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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이야기 – 9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 (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6)단재(丹齋)선생(先生)이 고증(考證) 한 단군조선(壇君朝鮮)의 국가 행정체계(行政體系)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은 앞 선 장들에서 단군조선(壇君朝鮮)에 대한 고증 외에도 많은 부분들에서 논증을 하였다. 단군조선(壇君朝鮮)에 대한 고증에는 지리강역(地理疆域) ‧ 정치사((政治史) ‧ 종교체계(宗敎體系) ‧ 종교지도자(宗敎指導者)의 선임(選任) 등에 대하여 고증을 하셨다.
이번 장(章)에서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이 단군조선(壇君朝鮮)에 대하여 고증을 한 국가행정체계(國家行政體系)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一般的)으로 국가행정체계(國家行政體系)가 갖추어졌다 함은 근대적(近代的) 국가형태(國家形態)를 갖추었다는 말과 같다. 물론 그동안 일제가 악랄하게 왜곡(歪曲) 말살(抹殺)하고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만들어내는데 일조를 했던 반역적(叛逆的)인 조선인(朝鮮人) 학자(學者)들이 해방(解放) 후 청산(淸算)되지 않고 고스란히 우리 역사(歷史)를 가르치는 후학(後學)들을 길러내는 주요한 역할을 한 학자들에게 배워왔던 배달겨레의 구성원들이라면 위에 언급한 근대적(近代的) 국가형태(國家形態)를 단군조선시대(壇君朝鮮時代)에 이미 갖추어졌다고 한다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것이다. 하지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은 단군조선(壇君朝鮮)이 근대적(近代的) 국가형태(國家形態)의 하나인 행정조직(行政組織)을 갖추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증(考證)을 하였다.
단재(丹齋) 선생(先生)이 고증(考證)을 한 행정체계(行政體系)에 대한 고증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단재(丹齋) 선생(先生)은 필자가 구분(區分)을 하는 것처럼 하지는 않았지만 단재 선생이 고증을 한 자료(資料)들을 분석(分析)하면 분명하게 위와 같이 구분을 할 수가 있다. 또한 단재(丹齋) 선생(先生)은 행정체계(行政體系)만이 아니라 갖추어진 행정체계(行政體系)를 관리하는 행정관(行政官)들에 대해서도 고증을 하였다. 이에 대해 본(本) 절(節)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단군조선(壇君朝鮮) 행정조직체계(行政組織體係)
①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중앙행정조직체계(中央行政組織體系)
단재(丹齋) 선생(先生)이 고증(考證)을 한 단군조선(壇君朝鮮) 행정조직체계(行政組織體系)는 단순한 원시적(原始的) 혹은 국가(國家) 초기형태(初期形態)의 행정조직체계(行政組織體系)가 아닌 근대적(近代的) 국가형태(國家形態)를 갖춘 행정조직체계(行政組織體系)이다. 그 조직체계(組織體系)가 매우 정교(精巧)하고 정밀(精密)하다.
단재(丹齋) 선생(先生)은 단군조선(壇君朝鮮)의 행정조직체계(行政組織體系)를 다음과 같이 고증을 하였다. 중앙(中央)에는 3경5부(三京五部)를 두었고, 지방(地方)은 9부(九部)로 나누어 다스렸다.
중앙(中央)의 삼경(三京)은 진(辰) ‧ 마(馬) ‧ 변(卞)이며, 전국을 오부(五部)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오부(五部)는 곧 동(東)‧ 남(南) ‧ 서(西) ‧ 북(北) ‧ 중(中)을 말 한다. 여기서 삼경오부(三京五部)는 중앙직제(中央職制)이다. 또 지방9부(地方九部)는 청(靑) ‧ 적(赤) ‧ 백(白) ‧ 현(玄) ‧ 황(黃) ‧ 견(畎) ‧ 우(于) ‧ 방(方) ‧ 량(良)등 9부(九部)이다.
먼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께서 고증(考證)한 중앙직제(中央職制)를 살펴보자.아래 전문을 실어준다.
❝ 대단군 왕검이 삼신(三神) ‧ 오제(五帝)의 신설(神說)로써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神說)에 의하여 인간 세상 일반의 제도를 정함에 있어서 「신한」과 「말한」 ‧ 「불한」의 세 「한」을 세워서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大王)이고, 「말한」 과 「불한」은 곧 조우의 양 부왕(副王)으로서 「신한」을 봐좌하는 자이다.
「삼경(三京)」을 두어서 세 「한」이 나뉘어 주재(駐在)하였으며, 세 「한」의 밑에 「돗가 ‧ 개가 ‧ 소가‧ 말가 ‧ 신가」의 다섯 「가」를 두고, 전국을 동 ‧ 남‧ 서‧ 북‧ 중 「오부(五部)」로 나누어 다섯 「가」가 중앙의 다섯 국무대신(國務大臣)이 되는 동시에 오부(五部)를 나누어 다스리는 다섯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다섯 「가」의 우두머리(首位)가 되며, 전시에는 오부의 인민으로써 중 ‧ 전 ‧ 후 ‧ 좌 ‧ 우의 5개 군(軍)을 조직하여 「신가」가 전 ‧ 후 ‧ 좌 ‧ 우의 네 원수(元帥)로 되어 출전하였다.
우리가 즐겨하던 윷판이 바로 다섯 「가」의 출진도(出陳圖)이다. 윷놀이를 할 때 우리가 쓰는 「도(刀) ‧ 개(介) ‧ 걸(乞) ‧ 유(兪) ‧ 모(毛)」는 이두자로 쓴 다섯 「가」의 칭호이니, 도(刀)는 「돗가」이고, 개(介)는 「개가」이며, 유(兪)는 엣날 음(古音)이 「소」이므로 「소가」이고, 모(毛)」는 「말가」이며 걸(乞)은 「신가」이니, 乞로써 「신가」를 적은 것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 시대에 「견사(犬使)」란 관명(官命)이 있는데 대개 견사(犬使)의 「犬(견: 개)」을 의역(意譯)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돗(猪:돼지) ‧ 개(犬) ‧ 소(牛) ‧ 말(馬)등 축류(畜類)로써 다섯 방위의 신의 이름(神名)을 삼고 동시에 이로써 관직명을 삼은 것은, 이때 와서 수렵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농목시대(農牧時代)가 되었다는 증적(證迹)이다. ❞
단군시대(壇君時代) 중앙직제(中央職制)를 왜 3경(三京)과 5부(五部)로 정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겨레는 3(三)이라는 숫자를 매우 중시했다. 또한 5(五)라는 숫자 역시 방위(方位)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매우 중시하였다. 여기서 3(三)은 천(天, 하늘) ‧ 지(地) ‧ 인(人) 삼재를 말하며, 이는 또 천신(天神) ‧ 지신(地神) ‧ 인신(人神)을 뜻한다. 이는 우리 겨레의 신앙과 사상 또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혀주는 완벽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삼(三)수는 매우 중요하며, 우리 겨레의 종교와 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온 누리 현생인류의 문화와 문명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물론 3수(三數) 또는 삼사상(三思想)이 단군시대(壇君時代)에 처음 도입된 것은 아니다. 단군시대 훨씬 이전인 약 9300여 년 전인 한인(桓因)의 한국시대(桓國時代)부터 내려온 아주 오래된 사상(思想)으로서 우리 겨레에게는 신성한 수로 받들어졌으며 천신(天神) ‧ 지신(地神) ‧ 인신(人神)의 삼신사상(三神思想)은 우리 겨레에게 뿌리깊게 내려왔으며 신성시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삼(三)이 중심이 된 말과 글, 문화, 문명 등에 스며들어있다.
❝ 「사기(史記)」의 봉선서(封禪書)에서 “三一神(삼일신)은 천일(天一) ‧ 지일(地一) ‧ 태일(太一)이니, 삼일(三一) 중에서 태일(太一)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으며, “오제(五帝:동‧서‧남‧북‧중 다섯 방위의 신神 - 원주)는 태일(太一)을 보좌하는 자”라고 하였고, 〈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서는 “천황(天皇) ‧ 지황(地皇) ‧ 태황(泰皇)의 삼황(三皇) 중에서 태황(泰皇)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으며, 〈초사〉에는 「동황태일(東皇太一)」이란 노래 이름이 있고, 〈한서〉 예문지(藝文志)에는 〈태일잡자(泰一雜子)〉라는 책 이름이 나오는데, 「三一神(삼일신)」과 「삼황(三皇)」은 곧 〈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삼신(三神)」 「삼성(三聖)」등과 같은 종류(種類)이다.
「삼일신(三一神)」을 다시 우리 고어(古語)로 번역하면, 〈천일(天一)〉은 「말한」으로 상제(上帝)를 의미한 것이며, 지일(地一)은 「불한」으로 천사(天使)를 의미한 것이며, 태일(太一)은 「신한」으로서, 「신」은 최고최상이란 말이므로, 「신한」은 곧 「天上天下, 獨一無二(천상천하, 독일무이)」(하늘과 땅에, 즉 우주에 단 하나뿐이다.)를 의미한 것이다. 「말한 ‧ 불한 ‧ 신한」을 이두문자로는 「마한(馬韓) ‧ 변한(卞韓) ‧ 진한(辰韓)」이라고 적었다.
「오제(五帝)」는 「돗가 ‧ 개가‧ 소가 ‧ 말가 ‧ 신가」 등 다섯 「가」로서 곧 다섯 방위의 신(五方位)을 가리킨 것이다. 순서대로 말하면, 「말한」이 「불한」을 낳고 「불한」이 「신한」을 낳았으나, 권력의 순위(順位)로 말하면 「신한」이 신의 세계(神界)와 인간의 세계(人界)의 대권을 다 잡고 「말한」과 「불한」보다 고귀하기 때문에 “삼일(三一) 중에서 태일(太一)이 가장 존귀하다”고 한 것이며, “「五帝(오제: 곧 五가 – 원주)는 곧 태일(太一)을 보좌하는 자” 하였으나 「신가」가 다섯 「가」의 수위(首位 - 우두머리)임은 「신」의 말뜻(語義)으로 보아 명백하므로, 위에서 말한 삼신(三神) ‧ 오제(五帝)는 곧 왕검이 창작한 전설이다.❞
천일(天一) ‧ 지일(地一) ‧ 태일(太一)은 곧 천신(天神) ‧ 지신(地神) ‧ 인신(人神)을 말한다. 즉 하늘 ‧ 땅 ‧ 사람을 말하는데 그 삼신(三神) 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 사람이 태어남은 곧 ≪하늘(天一)의 기운(氣運)이 땅(地一)의 몸을 빌어 사람(太一)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하늘(一) + 땅(二) = 사람(三)≫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 우주가 되며, 하늘, 땅, 사람의 삼신 중에 사람신이 가장 존귀하다는 의미이다. 천황(天皇) ‧ 지황(地皇) ‧ 태황(泰皇)은 천일(天一) ‧ 지일(地一) ‧ 태일(太一)과 동일한 내용이다. 다만 지나인들이 우리 겨레의 것을 가져다가 표현을 하다 보니 글자(文字)만 다르게 사용했을 뿐이다. 요약하면 온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말한 = 馬韓(마한), 불한 = 변한(卞韓), 신한 = 진한(辰韓)을 말하며 뜻글자는 각각 이두로 표현을 한 것이다. 또한 천일(天一) = 말한, 불한 = 지일(地)一) ‧ 천사(天使 - 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자) ‧ 신한 = 태일(太一)이다. 말한은 천신이며, 불한은 지신이고, 신한은 곧 태일 인신을 말한다. 말한이 불한을 낳고 불한이 신한을 낳았으나, 권력의 순위로 말하면 신한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의 대권을 다 잡고 말한과 불한보다 귀하기 때문에 삼일 중에서 태일이 가장 존귀하다고 한 것이다. 결국 하늘, 땅, 사람 가운데 사람이 가장 중요하니 「신한」 ‧ 「말한」 ‧ 「불한」 중에서 「신한」이 으뜸(우두머리, 首位)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오제(五帝)는 각 방위신(方位神)을 말하며 오제는 곧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방위를 지키는 신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오제(오가五加)는 가장 귀한 신인 태일(太一)을 보좌하는 직책을 말 하는 것이다. 결국 「돗가 ‧ 개가‧ 소가 ‧ 말가 ‧ 신가」 등 다섯 「가」는 태일을 보좌하는 직책인 것이다. 그들은 다섯 방위 중에서 담당하는 방위에서 장관 역할을 하며 이를 다스린다. 또한 「신가」는 다섯 가 중에서 우두머리 으뜸이 된다.
②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지방행정조직체계(地方行政組織體系)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은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중앙행정조직체계(中央行政組織體系)만을 고증(考證)을 하신 것만이 아니라 지방행정조직체계(地方行政組織體系)도 논증(論證)을 하였다. 즉 중앙의 3경5부 만이 아닌 지방행정조직인 9부도 고증을 하였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은 단군조선(壇君朝鮮)에 이미 지방행정체계(地方行政體系)도 조직(組織)이 되어있다고 논증을 하신 것이다.
먼저 우리 겨레는 천‧지‧인 삼사상을 중심으로 각 방위를 그 하위개념으로 하여 천지만물의 이치를 해석하였다. 여기서 중시되는 수자는 3, 5, 9 이며 3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하며 이 삼수의 개념은 인간사의 기본수로 인식이 되어있다. 또한 5는 각 방위를 의미하는데 동, 서, 남, 북, 중등 다섯 방위를 말한다. 9는 삼수분화에서 인간사의 완벽수를 말 하며 9를 지나면 열(十, 열다)고 우주의 세계로 나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더해서 9는 동, 서, 남, 북, 중, 동남, 남서, 북서, 북동의 9방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중앙행정조직이나 지방행정조직에 있어서도 3, 5, 9의 수를 하늘, 땅, 사람을 하나로 보고 있으며(하늘과 땅 사람은 곧 하나다), 다섯 방위를 중시하여 5부를 두었으며 각 방향을 더 세분화 하여 9방위로 나누어 지방행정조직을 했다. 이는 아마도 수두의 위치 역시 동일할 것으로 본다.
❝이제 낙랑 ‧ 임둔 ‧ 현토의 연혁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동사강목(東史綱目)〉 강역고(疆域考)에서 「낙랑」은 「량이(良夷)」이고, 「현토(玄兎)」는 「현이(玄夷)」라고 하였다. 단군의 9부(九部)는 곧 청(靑) ‧ 적(赤) ‧ 백(白) ‧ 현(玄) ‧ 황(黃) ‧ 견(畎) ‧ 우(于) ‧ 방(方) ‧ 량(良)이므로 「량이(良夷)」는 곧 「양부(良部)」를 가리킨 것이고, 「현이(玄夷)」는 곧 「현부(玄部)」를 가리킨 것이다.❞
단재 서생이 논증하신 바로 9부는 청(靑) ‧ 적(赤) ‧ 백(白) ‧ 현(玄) ‧ 황(黃) ‧ 견(畎) ‧ 우(于) ‧ 방(方) ‧ 량(良)를 말한다. 여기서 청(靑)은 청이(靑夷)이고, 적(赤)=적이(赤夷), 백(白)=백이(白夷), 현(玄)=현이(玄夷), 황(黃)=황이(黃夷), 견(畎)= 견이(畎夷), 우(于)=우이(于夷), 방(方)=방이(方夷), 량(良)=량이(良夷)를 말한다. 여기서 청, 적, 백, 현, 황, 견, 우, 방, 량을 각 방위를 말한다. 【이(夷)】는 곧 배달겨레를 우러러 이른 말이다. 즉 배달겨레는 곧 하늘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의 【이(夷)】를 말한다. 옥편을 보면 【夷】를 ≪오랑케≫라고 해석을 했으나 이는 대단히 잘 못된 해석이다. 여기서 【夷】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현자(賢者)를 일컫는 말이자 【大(큰) + 弓(활)】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겨레는 바로 하늘나라 사람이요(천손민족天孫民族)이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현자들이며, 큰 활을 사용하는 위대한 겨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夷】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 겨레를 ≪배달겨레≫라고 하기도 하고 역사를 알거나 전공을 하는 사람들은 ≪동이족(東夷族)≫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夷】가 들어가는 민족은 우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면 된다.
상기 청(靑) ‧ 적(赤) ‧ 백(白) ‧ 현(玄) ‧ 황(黃) ‧ 견(畎) ‧ 우(于) ‧ 방(方) ‧ 량(良)은 각 방위를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 백성들이 사방팔방에 흩어져 살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단재 선생이 고증을 하듯이 바로 단군조선시기(壇君朝鮮時期)에 각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조직의 체계를 말 하는 것이다.
위 단재 선생의 논증에 있는 낙랑‧임둔‧현토 등이 마치나 한사군이 단군조선을 물리치고 단군조선의 땅에 식민지를 세워놓고 지배를 한 듯이 남쪽에서는 일제 강점기 이후 교과서를 통해서 배워왔다. 물론 현재는 한나라가 단군조선을 무너뜨리고 단군조선의 땅에 세운 식민지 땅의 이름이라는 걸 대부분이 부인하고 있지만 80년대 까지만 해도 학교라는 공간과 서적등을 통해서 끈임없이 주입을 당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고 통탄할 일인가? 있지도 않는 한나라의 식민지지배를 제 나라의 자라나는 후예들에게 주입을 시켰다는 건 어떤 이유로도 겨레의 이름으로 용서받지 못할 반역적 행위이다. 이는 앞선 장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가 조작해낸 식민사관의 일환이며 식민지지배를 정당화 합리화하기 위해서 왜곡한 악랄한 우리 역사에 대한 왜곡인 것이다. 단군조선시기 근대적 국가조직체계를 가져다가 마치나 우리 겨레가 그 옛날부터 화하족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것으로 둔갑을 시켜 배달겨레의 자라나는 후예들에게 주입을 시켰다는 건 어떤 식으로던 용서받을 수 없는 반민족적 행위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 지나 사서와 우리 사서들을 포함하여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한사군의 허구성을 증명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단재 선생께서 논증한 지리명에 대해서 올려주기로 한다.
❝진번(眞番)은 후세 사람들이 언제나 한 무제(武帝) 유철(劉徹)의 한사군(漢四郡) 중의 한 군(郡)으로 알고 있으나,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진(眞)과 번(番)은 두 나라이다(眞番二國)”라고 하였는바, 대개 진번(眞番)은 곧 「辰(진)‧卞(변)」 양한(兩漢)의 연합국이다. 그런데 화족의 역사에서 이를 잘 못 번역하여 「진번(眞番)」이 된 것이다.
〈관자(管子)」에서의 “진하(秦夏)”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의 “진한(秦韓)”은 다 진한(辰韓)의 선대(先代)인데, 「진한(辰韓)」은 양국이 연합하기 이전의 독립적인 이름이고, 〈설문(說問)〉의 “낙랑번국(樂浪藩國)”과 〈한서(漢書)〉 지리지(地理誌)의 “搖動番汗懸(요동번한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의 “海北卞韓(해북변한)”은 다 변한(卞韓)의 엣터이니, 「卞韓(변한)」도 양국이 연합하기 이전의 독립적인 이름이다.
「진한(辰韓)」‧「卞韓(변한)」이 다 수백 년 강국으로서 그 지위를 자랑해 오다가, 안으로 기자(箕子)의 후손이 발흥하고, 밖으로는 지나와 흉노가 번갈아 침입하니, 이에 양국의 국력이 감퇴하여 드디어 공동으로 방어할 필요에서 연합하여 「辰卞國(진변국)」이라고 한 것이다.
그 위치는 직예성(直隸省:지금의 하북성下北省 - 원주)과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서(漢書)〉 화식전(貨殖傳)에서 “연(燕)은 ... 동(東)으로 진번(眞番)과 교역을 하였다(燕 ... 東賣眞番地理)”고 하였고, 반고(班固: 한서漢書의 저자)의 자서(自敍)에서도 “진번(眞番)은 연(燕)과 서로 접해 있다는 이점이 있다(眞番地利, 與燕相接)”고 하였는바, 변(卞) ‧ 진(辰) 양한을 마한(馬韓)과 병립하여 옛 사서(史書)에서는 삼한(三韓)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 동안 배워왔던 한(漢)나라가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 식민지가 바로 진번(眞番) ‧ 임둔(臨屯) ‧ 낙랑(樂浪) ‧ 현토(玄兎)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 단재 선생이 고증한 진번(眞番)은 곧 단군조선 삼한 가운데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이 안으로는 기자의 후손들이 흥성하게 되고, 밖으로는 지나와 흉노가 번갈아 침입을 하니 양국의 국력이 감퇴를 하게 되었다. 이에 양한은 연합을 하여 공동으로 대적을 하니 곧 【辰卞國】이 되었다. 즉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던 한사군의 식민지라고 했던 진번(眞番)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인가를 증명해준다.
❝〈현토(玄免)〉는 곧 〈현부(玄部)〉로서 단군조선 제2대 임금이자 제1대 임금의 태자(太子)인 부루(夫婁)가 현부(玄部)의 왕(王)으로 창해사자(滄海使者)를 겸하고, 진한(辰韓)이 강성할 때에 〈현부(玄部)〉를 서울로 삼고 현제(玄帝)라 칭하며 나라의 위광(威光)을 떨치던 부(部)이다.❞
이 한사군중의 하나라고 알려진 현토(玄免) 역시 단군조선시기 지방행정구역9부 중 북쪽지역에 있었던 행정구역 이름이라고 고증을 하였다. 또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현이(玄夷)라고 한다. 이는 민족 자체가 다르거나 아예 나라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단군조선 단 하나요, 그 단군조선의 지방인 현토이며, 그 안에 사는 배달겨레를 현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현재 한국 역시 중앙부처기 있는 지방조직중 하나인 서울이 있고, 중앙부처(대통령이 거주하는 지방)가 없는 지방행정구역이 있으며, 각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현 대한민국을 각기 다른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졌다고 해서 나라가 다른 것이 아니다. 또 그 지방행정구역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겨레가 아닌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 지방행정구역을 붙여서 서울 사람, 경기도 사람, 충청도 사람 등등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들이 각각 다른 민족이 아니다. 이와 같이 단군 조선시기 역시 각 지방을 다스리기에 용이하도록 행정구역을 방위별로 구분해서 나누고 또 그 구역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 지역 이름 뒤에 【이(夷)】를 붙여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현토 역시 단군조선의 지방행정구역 중에서 북쪽지방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이며 현이(玄夷)는 현토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따라서 【현토(玄兎)】를 한사군이 단군조선을 멸하고 단군조선의 땅에 식민지로 현토를 설치했다는 설이 얼마나 황당한 억설인가?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이다. 물론 한나라가 단군조선을 무너뜨린 것 역시 허무맹랑한 역사왜곡일 뿐이다. 이 역시 후일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량부(良部)」 곧 낙랑은 먼저는 기씨(箕氏: 箕子)가 이를 차지하고 다음에는 최씨(崔氏)가 그 후에 국호로 삼았던 것이니, 이는 현토‧낙랑 역사의 대개이다. 그 최초에는 모두 9부(九部) 중의 부(部) 이름이고 나라 이름이 아니었다.❞
낙랑(樂浪) 역시 결코 한나라가 단군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식민지 한사군이 아니다. 후일 단군조선이 스러지고 난 후 낙랑국이 건국이 되었다. 그리고 낙랑은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낙랑은 절대 한나라 사람 그 누구도 발을 들인 적이 없는 배달겨레의 성스러운 영토였던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악랄하게 조작 ‧ 왜곡된 한나라의 식민지 한사군 낙랑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서도 후일 상세할 예정이다.
❝「임둔(臨屯)」은 강 이름으로서 대방국(帶方國)의 별명이다. 임진강(臨陣江)의 옛 이름이 대수(帶水)이고, 대수는 대방(帶方) 앞에 가까이 있던 시내(川)이니, 임둔의 음(音)이 변하여 임진(臨陣)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전의 학자들이 강릉(江陵)을 임둔이라고 한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소리이다.
그러나 북대방(北帶方)은 대량하(大梁河) 부근이니, 북대방과 남대방은 다 단군조선의 9부(九部) 내에 속한 분국(分國)들이다.❞
우리가 임둔(臨屯))이라는 지명과 대방(帶方)에 대한 지명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흔히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서 기술된 대방군(帶方郡)이 현 황해남북도 지역에 한사군으로 설치되어있었던 임둔=대방군이라는 것이다. 이는 임진강이 황해도 지역에서 발원하여 경기도와 황해도 경계사이를 지나 강화도 북방으로 흘러들기에 조작된 한나라의 식민지 한사군 임둔(臨屯)이요, 대방군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역사조작인가? 일제에 의해서 악랄하게 왜곡 조작된 한사군설(漢四郡說)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8년 정도까지 지나와 배달겨레(남‧북 모두)를 뒤흔든 동북공정(東北工程)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서 왜곡된 한사군 문제와 만주와 한반도사관의 위험성을 면밀하게 바라봐야한다. 만일 삼국사기나 기타의 사적 자료들을 위주로한 기존의 강단사학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나(支那)의 동북공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걸 주지하여야 한다. 물론 과거 역사도 현재의 국력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도 현실이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 왜곡 말살된 우리의 상 ‧ 고대사를 철저하게 복원하여 다시는 외세에 의해 우리 겨레가 농락당하는 비극이 재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재 선생의 단군조선에 대한 고증 중에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삼한(三韓)이 남삼한(南三韓)과 북삼한(北三韓)으로 존재를 했다는 것이다. 아직 필자도 이 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연구를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이론 역시 철저하게 연구를 해볼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만약 단재 선생의 고증대로 남삼한과 북삼한이 존재를 했다면 그 동안 사서들에 기술된 지나와 배달겨레의 투쟁사를 용이하게 분석해낼 수 있다고 본다. 즉 화하족과의 쟁투는 현 조선반도 내에서는 벌어지지 않았으며 현 동북삼성의 가장 서쪽 혹은 대륙의 땅에서 벌어졌다는 논증을 할 수가 있다고 본다. 단재 선생 역시 조선상고사와 상고문화사에서 단군조선이 대륙 한복판에 거수국(식민국)을 거느렸다고 논증을 하고 있다. 이 역시 후일 상세할 예정에 있다.
③ 단군조선(壇君朝鮮) 행정조직(行政組織) 관직명(官職名)
㈀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최고령도자의 호칭인 【임금】
단군조선(壇君朝鮮)에 근대적 국가형태의 중앙 및 지방행정조직이 존재를 했다면 당연히 그 조직을 담당했던 담당관의 관직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단재 선생은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즉 단군조선시기(壇君朝鮮時期) 조직(組織)의 최상위(最上位) 담당자로부터 지방행정의 담당 관직명에 이르기까지 명쾌하게 고증을 했다.
먼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최상위(最上位) 관직명(官職名)은 당연히 단군(檀君)이라는 칭호(稱號)일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배달겨레 구성원들은 단군(壇君) 혹은 단군(檀君)이 단군조선시기(壇君朝鮮時期)에 있어서 최상위의 관직명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단군(壇君) 혹은 단군(檀君)은 칭호가 아니다. 이는 이두로서 【壇=檀은 박달(밝은 땅, 하늘나라, 광명의 땅 등등을 나타낸다. 君=임금(검, 감, 곰)으로서 땅신을 일컫는 말이다. 즉 하늘 신, 땅신(토지가 아닌 온 누리를 말 함), 인신(太一) 중에서 지일(地一)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금은 본래 검님이지만 앞뒤 말이 바뀌어 임금 쓰이게 된 것이다. 요약하면 壇=檀 + 君 = 박달 + 임금 = 박달 임금】이 된다. 따라서 이에 대해 단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논증을 하였다.
❝그러나 평양(平壤)의 옛 이름이 「왕검성(王儉城)」이고, 신라의 〈선사(仙史)〉에서도 “平壤者, 仙人王儉之宅(평양자, 선인왕검지택)”(→ 평양은 선인왕검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라고 하였고, 〈위서(魏書)〉에서도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國阿斯達, 國號朝鮮(내왕이천재, 입국아사달, 국호조선)”(→2천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는데,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이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조선 고대에 단군왕검을 종교의 교주(敎主)로 존숭하여 왔음은 사실이고, 「왕검(王儉)」을 이두문의 독법으로 해독하면 【임금】이 될 것이다. 따라서 【임금(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이 당시에 유행하는 「수두」의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의 수두에 출현하여 스스로 상제(上帝)의 화신(化身)이라고 칭하고 조선을 건국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역대 제왕의 칭호를 【임금(검)】이라 하였으며, 역대 경성(京城)의 명칭도 【임금】이라고 했던 것이다.❞
단재(丹齋) 선생(先生) 역시 ≪왕검(王儉)≫을 이두(吏讀)로 【임금(검)】으로 해석을 하였다. 필자가 해석하는 「王」자는 「壬」자와 같이 해석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윗분들에 대해서 높여 부를 때 이름 뒤에 꼭 〈님〉자를 붙여 쓰는데 바로 이 〈님〉자의 이두로 「壬」자에서 「王」자로 전이가 되었다고 해석을 한다. 필자 어린 시절 어른들은 결코 「왕」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어른들은 꼭 〈임금〉이라는 호칭만을 사용을 하였다. 물론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60년대까지만 하여도 책에도 〈임금〉이라고 호칭이 되어있었다. 그 한 예가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요약하면 「王」= 「壬」=〈님〉=〈임〉이라는 등식이 성립 된다. 「王」= 「壬」은 모두 이두로소 우리말 존칭토씨인 【님=임】을 나타내고 있다.
「儉」은 글자 그대로 【검(금,곰,감)】으로 소리 나는 대로 해석하면 된다.여기서 【검(금,곰,감)】은 천신(天神), 지신(地神 - 단순히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즉 온 누리를 의미한다.), 인신(人神) 가운데 온 누리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덕업을 쌓을 수 있는 신(神)을 가리키는 말이다.
「王」 + 「儉」 = 님(임) + 금(검,감,곰) = 「王儉」 = 「임금」이 된다. 우리 겨레의 높임말 토씨는 원래 뒤에 붙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본래는 【금님】이지만 말의 앞뒤가 바뀌어서 【임금(검, 감, 곰)】이 된 것이다. <단군조선>의 【임금】이라는 호칭을 ≪부도지≫에서는 일관되게 【임검씨】로 기록되어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추후 단군조선을 분석할 때 더 상세하게 글을 올릴 예정이다.
이와 같은 이두와 말의 앞뒤 오는 것에 따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平壤者, 仙人王儉之宅(평양자, 선인왕검지택)”는 내용의 문장은 전혀 하자가 없다. 이 문장은 이두로 해석을 하면 우리말 그대로 말의 앞뒤를 늘어놓은 것이다. 말이 중복이 된다거나 어순이 뒤바뀌지를 않고 매끄러운 문장이 된다. 위 문장을 필자는 아래와 같이 해석을 한다.
“펴라(평양)는 선배 임금이 머무는 땅이다.” 현대 언어적인 해석을 한다면 “평양은 선배 임금이 수도로 삼은 곳이다”라는 문장이 되는 것이다. 수도에 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령도자가 머무는 것은 동서고금에 일치한 현상이다.
반면 지나 사서들을 보면 【임금】이라는 말이 한 문장 안에서 중복되게 기록되어있다. 〈위서(魏書)〉에 기록된 “~有壇君王儉~”을 보면 【임금】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겹쳐서 기록되어있다. 즉 ≪君 = 임금, 王儉 = 임금≫이다. 결국 위서에 기록된 문장을 그대로 해석하면 “박달나라 임금 임금”이라는 문장이 된다. 이는 역시 이민족인 화하족이 배달겨레의 것을 가져다가 쓰다보니 이두문으로 기록된 것을 모르고 어이없게도 중복이 되게 사용을 한 것이다. 반면 비록 ≪삼국사기≫에 ≪단군관계사≫가 위 단 한 문장만 기록이 되어있지만 문맥에서는 전혀 하자가 없는 완벽한 문장으로 기록이 되어있는 것이다. 김부식이 비록 단군관계사를 전혀 기록하지 않고 삼국사만 기록을 함으로써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장구성에서는 우리 겨레이다 보니 비록 뜻글자를 이용한 이두문을 사용을 해서 기록을 했어도 문장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 중앙행정조직(中央行政組織)의 관직명(官職名) 호칭(呼稱)인 삼한(三韓)
단군조선(壇君朝鮮)에서 관직명 역시 상당히 치밀하고 체계적이다. 최고 최상의 령도자에 대한 관직호칭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아래 관직명까지 세밀하게 명명이 되어있었다. 이제 최고 최상의 령도자의 호칭인 【임금】 그 아래 관직에 대한 호칭은 어떤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 겨레는 ≪천 ‧ 지 ‧ 인≫ 삼사상(三思想)에 의해 조직되고 다섯 방위와 아홉방위에 따르는 조직체계를 보인다는 것은 이미 행정조직체계에서 언급을 하였다. 이러한 조직체계는 철저히 우주만물의 이치와 인간의 이치에 의해서 조직이 된 것이다. 이러한 행정조직체계는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까지도 철저하게 유지되어왔다. 즉 고려의 9주5소경제와 조선시대의 3정승제도 역시 우리의 전통적인 삼사상체계에 의한 행정조직체계에 따른 것이다.
먼저 우리는 단군조선(壇君朝鮮)에 삼한(三韓)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이 되었다. ≪삼한(三韓)≫은 행정구역의 이름이 아니라 구분된 행정구역을 담당하는 관직명이다. 구분된 행정구역명은 실제에 있어서는 〈진(辰) = 신〉 ‧ 〈말(馬)〉 ‧ 〈변(卞) = 불〉이다. 이러한 지역명칭 뒤에 관직의 명인 ≪한(韓, 汗, 干간)≫을 붙여서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卞韓)】으로 호칭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壇君朝鮮)에서 중앙직제에서 【삼한(三韓)】은 관직명(官職名)인 것이다. 아래 단재(丹齋) 선생(先生)이 한 고증(考證)을 보자.
❝삼한의 이름은 어느 때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전의 학자들은 「韓(한)」의 자의(字意 - 글자의 뜻)를 풀이하여 이르기를, 우리말에서 첫째를 「한아 → 연음법칙에 의해서 “하나”로 변화됨」라고 하고, 큰 것을 「한」이라 하니, 韓(한)이라 하니, 韓(한)은 곧 이에서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한」 또는 「한아」라고 한 형용사를 가지고 「韓」이라 하였다면, 「한밭(大田 - 원주)」 「한시울(큰 방大) - 원주原註」의 「한」과 같이 「韓」 자가 앞에 놓여서 韓辰(한진) ‧ 韓卞(한변) ‧ 韓馬(한마)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辰韓(진한) ‧ 馬韓(마한) ‧ 卞韓(변한)이 되었는가?
청(淸)의 건륭황제(乾隆皇帝)가 말하기를 “三韓(삼한)은 三汗(삼한)이요, 삼한 여러 나라의 卑離(비리)는 곧 貝勒(패륵: 패리)이니, 汗(한)이 貝勒(패륵)을 통솔하는 것은 동방 제국의 제도였다.”고 하였으니, 이 풀이가 가장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신라에 「居西干(거서간)」 「角干(각간)」 등의 칭호가 있고, 고구려 백제에 「가한(可汗)」등 신(神)에 대한 제례(祭禮)가 있으니, 이는 곧 우리 고대에 「汗(한)」이란 관직명이 있었던 증거이다. 고구려 때에는 전국을 삼경으로 나누고 각 경(京)마다 「汗(한)」(「丸都城干 朱理(환도성간 주리)」을 두었으므로, 단군의 부소량(夫蘇樑) ‧ 오덕지(五德地) ‧ 백아강(白牙江)의 삼경(三京)에도 삼한(三汗)이 있었을 것이다.
~전략~ 삼한(三韓)은 곧 삼한(三汗)인데, 삼한(三汗)은 곧 삼경(三京) 장관(長官)의 이름이다.❞
삼한(三韓)이 곧 삼경(三京) 장관(長官)의 이름이라는 뜻풀이는 위에서 했으니 단재 선생의 고증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필자가 연구해온 바에 따르면 중앙관직에 삼한(三韓) 아래에 각각 「신지(치)」 「말지(치)」 「불지(치)」라는 관직명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지」는 「신지비사」를 남긴 사관(史觀)으로서 문자(文字)등과 같은 문화‧문명에 관련된 직책을 맡아봤다고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말지(치)」에 대해서는 단군조선(壇君朝鮮)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삼국시기(三國時期)에 그 직책명이 있다. 즉 고구려시기 군사와 정치를 모두 담당하였던 임금 다음으로 높은 벼슬인 【막리지】는 이두로서 곧 【말지(치)】를 말한다. 즉 「馬(말)」의 행정단위에서 【말한(馬韓)】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관직명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또한 신라에서 「임금」 다운 임금의 호칭을 처음으로 얻었다고 하는(아마도 식민사관에 의해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삼국사기 초기불신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작되었을 개연성이 대단히 높다.) 【내물(奈勿) 마립간(麻立干)】 역시 이두로서 해제를 해보면 ≪麻 = 마, 立= 립, 干 = 간, 마 → “마”를 취하고, 립 → “ㄹ”을 얻고, 간 = “한”으로 그대로 둔다. 다음 마 + “ㄹ” = 말이 된다. 따라서 말 + 한 = 말한이 된다≫
❝왕의 칭호를 「불구래(弗矩內)」라고 하고❞ ❝우리 조선에서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사람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경우도 많은데 「부루(夫婁)」 「 품리(稟離)」 등이 다 「불」의 음역(音譯)이다.❞
여기서 「부루」 「품리」등이 모두 이두로서 「불 = 밝」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을 했듯이 신라의 관직명에 「각간(角干)」이 있는데 각각을 이두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角 = 뿔 각 = 불 각, 干 = 간은 곧 汗이다. 따라서 角 + 干 = 뿔 + 간 = 불 + 한 = 불한≫이 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삼한(三韓) 아래 관직으로 「신지(신치)」 ‧ 「말지(치)」 ‧ 「불지(치)」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 단군조선(壇君朝鮮) 중앙행정관직명(中央行政官職名)의 가(加)
❝ 「삼경(三京)」을 두어서 세 「한」이 나뉘어 주재(駐在)하였으며, 세 「한」의 밑에 「돗가 ‧ 개가 ‧ 소가‧ 말가 ‧ 신가」의 다섯 「가」를 두고, 전국을 동 ‧ 남‧ 서‧ 북‧ 중 「오부(五部)」로 나누어 다섯 「가」가 중앙의 다섯 국무대신(國務大臣)이 되는 동시에 오부(五部)를 나누어 다스리는 다섯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다섯 「가」의 우두머리(首位)가 되며, 전시에는 오부의 인민으로써 중 ‧ 전 ‧ 후 ‧ 좌 ‧ 우의 5개 군(軍)을 조직하여 「신가」가 전 ‧ 후 ‧ 좌 ‧ 우의 네 원수(元帥)로 되어 출전하였다.
우리가 즐겨하던 윷판이 바로 다섯 「가」의 출진도(出陳圖)이다. 윷놀이를 할 때 우리가 쓰는 「도(刀) ‧ 개(介) ‧ 걸(乞) ‧ 유(兪) ‧ 모(毛)」는 이두자로 쓴 다섯 「가」의 칭호이니, 도(刀)는 「돗가」이고, 개(介)는 「개가」이며, 유(兪)는 엣날 음(古音)이 「소」이므로 「소가」이고, 모(毛)」는 「말가」이며 걸(乞)은 「신가」이니, 乞로써 「신가」를 적은 것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 시대에 「견사(犬使)」란 관명(官命)이 있는데 대개 견사(犬使)의 「犬(견: 개)」을 의역(意譯)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돗(猪:돼지) ‧ 개(犬) ‧ 소(牛) ‧ 말(馬)등 축류(畜類)로써 다섯 방위의 신의 이름(神名)을 삼고 동시에 이로써 관직명을 삼은 것은, 이때 와서 수렵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농목시대(農牧時代)가 되었다는 증적(證迹)이다. ❞
단군조선시기(檀君朝鮮時期) 최상위의 령도자인 「임금」을 정점으로 아래 「삼한」을 두었으며 삼한의 아래에 「삼치(지)」를 두었고, 그 아래 단위로 전국을 5부로 나누어 다스리는데 5가(五加)를 두었다. 각각의 오가(五加)는 단군조선의 강역을 동, 서, 남, 북, 중으로 나누어 다섯 지방장관을 맡아 다스렸다. 그 관직명은 집에서 기르는 다섯 종의 집짐승의 이름 뒤에 「가(加)」를 붙여 불렀다. 그 다섯 가(加)의 명칭은 「돗가 ‧ 개가 ‧ 소가‧ 말가 ‧ 신가」의 다섯 「가」이다. 단재 선생이 고증을 한 관직명 이외에 다른 사서들에서는 중앙행정조직들에서 더 상세한 관직명과 맡은 바 책무등이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있다. 물론 단재 선생도 【팽오(우)】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었지만 다른 관직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본 연재 글에서는 단재 선생의 단군조선사(壇君朝鮮史)에 대해서만 분석을 하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후일 단군조선관계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때 많은 사서들에 기록되어진 자료를 근거고 자세하게 증명을 하게 될 것이다.
단재 선생은 이외에도 전국을 9부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고증을 하였다. 하지만 그 직책에 대해서는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단재 선생의 글에서는 각 지방의 직제와 직책이 중앙의 직제와 직책을 따라 이루어졌다고 언급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수두론」에서 그 단초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필자는 단재 선생이 더 이상의 자료를 남기지 않았기에 언급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④ 단군조선시기(檀君朝鮮時期)의 군사조직체계(軍事組織體系)
㈀ 군사조직체계(軍事組織體系) 및 출전도(出戰圖)
단군조선시기(檀君朝鮮時期)의 군사조직체계(軍事組織體系)가 현대와 같이 군(軍)은 국방의 일만을 담당하는 것과 같이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 혹은 5200여 년 전에 오늘 날과 같이 엄격하게 군사체계가 갖추어졌으리라고 믿기가 힘들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 시기 다른 민족들은 군사라는 것 자체가 있는 지 조차도 몰랐을 시기에 우리 겨레의 역사에 있어서 군사체계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 겨레를 과대평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이 분명하게 고증을 했듯이 배달겨레는 이미 그 시대에 체계적인 군사조직체를 갖추었다. 물론 다른 사서들에서는 그 이전의 시기에도 군사체계를 갖추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논하기로 한다.
먼저 단재 선생은 단군조선시기의 군사조직체계에 대한 언급을 「수두론」에서 하고 있다.
❝ 每年 5月과 10月에 〈수두〉에 나아가 祭할 새, 1人을 뽑아 祭主를 삼아 〈수두〉의 中央에 앉히어 〈하느님〉〈天神〉이라 이름 하여 衆人들이 祭를 올리고 〈수두〉의 周圍에 금줄을 매어 閑人의 出入을 禁하고, ~ 중략 ~ , 强賊이 侵入하면 各 〈수두〉所屬의 部落들이 聯合하여 이를 防禦하고 가장 功이 많은 部落의 〈수두〉를 第一位로 尊崇하여 〈신수두〉라 이름 하니 〈신〉은 最高最上을 의미한 것이며, 기타의 각 〈수두〉는 그 아래 附屬하였나니, 三韓史에 보인 〈蘇塗〉는 〈수두〉의 音譯이며 〈新蘇塗〉는 〈신수두〉의 音譯이요, ≪震壇九變國圖≫에 보인 〈震壇〉의 〈震〉은 〈신〉의 音譯이며 〈壇〉은 〈수두〉의 音譯이요, 〈壇君〉은 곧 〈수두하느님〉의 音譯이니라. 〈수두〉는 小壇이요 〈신수두〉는 大壇이니 一〈수두〉에 一壇君이 있었은 즉 〈수두〉의 壇君은 小壇君이요 〈신수두〉의 壇君은 大壇君이니라.❞
상기 단재 선생의 수두론에서 보면 종교적 조직체계로서의 수두론과 군사조직체계로서의 수두론 그리고 행정조직체계로서의 수두론을 다 볼 수가 있다. 이미 종교론적 관점에서 본 수두론과 행정조직체계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을 했기에 여기서는 군사조직체계(軍事組織體系)에 대해서만 보기로 하자.
군사(軍事)란 외적을 막기 위해서 집단을 조직하고 무력을 통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서 훈련과 단결을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못된 민족들은 방어만을 위한 군사가 아닌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침탈하기 위해서 조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배달겨레는 특별한 변이 없는한 결코 이민족을 지배하기 위해서 침략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단재 선생이 단군조선의 대륙거수국을 논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현대적인 식민지지배와 제국주의 형태의 거수국이 아닌 그야말로 미개하고 문명개화하지 못한 이민족에게 밝은 문명과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서 취해진 거수국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强賊인 侵入하면 各 〈수두〉所屬의 部落들이 聯合”
본 문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문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단군조선시기에 군사조직체계가 존재를 했다는 의미를 가지며, 당시에 각 지역 혹은 집단별로 존재하던 군사조직을 연합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몇 가지를 시사해주고 있다. 첫째 - 배달겨레는 각 단위 혹은 집단별로 군사훈련을 상시적으로 하고 있었다. 둘째 – 각 단위별 군사조직체 내지는 집단별 군사조직 상호간에 긴밀한 연락체계가 상시적으로 이루어졌다. 셋째 – 군사조직상호간에 직위와 직급이 정해져있었으며 명령체계가 완벽하게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만약 직위와 직급의 상하관계가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군의 특성상 연대 연합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 당시에 이미 단독 전쟁 혹은 연합전쟁에 대비해서 전술전략이 갖추어져 있었다. 다섯째 – 아래 문장을 보면 당시에 이미 방어의 개념이 확실하게 정립이 되어있었으며 전쟁의 공과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규명을 할 수 있는 규율 혹은 군율이 존재를 했었다고 보는 것이다.
❝ 가장 功이 많은 部落의 〈수두〉를 第一位로 尊崇하여 〈신수두〉라 이름 하니 〈신〉은 最高最上을 의미한 것이며, 기타의 각 〈수두〉는 그 아래 附屬하였나니, ~중략~ 〈수두〉는 小壇이요 〈신수두〉는 大壇이니 一〈수두〉에 一壇君이 있었은 즉 〈수두〉의 壇君은 小壇君이요 〈신수두〉의 壇君은 大壇君이니라.❞
일곱째 – 단군조선시기 이미 현재 군의 단위별 군사조직체계가 갖추어졌었다는 것 위 단재 선생의 고증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어덟째 – 마지막으로 당시에 비록 대단군(大壇君) 일지라도 공을 세우지 못하면 그 직급이 강등된다는 사실을 말 해주고 있다. 또한 소단군(小壇君) 이라고 해도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에서 공을 세우면 직급이 상승이 되어 대단군(大壇君)이 된다는 것을 고증해주고 있다. 따라서 각 단군들이 이끌고 있는 「수두」와 「신수두」의 위상도 각 단군들의 공에 따라 바뀌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재 선생은 군사(軍事) 조직체계와 전쟁수행방법 그 평가 등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들을 후세들에게 남겨주셨다.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이민족들은 군사라는 것조차 몰랐을 시기 단군조선에서는 이미 상기와 같은 군사조직체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군율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고증을 하였다.
단재 선생은 수두론 이외도 군사조직체계와 출전도(出戰圖)에 대해서 논증을 하였다. 아래를 보자.
❝~전략~ 삼경(三京)」을 두어서 세 「한」이 나뉘어 주재(駐在)하였으며, 세 「한」의 밑에 「돗가 ‧ 개가 ‧ 소가‧ 말가 ‧ 신가」의 다섯 「가」를 두고, 전국을 동 ‧ 남‧ 서‧ 북‧ 중 「오부(五部)」로 나누어 다섯 「가」가 중앙의 다섯 국무대신(國務大臣)이 되는 동시에 오부(五部)를 나누어 다스리는 다섯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다섯 「가」의 우두머리(首位)가 되며, 전시에는 오부의 인민으로써 중 ‧ 전 ‧ 후 ‧ 좌 ‧ 우의 5개 군(軍)을 조직하여 「신가」가 전 ‧ 후 ‧ 좌 ‧ 우의 네 원수(元帥)로 되어 출전하였다.
우리가 즐겨하던 윷판이 바로 다섯 「가」의 출진도(出陳圖)이다. 윷놀이를 할 때 우리가 쓰는 「도(刀) ‧ 개(介) ‧ 걸(乞) ‧ 유(兪) ‧ 모(毛)」는 이두자로 쓴 다섯 「가」의 칭호이니, 도(刀)는 「돗가」이고, 개(介)는 「개가」이며, 유(兪)는 엣날 음(古音)이 「소」이므로 「소가」이고, 모(毛)」는 「말가」이며 걸(乞)은 「신가」이니, 乞로써 「신가」를 적은 것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 시대에 「견사(犬使)」란 관명(官命)이 있는데 대개 견사(犬使)의 「犬(견: 개)」을 의역(意譯)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돗(猪:돼지) ‧ 개(犬) ‧ 소(牛) ‧ 말(馬)등 축류(畜類)로써 다섯 방위의 신의 이름(神名)을 삼고 동시에 이로써 관직명을 삼은 것은, 이때 와서 수렵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농목시대(農牧時代)가 되었다는 증적(證迹)이다. ❞
단군조선시기에는 행정조직의 책임자와 군사조직의 책임자가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역시 현재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구분이 되어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행정관 혹은 지방관들은 외적인 침입을 하면 갑옷을입고 활과 화살통을 짊어지고 장검을 꽃고 말을 타고 병졸들을 거느리고 전장터에 나아가 앞장에 서서 싸웠다. 아마도 이 전통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겨레의 전통이 아닌가 싶다. 단군조선시기에도 소단군 대단군들이 외적의 침입에 맞서 앞장서 싸웠음을 이미 언급을 하였다.
❝ 「신가」는 다섯 「가」의 우두머리(首位)가 되며, 전시에는 오부의 인민으로써 중 ‧ 전 ‧ 후 ‧ 좌 ‧ 우의 5개 군(軍)을 조직하여 「신가」가 전 ‧ 후 ‧ 좌 ‧ 우의 네 원수(元帥)로 되어 출전하였다. ❞
단재 선생은 상기 문장에서는 수두론에서 논증하던 것보다도 더 자세하게 단군조선시기의 군사조직체계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다. 즉 오가(五加) 중에서 「신가」가 중앙군의 지휘자이자 전군의 총지휘관이 되며, 「신가」가 직접 거느리는 군사집단은 중앙군이 되는 것이다. 또한 나머지 네명의 가(加)들은 전, 후, 좌, 우의 군사지휘관이 되명 그들이 거느리는 군사집단들 역시 전군, 후군, 좌군, 우군으로 편성이 되어 전쟁터에 나아가 싸웠다. 참으로 정교하고도 치밀한 군사배치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 시대에 이미 치밀한 군사조직체계가 갖추어져있었으며, 출전도 역시 완벽하다. 이 출전도가 바로 윷놀이로 우리 겨레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단재 선생이 고증을 하였다.
㈁ 단군조선시기(壇君朝鮮時期) 군사칭호(軍司稱號) 및 군사집단명(軍事集團名)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단군조선(壇君朝鮮)에는 강역내(疆域內)을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해 전국을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을 하였다. 중앙에 삼한(三韓)과 5부(部)를 두고, 지방에는 9부(部)를 두었다. 또한 구분(區分)된 중앙(中央)과 지방(地方)의 행정구역(行政區域)과 동일한 군사조직(軍事組織)을 두어 외적의 침입(侵入)에 대비를 하였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의 군사조직(軍事組織) 가운데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선배집단(仙人集團)이 있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선배집단(仙人集團)의 특징은 현대 군사상(軍事像)으로 비교해보면 특수부대(特守部隊)와 같은 임무를 수행을 했다. 선배집단(仙人集團)은 단군조선시기에 갑자기 조직이 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배달겨레의 역사(歷史時代 - 삶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시대를 말함)가 시작이 되었던 초기부터 조직되어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 문제는 추후 분석을 할 것이다. 또한 배달겨레에게 있어서 군사집단인 선배집단은 단순히 군사임무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종교, 공공건축, 토건 등을 우선적으로 담당했다. 그 제도는 고구려, 신라에 그 기록이 남아있으며 고려시기까지 이어진다.
❝ 「仙人王儉(선인왕검)」이라 한 것은 삼국시대에 「수두」 교도(敎徒)의 일단을 「선배」라 부르고, 「선배」를 이두문자로 「仙人(선인)」 혹은 「先人(선인)」이라 적었던 것이며 ❞
단재 선생은 선배집단이 수두교도의 일단을 말 하는 것이라고 논증을 하였다. 우리가 수두론에서 이미 보았듯이 당시에는 종교와 정치 그리고 군사가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수두의 우두머리인 단군은 강한 외적이 침입을 하였을 때 각 수두들이 연합을 하여 외적을 물리치고 그 공이 큰 수두를 【신수두】로 하고, 또 해당 수두의 우두머리인 단군은 【대단군】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종교집단으로 묘사를 한 【선배집단】은 군사집단인 【선배집단】도 되는 것이다. 아래 글을 보자.
❝ 무릇 사선(四仙)이란 수천 년 국수(國粹)의 정신(精神)의 중심이었고, 무사(武士)의 혼(魂)이라고 할만한 신라의 선랑(仙郞)인 남랑(南郞) ‧ 술랑(述郞) ‧ 영랑(永郞) ‧ 안상랑(安詳郞) 등 네 사람이니 ❞
여기서 사선(四仙)은 바로 신라의 선랑들을 의미하며, 신라의 선랑(仙郞) 곧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선배」를 이은 것이다. 신라의 선랑(仙郞)이 단지 제도만을 이은 것이 아니라 그 얼(精神)과 넋(魂)을 이어받은 집단이었다. 특히 신라는 바로 「신한」을 이어받은 나라이다. 따라서 선대의 제도인 「선배」를 이어받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또한 신라의 선랑(仙郞)들 역시 무사(武士) 집단이라는 것도 선대인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선배」를 이은 것이다.
❝ 「화랑」의 별명은 「국선(國仙)」 ‧ 「선랑(仙郞)」이라 하였고, 고구려 「조의(白+七 衣)」¹의 별명은 「선인(仙人)」이라 하였으며, 〈삼국유사〉의 화랑을 「신선지사(神仙之事)」라고 하였으니, 신라의 화랑은 곧 고구려의 「조의(白+七 衣)」에서 나온 것이며, 고구려사의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이 자리 잡은 곳(平壤者, 仙人王儉之宅)”이란 말은 곧 선사(仙史)의 본문이니, 단군은 곧 선인의 시조(始祖)이며, 선인은 곧 우리의 국교(國敎)이고, 우리의 무사도(武士道)이고, 우리 민족의 넋이고 정신이며, 우리 국사(國史)의 꽃이거늘❞
단재 선생은 단군조선시기부터 내려온 〈선배집단〉을 매우 중시했으며, 〈선배집단〉을 가리켜 우리의 국교(國敎)요 무사도(武士道 = 軍人精神)이며, 우리 민족의 얼과 넋이라고 까지 하였다. 필자가 연구를 해온 바에 의하면 선배집단은 곧 우리 민족을 유지시켜나가는데 기둥이요 우리 민족이 나가는 길에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또한 선배집단은 문명과 문화를 선도하며 나라의 발전을 앞장에 서서 이끌어가는 선도집단 이었다. 즉 선배집단은 평화시기에는 공공건축물은 짓고, 도로를 닦고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앞장에 서서 구제를 했다. 하지만 나라가 위란에 빠졌다거나 외적이 침략을 하면 무장을 갖추고 전쟁의 선두에 서서 전쟁에 참여를 하여 승전을 하고 나라를 지켰다. 선배집단은 평화시기라 해도 훈련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의 집에는 항상 활과 화살, 장검과 창 그리고 방패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더구나 고구려시대의 선배집단은 당시 무적의 무장장비로 일컬어지는 【개마무사】들이었다. 고구려의 그 유명한 【명림답부】역시 선배였다.
※※※단재 선생의 〈우리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3회로 마칠 예정이었으나 단재 선생의 단군조선(전조선, 후조선)에 대한 고증이 워낙이나 중요해서 다음 주 한 회 정도를 연장하여 연재를 할 계획이다. 다음 주에는 단군조선의 경제사, 대외관계사, 사상사, 문화, 예술, 풍습 등에 대해서 기고를 할 계획이다. 또 이번 회에서 마무리를 하지 못한 【선배】에 대해서도 상세를 해줄 계획이다. 【선배】제도는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현재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기 4347년(2014년) 6월 17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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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 ※※※
조의선인 : 〈조의〉란 하얀 옷에 검은 띠를 두른 것을 말한다. 또한 선배집단들 중 대선배들은 검은 옷을 입었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말까지 이어졌으며, 조선조 초까지도 이어졌다고 단재 선생은 고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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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한국근대사상가선집➁ 신채호(申采浩)(신채호 원저. 안병직 편. 한길사. 1979년 12월 25일)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丹齋申采浩全集 別集(신채호 원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단재신채호전집발행위원회. 1977년 12월 28일)
주역 조선상고사(下) (신채호 원저. 이만열 주역.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12월 30일)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00주년기념논집(論集),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0년 12월 8일)
조선상고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년 11월 10일)
조선상고문화사〈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사론(史論)〉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몀 3월 5일)
한단고기(계연수 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 2010년 3월 25일)
삼국유사(일연 저. 이민수 주역. 을유문화사. 1975년 2월 20일)
삼국유사(일연 저. 박성봉 / 고경식 주역. 서문문화사. 1985년 10월 15일)
삼국유사(일연 저. 리상호 옮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 연구소. 까치글방. 1999년 5월 10일)
불함문화론(최남선 저. 정재승 / 이주현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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