소리로써 부처를 구한다면 이음성구아
3. 이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시인행사도
4. 끝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 불능견여래
(강화) 이런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겉모양인 삼십이상만으로 여래를 추측해 알 수 있다고 여기느냐 하시니 수보리는 서슴없이 그러하나이다 하였으니 법신은 어떠한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법신은 어떠한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마치 초목의 싹만을 보고는 그 뿌리를 다 알 수 있다는 것 같으니 뿌리는 겉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므로 끝내 추측일지언정 분명히 보지는 못 한 것처럼 법신을 추측해 알려거나 겉모양에 의하여 속 알맹이를 알려는 것이 아마도 잘못의 기초인가 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어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보려하면 전륜성왕도 여래일 것이다 하여 전륜성왕이 여래일 수 없는 것 같이 겉모양으로 본 것이 참 법신불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착보살은 이 대목을 법신의 모습을 잘 성취하는 말씀이라 하였다.
전륜성왕은 위의 의법출생분에서 풀이한 4천하를 통솔한다고 믿어지던 인도 고대 신화 속의 이상적인 왕이니 인도는 많은 나라가 육속해 있어 조득모실이 빈번하므로 천하를 통일하여 평화를 갖다 줄 영주를 갈구하게 되었는데 그 희구하는 이상적인 군주가 바로 이 전륜성왕인 것이다.
그의 생김새는 부처님의 삼십이상과 꼭 같고 수명은 인간의 수명이 팔만사천세일 때에 이나 가장 긴 수명과 풍요한 부귀를 누린다.
그 중에 네 종류가 있으니 1, 철륜왕은 한 천하를, 2,동륜왕은 세 천하를, 금륜왕은 네 천하를 다스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갓난 시절에 정반왕은 싯달다 아기의 관상을 뵈었더니 말하기를 이 아기는 삼십이상이 구족하니 전륜성왕이 아니면 부처님이 되시겠다 하니 왕은 부처님이 되시는 것도 좋지만 전륜왕이 되기를 더 희망했다 한다.
이와 같이 전륜왕과 부처님은 겉모양으로는 같으나 실제는 다르니 하나는 유류의 복으로 얻어진 바요, 하나는 무류의 복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삼십이상만을 부처라 한다면 전륜성왕도 부처이어야 되겠다. 하신 것은 겉모양을 부처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수보리는 이내 부처님의 이 뜻을 알아차리고 제가 부처님의 뜻을 알기로는 삼십이상으론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실체 즉 법신에 의하여 겉모양이 나타났으므로 겉모양이 실체와 다르지 않은 줄은 알았으나 진실한 공덕은 겉모양에 있지 않나니 겉모양에 의해 실체인 법신을 더듬어 찾는 짓은 황당한 짓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다음 부처님의 게송은 장행과 별다른 어려움은 없으나 음성으로 부처를 구하지 말라는 말이 더 있을 뿐이다.
겉모양이 법신인가 여기거나 설법한 음성이 법신인가 여기거나 하면 삿된 짓을 하는 자란 뜻이다.
어찌 모양과 음성뿐이랴 이 경우를 미루어 모든 사물에 미치면 모든 형식적인 것으로는 진실을 볼 수 없다고 봐야 될 것이다.
그런데 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씀도 여러 차례 나왔으니 첫째는 여리실견분에서는 부처가 되려는 목표에 향하는 수행의 방법으로서 겉모양으로 부처를 보려는 짓이 틀렸다는 내용이요, 장엄정토분 후반에서 부처님이 부처가 되신 것은 겉모양을 여의었다는 뜻이요, 셋째는 이색이상분에서 모두 갖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없다 하여 참 법신에 의해 거짓인 겉모양이 나타났다는 뜻을 말씀하셨고 이제 넷째는 겉모양에 의해 참 부처를 찾을 수 없다는 뜻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부처의 과위는 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을까?
(과목해설) 바로 위 대목에서 모양다리로써 법신을 추측해 알려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고 또 모양다리나 음성으로 부처를 구하려 하면 삿된 짓이다 한 말씀을 듣고 생각하기를 부처님의 과위는 오로지 형상도 없고 조작도 없는 무위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복덕의 업은 아무리 닦아도 결국은 모양다리가 있는 과위만을 받는다 모양다리는 참 부처가 아니므로 참 부처의 과위를 얻으려면 모두 갖춘 몸매로도 얻을 수 없고 복덕의 업으로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 부처의 과위는 복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리라 하여 복덕의 씨앗을 잃게 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복덕을 떠나서 보리를 얻으려 하거나 복덕을 탐내어서 보리를 얻으려고 생각하면 복덕도 과위도 모두 잃은 실수가 있으리란 내용으로 말씀하신다.
무단무멸분 이십칠
수보리야 네가 생각하기를 여래는 거룩한 몸매를 갖춘 탓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수보리야 여래가 거룩한 몸매를 갖춘 탓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라.
수보리야 너는 혹시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이는 모든 법이 아주 없다고 말하리라 하느냐 그런 생각을 말지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이는 법에 대하여 아주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느니라.
(강화) 이상은 복덕을 떠나서 보리를 얻으려는 허물을 막으신 것이니 처음에 여래께서 거룩한 몸매를 갖추지 않아도 보리를 얻으리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하신 까닭은 거룩한 몸매가 없어야 보리도 복덕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써 거룩한 몸매를 얻을 원인을 무시해 버리는 짓은 없음에 치우친 생각이어서 복덕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이는 보든 법에 아주 없다고 말하리라 하는가 그런 생각을 말라 하셨다.
그렇다 모든 법이 결정적으로 있다고 하면 항상함에 치우치고 없다고 생각하면 아주 없음(단)에 치우쳐서 모두 안 된다 그러므로 부처의 과위는 복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는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함은 어째서 그런 생각 즉 여래는 거룩한 몸매를 갖추지 않아도 보리를 얻으리라는 생각을 말라 했는가 보리의 마음을 낸 이는 아무런 치우친 생각도 없어야 한다.
항상함에 집착되어도 안 되거늘 하물며 아주 없다는 생각을 내어서야 쓰겠는가 그러므로 아주 없는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니라 하셨다.
그러므로 소명태자는 이 대목을 무단무멸분이라 하였으니 단멸은 아주 없다는 고집이다.
그러면 수행자의 아주 없다는 고집이란 어떤 것인가 생사를 끊고 열반에 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중생 제도를 소홀히 하는 일이니 아주 없음의 소견에 집착되어 복덕을 닦지 않으면 현실을 너무나 무시하여 복덕을 잃는 허물이 생긴다.
그런데 보살은 그러한 아주 없음에서 벗어나므로써 참 공덕을 잃지 않는다.
불수불탐분 이십팔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효같이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워 보시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온갖 법이 (나)없는 줄 알아서 확실한 지혜(인)을 이룬다면 이 보살은 저 보살의 공덕보다 썩 나으니 수보리야 모든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나이까? 수보리야 보살들은 지은 복덕을 탐내거나 고집하지 않아야 하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 하느니라.
(강화) 이상은 복덕은 탐내서 보리를 얻으려는 허물을 막으신 것이니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워놓고 그것으로 보시한 공덕과 온갖 법이 (나)없는 줄 알아서 확실한 지혜를 얻은 공덕과를 견두면 나중의 공덕이 훨씬 수승하다 한 것은 이유인가 보살이 무아[(나)라는 생각이 없어진 상태]의 마음씨로써 복덕은 법신을 장엄하는 것이어서 참된 복덕이 구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 없음이란 인무아와 법무아이니 인무아는 (나)를 구성한 (나)의 실체가 없단 말이요 법무아는 (나)를 중심해서 이뤄진 법칙들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치를 확실히 알아 거기에 확고하게 안정된 상태를 확실한 지혜(인)라 하니 이런 지혜를 얻으므로써 부처의 과위는 복덕과는 관계가 없으리란 의문을 벗어나는 바른 복덕을 닦아 부처의 과위에 발돋움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른 복덕이란 무엇인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으셨으니 즉 어째서 (나)가 없이 닦은 복이 보시한 복보다 나은가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 하셨다. 복덕을 받지 않는다 함은 복덕에 집착되지 않는다는 뜻이니 복덕을 닦되 복덕에 집착되지 않는 일 이것이 참 복덕을 받는 길이며 부처의 과위에 직결되는 수단인 것이다.
이상으로써 보살은 복덕의 행을 무시하여도 안되고 복덕의 행을 탐매어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거니와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 함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므로 장로께서 다시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나이까? 하고 물어서 보살의 참 복덕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규명하셨으니 보살은 복덕을 탐내거나 집착하면 유루의 원인을 이루어 그 결과로서 삼십이상의 감응을 받게 되나 전륜성왕은 될지언정 부처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제시한 의문이 몽땅 성립되어 원인과 결과가 모두 도리에 맞지 않게 되리니 원인은 유루의 보시가 되고 결과는 유루의 삼십이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을 짓되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으니 원인은 분명 무루의 수행이요 그 결과로 얻어지는 삼십이상은 무루이어서 법신을 장엄하리니 그것이 바로 부처의 과위인 것이다.
이상으로써 보살은 부처의 과위를 얻기 위해 복덕의 행을 닦되 무시하지도 않고(무단무멸분) 집착되지도 않아야(불수불탐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과목해설) 바로 위 대목에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 하셨는데 복덕을 받는다 함은 복덕을 탐내고 고집한다는 뜻이라 했다.
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보살이 복덕을 탐내고 고집하지 않는다지만 그는 이미 복을 닦아 부처의 과위를 이루셨고 다시 그 복을 남기어 말세 중생들이 누리도록 하고 떠나셨으니 보살에서 부처님이 되셨고 부처님에서 다시 열반으로 가신 자취로 연결되는 복덕의 연속은 분명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 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부처님의 본래 수명은 백 년이었다. 그런데 이십년을 덜 사시고 미리 열반에 드셨다. 그 남기신 이십년의 복을 오늘의 우리들이 누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들 누구나가 부처님께 공양하고 섬기면 무량한 복을 받게 된다. 이는 곧 화신 부처님이 복을 받으셨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남겨줄 수도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며 따라서 부처님이 오시기도 가시기도 함이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겉모양인 화신이 열반에 드실 뿐 법신이야 어찌 가고 옴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삼십이분으로는 위의적정분(이십구) 즉 가고 오는 행동이 아주 고요해졌다 하였으니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의 귀추는 미루어 알 수 있으리라.
위의적정분 이십구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 하면 이 사람은 나의 말한 뜻을 알지 못함이니 무슨 까닭이냐 여래라는 이는 어디로부터 오는 일도 없고 가는데도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하느니라.
(강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을 받으시다가 그 복의 일부를 우리들에게 남겨주고 열반의 세계로 가셨다거나 또는 여래가 이 세상에 얼마동안 머무셨다 하는 이가 있으면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하셨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래라 함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기 때문이라 했다.
위 대목에서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아 집착이 없어야만 참 무루의 복을 이루고 참 무루의 복은 형체나 수량이나 거래가 없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들이 보기에 이천오백년전 인도의 정반왕궁에 고추를 달고 태어난 실달다 아기가 나중에 출가하여 도를 이루시고 그가 다시 퀴시나가라에서 어른 겨드랑을 땅에 대고 누워서 내 할 일을 다 했노라 하고 칠십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신 자취가 있을 뿐이다.
복덕을 탐내지 않고 받지 않음으로써 얻어진 무루의 법신이야 어찌 가고 옴이 있으랴.
그렇다면 이천오백년전의 역사적인 부처님은 전혀 껍데기이며 쭉정이여서 일고의 가치도 없단 말인가 밝은 달이 하늘에 두둥실 뜬 밤이면 온 누리의 크고 작은 물엔 모두 달이 비친다 여러 물에 달이 비쳤다 해서 달이 가고 오는 것은 아니다 인연이 있는 곳엔 비칠 뿐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하셨으니 화신으로 와서 복을 받으시고 화신의 몸을 버리고 떠나서는 복을 물려 주셨으리란 의문은 맞지 않는다. 가고 옴이 없을 때 참으로 자유로이 왕래하고 복을 받음이 없을 때 참으로 한량없는 복을 받는다.
(과목해설) 위의 법신비상분(이십육)에서는 부처님과 전륜왕은 혼동될 수 없다는 뜻에서 겉모양으론 법신을 추측해 알 수 없다 했고 위의적정분에서는 부처의 정의를 잘못 알까봐 법신은 가고 오고 앉고 눕는 것이 아니라 했으니 이것으로 봐서 법신과 화신은 다른 것 같고 무단무멸분(이십칠)과 불수불탐분(이십팔)에서는 아주 없다는 생각을 막아 복덕을 끝내 잃지 않게 하였으니 화신과 법신은 별 차이가 없는 것도 같다.
그래서 생긴 의문인데 이는 같음과 다름이 모두 있는 것인 줄 아는데서 온 의문이나 이 대목에선 티끌과 세계와의 관계를 들어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일합이상분 삼십
수보리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티끌을 만든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티끌들이 많지 않느냐? 매우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오면 만일 이 티끌들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티끌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티끌들이란 티끌들이 아니므로 티끌이라 이름하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아니므로 세계라 이름하나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오면 만일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한 덩어리(일합상)가 된 것이려니와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한 덩어리는 한 덩어리가 아니므로 한 덩어리라 이름하나이다.
수보리야 한 덩어리란 것은 곧 말할 수 없는 것이어늘 다만 범부들이 그것을 탐내고 집착하느니라.
(강화) 법신과 화신은 같은가 다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삼천대천세계와 티끌과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씀하신다. 물론 삼천대천세계의 단위는 매우 크고 그를 부순 티끌의 단위는 매우 적다하겠지만 삼천대천세계를 떠나서 티끌이 있을 수 없고 티끌을 떠나서 삼천대천세계가 이루어질 수도 없다. 티끌의 전체가 삼천대천세계요 삼천대천세계가 부분이 티끌인 것이다.
그러므로 법신과 화신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전체를 떠나서 부분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수보리존자는 잘 알았으므로 매우 많겠습니다 하고 이어 무슨 까닭인가 하오면 하여 자기의 견해를 폈으니 티끌이란 것이 전체인 세계를 떠나서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티끌이라 하지 않겠지만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세계의 부분인 티끌들이라 합니다 하였다.
티끌뿐이 아니라 세계라는 것 역시 그렇다 티끌이 세계를 떠나서 있을 수 없듯이 세계라는 것 역시 티끌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다만 티끌을 전제한 상대적인 표현 방법으로 말해서 세계라 할 뿐이다.
이상으르써 티끌도 세계도 모두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빈이름 뿐임을 알았다. 다시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오면 하여 세계가 따로 없는데 세계라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으니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한 덩어리(일합상)가 된 것이리이다 하여 세계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도 있을 수 없고 그를 형성한 티끌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삼천대천세계란 차별이 있을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한 덩어리라는 것도 말뿐이요 제일의제에는 있을 수 없다.
이상 여러 구절을 다시 정돈하면 티끌, 세계, 한 덩어리, 삼천대천세계 모두가 세속제로는 있을지언정 제일의제에는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한 덩어리란 것은 곧 말할 수 없거늘 범부들이 그것을 탐내고 집착하느니라 하셔서 세계와 티끌이 서로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듯이 법신과 화신도 같다거나 다르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였다.
말할 수 없다 함은 찾을 수 없다는 뜻과도 같으니 세계는 티끌의 집합이므로 찾을 수도 없고 티끌은 마음뿐이므로 찾을 수 없고 마음은 분별의 총칭이므로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거늘 중생들이 분별의 마음으로써 실제로 있는 것인 줄 알고 이것은 물질이다. 이것은 마음이다. 이것은 법신이다. 이것은 화신이다 하여 명확한 구분을 지으려하니 세속제로는 있다고 하였으나 제일의제에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견불생분 삼십일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말씀하셨다 한다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내가 말하는 뜻을 안다 하겠느냐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하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오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므로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 이름 하나이다.
(강화) 법신과 화신은 같은가 다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위에서는 세계와 티끌등의 경계를 들어 같다거나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물이라 말씀 하였거니와 여기서는 다시 우리들의 관념 위에서 그런 허물을 일으키는 요소를 규명하여 이 대목의 물음에 답하신다.
우리들의 관념이라 함은 곧 마음인데 마음은 분별 인식하는 작용에다 붙인 거짓 이름일 뿐이다. 그렇건만 누구나 이 마음의 실제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등의 잘못된 고집을 크게 나누어 아집이라 하는데 아집은 자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굳이 믿고 모든 것을 사리의 타당성에 관계없이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허물이요 법집은 자기 몸 밖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고 또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에 지나치게 얽매는 허물이니 예컨대 나는 아집을 여의었다 하는 따위로서 아집보다 더 미세한 허물이다.
이제 관념 위에서 허물의 요소를 제거함에 있어 먼저 아집을 버리게 하셨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아견 내지 수자견을 말씀하신다 하면 그 사람은 나의 말뜻을 알았다고 하겠느냐 하신 물음에 수보리는 아닙니다 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부처님은 평소 이러이러한 짓은 수자견이라 하는 식의 말씀을 하셔서 아집의 상태를 말씀하신 바가 없지는 않으나 그 아견등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있는 것이므로 세속제적인 말만으로 아견 등이라 하셨을 뿐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하여 아집이 없는 것임을 알았고 아집이 없으므로써 분별하는 마음도 따라서 사라진다. 이것이 법신과 화신이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지 않고 바로 부처의 본체를 보는 첫 방편인 것이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이는 온갖 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렇게 알며 이렇게 보며 이렇게 믿고 해석하여 법상을 내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법상이라 하는 것은 여래가 말하기를 법상이 아니므로 법상이라 하느니라.
(강화) (나)를 중심한 아집만이 아니라 (법집, 법상)도 없어야 한다.
왜냐 법집이란 (나)를 중심해서 내가 아는 일을 지나치게 분별하는 허물이니 이 지나친 분별 때문에 도리어 장애를 이루어 진여를 보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법집을 여의게 하셨으니 법집을 여윈다 함은 분별을 없앤다는 뜻이다. 누가 분별이 없어졌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이요 어떤 법에 대해서 분별치 않는가 온갖 법에 대해서요 어떤 방편으로 분별치 않는가 바르게 알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믿어 해석해서 분별치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법집이 사라지므로 법상을 내지 않으리라 하셨다.
이렇게 분별을 떠나 바르게 알고 보는 지혜가 생기면 그에게는 이미 법집은 없다. 그러므로 법집을 여의었다는 말은 한낱 세간적인 표현 방법일지언정 법집이 다한 이에게 알고 바르게 본 이라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상이라 하는 것은 법상이 아니므로 법상이라 이름한다. 하셨으니 이 법상 즉 법집이란 것 역시 세속제로는 있을지언정 제일의제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본래 적멸한 자리임을 말씀하신다.
이 본래 고요한 진리는 순일무잡하여 다른 그 어느 것과도 타협함이 없는 제일의제이므로 법상이 아니라 했고 이 진리가 움직여 형상으로 나타날 때엔 삼라만상이 찬연한 세속제이므로 법상이라 한다 하셨다.
그렇다면 법상과 법상 아님은 일의 동, 정의 한 측면일 뿐 각각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이와 같이 법신과 화신도 진여의 본체와 현상일 뿐인데 이것이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는 것은 한 낱 분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목해설) 위의 여러 대목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경의 4구게만 받아 지녀도 그 복이 한량없다 하셨는데 이는 모두가 화신 부처님의 말씀을 지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윗 대목 즉 일합이상분과 지견불생분에서 법신과 화신은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라 하여 그런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 했다. 그렇다면 끝내 거짓일 것이요 따라서 그의 설법을 지닌다는 것은 하등의 복도 될 것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 법신과 화신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곧 다르다는 말인데 다르다면 화신은 법신의 그림자 일 뿐 실체가 없는 거짓일 것이요 만일 다르지 않다면 화신은 법신과 혼연 일체이어서 화신의 복과 법신의 복이 구별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화신의 설법이란 공연한 이름뿐이요 실체가 없으러니 실없는 말씀을 지니어 무슨 복이 생기겠는가 하였다.
응화비진분 삼십이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쌓아두고 보시하더라도 다른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보살 마음을 낸 이가 이 경에서 4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하여 일러주면 그 복이 저 보시한 복보다 더 나으리라 어떻게 남을 위하여 일러 주는가 모양다리에 국집하지 않고 항상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아야 하느니라.
(강화) 아승지 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 공덕보다 이 경의 한 4구게를 자신이 받아 지니어 읽거나 외우거나 또는 남에게 일러주면 그 복이 보시한 복보다 낫다하니 물은 이의 의문과는 정 반대되는 말씀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풀이하기 위하여 어떻게 남을 위하여 일러주는가 하였으니 보살 마하살 마음을 낸 이로서 이 경을 자신이 지니거나 남에게 일러주되 겉 모양에 집착됨이 없이 여여하게 요동치 말아야 한다.
이 경을 말씀하신 (화신)부처님도 겉모양에 집착되지 않고 여여하게 요동치 않았고 이를 지니거나 남에게 연설하는 이도 여여하게 요동치 않으면 그는 법신의 경지에 접한 이요 무량한 복을 받을 자이다.
여여는 변함없는 모습이니 물들은 마음이 일지 않는 상태이다. 거울의 그림자가 실체가 없으되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면 거울의 밝음을 알 수 있듯이 화신의 설법이 실체가 없어 거짓인 듯하나 무심한 상태로 받아들이고 무심의 상태로 연설하면 자연히 무심의 법신과 계합하여 무량한 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화신의 설법은 복이 없으리란 의문을 하기 보다는 화신의 설법에 대하여 모양다리에 집착됨이 없이 무심의 상태에서 받아 지녀야 한다.
이것을 경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였다.
(과목해설) 위의 위의적정분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 하면 이 사람은 여래의 말을 잘 모른다 하셨으니 이는 부처님이 항상 적멸 즉 열반에 들어 계시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위 대목인 응화비진분 의문에선 모양다리에 국집하지 않고 항상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하시니 이는 항상 설법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적멸은 고요함이요 항상 설법함은 떠드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이 어떻게 공존하는가 한다. 그러므로 적멸에 들면 어떻게 설법하나 하였다.
하이고 무슨까닭인가
일체유의법 온갖 유위의 법은
여몽환포영 꿈 같고 그림자 같고 꼭두각시 같고 거품 같으며
여로역여전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응작여시관 이러한 것임을 관찰하여라.
(강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아홉 가지 허망한 물체를 예로 들어 모든 것이 겉모양은 있는 듯하나 실체가 없는 것임을 잘 관찰하여 어디에도 집착됨이 없이 말씀하신 것이므로 적멸 속에서 요동하는 설법을 하셨다 하여도 모순이 되지 않는다 하셨다.
부처님의 묘한 지혜로 모든 법이 꿈 따위 같다고 관찰하시므로 말씀하신 바가 있는 듯하나 그 말씀 역시 유위의 법이 아닌 열반의 모습이어서 상위됨이 없다.
우리가 대체로 부처님의 지혜라 할 때엔 대원경지,평등성지,묘관찰지,성소작지등 네 가지이다. 이러한 네 가지 지혜에 의해 잘 관찰하여 걸림 없이 말씀하신 바는 모두가 궁극적으로 대원경지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부처님의 설법은 말씀과 침묵이 둘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는 침묵의 메아리가 대천세계를 흔든다 하였다.
그 침묵과 설법이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르는 묘체는 무엇인가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고 관찰하여 집착되지 않는 길이다.
모든 경전에서 허망한 사례로서 별 눈어리(예), 등불(등), 꿈, 꼭두각시, 그림자(영), 거품(포)이슬(로), 번개(전)등 아홉 가지를 드는데 여기서는 여섯가지만 말했다. 어쨌든 온갖 유위의 법은 모두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만이 모든 법에 대하여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집착됨이 없이 바로 아는 길이며 설법과 침묵이 두이 아님을 아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 말씀하시기를 마치시니 장로인 수보리와 여러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여러 세계의 하늘 사람과 세상 사람과 아수라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모두들 매우 즐거워하면서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강화) 이상으로써 이 한 경의 말씀이 끝나고 이제 그 끝맺음을 함에 있어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여러 무리들이 모두가 기뻐하면서 물러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의 첫 머리에는 큰 비구들 천이백명이 모였단 말만 있는데 이제 끝맺음에는 수보리 한 분만을 들고는 전혀 없던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등이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옛 어른들은 전후영락이라 했으니 이는 앞뒤에 같은 말씀이 있어야 할 것을 앞에 든 것은 뒤에서 생략하고 앞에 생략된 것은 뒤에 나오게 하는 방법이라 했다.
처음 수보리가 한 마디의 물음을 던지니 부처님께서 마음 머무는 곳, 마음 닦는 법, 마음 항복시키는 법을 골고루 일러 주셨다.
이에 따른 27단의 의문이 말없이 굽이굽이 일어난 것을 낱낱이 풀어 주셨으니 듣는 이 모두가 지혜의 눈이 열리고 번뇌의 벽이 깨져서 즐겁지 않을 수 없으며 경을 맺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서투른 대로 이 강화를 끝맺는다. 독자(수강생)여러분 이 인연으로 이 경과의 인연이 더욱 두터워지기를 부처님께 발원한다.
첫댓글 정각행 드림~~땡
축하합니다.
사경하신 공덕이 지대합니다. -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보배를 보시함보다도 더 -성불하세요_()_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숙제하신 그 공덕으로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
ㅎㅎ
제27분 무단무멸분 해석에 관하여 창화의 해석은 좀 다름니다
수보리 여약작시념 여래< 不以具足相故 >득아뇩~삼보리 수보리 막작시념 여래 <不以具足相故 > 득 아뇩~보리 여약작시념 발아뇩~보리심자 설제법단멸 막작시념 하이고 발아뇩다라~~ 삽보리심자 어법 불설단멸상
중 불이구족상고의 해석이
무운스님께서 해석한 내용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물론 다른 금강경학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금강경도 다 그래요
건데
이렇게 달리 해석을 합니다
앞부분의 不字한자를 없애버리고 해석하고 뒤부분의 불자는 그대로 둔채로 해석을 하면 됩니다
<수보리야 네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여래는 상을 구족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것이다
300자가넘어 길어지므로 답글로 대신합니다 답글을 계속해서 보세요
너무 길다 ㅎ
바쁘다 읽어 가다 중단 ㅎ
시간이 되면 다시 보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