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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울증을 이렇게 이겨냈다
어릴 적의 나
1958년 5월 18일, 충북 진천을 고향으로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당시 근무지,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딸 넷, 아들 셋을 두셨던 한시를 좋아하시며 농사를 지으신 부지런하시고 정 많으신 할아버지(막내)에게 외아들로 자라셨다. 아들 셋 중 두 아들을 병으로, 사고로 잃으신 할머니께서 위로 누이 둘, 아래로 여동생 둘인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짐작이 된다. 가문의 기대 속에 진천 백곡저수지 기슭 ‘응낭골’에서 진천농고를 나오신 아버지는 큰 뜻을 품으셨으나 6·25 전쟁 후 혼란스러운 가운데 직업군인의 길을 걷게 되셨다.
어머니는 충북 진천 문백 번화한 문화 유씨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셨는데 외할아버지께서 6·25때 지주라는 이유로 납북되신 후 왕비를 배출한 민씨 집안에서 몸종을 데리고 시집오신 외할머니 밑에서 얌전하게 클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유교, 양반의식 속에 애비 없단 소리 들을세라 집 밖, 동네 밖은 나가지도 못하고 중매를 통해 가난한 집안에 잘생기고 재주 많은 외아들과 부잣집의 착하고 얌전한 큰딸이 만나 나를 낳으셨다. 두 분은 서로 다른 환경과 형편에서 자라셨으나 좋은 가정,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셨지만 그것이 어려웠다. 아들 낳기를 그렇게 바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께 우리 어머니는 외며느리로서 딸 다섯을 낳으셨고 그로 인해 큰 죄인인 것처럼 사셨다. 아버지는 정이 많으신 분이었으나 서울에 집을 구해놓고, 전방(홍천, 포천, 대구, 의정부, 철원 등등)으로 다니셨고 어머니는 딸 다섯 키우며 시부모님과 시누, 시골에서 올라오는 친척들 뒷바라지로 세월을 보내셨다.
어려서부터 사랑은 많이 받았지만 세상에 대해 밝은 생각을 갖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오시는 아버지가 무척 잘해주셨지만 무서웠고 아들 못 낳은 것이 엄마의 능력 밖인데 늘 죄인인 것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힘겹게 사시는 착한 엄마의 모습이 싫었다. 8살 때 나를 아끼시고 칭찬하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돌아가나 몹시 고민을 했었고 내가 자라는 것에 대해 걱정도 했다.
아버지도 뜻같지 않게 군인의 길을 걸으시며 권위에 젖었고 대를 이어야 자식 노릇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셨다. 딸 다섯을 데리고 시장에도 가시고 목욕탕도 가시고 일요일엔 앞마당에서 손수 머리를 깎아 주시고 빗어주시며 예쁜 옷과 신발도 사다 주시며 뜨개질로 옷을 짜 입히시는 분이었지만 엄마가 고생하시는 것이 참 싫었고 무능해 보였고 화도 났다. 어머니도 내게 아들보다 훨씬 나은 딸 노릇을 기대하셨고 실제로 어디를 가나 1등을 하던 초등시절이었다. 친구들과 놀 때도 뒤에 따라가지 말고 앞에 서라던 엄마의 요구가 겁 많고 마음 여린 내겐 부담이 되었지만 부모님의 자랑이 될 만큼은 했다. 초등학교 5학년 5월에 딸 다섯을 낳으시며 시부모, 시누, 집안 손님들 대접에 지치신 어머니는 큰 병을 얻으셨고 그 속상하심을 내게 푸시는 할머니의 푸념이 너무 싫었지만 그래도 들을 수밖에. 어머니는 그 후로 입원, 퇴원, 외갓집에 휴양, 다시 가족 뒷바라지 하시다 지치시면 또 입원, 휴양을 되풀이하시며 어두운 그늘을 끼치는 삶을 사셨고 고 1때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선 자식들 돌보시는 걱정 속에 근근히 지내시다 결국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시고 마흔 아홉에 생을 마치셨다. 아버지는 내가 고 1때 군인을 그만 두시고 퇴직금으로 사업도 하시고 투자도 하셨지만 고지식하고 성실하며 남을 잘 믿으시다가 계속 사기를 당하셨다. 아들에 대한 집념으로 결국 내가 결혼하고 큰딸을 낳은 뒤 새어머니에게서 쉰 셋에 아들을 얻으셨다.
결혼 후 남편은 아들 다섯인 집에 막내로 바로 위 형과 열 두 살 차이가 나며 큰 형님과는 삼십년 차이, 시어머니 마흔 일곱에 태어나 나이 많은 조카들 틈에서 자랐다. 나와 달리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으며 막내 기질이 그득하고 명랑한 모습에 이끌리어 결혼을 했다. 어두운 생각을 많이 하고 늘 심각하며 성실하고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아야만 속이 편한 나는 뭐든 잘하려고 애썼다. 막내 아들이 선생이 되어 선생 색시를 얻는 것이 너무 기쁘신 시어머님은 너는 유산은 못 받았어도 이 에미가 유산이라시며 우리와 같이 살며 손녀들 돌보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셨다. 친정에는 둘째도 독립하고 세 딸과 새어머니가 데리고 온 딸, 아들이 살았고 넷째 동생은 여고 졸업 즉시 몸 약한 언니를 도와줄 겸 아버지 힘도 덜어준다고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둘이 열심히 벌고 어머니가 애를 봐주시고 동생이 살림을 해주어 알뜰하게 살면 남부럽지 않겠다 생각되었다. 워낙 사람 좋아하는 남편은 바깥일에 시간과 정력을 다 쏟고 술을 즐겨하였다. 어머니와 친정 동생 있는데 싸울 수도 없고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연년생인 두 딸을 키우고 통근 거리가 먼 직장 생활만으로도 지쳤으며 첫 아이 낳고 간이 나쁘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늘 엄마가 기운 없이 살던 것이 생각나서인지 나 역시 늘 힘들고 피곤하고 지쳐있는 모습이 그렇게도 닮기 싫던 엄마의 삶을 닮아 있어서 싫었다. 남편의 자기중심적인 생활에서도 아버지의 태도를 보았고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는데 생활은 쉽게 나아지거나 편해지지 않아 허덕이며 살았다. 염세적이고 허무적이었으나 남에겐 씩씩하고 똑똑한 모습, 자신있는 모습으로 비치려 애쓰던 내가 예수님을 안 것은 교대 다닐 때였다. 어려서부터 교인들의 의존적이고 나약해 보이고 감정적이고 수다스러운 모습이 싫어 교회 근처로 다니지도 않던 나였는데 교대 1학년 때 대학생 성경 읽기회 라는 선교 단체를 통해 그렇게 거부했던 예수님을 2~3년 걸쳐 집중적인 성경 공부를 통해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불공평하고 죄악이 그득한 세상을 심판하고 억울한 이들의 삶을 보상해줄 천국이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평생 하나님의 딸로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기로 결단하였다. 또한 착하게 바르게 살고자 하면서도 내 안에 숨어있는 악한 생각, 게으름, 교만함을 인정하며 죄인임을 고백하였다.
결혼 후 그 교회를 떠나고 큰딸을 낳고 남편과 같이 개척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남편은 믿음은 없었어도 주일은 지키려고 했고 목사님의 삶은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의 바깥 생활에 대한 미안함이 나의 신앙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어머님도 큰아들을 따라야 한다고 세례는 안 받으셔도 교회 다니는 일을 막지는 않으셨다.
목사님 내외 분도 우리 가족을 특히 사랑하셨고 아이들도 많이 돌봐주시고 키워주셨다. 내가 서른 세 살 때 셋째를 갖게 되었는데 본인들은 딸 하나 더 낳는다는 생각으로 뭘 잘했다고 하나님께 아들 달라는 기도를 하나 딸이라도 감사하게 받아야지, 혹은 남편이 가정적으로 변할까 기대하며 지냈는데 목사님께선 아들주시라고 엄청 기도하셨고 친정에서나 시댁에서도 아들 기원을 더 하였다. 아이 낳던 날도 밤 12시에 남편 제치고 사모님이 병원에 따라 오셨고 목사님은 양복 갈아입으시고 강대상에서 무릎꿇어 기도하셨고 예쁘다는 간호사 말에 딸이려니 생각한 나보다 목사님이 먼저 아셨고 더 기뻐하셨다.
쓰러지던 날
두 딸을 키워주던 동생이 결혼하게 되었고 어머님은 연로하셔서 (82세) 아들을 낳았지만 키울 대책이 없었다. 아들을 얻고 세상을 얻은 듯 기쁘다는 남편은 그 기쁨을 가족과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기분 좋다며 더 바깥으로만 나가서 혼자 아이를 안고 키울 대책에 눈물과 한숨을 지었다. 동생은 혼자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게 다녔고 큰집에선 이제 어머니를 큰집으로 보내라고 했고 경제적으로 넉넉치도 못하고 주변머리가 없어서 남에게 키울 생각을 못하던 나는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며 몸이 회복되질 않아 힘들던 터에 다시 한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먼 학교로 발령받는 어려움이 겹쳤다. 백일이 지나고 겨울 방학을 보내고 발령을 앞두고 병원에 갔는데 위, 간, 신장 등 기능이 모두 저하되어 있어 계속 아이 돌보는 일과 직장생활을 하면 큰 일 난다는 선고를 받고 아이도 남에게 맡기고 입원해서 쉬어야 한다고 하여 발령만 받은 뒤 병가를 내게 되었다. 난생 처음 병원에 입원해 병원 밥을 먹으며 쉬게 되었는데 워낙 소화기능이 약하고 누적된 피로가 심했는지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한 달 병가를 두 달로 연기하고 쉬는 동안 결혼한 동생 신랑 생일이 다가왔다. 두 아이를 키워주고 살림해주느라 애쓴 동생 신랑 첫 생일을 차려주기 위해 잔뜩 장을 봐다 놓고 있는데 엄마 좀 쉬라고 외가에서 데리고 간 아들놈이 열이 높아서 병원에서 주사맞고 약을 먹여도 영 내려가질 않는다고 엄마가 돌봐야겠다는 연락이 왔다. 장 봐 온 것을 풀지도 못하고 아이를 데려다 밤새 보채는 녀석을 업고 밤을 꼬박 샜다. 아침도 굶고 병원에 데리고 갔다와서 저녁 무렵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가빠오면서 아주 불길한 느낌, 위기감이 들었다.
교회로 사모님을 찾아갔다가 못 뵙고 목사님 앞에서 쓰러져서 사택에서 저녁을 먹고 쉬는데 자꾸만 정신이 빠져나가는 듯하고 기운을 차리려 해도 나의 몸이 내 의지 밖으로 분리되는 느낌에 휩싸였다.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고 답답하며 누가 좀 도와줬으면 싶은데 내일 동생 남편 생일은 어쩌나, 아이는 어쩌나, 나는 이러다 어떻게 되나 깊은 잠을 푹 자고 맛있는 것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싶은데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은 수습하려고 할수록 불안감만 커졌다. 교회당에서 기도하자는 사모님을 따라 올라가긴 했으나 기도할 수도 없었고 강대상 앞에서도 덜덜 떨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밤을 새고 다음 날 동생 남편 생일 미역국을 먹고 내과에 가서 링거 주사도 맞았는데 기운은 차려지지 않았고 몸도 자꾸 까라들면서 정신을 놓칠 것만 같았다. 자꾸 의식을 놓치는 나를 놓고 기도도 많이 하고, 온 집안 식구들이 염려하는 모습이 느껴지고 목사인 조카가 가슴을 누르며 방언 기도하는 것, 화장실에서 자기 때문이라며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우는 남편도 느껴지고 빨래를 담궈둔 물이라도 끼얹어주고 뺨이라도 철썩 때리면 정신이 날 듯도 한데 다들 걱정하며 울기만 하는 모습이 답답하고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동생들, 시어머니, 동생, 남편이 정신 차리라는 소리가 들리는데 반응할 수가 없었고 내 의지와 다른 헛말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다. 고모들도 보고 교회 집사님 차로 병원에 가는데 주위 풍경이 내게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사람들이 떼지어 달려드는 듯하고 의사들의 질문에 똑바로 대답할 수도 없고 내가 내 혀와 생각을 감당할 수도 없는 무서운 시간들이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면 무엇이 먹고 싶기도 했는데 그런 말을 못하고 다시 정신을 놓칠까 두렵기만 했다. 이 사태가 빨리 수습되고 정신을 차리고 싶은데 속수무책이었다. 성모병원 응급실에 있다가 긴 잠을 자며 많은 꿈을 꾸고 아주 깊고 무거운 칠흙 같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 별을 보며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낸 후 아들 녀석 요한이를 부르며 깨어났다. 남자 간호사가 정신이 드냐며 침대로 옮겨주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고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이상한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시키는 대로 하며 면회 오는 식구들도 보았지만 아득한 거리가 느껴졌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나는 아주 무능한 채로 무기력한 식물처럼 지내다가 퇴원했는데 뭔지 모를 불안과 답답함으로 잠도 잘 수 없었고 음식은 모래알 같았으며 글씨도 안보이고 멍청하고 불안한 저능아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내 의식은 다 사라지고 목숨만 붙어있는 것 같았고 시간이 지나도 점점 나아지는 기미가 없고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큰 병원으로 간다고 백병원에 입원했다. 6개월 휴직 신청을 하고 3개월이나 입원해 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힘과 자신, 안정감을 잃어버린 물체처럼 여겨지는데 의사 선생님과 남편이 할 수 있다며 다시 복직해서 적응하자고 하셨다. 여름방학에는 설악산 여행도 가고 무엇이든 맛있는 것을 먹으라고 했지만 맛있는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고 마음 속엔 이러다 어떻게 되는 건지 불안감만 그득 차 있어서 모든 생활은 기계적으로 진행될 뿐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 좋아질 거란 희망도 없이 묵묵히 참으며 무겁고 지루한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렸다. 나는 할 수 없고 안될 것 같은 데 자꾸 된다고 하여, 그래야만 좋아진다고 하여 11월엔 복직도 하고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먼 거리 통근을 하며 학교에 나가 퇴근을 기다리다 집에 오면 오늘 하루도 지나갔구나, 저녁 먹고 자면 또 일어나서 가야할 텐데 어떻게 하나 두려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고생하였고 동생도 어쩔 수 없이 결혼 후에도 우리 살림을 돌볼 수밖에 없는 상태로 지냈다. 시키는 대로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라 좋아졌다는 남편과 선생님들, 친척들 말에 반신반의하며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1주에 한 번, 2주에 한 번, 4주에 한 번 내 병의 정체를 알기 위해 병원에 다녔다. 아들 녀석은 조카며느리가 맡아 키우며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고 한 2년 고생하다 3년째 다시 담임을 맡아 아이들을 가르칠 만큼 회복되었다. 간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간염보균자-간염-간경화-간암-죽음) 담당의사도 간염으로 병원을 그만 두어 다른 의사에게 인계되었으며 한약도 먹고 계속 관리하여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그 안에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며 아들 녀석을 데리고 와 순수한 우리 식구 다섯이 살며 살림도 맡아 하게 되었다. 어느덧 제법 부끄럽고 뭔지 모르는 의문 속에 4년이 지나 제법 안정된 모습으로 집 앞의 학교로 발령 받아 내 평생 처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편안하게 식구끼리 살았다.
다시 내 발로 입원
재혼해서 아들을 얻으신 아버지가 여러 가지 문제로 안정된 생활을 못하시는 것이 늘 마음을 무겁게 했고 시아주버니께서 세 번이나 보증을 서게 하곤 우리가 갚게 해놔서 몹시 힘들었다. 직장에선 40대가 되며 중간 관리자 역할을 하느라 힘들고 남편은 성격대로 혹은 내가 아픈 동안 고생했다고, 형님 때문에 속상하다고 가정의 일보다는 직장 일이 우선이고 가족보다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집안 일을 의논할 시간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 고통의 기억이 너무 무섭고 다시는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아 의사가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다닌다는 결심으로 4주에 한번씩 상담을 하고 간장약, 위장약과 매일 세 알 정도의 약을 먹으며 8년을 다녔다.
내가 잘하면 모든 것이 점점 좋아지고 나아지리란 기대로 많이 참고 애쓰며 지냈지만 주위 상황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고 늘 책임을 다하느라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마음과 시간과 정성을 쏟던 중 작년 봄에 학교를 새로 옮기며 친정에서 새어머니의 실수로 70세 가까운 나이에 30년 넘게 살던 집을 버리고 쫓기듯 이민을 가시게 되었는데 딸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 괴로웠다. 시아주버니 돈을 갚느라 빚이 많았고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에 이러한 일로 부부 사이에 말은 안해도 원망과 불만이 쌓여갔다. 더구나 옮긴 학교에선 처음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중견교사로서 못한다고 할 수도 없고 무리한 사무와 학급 일은 해도 해도 줄지도 않고 끝날 기미도 없이 한 가지 일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일이 나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감당하기가 벅찼고 집에 와도 힘이 들고 사방을 둘러봐도 꽉 막힌 듯 한숨만 나오는 상황에 세상 모두 내게 등을 돌린 듯 외롭기 한이 없고 가슴에 무엇이 매달려 갑갑하여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고비고비 어려울 때마다 성경 말씀을 통해 기도하며 찬양하며 나름대로 잘 감당하려고 조언을 구하며 극히 조심했지만 그렇게도 다시 부닥치기 싫은 답답하고 불안한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먹고 자는 일은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이뤄지는 일인데 그것이 안되는 기막힌 상황, 음식이 넘어가지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저녁이 되면 불면의 공포 속에 온갖 노력을 하고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기도를 하며 기도를 받고 찬양을 하고 복음송을 들어도 사르르 다가오는 듯하던 잠이 어느새 눈 앞에서 싹 등을 돌리고 사라져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순간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씀이 나를 찌르고 나는 왜 이렇게 되었나 나름대로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용서하며 이해하며 오래 참으며 양보하며 낮아지며 성실하게 사는데 또 혼란의 늪 속에 빠지게 되는지 누구를 원망하고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나의 능력 너머 일어나는 일들에 무릎 꿇고 손들고 말았다. 교회를 위해, 친정의 평안, 시댁의 평안, 가정의 화목, 욕먹지 않는 교사로 직분을 다하려고 노력했건만 부족한 것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나, 이 일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또 그 고통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며 수치와 고생을 감내해야 하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라는데 어떻게 내려놓는 것인지,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는데 내겐 왜 이리 무거운지 오래 참고 많이 겸손하며 순종했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참아야하나,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데 과연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이 모든 시험의 이유가 무엇일지….
신경증, 기분 장애, 우울증, 조울증, 정동 장애, 신경 쇠약, 불면증, 병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치료되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부족해서 남편에, 집에, 아들·딸에, 좋은 직장에, 복에 겨워 사치스럽게 우울증 타령이냐, 먹고살 것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운동을 해야 한다, 왜 믿음이 없냐, 될 대로 돼라,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배짱도 없냐, 기도원에 가봐라, 금식 기도를 해라, 새벽 기도를 해라, 잠이 안 오면 밤새 기도하면 되지 않냐, 정신 차려라, 의지할 곳도 없는데 이렇게 나약해서 어찌 사냐, 죽을 각오로 버텨라 등등 말의 홍수 속에 아무 위로도 받지 못했다. 6학년을 맡아 잘 감당하려고 했지만 결국 내 발로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8년 다닌 백병원을 옮겨 친지의 소개로 인천 의료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듯하며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며 그간의 병력을 이야기하니 금방 좋아질 거라고 장담하셨는데 퇴원 날짜를 잡으면 다시 나빠지는 악순환 끝에 한 달 병가가 1년 휴직으로 이어지고야 퇴원을 했다. 병원에 있는 사이 친정은 멀리 떠났고 나 때문에 친정 동생들은 걱정이 태산이고 집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세 아이가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리도 듣기 싫은 정도였으니. 더구나 의료원은 백병원과 달리 시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행려 병자나 무연고자, 영세민, 생활보호자 등이 많아 처음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의 끝, 마지막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절망감에 몸이 떨렸고 도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거부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눈뜨기도 싫고 모든 것을 외면하고 고개 들기도 싫고 링거주사 맞느라 소변보는 일도 끔찍히 싫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며 거의 매일 남편이 다녀가고 동생들이 가끔 오고 그 외엔 병실 문 앞에서 돌려보내며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성실하신 아버지가 고생하시기 때문에, 진실하신 개척 교회 목사님이 고생하시기 때문에 내게 좋은 일이 있어도 즐길 수 없었고 늘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 남편인 목사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빌립보서 말씀을 증거하고 갔다. 처음 예수님을 믿기로 했을 때도 그 말씀을 외우며 겸손하게 살기로 다짐했는데 아직도 교만한 탓에 이렇게 꺾이는 것인가, 진리의 무게에 짓눌려 말씀을 아는 것이 짐이 되었다. 오직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하박국 말씀, 일체를 배설물로 여기고 푯대를 향한다는 바울의 믿음, 이삭을 바치려한 아브라함의 믿음도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인데 하나님께선 내게 그런 것까지 기대하시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신앙 양심을 지키며 가난한 자의 편 약한 자의 편이 되어 가는 곳마다 잘 적응하며 지내려 노력하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며 섬기며 산다고 하여도 이 모든 것이 가식이고 겉치레였는지 도대체 믿음의 분량을 어느 정도 채워야 하는 것인지 두렵기만 하였다. 모든 것을 내 안에서 해결점을 찾고 나의 노력과 양보로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산다고 하였지만 내 안의 욕심이 아직도 너무 큰 것인지 혼란스러운 시간들이었고 수치와 치욕으로 몸과 마음이 묶이고 비비틀리는 것 같고 어떤 힘이 뒤에서 내 머리를 잡아끌고 발길을 옮기지 못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주어진 교사의 역할도 포기해야 할 듯하고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한 사람 몫을 감당치 못할 듯하여 주저앉고만 싶고 그래도 마음은 불안하고, 차라리 눈을 떴다 감았을 때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질까요? 괜찮아질까요? 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요? 의심스런 마음이 가득했다. 이곳에 온 저 인생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엔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관심을 갖고 이야기도 하며 세상은 참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했다. 약물복용하다 잡혀온 홀어미의 착한 아들, 부인 잃고 알콜중독이 되어 식구들 손에 강제입원한 아저씨, 실연당해 난폭해진 아가씨, 기도하는 부모 손에서 놓여나면 무지한 욕과 난폭한 행동을 하는 열일곱 아가씨는 아이가 있다고도 하고, 할머니와 아버지와 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성가대활동을 열심히 했다며 나 예쁘냐, 착하냐며 울고 웃는 여고생, 고아원에서 왔다는 소년, 차마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인생들이었다. 남편의 여자관계로 자살을 기도하고 아이도 시댁에 뺏기고 이혼당한 중학교 선생님, 천국에는 상처받고 힘없는 연약한 이들이 먼저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지 말자는 비장한 약속을 하며 하나씩 퇴원하고 새로 오고 시끄러운 싸움이나 울음, 괴성, 노랫소리로 시간이 흐르고 차츰 안정을 찾아 그곳에 있는 책도 열심히 읽고 운동도 하고 퇴원 후 계획도 세우고 병원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퇴원하였다. 컴퓨터도 배우고 운전면허를 따고 그림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과 1년 동안 잘 쉬고 더욱 나아진 모습으로 복직하겠다는 결심은 잘 실천되지 않고 자꾸 낙심, 체념, 무기력함이 엄습해오곤 했다. 자식 노릇 못하고 바라만 보는 딸, 바깥 일에 열심을 쏟고 집에 오면 재미없다며 늦게 귀가하는 남편의 아내, 짜증내고 잔소리하는 것이 싫다는 아이들의 엄마,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였다. 남들이 아무리 잘한다 한들 부모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일어서기 위해
내적 치유를 받아보라는 권유에 여름방학에 한국가정사역연구소의 풍성한 가정 만들기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설악산에서 편안하고 환한 모임을 통해 평온을 맛보고 2학기엔 충만한 가정만들기 부부 성경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주님은 전능하신 분, 경외의 대상, 심판주의 모습이 강했는데 그 공부를 통하여 사랑이신 주님, 내 잘못을 벌하시기에 앞서 내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어렵사리 알게 되었다. 나는 행복을 누리고 살 자격이 없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로 살지 못하여 벌을 받고 고생한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아는데 시간과 수업료를 크게 지불하였다. 왜곡된 믿음으로 죄책감 속에 소극적으로 늘 자신을 학대하며 지치고 힘든 모습으로 주님 마음에 들기를, 내 진심을 아시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모습이었다.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데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내게 주신 재능을 살려서 건강하고 풍성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버지께 효도요, 내 자녀에게 좋은 인생의 선배로서 모델이며 어머니 역할인 것을 이제 깨닫다니…. 남들이 엄마를 다 훌륭하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항변하는 사춘기 딸, 남한테는 잘하고 자기들에게 소홀했다며 엄마처럼 살지 않는다니…. 그저 양보하며 무능하게 다른 사람 위주로 사는 에미 모습이 아이에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심성을 키웠나보다.
복직을 하여 새 여름을 맞고 전문 상담 자격 연수를 받았다. 나를 알기 위해, 내 인생의 상담자로서 내가 바르게 서기 위해, 나의 의문을 내가 풀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다. 상처받은 자로서 상처 회복을 통해 더 건강한 자세를 갖게 되었다. 어차피 나는 사람일 뿐 하나님의 자녀이지 하나님처럼 될 수는 없는데 하나님처럼 살기 원했던,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풀 수 없는 문제를 풀고자 했던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 나를 괴롭히고 망하게 하였으며 우울의 원인이었을까. 내게 주어진 작은 일에 감사하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밝은 것으로 확신하며 심판자 주님이시기 전에 사랑이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임을 알게 되자 나를 얽매던 사슬이 풀어지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이제 어떤 일을 만나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사건에 짓눌리거나 감당할 수 없는 일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버리고 살아야지. 나를 모르고 나를 잊고 죽이며 사는 것이 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고 나를 키우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남도 살리는 길임을 알게 되었다. 자꾸 좋아지기를 바라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보다는 순간순간 내게 주어진 것들을 감사하고 만족스럽게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 좀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내일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오늘 나의 모습을 부인하며 만족을 연기하는 삶은 힘들고 지치고 쓰러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나간 일은 잊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만족과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것이 행복한 미래의 밑거름이 되리라. 안정과 자신에 대한 신뢰, 내게 주어진 인생에 대한 환희스런 감사, 이미 이뤄진 일들에 대한 확신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여유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 결국 자기를 못 믿고 자신이 성숙해지지 못하면 남도 믿지 못하게 되고 남을 돕는다는 게 폐를 끼치게 되는 것 같다. 많은 일을 완벽하게 하려다 지치고 다른 사람 삶에 시중들다가 상처받는 소극적이고 의존적인 태도를 버리고 당당히 한 인생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관리하며 자신이 행복하고 건강해야 이웃도 돌볼 수 있다는 진리를 나이 마흔 하고도 셋에 깨닫는다. 주인 의식을 갖고 내게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며 사랑이신 주님을 경외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보다 약한 이를 섬기는 데 남은 시간을 투자하겠다. 아주 건강하고 행복하며 풍성한 나눔의 시간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행위를 따르자니 완벽해야했고 종의 멍에를 지자니 피곤했고 죄인의 마음으로 조심조심 피해가며 살았으나 부딪히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내 자신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고 존귀히 여김 받기를 거절하고 불편해하는 삶이었다. 나는 신처럼 살 수도 없고 종처럼 살지도 않을 것이며 죄인의 굴레도 벗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생명이 있는 한 내 삶을 잘 관리하여 나를 만드신 이를 기쁘시게 하겠다.
(이호방/인천산곡초등학교 교사(휴직중)이며 현대중앙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