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로마에는 .3두 정치라는 것이 있었다. 제1기 3두 정치는 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랏수스의 세 명이 로마의 정치를 농단하던 시기였으며 제2기 3두 정치는 카이사르의 암살 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가 로마를 지배했던 시대이다.
이들 세 명이 권력을 공동 소유하게 된 것은 과연 하나의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이서 무엇을 양분하면 자칫 적대적이 되거나 분열하기 십상이지만 그 가운에 완충 장치를 둠으로써 권력을 보다 안정적으로 소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역사에서 삼국 동맹·삼국 간섭·삼국 현상·삼제 협상·삼국 동맹 등이 용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여러 나라가 각축하던 유럽 역사에서 세 나라가 연합하는 경우가 두 나라가 연합하는 경우보다 많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제2차 대전은 일본·이탈리아·독일의 3주축국의 동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제갈공명은 일찍이 유비가 한(漢)의 멸망 이후 중국의 미래를 묻자 3국 정립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그가 3국 정립을 말한 주된 이유도 바로 상호 견제와 협조가 동시에 가능한 공존의 세계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가장 유명한 소설 중 하나가 유비·조조·손권 등 영웅들의 활약을 그린「삼국지연의」라는 사실은 재삼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순전히 우연이라고 해도 좋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카톨릭과 기독교간의 갈등으로 벌어진 전쟁 중에 30년 전쟁이라는 것이 있다. 또 우린 나라는 3년간의 한국 전쟁을 겪었다. 30년 또는 3년에 전쟁을 끝내게 된 것은 그 숫자가 의미하는 기간에 대한 인간들의 어떤 심리적 원인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3이라는 숫자는 어떤 단락이나 종결같은 것을 은근히 사람들에게 압박하는지도 모른다.
중세 봉건제하의 농업은 이른바 3포제라는 것인데, 이것은 전농업 경지를 3등분하여 한 번은 여름 곡식, 한 번은 겨울 곡식을 심고, 한 번은 쉬어서 농토의 자생력을 키우는 농업 방식이었다.
또 중세 유럽의 신분 구조는 5백년 이상을 승려·귀족·평민이라는 3계급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그 신분들의 대표가 모여 만든 3부회라는 의회가 있었다. 이 의회는 유명무실하였다가 제3계급이 일으킨 프랑스혁명 때에 비로소 없어졌다. 제3계급이 일으킨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자유·평등·박애라는 세 가지 이념이었으며, 그 후 프랑스의 국기는 그것을 상징하는 세 가지 빛깔을 횡으로 그은 것으로 삼색기라 불린다. 오늘날에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색깔을 달리한채 3색을 기본으로 하는 3색기가 보편적이다.
식민주의 시대 영국이나 독일은 해외에 자신들의 세계를 펼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 때 영국이 추진한 정책은 케이프타운·카이로·캘커타를 잇는 3C 정책이었으며, 이에 대항하여 독일이 펼친 정책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 정책이었다.
조선조 말의 정치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그 중에도 군에 관한 정치, 곡물에 관한 정치, 논밭 등에 대한 세금이 문란하였는데 이를 3정의 문란이라고 했다.
손병희는 3·1 운동을 전후해서 일본에 대한 도전·언전·재전의 3전을 실시하라고 국민에게 촉구했다. 쑨원이 신해혁명 후 주장한 것도 삼민주의이다. 우리들은 무엇을 주장하거나 분석할 때에 알게 모르게 3이라는 숫자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쑨원의 정신을 이어 받은 장제스(장개석)는 공산 정권 타도를 시도할 때 공산 지역 장정을 모두 죽이는 살광(殺光), 그 지역 가옥을 모두 불태우는 소광(燒光), 모든 식량은 운반하되 운반하지 못하는 식량은 모두 태우라는 창광(槍光) 정책을 강력히 실시했다. 대만으로 쫓겨온 뒤 본토 수복을 노리면 이른바 3불 정책이라 불리는 공산 정권에 대해서 불타협·불접촉·불대화라는 외교 전략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1942년에 3충 운동이라 하여 학풍·단풍·문풍에서 독선주의·교도주의·주관주의를 몰아내자는 운동이 있었다.
1919년 한국민의 3·1 운동이 33명의 서명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운동이 일어난 동기는 3월 3일로 잡혀 있는 고종의 장례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