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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행기)
“ 유리부스 안의 삥앙아가씨 ”
유리 부스 안에 젊고 발랄한 미녀들이 아스라한 노출로 몸매를 자랑하며 요염한 미소로 손님을 끌어드리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일종의 호객행위였다. 도심과 고속도로 변이나 유원지에서 주로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미녀들의 노출 모습이 눈에 띈다. 보행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운전자들도 잠시 차를 세우고 유리 부스 쪽으로 몰려든다. 대부분 사내들이다. 부스안의 여인들은 요염한 미소로 손님과 대화를 나눈다. 예쁘고 섹시한 미인들에 매료된 사내들이 한참 부스 안에서 진한 대화를 나눈 후 기쁜 표정으로 뭔가 질근질근 씹으며 나온다. 대체 그곳에서 그녀들이 사내들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사내들이 그토록 즐거운 표정을 하고 나오는걸까? 그리고 사내들이 씹고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너무 궁금하다. 가이드는 그녀들을 대만의 상징적인 문화인 삥앙(빈랑)미녀이라 말했다.
삥앙(빈랑)미인..........?
12월 23일 한해를 보내면서 미루었던 대만여행을 서둔 것은 잃어버린 백제사의 복원을 위한 기획여행이었다. 대만에 살고 있는 원주민중에 아미족(태아족)이 백제의 후손 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그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정확한 고증은 할 수 없지만 중국사의 기록이나 생활습관으로 봐서 그들이 분명히 백제인 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그 문화를 체험하기 위하여 대만 여행을 서둔 것이다.
막상 그들을 만난 감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사각의 유리 부스안에서 황홀한 조명을 받으며 손님을 호객하는 삥앙미인들이 백제 후손 원주민이라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들은 대만을 상징하는 관광 미학이었다.
* 삥앙(빈랑=betel nut)
1) 대만의 지정학과 역사
대만에서 사라진 백제의 향기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요서백제의 흔적이 대만에 유구국 이란 이름으로 존재해 있다는 기록을 믿고 여행을 서둘렀다. 한제국 멸망 후 5호국의 한 나라로 백제가 대 중원을 지배했다는 기막힌 역사적 기록이었다. 그 백제가 망하고 백제의 유민들이 바다로 유랑하다가 오끼나라(흑치국)와 대만(유구국)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여 존재 했던 것이다. 그런 대만에 백제의 후손이 원주민으로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먼저 대만에 관한 지정학적 위치를 보자. 대만(taiwan)은 중국 대륙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섬나라로 정식 국명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며 수도는 대북(taipei)이다.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1개 성(省)이로 칭한다. 남북길이 약 395km, 동서길이 약 145km에 이르며, 북쪽은 동중국해, 동쪽은 태평양, 남쪽은 바시 해협, 서쪽은 타이완(포르모사) 해협과 맞닿아 있다. 국토 면적은 36,188㎢, 인구 2,500만, 국토의 2/3 가 산지와 구릉 지대이며 지형에 따라 5개의 지역으로 나눈다. 수도 타이페이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00미터 분지에 자리 잡은 명당이다. 동쪽은 산악지대이고 서쪽은 농업지대이며, 북쪽은 대도시, 남쪽은 공업지대, 중앙은 고산지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4개의 큰 분지가 있는데 남쪽의 핑둥(屛東) 분지, 중서부 쪽에 타이중(臺中) 분지, 북쪽의 타이베이 분지, 북동쪽에 이란(宜蘭) 분지가 있다.
가장 높은 산은 위산(해발 3,997m)이며, 큰 강은 북쪽의 단수이강(淡水河)과 서쪽의 줘수이강(濁水溪)이 있다. 기후는 북쪽은 아열대, 남쪽은 열대다. 겨울철(10∼3월) 월평균 기온은 약 15℃이며, 여름철(6∼9월)에는 30℃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2,590㎜다 주민은 한족이 95%(본토 이주민 14%)원주민 5%(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 언어는 북경어(官話) 민난어, 커자어(客家語)와 타이완 방언 4가지가 있다.
이 섬은 유구국이란 백제의 땅이었다. 중국인들이 이 섬에 정착한 것은 17세기 이후다. 1590년 포르투갈인 이 처음 이 섬에 상륙하여 포르모사(아름다운 섬)라고 이름 지었고 1626년 네덜란드인과 스페인인들이 섬의 서쪽 해안을 점령하여 요새화 하였고 1646년 네덜란드가 스페인 정착촌을 장악하고 이 섬의 지배권을 독차지 하였다.
그 뒤 명나라(1368∼1644)가 멸망하고 명나라 관리들이 이 섬에 대거 들어와 네덜란드인들을 쫓아냈다. 그 후 중국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섬의 주민은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1683년 청나라의 만주족이 타이완을 장악하여 통치하면서 1796년 동쪽 해안에 정착촌을 이루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할양되어 일제 통치를 받다가 제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 되돌려 졌고. 1949년 본토에서 공산당이 망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장군이 지지자들과 타이완으로 피해 와서 국민정부를 세우고 1954년 국민정부와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면서 독립 국가를 이루어 거의 30년간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받고 오늘날의 국민총생산 2만3000 불의 경제 국가로 성장하였다.
2) 여행 일정
1. 중정기념관 (장개석 유물전시관)
2. 국립 고궁박물관 (세계4대 박물관)
3. 충렬사 (항일 및 국민당 군 전몰 추모 현충사)
4. 야류해상 국립공원( 화산과 암석, 바람과 파도가 만든 예술품)
5. 용산사( 도교와 불교의 혼성 사찰)
6. 양명산 노천온천( 일제가 만든 폐탄광의 유황온천)
7. 야시장과 서문정 거리( 서민 시장풍경과 최고 번화가의 풍경)
8. 화련 (국립해양공원 휴양지 )
9. 태로각 대협곡( 세계 제일의 대리광석이 만든 협곡- 연자구, 구곡동, 장춘사 모자루등 187킬로미터의 대협곡)
10. 아미족 민속춤( 타이완 원주민- 백제의 후손의 픙습)
11. 소인국(세계 각국의 문화를 축소해 놓은 조형물 단지)
3) 여행기
12월 23일 연휴를 이용하여 14시 40분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3박4일 대만 여행을 떠났다. 일기는 쾌청, 탐승 소요시간, 2시간 30분, 대만 도원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도원국제공항은 3년 전에 중정공항에서 옮겨 온 새로 만든 공항인데 인천공항에 못지않은 규모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 도원의 곳곳에 저수지 같은 물웅덩이가 박혀 있었는데 진주양식장이란다.
현지 가이드의 도움으로 타이페이로 이동(1시간하는, 고속도로에서 세계 5대 호텔인 원산대반점이 황금색 광채를 발하며 관광객의 시선을 매혹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와 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이 진풍경이다. 모두 질서정연하게 헬멧을 쓰고 저속으로 달리는 50cc급의 오토바이 행렬, 대만인은 걷기를 싫어하여 집 앞에 잠깐 출입을 할 때도 이렇게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우리나라와는 중국의 유엔가입 대만의 추출에 찬성을 보내 1995년에 단교하여2005년에 비로소 다시 수교가 되어 여행이 자유로워졌다.
대만의 첫인상 가이드 말대로 외빈내유, 겉으론 초라하지만 내부론 알차다는 표현같이 국민소득 2만 불에 빈부 차이가 없는 선진국이라는 사실, 온순하고 차분한 국민의식이 자랑스럽다. 거리는 아직 일본식 건물이 남아 있어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이루었고 지난 53년간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받은 탓인지 그 흔적들이 일본문화의 축소판이거나 닮은꼴이다. 자종차를 비롯하여 모든 공산품과 문화, 문명의 이기가 거의 일본 것이거나 일본화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만의 문화는 중국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적이며 일본의 식민문화란 생각이 든다.
첫 방문은 타이페이의 신구 문화의 조화장이었다. 서문정거리와 야시장이 그렇다.
(1) 서문정거리
대만의 최고 번화가 서문정 거리에서 젊음의 공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인데 세계의 최첨단 유행문화가 동양에 제일먼저 오는 곳이다. 젊고 발랄한 젊은이들이 대 인파를 이루어 거리에 가득 차 있었다. 첨단 전자 상품과 전자 기기가 전시되는 곳이며 최신 이색의 국제문화가 범람하는 곳이다. 대만은 한국보다 선진국이지만 옛것과 새것을 같이 병용하는 나라다. 문화도 그렇다 한국은 한번 갈아치워 버리지만 대만은 디지털과 아놀로그를 같이 병행한다. 이유는 모든 것을 디지텔화 하면 실업가 가 양산된다는 것이다.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신구가 병행한다. 일례로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먹여 살리는 경제다. 실업자가 없고 복지제도가 천국이다. 태풍과 지진이 많기 때문에 고층빌딩을 안 짖지만 세계 제일 높은 101빌딩 (507미터)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다.
서문정 거리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첨단 기기와 상품들이 전시되어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다음은 야시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2) 야시장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은 재래시장이다. 거리엔 우중충하고 먹자거리가 주를 이룬다. 대만의 요리와 먹을거리가 다 모인 곳인데 외식을 즐기는 대만인들은 이곳에서 편하게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즐겨 먹는다. 대만 여인들은 밥을 짓지 않고 가족식사를 외식에 의존케 한다. 그래서 먹자거리엔 식품이 다양하다. 그래서 야시장은 상품보다는 거의 먹을거리 상품이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뱀시장거리다. 뱀장수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관객을 유도하고 있었다.
난 잠깐 술안줏감으로 거리에서 굽는 한치 구이를 샀는데 너무 맛있고 고소하다. 대만의 음식은 보기보다 맛이 있기로 유명하다. 거리음식이라 불결하고 맛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무엇이든 다 맛이 있어 외국인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상품은 모두 정찰제이다,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고 누군가가 말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가짜는 가짜라고 생산지 이름까지 붙여 놓고 판다. 그래서 상품은 정확하고 절대 믿음직하다.
거리엔 삥앙(빈랑)을 파는 여인들이 호객을 하고 있었다. 유리 부스 안의 아름다운 노출의 그 여인들, 삥앙파는 미인들이다. 삥앙은 대만의 대표 농산물인데 연간 17만 톤을 생산하는 수출품이다. 이것으로 25만 명이 먹고 산다. 마약의 일종인 이 삥앙은 주로 남성들이 담배 같이 씹는 약인데 환각성을 일으켜 누구나 즐겨 찾는단다. 대만인 17.5% 160만 명이 애용하는 기호 식품이다. 이것은 야자수와 비슷한 나무에서 나는 열매인데 대만의 주 농산물이다.
이렇게 삥앙을 파는 유리부스 안의 예쁜 아가씨들의 월수입은 연봉 4,500만 원 이상이란다.
다음은 용산사로
(3) 용산사
도교와 불교의 문화고 공존 병합한 사찰이다. 대만엔 도시 도처에 절이 있는데 대부분 도교 사찰이다. 도교는 우리나라의 무당과 흡사하지만 다신을 똑같은 존재로 믿는 것이 특색이다. 재물, 건강, 장수, 출세, 영화, 결혼, 즉자 등등 신이 다르다. 이들에게 바치는 제물도 여러 가지며 다르다. 불교나 도교사원에선 향을 피울 때 큰 묶음으로 불을 피우는 이유가 다신 숭배란 의미다.
이 용산사는 270년 대륙에서 신을 모셔 와서 보존한 사찰인데 정문에 신을 모셔온 황제의 옥좌를 방불 하는 화려한 가마가 신주처럼 모셔져 있었다.
신당의 종류를 말하는 사자 성 명구에서 신당의 문화를 달리함을 알 수 있었다.
* 주신 관세음보살(主神 觀世音菩薩)- 우주 만물의 창제 신을 절대존중으로 절의 중앙에 모셨다.
* 문창제군 (文昌帝君-화타)- 학문의 신이다. 과거나 응시생이 기원하여 합격을 비는 곳인데 이곳엔 ‘화타’ 라는 문장가가 문재를 살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화타상앞이 젊은들이 많이 향불을 피우고 있었다.
* 천상성모상 (天上聖 母像- 媽祖) - 결혼의 신, 마조라는 여신을 모시고 결혼의 행운을 기원한다.
* 자장부자(子長父子)- 생명을 낳아주는 신상. 자식을 얻기 위한 기원소,
* 삼관대제 (三官大帝)- 관운과 벼슬을 내려주는 신상
* 화택신사(火宅神祀)- 좋은 집을 안겨주는 신상
대만인은 조상을 극진히 모신다.
용화사는 대만의 힘을 내는 정신적 본산이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일년에 한번은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교회는 산에 있고 절은 도시 가운데 있다. 주로 예수교는 고산족이 믿는다.
세계문화 유산의 축소장
(4) 소인국 전시장
세계의 문화를 축소하여 모형으로 만든 전시장이다. 전시장은 동양과 서양의 도로 항만 비행장, 건축물, 유물 유적을 축소해 놓았는데 그중에서 주거 생활의 모형이 관객을 모우고 있었는데 대만의 ‘객가이’ 족의 주거 문화가 이채롭다. 원형의 성벽 안에 주거지를 만들어 외부의 침입을 철저히 방어하는 생활이다. 그밖에 중국의 문화유산과 각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물을 볼 수 있다.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어린아이들이 선호하며 교육적인 소재가 된다.
중국엔 주로 56개 소수민족의 생활을 모형화한 소인국인데 이곳은 세계문화를 볼 수 있는 소인국이다.
세계 4대 박물관인 하나
(5) 고궁 박물관
<대표적인 유물>
0. 비취옥 백채(배추옥)
0. 모공정 (향로)
0. 산반(동판에 땅 문서 기록)
0. 피셔(정재신).
0. 낙관(건륭황제 낙관)
0. 상아공 조각(상아 한개로 만든 조각).
0. 마상(장군의 명마)
0. 연꽃 청자그릇 (북방.남방형 비교.)
0. 백자(채도잔)
0. 문연각, 사서전고(청나라 건륭황제 )
0. 벽옥(옥기)
0. 석가모니불 좌상(북위 태화원년)
0. 장춘 사슴 (청나라.겹층 장방형)
대만의 최고 자랑거리며 세계적인 명물, 타이페이 최고 주택가 명당 터에 자리 잡은 고궁박물관은 8,000년 역사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30년 역사를 가졌다.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 공산당에 밀려 본토에서 나오면서 65,000여점의 중국본토 보물을 미국 한정으로 옮겨 싣고 와서 이곳 토굴에 저장했다가 전시관을 지어 6개월-1년간 전시하는 곳이다. 세계인의 시선을 끄는 이곳 박물관은 한번 전시하고 두 번 다시 전시하는 기간이 30년이 걸릴 정도로 많은 보물이 있다. 중국의 자금성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역사유물은 거의 가져온 셈이다. 그래서 중국의 유적지는 빈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전시관은 지하1층에서 지상 3층으로 되어 있는데 3층은 선사 고대 유물 전시관이고 2층은 송, 원, 육조, 명, 청 중세유물장이고, 1층은 근대 유물전시관과 서예 및 서책 문헌 등이 전시되었다.
먼저 에스카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면 문명서광(文明瑞洭) 이란 간판아래 7-8천년 전의 유물부터 전시된다.
중옥비덕(重玉肥德) 옥은 덕과 행운을 가져오는 보석이다. 주로 중국이 자랑하는 옥 장식품이 전시되었다.
옥은 연옥, 황옥, 백옥, 비취 가 잇는데 이중 비치는 옥중의 최고품이다. 그리고 쑥옥을 귀하게 여긴다. 이곳에서 옥으로 가장 귀중한 보물은 옥비치로 만든 배추 조각이다. 백옥과 청옥으로 배추를 조각한 것인데 청나라 건륭황제 때 조각가가 3대에 걸쳐 만들었다. 옥으로 만든 배추 잎에 벌레 두 마리를 얹어놓았다. 황제가 물었다. 무슨 연유로 배추에 벌레를 조각했느냐? 이 배추는 싱싱한 청나라이고 벌레는 더러운 명나라입니다. 즉 명나라는 벌레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말하자 황제는 그에게 큰 재물을 내렸다. 그런데 그자 죽으면서 명나라 벌레가 청나라 배추 잎을 모두 갉아먹어 망할 것이라고 유언하고 죽었다. 결론적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에 대한 저주로 만든 옥 조각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5-6천년, 황하인류문명지 유물과, 화동지구와 화서지구로 구별해서 유물을 볼 수 있다. 화동선민상통, 산동문여천대창, 화서선민사용, 소업미옥여천대장 구분하여 전시되어 있었다.
주로 옥문명이다. 황제지시이옥위병 같은 옥잔, 옥띠 옥칼 옥장식, 옥침구, 옥병이 주제품이었다.
세번째로 3-4천 년대의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 유물이며 2천년 후론 화려한 도자기 문명의 꽃을 볼 수 있었다.
중세 수당에서 송, 원, 명, 청에 이루는 전시관이 일목요연하게 정돈되어 시대의대표적인 옥 유물과 청동기 유물, 철기 유물이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모공정은 청동 향로인데 사반풍채(私礬風采)란 다리가 3달린 향로는 다리가 4개 달린 서민의 것과 구별된다. 산반 이란 청동유물엔 땅 문서가 기록되어 있었다.
금광휘광(金光輝光)의 찬란한 빛을 발하는 제사도구, 종, 술잔, 둥경 등이 진귀하고, 공자 때 만든 동종은 음계를 달리하여 소리를 내는 악기 였다. 피셔 (해태) 란 기린, 용, 사자 봉황을 형상한 해태와 비슷한 상인 피셔는 재물을 모우는 신으로 먹기만 하고 싸지는 않는다. 이는 중국인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상징 유물이다.
2층으로 내려오면 당나라의 양귀비옥 조각상을 비롯하여 육조. 수. 당. 송. 원. 명청 의 유물이 전시되었는데 풍자적인 취옥백채와 육형석(돼지비계)에 시선이 많이 모였다. 낙관(쑥비치옥)은 쌍용을 새긴 건륭황제의 낙관이다, 청자는 북송과 남송(북방-북송은 어둡고 남방-남송은 밝다)의 작품으로 구별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백자는 경덕진. 정연이란 작품이 탁월한 기품을 보여주고 있었다.
청나라 3황제의 흉상 앞에 잠시 고개를 숙인다. 청나라 건국의 영웅 도르곤, 중원을 정복한 건륭황제, 평화와 영광을 이뤄낸 강희제의 흉상이 청나라 번성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밖에 서태후 유장품이 화려하고 웅장하다.
외래충격(外來衝擊) 서태후의 유장품은 너무나 화려했다. 그중에서 목조 마상( 꼬리가 없는 마상인데 중국에선 장군의 말은 꼬리가 없다고 함)은 장군의 위엄을 표징하고 있었다.
고궁박물관을 나오면서 느낀 것은 이 모든 유물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본토 중국에서 빼내 온 유물이란 점이 씁쓸했다. 다 장개석 개인의 소장품이었다는 점도 그렇다. 그가 대만의 국부가 되어 비로소 유물을 전시관에 두긴 했지만 사실은 그의 소장이었다.
다행히 다른 세계의 유명 박물관의 소장품은 모두 착취문화인데 비해 이곳은 장소 옮김 문화라는 것이 가치를 체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예품과 회화품, 서적, 서책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다.
북송 때 화가 곽희의 조춘도 등 유명화가나 서예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데 못 보았다. 그리고 중국의 대문장가들의 저서와 필적을 못 본 것이 더 한이 된다.
(6) 야류(野柳)
타이페이에서 북으로 한 시간여 버스로 달리며 기웅시에 위치한 국립해양박물관 야류를 볼 수 있다. 야류는 들판에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들판이라는 뜻이 아니고 볶은 쌀이 흘러넘치는 들판이란 뜻인데 잘못 쓴 글자란다. 이야긴 일제가 이곳 최북단에 무역항을 만들어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날랐는데 전국에서 모인 쌀더미를 보고 욕심이 난 이곳 원주민들이 쌀부대를 헐어 빼가다가 흘려놓은 쌀이 들판에 가득했다는 뜻이다.
야류는 아름다운 둥북해안에 위치한 화산암지대이다. 버스를 타고 북쪽의 최고 도시 기웅(基雄) 해변에 존재하는 풍경인데 버스로 야류의 해변을 달리며 만리향 (萬里鄕)이란 지명의 해변이 나온다. 그리고 순천부(順天府)란 마을이 나타난다.
萬里鄕 은 만리 먼 곳에 둔 고향이 그립다는 뜻인데 즉 순천부란 한국의 전라남도 순천을 뜻한다. 그렇다면 순천이 고향인 사람들이 만리타향에 정주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픔을 노래한 뜻으로 지은 지명이란 생각을 해본다. 난 직감적으로 이곳이 내가 찾는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땅이라는 것을 의식했다. 이곳은 조선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뱃길이다. 그렇다면 내가 추적하는 백제의 유혼들이거나 조선의 노예들이 이곳에 정착을 했다는 생각으로 거리를 좁혀본다. 이곳 원주민인 아미족의 실체들이 아닌가라는 기대였다.
해변으로 나서니 푸른 바다와 맞닿는 곳 해변에 해괴한 괴암들이 우뚝우뚝 서있었다. 야류의 기암형색들이다.
선녀신발, 여왕머리, 진주, 버섯돌, 생강돌, 촛대가 대표적인 야류의 기암들인데 황토 흙에서 까만 버섯이 피어나듯이 기암들이 솟아오라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해괴한 암석들이 황토 흙에서 구름처럼 솟아 올랐다. 기암의 아래는 황토색이고 머리는 검은색의 바위가 버섯과 흡사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넉넉한 가슴을 안고 기형상을 만져 보았다. 분명히 돌이었다. 난 이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조국을 그리워하는 백제인의 아픈 만리향을 상상 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원주민이 되었다.
야류 해상의 괴암들은 자연이 만들어낸 조형물이다. 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한동안 의식을 잃고 있다가 감탄을 연발하였다.
(7) 양명산 노천오천
야류 공원을 나와 곧장 양명산 노천온천으로 향하였다. 어둠을 뚫고 깊은 양명산으로 버스는 숨차게 올랐다. 얼마쯤인가가 갑자기 짙은 유황냄새가 코를 질렀다. 노천온천이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이곳은 일제가 광산을 개발하면서 만들어진 온천이다. 옥광석을 파낸 곳에서 온천이 솟구친 것이다. 광부들은 이 노촌 온천에서 피로를 풀곤 하였다. 지금도 옛 그대로의 고풍을 지니고 있었다.
온천 입장료는 대만 돈 300원(10,000원), 개인 사물함 료 20원을 내고 짐을 맡기고 노천 욕장으로 들어선다. 추위가 오싹 몸을 떨게 한다. 욕장은 말 그대로 들판 가운데 노천에서 솟아오르는 온천이다. 욕탕을 들랑거리며 목욕을 즐기자 추위가 가신다. 온천욕을 하고 나와 따끈한 해물 사브사브에 피로를 풀었다.
다시 버스는 어둠의 고속도로를 타고 타이페이로 향하였다.
타이페이로 들어서면서 삥앙 파는 아가씨를 만났다. 쇼윈도우 안에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네모난 방안에 아름다운 조명이 비치고 그 가운데 한아가씨가 요염하게 앉아 창밖의 시선을 모우며 손님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꼭 달라붙는 블라우스가 마치 엘로우 하우스의 여인같다. 삥앙은 환각성 약재로 이것을 씹으며 환각증상을 일으켜 고통과 아품을 잊고 환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야자수 나무와 비슷한 나무의 열매로 일종의 환각성 마약인데 습관성이 아니라서 세계인들이 즐겨 찾는다.
그런데 사각의 방안에서 삥앙을 파는 아가씨의 모습이 어쩐지 가련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주로 이곳 원주민의 여인이란다. 삥앙파는 아가씨를 뒤로 하고 숙소로 들어선다.
(8) 화련 (華漣)
대만의 최고 관광지로 외국인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해변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태로각 협곡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만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화련에서 대만의 풍요를 느낀다. 해변에 전개되는 자연 풍광이 최고다.
여행지에서 남자 혼자 여행을 하면서 제일 먼저 아내 선물을 챙기지만 여자는 남편 같은 존재는 아예 망각하고 자신의 기호품만 챙기고 부부가 같이 오면 부부가 서로 상대편의 기호품 구매를 무조건 반대한다. 왜 그런 심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침을 일찍 먹고 타이페이 기차역으로 나가서 동해선 열차를 타고 화련으로 향하였다. 타이페이에서 3시간 걸려 동해안 중간점이 화련이다. 화련으로 가는 열차는 한국제 기관차 였다. 대만의 동해안은 정말 환상적인 남국의 풍경을 자아내는 명소로 연결된다. 화련은 태로각이란 세계 최고의 대리석과 옥을 생산하는 곳이다. 대리석의 질은 말할 것도 없고 쑥비치 냉비치, 칠세옥, 배추옥, 홍비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 되는 곳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거의 일제의 잔유물 임에 놀란다. 무성한 수림 속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치며 기차는 환상적인 질주를 계속한다. 기차에서 외국인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난 딸을 데리고 부부가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도 아내와 딸과 같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앞자리엔 그의 아내와 딸 뒷좌석인 나의 아내와 딸이 앉았고 우린 가운데 자리에 같이 앉았다. 그와 난 이야기기가 시작되었다. 해변 언덕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가 물었다. 저것들이 뭐내고? 난 무덤이라고 답 해 주었다. 그는 알겠다고 고갤 끄덕였다. 다시 그가 물었다. 일본인이냐고? 난 한국인이라고 답했다. 그는 대만계 미국인 라고 소개하였다. 25년 만에 조국, 아니 고향에 왔다는 것이다. 일본여행을 마치고 오는 길인데 조국 대만에 와보니 엄청나게 많이 변해다는 것이다. 딸은 낳아서 처음 고향에 왔다는 것이다. 우린 대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이야길 나누었다. 그는 내가 대만의 문화 풍습을 잘 아는 것에 놀랐다. 그런 전자 계통의 엔지니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며 화련에 도착하였다.
그는 반갑게 내손을 잡으며 한국에 한번 들리겠다는 것이다. 오케이.....
화련은 30만 인구의 관광도시였다. 원주민은 아미족. 대리석, 진주 산호, 비치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곳이다. 빵이 열리는 나무도 많다. 삥앙의 주산지로 원주민이 이것을 기르고 딴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셔란 동물이 살았던 곳이다. 피셔는 먹기만 하고 배설을 못하는 짐승으로 부와 재정의 신으로 통한다. 이곳의 작물은 옥수수, 빠나나, 빵나무, 쌀이 주작물이다.
해변엔 3모작 모내기를 준비 하고 있었다.
화련에 도착하여 먼저 대리석 공장과 원주민( 아미족) 의 민속춤 관람을 하려갔다.
아미족(阿美族)은 이곳의 원주민인데 술과 노래와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결혼은 가마를 타고 가며 날씬한 여인을 선호한다. 결혼 후엔 얼굴에 v 자 문신을 하여 기혼자 임을 표시하며 쌀로 술을 담가먹는다.(막걸리) 빵나무 열매와 삥앙과 옥을 팔아 살아간다.
바로 이곳이다. 이들이 내가 찾는 백제의 유민들이다. 백제가 망하고 요서백제의 유민들이 배를 타고 유랑하다가 이곳 대만에 정착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사라져 버린 민족인데 다시 그 흔적이 이어졌다는 정보를 알고 난 그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우린 곧장 남도 극장으로 아미족의 민속춤 공연을 보려갔다. 무용은 주로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농기구를 놓고 춤추는 손놀림이 우리 춤의 춤사위와 흡사했다. 춤의 우리의 농악놀이와 비슷했고 대나무 짚고 넘기는 춤은 우리의 고무줄놀이와 흡사했다. 가미타고 시집가는 풍경이라던지 전통 결혼식장에서 나무잔으로 신랑신부가 같이 술을 마시는 결혼풍습이라던지 엎드려 절할 때 남자가 두 손을 모우는 것,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여자는 오른손을 왼손위에 얹고 절하는 모습이 우리의 절 동작과 꼭 같았다.
아무튼 얼굴의 형상이라던지 체구의 조화가 한족과는 다른 바로 한국인 같은 체구를 가졌다.
난 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눈물겨운 감동을 받고 있었다.
아미족의 민속춤은 살아 숨쉬는 백제인의 숨결이었다. 난 그들에게 당신이 내 민족이라고 말을 걸었다. 그들은 내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9) 태로각 협곡
장장 186키로 미터의 대리석 협곡이다. 이곳은 대리석과 옥 광산지대였다. 태로각 협곡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이곳을 요새화 하면서 화련에서 협곡을 따라 내륙을 거처 서쪽 해안까지 관통하는 길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협곡이라서 감히 작업을 못하고 말았다. 장경국 총통이 1956년부터1960년에 대협곡의 암벽을 뚫어 길을 만들었다. 이 협곡은 모두 질 좋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800미터 고산으로 이어진 수직의 산을 따라 전체 계곡이 대리석 암으로 되어 있다. 단층이 자연붕괴로 깊게 파인 협곡에 들어서면 두벽의 수직의 산들이 하늘을 가린다.
이곳의 시작은 장춘사란 협곡부터다. 이절은 이곳에 도로를 설치하다가 죽은 250명의 위령을 모시는 절이 있다. 그리고 천외의 절경은 제비집 같이 구멍이 송송 뚤린 동굴에 강남 가는 제비가 머물며 한겨울을 서식 하는 연자구, 장춘사, 구곡동, 자모교, 두 계곡의 합류가 명소를 이룬다. 협곡의 암석은 모두 질 좋은 대리석이다. 이 협곡엔 산양과 야생 원숭이들이 집단으로 무리져 자생하는데 원주민들이 이들을 사냥하며 산다고 한다.
태아 족이란 원주민인데 지금은 모두 화련으로 내려와서 삥앙을 팔거나 하층 잡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태아족은 아미족에서 갈려나온 민족이다. 그러니까 한족과의 혼혈족이다.
이 태로각의 대리석은 자자손손 천년을 파먹어도 남는다니 얼마나 복 받은 곳인가.......
(10) 중정기념관
면적이 25만평에 달하는 장개석 총통의 기념관이다, 대중지정(大中至正) 이란 정문의 현판이 걸려있는 정문 대충문 (大忠門)과 대효문 (大孝門)으로 들어서면 미술관, 박물관. 중정기념관이 있는데 중정 기념관은 높이 72미터의 대리석건물에 파란 유리기와의 팔각형 지붕을 가진 2층 건물이다. 2층엔 장개석 총통의 동상과 손문의 삼민주의 철학을 바탕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장개석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가족관계 국민당 창당 당수로 공산당과 싸운 공적. 세계사의 중앙에서 활약한 업적들이 전시되어 교육적인 귀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광자박애(廣慈博愛) 광동으로 가는 열차에서 (廣東列車) 손문과 장개석 청년이 마주앉아 조국의 미래를 논의하는 장면이 청나라 개혁의 시두가 되었던 것이다. 장개석은 손문의 후계자로 중국을 다스렸으니 공산주의 모택동에게 밀리고 말았다.
보파사명 (保坡使命) 담파남매 (憺坡男妹) 벽생공존 (劈生共存) 중유헌보(中有獻寶)의 손문의 사상을 실천한 장개석의 정치철학의 교육장이었다.
중정기념관으로 중국여행을 정리한다.
이번 여행에서 대만의 전역을 다 돌아보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만은 비행기 여행보다 철도여행이 여행의 맛을 배가 시킨다. 아름다운 해변을 한바퀴 도는 절경이 그렇다. 대만의 3대 시는 타이페이(대북)과 타이난(대남) 그리고 까오숭(고웅)이다. 대만의 철도 여행은 타이페이에서 기웅을 거처 이란-소오-천상-태로각-화련-옥리-대동 아란피-켄튼-현춘-대남-가의-장화-신죽-도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참고로 대만의 발 맛사지는 의학적인 방법으로 우리 몸의 부위별 병을 검진해 주고 치료효과를 거둔다. 발 맛사지는 발바닥 오장을 건드려 전체몸의 병을 자연치료 하는 효과를 거둔다.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인체 내 에너지 흐름을 방해하는 물질을 제거하며 각 기관의 기능을 정상화하고 조직 간의 활동을 순조롭게 한다. 그리고 분비물의균형을 유지하며 체내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
대만의 특징을 정리하면 국민소득 23,000불의 선진국이란 사실이다. 외유내강 외부론 초라한 것 같지만 내부론 탄탄한 부자다. 열대와 아열대성 1년 3모작 농산물이 많고 대리석과 옥의 최고산지며 전 국민이 한대의 50CC 오토바이를 갖고 있으며 탑승이 꼭 헬멧을 쓰는 예의와 준법정신이 투철한 나라이고 지진이 많지만 세계 최고의 101빌딩을 갖고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국이면서도 빈부차가 없으며 65세가 넘으면 노후복지연금을 받는 복지 제도가 잘된 나라며 전자공업 대국으로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로 디지텔과 아날로그가 같이 병행하여 조화를 이루는 문화를 가졌고 세계최고의 박물관을 가졌으며 도로시설이 예술적인데도 비행기가 주 교통수단으로 활용하는 나라다. 음식과 요리를 자랑하는 나라다. 삥앙미녀를 만나고 싶은, 아무튼 대만은 흠잡을 데가 없는 나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